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40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피곤에 절어 눈 앞이 어둡다. 눈을 주무르며 서둘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큰 길로 나선다. 싸늘한 날씨와 함께 그리 춥지도 않다는 것을 동시에 느끼며 봄이 왔다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은 여느날과 같이 햄버거다. 햄버거를 포장해 나오자 어느새 비가 거의 그쳤다. 아직도 방울방울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우산을 쓰기보다는 그저 비에 조금 젖고 싶다.
새삼스레 외로움을 느낀다. 나이 마흔 여섯의 솔로. 아니 노총각. 간만에 술이 당긴다. 하지만 마실 사람을 찾는 대신 찬장에 넣어놓은 위스키 한 병을 떠올린다. 지난 번 일본 출장 때에 사들고 온 것.
"흐"
그렇게 집에 와서는 뜨신 물에 샤워를 하고는 TV를 보며 주접을 떤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시트콤 재방 장면을 보며 피식 웃고는, 햄버거를 베어문다. 그리고 콜라 한 모금, 그리고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을 들이킨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좋다.
"후우"
햄버거를 다 먹고는 그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방 한 켠에 버린다. 말없이 채널을 계속 돌린다. 재미있는 것은 나오지도 않고, 엉뚱한 현대 사회 관련 다큐멘터리를 10분만 멍하니 보다가 다시 채널을 돌린다. 그리고 또 한잔 위스키를 홀짝.
그러다보니 문득 언젠가의 젊은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30대 후반의 어느 날, 4년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 2년을 더 밤만 되면 바보처럼 징징 대던 시절. 평생 가장 많이 술을 마시던 시절.
얼른 잊고 싶었는데 어째 그게 잘 안되던 그 시절. 그녀를 잊고 싶어서 비만 오면 슬픈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그래,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언제나 혼자.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길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잘해야 몇 달 남짓. 그나마도 이제는 끊긴지 오래.
또 빙신같이 나이 쳐먹고 옛날 생각하다가 울었다. 회사에서는 권고 사직 통보를 받았다. 재취업이 가능할까 두렵고 창업을 하자니 다 말아먹고 다시 모아놓은 돈 4천만원이 전부인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망설여진다.
그냥…
만약 그 애랑 잘 만나서 연애를 성공하고 결혼을 하고 오손도손 살았다면, 매일 아침 같은 해를 보며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그렇게 매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또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한 잔이 가볍게 또 들어간다.
알딸딸하고 얼큰하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또 슥 닦고, 나이 쳐먹고 참 나도 애 같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피식 피식 웃는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제목도 가물가물한 연애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채워놓은 한 잔을 들이킨다. 내일 출근을 잠시 걱정하다, 어차피 권고 사직 통보 받은 마당에 무슨 눈치를 보랴 싶어 배게 속에 더욱 머리를 깊이 묻는다.
'헤어지고 넌 내 생각 한번이라도 해본 적 있냐'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문득 몸이 자주 아프던 그녀가 새삼 걱정된다. 나도 그녀도 나이를 더 먹었으니 더 자주 아플텐데. 지금쯤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나보다는 그 사람이 너를 더 잘 지켜줄테니까.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너, 충치가 생겼는데도 병원비 걱정에 겁을 내던 너, 내가 돈 대신 내줄테니 억지로 가라고 떠밀어서 겨우 치료 받고도 나에게 계속 미안해하던 너, 심장이 안 좋던 너, 자주 토하던 너, 자주 손이 시큰거린다던 너, 뭐만 먹었다면 소화 안된다고 힘들어 하던 너, 허리디스크에 고생하던 너.
참 지랄맞게도 자주 아팠구나 하면서도 그 상황상황마다 옆에 자주 있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아직까지도.
"흐"
사실 얼굴도 희미한 10년 전 연인에 무슨 애틋함이 그리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리 애틋한 사람도 아니다. 고비고비마다 씁쓸해지는 기억이 더 많은 그런 흔해 빠진 못난 남자의 연애 실패담.
"괜찮아"
…그렇게, 지난 10년간 수도 없이 되뇌인 그 의미없는 말을 오늘도 또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언젠가 영원히 눈 뜨지 않을 그런 날일 고대하며.
띵 띠리릿띠 띳띳띳띳띠- 띠리딧띠 띳띳띳띳 띠-
기분좋게 언제나처럼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경박한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 시간에 내 휴대폰에? 의아해하며 휴대폰을 확인하자 모르는 번호다.
"누구세요"
"나야"
여자다. 익숙하게 "나야" 라고는 하는데 모르는 목소리다.
"전화 잘못 거신거 같은데요"
이 나이쯤 되면 희미한 기대조차 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대는 "임주원씨 휴대폰 아니에요?" 하며 내 이름을 묻는다. 누구지.
"맞는데 그 쪽은 누구신데요"
제기랄 술을 너무 과하게 마셨다. 머리가 알딸딸하고 핑 돈다. 눈 뜨기조차 힘들고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게 전부다.
"오빠 진짜 나 몰라? 나 승연이야"
안다. 작년 가을에 잠깐 만났던 돌싱.
"어, 간만이야"
별로 반갑지는 않다. 정이 붙기도 전에 헤어졌으니까. '만남을 지속할 이유를 못 찾겠다'라는 기가 찰 이유로 나를 찼으니까. 뭐 솔직히 애 딸린 돌싱이 나라고 그리 애틋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잠이나 더 잤으면 좋았겠구나 싶은 그런 허무함이 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오빠"
"용건이 뭔데"
제발 시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지랄맞은 이유라서 내가 움직어야 되는 그런 이유만 아니길.
"…혹시 돈 좀 있어?"
시발.
"야, 너는 니가 찬 남자가 니한테 돈을 꿔줄거라고 생각하고 돈을 빌리는거냐?"
술에 취해 꼬인 혀가 이제 간신히 조금씩, 아니 여전히 꼬인다. 하지만 승연은 울먹이며 말한다.
"애가 아퍼. 근데 돈이 없어"
시발. 시발, 시발.
"야"
"알아, 오빠 진짜 미안해. 이런 전화 경우 없는거 아는데, 정말…아는데…"
코가 시큰하다. 시발.
"야, 아 시발. 아이 씨발"
"미안해"
냉정해져야 되는데, 내가 인생이 꼬인 이유가 바로 이건데. 오지랍 부리면 안되는건데.
"뭐 어떻게 아픈데"
씨발!
"애가 신장이 안 좋대. 하나는 아예 기능을 잃었고, 남은 하나도…"
"아…"
되돌아보면 내가 이 지랄로 인생을 조진거다. 정말로. 스물 세살에 취객 도와주다 시비 붙어서 폭행죄로 빨간 줄이 갔고, 서른 셋에 동생 사업에 급전 필요하다고 돈 5천 빌려줬다가 싹 날리고, 서른 여덟에 윤지 그 년이랑 헤어진 것도 결국 오지랍 부리다가 뭐 그리 된거 아닌가.
그런데 또 돈을 빌려준다고?
뱃 속으로 쌍욕이 불같이 치솟아 오르지만 애시당초 어차피 조진 인생, 착한 일 조금 더 해두면 지옥 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겠지.
"병원이 어딘데"
"서울대병원"
"너 진짜 철판 깔았구나. 쯥"
지금 꽤 취했는데 갈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힐끔 눈을 떠서 보니 1/3병도 안 깠네. 생각보다는 덜 마셨다.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로 가서 생수 500미리 한 통을 그대로 비운다. 그리고는 바로 또 화장실로 어기적 어기적 가서 방광을 비운다.
'뭐하는 짓이지'
스스로에게 적당한 답도 찾지 못하면서 주춤주춤 옷을 챙겨입는다. 그리고 집을 나서 택시를 잡는다. 비 온 뒤라 날씨가 꽤나 쌀쌀하다. 조금 두툼한 재킷을 입기를 잘했다.
"서울대병원이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나.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잘하는 짓일까. 아니.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 애 딸린 돌싱녀와 다시 엮이는 자체가 미친 짓이고, 거기에 돈 없다고 돈까지 부어주려는 이 짓은 정말로, 정말로 단언컨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호구 짓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외로워지다 보면, 세상 어디엔가 내가 쓸모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게 느껴진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한없이 퍼주고 싶어지는 것이 그런 외로운 호구의 마음이다.
'알아, 안다고'
승연과 엮이고 싶은 생각 별로 없다. 처음에 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이해했지만, 어쨌든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나도 그녀에게 꽤 차갑게 대했고 그녀도 그 이후로 아마 나와 두어번 더 만나고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며 나를 찬 거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좀 거시기한 건가 싶지만 어쨌거나 사람 마음 다 똑같은거 아닌가.
'시발'
이 와중에도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하는 나는 도대체 뭘까. 그저 화려한 밤의 간판불빛들을 머릿 속에 아로새기며, 그렇게 택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는 이 답없고 미래 없는 인연에 내 돈 쏟아부을 생각을 하고 있다.
오백만원까지라면 기부하는 마음으로, 천만원까지라면 연애 다시 시작한다, 그 이상이라면 그냥 단칼에 거절이라고 마음 속으로 조건 걸면서. 시발.
- 끝 -
술 김에
오늘 저녁은 여느날과 같이 햄버거다. 햄버거를 포장해 나오자 어느새 비가 거의 그쳤다. 아직도 방울방울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우산을 쓰기보다는 그저 비에 조금 젖고 싶다.
새삼스레 외로움을 느낀다. 나이 마흔 여섯의 솔로. 아니 노총각. 간만에 술이 당긴다. 하지만 마실 사람을 찾는 대신 찬장에 넣어놓은 위스키 한 병을 떠올린다. 지난 번 일본 출장 때에 사들고 온 것.
"흐"
그렇게 집에 와서는 뜨신 물에 샤워를 하고는 TV를 보며 주접을 떤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시트콤 재방 장면을 보며 피식 웃고는, 햄버거를 베어문다. 그리고 콜라 한 모금, 그리고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을 들이킨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좋다.
"후우"
햄버거를 다 먹고는 그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방 한 켠에 버린다. 말없이 채널을 계속 돌린다. 재미있는 것은 나오지도 않고, 엉뚱한 현대 사회 관련 다큐멘터리를 10분만 멍하니 보다가 다시 채널을 돌린다. 그리고 또 한잔 위스키를 홀짝.
그러다보니 문득 언젠가의 젊은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30대 후반의 어느 날, 4년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 2년을 더 밤만 되면 바보처럼 징징 대던 시절. 평생 가장 많이 술을 마시던 시절.
얼른 잊고 싶었는데 어째 그게 잘 안되던 그 시절. 그녀를 잊고 싶어서 비만 오면 슬픈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그래,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언제나 혼자.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길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잘해야 몇 달 남짓. 그나마도 이제는 끊긴지 오래.
또 빙신같이 나이 쳐먹고 옛날 생각하다가 울었다. 회사에서는 권고 사직 통보를 받았다. 재취업이 가능할까 두렵고 창업을 하자니 다 말아먹고 다시 모아놓은 돈 4천만원이 전부인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망설여진다.
그냥…
만약 그 애랑 잘 만나서 연애를 성공하고 결혼을 하고 오손도손 살았다면, 매일 아침 같은 해를 보며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그렇게 매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또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한 잔이 가볍게 또 들어간다.
알딸딸하고 얼큰하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또 슥 닦고, 나이 쳐먹고 참 나도 애 같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피식 피식 웃는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제목도 가물가물한 연애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채워놓은 한 잔을 들이킨다. 내일 출근을 잠시 걱정하다, 어차피 권고 사직 통보 받은 마당에 무슨 눈치를 보랴 싶어 배게 속에 더욱 머리를 깊이 묻는다.
'헤어지고 넌 내 생각 한번이라도 해본 적 있냐'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문득 몸이 자주 아프던 그녀가 새삼 걱정된다. 나도 그녀도 나이를 더 먹었으니 더 자주 아플텐데. 지금쯤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나보다는 그 사람이 너를 더 잘 지켜줄테니까.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너, 충치가 생겼는데도 병원비 걱정에 겁을 내던 너, 내가 돈 대신 내줄테니 억지로 가라고 떠밀어서 겨우 치료 받고도 나에게 계속 미안해하던 너, 심장이 안 좋던 너, 자주 토하던 너, 자주 손이 시큰거린다던 너, 뭐만 먹었다면 소화 안된다고 힘들어 하던 너, 허리디스크에 고생하던 너.
참 지랄맞게도 자주 아팠구나 하면서도 그 상황상황마다 옆에 자주 있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아직까지도.
"흐"
사실 얼굴도 희미한 10년 전 연인에 무슨 애틋함이 그리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리 애틋한 사람도 아니다. 고비고비마다 씁쓸해지는 기억이 더 많은 그런 흔해 빠진 못난 남자의 연애 실패담.
"괜찮아"
…그렇게, 지난 10년간 수도 없이 되뇌인 그 의미없는 말을 오늘도 또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언젠가 영원히 눈 뜨지 않을 그런 날일 고대하며.
띵 띠리릿띠 띳띳띳띳띠- 띠리딧띠 띳띳띳띳 띠-
기분좋게 언제나처럼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경박한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 시간에 내 휴대폰에? 의아해하며 휴대폰을 확인하자 모르는 번호다.
"누구세요"
"나야"
여자다. 익숙하게 "나야" 라고는 하는데 모르는 목소리다.
"전화 잘못 거신거 같은데요"
이 나이쯤 되면 희미한 기대조차 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대는 "임주원씨 휴대폰 아니에요?" 하며 내 이름을 묻는다. 누구지.
"맞는데 그 쪽은 누구신데요"
제기랄 술을 너무 과하게 마셨다. 머리가 알딸딸하고 핑 돈다. 눈 뜨기조차 힘들고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게 전부다.
"오빠 진짜 나 몰라? 나 승연이야"
안다. 작년 가을에 잠깐 만났던 돌싱.
"어, 간만이야"
별로 반갑지는 않다. 정이 붙기도 전에 헤어졌으니까. '만남을 지속할 이유를 못 찾겠다'라는 기가 찰 이유로 나를 찼으니까. 뭐 솔직히 애 딸린 돌싱이 나라고 그리 애틋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잠이나 더 잤으면 좋았겠구나 싶은 그런 허무함이 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오빠"
"용건이 뭔데"
제발 시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지랄맞은 이유라서 내가 움직어야 되는 그런 이유만 아니길.
"…혹시 돈 좀 있어?"
시발.
"야, 너는 니가 찬 남자가 니한테 돈을 꿔줄거라고 생각하고 돈을 빌리는거냐?"
술에 취해 꼬인 혀가 이제 간신히 조금씩, 아니 여전히 꼬인다. 하지만 승연은 울먹이며 말한다.
"애가 아퍼. 근데 돈이 없어"
시발. 시발, 시발.
"야"
"알아, 오빠 진짜 미안해. 이런 전화 경우 없는거 아는데, 정말…아는데…"
코가 시큰하다. 시발.
"야, 아 시발. 아이 씨발"
"미안해"
냉정해져야 되는데, 내가 인생이 꼬인 이유가 바로 이건데. 오지랍 부리면 안되는건데.
"뭐 어떻게 아픈데"
씨발!
"애가 신장이 안 좋대. 하나는 아예 기능을 잃었고, 남은 하나도…"
"아…"
되돌아보면 내가 이 지랄로 인생을 조진거다. 정말로. 스물 세살에 취객 도와주다 시비 붙어서 폭행죄로 빨간 줄이 갔고, 서른 셋에 동생 사업에 급전 필요하다고 돈 5천 빌려줬다가 싹 날리고, 서른 여덟에 윤지 그 년이랑 헤어진 것도 결국 오지랍 부리다가 뭐 그리 된거 아닌가.
그런데 또 돈을 빌려준다고?
뱃 속으로 쌍욕이 불같이 치솟아 오르지만 애시당초 어차피 조진 인생, 착한 일 조금 더 해두면 지옥 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겠지.
"병원이 어딘데"
"서울대병원"
"너 진짜 철판 깔았구나. 쯥"
지금 꽤 취했는데 갈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힐끔 눈을 떠서 보니 1/3병도 안 깠네. 생각보다는 덜 마셨다.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로 가서 생수 500미리 한 통을 그대로 비운다. 그리고는 바로 또 화장실로 어기적 어기적 가서 방광을 비운다.
'뭐하는 짓이지'
스스로에게 적당한 답도 찾지 못하면서 주춤주춤 옷을 챙겨입는다. 그리고 집을 나서 택시를 잡는다. 비 온 뒤라 날씨가 꽤나 쌀쌀하다. 조금 두툼한 재킷을 입기를 잘했다.
"서울대병원이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나.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잘하는 짓일까. 아니.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 애 딸린 돌싱녀와 다시 엮이는 자체가 미친 짓이고, 거기에 돈 없다고 돈까지 부어주려는 이 짓은 정말로, 정말로 단언컨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호구 짓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외로워지다 보면, 세상 어디엔가 내가 쓸모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게 느껴진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한없이 퍼주고 싶어지는 것이 그런 외로운 호구의 마음이다.
'알아, 안다고'
승연과 엮이고 싶은 생각 별로 없다. 처음에 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이해했지만, 어쨌든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나도 그녀에게 꽤 차갑게 대했고 그녀도 그 이후로 아마 나와 두어번 더 만나고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며 나를 찬 거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좀 거시기한 건가 싶지만 어쨌거나 사람 마음 다 똑같은거 아닌가.
'시발'
이 와중에도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하는 나는 도대체 뭘까. 그저 화려한 밤의 간판불빛들을 머릿 속에 아로새기며, 그렇게 택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는 이 답없고 미래 없는 인연에 내 돈 쏟아부을 생각을 하고 있다.
오백만원까지라면 기부하는 마음으로, 천만원까지라면 연애 다시 시작한다, 그 이상이라면 그냥 단칼에 거절이라고 마음 속으로 조건 걸면서. 시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