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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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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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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발자유화

중학교 시절, 남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머리길이 규정에 대해 꽤나 엄격했다.

종종 아침 등교시간에 난데없이 진행되는 두발단속. 교문 앞에 서있던 학생주임과 담당 교사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죽 살펴보다가 '학교에서 규정한 길이 이상의 앞머리, 옆머리를 한 학생을 발견하면' 그를 불러 그 자리에서 바리깡으로 앞머리부터 정수리를 지나 뒷머리까지 그대로 죽 밀어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고속도로를 낸다'고 부르며 웃곤 했다.

머리카락을 죽 밀려버린 학생은 당연히 하루종일 친구들과 다른 교사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다음 날 스포츠 스타일을 넘어 사실상 반삭발 상태로 머리를 밀고 와야한다. 단속하는 교사에 따라, 단속당한 학생의 평소 이미지에 따라 다소간의 '깊이 차이'는 다를 수 있으나 어쨌거나 일단 '고속도로'를 당하면 그렇게 몇 달을 인내의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 특히 졸업앨범에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서너달 전부터 머리길이를 길게 관리하던 내 친구 동철이는 몇 차례의 경고를 끝에 결국 '본보기'로 그렇게 머리를 박박 밀렸다. 그는 반삭발로 졸업앨범을 찍게 되었다. (여담으로 녀석은 졸업앨범을 받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애시당초 '두발길이 단속을 통해 학생들을 그 본연의 본분에 맞는 행실로 계도한다'라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방식도 그 실효성에 큰 의문이지만 설령 그걸 인정하더라도 두발단속에 그토록이나 강한 억지력을 동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 놈의 '계도'와 '반 강제로 머리를 밀어야 했던 학생의 감수성'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평소에 꽤나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녀석이 주말에 미용실을 가지 못한 죄로 머리가 죽 밀리고는 이후로 꽤나 교사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된 케이스'처럼 두발단속의 원래 목적과 결과가 완벽히 주객전도 된 케이스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결론을 내면 좋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두발단속'에 참여한 교사들의 입장이다. 학생들의 머리를 그렇게 죽 밀어버리며 그들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1. 비록 내가 이 학생에게 욕을 먹을 지언정, 이 아이를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나는 녀석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다.
2. 요놈 봐라 요놈, 내 그러니까 전부터 머리카락 규정대로 잘 자르고 다니라고 했지? 낄낄낄 요 놈아 시원하냐?
3. 뒷머리가 규정보다 0.5cm 기네? 그러니 고속도로 내야겠네

…등등등,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바리캉을 들고 사춘기 소년들의 머리카락에 접근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중에 3번에 가까운 이가 있다면, 그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실효성, 그리고 그 부작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고민을 했으며 어떤 논리로 바리깡을 쥔 손에 힘을 주게 되었을까.



2. 절대악 논쟁

대학교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임 모는 꽤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남들은 대학 내내, 아니 평생 한번 건드려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두꺼운 인문학 서적들을 기꺼이 탐독하는 소위 '골방철학자' 같은 이미지를 가진 이였다. (때문에 실제로 만나보았을 때는 의외로 평범한 외모에 오히려 조금 실망했을 정도로)

그는 종종 뜬금없는 철학적 질문(?)을 나에게 던지곤 했는데, 한번은 "절대악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분명히 극단적인 악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절대악'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순수한 악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양면성을 갖기 마련인데 그 양면 모두에게 절대적 악으로 규정지어지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고, 시대와 사상에 따라서 한때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될 때도 있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두를 초월해 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역시 어려우며, 극단적인 악인이나 악행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따라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하며, 하다못해 '반면교사'로서도 그 가치가 극소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는데 과연 그 모든 관계와 조건에서 순수히 악으로 규정되는 절대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역시 그의 취향에 맞춘 다소 철학적인(?) 답변을 했다. 그 사이사이에 '살인-전쟁터에서의 전투, 왕조시대의 가치-민주주의 시대의 가치, 역사 속 끔찍한 악인으로 손꼽히는 이들에 대한 의외의 면모' 등등을 언급하면서. 사실 나는 그의 의견 역시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철학을 좋아하는 이답게 굉장히 다각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사고를 감안하건데), 의외로 그 반대였다.

"저는 절대악의 존재를 믿습니다"

나는 혹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그건 또 아니란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고, 그는 몇 가지의 '우리나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몇 가지 집단-종교, 정치 등의-'을 그 예로 들었다. 사실 깊이(?)에 개인적으로 조금 실망했는데, 굉장히 깊이 있는 어떤 철학적 의견을 기대했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들은 사실상 일반론이었다. '그들은 이러이러한 잘못들을 저질렀으므로 절대악이다' 같은.

그가 내놓은 주장들은 물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부정평가였으므로 당연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평소 언행과 사상에 비추어 보건데 "절대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조금 과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단어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토론의 기본 문제를 환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절대악'이라고 단언한 집단들이 종종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만 놓고 보아도 이미 절대악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부연해서.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이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도 결국에는 큰 거악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절차이므로 악행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무슨 그들이 만화 속 악당도 아니고 정말 순수히 악행만을 위해 집단을 구성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네가 말하는 '거악'조차도 그저 단순히 사상적, 종교적 입장차이일 수 있고, 또 그런 이유로 그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한다면 그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절대선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서 결국 그 지점부터는 옳고 그름을 논하기 어려운 어떤 사상논쟁으로 흐르게 되어 이야기가 공전하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조금 아쉬운 흐름인데(차라리 '보여주기식 선행을 정말 악행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같은 부분에서의 논쟁이 더 흥미로웠을것 같아서), 어쨌거나 어떤 이상론적 관점에서의 절대악이 아니라 실존하는 집단을 절대악이라고 규정짓고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은 꽤 깊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의외로 그런 이들이 매우 흔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나이 먹고 깨달았을 때는 더 충격이었다.



3. 책임의 문제

몇 년 전의 일인데, 신문 귀퉁이에 실린 한 칼럼 기사였던 것 같다. 평생을 교회의 전도사로서 활동하며 수백 명의 지인들과 행인들을 교인으로 만든 이의 이야기였다. 그랬던 그가, -보통의 케이스와는 정 반대로- 인생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종교의 무의미함을 느끼고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단다. 당연히 종교 활동은 접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회의주의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생 말년의 그 모습은 보통의 나였다면 "그래, 그게 맞는거지" 하고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가 평생동안 교회로 이끈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의견이 궁금한 한편으로 조금 화까지 났다.

'평생동안 옳다고 믿어온 어떤 행동을 인생 말년에 완벽하게 뒤집는' 모습 그 자체는 보통의 용기로는 하기 어려운-다들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홀가분해진 듯한 그 모습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가 끌어들인 수백 명의 교인들에 대해서는 굴레를 씌운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가 아무리 인도했다고는 하나 결국 교인이 되는 것은 그 본인들의 선택이었을테니 책임을 무겁게 지우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 다단계나 어떤 잘못된 사상의 집단의 경우였다면? (물론 다단계는 보통 아예 엿 먹이려고 인도하는 것이니 조금 옳은 예가 아닐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본인조차 너무나 완벽하게 넘어가서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경우들도 있으니까)

본의 아니게, 혹은 한때는 큰 확신을 갖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며 행해왔던 일들이 뒤늦게 보았더니 그렇지 않았을 때, 그 지나온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교회로 이끈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교회 믿지 말아라" 하고 권유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된다면 처음에 교회를 권유할 때 행한 권유는 터무니 '있는' 행위였을까.



4. 악인과 그들의 결과물


종종 인성과 능력이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 경우들을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본다. 가까운 예로 '능력은 좋은데 성격이나 인성은 개차반인 직장 동료나 지인'들의 모습 같은.

나는 그들이 다소 밉상이고 속으로 쌍욕을 할 지언정, 결과물이 썩 괜찮다면 그 능력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만큼은 인정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더 나아가서는 정치인이나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도 보통 그렇게 평가하는 편인데, 이에 대해 질색팔색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꽤 많이 보았다.

"네? 이번에 XXX, 그 사고친거 몰라요? 완전 쓰레기잖아요!"

그러한 반응에 대해 나는 "아니 그건 아는데, 그 인성이 쓰레기더라도 이 노래 자체는 좋지 않아요?" 하고 되물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에 더 이해가 어렵다며 정색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음악이나 문학처럼, 어느 정도 취향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그 제작자 자체가 싫어졌다면 결과물도 같이 싫어질 수 있다는 심정적인 부분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더 나아가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도 그 '쓰레기'의 기준이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추한 모습(소아성애 논란이 있는 간디부터,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품들을 남겼지만 사생활에서는 불륜이나 각종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예술가들, 우리의 일상을 위대하게 만든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의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을 감안해보면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라는 주장은 간단히 반박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쓰레기로 욕을 먹는 이들의)사고치기 전 인기와 작품에 대한 평가(순위 등)"를 감안해보면 역시 "쓰레기가 만들어서 쓰레기인데 왜 예전에는 그렇게 인기를 끌었대요?" 하고 되묻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 생각하노라면 또 '제품의 문제가 아닌, 기업 그 자체나 제품 외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불매운동' 같은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사회정의' 같은 개념을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그 질색팔색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단지, 그 질색팔색의 범위가 너무나 주관적이며 자기편의적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뿐이다.



5. '옳음'에 대한 이야기

여지껏 인터넷에서 본, 가장 공감하면서도 역시 그 이행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댓글 중의 하나가 이거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져도, 때로는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도 좀 해보고 남의 말도 진지하게 들어보고 해야 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더욱 더"

사실 나는 거의 모든 인간사 논쟁과 세상의 갈등이 저 문장들로 간단히 정리된다고 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라는 말처럼(딱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그 어떤 주장이라도, 억지나 의도적인 왜곡이 아닌 한, 진실되게 목소리 높이는 주장이라면 분명히 그 나름대로 최소한의 당위는 갖고 있다고 본다.

누군가들의 주장과 의견이 정말 터무니 없고 미친 소리 같아도, 내 의견을 잠시만 내려놓고 곰곰히 듣고 있다보면 분명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최소한 '그렇게 된 이유'라도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뭐, 그러한 당위가 결국 목소리와 행동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도 많지만)

게다가 '스스로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저들보다 정의롭다고 생각할수록', '내 주장이 그들의 주장보다 더 가치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할수록' 정말 그것이 그러한가에 대한 반문은 더욱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맹목(盲目)의 우에 빠져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드는 나의 모습만큼 추한 것도 드무니까. 마치 이 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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