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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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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호야, 나 그냥 다 솔직히 이야기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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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눈이 예쁘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오늘따라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몇 번을 주저주저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술 마셨어. 근데 술은 먹었지만 정신 말짱해. 그냥 살짝 알딸딸한 기분 막 들까말까 하는 그런 느낌이야. 그러니까 말할게. 나 말이야, 이제 좀 힘들어…솔직히 너무 많이 힘들어, 힘들다구!"

마지막 말을 하면서 겨우겨우 울음을 억누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속사포 같이 수영의 다음 말들이 터져나왔다.

"그래, 알아. 나는 니한테 많이 부족한 사람이야. 너처럼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애가, 나같이 안 이쁘고 뚱뚱한 여자애랑 사귀어 주는거, 그거 되게 힘든거 알아. 막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그런거… 그런거…나 진짜 잘… 알어. 아냐, 괜찮아"

그녀의 터져버린 울음을 달래주려고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들자 수영은 손을 내저으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근데 세호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니가 바라는 이상형의 사람은 될 수 없어. 변명이든 포기든 게으른 여자든,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냥 그게 사실이야. 어, 나 살 못 빼. 니한테는 운동 간다고 하고서 안 가고 집에서 그냥 잔 날도 많고, 꾹 참았다가도 결국 못 참고 새벽에 라면 끓여먹고 그런 날도 많어"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물론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수영은 어느새 울음을 그쳤고, 콧물을 훌쩍였다.

"막 영화 같은데 보면 그런 말 나오잖아. 있는 그대로 사랑해달라고. 옛날에는 그게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됐어. 너랑 사귀면서 나는 그 말이… 되게 많이 이해가 됐어. 너무 가슴 아프게 이해됐어. 그리고 너무 속상하더라. 너무… 너무 속상했어"

다시 울음이 터진 그녀.

"그냥… 아주 가끔씩이라도… 니가 나 예쁘다고 말해주면, 나 되게 기분 좋아서 막 며칠동안 그 말만 생각하고 그랬어. 나 진짜 그랬어…니가 막 모진 말 해서 진짜진짜 힘들 때도, 그 예쁘다고 말해준 기억 생각하면서 겨우 달래고 그랬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수영.

"니가 들으면 웃겠지만, 나도 가끔 거울보면서 내가 이쁘다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 너한테 셀카 보내고 그랬거든. 근데 너 그때마다 살 빼라고 놀렸잖아. 흐. 나 그 말 들으면 그 사진들 다 바로 지웠어. 근데 나도 여자야. 이쁘다는 소리 듣고 싶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자친구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 놀려도, 너는 내 편이었으면 좋겠구… 니는 나… 안 놀렸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욕 백마디보다, 니가 놀리는 한 마디가 더 아파"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니 눈에 안 차는거지. 너가 그랬지. 살만 빼면 이쁠거라고, 왜 안 빼냐고. 내가 그 말 너한테 돌려줄까? 너 조금 더 좋은 회사 가서 월급 더 많이 받으면 더 좋을텐데 왜 니 스스로도 비전 없다는 회사 오래 다녀? 너 영어만 잘하면 훨씬 더 좋은 회사 갈 수도 있는데 왜 영어 공부 안 해? 그냥 그런거야. 노력하면 되는데… 노력이 힘든거라고. 나 이 말 너한테 처음하지? 근데 이 말… 지난 3년간 니가 나 놀릴 때마다 맨날 가슴 속에서 혼자 떠들었어. 맨날. 나한테 정 떨어지지? 그래, 알아"
"아니야, 정이 왜 떨어져"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변명했지만,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세호 너도 내가 더 예쁘면 좋겠지. 인정해. 근데 더이상 니가 하는 말 때문에 스트레스랑 상처 안 받을래. 너랑 헤어지면… 분명히 다시는 너처럼 멋있고 좋은 남자친구 못 사귈거야.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어. 근데… 아는데… 나 너무 힘들어… 이제 그냥 다 포기할래. 평생 혼자 살아도 돼. 다시 누구한테 사랑 못 받아도 돼"

그 말을 마친 수영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알아. 맘에 안드는 나를 꾹 참고 사귀어준거.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세호야 정말 고마워"
"수영아"
"나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말할게"

수영은 오래 서있는게 힘들었던지 계단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진짜 니한테 최선 다했다? 머 결과적으로 내가 어떻게 뭘 더 했더라면 더 잘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매 순간 나는 너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어. 너 먹고 싶은거, 갖고 싶은거 들으면 기억해뒀다가 내가 다 챙겨줬잖아. 너 기분, 감정 많이 살피고… 니가 가끔 나한테 모진 말해도 그냥 혼자 씁쓸하게 웃어 넘기거나 뒤에서 혼자 욕은 할 지언정 그냥 받아들였어. 정말로. 그냥 니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싸우면 니가 떠나기라도 할까봐 혼자 맨날 참았어"

예전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수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세호야, 사실은 그냥 오늘 좋은 말만 하고 갈랬는데 결국에 디게 못난 말만 많이 했다. 미안해. 그냥 잊어버려…. 넌 정말 좋은 애구, 정말 고마워. 진짜 잘생겼네 우리 세호. 알지? 내가 니… 진짜 진짜 많이 좋아한거. 진짜 많이 좋아했는데… 너무 좋아해서… 평생 너 옆에서 있고 싶었는데… 안되겠어. 미안해.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다. 사실 더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냥 엊그제 싸우면서 니가 그 말 했잖아. 니만 아니었어도, 그 말. 그래. 내가 아니면, 나같은 여자 아니었으면 너는 더 예쁘고 니가 좋아하는 여자 만날 수도 있었는데…"
"수영아, 그런 소리가 어딨어. 그리고 그건 내가 화나서…"
"더 니 마음에 드는 그런 여자 만나서 연애 할 수도 있었는데, 나같은 못난 년 만나서… 하아… 짜증나고 후회하는거… 이제 그만해도 돼. 좋은 여자 만나. 너는 정말 할 수 있잖아"
"수영아"
"너한테 혼나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예쁘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어. 근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수영이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큰 눈의 예쁜 얼굴.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향해 웃어주던 이 예쁜 미소를, 맨날 나를 위해 지어주던 이 예쁜 미소를… 나는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는걸.

"세호야, 나 집에 갈게"
"수영아 잠깐만, 잠깐만 기회를 줘"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수영이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슬그머니 뺐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서,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고통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좋은 사람 만나. 나보다 더 착하고, 예쁘고, 더 잘해주는, 너한테 더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한테 안 부끄러운 그런 여자친구 만나. 비꼬는거 아냐, 정말루. 잘 지내. 고마웠어. 평생 못 잊을거야. 너같은 사람. 넌 내 최고 자랑거리였어…"

그 말과 함께 수영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수영을 못 잡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뒤늦게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모멸감이 드는 폭언을 던져댄 기억, 솔직히 부끄럽다는 말까지 했던 기억, 몇 시간이나 걸려 만들어 온 케이크를 "단걸 왜 먹어!" 소리치며 던져버린 기억… 좋은 기억들도 많았는데 후회스러운 기억들, 상처 준 기억들만 떠올랐다. 차마 다른 누구한테 말하기도 부끄러운 추한, 더 한 기억들도 많았다.

왜 그리도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그렇게 내가 좋다고 좋다고 하는 사람한테 나는 왜 그리도 못되게 굴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좋게좋게, 좋은 말로 대해줬더라면 수영이가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 입었어도 됐을텐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하아아…"

결국 나라는 쓰레기의 본성이, 나 좋다고 다 응석 받아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드러났을 뿐인거다.

"한번만 더…"

그래도 수영이를 붙잡고 싶었다. 안다. 나한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너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헤어지면, 설령 너보다 더 예쁜 여자를 나중에 만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너보다 더 나한테 잘해줄 여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 앞에, 울며 걸어가는 수영이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보였다. 울지마 수영아. 내 안에서… 니가 나같은 놈을 버리고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연애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나와, 너처럼 착하고 좋은 여자를 놓치기 싫다는 이기적인 내가 충돌했다. 그러면서 더욱 내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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