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힙한 공유오피스에 사무실을 얻었다. 물론 독립 사무실도 아니고 그냥 임자 따로 없이 테이블만 빌리는 것인데 월 35만원의 비용은 조금 애매한, 아니 분명 비싼 감이 있기는 했지만 칙칙한 동네 사무실을 떠올려면 이 곳은 너무나 멋지고 힙한 곳이었다.
'게다가'
커피도, 맥주도 공짜라는 점에서 충분히 돈 값 한다고 느꼈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맥주 두 컵만 마셔도…'
그렇게 애써 합리화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고 멋진 설비도 설비였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였다. 아니 그 사람들 그 자체였다. 어디 뉴욕이나 LA 어딘가의 글로벌 사무실에서 일할거 같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에어팟에 스타일리시한 패션, 애쉬 염색을 하고 흥겹게 몸을 흔들며 맥북으로 열심히 무언가의 일들을 하는 모습들은 과연 멋짐 그 자체였다. 이렇게 힙한 곳에서 이렇게 힙한 사람들과 힙하게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35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나 패스트워크스페이스에 사무실 잡았어"
여친 주리한테 자랑했다. 여친은 "정말?" 하며 놀라워했다. 사실 여친 성격상 시큰둥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아는 언니도 거기에서 서너달 정도 잠깐 일했었대. 엄청 멋있는 곳이라면서. 오빠 부럽다" 하면서 부러워했다. 더 신이 났다.
조금 우습고 허세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괜히 거기에 찌질한 모습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살까 말까 고민하던 에어팟도 사고 신발도 사고 나 역시 최대한 멋을 부리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 반, 의외로 밤에 비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적었다. 하긴,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형 인간보다는 저녁형 인간들이 더 많겠지 하고 생각했다.
"음"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려니 확실히 신나고 좋긴 한데 집중력이 떨어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아 맞다 공짜지!' 하는 생각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그냥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자 마음 먹고 그쪽으로 걸어가니 아직 오전인데도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는 잘생긴 또래 하나가 보인다. 옷 차려입은게 그야말로 이 공유 오피스의 화신 같다. 스타일리시하다.
"어, 못 보던 분인데. 새로 계약하신거에요?"
놀랍게도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규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여기 강남점이 생기자마자 입주해서 벌써 1년 넘게 일을 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나고 했더니 디자인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는 잡스럽게 이 일 저 일 다 한다고 했다. 로고 디자인부터 웹디자인, UI, UX까지 다. 실력이 어마어마하신 거 같다고 하니 사실은 실력은 쥐뿔 없고 그냥 엄청 빨리 일을 쳐내주는 바람에 오래 거래하면서 일거리 던져주는 분들이 좀 있을 뿐이란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자그마한 소품 관련 쇼핑몰 창업 준비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혹시 일거리 생기면 말만 하라고 번호 교환을 하잔다. 이 사무실에 친구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거 같고, 디자인쪽으로 이 일 저 일 다 할 줄 아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느새 카톡 친추까지 했는지 [ 안녕하세요 ] 하고 말까지 건다.
"오, 여친 분 엄청 이쁘시네. 잘 어울린다. 몇 살이에요? "
"헤헤, 올해 서른이에요"
"우왁? 정말? 완전 동인이네. 한 20대 중반? 초반까지 봤어요"
"여친 들으면 기뻐서 춤 추겠네요"
"하하, 여튼 수고하시고, 이따 또 봐요"
그가 손을 흔들길래 조금 아쉬운 마음에 물었다.
"아 들어가세요?"
"그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 좀 나가서 스케이트 보드 좀 타고 올라구요"
"오 그렇구나"
"그럼 이따 봐요"
"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슥 스케이트 보드를 꺼내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모습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게다가 이 사무실에는 저런 좀 뭔가 일도 잘할거 같고 놀 줄도 알 것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 최소 몇 십 명은 된다. 이 넘치는 에너지는 정말 최고다.
"어, 나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어?"
"그럼"
"대박"
"대신 나랑 같이 들어가야 돼. 미팅한다는 명목으로는 입실이 가능하지만, 아무나 들어 올 수 있어서야 관리가 안 될거 아냐"
"그렇구나"
며칠 뒤 토요일, 사무실을 방문한 주리는 안에 들어오더니 신이 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
"나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
"그래"
"저거도 공짜라며? 커피"
"응, 공짜. 맥주도 공짜야"
"진짜 좋다"
함께 커피 한잔씩을 마시며, 마주보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조금 수다를 떨고 있노라니 누가 아는 체를 한다. 규진이 형이다. 벌써 우리는 며칠 만에 제법 친해졌다.
"안녕! 어? 오늘은 여친도 함께 왔네? 안녕하세요"
규진이 형이 인사를 하며 우리 테이블에 합석을 한다. 주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 하고 묻다가 곧 "아! 같이 친해졌다고 하던 그 분?" 하고 묻는다. 규진이 형은 곧바로 "맞아요, 그 분이에요" 하고 씩 웃는다. 핸섬한 그 미소에 나까지 조금 으쓱해진다.
"여기 오늘 처음 와봤는데, 디게 분위기 멋있네요"
"그쵸? 그래서 저도 반해서 계속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규진이 형은 "그럼 두 분 재밌게 노세요" 하고 좌르르 바닥에 스케이트 보드를 굴리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 안에서 저런걸 타는건 당연히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관리자 안 보는 데서야 누가 뭘 어쩌겠는가.
"저 사람이구나."
"응, 잘 생겼지?"
"아니"
하지만 주리는 고개를 저었다.
"좀 사람이 어설프게 날티 나. 내 취향 아냐. 별로"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그 오픈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한거도 저 형이 공짜로 해준거야"
"난 그거도 디자인 별로던데"
"그래"
주리가 조금 규진이 형에 대해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길래 나는 얼른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주리는 곧 또 다른 힙한 분위기의 사람들과 공간을 보며 기분을 풀었다.
"사실 창업이라는게, 리스크 생각하면 안 하는게 정답이긴 하죠. 아무리 힘들고 뭐 같아도 한달 20일만 어떻게든 버티면 알아서든 월급 통장에 딱딱 돈 꽂히니까. 당장 직장인 아니면 우린 진짜 집 얻을 전세대출도 힘들잖아요"
오늘은 초소형 스타트업에 대해 여섯 명이 함께 진행하는 미니 세미나를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대기업에서 한자리씩 하다가 뜻이 있어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같은 말을 해도 훨씬 설득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평생 그랜저 이상 못 끌어요. 그게 현실이죠. 적당히 대기업 다니다가 가정 꾸리고 소나타 내지 그랜저 몰고 아들 딸 하나 낳아서 어떻게 어떻게 아둥바둥 살아봤자 딱 그게 한계라는거죠. 그나마도 엄청 잘 풀린거고, 잘 안 풀리면 훨씬 그거보다 피곤해지는거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람의 꿈이 작아져요. 그냥 현실에 적당히 만족하게 된다는거죠. 절약, 자식, 부양, 학원비, 가장, 이런 단어에 치여 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게 싫어서…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똑같이 그냥 그렇게 평생 기획서나 만들면서 9시 출근 8시 퇴근 반복하며 연봉 200 남짓 오르면 만세하고 싶어지는 그런 중소기업 또 찾아다니는게 무서워지고 싫어졌다. 그 싫어진 그게 설령 진짜 인생의 정답이라 할지라도 조금 뭔가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고 싶었다.
'너 그렇게 평생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끝내고 싶은거야?'
그 돌파구로 찾은게 조금 우습지만 이 짓이었다. 뭐 이것도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쇼핑몰 기획서만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미니 세미나를 한다고 하길래 무슨 이야기들 하나 싶어 참여해봤는데 저 탈모끼 보이는 체크 남방의 힙스터 아재 말에 새삼 공감했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소리도 없이 뒤에 나타난 규진이 형이 내 손목을 슥 끌어당기고는 구석으로 돌아가서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거 듣지마.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시간만 잡아먹어. 저 사람들 뭔가 좀 뜻 있고 깨어있고 잘난거 같지? 다 그냥 지금 하는 일 답 안 나올 거 같으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합대회 하는거야. 저 사람들 저거 코드 맞잖아? 맨날 그룹 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고 점점 더 망가져. 그러다 창업자금 올인나면 그렇게 허무하게 하나둘씩 흩어지고. 최악이야 저런거"
규진의 말에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찔린 기분이라 부끄러우면서도 민망했다. 그리고 그 날은 결국 짐을 일찍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달 또 연장한다고? 이주일이면 다 한다고 하지 않았어?"
주리는 입술을 빼쭉한다.
"막상 해보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고. 디자이너도 없고, 혼자 구현해보려니까 영 후진거 같고 그래서, 다시 갈아엎고 엎고 하다보니 좀 시간이 더 걸리네"
"맨날 여기서 이쁜 여자들 보느라 눈 돌아가서 그런거 아냐? 보니까 엄청 꾸민 언니들도 있더만. 그 사람들 여기서 진짜 일하는거 맞긴 맞어? 남자 꼬시러 온 여자들 같애"
"엥? 어디어디?"
"오빠!"
내 너스레에 주리는 주먹을 쥐어보이더니 피식 웃는다.
"아 놔 진짜"
"야,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이나 돌릴 남자냐? 너나 여기 맨날 와서는 외국인 백인 잘생긴 남자들 쳐다보지 마라"
"여기 잘생긴 남자가 어딨냐?"
"여깃…"
"저요!"
내가 농담을 하려던 차에 어느새 규진이 형이 끼어든다. 주리는 "둘 다 미친 거 아니에요?" 하며 웃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불쑥불쑥 끼어드는 것에 불편해하던 그녀도 어느새 능청맞은 규진의 성격 탓에 제법 친해졌다.
"근데 뻥 안치고 여기 미친 사람이 절반은 넘을걸. 새벽 2시 넘어가면 비정상들 너무 많아. 특히 약간 취한 외국인들."
"규진 오빠도 그 중 하나 아니에요?"
"하하, 근데 맞음.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아님. 형만 미침"
"사실 나도 아님"
"둘 다 똑같이 미쳤어"
즐겁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의 진도가 정말 안 나갔다. 2주면 될 것이라던 내 쇼핑몰은 기획부터 싹 뜯어고치고 요즘 최신 트랜드를 반영한 디자인의 시안만 계속 고를 뿐이었다. 맥주가 늘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 새벽이 되면 어느새 관리자들이 퇴근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들이 많은 밤에는 무려 파티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쭈뼛대며 잘 끼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규진이 형 덕분에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고 패션 쇼핑몰 창업준비를 한다던 지혜 누나, 나연이와도 친해졌다.
"어어, 잘 자"
그 무렵이었다. 일의 진도 문제로 몇 번 주리와 크게 싸운 이래로 나는 마음을 쉽게 잡지 못했고, 그때마다 주리는 조금씩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잘 리가 없는 시간인데도 그녀는 잔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고 그녀의 인스타며 뭐며 뒤늦은 시간에 업데이트 되는 것 때문에 나는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
"나연이가 너 좋아하는거 같더라"
"에? 정말요?"
"저번에 지혜랑 셋이라 같이 저녁 먹었거든? 근데 그때 나연이가 너 안 오냐면서 너 귀엽다고 했어"
"에이, 난 또. 귀엽다는 정도야 뭐"
규진이 형은 픽 웃으며 물었다.
"야, 난 또는 뭔데? 그럼 나연이가 너 진심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뭐…"
"피팅모델 하던 애들이라 몸매 끝내주긴 하지"
"그쵸"
"여튼 조심해라. 그런 애들 은근 발라당 까져서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온다. 한눈 팔지 말고 조심해라"
"에이 걔가 미쳤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설레이긴 했다. 괜히 더 신경쓰이고.
"야, 너 밤새 뭐했냐? 왜 전화도 안 하는데?"
금요일 밤, 파티를 하며 새벽까지 놀다가 커피 테이블 옆에서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6시 40분. 그러나 지난 밤 9시에 아는 언니랑 밥 한 끼 먹고 온다던 주리는 밤새 연락이 없었다.
"그러는 오빠는?"
차마 밤새 사무실에서 파티하다가 밤새우고 새벽에 취해 쓰러져 잤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나는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근데 너는 들어가면서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냐?" 하며 따지기 바빴다.
"나도 그래. 일찍 들어왔는데 오빠 피곤할까봐 전화 그냥 안 한거야"
"뭐? 그래, 그건 좋다 이거야. 너 요즘 내 전화 왜 잘 안 받냐? 저녁에 걸면 한 10번 걸면 제때 받는거 한 서너번이나 되냐?"
"아 진짜 왜 그래? 백수생활 길어지더니 아주 미친거야?"
"야!"
그 날, 크게 싸웠다. 그리고 그 날이 기점이었다. 화해는 했지만, 주리의 마음은 점점 나에게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거 할건데. 하긴 하는거 맞아?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했어도 지금 기획이 문제가 아니라 창업해서 팔고 있겠네"
"후우 야"
"그리고 씻긴 씻는거야? 뭐하는데 진짜. 팔꿈치에 때 이거 뭔데"
"아 진짜 쫌 너 쪽팔리게 할래?"
사무실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 많은데서 싸우는건 무척 피곤하고 부끄러웠다. 커뮤니티 매니저가 와서 주의를 부탁드릴 정도였다. 나는 "야, 이럴거면 그냥 오지마" 하고 말해버렸다. 실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주리는 정말로 이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물론 다행히 며칠 뒤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며 사무실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청 저렴하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구나 하고 작고 찌질한, 후회 아닌 후회를 할 따름이었다.
이상기미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 않던 주리의 휴대폰에 비번이 걸리더니, 급기야는 섹스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핑계로 내가 잦은 섹스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묵묵히 받아주던 그녀가 어느 날인가부터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고, 모텔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말 이틀 모두를 만나지 못했던 어느 주말을 기점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불안을 점차 의혹으로 키워나갔다. 내가 이름을 잘 모르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늘어났고, 언젠가부터 백화점에서 속옷 매장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진한 의혹을 느꼈다. 그저 그녀는 "마음에 드는데 비싸서 고민한 것일 뿐"하고 말했을 따름이지만.
급기야 도저히 참치 못한 어느 날, 나는 몰래 미리 봐두었던 그녀의 폰 비번을 풀고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운 것인지,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별 크게 문제될만한 것은 없었지만 한가지 걸리는게 있었다.
임규진.
지난 주말, 그와 주리가 세 차례 연락을 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전화도 아니고 카톡 전화로. 나름 우리 사무실의 터줏대감이던 그는 지난 한달 전 즈음부터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랑도 엮일 일이 없었고. 우리는 친하기는 했지만 사무실에서만의 관계였다. 그런 그가 왜 주리와 연락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전의 둘의 모든 대화 기록은 삭제되어 있었으며, 어제 내 폰이 꺼져서 주리의 폰으로 잠깐 지도 좀 찾으려니 왜 그렇게 정색을 했을까.
나는 조용히 주리의 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솔직히 오빠 그 신발이랑 그 바지 너무 안 어울려. 너무 겉멋만 부리는거 같아. 그리고 나 이제 좀 신뢰를 못 하겠어. 세상에 쇼핑몰 하나 기획한다면서 벌써 반년이야. 준비를 하기는 하는거야? 그냥 거기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고 먹는게 전부 아냐? 창업 자금 남기는 했어?"
"야, 4천 준비해서 고작 사무실 임대로 6개월에 2백 좀 넘게 쓴게 그리 문제냐? 그리고 2주만에 뚝딱 어설프게 시작했다가 한 큐에 말아먹느니 6개월 걸려서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안에 성공한 스타트업 출신들, 대기업 출신들, 외국계 기업 다니던 사람들한테 돈 주고도 못 들을 정보랑 조언 받으면서 신중을 기하는게 어느게 더 잘하는 일일까?"
"아니 맨날 말로는 그러는데 정말 하기는 하는거 맞아? 오빠 일하기는 해?"
"기획안 보여줄까? 지금 버전만 30가지가 넘어"
"아 근데 왜 안 하는데 그럼!"
주리는 초조해했다. 사실 진짜 초조한 사람은 나인데. 그녀가 나의 창업에 관심과 우려를 보내는 만큼, 나도 그녀의 정조와 식어가는 사랑에 대한 초조함이 절박했다. 강남 사무실에서 의왕시까지 뒤를 밟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고 그저 '설마'하는 의심만 가진 채 내 안의 불안함만 극대화 될 뿐이었다. 사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였고.
"후, 끝났다"
솔직히 나도 어처구니 없지만 8개월차 계약을 마치고 딱 5일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정식 넘버링 '5'의 타이틀을 달고 최종버전의 기획안이 완성됐다. 톡 까놓고 말해 처음 버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디자인이지만, 멀고 먼 길을 돌아 온 것이었기에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대가가 너무 컸다. 근 8개월치의 임대료도 그렇고, 여기에서 사용한 밥값만 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리도 그렇고.
"관두자"
그녀의 이별 선언에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주리가 그저 나에게 실망해서 떠난 것인지, 내 의심처럼 다른 무언가의 '의혹'이 있던 것인지, 규진이 처음에 주리에게 보였던 어떤 관심이 정말 단순한 관심종자의 그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수많은 의혹만 남았을 뿐 결국 밝혀내진 못했다. 그냥 그것을 내가 정신 차리는 계기로 삼기로 했을 뿐이다.
"공백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무엇을 했나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개인사업을 준비했었습니다"
"어떤 사업이죠?"
"쇼핑몰입니다."
"잘 안 됐나보죠? 지금 이렇게 면접을 보는거 보면"
"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면접관이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그럼 우리 회사 다니다가 또 돈 모이면 다시 창업한다고 훌쩍 나가버리는거 아니야? 창업하는 사람들 많이들 그러던데"
다른 면접관들도 와 하고 웃는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너무 제대로 쫄딱 망해서 절대 그런 일은 이제 없습니다. 호되게 데어봤습니다. 돈도 잃고, 여자친구도 잃고 해서요. 이제는 정말 회사 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회사 뿐이다' 라는 멘트가 면접관인 임원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나는 결국 재취업에 어렵게 성공했다.
입사 전날 밤, 나는 오래간만에 어렵게 주리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주리가 받았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고, 근황을 전했다. 돈은 거의 다 잃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재취업 했다고.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잡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간신히 멈추었다.
"잘됐네. 축하해"
조금 힘 빠진 목소리.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이제는 어쩌면 정말 네가 바라는, 그런 조금 안정적인 그런 남자가 되었다고.
"그래, 고맙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나 역시 무미건조한 말을 건냈을 뿐.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리야, 나 말인데…"
"오빠"
그래, 다 알아. 그래도 나는 평생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우리 시작해보면 안될까"
한참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후, 주리는 물었다.
"오빠는 내가 좋아?"
나 역시 즉답 대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메인 목을 조용히 풀어넘기고 대답했다.
"어"
그리고 역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주리의 대답 대신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일까. 나는 그 날 밤새 다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첫 출근을 하며 그녀에게 나는 문자 메세지를 남겼다.
[ 주리야 내가 간밤에 괜히 짜증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힘내고, 언젠가 다시 인연 닿게 되면 그때는 부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첫 출근, 다시 힘을 내자. 내야한다.
- 끝 -
'게다가'
커피도, 맥주도 공짜라는 점에서 충분히 돈 값 한다고 느꼈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맥주 두 컵만 마셔도…'
그렇게 애써 합리화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고 멋진 설비도 설비였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였다. 아니 그 사람들 그 자체였다. 어디 뉴욕이나 LA 어딘가의 글로벌 사무실에서 일할거 같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에어팟에 스타일리시한 패션, 애쉬 염색을 하고 흥겹게 몸을 흔들며 맥북으로 열심히 무언가의 일들을 하는 모습들은 과연 멋짐 그 자체였다. 이렇게 힙한 곳에서 이렇게 힙한 사람들과 힙하게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35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나 패스트워크스페이스에 사무실 잡았어"
여친 주리한테 자랑했다. 여친은 "정말?" 하며 놀라워했다. 사실 여친 성격상 시큰둥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아는 언니도 거기에서 서너달 정도 잠깐 일했었대. 엄청 멋있는 곳이라면서. 오빠 부럽다" 하면서 부러워했다. 더 신이 났다.
공유오피스
조금 우습고 허세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괜히 거기에 찌질한 모습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살까 말까 고민하던 에어팟도 사고 신발도 사고 나 역시 최대한 멋을 부리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 반, 의외로 밤에 비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적었다. 하긴,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형 인간보다는 저녁형 인간들이 더 많겠지 하고 생각했다.
"음"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려니 확실히 신나고 좋긴 한데 집중력이 떨어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아 맞다 공짜지!' 하는 생각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그냥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자 마음 먹고 그쪽으로 걸어가니 아직 오전인데도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는 잘생긴 또래 하나가 보인다. 옷 차려입은게 그야말로 이 공유 오피스의 화신 같다. 스타일리시하다.
"어, 못 보던 분인데. 새로 계약하신거에요?"
놀랍게도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규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여기 강남점이 생기자마자 입주해서 벌써 1년 넘게 일을 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나고 했더니 디자인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는 잡스럽게 이 일 저 일 다 한다고 했다. 로고 디자인부터 웹디자인, UI, UX까지 다. 실력이 어마어마하신 거 같다고 하니 사실은 실력은 쥐뿔 없고 그냥 엄청 빨리 일을 쳐내주는 바람에 오래 거래하면서 일거리 던져주는 분들이 좀 있을 뿐이란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자그마한 소품 관련 쇼핑몰 창업 준비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혹시 일거리 생기면 말만 하라고 번호 교환을 하잔다. 이 사무실에 친구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거 같고, 디자인쪽으로 이 일 저 일 다 할 줄 아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느새 카톡 친추까지 했는지 [ 안녕하세요 ] 하고 말까지 건다.
"오, 여친 분 엄청 이쁘시네. 잘 어울린다. 몇 살이에요? "
"헤헤, 올해 서른이에요"
"우왁? 정말? 완전 동인이네. 한 20대 중반? 초반까지 봤어요"
"여친 들으면 기뻐서 춤 추겠네요"
"하하, 여튼 수고하시고, 이따 또 봐요"
그가 손을 흔들길래 조금 아쉬운 마음에 물었다.
"아 들어가세요?"
"그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 좀 나가서 스케이트 보드 좀 타고 올라구요"
"오 그렇구나"
"그럼 이따 봐요"
"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슥 스케이트 보드를 꺼내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모습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게다가 이 사무실에는 저런 좀 뭔가 일도 잘할거 같고 놀 줄도 알 것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 최소 몇 십 명은 된다. 이 넘치는 에너지는 정말 최고다.
"어, 나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어?"
"그럼"
"대박"
"대신 나랑 같이 들어가야 돼. 미팅한다는 명목으로는 입실이 가능하지만, 아무나 들어 올 수 있어서야 관리가 안 될거 아냐"
"그렇구나"
며칠 뒤 토요일, 사무실을 방문한 주리는 안에 들어오더니 신이 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
"나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
"그래"
"저거도 공짜라며? 커피"
"응, 공짜. 맥주도 공짜야"
"진짜 좋다"
함께 커피 한잔씩을 마시며, 마주보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조금 수다를 떨고 있노라니 누가 아는 체를 한다. 규진이 형이다. 벌써 우리는 며칠 만에 제법 친해졌다.
"안녕! 어? 오늘은 여친도 함께 왔네? 안녕하세요"
규진이 형이 인사를 하며 우리 테이블에 합석을 한다. 주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 하고 묻다가 곧 "아! 같이 친해졌다고 하던 그 분?" 하고 묻는다. 규진이 형은 곧바로 "맞아요, 그 분이에요" 하고 씩 웃는다. 핸섬한 그 미소에 나까지 조금 으쓱해진다.
"여기 오늘 처음 와봤는데, 디게 분위기 멋있네요"
"그쵸? 그래서 저도 반해서 계속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규진이 형은 "그럼 두 분 재밌게 노세요" 하고 좌르르 바닥에 스케이트 보드를 굴리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 안에서 저런걸 타는건 당연히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관리자 안 보는 데서야 누가 뭘 어쩌겠는가.
"저 사람이구나."
"응, 잘 생겼지?"
"아니"
하지만 주리는 고개를 저었다.
"좀 사람이 어설프게 날티 나. 내 취향 아냐. 별로"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그 오픈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한거도 저 형이 공짜로 해준거야"
"난 그거도 디자인 별로던데"
"그래"
주리가 조금 규진이 형에 대해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길래 나는 얼른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주리는 곧 또 다른 힙한 분위기의 사람들과 공간을 보며 기분을 풀었다.
"사실 창업이라는게, 리스크 생각하면 안 하는게 정답이긴 하죠. 아무리 힘들고 뭐 같아도 한달 20일만 어떻게든 버티면 알아서든 월급 통장에 딱딱 돈 꽂히니까. 당장 직장인 아니면 우린 진짜 집 얻을 전세대출도 힘들잖아요"
오늘은 초소형 스타트업에 대해 여섯 명이 함께 진행하는 미니 세미나를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대기업에서 한자리씩 하다가 뜻이 있어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같은 말을 해도 훨씬 설득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평생 그랜저 이상 못 끌어요. 그게 현실이죠. 적당히 대기업 다니다가 가정 꾸리고 소나타 내지 그랜저 몰고 아들 딸 하나 낳아서 어떻게 어떻게 아둥바둥 살아봤자 딱 그게 한계라는거죠. 그나마도 엄청 잘 풀린거고, 잘 안 풀리면 훨씬 그거보다 피곤해지는거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람의 꿈이 작아져요. 그냥 현실에 적당히 만족하게 된다는거죠. 절약, 자식, 부양, 학원비, 가장, 이런 단어에 치여 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게 싫어서…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똑같이 그냥 그렇게 평생 기획서나 만들면서 9시 출근 8시 퇴근 반복하며 연봉 200 남짓 오르면 만세하고 싶어지는 그런 중소기업 또 찾아다니는게 무서워지고 싫어졌다. 그 싫어진 그게 설령 진짜 인생의 정답이라 할지라도 조금 뭔가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고 싶었다.
'너 그렇게 평생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끝내고 싶은거야?'
그 돌파구로 찾은게 조금 우습지만 이 짓이었다. 뭐 이것도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쇼핑몰 기획서만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미니 세미나를 한다고 하길래 무슨 이야기들 하나 싶어 참여해봤는데 저 탈모끼 보이는 체크 남방의 힙스터 아재 말에 새삼 공감했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소리도 없이 뒤에 나타난 규진이 형이 내 손목을 슥 끌어당기고는 구석으로 돌아가서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거 듣지마.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시간만 잡아먹어. 저 사람들 뭔가 좀 뜻 있고 깨어있고 잘난거 같지? 다 그냥 지금 하는 일 답 안 나올 거 같으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합대회 하는거야. 저 사람들 저거 코드 맞잖아? 맨날 그룹 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고 점점 더 망가져. 그러다 창업자금 올인나면 그렇게 허무하게 하나둘씩 흩어지고. 최악이야 저런거"
규진의 말에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찔린 기분이라 부끄러우면서도 민망했다. 그리고 그 날은 결국 짐을 일찍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달 또 연장한다고? 이주일이면 다 한다고 하지 않았어?"
주리는 입술을 빼쭉한다.
"막상 해보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고. 디자이너도 없고, 혼자 구현해보려니까 영 후진거 같고 그래서, 다시 갈아엎고 엎고 하다보니 좀 시간이 더 걸리네"
"맨날 여기서 이쁜 여자들 보느라 눈 돌아가서 그런거 아냐? 보니까 엄청 꾸민 언니들도 있더만. 그 사람들 여기서 진짜 일하는거 맞긴 맞어? 남자 꼬시러 온 여자들 같애"
"엥? 어디어디?"
"오빠!"
내 너스레에 주리는 주먹을 쥐어보이더니 피식 웃는다.
"아 놔 진짜"
"야,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이나 돌릴 남자냐? 너나 여기 맨날 와서는 외국인 백인 잘생긴 남자들 쳐다보지 마라"
"여기 잘생긴 남자가 어딨냐?"
"여깃…"
"저요!"
내가 농담을 하려던 차에 어느새 규진이 형이 끼어든다. 주리는 "둘 다 미친 거 아니에요?" 하며 웃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불쑥불쑥 끼어드는 것에 불편해하던 그녀도 어느새 능청맞은 규진의 성격 탓에 제법 친해졌다.
"근데 뻥 안치고 여기 미친 사람이 절반은 넘을걸. 새벽 2시 넘어가면 비정상들 너무 많아. 특히 약간 취한 외국인들."
"규진 오빠도 그 중 하나 아니에요?"
"하하, 근데 맞음.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아님. 형만 미침"
"사실 나도 아님"
"둘 다 똑같이 미쳤어"
즐겁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의 진도가 정말 안 나갔다. 2주면 될 것이라던 내 쇼핑몰은 기획부터 싹 뜯어고치고 요즘 최신 트랜드를 반영한 디자인의 시안만 계속 고를 뿐이었다. 맥주가 늘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 새벽이 되면 어느새 관리자들이 퇴근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들이 많은 밤에는 무려 파티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쭈뼛대며 잘 끼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규진이 형 덕분에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고 패션 쇼핑몰 창업준비를 한다던 지혜 누나, 나연이와도 친해졌다.
"어어, 잘 자"
그 무렵이었다. 일의 진도 문제로 몇 번 주리와 크게 싸운 이래로 나는 마음을 쉽게 잡지 못했고, 그때마다 주리는 조금씩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잘 리가 없는 시간인데도 그녀는 잔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고 그녀의 인스타며 뭐며 뒤늦은 시간에 업데이트 되는 것 때문에 나는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
"나연이가 너 좋아하는거 같더라"
"에? 정말요?"
"저번에 지혜랑 셋이라 같이 저녁 먹었거든? 근데 그때 나연이가 너 안 오냐면서 너 귀엽다고 했어"
"에이, 난 또. 귀엽다는 정도야 뭐"
규진이 형은 픽 웃으며 물었다.
"야, 난 또는 뭔데? 그럼 나연이가 너 진심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뭐…"
"피팅모델 하던 애들이라 몸매 끝내주긴 하지"
"그쵸"
"여튼 조심해라. 그런 애들 은근 발라당 까져서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온다. 한눈 팔지 말고 조심해라"
"에이 걔가 미쳤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설레이긴 했다. 괜히 더 신경쓰이고.
"야, 너 밤새 뭐했냐? 왜 전화도 안 하는데?"
금요일 밤, 파티를 하며 새벽까지 놀다가 커피 테이블 옆에서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6시 40분. 그러나 지난 밤 9시에 아는 언니랑 밥 한 끼 먹고 온다던 주리는 밤새 연락이 없었다.
"그러는 오빠는?"
차마 밤새 사무실에서 파티하다가 밤새우고 새벽에 취해 쓰러져 잤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나는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근데 너는 들어가면서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냐?" 하며 따지기 바빴다.
"나도 그래. 일찍 들어왔는데 오빠 피곤할까봐 전화 그냥 안 한거야"
"뭐? 그래, 그건 좋다 이거야. 너 요즘 내 전화 왜 잘 안 받냐? 저녁에 걸면 한 10번 걸면 제때 받는거 한 서너번이나 되냐?"
"아 진짜 왜 그래? 백수생활 길어지더니 아주 미친거야?"
"야!"
그 날, 크게 싸웠다. 그리고 그 날이 기점이었다. 화해는 했지만, 주리의 마음은 점점 나에게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거 할건데. 하긴 하는거 맞아?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했어도 지금 기획이 문제가 아니라 창업해서 팔고 있겠네"
"후우 야"
"그리고 씻긴 씻는거야? 뭐하는데 진짜. 팔꿈치에 때 이거 뭔데"
"아 진짜 쫌 너 쪽팔리게 할래?"
사무실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 많은데서 싸우는건 무척 피곤하고 부끄러웠다. 커뮤니티 매니저가 와서 주의를 부탁드릴 정도였다. 나는 "야, 이럴거면 그냥 오지마" 하고 말해버렸다. 실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주리는 정말로 이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물론 다행히 며칠 뒤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며 사무실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청 저렴하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구나 하고 작고 찌질한, 후회 아닌 후회를 할 따름이었다.
이상기미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 않던 주리의 휴대폰에 비번이 걸리더니, 급기야는 섹스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핑계로 내가 잦은 섹스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묵묵히 받아주던 그녀가 어느 날인가부터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고, 모텔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말 이틀 모두를 만나지 못했던 어느 주말을 기점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불안을 점차 의혹으로 키워나갔다. 내가 이름을 잘 모르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늘어났고, 언젠가부터 백화점에서 속옷 매장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진한 의혹을 느꼈다. 그저 그녀는 "마음에 드는데 비싸서 고민한 것일 뿐"하고 말했을 따름이지만.
급기야 도저히 참치 못한 어느 날, 나는 몰래 미리 봐두었던 그녀의 폰 비번을 풀고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운 것인지,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별 크게 문제될만한 것은 없었지만 한가지 걸리는게 있었다.
임규진.
지난 주말, 그와 주리가 세 차례 연락을 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전화도 아니고 카톡 전화로. 나름 우리 사무실의 터줏대감이던 그는 지난 한달 전 즈음부터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랑도 엮일 일이 없었고. 우리는 친하기는 했지만 사무실에서만의 관계였다. 그런 그가 왜 주리와 연락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전의 둘의 모든 대화 기록은 삭제되어 있었으며, 어제 내 폰이 꺼져서 주리의 폰으로 잠깐 지도 좀 찾으려니 왜 그렇게 정색을 했을까.
나는 조용히 주리의 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솔직히 오빠 그 신발이랑 그 바지 너무 안 어울려. 너무 겉멋만 부리는거 같아. 그리고 나 이제 좀 신뢰를 못 하겠어. 세상에 쇼핑몰 하나 기획한다면서 벌써 반년이야. 준비를 하기는 하는거야? 그냥 거기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고 먹는게 전부 아냐? 창업 자금 남기는 했어?"
"야, 4천 준비해서 고작 사무실 임대로 6개월에 2백 좀 넘게 쓴게 그리 문제냐? 그리고 2주만에 뚝딱 어설프게 시작했다가 한 큐에 말아먹느니 6개월 걸려서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안에 성공한 스타트업 출신들, 대기업 출신들, 외국계 기업 다니던 사람들한테 돈 주고도 못 들을 정보랑 조언 받으면서 신중을 기하는게 어느게 더 잘하는 일일까?"
"아니 맨날 말로는 그러는데 정말 하기는 하는거 맞아? 오빠 일하기는 해?"
"기획안 보여줄까? 지금 버전만 30가지가 넘어"
"아 근데 왜 안 하는데 그럼!"
주리는 초조해했다. 사실 진짜 초조한 사람은 나인데. 그녀가 나의 창업에 관심과 우려를 보내는 만큼, 나도 그녀의 정조와 식어가는 사랑에 대한 초조함이 절박했다. 강남 사무실에서 의왕시까지 뒤를 밟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고 그저 '설마'하는 의심만 가진 채 내 안의 불안함만 극대화 될 뿐이었다. 사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였고.
"후, 끝났다"
솔직히 나도 어처구니 없지만 8개월차 계약을 마치고 딱 5일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정식 넘버링 '5'의 타이틀을 달고 최종버전의 기획안이 완성됐다. 톡 까놓고 말해 처음 버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디자인이지만, 멀고 먼 길을 돌아 온 것이었기에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대가가 너무 컸다. 근 8개월치의 임대료도 그렇고, 여기에서 사용한 밥값만 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리도 그렇고.
"관두자"
그녀의 이별 선언에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주리가 그저 나에게 실망해서 떠난 것인지, 내 의심처럼 다른 무언가의 '의혹'이 있던 것인지, 규진이 처음에 주리에게 보였던 어떤 관심이 정말 단순한 관심종자의 그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수많은 의혹만 남았을 뿐 결국 밝혀내진 못했다. 그냥 그것을 내가 정신 차리는 계기로 삼기로 했을 뿐이다.
"공백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무엇을 했나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개인사업을 준비했었습니다"
"어떤 사업이죠?"
"쇼핑몰입니다."
"잘 안 됐나보죠? 지금 이렇게 면접을 보는거 보면"
"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면접관이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그럼 우리 회사 다니다가 또 돈 모이면 다시 창업한다고 훌쩍 나가버리는거 아니야? 창업하는 사람들 많이들 그러던데"
다른 면접관들도 와 하고 웃는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너무 제대로 쫄딱 망해서 절대 그런 일은 이제 없습니다. 호되게 데어봤습니다. 돈도 잃고, 여자친구도 잃고 해서요. 이제는 정말 회사 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회사 뿐이다' 라는 멘트가 면접관인 임원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나는 결국 재취업에 어렵게 성공했다.
입사 전날 밤, 나는 오래간만에 어렵게 주리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주리가 받았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고, 근황을 전했다. 돈은 거의 다 잃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재취업 했다고.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잡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간신히 멈추었다.
"잘됐네. 축하해"
조금 힘 빠진 목소리.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이제는 어쩌면 정말 네가 바라는, 그런 조금 안정적인 그런 남자가 되었다고.
"그래, 고맙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나 역시 무미건조한 말을 건냈을 뿐.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리야, 나 말인데…"
"오빠"
그래, 다 알아. 그래도 나는 평생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우리 시작해보면 안될까"
한참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후, 주리는 물었다.
"오빠는 내가 좋아?"
나 역시 즉답 대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메인 목을 조용히 풀어넘기고 대답했다.
"어"
그리고 역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주리의 대답 대신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일까. 나는 그 날 밤새 다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첫 출근을 하며 그녀에게 나는 문자 메세지를 남겼다.
[ 주리야 내가 간밤에 괜히 짜증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힘내고, 언젠가 다시 인연 닿게 되면 그때는 부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첫 출근, 다시 힘을 내자. 내야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