"헤어지자"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왔던 그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 헤어지자는 말에 이렇게까지 쿨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 답변까지 1초. 눈물 한 방울, 서운함 1그램조차 없는 지나치게 드라이한 이별의 순간. 만난 기간 4년, 가져다 바친 데이트 비용 수천, 싸우고 빌고 화해하고 마음 졸인 마음고생 4년, 함께 한...
View Article영춘화
오늘도 날이 찹다 못해 성이 날 지경으로 얼어 붙었다. 미투리에 둘두리 천대기를 말아 그 안에 솜을 덧댄다 허여도 당최가 찬 것은 세상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얼어붙은 것은 요 벌겋다 못해 시퍼런 발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이 틀림없다. "에효효" 입김 화하게 퍼지는 이 질다란 한숨 속으로 내 식허먼 속이 다 빠져나간다. 아랫마을 학동에 창녕이가 성례를...
View Article"세호야, 나 그냥 다 솔직히 이야기 할께"
수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눈이 예쁘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오늘따라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몇 번을 주저주저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술 마셨어. 근데 술은 먹었지만 정신 말짱해. 그냥 살짝 알딸딸한 기분 막 들까말까 하는 그런 느낌이야. 그러니까 말할게. 나 말이야, 이제 좀 힘들어…솔직히 너무 많이 힘들어, 힘들다구!"...
View Article"또 도박이야? 진짜 미쳤어?"
이제는 숫제 비명에 가까운 선아의 악. 나 역시 "별거 아니라고! 그냥 잠깐 재미로 한거야, 10만원도 안 했어" 하고 말해보지만 입 다물고 있는 것만 못하다. 결국 집안 살림이 이것저것 아주 골고루 박살이 나고 아랫집에서 신고한 경찰이 출동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된다. "죄송함다"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간신히, 경찰 출동에 구경나와 나를 벌레보듯...
View Article거악토론
"정말 이대로 우리 괜찮은 겁니까?" 지옥 만마전 긴급 정무회의. 일만에 이르는 거악의 정점들이 준엄히 자리잡은 가운데,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인간계에 대한 악행총량 역전상황'에 대해 열띈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지상에 크게 헬게이트가 열렸다고 해서 '어디 간만에 한번 인간들 맛 좀 보고 올까?' 하며 기분좋게 현장에 나가보면, 세상에, 여기...
View Article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
가끔 고가의 현대미술 작품에 관한 기사가 이슈가 되면 의례 비판적인, 아니 그것을 넘어 거의 비아냥 수준의 댓글들이 뒤따른다. 척 보아도 아름답다, 멋지다, 어떻게 그렸을까, 어떻게 깎았을까 같은 감탄이 흘러나오는 고전 미술과 달리 이게 뭘 말하고 싶은지조차 이해가 쉽지 않은 불친절한 현대미술이 문외한들에게 쉽게 이해 받기란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View Article소원
나는 어렸을 적 꽤 똘똘한 아이였다. 제법, 상당히. '그때 그 시절'에 교장 선생님을 통해 영재교육을 권장 받을 정도였고, 교육열이 꽤 치열한 동네에서 성장했음에도, 학원 한번 다닌 적 없이 언제나 전교권에서 놀던 우수한 수재였다. "그냥 수업만 들으면 되는데" 재수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로 '왜...
View Article자국
"에이 씨팔!" 큰아버지는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고 나갔다. 발로 걷어차인 현관문 가운데는 움푹 패였고, 폭풍이 지나고 난 듯 엉망이 된 집구석에서 어린 여동생은 눈물을 훔치며 찢기고 내팽겨쳐진 캐릭터 달력을 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조용해진 거실에서 큰아버지의 고함과 폭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목의 할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View Article술 김에
8시 40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피곤에 절어 눈 앞이 어둡다. 눈을 주무르며 서둘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큰 길로 나선다. 싸늘한 날씨와 함께 그리 춥지도 않다는 것을 동시에 느끼며 봄이 왔다고 생각한다. 술 김에 오늘 저녁은 여느날과 같이 햄버거다. 햄버거를 포장해 나오자 어느새 비가 거의 그쳤다. 아직도...
View Article공유오피스
말로만 듣던 힙한 공유오피스에 사무실을 얻었다. 물론 독립 사무실도 아니고 그냥 임자 따로 없이 테이블만 빌리는 것인데 월 35만원의 비용은 조금 애매한, 아니 분명 비싼 감이 있기는 했지만 칙칙한 동네 사무실을 떠올려면 이 곳은 너무나 멋지고 힙한 곳이었다. '게다가' 커피도, 맥주도 공짜라는 점에서 충분히 돈 값 한다고 느꼈다. '하루에 커피 두 잔,...
View Article우리 아들
아들이 누운 병원 간이침대의 머리 맡에서 나는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는다. 이 늙은 애미의 힘만으로는 저 성난 것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약에 취해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이 애미도 곧 따라갈거니까, 울지 말고 기달리고 있어' 눈을 질끈 감으며 있는 힘껏 수건에 체중을 실어 잡아당긴다. 곧장 눈을 뜬 아들은 컥컥 거리며...
View Article가면
"애기야 밥 먹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강아지 밥을 준다. 아, 방금 전에 말한 '애기'는 강아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 이름은 둘둘이다. "둘둘이도 밥 먹어" 하얀 푸들. 사실 나는 강아지 중에서 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둘둘이만큼은 예외다. 이 놈은 정말 똑똑하니까. 꼬리를 좋아라 흔들며 밥을 먹는다. "왔어?" 아라는...
View Article가면 : 2화
"그거 에픽 템 먹을 생각 아니라면 굳이 거기에 시간 버릴 필요 없어요" "그쵸? 그냥 제껴도 되죠? 오케이, 오늘 걍 그럼 바로 렙업만 쭉쭉 달린다" 그때 그 시절, 정모의 성지 '민토'에서 우리는 곧잘 정모를 가졌었다. "페가님 요새 새벽에도 계속 접속해 계시던데" "저 휴학했걸랑요. 아 근데 모드님 좀 늦으시네, 3시까지 모이기로 해놓고선 지금 거의...
View Article가면 : 3화
아라를 만나기 두 달 전 즈음, 나는 사실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우리 그만하자" "뭘?" "그만 만나자" 모처럼 집 근처에 생긴 파스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함께 산책한 직후에 내가 한참을 주억거리다 어렵게 꺼낸 난데없는 이별 통보. 가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글쎄. 뭐라고 이유를 말하면 좋을까. 가영이...
View Article맹목에 대한 이야기
1. 두발자유화 중학교 시절, 남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머리길이 규정에 대해 꽤나 엄격했다. 종종 아침 등교시간에 난데없이 진행되는 두발단속. 교문 앞에 서있던 학생주임과 담당 교사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죽 살펴보다가 '학교에서 규정한 길이 이상의 앞머리, 옆머리를 한 학생을 발견하면' 그를 불러 그 자리에서 바리깡으로 앞머리부터 정수리를 지나...
View Article혐식주의자
"여러분이 드시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절반은 코웃음을 쳤고, 절반은 화를 냈으며, 그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극소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채식주의자 식당에 들어가 식물을 먹지 말자면서 소리를 지르고 촬영을 막는 자들에게 "신체접촉 하지 마세요, 카메라 건드리지 마세요" 하며 경고하는 모습은 온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View Article[공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새 표지' 판매 시작
안녕하세요, 스타일박스입니다. 지난 2011년, 그동안 써왔던 글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내용 일부를 담아 출판했던 '생각보다 짧은 시간'은 제 개인적인 큰 기대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많은 재고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게 조금 속상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해서 이후에도 구매를 문의해주시는 분들께 알음알음 한두권씩 판매는...
View Article[장편] 수지 3화
"네, 5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또 오세요" 불금을 맞이한 강남의 저녁은 인산인해 그 자체다. 11번 출구 올라가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리도록 사람이 미어 터지니까. 편의점 손님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유나씨가 함께 일하는데도 계산을 하기 위해 계속 줄을 설 정도다. 그 와중에도 튀김을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야 한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View Article데스토피아
"더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네"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은실장님과의 3차 면담. 나는 간절히 부탁했지만 그녀의 입장 역시도 사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그녀는 회사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실장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신경 많이 써주셔서" 그래, 그녀는 나에 대해 배려를 많이 해줬다. 회사와 싸워가며 한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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