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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박이야? 진짜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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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숫제 비명에 가까운 선아의 악. 나 역시 "별거 아니라고! 그냥 잠깐 재미로 한거야, 10만원도 안 했어" 하고 말해보지만 입 다물고 있는 것만 못하다. 결국 집안 살림이 이것저것 아주 골고루 박살이 나고 아랫집에서 신고한 경찰이 출동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된다.

"죄송함다"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간신히, 경찰 출동에 구경나와 나를 벌레보듯 쳐다보는 아파트 같은 복도의 동네 사람들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고 나는 그렇게 현관문을 닫는다. 후. 이미 이틀밤을 새며 꾼들과 밤새도록 달린 나는 죽도록 피곤하다. 선아와의 싸움까지 견뎌낼 체력과 정신머리는 없다. 바로 네 시간 전, 1억 3천까지 올려놓았던 도박빚을 마지막 한방으로 역전시켜 제로로 만들고 심지어 두둑하게 재미까지 본 이 세기의 도박사, 리빙 레전드 오원욱의 전설을 어디 알릴 곳이 없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

"뭐야"

잠시 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내 앞에는 커다란 캐리어에 백팩까지 맨 선아의 모습이 보인다. 잠에 취한 나는 "뭐냐고" 하고 목소리를 다시 높여보지만, 선아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 그저 "잘 살어" 하는 한 마디와 함께 문을 나섰다. 잡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잡을 낯이 없었다.




원점 




장담컨데 선아만큼 나를 좋아해 준 여자는 없다고 확신한다. 아닌 말로다가 여자가 남자한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준 여자다. 마음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거면 된거다? 아니. 내츄럴 본 쓰레기인 나는 바람까지 피워댔다. 한번은 다른 년을 임신, 낙태까지 시켰다. 솔까 내 애 아닌 것 같긴 해도, 어쨌거나. 안다. 어쨌든 나는 답 없는 쓰레기라는거. 얼마든지 욕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제 3자가 들어도 욕 나올 그런 나같은 개쓰레기를 정작 당사자인 선아는 이해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도 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거든. 알랭 들롱이 그랬다던가. 온갖 바람을 다 피우고 다녀도 여자들이 이해해주고 줄줄히 따랐다고? 근데 그건 알랭 들롱의 이야기다. 그 놈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잘 생겼지만 나는 그게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라 선아는 내 도박빚 6천을 갚아주고 차를 사주고 오갈 데 없어진 나를 동거까지 시켜줬다. 세상 다시 없을 성녀다. 성녀. 물론 나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건 아니고.




"갈 데 없으면 여기서 당분간 살아도 돼"
"정말요?"
"사고만 안 치면"

정확히 13년 전. 우리는 채팅앱으로 만났다. 모처럼 가랑이 사이 간질간질하던거 싸게 좀 풀 요량으로 조건만남 방을 열고 기달렸는데 나온게 바로 선아였다. 근데 암만 인간매립지 오원욱이래도 딱 봐도 민짜, 그것도 좀 놀게 생긴 애도 아니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미안해요" 연발하는 애는 '이거 아차하면 좆되겠는데?' 싶어 고대로 스돕하고 자세히 캐물어봤다. 역시나 그거였다. 쓰레기 애비의 개지랄 피해서 가출한 불쌍한 핏덩이. 나와 같은 부류의 짐승이다. 타고난 개악질은 아니고, 본성은 괜찮은데 환경이 폐끕이라 인생 좆된 애들.

"야, 밥이나 먹자"

떡은 집어치우고 그냥 옆 앞 맥데리아 햄버거를 사줬다. 세상 천지에 나는 싸구려 새우버거를 그리 맛나게 쳐먹는 애는 지금도 본 적이 없다.

"야 그러다 체해, 미친 년아. 안 뺏어먹을테니까 천천히 먹어. 쪽팔려 븅신아. 하나 더 사줘? 뭔 거렁뱅이처럼 쳐먹어 기집애가"
"미안해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그렇게 이 아이를 신주단지처럼 소중히 보살피고 지켜줘가며 오늘날까지 데리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당빠 아니다. 나도 생각은 있어서, 아는 형님 때문에 즐겨 다니던 바닷가이야기 게임장에 취업을 시킬라고 그랬던거다. 일단 팔다리가 길쭉길쭉한게, 사이즈는 좀 나왔거든.

"야, 와꾸 나오네. 거봐, 이거지"
"저 근데 진짜 이런 데서 일해도 되요?"
"안되는게 어딨어. 야, 현재그룹 정병철은 니 나이에 현재그룹 세웠어"
"진짜요?"
"아 따지지마, 대충 그렇다고"

대졸 초임 애들이 어중한한 중소기업 들어가서 월급 180만원 받고 일하던 시기에 나는 선아를 게임장에 취업시켜서 260에 팁까지 추가로 받는 일자리를 소개시켜 줬다. 물론 그리고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핑계 하에 150을 떼갔고, 나는 그걸 요긴하게 생활비로 썼다. 선아가 좀만 더 약아 빠졌어도 그냥 그 담달에 튀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가 멍청한건지 착한건지 나한테 그리 돈을 상납하면서도 걔는 내 곁에 있었다. 하기사 지가 튀면 그런 돈을 어디가서 벌겠으며 또 누가 재워줄까. 나보다 더한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닌 결국 중졸이네?"
"오빠는요"
"나? 난 고퇴지"
"뭐래, 그게 그거지"
"그래도 나는 3학년 2학기 때 짤렸던 거지만 니는 이제 2학년 올라가는건데 완전 끕이 다르지. 군대로 치면 병장이 의가사 전역한 거랑 일병이 탈영한 수준의 차인데"

당시만 해도 나는 그저 한달에 말밥이나 한 30만원 주고 다니는 칠칠이였다. 온갖 도박 종류를 다 좋아하긴 해도, 쩐이 없어서 뭐 제대로 판에 끼지도 못하고, 그냥 제법 그렇게 순수하게 놀았다.

그러니까 선아가 열심히 벌어서 나한테 떼이는 백오십 중에 삼십은 말밥 주고 이십은 술담배로 날리고 오륙십은 떡치는데 쓰고 나머지는 밥 쳐먹는데 썼다. 물론 나 혼자 먹는거. 가끔 잔돈 생기면 그걸로는 머리 파마하고 옷 사입고. 그리고 진짜 생활비는 선아가 벌어오는 돈으로 우리 둘이 먹고 살고.

"근데 너는 나 안 무섭냐? 딱 봐도 난 존나 쓰레긴데"
"안 무서워요"
"나 여자들 그냥 막 따먹고 바로 버려. 세 번 떡치는 애가 없어. 레알 폐급 괴물이야"
"조룬가 보네"
"뭐?"

선아는 생각보다 빠르게, 스펀지처럼 좍좍 이쪽 세계 스타일을 흡수했다. 애교도 배웠고, 화끈한 말발과 너끈한 넉살도 갖췄다. 어설픈 동네 똥양아치인 내가 멋적을 정도로.  

"이제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알바해야지"

선아가 일하던 업장이 단속으로 문을 닫았다. 아는 사람 통해 구왕동쪽에 있는 다른 가게에 취업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소문이 좆같아서 안 보냈다. 물장사 권유해서 팔아 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돈이 안되요"
"원래 그런거야 븅신아"

한달에 근 300만원을 훨씬 넘게 벌던 선아는 생각보다 편의점 알바 일에 적응을 잘 못했다. 월 300 넘게 벌다가 꼴랑 60 받고 일하려니 어디 일할 맛이 나겠는가. 그렇다고 민짜를 술장사 보낼 수는 없었고, 마침 눈에 들어온게 전화방이었다.

"야, 이게 좀 좆같긴 한데, 어차피 니는 나랑 살면서 오염되서 어지간한 폐급 더러운 이야기는 좆도 아닐거야"
"아 제발 말할 때 그 놈의 좆 좀 그만"
"오케이, 그래. 바로 그거라고"

암만 해도 바닷가 이야기만큼의 효율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활비 만큼은 벌어올 수 있는게 선아였다. 게다가 꾸준히 일 잘한다고 사장님한테 30만원씩 추가금까지 받아왔다. 선아는 전화방에서 2년을 더 일했다. 남들은 좆같아서 하루하고 관두는 곳을.

"야 근데 그 사장님이 너한테 집적댈라고 돈 더주는거 아냐?"
"사장님 여자에요"
"아 그래? 존나 착한 여자네. 돌싱? 이쁘냐? 오빠가 한번 들이대볼까?"
"환갑 넘었어요"
"시발. 잠깐, 아아! 그 너 데려다 줬을 때 그 존나 독하게 생긴 아줌마가 사장이야? 난 그때 거기 뭐 아래 다방 아줌마가 알바 뛰러 올라온 줄 알았네. 그랬구만"
"근데 더 놀라운거 사장님이 간드러지는 목소리 하면 아저씨들 완전 미쳐요"
"그 바닥이 원래 그래. 나 저번에 세방이 새끼랑 놀았던 노도 아줌마 있잖아, 어째 와꾸가 묘하게 애매하다 싶었는데 목주름이 시발이라 물어보니 옘병 나이가…"

어쨌거나 선아가 벌어오는게 생활비였고, 그 돈으로 반지하 월세방에서 우리 둘의 기묘한 동거가 유지되는 거였다면 내 직업은 좀 쌩뚱맞은 거였다. 아니, 나 답다고 해야되나. 하우스 뽀이였다. 선아 앞에선 뭔 달건이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렸지만 실상은 딱 그 수준.

"야, 욱아 니 오늘 함 낄래?"
"제가요?"

가끔 팁이나 좀 받고, 쓰레기들 뒤 좀 닦아주고 그게 일상이었다. 근데 내가 하우스의 패밀리들하고 좀 선을 두면서도 가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가 하우스 사장 아들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아들이 사람 하나 반 병신 만든거 대신 죄 뒤집어 쓰고 학교까지 잘려준 의리있는 시다바리.

"아이다 댔고, 오늘 먼저 가봐라"
"예"

나는 학교 다닐 적에, 용범이와 친하게 지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똘만이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친구였다. 집이 도박장 하우스 운영하는 새끼였으니 우리 또래가 뭐 나이다스 신발 한 켤레에 벌벌벌 떨 때에 이미 안마를 다닌 애다. 그 옆에서 콩고물도 많이 떨어졌고, 그래서 시다바리 노릇까지 해가며 잘 같이 다녔는데, 어느날 용범이랑 그 애비 새끼가 하루는 나를 불러다 놓고 제안을 해왔다.

"용범이가 사고를 하나 쳤는데, 딸내미 하나를 반 빙신 만들어 가지고…"
"원욱아"

이 병신새끼가 별 이유도 없이 길가던 여자애를 후드려 까고 얼굴을 아예 갈아버렸단다. 대신 그 조건은 현찰 3천. 같이 일하는 건달 애들한테 떠넘기면 되는거 아니냐니까 걔들이 들어가면 일이 커지고, 또 여자애가 자기한테 가해한 사람이 교복 입은 학생이라는걸 아는 상황이라 구라도 어설프게 칠 수가 없는 것이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솔직히 나야 일이 어긋나도 초범이고, 당장 돈이 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라 간경화 투석에 돈이 지랄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학교에서 잘리고 보호처분 8호, 소년원 20일 처분을 받았다. 소년원에서 나온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은 돈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나는 소년원에서 나온 뒤로도 요 하우스에서 꽤 오래 일을 했다. 삼촌들도 내가 의리 있는 새끼라고 다들 좋아했다.



"이 오빠가 얼마나 귀신 같은 감을 가진 줄 아냐?"
"뭐 맨날 돈 잃으면서"
"야, 아홉 번 잃어도 한번 따면 싹 본전 복구하는게 내 스타일이야"

언제 한번 선아랑 같이 경마장에를 갔었다. 그리고 그 날이 내 인생의 대박이 트인 날이었다. 선아가 이름만 보고 건 똥말이 쌍승대박이 터져 만마권이 됐다.

나는 당장 하우스부터 관뒀다. 사유는 적당히 데리고 다니던 여자애를 임신시켜서, 걔네 집에 데릴사위 들어간다는 핑계였다. 사실 혹시 막 무슨 건달들 관둘 때처럼 무섭게 잡을까봐 좀 센 핑계를 댄건데, 다들 낄낄대며 돈까지 쥐어주며 좋게좋게 보내줬다. 은근히 시원섭섭했다. 그리고 더이상 엮이기 싫기도 했고 집값도 더 싼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기천만원, 솔직히 지금 눈으로 보면 전혀 큰 돈이 아니지만 적어도 떼깔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돈이다. 특히 그건 남자보다 여자한테 더 크게 작용한다. 선아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바꿔봤다. 새삼 선아가 여자로 보였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근 3년을 내 옆에 있어준 여자라는걸. 물론 그에 대한 내 첫 반응은 동물적이었다.

"야, 마셔"
"오빠 나 취했어요"
"아 마셔"

그렇게 데리고 잤다. 

"혹시 나 처녀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뭐래 븅신이. 설마 처녀였으면 그걸로 나 옭아맬라고 그랬냐?"
"아니요, 뭐래 진짜. 븅신은 지가 븅신이네"
"너 은근 말이 점점 짧아진다? 야, 한번 잤다고 나랑 뭐 연애라도 하는걸로 착각하면 니 곤란하다? 나 완전 미친 차가운 남자야"
"아 병신"

진짜 웃기기도 한게, 지금 눈으로는 절대 큰 돈이 아닌데, 그때 나는 그게 엄청 큰 돈이어서 막 인심이 엄청 후해졌었다.

"야, 너 검정고시 학원 다녀라"
"왜요"
"뭐가 왜요야. 나중에 니가 자식 낳았는데, 어? 엄마도 중졸이고 아빠도 중졸이면 씨발, 애새끼가 바로 포기하고 저기 달건이들 있는데 생활하러 들어가지 않겠냐? '행님들 안녕하심까, 오늘부터 저 식구 하겠씀돠' 이러면서"
"내가 중졸인건 그렇다고 치고 왜 내 애기 아빠가 중졸이에요?"
"뭐?"
"헐, 오빠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아니 씨발 그냥 예가 그렇다는거지, 뭔 내가 니랑…"

어쨌거나 선아는 그렇게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그 돈으로 면허를 땄고, 한동안 사치도 부렸다. 그리고 커플반지도 했다. 돈 아까워서 18K로.



"오빠 싸인 코싸인이 뭔지 알어?"
"들어봤어"
"뭔데? 말해봐봐"
"아 들어만 봤다고"
"존나 웃겨"
"그럼 닌 로얄 스트레이트 플래쉬가 뭔지 아냐?"
"또 도박 이야기네"

뒤늦게 알았지만 선아가 극도로 혐오하는게 바로 도박이었다. 그 애비가 도박으로 폐인된 케이스라. 그래서 사실 내가 도박장 뒤 봐주고 다니고, 도박으로 돈 다 쳐날리는걸 극도로 혐오했다고 하는데, 그게 연인 관계로 발전되자 점점 태클을 걸어왔다.

"야, 오빠가 어디 잃는거 봤냐"
"어 많이 봄. 진짜 한번만 더 했단 봐. 남은 천만원 싹 다 불태울테니까"

슬금슬금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불과 1년 반 만에. 4천을 더 썼다. 씀씀이가 커지니 돈 나가는게 무서웠다. 선아는 똑똑한 애였다. 검정고시를 금방 떼더니 어디서 경리부기를 배워와서는 시와공단에서 취업까지 했다.

"얼마준대?"
"점심 나오고 저녁 나오고 220만원"
"괜찮은데?"

선아가 점점 사회인으로 성장할 무렵, 그 즈음해서 나는 슬슬 다시 병신병이 도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늦잠 자고 일어나서는 오전 나절 리지니 좀 하다가 나가서 당구장 갔다가 밤에 술 한병 땡기고 들어오는 그런 생활. 물론 역시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선아였고 그 와중에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돈들은 경마로 번 돈들이었다. 게다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질 안 좋은 무리 덕분에 맨날 이기지도 못하는 내기볼링에 빠졌다가 그 후에는 외노자들 끼는 하우스에 끼어서는 결국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오빠 어제 거기 또 갔지"
"안 갔거든?"
"뭐가 안 가. 갔잖아"
"아 씨발 안 갔다고!"

갔다. 사실 이 무렵의 내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정확하게 말하기는 좀 뭣해도 점점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선아를 보며 느끼는 묘한 열등감이랄까, 그런 의식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어제 회식 때 옆에서 낄낄댄 새끼 누구야?"
"아 상무님이라고 말했잖아. 그 분 결혼해서 애가 셋이야. 그리고 대머리야"
"말만 그렇고 젊은 새낀 줄 어떻게 알아"
"아 쫌!"

도박장 가는 걸로 바가지를 긁히면 곧바로 회사에서의 행실이 어쩌고 하면서 선아의 직장생활을 욕했다. 물론 선아가 바람 같은 것을 피우는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반복하던 나의 억지주장은 점점 나 스스로를 세뇌하기 시작했다.

"야, 폰 까봐"
"아 왜 또 그러는데"
"까보라면 까봐"

그리고 또 스스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괜히 행패를 부리고 지랄을 놨다. 심지어 술김에 선아 회사동료한테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선아는 세 번을 이직을 했다. 나 때문에. 내 억지와 내 행패 때문에. 사실 그 즈음해서는 날 떠날만도 하건만 의외로 선아는 어느 시점이 되면 "그래, 오빠 말대로 그냥 관둘게, 알았어" 하며 순순히 회사를 관뒀다. 내 억지에 질리기도 했겠지만, 사실 뒤늦게 듣기로 회사에서의 성희롱과 은근한 추행이 지랄맞은 정도였다고.



"오빠 어제 내 통장 손댔어?"
"어? 아, 어어. 그랬나?"
"제대로 말해. 손 댄거야?"
"조금 빌렸어"

슬금슬금 도박에 잠식되어 가던 나는 어느새 가진 돈을 다 까먹고 도박장에서 빌린 돈으로 도박질을 해댔다. 그때까지도 선아 돈에는 일절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 그 빚이 더이상 감당이 안되자 결국 선아 통장에 손을 댄 것이다. 죽어라 모은 2천만원이었다.

"오빠 그 돈이 무슨 돈인지 알아?"

그냥 막연히 큰 돈 모으려고 모은 돈인 줄 알았다. 내가 멋적게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선아는 그때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었지만 선아는 내 아이를 갖고 싶었단다. 물론 그 이야기 뒤늦게 듣고는 그저 "어린 마음에 했을 법한 생각이네" 하며 무신경하게 흘려 넘겼지만, 속이 꽤 쓰리긴 했다.



그러나 선아 돈 2천으로는 부족했다. 애초에 원금 5천에 한달 이자로만 400만원이 붙는 미친 고리였기에 비상상황이었다. 나는 세번째 협박을 받은 시점에서 그 사실을 선아에게 털어놓았다. 선아는 그 말에 긴 장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그 이틀 후에 삼천만원을 구해왔다.

"너 이 돈 뭔데"
"내 인생 이제 오빠가 책임져야 된다 진짜"
"뭔데"

선아는 내 생각보다 독한 아이였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나와 삶의 결이 비슷한 아이였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사장 새끼가 꽤나 양아치였던 것이, 비지니스랍시고 바이어 상대하는 룸에 선아를 데려 갔었단다. 언니들은 언니들대로 따로 부르고. 바이어가 선아를 맘에 들어하니까 눈으로는 선아를 보면서 옆의 언니들을 주무를 수 있게 배려한 것이었다. 선아 이 등신 같은 년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대신 거기 쳐 앉아있었던 거고.

…어쨌거나, 그 날 그 엽기적인 접대의 현장에서 그 룸의 마담이 대차게 그 자리에서 상황을 웃어 넘기던 선아를 눈여겨 보고 명함을 줬었단다.

"알아. 버리고 싶겠지만, 갖고 있어 봐봐. 너 그 명함 몇 천만원짜리다?"

마담의 예언대로 선아는 결국 근 3개월 만에 그 번호로 연락을 해서, 마이킹을 땡겨 쓴 거다. 세상 어느 미친 가게가 일 시작도 안 한 생초짜한테 그런 식으로 떼주냐고, 그것도 뭔 3천을 해주냐고 혹시 무슨 개막장 업소 같은데 등록한거 아니냐며 내가 더 놀래서 되물었지만 선아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당장 빚부터 갚아" 하며 돈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서워서 선아에게 자세히 묻지 못했다.

"산호아파트 110동 305호요"

그리고 정말로 그 뒤로 나는 그 도박장을 끊었다. 배달 일을 나갔다. 선아는 룸에서 일을 시작했고, 4천 마이킹 빚에 짓눌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22살의 꽃다운 나이와 일찍부터 다방면의 쓰레기들을 골고루 겪은 커리어는 그녀가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왔다.

"힘들지"
"오빠가 더 힘들지"

아직 요령이 없어서 술에 절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안 좋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냥 마사지와 콩나물국이 전부였다. 사실 나도 배달 일이 꽤나 고되었지만 선아한테 하소연할 입장은 아니었다.

솔까 어디 선릉 업소도 아니고 이런 수도권 외곽 룸빵에서 4천 마이킹 잡혔으면 이거 완전 평생 노예계약 아닌가 싶어 겁이 나기도 했지만, 선아는 언제나 내 예상 밖에 있었다.

"이달에만 300 갚았는데?"
"뭐?"

암만 찌질한 동네라도 그 나름의 동네 병원, 한의원, 건물주 등 부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유흥에 있어서 22살에 말 잘하는 동네 이쁜이는 확실히 매리트가 있었다. 물론 사람 욕심이 말 통하면 손 잡고 싶고, 손 잡으면 뽀뽀하고 싶고 뽀뽀하면 떡치고 싶은게 마음이니 2차의 유혹은 항상 있었지만 선아는 그것만큼은 피했고, 오히려 그게 더 할아재들 몸을 닳게 해서 에이스로 자리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단다. 뭐 항상 좋게좋게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오빠 우리 이제 서울로 이사 가자"

선아는 24살의 생일에 그 말을 했다. 왜냐고 심드렁하게 묻자 그녀는 "나 이제 돈 더이상 안 갚아도 돼" 하면서 살짝 눈물을 비쳤다.그 말에 나는 가타부타, 농담도 안 하고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뭐하고 먹고 살면 될까 내 머릿 속에 새로운 고민이 자리 잡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선아가 먼저 말했다.

"나 스카웃 됐어. 우리 돈 걱정하지 말자 이제"

그 무렵해서 선아는 가슴 수술을 하고자 했다. 보통 정상적인 남자라면 여기에서 "뭔 수술이야" 하며 펄쩍 뛰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나는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선아는 피식 웃었다.

"우리 오빠 쿨하네"
"…나 원래 쿨하잖아"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선아는 강남 병원에서 가슴을 키웠고, 그 외에도 무슨 쁘티 시술인지 뭔지를 이것저것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1년 가까이를 그렇게 무탈하게 살았다. 언젠가의 싸움을 하기 전까지는.

"아 지루하다"

리지니를 싹 다 접은 나는 서울에 와서는 꽤 할 일이 없었다. 헬스장에 다니는게 유일한 내 일과였다. 선아는 헬스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수영으로 몸 관리를 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찮게 같이 운동하던 5살 연하 지혜와 친해졌고, 지금의 화려해진 선아와 달리 선아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수수하면서도 톡톡 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묘한 데자부를 느꼈다.

"정말? 오빠 완전 미친 동안이네. 그럼 오빠 여친 있어요?"
"없는데. 왜? 니가 내 여친 해줄라고?"
"와 방금 전 말 완전 아저씨 같았음. 팍 식는다"
"아, 때려치워.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구라치시네"
"사실 쪼끔함"

매일 같이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했다. 어차피 선아는 저녁 시간에 출근하면 전화 안 되는 일이 허다했고, 반대의 경우도 "어 간만에 게임 좀 달리느라. 요즘 랭킹전 시즌이잖아" 하며 대충 넘겼다.



그러기를 석 달. 너무 꼬리가 길었던 탓일까. 언젠가 지혜네 집에서 자고 아침에 들어온 날 무표정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지우며 기다리고 있던 선아는 나에게 물었다.

"오빠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뭐했어?"
"금요일? 몰라? 기억 안 나는데. 왜?"

선아는 피식 웃으며 "맛있는거 먹었는데 왜 기억 못해?" 하며 물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걸렸다는 사실을. 지난 주 금요일은 선아와 초밥집에 간 날이다. 인당 11만원짜리. 나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어, 초밥 먹었어"
"누구랑?"
"여자애랑"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장품병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겨우 피했다. 내가 어지간한 쓰레기짓을 해도 조금 뭐라 하다가 곧 "그래 오빠 말이 맞는거 같다" 하며 이해해주던 선아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듯이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한을 느꼈다. 그저 분해서, 화가 나서 하는 짜증이 아닌, 인생의 회한이 담긴 어떤 그런 분노.

결국 목부터 팔까지 오만 곳을 다 할퀴고, 선아도 손톱이 두 개나 부러지고 그녀 스스로가 탈진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됐다. 할 말이 없었다. 예전과 달랐다. 어느새 나는 선아 하나 덕분에 먹고 사는 놈팽이가 되어 있었고, 선아가 떠난다면 지금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용돈만 200 받는 이 꿈같은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 틀림 없었으니까. 아니 뭐 먹고 살 수는 있을까.

하지만 곧 선아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날 보며 말했다.

"그래, 오빠 용서해줄게"

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어차피 내가 오빠를 무슨 낯으로 욕하겠어. 안 그래?"

내가 주억거리자 선아는 말했다.

"나 요즘 2차 나가"
"뭐?"

반응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짐작은 했다. 애초에 가슴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다. 언젠가는 올 일이라고.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회고해보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결국 나는 여자친구가 몸 팔아서 벌어온 돈으로 다른 여자랑 먹고 자고 한 것이다.

"미안해. 정리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번호 차단걸고 [ 나 여친 있었어. 미안하다. 걸렸다 ] 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선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휴대폰을 뺏어서 바로 창 밖으로 던졌다.

"새 폰 사줄게. 다시는 그러지마"



…보통, 대가리가 멀쩡한 새끼 같으면 거기에서 박수치며 절하고 여친 앞에 조아려 살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 정도의 폐급 쓰레기가 그럴 리가 있는가. 한 6개월을 조신하게 쥐죽은 듯 살았지만, 애시당초 여친이 2차 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멘탈 멀쩡한 새끼가 어디 있겠는가.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여튼 그랬다.

"씨발"

새벽 2시, 3시. 연락이 되지 않으면 가슴이 뛰고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어도 머릿 속에는 선아가 다른 새끼랑 더럽게 뒹구는 모습만 생각났다. 그 돈으로 이렇게 먹고 산다는걸 알면서도. 자제력이 무너진 나는 집안 살림을 다 때려부수었다. 결국 주민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서야 나 혼자만의 파괴적 난동이 진정됐다.

"새로 사자"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선아는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을 흘린게 나다. 쪽팔리게.

그대로라면 나 스스로가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자금은 있었다. 선아는 돈을 잘 벌어왔다. 나는 선아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생각으로 모으는 돈인지는 이미 한번 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돈에 손을 댔다.

"그랬구나"

선아는 두 번 용서해주지는 않았다. 이틀 사이에 3천을 6백만원으로 만들어 온 나를 본 선아는 "일 다녀올게" 하고 다시 나가서는 일주일간 연락을 끊었다. 나도 집 안에만 있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꼴랑 사백을 들고 마카오로 떴다. 도박장에서 만난 괴짜 영일이 아재와 함께.



"니 꼰대네 하우스 때문에 신세 조진 인간이 몇인데, 니가 도박으로 신세 조졌다고 억울해하면 우짜노"
"아 시발 누가 우리 꼰대야. 그 사람 우리 꼰대 아니에요. 친구네 애비지"

그런 말이 있잖는가. 사람은 살면서 몇 번 기회가 온다고. 내 첫 번째 기회가 선아였다면 두번째 기회가 이 영일이 아재다. 나름 잘나가던 중소기업 대표까지 하던 양반이 역시나 도박에 맛들려서 재산 잃고 마누라 잃고 신세 조진 양반인데, 역시나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사람 특유의 근성으로 이번에는 도박을 파서 경지에 오른 양반이다.

나는 전혀 몰라봤는데, 왕년에 용범이 아버지 하우스에서 노름질 하던 양반이 엉뚱한 곳에서 "니 왕년에 그 뽀이하던 아 아이가?" 하면서 알아본거다. 하여간 사업머리 있는 양반들의 눈썰미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일이며 몇 번이나 심부름 했다고 그걸 알아본단 말인가.

"거 얼굴 하나 기억한다고 츤재문, 어림없다. 세상에 츤재들 많다. 많아. 근데 그 머리를 제대로 된데 못 써서 다 망하는기라"

그래, 그리고 그 말에 드디어 기억이 났다. 이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 이유를. 이 사람 타짜다. 근데 기술 쓰는 타짜가 아니라 대가리 굴리는 타짜.

"아저씨 우리 바람 좀 쏘이고 옵시다"
"어데"
"마카오"

그러나 정작 마카오에 도착하자 그는 껄껄대며 내 머리통을 쳤다.

"뭔 소리고. 니 영화 보고 햇소리 하나?"
"못해요?"
"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시스템이 다 막힜다. 먼 70년대 이야기를 하고 있노 모지리야"

카드카운팅이나 뭐 그런거는 이미 옛날 옛적에 다 막혀서 해봤자 손해란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카지노를 수학적으로 보믄 말이다, 목표값을 정하고 1/2 승률을 가진 게임을 골라 잡아 모든 판을 더블업으로 하는게 그게 최적 루트인기라. 쉽게 말해서 연전연승 아니면 오링, 딱 둘이다"
"그거 그거, 그거잖아요. 두 배 두 배 늘려가는거"
"마팅게일 그기 말고, 그냥 무식하게, 오링 아이면 고! 그렇게 간다꼬. 완저히 머 헷까닥한 방식으로다가"
"아 망할"

내가 그 말을 들으려고 꼰대를 비행기까지 태워 여기까지 날아왔단 말인가. 하지만 보람이 없는건 아니었다.

"드 가자, 낸 여기 VIP 카드있다. 닌 내 아들이라 케라"

카지노로 향하며 그가 말했다.

"월래애, 카지노에서 즐대로 손대면 안되는 게임이 바카라야. 와? 이건 절대 못 이긴다카이. 게임 룰 자체가 승률상 젤로 불리하게 맨들어진기다. 근데 유일하게 또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바카라야. 왜냐? 깨끗하게 운영된다는 전제 하에, 유일하게 기술이 필요없는 도박이그든? 목표값 낮춰서 맥시멈 1억 잡고 더블업 계속해서 딱 10배만 뿔려서 가자카이"
"그게 말이 되요?"
"니 가위바위보 열번 연속 이겨 본 적 읍나? 확률 생각하문 하면 안되지. 근데 되는 날이 있다 안 카나? 그기랑 똑같은기라"
"아저씨는 있어요?"
"내는 평생 가위바위보 져 본 역사가 없다. 그리고 이기 그거보다 쉽다카이. 내 믿어라"

…그냥 미친 개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 다 날리면 마카오 앞바다에서 뛰어내릴 각오를 했다. 정말로. 사실 마카오로 간 진짜 이유가 그거였다. 한국에서 자살하면 어떻게든 그 소식이 선아한테 전해질 거 같아서.



"봤제?"

싱긋 웃는 영일이 아저씨. 그는 웃으며 정장 포켓을 두드린다.

"내 평생 소원이 이기 다시 한번 입어 보는 거였던기라. 고맙데이"

그는 이겼다. 오백만원으로 1억 6천을 만들어 냈다. 다섯 판 만에. 그리고 사실 자기 폐암 4기라고 이제 곧 죽을거라며 입을 턴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덤으로 요구한게 그냥 정장 한 벌이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 돈이 무슨 소용이고. 그냥 염할 때 안 쪽팔릴 옷 한벌 마련했으니 난 됐다"
"그럼 이거는 장례비 쓰세요. 육천."
"지랄도, 뭔 피라미드 만들끼가"

현찰 1억을 마련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선아의 집으로. 문을 여는 순간 집이 텅 비어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문을 열자 선아가 있었다. 그것도 내 사진 꺼내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발.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어찌 또 있단 말인가.

"미안하다 선아야"
"밥은 먹었어?"
"아니"
"밥 차려줄게"

항상 그랬다. 나는 그랬다. 살면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떻게든 기회가 생겨났고, 나는 거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삶의 큰 돈을 쥐어 본 나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물론 선아 눈에는 이미 현찰 1억은 별로 큰 돈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나는 필요할 때 돈 만들어 오잖아. 되는 놈이라고."
"정말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
"그래"

그 말을 하고도 나는 바람을 두 번 더 피웠고 도박을 세 번 더 했다. 횟수가 아니라 사람이 두 명이었고, 도박도 횟수가 아니라 큰 판 기준으로.



내 나이 마흔. 선아는 어느새 네일아트 샵의 어엿한 대표가 되었다. 장사도 나름 잘되어 자리를 잘 잡고 있고, 나는 여전히 뻘짓들을 해댔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 선아는 집을 나섰다. 물론 이것 역시 수십 번 겪은 일이긴 한데, 알다시피 매번 겪는 똑같은 일도 어느 순간에는 '이거 아닌데'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오늘이었다.

"후"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선아. 만약 그녀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까놓고 말해서 지금보다 나은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우리 같은 새끼들은 분명히 그런게 있거든. 어떤 굴레에 대한 속박.

이거 하면 좆될텐데, 이 새끼랑 엮이면 안되는데, 하는걸 알면서도 어째 기어코 엮이고야 마는 것. 대놓고 피해도 어느 순간 정신차려 보면 엮여있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팔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선아는 또 어떤 병신새끼 만나서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도 더 좆같은 삶을 살았을거다.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쩌겠냐 시팔"

일어나 잠바를 다시 걸쳤다.




"선아야"

캐리어까지 끌고 나가길래 어디 멀리나 갔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고작해야 집 근처 하천변에 앉아 있었다. 습관인지 직업병인지 단어안 자세로 앉은 뒷모습이 어찌도 그리 처연해 보이는지. 참 마누라한테 못 할 말이다만, 어째 왕년에 한가락 하던 술집 여자들이 은퇴하고 홀로 된 모습들은 하나같이 그리도 안쓰러워 보일까. 누구 말로는 그게 다 업이라던데. 젊었을 때 다른 년들 집구석에서 속 태운 업보라고.

선아는 내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멍하니 물 흐르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나는 굳이 더이상 말을 걸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노을이 다 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선아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오빠 처음 만난 날, 오빠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어쩌면 나와 그리도 같은 생각을 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더 잘됐을거 같지가 않아. 집으로 돌아가서 정신 나간 아버지한테 맞아죽던지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술 팔고 몸 팔던지 둘 중 하나였겠지. 배운거 없는 중졸 여자애가 얼굴 하나 믿고 집 나와서 혼자 뭘 했겠어. 보나마나 뻔한거지"

음.

"그래서 그냥 이제껏 참고 살았어. 다 내 업보고, 그나마 그래도 이렇게 먹고 살고는 있는 것도 다 오빠 덕분이다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나는 그저 묵묵히 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욕심이 생기더라고. 나도 평범하게, 남들처럼 남편이랑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될까, 남편은 도박하고 나는 몸 파는 그런거 말고 말이야. 그래서 가게도 연 거고, 오빠 참 무던히도 달랬던거고. 어떻게 한번에 사람이 바뀔까 싶어서 참고 또 참았던거고."
"이제 못 참겠니"

나는 어렵게 물었다. 선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냥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었다. 속이 텅 비는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못 참지. 그냥 때려죽이고 싶지. 그걸 뭐하러 물어."
"음"
"오빠 두고 내가 떠나서 산다면 지금보다야 낫겠지. 속 썩을 일도 들할테고. 안 그래? 그리고 내가 뭐 쓸만한 남자 하나 못 구하겠어?"

시발.

"오빠는 딱 봐도 아니거든. 돈이 있어 뭐가 있어, 건들건들 양아치삘 나면서도 진짜 건달도 아니고 재주도 없고, 이제 나이 더 먹으면 완전 평생 혼자 골골하다 죽을 팔자지. 끽해야 어디 만나도 못 생기고 다 늙은 멍청한 여자 하나 만나서 둘이 시팔조팔 욕만 하면서 지랄 같이 살겠지"
"야"

담배를 입에 문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도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오빠는 내가 제일 힘들 때 같이 해준 사람이잖아. 그 생각해보니 또 불쌍하더라. 알아서 잘 살면 모르겠는데, 보나마나 거지처럼 살거 뻔하고. 왠지 모르겠는데 그건 싫더라고."
"동정하냐?"
"그리고 뭐 딴 새끼 만난다고 나라고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어. 제일 어려울 때 함께 한 사람 내다 버리고, 다른 남자 만나 살면, 뭐가 그렇게 다를까. 내가 잘나봐야 뭐 얼마나 더 대단한 남자 만나겠으며, 그런 새끼 만난다고 해봐야 몇 년 지나고 애정 식으면 그때도 즐거울까. 그때가서 오빠 웃는 얼굴 생각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 들더라. 모지리 같은 오빠지만, 나보고 맨날 이쁘다고 말해주는건 오빠가 최고잖아"

빙신.

"멍청한 년, 다른 좋은 놈 만나 살면 당연히 행복하겠지. 나보다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또 피식 웃은 선아는 담배를 다시 한번 맛있게 빨더니 아직 반도 안 피운 담배를 던져버린다.

"오빠 들어가자. 오늘 치킨 시켜먹자"

나는 또 주춤 일어서며 캐리어를 잡아들고 짐짓 허세를 부려본다.

"다시 한번 또 나갔단 봐라"
"다시 나가면?"

잠시 할 말을 찾던 나는 어렵게 대답했다.

"다시 찾아와야지. 그거 내 전공이잖아"

깔깔 웃은 선아는 내 팔짱을 낀다.

"그래, 잃으면 다시 따와야지. 맨날 오빠 잘하는게 그거잖아"
"야, 저기 치킨, 네래 치킨 먹을래?"
"맘대루. 사실 난 다 그냥 그래"

이제 간신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나 하는 생각에 한숨 돌리며, 늘어선 가로등 저 너머 언덕 위 우리 집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이번에야말로 손 딱 씻고 진짜 제대로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하는 기약없는 다짐을 다시 품으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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