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에픽 템 먹을 생각 아니라면 굳이 거기에 시간 버릴 필요 없어요"
"그쵸? 그냥 제껴도 되죠? 오케이, 오늘 걍 그럼 바로 렙업만 쭉쭉 달린다"
그때 그 시절, 정모의 성지 '민토'에서 우리는 곧잘 정모를 가졌었다.
"페가님 요새 새벽에도 계속 접속해 계시던데"
"저 휴학했걸랑요. 아 근데 모드님 좀 늦으시네, 3시까지 모이기로 해놓고선 지금 거의 4시가 다 되어가는데"
"우리 여기 몇 시까지 예약해놨어요?"
"5시요"
흔한 온라인 게임 동호회의 정모. 키 작고 배 나온, 혹은 키만 멀대같이 큰 멸치, 혹은 키 작은 멸치, 혹은 거북목의 체크남방 입은 돼지들의 그렇고 그런 구질구질한 모임. 그러나 오늘은 묘한 긴장감과 함께 다들 어딘가 '조금은' 멋을 부린 듯한 느낌이 난다. 안경 대신 렌즈를 낀 '페가수스' 상철, 새 유니클로 남방을 사 입은-그러나 XL 스티커를 깜박하고 떼지 않아 조금 망신을 산- 'k86huns' 재훈, 세미정장을 걸친 '랜드로어' 동원, 닥터마틴으로 키를 2cm 키우고 미묘하게 더운 날씨에 가죽재킷을 걸친 나.
"누가 모드님한테 연락 좀 해보세요"
그렇다. 오늘은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모드'가 무려 대구에서 상경해서 처음으로 정모에 참석하는 날. 길드장이었던 나의 지시에 옳다꾸나 동원이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영철이 재훈에게 "님도 아라모드님 연락처 알아요?" 하고 속삭인다. 동원의 전화기 너머로 전화 발신음만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쨘! 늦어서 죄송해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 버스 타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대구 사투리가 살짝 섞인, 애교 넘치는 목소리의 긴 생머리 금발 엘프 여신은 과연 '아라모드'라는 우아한 닉네임에 걸맞는 외모였다. 새하얀 피부에 보조개 쏙쏙 들어가는 얼굴, 큰 눈에 러블리한 목소리. 다들 "우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연창이 곧바로 터져나온다.
…나의 회고에, 아라는 웃었다.
"영호님 기억에서 제가 너무 미화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때 최고였어요. 솔직히 편견 있잖아요. '이쁜 여자가 게임을 왜 해?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랑 놀지' 같은. 근데 제 그 고정관념을 처음으로 깬 게 아라님이었어요"
과거 이야기는 우리 둘의 관계를 매우 빠르게 진전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다음 말에 나는 어떤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당시에 저도 기대 하나도 안 했거든요. 게임동호회 남자들 다 뻔하니까. 근데 영호님 처음 보고 조금 두근두근했어요. 맨날 게임 속에서만, 그리고 게시판에서 글로만 봤던 분이었으니까. 근데 생각 이상으로 좀 괜찮았던? 그리고 더 놀랬던 건, 지난 주에 봤을 때, 엄청 시간이 자났는데도 전이랑 비교해서 하나도 안 변한거에요.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
그도 그럴 것이 그 몇 년 사이 가영을 통해 나름대로 가꾸어진 나였으니까.
"하하, 부끄럽네요"
지난 주, 아라와의 첫 데이트 이후 근 일주일만에 나는 또 그녀를 만났다. 가영에게는 "승준이 좀 만나고 올게" 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말이다. 두번째 데이트 역시 영화, 밥, 카페의 코스였다.
"저 공포영화 좋아하는데"
"아 그래요? 마침 잘 됐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보다는 호러SF 영화였다. 하지만 깜짝깜짝 놀라는 장면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놀랄 장면도 아니었지만 일부러 잡았다. 보드라운 손.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 5년 전 또래들 사이에서 '엘프' 칭호를 가졌던 여자의 손.
솔직히 말해 그 순간부터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온 신경이 아라의 손에 다 가있었다. 아라는 내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영화 재밌었죠?"
나의 어색한 질문에 아라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더니, 영화관을 나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내 손 계속 잡고 있었어요?"
아무리 내가 찌질이라고 해도, 이미 가영과의 오랜 연애로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통달한 나였다. 구태여 어설픈 변명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서요"
아라는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말해 첫 데이트 때 어느 정도 간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간이 맞는다. 아니 더 졸이면 오히려 짤 판이다. 그녀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만나요. 오늘부터"
조금은 낯 간지러운 말. 아라는 영화관 옆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 담배 피워도 괜찮죠?" 하고 묻는다. 아라가 담배를 피우는지는 몰랐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요"
아라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말했다.
"좋아요. 솔직히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요. 근데 우리 이제 말 놓는걸로?"
"그래"
나 역시 뛸듯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첫 데이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릿 속에서 가영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어쨌든 기뻤다.
"그래서 둘이 뭐했어?"
전화기 너머 가영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간만에 만나서 둘이 고기 구워 먹었지. 아 근데 승준이 그 새끼 요즘 영 컨디션이 별로더라고"
"왜?"
"계약직 끝나고 이제 정규직 전환시켜준다고, 분명히 지난 달까지 그렇게 말해놓고선 이번 달에 갑자기 그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거야. 부장 새끼가. 그래서 빡돈거지"
"와 그 회사 미쳤네. 근데 그런 회사 많대 요즘에"
"그러게.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있더라고 그런 회사"
사실은 며칠 전에 전화로 주고 받은 이야기. 그게 어느새 승준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영은 곧 "나 네일 했어. 사진 봐봐" 하면서 카톡으로 이미지를 보냈다.
"오 이쁘다"
하지만 가영의 긴 손가락과 화려한 네일아트를 보면서도, 나는 수수한 아라의 그 보드라웠던 손을 떠올렸다.
"뭐야 반응이 시큰둥한데? 별로야?"
리액션의 크기에도 민감한 가영. 나는 서둘러 "아니, 이쁘다고. 근데 내가 뭐 네일이 이쁜지 어떤지 아나" 하면서 둘러댄다. 가영은 "확!" 하고 군기를 또 잡더니 "내일 우리 뭐해?"하고 묻는다. 뭘하면 좋을까.
"영화볼까"
그러나 의외로 영화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다.
"뭐 볼건데"
"공포영화"
공포영화라는 말에 가영이 놀랜다.
"왠 공포영화? 나 공포영화 싫은데"
"아냐, 재밌어. 아니 재밌대"
"알았어"
순순히 오케이 하는 가영. 나는 아라와 함께 본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게 혼란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의 '발각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 재미 하나도 없잖아. 무섭기만 해. 기분만 찝찝해. 공포영화 좋아하는 변태들이 제일 싫어"
"그러게"
나는 시큰둥하게 가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한 오후 4시 반.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운동하러 가자"
"응? 운동? 니가 왠일로"
당시 '운동'은 가영이 나에게 섹스를 먼저 제안할 때의 은어였다. 계산해보니 700일 이래로 근 석 달만의 제안이었다.
"가자. 오늘 날씨 덥잖아.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쉬자"
"좋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가영과의 섹스가 뜸해졌었다. 물론 언제나 섹스에 굶주렸던 나는 항상 그녀와의 관계를 원했지만 가영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섹스를 기피했었고, 언젠가 내가 정색을 했던 날 그녀는 더욱 더 그 이상의 정색을 해왔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아…"
나는 조루였다. 삽입으로 3분 넘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초조한 마음에 오히려 애무도 더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몸만 달구어 놓고 본 게임에서 못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더 오래 하려고 머릿 속에서 천천히 숫자를 세보기도 했고, 아예 실제 허리 흔드는 속도를 줄이기도 해봤고 체위를 자주 바꾸기도 해봤지만 역시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몰려오는 쾌감에 금방 사정을 했고 그렇게 어색한 타이밍, 아쉬운 순간에 끝난 이상 나는 묘하게 그녀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가영아"
"알았어, 어휴"
그래도 아직 팔팔하던 시절이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동이 걸리면 2차전을 뛰기도 했지만 어느새 가영이와의 만남도 3년 차에 접어드는 상황이었던만큼 재시동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냥 됐고, 영화나 보자. 아까 사온 과일 좀 씻어줘"
"어"
대실 시간 3~4시간 중에 애무와 본 게임, 뒷처리까지 다 합해 30분도 안되는 짧디 짧은 해피타임이 지나가고 우리는 정말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영화로 시간을 떼웠다. 가방 속에서 울리는 아라의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은 채로.
"자기야, 혹시 강아지 키울 생각 없어?"
죽었다 깨나도 나에게 애칭 같은 것을 사용한 적이 없는 가영과 달리, 사귀기로 한 직후부터 나를 '자기'로 부르는 아라.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개는 귀찮잖아. 그리고 원룸에서 어떻게 개를 키워. 못해"
하지만 아라는 몇 번이고 권했다.
"근데 진짜 이런 개 없다니깐? 아는 오빠가 키우다가 갑자기 유학가게 되어서 분양하게 된 강아지인데, 너무 똑똑하고 절대 안 짖어. 그리고 똥오줌도 너무 잘 가리고, 막 귀찮게 조르지도 않아. 이런 개는 정말 없어"
"아 참"
…그렇게 딱 2주일만 시험삼아 길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반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똑똑하고 착한 개가 있을까. 구르라면 구르고 춤추라면 춤추고, 이건 정말 천재견이었다. "리모콘" 하면 리모콘을 입에 물고 오는 이 사랑스러운 요크셔에게 나는 흠뻑 빠졌다. 가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얘 진짜 똑똑하다. 근데 어디서 난거야?"
"어? 아아, 그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아는 오빠가 유학가게 됐다고, 분양할 곳 찾다가…"
"아는 여자애? 누구?"
"지민이라고 있어"
"지민이?"
"거 왜 예전에 내가 재훈이가 뭐 물어보다가 싸대기 맞고 친해진 애 얘기 한번 했잖아"
"아아, 그 도끼병? 근데 니가 걔를 어떻게 알아?"
"아 그냥 재훈이 통해서 분양할 사람 찾다가 나한테까지 순번이 온거지"
"그래. 나는 또 아는 여자애라고 하길래 뭔 소린가 했지. 여튼 배변패드 사왔어"
"올, 고마워"
가영이는 처음에 잠깐 의심을 했지만 순간적으로 적당히 잘 둘러낸 덕분에 더이상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여자의 촉. 어설프게 '아는 여자애' 라는 단어 하나에 갑자기 깊게 파고 든다. 이후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은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주말이 되자 아라가 우리 집에 반디를 보러 온다며 강아지 간식 이만큼과 함께 찾아왔다.
"자기야, 우리 둘둘이건데, 반디 주려고 내가 이만큼 가져왔어"
"오, 넘 좋다"
아라는 내 방을 휘 둘러보다가 "방은 작은데 그래도 디게 아늑하다. 우리 집은 투룸이라서 집은 큰데, 룸메가 넘 집을 엉망진창으로 써서 오히려 생활공간은 더 좁은 느낌이야" 하면서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아라야"
"응?"
사귀기로 한 지 9일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에로틱한 키스를 이어나갔다. 내가 찌질했던 어떤 시절, 혼자 속으로만 짝사랑했던 여자. 그런 여자와 몇 년 뒤 인연이 되어 나누는 야한 키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흥분을 불러왔지만 마음 속 한 켠에서 큰 불안함과 미안함을 유발했다. 조루에 대한 걱정.
"왜 안 서?"
너무 그 불안이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영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을까. 나의 성기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당황했을 아라는 나에게 웃으며 물었다. 뭐랄까…불안과 의심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면 어쩌면 더 위축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라는 여유있게 나의 팬티를 벗기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아…"
환희의 순간,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채 3분을 넘기기 힘들었던 가영과 달랐다. 아라와 할 때는 20분이고 30분이고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도 곧바로 부활하는 나의 쥬니어. 그래, 이게 섹스지. 이거였지. 근 십여년 전의 첫 경험 때도 그랬다. 그래, 나는 원래 조루가 아니었다. 심인성 조루. 무언가의 압박, 스트레스, 관계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상하관계에 의한 위축. 그 모든 것이 나의 멘탈을 흔들었고, 나는 그렇게 작아졌던 것이다.
"사랑해 영호야"
흥분이 채 식기 전,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라. 그녀는 가영과 달랐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에게 은근한 애정을 눈빛에서부터 발산하고 있었고, 계속 나에게 멋지다, 좋다, 잘한다 등의 칭찬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표현하는 사랑.
"나도 우리 애기 사랑해"
닭살 돋는 말. 가영과의 관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응"
"근데 나 어떻게 하지? 나 또 흥분했는데?"
"또? 너 진짜 변강쇠 아니니"
수컷으로서 그보다 기분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침대에서 네 번의 사랑을 나누고, 더워서 냉장고를 연 순간 나는 책상 한 켠에 놓아둔 무음의 내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 중 전화 네 통. 가영이었다. 사실 나는 아라가 강아지 간식만 주고 바로 갈 줄 알고, 따로 가영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두지 않았었다. 즉, 이러다가 가영이 혹시라도 우리 집에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첫 전화는 무려 45분 전에 왔었다. 혹시 모른다. 그녀가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인지도. 그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참 미련하게도,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가영아"
다른 여자의 이름에 이번에는 아라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느껴진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분명히 아까에 비해 작다.
"어어, 뭐 좀 하느라고. 왜"
가영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 목소리였지만, 게임 곧 "나 이력서 수정한 것 좀 도와줘" 하며 부탁을 해온다.
"나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이메일로 보내놔. 어어. 어어"
전화를 끊었지만 아라의 눈빛이 분명히 조금 전과 다르다.
"누구?"
나는 이번에는 아라에게 또 거짓말을 한다.
"아, 가영이라고 아는 여자애있는데, 이번에 취업준비하면서 이력서 좀 봐달라고 해서"
"그걸 왜 자기가 봐주는데?"
"그냥 그나마 내가 대기업 계열사에서라도 일하고 있으니깐"
아라는 무언가 뭐라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그저 "아무 여자한테나 다 잘해주지 마" 하고 한 마디 하고 끝이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 한판 더 하자!"
섹스에 대해 자신감을 찾은 나는 곧 가영에게도 그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섹스는 멘탈스포츠, 라는 명언을 새삼 되새긴 나는 그동안 잃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적인 이유라면 분명히 이번 일을 계기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화 틀어봐"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예전에 가영이와의 플레이 타임이 보통 순수 5분 넘기가 어려웠다면 이번에는 10분 정도를 한 느낌이었다. 뉴 레코드. 그러나 가영을 충분히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플레이 타임이었던 것 같다. 단지 가영도 "오늘 평소랑은 좀 다르네?" 하고 은근하게 물어볼 따름이었다.
"아라야"
"응?"
그 즈음해서 나는 중심을 찾고 싶었다. 연애 3년 차의 여자친구, 가영에 대한 의리와 순정을 떠올렸다. 순간의 탈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아라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자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아도 저런 '미소녀'가 나같은 찌질이를 좋아해준다는 자체가 뭔가 인생에 한두번 찾아올까 말까한 어떤 '기회'라는 생각은 했다. 또 최근들어 왠지 묘하게 관계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 나를 정말 수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영에 대한 서운함이 여기까지 상황을 몰고 온 것이라는 변명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더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느 평일의 밤. 가영이 생리라며 피곤하다고 일찍 자겠다던 그 날 밤, 나는 집에 아라를 불러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 '안전한 날'이라는 말에 더없이 짜릿한 경험까지 해가며. 사실 정말로 정리를 하려고 했다면 그 전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정말 더럽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
아마 아라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을게다.
"왜"
나는 내 진실된 속 마음과 구라를 적당히 섞어서 말했다. 사실 바로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아라 너를 만난 것인데 아직 마음 속에서 그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를 더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개소리를.
"그래"
아라는 슥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준 남자에게 버려지는 순간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혹시 마음 속에서 걔가 정리가 되면, 연락해"
그렇게 문을 나섰다. 아마 문을 나서면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가영이 그 년이 뭐가 좋다고. 맨날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데. 병신. 그냥 갈아타면 되는데. 아니, 근데 그럼 또 나를 바라보며 3년을 참아준 가영이는 뭔데. 그래, 둘 모두에게 미안했다.
아마 보통의 연애담이었다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달랐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속사정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정말로 신선한 남자였던 것이다.
"자아, 묵자 묵자. 내 특제 김치찌개야. 엥? 너 표정이 왜 그래"
"나 남자가 해준 요리 처음 먹어봐. 감동해서"
"엥? 전 남친들은 그런거 안 해줬어?"
"대구 남자들은 주방에도 안 간다고. 그리고 서울 올라와서도 쓰레기 같은 놈들만 만나서"
"에휴, 너도 어지간한 병신 자석이었구나. 병신 같은 남자들만 척척 달라붙는"
…그리고 아라 입장에서도, 차라리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어서 버린다고 했으면 차라리 쉽게 포기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때문이라고 말을 한 만큼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야"
바로 다음 날 새벽. 아라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속옷 속으로 과감히 뻗는 그 보드러운 손길을 나는 뿌리치는 대신 그저 신음성과 함께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양다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명 당시의 내 저울추는 가영에게 기울어 있었다. 지난 3년간이라는 시간의 무게, 함께 전 직장동료로서 일해온 우정의 무게, 실직-백수-어머니의 사고-가영이네 집의 사기 등 함께 이겨내 온 힘든 시간의 전우애가 있었다.
아라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이며 '첫 사랑'에 가까운 어떤 오랜 인연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한들, 또 침대에서 엄청난 순종과 환상적인 속궁함을 보인다 해도 어쨌든 당시의 나는 그저 그녀를 '언젠가는 버려야 할 인연'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기야, 나 오늘도 이 집에서 자도 돼?"
"어어, 그래"
그렇게 일주일에 최소 3~4일은 아라가 내 집에서 자고 갔다. 여자친구가 있는 놈이 자기 원룸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기본적으로 가영은 내 집에 오면 개 냄새가 나고, 개털 때문에 답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곧 아라가 스스로 완벽한 환경까지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나 알바 자리 구했어"
"편의점?"
"응. 심야근무 할거야. 그럼 돈도 1.5배 주지롱!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돼"
"오 대박인데?"
"주 7일 근무라는게 최악이긴 한데, 어쩌겠어"
"엥?"
아라는 그 무렵, 다니던 에이전시 회사를 관두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지나친 격무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관둔 아라는 카드값도 그렇고 월세도 그렇고, 급한 마음에 편의점 심야 알바 자리를 구했다. 물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스케쥴이 드디어 딱 맞춰졌다.
"어, 가영아. 나 일 끝났어. 어어 그럼 너네 집 근처에서 저녁 먹자. 오케이"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일하는 아라는, 집에 돌아오면 정신없이 자기 바빴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그녀가 심야 근무까지 하니 눈을 뜨는 것은 보통 오후 8시~9시 전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가영과 저녁을 먹고 가벼운 커피 한잔을 하고 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면 아예 일찍 집에 와서 아라를 깨우고 저녁을 차려줄 수도 있는 시간이고 말이다.
"아라야 밥 먹자. 내가 밥 차려줄게"
"우응, 응, 오늘 반찬은 뭐야?"
…그렇게 6개월을 살았다. 단언컨데, 당시의 나는 동네 반경 5Km 이내에서 가장 섹스를 많이 한 남자였을 것이다. 아라와 나의 궁합은 환상적이었고-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처럼 미친듯이 즐겼다. 나의 스킬은 뒤늦게 엄청나게 향상됐고 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아라는 받아주었다. …물론 그만큼 내 업보도 쌓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언제나와 같이 섹스를 하고, 노곤한 몸으로 둘이 끌어안고 아라의 출근 전까지 두 시간 정도 잠을 자던 금요일 밤.
"아 왜 전화를 안 받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가영. 그녀는 "오늘 엄마네 집에서 자고 올거야" 라던 말과 달리,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싸워서 그냥 집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맞장구를 쳐줄 남자친구에게 몇 통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 짜증을 폭발시키며 남친의 집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벌거벗은 채 다른 여자와 끌어안고 자고 있던 더러운 남자친구의 모습일 뿐이었다.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
가영은 욕과 함께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고, 나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아라를 뒤에 남긴 채 가영의 뒤를 쫒아나섰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쾌락의 시간은 끝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한 그 순간, 나는 제발 이것이 악몽이길 바라며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 계속 >>
"그쵸? 그냥 제껴도 되죠? 오케이, 오늘 걍 그럼 바로 렙업만 쭉쭉 달린다"
그때 그 시절, 정모의 성지 '민토'에서 우리는 곧잘 정모를 가졌었다.
"페가님 요새 새벽에도 계속 접속해 계시던데"
"저 휴학했걸랑요. 아 근데 모드님 좀 늦으시네, 3시까지 모이기로 해놓고선 지금 거의 4시가 다 되어가는데"
"우리 여기 몇 시까지 예약해놨어요?"
"5시요"
흔한 온라인 게임 동호회의 정모. 키 작고 배 나온, 혹은 키만 멀대같이 큰 멸치, 혹은 키 작은 멸치, 혹은 거북목의 체크남방 입은 돼지들의 그렇고 그런 구질구질한 모임. 그러나 오늘은 묘한 긴장감과 함께 다들 어딘가 '조금은' 멋을 부린 듯한 느낌이 난다. 안경 대신 렌즈를 낀 '페가수스' 상철, 새 유니클로 남방을 사 입은-그러나 XL 스티커를 깜박하고 떼지 않아 조금 망신을 산- 'k86huns' 재훈, 세미정장을 걸친 '랜드로어' 동원, 닥터마틴으로 키를 2cm 키우고 미묘하게 더운 날씨에 가죽재킷을 걸친 나.
"누가 모드님한테 연락 좀 해보세요"
그렇다. 오늘은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모드'가 무려 대구에서 상경해서 처음으로 정모에 참석하는 날. 길드장이었던 나의 지시에 옳다꾸나 동원이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영철이 재훈에게 "님도 아라모드님 연락처 알아요?" 하고 속삭인다. 동원의 전화기 너머로 전화 발신음만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쨘! 늦어서 죄송해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 버스 타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대구 사투리가 살짝 섞인, 애교 넘치는 목소리의 긴 생머리 금발 엘프 여신은 과연 '아라모드'라는 우아한 닉네임에 걸맞는 외모였다. 새하얀 피부에 보조개 쏙쏙 들어가는 얼굴, 큰 눈에 러블리한 목소리. 다들 "우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연창이 곧바로 터져나온다.
…나의 회고에, 아라는 웃었다.
"영호님 기억에서 제가 너무 미화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때 최고였어요. 솔직히 편견 있잖아요. '이쁜 여자가 게임을 왜 해?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랑 놀지' 같은. 근데 제 그 고정관념을 처음으로 깬 게 아라님이었어요"
과거 이야기는 우리 둘의 관계를 매우 빠르게 진전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다음 말에 나는 어떤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당시에 저도 기대 하나도 안 했거든요. 게임동호회 남자들 다 뻔하니까. 근데 영호님 처음 보고 조금 두근두근했어요. 맨날 게임 속에서만, 그리고 게시판에서 글로만 봤던 분이었으니까. 근데 생각 이상으로 좀 괜찮았던? 그리고 더 놀랬던 건, 지난 주에 봤을 때, 엄청 시간이 자났는데도 전이랑 비교해서 하나도 안 변한거에요.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
그도 그럴 것이 그 몇 년 사이 가영을 통해 나름대로 가꾸어진 나였으니까.
"하하, 부끄럽네요"
지난 주, 아라와의 첫 데이트 이후 근 일주일만에 나는 또 그녀를 만났다. 가영에게는 "승준이 좀 만나고 올게" 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말이다. 두번째 데이트 역시 영화, 밥, 카페의 코스였다.
"저 공포영화 좋아하는데"
"아 그래요? 마침 잘 됐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보다는 호러SF 영화였다. 하지만 깜짝깜짝 놀라는 장면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놀랄 장면도 아니었지만 일부러 잡았다. 보드라운 손.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 5년 전 또래들 사이에서 '엘프' 칭호를 가졌던 여자의 손.
솔직히 말해 그 순간부터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온 신경이 아라의 손에 다 가있었다. 아라는 내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영화 재밌었죠?"
나의 어색한 질문에 아라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더니, 영화관을 나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내 손 계속 잡고 있었어요?"
아무리 내가 찌질이라고 해도, 이미 가영과의 오랜 연애로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통달한 나였다. 구태여 어설픈 변명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서요"
아라는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말해 첫 데이트 때 어느 정도 간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간이 맞는다. 아니 더 졸이면 오히려 짤 판이다. 그녀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만나요. 오늘부터"
조금은 낯 간지러운 말. 아라는 영화관 옆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 담배 피워도 괜찮죠?" 하고 묻는다. 아라가 담배를 피우는지는 몰랐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요"
아라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말했다.
"좋아요. 솔직히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요. 근데 우리 이제 말 놓는걸로?"
"그래"
나 역시 뛸듯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첫 데이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릿 속에서 가영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어쨌든 기뻤다.
가면 : 2화
"그래서 둘이 뭐했어?"
전화기 너머 가영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간만에 만나서 둘이 고기 구워 먹었지. 아 근데 승준이 그 새끼 요즘 영 컨디션이 별로더라고"
"왜?"
"계약직 끝나고 이제 정규직 전환시켜준다고, 분명히 지난 달까지 그렇게 말해놓고선 이번 달에 갑자기 그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거야. 부장 새끼가. 그래서 빡돈거지"
"와 그 회사 미쳤네. 근데 그런 회사 많대 요즘에"
"그러게.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있더라고 그런 회사"
사실은 며칠 전에 전화로 주고 받은 이야기. 그게 어느새 승준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영은 곧 "나 네일 했어. 사진 봐봐" 하면서 카톡으로 이미지를 보냈다.
"오 이쁘다"
하지만 가영의 긴 손가락과 화려한 네일아트를 보면서도, 나는 수수한 아라의 그 보드라웠던 손을 떠올렸다.
"뭐야 반응이 시큰둥한데? 별로야?"
리액션의 크기에도 민감한 가영. 나는 서둘러 "아니, 이쁘다고. 근데 내가 뭐 네일이 이쁜지 어떤지 아나" 하면서 둘러댄다. 가영은 "확!" 하고 군기를 또 잡더니 "내일 우리 뭐해?"하고 묻는다. 뭘하면 좋을까.
"영화볼까"
그러나 의외로 영화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다.
"뭐 볼건데"
"공포영화"
공포영화라는 말에 가영이 놀랜다.
"왠 공포영화? 나 공포영화 싫은데"
"아냐, 재밌어. 아니 재밌대"
"알았어"
순순히 오케이 하는 가영. 나는 아라와 함께 본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게 혼란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의 '발각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 재미 하나도 없잖아. 무섭기만 해. 기분만 찝찝해. 공포영화 좋아하는 변태들이 제일 싫어"
"그러게"
나는 시큰둥하게 가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한 오후 4시 반.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운동하러 가자"
"응? 운동? 니가 왠일로"
당시 '운동'은 가영이 나에게 섹스를 먼저 제안할 때의 은어였다. 계산해보니 700일 이래로 근 석 달만의 제안이었다.
"가자. 오늘 날씨 덥잖아.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쉬자"
"좋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가영과의 섹스가 뜸해졌었다. 물론 언제나 섹스에 굶주렸던 나는 항상 그녀와의 관계를 원했지만 가영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섹스를 기피했었고, 언젠가 내가 정색을 했던 날 그녀는 더욱 더 그 이상의 정색을 해왔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아…"
나는 조루였다. 삽입으로 3분 넘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초조한 마음에 오히려 애무도 더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몸만 달구어 놓고 본 게임에서 못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더 오래 하려고 머릿 속에서 천천히 숫자를 세보기도 했고, 아예 실제 허리 흔드는 속도를 줄이기도 해봤고 체위를 자주 바꾸기도 해봤지만 역시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몰려오는 쾌감에 금방 사정을 했고 그렇게 어색한 타이밍, 아쉬운 순간에 끝난 이상 나는 묘하게 그녀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가영아"
"알았어, 어휴"
그래도 아직 팔팔하던 시절이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동이 걸리면 2차전을 뛰기도 했지만 어느새 가영이와의 만남도 3년 차에 접어드는 상황이었던만큼 재시동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냥 됐고, 영화나 보자. 아까 사온 과일 좀 씻어줘"
"어"
대실 시간 3~4시간 중에 애무와 본 게임, 뒷처리까지 다 합해 30분도 안되는 짧디 짧은 해피타임이 지나가고 우리는 정말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영화로 시간을 떼웠다. 가방 속에서 울리는 아라의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은 채로.
"자기야, 혹시 강아지 키울 생각 없어?"
죽었다 깨나도 나에게 애칭 같은 것을 사용한 적이 없는 가영과 달리, 사귀기로 한 직후부터 나를 '자기'로 부르는 아라.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개는 귀찮잖아. 그리고 원룸에서 어떻게 개를 키워. 못해"
하지만 아라는 몇 번이고 권했다.
"근데 진짜 이런 개 없다니깐? 아는 오빠가 키우다가 갑자기 유학가게 되어서 분양하게 된 강아지인데, 너무 똑똑하고 절대 안 짖어. 그리고 똥오줌도 너무 잘 가리고, 막 귀찮게 조르지도 않아. 이런 개는 정말 없어"
"아 참"
…그렇게 딱 2주일만 시험삼아 길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반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똑똑하고 착한 개가 있을까. 구르라면 구르고 춤추라면 춤추고, 이건 정말 천재견이었다. "리모콘" 하면 리모콘을 입에 물고 오는 이 사랑스러운 요크셔에게 나는 흠뻑 빠졌다. 가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얘 진짜 똑똑하다. 근데 어디서 난거야?"
"어? 아아, 그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아는 오빠가 유학가게 됐다고, 분양할 곳 찾다가…"
"아는 여자애? 누구?"
"지민이라고 있어"
"지민이?"
"거 왜 예전에 내가 재훈이가 뭐 물어보다가 싸대기 맞고 친해진 애 얘기 한번 했잖아"
"아아, 그 도끼병? 근데 니가 걔를 어떻게 알아?"
"아 그냥 재훈이 통해서 분양할 사람 찾다가 나한테까지 순번이 온거지"
"그래. 나는 또 아는 여자애라고 하길래 뭔 소린가 했지. 여튼 배변패드 사왔어"
"올, 고마워"
가영이는 처음에 잠깐 의심을 했지만 순간적으로 적당히 잘 둘러낸 덕분에 더이상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여자의 촉. 어설프게 '아는 여자애' 라는 단어 하나에 갑자기 깊게 파고 든다. 이후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은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주말이 되자 아라가 우리 집에 반디를 보러 온다며 강아지 간식 이만큼과 함께 찾아왔다.
"자기야, 우리 둘둘이건데, 반디 주려고 내가 이만큼 가져왔어"
"오, 넘 좋다"
아라는 내 방을 휘 둘러보다가 "방은 작은데 그래도 디게 아늑하다. 우리 집은 투룸이라서 집은 큰데, 룸메가 넘 집을 엉망진창으로 써서 오히려 생활공간은 더 좁은 느낌이야" 하면서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아라야"
"응?"
사귀기로 한 지 9일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에로틱한 키스를 이어나갔다. 내가 찌질했던 어떤 시절, 혼자 속으로만 짝사랑했던 여자. 그런 여자와 몇 년 뒤 인연이 되어 나누는 야한 키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흥분을 불러왔지만 마음 속 한 켠에서 큰 불안함과 미안함을 유발했다. 조루에 대한 걱정.
"왜 안 서?"
너무 그 불안이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영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을까. 나의 성기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당황했을 아라는 나에게 웃으며 물었다. 뭐랄까…불안과 의심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면 어쩌면 더 위축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라는 여유있게 나의 팬티를 벗기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아…"
환희의 순간,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채 3분을 넘기기 힘들었던 가영과 달랐다. 아라와 할 때는 20분이고 30분이고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도 곧바로 부활하는 나의 쥬니어. 그래, 이게 섹스지. 이거였지. 근 십여년 전의 첫 경험 때도 그랬다. 그래, 나는 원래 조루가 아니었다. 심인성 조루. 무언가의 압박, 스트레스, 관계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상하관계에 의한 위축. 그 모든 것이 나의 멘탈을 흔들었고, 나는 그렇게 작아졌던 것이다.
"사랑해 영호야"
흥분이 채 식기 전,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라. 그녀는 가영과 달랐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에게 은근한 애정을 눈빛에서부터 발산하고 있었고, 계속 나에게 멋지다, 좋다, 잘한다 등의 칭찬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표현하는 사랑.
"나도 우리 애기 사랑해"
닭살 돋는 말. 가영과의 관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응"
"근데 나 어떻게 하지? 나 또 흥분했는데?"
"또? 너 진짜 변강쇠 아니니"
수컷으로서 그보다 기분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침대에서 네 번의 사랑을 나누고, 더워서 냉장고를 연 순간 나는 책상 한 켠에 놓아둔 무음의 내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 중 전화 네 통. 가영이었다. 사실 나는 아라가 강아지 간식만 주고 바로 갈 줄 알고, 따로 가영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두지 않았었다. 즉, 이러다가 가영이 혹시라도 우리 집에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첫 전화는 무려 45분 전에 왔었다. 혹시 모른다. 그녀가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인지도. 그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참 미련하게도,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가영아"
다른 여자의 이름에 이번에는 아라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느껴진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분명히 아까에 비해 작다.
"어어, 뭐 좀 하느라고. 왜"
가영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 목소리였지만, 게임 곧 "나 이력서 수정한 것 좀 도와줘" 하며 부탁을 해온다.
"나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이메일로 보내놔. 어어. 어어"
전화를 끊었지만 아라의 눈빛이 분명히 조금 전과 다르다.
"누구?"
나는 이번에는 아라에게 또 거짓말을 한다.
"아, 가영이라고 아는 여자애있는데, 이번에 취업준비하면서 이력서 좀 봐달라고 해서"
"그걸 왜 자기가 봐주는데?"
"그냥 그나마 내가 대기업 계열사에서라도 일하고 있으니깐"
아라는 무언가 뭐라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그저 "아무 여자한테나 다 잘해주지 마" 하고 한 마디 하고 끝이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 한판 더 하자!"
섹스에 대해 자신감을 찾은 나는 곧 가영에게도 그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섹스는 멘탈스포츠, 라는 명언을 새삼 되새긴 나는 그동안 잃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적인 이유라면 분명히 이번 일을 계기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화 틀어봐"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예전에 가영이와의 플레이 타임이 보통 순수 5분 넘기가 어려웠다면 이번에는 10분 정도를 한 느낌이었다. 뉴 레코드. 그러나 가영을 충분히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플레이 타임이었던 것 같다. 단지 가영도 "오늘 평소랑은 좀 다르네?" 하고 은근하게 물어볼 따름이었다.
"아라야"
"응?"
그 즈음해서 나는 중심을 찾고 싶었다. 연애 3년 차의 여자친구, 가영에 대한 의리와 순정을 떠올렸다. 순간의 탈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아라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자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아도 저런 '미소녀'가 나같은 찌질이를 좋아해준다는 자체가 뭔가 인생에 한두번 찾아올까 말까한 어떤 '기회'라는 생각은 했다. 또 최근들어 왠지 묘하게 관계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 나를 정말 수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영에 대한 서운함이 여기까지 상황을 몰고 온 것이라는 변명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더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느 평일의 밤. 가영이 생리라며 피곤하다고 일찍 자겠다던 그 날 밤, 나는 집에 아라를 불러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 '안전한 날'이라는 말에 더없이 짜릿한 경험까지 해가며. 사실 정말로 정리를 하려고 했다면 그 전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정말 더럽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
아마 아라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을게다.
"왜"
나는 내 진실된 속 마음과 구라를 적당히 섞어서 말했다. 사실 바로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아라 너를 만난 것인데 아직 마음 속에서 그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를 더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개소리를.
"그래"
아라는 슥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준 남자에게 버려지는 순간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혹시 마음 속에서 걔가 정리가 되면, 연락해"
그렇게 문을 나섰다. 아마 문을 나서면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가영이 그 년이 뭐가 좋다고. 맨날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데. 병신. 그냥 갈아타면 되는데. 아니, 근데 그럼 또 나를 바라보며 3년을 참아준 가영이는 뭔데. 그래, 둘 모두에게 미안했다.
아마 보통의 연애담이었다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달랐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속사정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정말로 신선한 남자였던 것이다.
"자아, 묵자 묵자. 내 특제 김치찌개야. 엥? 너 표정이 왜 그래"
"나 남자가 해준 요리 처음 먹어봐. 감동해서"
"엥? 전 남친들은 그런거 안 해줬어?"
"대구 남자들은 주방에도 안 간다고. 그리고 서울 올라와서도 쓰레기 같은 놈들만 만나서"
"에휴, 너도 어지간한 병신 자석이었구나. 병신 같은 남자들만 척척 달라붙는"
…그리고 아라 입장에서도, 차라리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어서 버린다고 했으면 차라리 쉽게 포기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때문이라고 말을 한 만큼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야"
바로 다음 날 새벽. 아라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속옷 속으로 과감히 뻗는 그 보드러운 손길을 나는 뿌리치는 대신 그저 신음성과 함께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양다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명 당시의 내 저울추는 가영에게 기울어 있었다. 지난 3년간이라는 시간의 무게, 함께 전 직장동료로서 일해온 우정의 무게, 실직-백수-어머니의 사고-가영이네 집의 사기 등 함께 이겨내 온 힘든 시간의 전우애가 있었다.
아라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이며 '첫 사랑'에 가까운 어떤 오랜 인연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한들, 또 침대에서 엄청난 순종과 환상적인 속궁함을 보인다 해도 어쨌든 당시의 나는 그저 그녀를 '언젠가는 버려야 할 인연'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기야, 나 오늘도 이 집에서 자도 돼?"
"어어, 그래"
그렇게 일주일에 최소 3~4일은 아라가 내 집에서 자고 갔다. 여자친구가 있는 놈이 자기 원룸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기본적으로 가영은 내 집에 오면 개 냄새가 나고, 개털 때문에 답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곧 아라가 스스로 완벽한 환경까지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나 알바 자리 구했어"
"편의점?"
"응. 심야근무 할거야. 그럼 돈도 1.5배 주지롱!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돼"
"오 대박인데?"
"주 7일 근무라는게 최악이긴 한데, 어쩌겠어"
"엥?"
아라는 그 무렵, 다니던 에이전시 회사를 관두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지나친 격무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관둔 아라는 카드값도 그렇고 월세도 그렇고, 급한 마음에 편의점 심야 알바 자리를 구했다. 물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스케쥴이 드디어 딱 맞춰졌다.
"어, 가영아. 나 일 끝났어. 어어 그럼 너네 집 근처에서 저녁 먹자. 오케이"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일하는 아라는, 집에 돌아오면 정신없이 자기 바빴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그녀가 심야 근무까지 하니 눈을 뜨는 것은 보통 오후 8시~9시 전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가영과 저녁을 먹고 가벼운 커피 한잔을 하고 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면 아예 일찍 집에 와서 아라를 깨우고 저녁을 차려줄 수도 있는 시간이고 말이다.
"아라야 밥 먹자. 내가 밥 차려줄게"
"우응, 응, 오늘 반찬은 뭐야?"
…그렇게 6개월을 살았다. 단언컨데, 당시의 나는 동네 반경 5Km 이내에서 가장 섹스를 많이 한 남자였을 것이다. 아라와 나의 궁합은 환상적이었고-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처럼 미친듯이 즐겼다. 나의 스킬은 뒤늦게 엄청나게 향상됐고 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아라는 받아주었다. …물론 그만큼 내 업보도 쌓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언제나와 같이 섹스를 하고, 노곤한 몸으로 둘이 끌어안고 아라의 출근 전까지 두 시간 정도 잠을 자던 금요일 밤.
"아 왜 전화를 안 받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가영. 그녀는 "오늘 엄마네 집에서 자고 올거야" 라던 말과 달리,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싸워서 그냥 집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맞장구를 쳐줄 남자친구에게 몇 통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 짜증을 폭발시키며 남친의 집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벌거벗은 채 다른 여자와 끌어안고 자고 있던 더러운 남자친구의 모습일 뿐이었다.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
가영은 욕과 함께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고, 나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아라를 뒤에 남긴 채 가영의 뒤를 쫒아나섰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쾌락의 시간은 끝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한 그 순간, 나는 제발 이것이 악몽이길 바라며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