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날이 찹다 못해 성이 날 지경으로 얼어 붙었다. 미투리에 둘두리 천대기를 말아 그 안에 솜을 덧댄다 허여도 당최가 찬 것은 세상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얼어붙은 것은 요 벌겋다 못해 시퍼런 발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이 틀림없다.
"에효효"
입김 화하게 퍼지는 이 질다란 한숨 속으로 내 식허먼 속이 다 빠져나간다. 아랫마을 학동에 창녕이가 성례를 치룬다고 들었다. 처가에서 조막만하기는 혀도 곡식 잘 여무는 진또배기 뙤기 밭꺼정 뗘준단다. 데릴사위 6년 지랄도 이만하면 성공이다. 섁시 점순이는 키는 딸따름해도 야무지고 왈개한 것이 은근히 나 같은 무딘 무똑똑이조차 "고런 것이 참맛인데" 하고 입맛 다시게 만드는 앙증한 야무짐이 있건만 이 아쉬움은 무엇에 대야할지 모르겠다. 남의 처자를 탐나는 것 같아 참담하기도 하고 남새스럽건만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외로움이 고만큼 작지 아니하다는 왈이다.
하기사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데 6년을 그 재랄맞은 선빙장 밑에서 반 머슴살이 한 창녕이 생각을 한다면야 나는 차마 진즉에 못참고 뛰쳐나갔을 거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긴 하여도, 결과적으로 고 놈은 마누라에 집에 땅뙤기까지 얻었고, 암만 딸내미라 혀도 떡두깨비 같은 손주 폭하니 품에 안기주믄 그 빙장이 난중에 재산 반의 반, 아니 십분지의 일만이라도 물려주지 않고 배기겠느냔 말이다. 그렇담 단박에 창녕이는 그 땅 전부 소작 주고 2할만 받아 묵어도 평생 배 곯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걸 생각하면 역시나 배가 아니 아플 수가 없다.
"시버럴 것"
당최가 이럴 바엔즉 콱 뒈지고 싶다 하는 생각꺼정 드는 것은 나에게는 그런 빌어먹을 일이 일어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생전에 여 골막촌은 무신 놈의 양기가 그리도 센 땅인지 근 수십년이 낳았다 하면 아들이요 딸내미는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산을 하나 반은 넘어야 한다. 그나마도 이젠 뭐가 없지만서도. 아 오죽하면 다들 눈이 벌개져 학동의 오종종이 점순이 소식이 예까지 들어오냔 말이다. 지미럴거.
오종이 왈도 일리가 있는 것이, 세상에 무덤뙤기는 둘째치고 조상 이름은 알아야 제사라도 지낼 것 아닌가. 지집이 있기는 해야 뭔 연적질을 하건 장개를 가건 할텐데 여는 당최가 고추밭만 줄엉줄엉이다. 그렇다고 이 골막촌 거렁뱅이들이 뭔들 넘의 재산이 있어 저 먼즉에서 색시를 모셔오겠는가. 정 붙일 인연 자체가 없는 황무한 땅이 그러한 것이니 세상 아쉬울 것은 오로지 나이 급한 나 뿐이다. 그리하여 더욱 더 작년 설 즉에 겪은 그 쪼간이 나는 여지껏 생각이 간절하다. 하늘도 무심하지.
작년 설 즈음의 일이다. 큰 눈 오기 전에 나무 잔태기도 좀 줘오고 겸사겸사 고려엉겅키라도 혹 캐올까 해 올랐다가 갑자기 눈이 크게 쏟아짐에 식급히도 오도방정 떨며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러던 차에 시커먼 남녀가 눈에 흙에 걸뱅이 꼴이 다 되어 산자락 내다 보이는 막고바우 근처에서 오돌돌이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딱 봐도 차림이 골막촌 사람은 진즉에 아니고 낯설기에 뉘신가하여 유심히 바라보노라니 부지불식간에 처자랑 눈이 마주쳤다. 머리도 안 올렸고 앳띈 것이 언뜻 봐도 또래인데 참 곱다.
"크흠"
괜히 멋적어 헛기침을 하고 슥 눈 돌리고 지나가려는데 마주친 눈매도 그리하고 가까이 갈수록 흘깃흘깃 그 태가 흐뭇하다.
"얘"
가까이 가니 그 아이가 나를 부른다. 옆에 있는 남정네는 무엇일까, 행색을 보아하니 그 애비 또래인데 설마하니 기둥서방은 아닐테지.
"내 말이 안 들리니?"
"뭐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다. 이번에는 옆의 사내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 이 근방에 잠시 쉴 곳, 묵을 곳이 있나?"
"얼마나유?"
내 말에 사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하나 곧 "짧게는 며칠, 길면 봄까지면 더 좋고" 하고 대답한다. 며칠이면 몰라도 봄꺼정 있는다는 말에 나는 학동에 주막보다도 얼마 전 장사 치러 비어있는 달맥이 할매집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용한 대답이다.
"동리에 빈 집이 하나 있긴 한듸"
사내도 기집애도 얼굴이 환하니 밝아진다. 허나 이제와 생각하니 둘 다 짐이라고는 보따리 두 개가 전부다. 함께 산을 내려가며 묻노라니 둘은 역시나 애비자식 관계로, 그 외의 것은 먼저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제사 혹여 나쁜 짓이라도 하고 도망 다니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서도 버럭 겁이 난 관계로 구태 묻지는 않았다. 와중에 뜬금없이 기집애는 지 애비가 있는데도 서슴없이 자꾸 말을 편히도 건다. 그에 나도 편케 답한다.
"옷 얇은데 안 춥니"
"안 춥다"
내가 앞장을 서고 다음으로 기집애가 따르고 그 뒤에야 담뱃대 꺼내 문 애비가 따른다. 이것부터가 거꾸로다.
"너어 밥은 먹었니"
"이제 내려가 먹을거다"
잠시 말이 끊어진 기집애는 다시 싹싹하게 묻는다.
"원래 그리 말이 안 기니"
넘이랑 말할 일이 잘 없어서 모르겠다. 묵묵히 있노라니 이제사 그 애비가 헛기침을 하는데 기집애가 못마땅해 그러는 것인지 담배가 매워 그런 지는 모르겠다. 허나 기집애는 계속 묻는다.
"너 동리 사람들은 어떠니"
"마을은 작은데 사람 좋다 다들"
"다행이다"
여자애가 괄괄하면서도 다정한 것이, 왈자구나 싶으면서도 은근 그 사근한 맛에 히죽히죽 입이 벌어진다.
"너 이름이 뭐니"
"동이. 만동이"
나도 너 이름은 무엇이니 묻고 싶지만 그 애비가 그 등 뒤에 있으니 묻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처지가 그래서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는 역시 아무 말이 없다.
"내 이름은 금이야"
금이. 마음 속으로 한번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그즘하여 뒤늦게 심사가 불편해진 그 애비가 "어여 가자" 하며 가볍게 꾸짖는다. 그러나 그리 역정이 묻어있는 것은 아니고, 애시당초 금이 얘가 크게 아비를 무서워 하는 것 같지가 않다. 먼즉에 애비보다도 먼자 나에게 말을 건 것도 금이 아니었던가.
"장은 어디에 서니"
몇 달을 살려면 구해야 할 것이 많지 싶어 재 너머 삼일장, 두엇거리 오일장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석이 할아범한테 사정을 구하니 혼쾌히 응락한다. 실은 할아범 아니고서야 출신 불분명한 외지인을 마을 들이는걸 누가 좋아하며 누가 허락하겠는가. 역시나 사람 좋은 어르신이 제일이다.
"그럼 글피에 장 서면 같이 가기로 하고, 일단 급한 것은 거기 놔뒀어유"
"고마워, 동아"
금이가 지 애비를 대신해 대답하고는 얼기설기한 것이 이미 문 같지도 않은 서릿문을 닫는다. 직전에 집 나간 며느리가 혹여라도 돌아와서 물건 달랠까봐 장리 치르고도 그 집 물건은 다들 고대로 냅뒀는데 철이 바뀌어도 안 돌아오는 것을 보면 달맥이 할마이 집에 사람 들어올 일은 없고, 항차에 동리에 사람은 연즉 죽어나가도 암도 들어올 일 없는 골막동이니 걱정 많은 석이 할아범은 그저 사람 들왔다는 사실이 흐뭇한 것이다. 실은 나도 흐뭇하고.
"젖은 나무는 무엇에 쓰는데"
"말리면 그만이지."
"그래"
다음 날로 금이와 나는 동무가 되어, 함께 장을 다녀오고 그 집에다 나무까지 해다줬다. 눈에 젖은 나무지만 우리 집 부뚜막에서 연 이틀 말리면 어떻게든 잠시롱 땔감은 되어 줄 것이고, 이틀치는 우리 집 것을 조금 덜어다 주었다. 아무렴 푸줏간 주인은 풀만 먹고 나뭇꾼 부뚜막엔 이파리만 불탄다지만 까짓거 줄 때는 인심 좋게 주는 것이 사람 도리란 것이다.
"봄 되면 이 근방이 다 영춘화 천지인데, 그 노란 천지가 매화, 함박보다 예쁘단다"
사실 어찌 영춘화가 매화나 함박보다 예쁘겠냐만, 금이가 봄에 떠날지도 모른다 하니 마음이 급하여 그저 매화보다도 영춘화가 나는 더 예쁜 것이다. 그저 영춘 한 줄기 꺾어다가 금이 머리에 씌우면 그보다 예쁜 것이 없을 것만 같다.
"고맙다"
금이는 무슨 일이든 연방 고마워라 했다. 하기사 세상 천지에 길 한번 물어봤다고 집이 생기고 쌀까지 퍼다주고 춥다고 나무까지 해다 바치니 싫을 이유가 있으련만 실인즉 나는 그저 금이랑 말이라도 섞어보는 것이 참으로 몸 닳도록 기분 좋은 것이다. 어제 장까지 함께 보고 왔다니 어머니도 히죽한 것이 버럭 혹여 동리에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까 의심되어 내가 부러 주의를 주었다.
"알았다 알았다 이 놈아"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지만 혹시라도 또 노파가 어디 가서 정말 소문이라도 냈다가는 금이도 불편할테고, 봄에 떠날 양반들이 당장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이 아들 몽달귀신 되는 꼴 보게 될 거라고 다시 한번 단단히 주의를 주니 그제서야 은근 역정이 난 어머니는 혀를 찬다. 허나 중요한 것은 우리 엄씨가 아니라 내 금이 아니던가. 그래, 내 금이.
"요래 납자닥한 돌짜구를 들추면?"
"에그"
"옳거니"
그 다음 날에는 금이가 지 아비 출타해 혼자 심심하다고 조르는 통에, 엄니한테는 나무하러 간다고 하고는 함께 산에를 올랐다. 소막산 연천을 살짜기 지나 비탈 오를라치는 바로 그트막에 겨울 개골이 잡기 참으로 좋은 명당이 있다. 돌짜구를 열면 여는대로 동면 들어간 개골이 천지다. 욕심낼 것은 없고 딱 궈먹을 세 마리만 잡았다. 기분좋아 흐흐하며 으쓱하노라니 불쑥 금이가 내 손을 잡는다.
"고만잡자. 너 손 많이 차지?"
내 뭉툭한 손에 고운 손이 얹혀지니 번뜩하니 눈이 떠지다가 그 노골함에 손이 다 녹는다. 금이 손은 어찌 이리도 보드라운지 여기에 댈라치면 내 손은 차마 발이라 하기에도 댈 것이 못 된다.
"왜?"
묻기는 또 무엇이냐. 내 얼굴 벌개지는 것이 정말 몰라 묻는 것인지, 아는데 빼꼼하니 한발 빼는 것인지 멍하던 차에 또 한번 은근하니 묻는 금이의 말이 내 가심을 두드린다.
"동이 니가 있어 든든해"
참으로 아마도 이 곳이 축축하니 밑겨운 개천 근방이 아니라 어디 폭신하고 키 높은 풀숲이었다면야 참으로 좋았으련만, 단벌이 분명한 금이의 옷마저 생각한 그 마음에 그저 나는 와락 안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금이를 품에 안으니 참으로 포근하고 가슴 한 구석 간질간질함이 마치 곧 터져버릴 것 같아 그 알 수 없는 기분에 눈 앞이 다 아찔했다.
"나만 믿어"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엇을 신용하고 또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인지도 맥락 없지만 그때는 그런 마음만이 그저 가득했다. 얼마를 그리 둘이서 안고 있었을까. 답답하다는 말에 얼른 또 놀라 허둥지둥 떨어져 손잡고 개골이만 주워 내려오니, 그리 길지 못한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필시 그때가 틀림없다.
"뭐여"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허나 삶이란 항상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이 하나 생기면 반드시 나쁜 일이 두엇은 족히 생기는 것이라고. 오종이 고 놈 말은 참 허투로 듣기에도 소름 돋으리만치 맞는 말이 많다. 이번 일도 그랬다.
"그럼 어디로?"
"나도 몰러"
출타했다 3일 만에 돌아온 금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그날 밤으로 떠나야 한다고 준비하라고 하고서는 또 어디를 급하게 다녀온다고 했다는데, 아니 봄까지 있을 수도 있다던 양반이 꼬박 엿새만에 떠난다니 금이 만큼이나 나도 경황이 없다. 나는 도무지 이렇게 금이를 보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금아"
"동아"
그저 서로 이름만 불러 보았음이며 고작해야 며칠의 정인데 어찌 이리도 마음이 아픈 줄을 모르겠다. 분하면서도 쌀쌀하고 아프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그만 번뜩 금이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혹시 우리 도망치지 않으련?"
"어디루"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차라리 그때 아무 데나 씨불기고 그냥 냅다 가자고 꼬셨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것인데 고지식한 나는 그저 순순히도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하고 말을 흐렸으니 금이도 잠시 동했던 마음이 가라 앉았으리라.
"그럼 아부지는. 안돼"
"그려"
실은 나도 엄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객기를 부려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고개가 떨궈지고 깊숙하니 마음 한 구석이 베인 듯 아픈 것이 그 얼얼함은 그 옛적 쓰러지는 나무 뒷퉁에 대가리 맞은 것보다 심하다. 그래도 불쑥하니 떠오르는 분함에 "봄까지만 있으면 안되나?" 하고 재차 물었지만 그저 금이는 고개만 젓는다.
"그럼 기달류. 내 줄 것이 있으니"
"뭐를"
나는 그저 힘차게 내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암 것도 없구나 서글픈 마음에 그저 뭐라도 쥐어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씨암닭을 잡을까 싶었지만 그걸 들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자시고 가라고 하기에는 그 애비가 따를 성 싶지가 않다. 말랭이라도 뭐가 좀 있으면 가져다 줄까 했지만 우리 살림에 만들면 먹기 바쁘지 남겼을 리가 없다. 간신히 떠올린 것이 고작해야 남겨둔 씨감자 몇 알인데, 그걸 또 보따리에 싸서 다시 들고 부리나케 뛰노라니 발걸음도 마음도 어찌 그리도 무거운지 모르겠다. 꼭 다리가 천근이고 가슴이 만근만도 같다.
"왜 울어. 울기는"
보자기를 받자마자 금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그만 시큰하여 내까정 울음이 번진다. 나는 그것을 아부지랑 같이 떠나는 길에 먹으라고 들고 온 것인데 금이는 "아부지는 밤에 온댔어" 하면서 그 자리에서 둘이 먹자며 감자를 굽는다.
"동아"
부뚜막 앞에서 벌개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그만 픽 웃은 우리는 그렇게 또 손을 잡는데, 마음이 그리도 아픈데 어찌 손은 또 이리도 달 수 있는지 모르겠다.
"금아"
"응"
"만시, 혹여라도 여참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그때는 꼭 같이 살자"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며 다짐인 듯 부탁인듯 하는 내 말에 금이의 대답없음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얼굴 가리고 우는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내 심장이 철렁한다. 나는 아파도 너는 안 아팠으면 좋겠다. 금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주고는 어느새 다 구워진 감자를 꺼냈다. 그렇게 반나절을 감자 까먹으며 도란도란 둘이 실없는 이야기 나누노라니 기어코 그 아버지가 오고야 말았다.
"그래, 고맙다 동아"
"조심혀 가세유"
나는 여지껏 그 양반이 항시 뭐가 그리도 급한지는 알 수 없다. 금이도 말을 해준 적이 없고, 묻지도 않았으되 그저 알 것이 아니구나 할 따름이다. 단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니라는 답이 두려우면서도 떠나는 뒷등에 물어보았다.
"언제든 돌아는 오쥬?"
금이 아버지는 답이 없었지만, 금이는 답했다. 봄 되면 꼭 돌아올 거라고.
도주라도 하듯 그리 급히 둘이 떠난 뒤로 내 속은 허하다 못해 병이 도지기 직전으로, 봄이 되어 영춘화 피고 매화 피고 심지어는 오뉴월 작약까지 지 이름맨큼 함박하니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어느새 가을 지나 겨울마저 다 지나갈 무렵이 되었건만 역시나 금이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저 오늘처럼, 이리 나무하다 괜시리 막고바우 옆에서 얼찍하니 저 산자락 아래 내려다보며, 길가로도 괜스레 기웃거리다 혼자 내려갈 따름이다. 혹시라도 금이가 왔다가 길 못 찾고 그냥 엉딴데 갈까뱀시로.
"지미"
하필이면 발싸개마저 축축하니 오그라드는 발가락새로 찬기운이 도져 감각 없을 지경이 되어 손가락으로 살곰하니 만지노라니 간신히 피가 돈다.
"얼타면 발가락 떨어지겄구먼"
그리 혼자 혀 차고 세워놓은 등지게 다시 메는 순간 나는 봤다. 노란 옷 입은 금이를. 금이 닮은 영춘화를. 둘 중에 그 무엇을. 헛거를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고만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제발 그것이 금이이길 빌며 그렇게 눈을 살곰하니 떠본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 끝 -
"에효효"
입김 화하게 퍼지는 이 질다란 한숨 속으로 내 식허먼 속이 다 빠져나간다. 아랫마을 학동에 창녕이가 성례를 치룬다고 들었다. 처가에서 조막만하기는 혀도 곡식 잘 여무는 진또배기 뙤기 밭꺼정 뗘준단다. 데릴사위 6년 지랄도 이만하면 성공이다. 섁시 점순이는 키는 딸따름해도 야무지고 왈개한 것이 은근히 나 같은 무딘 무똑똑이조차 "고런 것이 참맛인데" 하고 입맛 다시게 만드는 앙증한 야무짐이 있건만 이 아쉬움은 무엇에 대야할지 모르겠다. 남의 처자를 탐나는 것 같아 참담하기도 하고 남새스럽건만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외로움이 고만큼 작지 아니하다는 왈이다.
하기사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데 6년을 그 재랄맞은 선빙장 밑에서 반 머슴살이 한 창녕이 생각을 한다면야 나는 차마 진즉에 못참고 뛰쳐나갔을 거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긴 하여도, 결과적으로 고 놈은 마누라에 집에 땅뙤기까지 얻었고, 암만 딸내미라 혀도 떡두깨비 같은 손주 폭하니 품에 안기주믄 그 빙장이 난중에 재산 반의 반, 아니 십분지의 일만이라도 물려주지 않고 배기겠느냔 말이다. 그렇담 단박에 창녕이는 그 땅 전부 소작 주고 2할만 받아 묵어도 평생 배 곯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걸 생각하면 역시나 배가 아니 아플 수가 없다.
"시버럴 것"
당최가 이럴 바엔즉 콱 뒈지고 싶다 하는 생각꺼정 드는 것은 나에게는 그런 빌어먹을 일이 일어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생전에 여 골막촌은 무신 놈의 양기가 그리도 센 땅인지 근 수십년이 낳았다 하면 아들이요 딸내미는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산을 하나 반은 넘어야 한다. 그나마도 이젠 뭐가 없지만서도. 아 오죽하면 다들 눈이 벌개져 학동의 오종종이 점순이 소식이 예까지 들어오냔 말이다. 지미럴거.
오종이 왈도 일리가 있는 것이, 세상에 무덤뙤기는 둘째치고 조상 이름은 알아야 제사라도 지낼 것 아닌가. 지집이 있기는 해야 뭔 연적질을 하건 장개를 가건 할텐데 여는 당최가 고추밭만 줄엉줄엉이다. 그렇다고 이 골막촌 거렁뱅이들이 뭔들 넘의 재산이 있어 저 먼즉에서 색시를 모셔오겠는가. 정 붙일 인연 자체가 없는 황무한 땅이 그러한 것이니 세상 아쉬울 것은 오로지 나이 급한 나 뿐이다. 그리하여 더욱 더 작년 설 즉에 겪은 그 쪼간이 나는 여지껏 생각이 간절하다. 하늘도 무심하지.
영춘화
작년 설 즈음의 일이다. 큰 눈 오기 전에 나무 잔태기도 좀 줘오고 겸사겸사 고려엉겅키라도 혹 캐올까 해 올랐다가 갑자기 눈이 크게 쏟아짐에 식급히도 오도방정 떨며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러던 차에 시커먼 남녀가 눈에 흙에 걸뱅이 꼴이 다 되어 산자락 내다 보이는 막고바우 근처에서 오돌돌이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딱 봐도 차림이 골막촌 사람은 진즉에 아니고 낯설기에 뉘신가하여 유심히 바라보노라니 부지불식간에 처자랑 눈이 마주쳤다. 머리도 안 올렸고 앳띈 것이 언뜻 봐도 또래인데 참 곱다.
"크흠"
괜히 멋적어 헛기침을 하고 슥 눈 돌리고 지나가려는데 마주친 눈매도 그리하고 가까이 갈수록 흘깃흘깃 그 태가 흐뭇하다.
"얘"
가까이 가니 그 아이가 나를 부른다. 옆에 있는 남정네는 무엇일까, 행색을 보아하니 그 애비 또래인데 설마하니 기둥서방은 아닐테지.
"내 말이 안 들리니?"
"뭐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다. 이번에는 옆의 사내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 이 근방에 잠시 쉴 곳, 묵을 곳이 있나?"
"얼마나유?"
내 말에 사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하나 곧 "짧게는 며칠, 길면 봄까지면 더 좋고" 하고 대답한다. 며칠이면 몰라도 봄꺼정 있는다는 말에 나는 학동에 주막보다도 얼마 전 장사 치러 비어있는 달맥이 할매집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용한 대답이다.
"동리에 빈 집이 하나 있긴 한듸"
사내도 기집애도 얼굴이 환하니 밝아진다. 허나 이제와 생각하니 둘 다 짐이라고는 보따리 두 개가 전부다. 함께 산을 내려가며 묻노라니 둘은 역시나 애비자식 관계로, 그 외의 것은 먼저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제사 혹여 나쁜 짓이라도 하고 도망 다니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서도 버럭 겁이 난 관계로 구태 묻지는 않았다. 와중에 뜬금없이 기집애는 지 애비가 있는데도 서슴없이 자꾸 말을 편히도 건다. 그에 나도 편케 답한다.
"옷 얇은데 안 춥니"
"안 춥다"
내가 앞장을 서고 다음으로 기집애가 따르고 그 뒤에야 담뱃대 꺼내 문 애비가 따른다. 이것부터가 거꾸로다.
"너어 밥은 먹었니"
"이제 내려가 먹을거다"
잠시 말이 끊어진 기집애는 다시 싹싹하게 묻는다.
"원래 그리 말이 안 기니"
넘이랑 말할 일이 잘 없어서 모르겠다. 묵묵히 있노라니 이제사 그 애비가 헛기침을 하는데 기집애가 못마땅해 그러는 것인지 담배가 매워 그런 지는 모르겠다. 허나 기집애는 계속 묻는다.
"너 동리 사람들은 어떠니"
"마을은 작은데 사람 좋다 다들"
"다행이다"
여자애가 괄괄하면서도 다정한 것이, 왈자구나 싶으면서도 은근 그 사근한 맛에 히죽히죽 입이 벌어진다.
"너 이름이 뭐니"
"동이. 만동이"
나도 너 이름은 무엇이니 묻고 싶지만 그 애비가 그 등 뒤에 있으니 묻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처지가 그래서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는 역시 아무 말이 없다.
"내 이름은 금이야"
금이. 마음 속으로 한번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그즘하여 뒤늦게 심사가 불편해진 그 애비가 "어여 가자" 하며 가볍게 꾸짖는다. 그러나 그리 역정이 묻어있는 것은 아니고, 애시당초 금이 얘가 크게 아비를 무서워 하는 것 같지가 않다. 먼즉에 애비보다도 먼자 나에게 말을 건 것도 금이 아니었던가.
"장은 어디에 서니"
몇 달을 살려면 구해야 할 것이 많지 싶어 재 너머 삼일장, 두엇거리 오일장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석이 할아범한테 사정을 구하니 혼쾌히 응락한다. 실은 할아범 아니고서야 출신 불분명한 외지인을 마을 들이는걸 누가 좋아하며 누가 허락하겠는가. 역시나 사람 좋은 어르신이 제일이다.
"그럼 글피에 장 서면 같이 가기로 하고, 일단 급한 것은 거기 놔뒀어유"
"고마워, 동아"
금이가 지 애비를 대신해 대답하고는 얼기설기한 것이 이미 문 같지도 않은 서릿문을 닫는다. 직전에 집 나간 며느리가 혹여라도 돌아와서 물건 달랠까봐 장리 치르고도 그 집 물건은 다들 고대로 냅뒀는데 철이 바뀌어도 안 돌아오는 것을 보면 달맥이 할마이 집에 사람 들어올 일은 없고, 항차에 동리에 사람은 연즉 죽어나가도 암도 들어올 일 없는 골막동이니 걱정 많은 석이 할아범은 그저 사람 들왔다는 사실이 흐뭇한 것이다. 실은 나도 흐뭇하고.
"젖은 나무는 무엇에 쓰는데"
"말리면 그만이지."
"그래"
다음 날로 금이와 나는 동무가 되어, 함께 장을 다녀오고 그 집에다 나무까지 해다줬다. 눈에 젖은 나무지만 우리 집 부뚜막에서 연 이틀 말리면 어떻게든 잠시롱 땔감은 되어 줄 것이고, 이틀치는 우리 집 것을 조금 덜어다 주었다. 아무렴 푸줏간 주인은 풀만 먹고 나뭇꾼 부뚜막엔 이파리만 불탄다지만 까짓거 줄 때는 인심 좋게 주는 것이 사람 도리란 것이다.
"봄 되면 이 근방이 다 영춘화 천지인데, 그 노란 천지가 매화, 함박보다 예쁘단다"
사실 어찌 영춘화가 매화나 함박보다 예쁘겠냐만, 금이가 봄에 떠날지도 모른다 하니 마음이 급하여 그저 매화보다도 영춘화가 나는 더 예쁜 것이다. 그저 영춘 한 줄기 꺾어다가 금이 머리에 씌우면 그보다 예쁜 것이 없을 것만 같다.
"고맙다"
금이는 무슨 일이든 연방 고마워라 했다. 하기사 세상 천지에 길 한번 물어봤다고 집이 생기고 쌀까지 퍼다주고 춥다고 나무까지 해다 바치니 싫을 이유가 있으련만 실인즉 나는 그저 금이랑 말이라도 섞어보는 것이 참으로 몸 닳도록 기분 좋은 것이다. 어제 장까지 함께 보고 왔다니 어머니도 히죽한 것이 버럭 혹여 동리에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까 의심되어 내가 부러 주의를 주었다.
"알았다 알았다 이 놈아"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지만 혹시라도 또 노파가 어디 가서 정말 소문이라도 냈다가는 금이도 불편할테고, 봄에 떠날 양반들이 당장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이 아들 몽달귀신 되는 꼴 보게 될 거라고 다시 한번 단단히 주의를 주니 그제서야 은근 역정이 난 어머니는 혀를 찬다. 허나 중요한 것은 우리 엄씨가 아니라 내 금이 아니던가. 그래, 내 금이.
"요래 납자닥한 돌짜구를 들추면?"
"에그"
"옳거니"
그 다음 날에는 금이가 지 아비 출타해 혼자 심심하다고 조르는 통에, 엄니한테는 나무하러 간다고 하고는 함께 산에를 올랐다. 소막산 연천을 살짜기 지나 비탈 오를라치는 바로 그트막에 겨울 개골이 잡기 참으로 좋은 명당이 있다. 돌짜구를 열면 여는대로 동면 들어간 개골이 천지다. 욕심낼 것은 없고 딱 궈먹을 세 마리만 잡았다. 기분좋아 흐흐하며 으쓱하노라니 불쑥 금이가 내 손을 잡는다.
"고만잡자. 너 손 많이 차지?"
내 뭉툭한 손에 고운 손이 얹혀지니 번뜩하니 눈이 떠지다가 그 노골함에 손이 다 녹는다. 금이 손은 어찌 이리도 보드라운지 여기에 댈라치면 내 손은 차마 발이라 하기에도 댈 것이 못 된다.
"왜?"
묻기는 또 무엇이냐. 내 얼굴 벌개지는 것이 정말 몰라 묻는 것인지, 아는데 빼꼼하니 한발 빼는 것인지 멍하던 차에 또 한번 은근하니 묻는 금이의 말이 내 가심을 두드린다.
"동이 니가 있어 든든해"
참으로 아마도 이 곳이 축축하니 밑겨운 개천 근방이 아니라 어디 폭신하고 키 높은 풀숲이었다면야 참으로 좋았으련만, 단벌이 분명한 금이의 옷마저 생각한 그 마음에 그저 나는 와락 안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금이를 품에 안으니 참으로 포근하고 가슴 한 구석 간질간질함이 마치 곧 터져버릴 것 같아 그 알 수 없는 기분에 눈 앞이 다 아찔했다.
"나만 믿어"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엇을 신용하고 또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인지도 맥락 없지만 그때는 그런 마음만이 그저 가득했다. 얼마를 그리 둘이서 안고 있었을까. 답답하다는 말에 얼른 또 놀라 허둥지둥 떨어져 손잡고 개골이만 주워 내려오니, 그리 길지 못한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필시 그때가 틀림없다.
"뭐여"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허나 삶이란 항상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이 하나 생기면 반드시 나쁜 일이 두엇은 족히 생기는 것이라고. 오종이 고 놈 말은 참 허투로 듣기에도 소름 돋으리만치 맞는 말이 많다. 이번 일도 그랬다.
"그럼 어디로?"
"나도 몰러"
출타했다 3일 만에 돌아온 금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그날 밤으로 떠나야 한다고 준비하라고 하고서는 또 어디를 급하게 다녀온다고 했다는데, 아니 봄까지 있을 수도 있다던 양반이 꼬박 엿새만에 떠난다니 금이 만큼이나 나도 경황이 없다. 나는 도무지 이렇게 금이를 보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금아"
"동아"
그저 서로 이름만 불러 보았음이며 고작해야 며칠의 정인데 어찌 이리도 마음이 아픈 줄을 모르겠다. 분하면서도 쌀쌀하고 아프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그만 번뜩 금이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혹시 우리 도망치지 않으련?"
"어디루"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차라리 그때 아무 데나 씨불기고 그냥 냅다 가자고 꼬셨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것인데 고지식한 나는 그저 순순히도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하고 말을 흐렸으니 금이도 잠시 동했던 마음이 가라 앉았으리라.
"그럼 아부지는. 안돼"
"그려"
실은 나도 엄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객기를 부려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고개가 떨궈지고 깊숙하니 마음 한 구석이 베인 듯 아픈 것이 그 얼얼함은 그 옛적 쓰러지는 나무 뒷퉁에 대가리 맞은 것보다 심하다. 그래도 불쑥하니 떠오르는 분함에 "봄까지만 있으면 안되나?" 하고 재차 물었지만 그저 금이는 고개만 젓는다.
"그럼 기달류. 내 줄 것이 있으니"
"뭐를"
나는 그저 힘차게 내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암 것도 없구나 서글픈 마음에 그저 뭐라도 쥐어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씨암닭을 잡을까 싶었지만 그걸 들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자시고 가라고 하기에는 그 애비가 따를 성 싶지가 않다. 말랭이라도 뭐가 좀 있으면 가져다 줄까 했지만 우리 살림에 만들면 먹기 바쁘지 남겼을 리가 없다. 간신히 떠올린 것이 고작해야 남겨둔 씨감자 몇 알인데, 그걸 또 보따리에 싸서 다시 들고 부리나케 뛰노라니 발걸음도 마음도 어찌 그리도 무거운지 모르겠다. 꼭 다리가 천근이고 가슴이 만근만도 같다.
"왜 울어. 울기는"
보자기를 받자마자 금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그만 시큰하여 내까정 울음이 번진다. 나는 그것을 아부지랑 같이 떠나는 길에 먹으라고 들고 온 것인데 금이는 "아부지는 밤에 온댔어" 하면서 그 자리에서 둘이 먹자며 감자를 굽는다.
"동아"
부뚜막 앞에서 벌개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그만 픽 웃은 우리는 그렇게 또 손을 잡는데, 마음이 그리도 아픈데 어찌 손은 또 이리도 달 수 있는지 모르겠다.
"금아"
"응"
"만시, 혹여라도 여참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그때는 꼭 같이 살자"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며 다짐인 듯 부탁인듯 하는 내 말에 금이의 대답없음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얼굴 가리고 우는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내 심장이 철렁한다. 나는 아파도 너는 안 아팠으면 좋겠다. 금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주고는 어느새 다 구워진 감자를 꺼냈다. 그렇게 반나절을 감자 까먹으며 도란도란 둘이 실없는 이야기 나누노라니 기어코 그 아버지가 오고야 말았다.
"그래, 고맙다 동아"
"조심혀 가세유"
나는 여지껏 그 양반이 항시 뭐가 그리도 급한지는 알 수 없다. 금이도 말을 해준 적이 없고, 묻지도 않았으되 그저 알 것이 아니구나 할 따름이다. 단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니라는 답이 두려우면서도 떠나는 뒷등에 물어보았다.
"언제든 돌아는 오쥬?"
금이 아버지는 답이 없었지만, 금이는 답했다. 봄 되면 꼭 돌아올 거라고.
도주라도 하듯 그리 급히 둘이 떠난 뒤로 내 속은 허하다 못해 병이 도지기 직전으로, 봄이 되어 영춘화 피고 매화 피고 심지어는 오뉴월 작약까지 지 이름맨큼 함박하니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어느새 가을 지나 겨울마저 다 지나갈 무렵이 되었건만 역시나 금이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저 오늘처럼, 이리 나무하다 괜시리 막고바우 옆에서 얼찍하니 저 산자락 아래 내려다보며, 길가로도 괜스레 기웃거리다 혼자 내려갈 따름이다. 혹시라도 금이가 왔다가 길 못 찾고 그냥 엉딴데 갈까뱀시로.
"지미"
하필이면 발싸개마저 축축하니 오그라드는 발가락새로 찬기운이 도져 감각 없을 지경이 되어 손가락으로 살곰하니 만지노라니 간신히 피가 돈다.
"얼타면 발가락 떨어지겄구먼"
그리 혼자 혀 차고 세워놓은 등지게 다시 메는 순간 나는 봤다. 노란 옷 입은 금이를. 금이 닮은 영춘화를. 둘 중에 그 무엇을. 헛거를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고만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제발 그것이 금이이길 빌며 그렇게 눈을 살곰하니 떠본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