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5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또 오세요"
불금을 맞이한 강남의 저녁은 인산인해 그 자체다. 11번 출구 올라가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리도록 사람이 미어 터지니까. 편의점 손님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유나씨가 함께 일하는데도 계산을 하기 위해 계속 줄을 설 정도다. 그 와중에도 튀김을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야 한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10시 반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금씩 손님이 줄어간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유나씨도 퇴근하고 이제 혼자 일하는 시간. 이미 손님도 아까의 반의 반의 반. 조금은 한가해진 것을 느끼며 나는 진열을 조금 손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한번 더 들여다본다. 유투브 알람을 설정해놓은 몇몇 BJ의 새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영상을 볼 여유는 없지만, 한쪽 귀에 끼운 에어팟으로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후"
가게 안에서 떠들고 있던 10대 손님들마저 나가고, 이제 간신히 한숨 돌리며 카운터 의자에 털썩 앉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지친다. 시급 천원 더 준다는 말에 이 가게로 옮겼는데 후회가 된다. 너무 빡세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편의점 알바나 한다는 지금 내 처지가. 같은 영어 스터디에 있던 윤정씨가 얼마 전에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서 그런지도. 괜한 짜증이 솟구친다.
"어서오세요"
그 찰나에 들어온 손님들. 금요일 밤, 한껏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다. 번화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작은 보람이다.
"아 목마르다"
"혜미 넌 뭐 마실거?"
"난 제로 콜라"
"야, 그냥 콜라를 끊어"
"아 난 제로 콜라가 제일 맛있엉!"
나는 힐끗 그녀들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지 어느새 9개월째. 나는 아직도 은평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한테는 영어 학원 때문에 겸사겸사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9개월 전의 그 우연한 만남, '수지'와의 인연 때문에 시작한 알바다. 그냥 우연히라도 또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지금에 와서는 포기한 상태로 그냥 정말로 학원 가까워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카톡을 열어본다. 반 년도 넘게 지난 그 날,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한 이래로 수지의 연락은 똑 끊겼다. 주말에 영화 뭐 보냐는 질문, 내일 바쁘냐는 질문, 그리고 세 통의 전화와 무슨 일 있냐는 카톡 등등 내가 보낸 모든 카톡 메세지는 그렇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음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계정과 프로필 이미지. 귀여우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을 가졌던 수지. 그녀는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난 짧게 꾸었던 단꿈에서 그렇게 깨어났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는 여전히 그녀가 살고 있는 강남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술에 꼻은 그녀를 데려다 주러 갔던, 수지네 집 앞까지도 몇 번이나 가서 기다려봤다.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 그러나 참 뭐가 타이밍이 그리도 안 맞았는지 그때마다 수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두려웠다. 만약 마주치더라도, 내가 무슨 명목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까. 잘해봐야 눈치없는 놈, 보통은 스토커일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후로는 한번도 집 근처로 찾아간 적이 없다.
"수지, 넌?"
"난 지그램"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지?'
딱 보면 알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다.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솔직히 긴가민가하다. 이미 반 년도 한참 더 된 일이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 하는 나는 '쟤인가?' 싶으면서도 확신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니 쟤가 맞다 하더라도 내가 뭘 어쩐단 말인가.
"장미나, 아 빨리 골라!"
짜증을 내는 단발머리의 그녀. 목소리 톤에서 조금 더 확신이 들지만 정말 맞을까. 셋은 시끌시끌 떠들더니 곧 카운터로 음료 하나씩을 들고 다가왔다.
"계산해주세요"
"네"
카드를 내미는 단발머리. 원래대로라면 앞에 그냥 꽂으면 된다고 안내하겠지만 굳이 카드를 받아서 슬쩍 이름부터 확인한다. 편의점 형광등 불빛에 힐끔 비친 영문자 JUNG. 그래 맞어. 정수지였지. 맞는 것 같다. 손이 떨린다. 미친 놈, 하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바코드기로 음료들을 찍고 다시 한번 슬쩍 그녀가 내 얼굴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6300원입니다"
그러나 수지는 휴대폰에 눈길이 가 있다. 오히려 그녀 옆의 친구들이 내 굼뜬 동작에 짜증을 내는 느낌. 나는 마음 속 깊이 한숨을 내쉬며 결제를 진행하고, 영수증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흔드는 수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조금 떨리는 내 목소리. 병신 같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근 반 년을 그리워 한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왜? 아니 알아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그녀들이 가게를 떠난다. 아니 그 직전.
"저, 혹시 정수지?"
그리고 내 질문에 셋이 일제히 나를 돌아다본다. 둘은 '너가 뭔데? 얘 이름을 알아?' 하는 황당한 표정, 하나는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
"어?!"
…를 상상해보지만 그저 나는 입도 뻥긋 못한 채 그녀들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문이 닫히며 딸랑~ 하는 소리가 망상 속에서 나를 깨운다.
"수지 넌 어때?"
혜미의 질문에 난 혀를 찬다.
"재미없어. 알잖아, 우리 과 애들 싹 다 병신들인거"
"어? 수지 너 복학했어? 왜?"
"아빠 땜에. 유학가던지 복학하던지 둘 안 하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잖아"
"차라리 유학 오지"
"아 싫어 그것도. 나 예전에 유학 준비하다가 완전 고생한거 몰라?"
"아 맞어. 그랬지 참"
한국에 간만에 돌아온 미나의 생일 때문에 모처럼 강남역에서 만난 우리 셋. 1차로 장원닭갈비, 2차로 YA라운지, 3차로 커피비니에서 배를 가득가득 채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 한다.
"너 그럼 아직도 여기서 자취해?"
"어, 집세는 내는데, 거의 요즘에는 아빠집에서 자. 옆집에 왠 미친 아저씨가 이사왔는데 맨날 밤에 막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 무서워 죽겠어. 집주인한테 말해도, 집주인이 건물에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관리인 아저씨는 경비실에서 10시면 자기 바빠."
"뭐야 그게"
"여튼 그래서 걍 아빠집에서 잘 때가 많아. 주중에는 학교 다니고 주말에는 아빠 갤러리 출근하고"
문득 미나가 묻는다.
"너 아직 재혁 오빠 만나?"
그 말에 혜미가 풋하고 웃는다. 아 짜증나.
"그 새끼랑 끝난게 언젠데. 그 바람둥이 새끼"
그러자 혜미가 부연한다.
"근데 너가 그때 좀 그렇긴 했어. 오빠랑 헤어지면서 그 뭐야, 이상한 찌질이 사진 인스타랑 카톡 프로필에 올리고 막 그때 우리 실시간으로 막 난리났잖아"
"찌질이?"
"뭐랬지? 후보선수? 아아, 선수교체! 막 선수교체라고 태그 쓰면서 남자 사진 올려서 막 우리 난리났잖아. 재혁 오빠에서 실시간으로 갈아탄거냐고. 수지 너 완전 멋있다고"
"뭐래"
미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뭐야, 나만 모르는 대박사건? 나 업데이트 하나도 안 됐어. 빨리빨리 털어" 하면서 보챈다. 혜미는 이야기를 야무지게 정리한다.
"재혁 오빠가, 수지 두고 또 바람 피웠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어"
"뭐? 둘? 세 다리 걸친거야?"
"아니, 쓰리썸"
"헐 대에박!"
미나의 경악에 "조용해 미친 년아" 하고 혜미가 뻥 터지며 입을 막는다.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첨엔 그렇게 수지가 차였거든? 맞지?"
"아니거든?"
"미친 너 차인거 맞잖아. 여튼, 근데 그 다음 날에 수지 얘가 다른 남자를 바로 꼬셔서 인스타에 '선수교체' 라면서 딱 사진 업댓한거야"
"오 뭐야 수지 너 대박 멋있다!"
미나는 연신 내 팔뚝을 내려친다.
"그래서 재혁 오빠 완전 빡쳐서 다음 날 수지한테 와서, 그 재혁 오빠가 막 그 남자 뭐냐고 난리난리 피우고 얘 폰 까보라고 그러고 완전 상난리 피웠어."
"정말? 재혁 오빠가? 그 쿨맨이?"
"어. 그날 수지랑 막 싸우다가 수지 휴대폰 막 던지고 난리 났었대"
"뭐야, 재혁 오빠 완전 찌질이네. 세상 쿨내는 혼자 다 풍기고 다니더니. 그럼 그 새 남자는? 지금도 만나?"
"아니. 그냥 그걸로 끝이지."
…그러고보니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근데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어? 그 새 남자는?"
미나의 질문에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만나서 대충 장난 좀 친거라는 말을 하자니 내가 쓰레기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는 오빠 있어. 아무한테나 돈 막 퍼주는 남자"
처음 만난 날, 아무 꺼리낌 없이 나한테 택시비로 없는 돈 2만원을 아낌없이 퍼준 남자. 맞긴 맞잖아. 혜미는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잘 쓰는 남자가 최고지"
미나는 "야, 너네 진짜 더러워" 하며 빵 터진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조심해서 가"
"어, 우리 쑤, 또 봐"
"응"
카페를 나와 둘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나도 아빠 집으로 가려고 세 번째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뭔가 아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라니 설마설마하던 중에 생리가 터졌다. 아차 싶었다.
'아…'
마침 가방도 바꾼 차에 비상용도 안 챙겨왔는데.
"아…"
어쩔 수 없이 그냥 강남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생리대가 남아있던가? 이미 강남집에 안 들어간지 거의 몇 달 째라 확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들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찐따 같이 생긴 알바생이 날 보자마자 당황스러워 한다. 뭐야. 짜증나게. 설마 뭐 나 좀 상태 이상한가? 싶어서 서둘러 진열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니, 나 오늘 블랙진이라서 뭐 티가 날 것도 없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리대를 집는다. 피곤하다. 계산을 위해 생리대를 올려놓고 지갑을 꺼낸다.
"저기요"
알바생이 말을 건다. 뭔데.
"혹시 수지…씨?"
어?
"나 알아요?"
카운터의 알바생 얼굴을 그제서야 똑바로 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느낌을 받는다. 누구더라. 분명히 본 얼굴인데.
"나에요, 호민이. 고호민. 그, 나 옷 사줬잖아요"
아, 그 찌질이. 아니, '돈 잘 쓰는 남자'.
생각보다 시큰둥한 표정의 수지. 하긴, 그게 정상이지 싶긴 한데.
"아, 잘 지냈어요?"
꽤나 건조한 말투의 그녀. 나는 단박에 아까의 용기가 사그라듬을 느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뭐. 수지씨도 잘 지냈어요?"
"그냥 그랬어요"
어색함 그 자체.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녀가 집어든 물건을 바코드로 찍는다. 아니 그보다, 이거 생리대네. 아, 괜히 말 오래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카드주세요. 얼른 결제해드릴게요"
그리고 그 말에 수지가 피식 웃었다.
"맞어, 이런 남자였어"
"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꼼꼼히 화장을 지운 뒤, 혜미한테 연락했다.
"나 좀 전에 그 오빠 만났어"
"누구?"
"찌질이"
"찌질이? 재혁 오빠?"
"아니이! 그, 선수교체남"
"어? 진짜? 뭐야, 우리 보내고 따로 만난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구, 우연히 만났어"
혜미도 요즘 남자 안 만나지 좀 오래되서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한다.
"그래서? 지금 너네 집에 같이 있는거야? 대박! 꺄!"
"무슨 소리야, 그냥 잠깐 길에서 봤어. 진짜 우연히"
"아! 좀만 늦게 올걸. 궁금하다. 맞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냥 쉬면서 집안 일 돕는다나 봐"
"딱 너랑 같은 과네. 그 오빠는 연애 안 한대?"
"어, 아마도?"
"뭐야 왜 단정을 못 해. 그거부터 물어봐야지"
"됐어"
"여튼, 뭐야 우리 쑤지 그럼 간만에 다시 연애질 하는거? 막 운명의 스트릿 로맨스?"
"됐거든요?"
"야, 너 지금 딱 걸렸어. 우리 딱 보내자마자 남자 만나고, 어? 그 남자 만나고 나한테 바로 자랑하고. 너 완전 이거 딱 너 연애 시작할 때 느낌인데?"
아니,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럴 말로 꺼낼 이유도 없다.
"됐거든? 여튼, 집에 잘 들어간거지?"
"어어 나 이제 씻고 잘래. 안농"
"응"
전화를 끊고, 아까 호민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눈치도 둔한 주제에 묘하게 쓸데없는 곳에서 친절하다. "20원은 안 받을게요" 라며 검은 봉투에 담아주는 것도 그냥 웃기다. 뒤늦게 요즘 정말 잘 지냈냐는 말에 또 신나서 장황하게 말을 하려길래 말을 끊고 번호만 받았다.
[ 찌질이 ] 로 저장을 하려다가 그냥 [ 호민 오빠 ] 로 저장했다. 찌질이로 저장하면 진짜로 이름 까먹을 거 같아서. 사실 성은 이미 까먹었다. 뭐였더라.
"사실 그 뒤에 일이 조금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 미안해요" 라는 나의 사과에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저는 그, 옷이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서 제가 미안했어요" 라며 또 정색하는 그.
"후우"
그냥 요즘 맨날 학교-아빠집-학교-아빠집-갤러리의 뻔한 일상만 보내던 도중 만난 우연한 인연.
"근데 그럼 아까 나 본 거 아니에요? 그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그냥, 좀 말걸기가 그래서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흔하디 흔한 찌질남.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이 남자에게서는 정을 느낀다. 확실히. 뭐지.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순진함에 또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아'
학교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학년 1학기, 기대 속에 시작한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 꼬였다. 첫 MT에서 술기운에 얼떨결에 분위기 맞춘다며 승락하고만 한 머저리의 고백. 술자리에서의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그 헤프닝을, 머저리는 물론이요 과 전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상황.
그 와중에 이어진 몇 차례의 짧은 만남, 그리고 머저리에 의해 황당하게 폭로된 사생활. 어느새 과에서는 '걸레', '오다리' 같은 별명과 눈총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휴학을 하고 떠난 도피성 유학. 물론 그것도 일이 꼬여서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리고 1년 반만의 복학이다. 죽기보다 싫은 복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지금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 때의 첫 사랑 준영을 떠올리는 내가 잠시 싫어졌다.
'또 그런 과에 끌리는거야? 또 찌질이냐고'
카톡 프로필의 이 어이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진부터 그냥 웃겼다. 그게 꼭 싫다는건 아니지만.
보통 같으면 야간 알바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3호선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가겠지만 오늘의 나는 쌩쌩하다. 왜냐하면 강남 편의점에서의 '존버'가 대성공한 셈이었으니까. 결국 수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번호까지 얻었으니까. 기적이었다.
"기적이야 기적"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전철 시트에 몸을 깊숙히 기댄다. 물론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뭐 걔랑 어떻게 진지하게 잘 되길 기대하는 것은 김치국 마시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배추농사부터 미리 하는 짓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좋았다. 괜히.
< 계속 >
불금을 맞이한 강남의 저녁은 인산인해 그 자체다. 11번 출구 올라가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리도록 사람이 미어 터지니까. 편의점 손님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유나씨가 함께 일하는데도 계산을 하기 위해 계속 줄을 설 정도다. 그 와중에도 튀김을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야 한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10시 반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금씩 손님이 줄어간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유나씨도 퇴근하고 이제 혼자 일하는 시간. 이미 손님도 아까의 반의 반의 반. 조금은 한가해진 것을 느끼며 나는 진열을 조금 손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한번 더 들여다본다. 유투브 알람을 설정해놓은 몇몇 BJ의 새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영상을 볼 여유는 없지만, 한쪽 귀에 끼운 에어팟으로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후"
가게 안에서 떠들고 있던 10대 손님들마저 나가고, 이제 간신히 한숨 돌리며 카운터 의자에 털썩 앉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지친다. 시급 천원 더 준다는 말에 이 가게로 옮겼는데 후회가 된다. 너무 빡세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편의점 알바나 한다는 지금 내 처지가. 같은 영어 스터디에 있던 윤정씨가 얼마 전에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서 그런지도. 괜한 짜증이 솟구친다.
"어서오세요"
그 찰나에 들어온 손님들. 금요일 밤, 한껏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다. 번화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작은 보람이다.
"아 목마르다"
"혜미 넌 뭐 마실거?"
"난 제로 콜라"
"야, 그냥 콜라를 끊어"
"아 난 제로 콜라가 제일 맛있엉!"
나는 힐끗 그녀들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지 어느새 9개월째. 나는 아직도 은평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한테는 영어 학원 때문에 겸사겸사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9개월 전의 그 우연한 만남, '수지'와의 인연 때문에 시작한 알바다. 그냥 우연히라도 또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지금에 와서는 포기한 상태로 그냥 정말로 학원 가까워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카톡을 열어본다. 반 년도 넘게 지난 그 날,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한 이래로 수지의 연락은 똑 끊겼다. 주말에 영화 뭐 보냐는 질문, 내일 바쁘냐는 질문, 그리고 세 통의 전화와 무슨 일 있냐는 카톡 등등 내가 보낸 모든 카톡 메세지는 그렇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음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계정과 프로필 이미지. 귀여우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을 가졌던 수지. 그녀는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난 짧게 꾸었던 단꿈에서 그렇게 깨어났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는 여전히 그녀가 살고 있는 강남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술에 꼻은 그녀를 데려다 주러 갔던, 수지네 집 앞까지도 몇 번이나 가서 기다려봤다.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 그러나 참 뭐가 타이밍이 그리도 안 맞았는지 그때마다 수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두려웠다. 만약 마주치더라도, 내가 무슨 명목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까. 잘해봐야 눈치없는 놈, 보통은 스토커일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후로는 한번도 집 근처로 찾아간 적이 없다.
"수지, 넌?"
"난 지그램"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지?'
딱 보면 알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다.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솔직히 긴가민가하다. 이미 반 년도 한참 더 된 일이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 하는 나는 '쟤인가?' 싶으면서도 확신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니 쟤가 맞다 하더라도 내가 뭘 어쩐단 말인가.
"장미나, 아 빨리 골라!"
짜증을 내는 단발머리의 그녀. 목소리 톤에서 조금 더 확신이 들지만 정말 맞을까. 셋은 시끌시끌 떠들더니 곧 카운터로 음료 하나씩을 들고 다가왔다.
"계산해주세요"
"네"
카드를 내미는 단발머리. 원래대로라면 앞에 그냥 꽂으면 된다고 안내하겠지만 굳이 카드를 받아서 슬쩍 이름부터 확인한다. 편의점 형광등 불빛에 힐끔 비친 영문자 JUNG. 그래 맞어. 정수지였지. 맞는 것 같다. 손이 떨린다. 미친 놈, 하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바코드기로 음료들을 찍고 다시 한번 슬쩍 그녀가 내 얼굴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6300원입니다"
그러나 수지는 휴대폰에 눈길이 가 있다. 오히려 그녀 옆의 친구들이 내 굼뜬 동작에 짜증을 내는 느낌. 나는 마음 속 깊이 한숨을 내쉬며 결제를 진행하고, 영수증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흔드는 수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조금 떨리는 내 목소리. 병신 같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근 반 년을 그리워 한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왜? 아니 알아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그녀들이 가게를 떠난다. 아니 그 직전.
"저, 혹시 정수지?"
그리고 내 질문에 셋이 일제히 나를 돌아다본다. 둘은 '너가 뭔데? 얘 이름을 알아?' 하는 황당한 표정, 하나는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
"어?!"
…를 상상해보지만 그저 나는 입도 뻥긋 못한 채 그녀들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문이 닫히며 딸랑~ 하는 소리가 망상 속에서 나를 깨운다.
수지
"수지 넌 어때?"
혜미의 질문에 난 혀를 찬다.
"재미없어. 알잖아, 우리 과 애들 싹 다 병신들인거"
"어? 수지 너 복학했어? 왜?"
"아빠 땜에. 유학가던지 복학하던지 둘 안 하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잖아"
"차라리 유학 오지"
"아 싫어 그것도. 나 예전에 유학 준비하다가 완전 고생한거 몰라?"
"아 맞어. 그랬지 참"
한국에 간만에 돌아온 미나의 생일 때문에 모처럼 강남역에서 만난 우리 셋. 1차로 장원닭갈비, 2차로 YA라운지, 3차로 커피비니에서 배를 가득가득 채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 한다.
"너 그럼 아직도 여기서 자취해?"
"어, 집세는 내는데, 거의 요즘에는 아빠집에서 자. 옆집에 왠 미친 아저씨가 이사왔는데 맨날 밤에 막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 무서워 죽겠어. 집주인한테 말해도, 집주인이 건물에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관리인 아저씨는 경비실에서 10시면 자기 바빠."
"뭐야 그게"
"여튼 그래서 걍 아빠집에서 잘 때가 많아. 주중에는 학교 다니고 주말에는 아빠 갤러리 출근하고"
문득 미나가 묻는다.
"너 아직 재혁 오빠 만나?"
그 말에 혜미가 풋하고 웃는다. 아 짜증나.
"그 새끼랑 끝난게 언젠데. 그 바람둥이 새끼"
그러자 혜미가 부연한다.
"근데 너가 그때 좀 그렇긴 했어. 오빠랑 헤어지면서 그 뭐야, 이상한 찌질이 사진 인스타랑 카톡 프로필에 올리고 막 그때 우리 실시간으로 막 난리났잖아"
"찌질이?"
"뭐랬지? 후보선수? 아아, 선수교체! 막 선수교체라고 태그 쓰면서 남자 사진 올려서 막 우리 난리났잖아. 재혁 오빠에서 실시간으로 갈아탄거냐고. 수지 너 완전 멋있다고"
"뭐래"
미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뭐야, 나만 모르는 대박사건? 나 업데이트 하나도 안 됐어. 빨리빨리 털어" 하면서 보챈다. 혜미는 이야기를 야무지게 정리한다.
"재혁 오빠가, 수지 두고 또 바람 피웠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어"
"뭐? 둘? 세 다리 걸친거야?"
"아니, 쓰리썸"
"헐 대에박!"
미나의 경악에 "조용해 미친 년아" 하고 혜미가 뻥 터지며 입을 막는다.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첨엔 그렇게 수지가 차였거든? 맞지?"
"아니거든?"
"미친 너 차인거 맞잖아. 여튼, 근데 그 다음 날에 수지 얘가 다른 남자를 바로 꼬셔서 인스타에 '선수교체' 라면서 딱 사진 업댓한거야"
"오 뭐야 수지 너 대박 멋있다!"
미나는 연신 내 팔뚝을 내려친다.
"그래서 재혁 오빠 완전 빡쳐서 다음 날 수지한테 와서, 그 재혁 오빠가 막 그 남자 뭐냐고 난리난리 피우고 얘 폰 까보라고 그러고 완전 상난리 피웠어."
"정말? 재혁 오빠가? 그 쿨맨이?"
"어. 그날 수지랑 막 싸우다가 수지 휴대폰 막 던지고 난리 났었대"
"뭐야, 재혁 오빠 완전 찌질이네. 세상 쿨내는 혼자 다 풍기고 다니더니. 그럼 그 새 남자는? 지금도 만나?"
"아니. 그냥 그걸로 끝이지."
…그러고보니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근데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어? 그 새 남자는?"
미나의 질문에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만나서 대충 장난 좀 친거라는 말을 하자니 내가 쓰레기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는 오빠 있어. 아무한테나 돈 막 퍼주는 남자"
처음 만난 날, 아무 꺼리낌 없이 나한테 택시비로 없는 돈 2만원을 아낌없이 퍼준 남자. 맞긴 맞잖아. 혜미는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잘 쓰는 남자가 최고지"
미나는 "야, 너네 진짜 더러워" 하며 빵 터진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조심해서 가"
"어, 우리 쑤, 또 봐"
"응"
카페를 나와 둘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나도 아빠 집으로 가려고 세 번째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뭔가 아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라니 설마설마하던 중에 생리가 터졌다. 아차 싶었다.
'아…'
마침 가방도 바꾼 차에 비상용도 안 챙겨왔는데.
"아…"
어쩔 수 없이 그냥 강남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생리대가 남아있던가? 이미 강남집에 안 들어간지 거의 몇 달 째라 확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들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찐따 같이 생긴 알바생이 날 보자마자 당황스러워 한다. 뭐야. 짜증나게. 설마 뭐 나 좀 상태 이상한가? 싶어서 서둘러 진열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니, 나 오늘 블랙진이라서 뭐 티가 날 것도 없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리대를 집는다. 피곤하다. 계산을 위해 생리대를 올려놓고 지갑을 꺼낸다.
"저기요"
알바생이 말을 건다. 뭔데.
"혹시 수지…씨?"
어?
"나 알아요?"
카운터의 알바생 얼굴을 그제서야 똑바로 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느낌을 받는다. 누구더라. 분명히 본 얼굴인데.
"나에요, 호민이. 고호민. 그, 나 옷 사줬잖아요"
아, 그 찌질이. 아니, '돈 잘 쓰는 남자'.
생각보다 시큰둥한 표정의 수지. 하긴, 그게 정상이지 싶긴 한데.
"아, 잘 지냈어요?"
꽤나 건조한 말투의 그녀. 나는 단박에 아까의 용기가 사그라듬을 느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뭐. 수지씨도 잘 지냈어요?"
"그냥 그랬어요"
어색함 그 자체.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녀가 집어든 물건을 바코드로 찍는다. 아니 그보다, 이거 생리대네. 아, 괜히 말 오래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카드주세요. 얼른 결제해드릴게요"
그리고 그 말에 수지가 피식 웃었다.
"맞어, 이런 남자였어"
"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꼼꼼히 화장을 지운 뒤, 혜미한테 연락했다.
"나 좀 전에 그 오빠 만났어"
"누구?"
"찌질이"
"찌질이? 재혁 오빠?"
"아니이! 그, 선수교체남"
"어? 진짜? 뭐야, 우리 보내고 따로 만난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구, 우연히 만났어"
혜미도 요즘 남자 안 만나지 좀 오래되서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한다.
"그래서? 지금 너네 집에 같이 있는거야? 대박! 꺄!"
"무슨 소리야, 그냥 잠깐 길에서 봤어. 진짜 우연히"
"아! 좀만 늦게 올걸. 궁금하다. 맞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냥 쉬면서 집안 일 돕는다나 봐"
"딱 너랑 같은 과네. 그 오빠는 연애 안 한대?"
"어, 아마도?"
"뭐야 왜 단정을 못 해. 그거부터 물어봐야지"
"됐어"
"여튼, 뭐야 우리 쑤지 그럼 간만에 다시 연애질 하는거? 막 운명의 스트릿 로맨스?"
"됐거든요?"
"야, 너 지금 딱 걸렸어. 우리 딱 보내자마자 남자 만나고, 어? 그 남자 만나고 나한테 바로 자랑하고. 너 완전 이거 딱 너 연애 시작할 때 느낌인데?"
아니,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럴 말로 꺼낼 이유도 없다.
"됐거든? 여튼, 집에 잘 들어간거지?"
"어어 나 이제 씻고 잘래. 안농"
"응"
전화를 끊고, 아까 호민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눈치도 둔한 주제에 묘하게 쓸데없는 곳에서 친절하다. "20원은 안 받을게요" 라며 검은 봉투에 담아주는 것도 그냥 웃기다. 뒤늦게 요즘 정말 잘 지냈냐는 말에 또 신나서 장황하게 말을 하려길래 말을 끊고 번호만 받았다.
[ 찌질이 ] 로 저장을 하려다가 그냥 [ 호민 오빠 ] 로 저장했다. 찌질이로 저장하면 진짜로 이름 까먹을 거 같아서. 사실 성은 이미 까먹었다. 뭐였더라.
"사실 그 뒤에 일이 조금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 미안해요" 라는 나의 사과에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저는 그, 옷이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서 제가 미안했어요" 라며 또 정색하는 그.
"후우"
그냥 요즘 맨날 학교-아빠집-학교-아빠집-갤러리의 뻔한 일상만 보내던 도중 만난 우연한 인연.
"근데 그럼 아까 나 본 거 아니에요? 그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그냥, 좀 말걸기가 그래서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흔하디 흔한 찌질남.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이 남자에게서는 정을 느낀다. 확실히. 뭐지.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순진함에 또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아'
학교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학년 1학기, 기대 속에 시작한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 꼬였다. 첫 MT에서 술기운에 얼떨결에 분위기 맞춘다며 승락하고만 한 머저리의 고백. 술자리에서의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그 헤프닝을, 머저리는 물론이요 과 전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상황.
그 와중에 이어진 몇 차례의 짧은 만남, 그리고 머저리에 의해 황당하게 폭로된 사생활. 어느새 과에서는 '걸레', '오다리' 같은 별명과 눈총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휴학을 하고 떠난 도피성 유학. 물론 그것도 일이 꼬여서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리고 1년 반만의 복학이다. 죽기보다 싫은 복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지금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 때의 첫 사랑 준영을 떠올리는 내가 잠시 싫어졌다.
'또 그런 과에 끌리는거야? 또 찌질이냐고'
카톡 프로필의 이 어이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진부터 그냥 웃겼다. 그게 꼭 싫다는건 아니지만.
보통 같으면 야간 알바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3호선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가겠지만 오늘의 나는 쌩쌩하다. 왜냐하면 강남 편의점에서의 '존버'가 대성공한 셈이었으니까. 결국 수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번호까지 얻었으니까. 기적이었다.
"기적이야 기적"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전철 시트에 몸을 깊숙히 기댄다. 물론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뭐 걔랑 어떻게 진지하게 잘 되길 기대하는 것은 김치국 마시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배추농사부터 미리 하는 짓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좋았다. 괜히.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