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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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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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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를 만나기 두 달 전 즈음, 나는 사실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우리 그만하자"
"뭘?"
"그만 만나자"

모처럼 집 근처에 생긴 파스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함께 산책한 직후에 내가 한참을 주억거리다 어렵게 꺼낸 난데없는 이별 통보. 가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글쎄. 뭐라고 이유를 말하면 좋을까.

가영이 너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우리 집안 형편상, 멀리 생각해보아도 아무래도 결혼은 틀린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는 연애가 힘들어서?
이제 이런 힘든 연애 관두고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아라와 만나고 싶어서?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던 나는 "너 나 안 좋아하잖아" 하면서 힘없이 웃었다. 무어라 잔뜩 퍼부을 준비를 하는 듯 하던 가영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닫으면서 "참 나" 하면서 할 말을 열심히 찾는 듯 했다.

솔직히 힘든 연애였다. 애정의 농도가 다르고 표현의 강도차이가 현격했으며 내 스스로 보아도 그녀가 나와 진지하게 미래를 꿈꾸는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은 그런 연애. 혼자 애쓰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서운해하는 그런 외톨이의 연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말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그래서 헤어지자는거야?"

나의 긴 한숨은 긍정의 답을 대신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던 내 자신에 대한 배려였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나를 조금 더 아껴주기로 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나 바닥만 보고 있었을까.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예쁜 가영이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머릿 속에 새겨두고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영이는 두 눈 가득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가면 : 3화







아라와 벌거벗고 자던 것이 걸린 그 순간, 나는 츄리닝 바람에 옷도 간신히 걸친 채로 밖으로 나갔다. 가영이는 큰 길을 향해 저 앞에서 울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영아"

하고 부른 순간 돌아본 그녀의 모습은, 몇달 전 그 모습과 참 똑같았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르다 못해 줄줄 흐르는 그 모습.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가영이 말했다.

"개새끼야"

그리고 가영이 눈물을 닦고 똑바로 말했다.

"왜 그랬어 왜!"

차라리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변명을 했다. 그것도 최악의 변명을.

"너 나랑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인 줄 알아? 아, 지난 달에 잔거 빼고. 그 이전에 말이야. 기억 나? 난 기억도 안 나."
"뭐?"
"나도 기억 안 나. 너 나 안 좋아하잖아. 나도 힘들었어, 힘들었다구. 나도 사람인데, 혼자만 하는 연애 같은거, 감당하기 힘들어. 그래, 나 쓰레기 맞고 인정하는데, 너도 잘한거 없어. 나 최선을 다했다고 너한테. 근데 너는 아니었잖아. 저번에 내가 먼저 처음으로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니가 수백번도 넘게 헤어지자고 하던거 매번 붙들고 빌던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 그때 뭐랬니. 이제는 너가 잘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 하나도 안 바뀌었어. 나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바람을 피운거야?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그래, 사실 그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니었지. 하지만 나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렇게 쓰레기 같은 자기합리화를 시도했고, 가영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변명이라기보다…"

그때 손에 들고 나온 휴대폰에서 아라의 전화가 울렸다. 그것을 본 가영은 "약!" 하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서 바닥에 던져 깨버렸다.

"야…"
"뭐!"

박살이 난 휴대폰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찰나, 저쪽에서 아라가 힘없이 걸어왔다. 나와 가영 모두가 이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상황에 얼굴을 쓸어내리는 순간, 아라는 처음으로 가영에게 말을 걸었다.

"가영씨,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당황스러웠다. 그래, 가영이야 뭐 그렇다고 쳐도, 아라는 날 뒤도 안 보고 버릴 줄 알았다. 그렇잖는가. 자기는 세컨드였던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아. 혹시 가영에게 나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건가.

"너는 무슨 말을 또 하려고? 니가 왜 끼어드는데"

그러자 아라가 세상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더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가영도 아라와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은 당연히 아니었겠지.

"하"

가영은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젓고는 큰 길 직전의 골목 한 켠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나와 아라 모두 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곧 차에 올라 시동을 건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아라와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넌 꺼지고, 너 여기 타. 이야기 좀 해"

나에게 타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라는 "가영씨, 나도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요" 하고 가영에게 부탁했다. 가영은 "넌 다른 남자 뺏은 더러운 년 주제에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미친 년이 진짜. 야, 너 안 타?" 하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라를 한번 흘낏 보고 차를 향해 걸어가자 이번에는 아라가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저 차 타면 나랑 끝이야"

선택의 기로. 아라도 가영도 나를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가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가영의 차를 타지 않았다. 최악의 순간에서 떠오른 이기적인 생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양다리를 걸친 이상, 나는 당연히 그 둘 모두를 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그녀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주어진 기회에서 나는 조금 더 실리적인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간단했다. 가영의 성격상, 내가 바람 피운 것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야 아라에게만큼은 뺏기기 싫어서 나와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아마 감정이 진정되면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반 년간 붙어 지내면서, 아라는 나에게 줄곧 말해왔다. 자기가 만났던 남자 중에 내가 최고라고.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 뭐가 좋냐고 자조적으로 미안함을 내비쳤으나 아라는 그저 좋다고 했다. 뭐, 다 떠나서 만나서 지난 6개월간 반 동거하며 지낸 상황이니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가장 뜨거울 때 아니겠는가. 한번 정도는 용서 받을 수도 있을거라는 철저히 확률적인 생각으로 아라의 곁에 섰다.

"… …"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가영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였으리라. 근 3년 가까이, 강아지처럼 자신만을 철저히 바라 보아주고 참아주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던 남친이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당연히' 자신의 차에 탈 줄 알았던 그가 다른 여자 곁에서 겸언쩍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선을 긋는다니.

가영은 끝내 울음을 다시 한번 터뜨리며 차를 몰고 큰 길로 나갔고, 그 와중에 나는 또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하며 그녀를 걱정했다. 아라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이야기 좀 해"




방으로 돌아와 나는 아라에게 지난 3년 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라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저번에, 아니 처음에. 나랑 잘 때 전화와서 이력서 봐준다고 했던 여자애. 걔가 가영이었지?"
"어"

아라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아 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고맙다니 뭐가. 그저 내 품에 기대는 아라가 고마웠다. 그리고 가영이에 대한 미안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저녁, 약간의 야근으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라는 이미 편의점 출근을 하고 난 이후였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를 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혼란스럽고 피곤했다. 양다리는 끝났다. 나는 아라를 골랐고, 나는 청춘의 순정을 바쳤던 가영을 그렇게 놓아버렸다. 허무했다.

'흐'

참 징하게 힘들었던 연애였다. 아니 '힘들었다'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 즐거웠지만 바로 그렇게 너무 즐거웠기에 힘들었다. 나는 가영이 곁에만 있어도 좋았고, 가영이가 한번 웃어주면 너무 행복했다. 내가 그 어떤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 가영이가 맛있게 먹는게 좋았고,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그렇게 그저 마냥 걔가 애틋하게 좋았다.

진심을 준 상대였다.

바로 그래서 더 힘들었다. 가영이가 화를 내면 나는 사과하기 바빴고, 설령 억울하고 서운한게 있어도 내가 한번 더 참고 혼자 스트레스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영이를 잃는게 두려웠고, 그녀에게서 버려질까봐 걱정됐다.

헤어지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나에 대한 마음이 깊지 않았던,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리 미덥지 않은 남자였던 나는 그녀에게 '아쉬운' 남자였을테니.

그리고 매번 나는 매달렸다. 앞으로 잘하겠다, 노력하겠다, 내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고, 지나간 시간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자 했던 시간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정으로 달랬고 울음으로 매달렸다. 자존심도 뭐도 없었다. 그저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내가 그리 많은 연애를 해보지 못했기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호구의 연애, 바보의 연애. 밀당은 커녕 오로지 퍼주기 바빴던 연애. 물론 어느 순간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면 참으로 허무했던 그런 연애. 혼자만의 연애. 참으로 지독한 마음 고생을 계속했던 연애.

그랬던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사실 아라와 본격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기로 한 순간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영과도 결코 좋은 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나도 알았으니까.

"후우"

피곤했다. 습관처럼 로그인을 하고, 메일함에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영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무슨 내용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열람했다.




지금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사실 나는 모르겠어.
그저 끝없는 악몽을 꾸는 듯한 어둠 속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야.
어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너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혼자 미친사람처럼 뜬 눈으로 이렇게 하루를 보냈어...

그리고 문득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마치 그 모든 일들이 꿈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어.
이거 정말 꿈 아니냐고.

너무 늦은 것이 아니냐고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제서야 나는 너를 바라보아. 진심으로.
너 어제 "나랑 언제 잠 잤는지 기억이나 나느냐"고 물었지? 그래.
정말 그랬더라. 내가 너를 너무...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아.
알아. 그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것도. 마음적으로든 뭐든.
너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많은 기억들... 그 기억들이 너무 후회스러워.

다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너가 지금의 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고 믿어서 그랬어.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이 어둠의 터널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어.
너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 니가 걔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나타나지 않아도 좋아. 이 편지를 지워도 돼.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아.

너와 꼭 마무리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이번 주말에라도....




인터넷 창을 끄고 나는 끅끅 거리며 울었다. 가영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메일을 썼을지를 생각하자 내 마음까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친 놈, 머저리. 정신나간 새끼. 나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일요일 오후 2시에 만나자고 답장을 보내 약속을 잡았다. 이번 주는 마침 아라가 일하는 편의점의 여자애 하나가 관두는 바람에 주말에도 풀타임으로 근무하기로 한 것이라 시간도 딱 좋았다.

일요일 2시.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놓고는, 나는 방청소를 시작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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