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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악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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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대로 우리 괜찮은 겁니까?"

지옥 만마전 긴급 정무회의. 일만에 이르는 거악의 정점들이 준엄히 자리잡은 가운데,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인간계에 대한 악행총량 역전상황'에 대해 열띈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지상에 크게 헬게이트가 열렸다고 해서 '어디 간만에 한번 인간들 맛 좀 보고 올까?' 하며 기분좋게 현장에 나가보면, 세상에, 여기 계신 상급악마님들 한창 뛰어다니던 현역 시절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 일 저질러놓고 웃고 있습니다. 요즘 정말 일하다 보면 진짜 도저히 안 믿겨서 '저거 인간 맞나? 혹시 지금 우리 윗 분 중에 누가 지금 강림하신건가?' 싶어서 몰래 속삭여 본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현장의 심각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참고인 격으로 초대받아 불려나온 현장 실무 악마들이 하나둘씩 증언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제 생각으로는 교육이나 메뉴얼부터가 너무 실무와 괴리되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지금 교과서 보면 '신앙심이 약한 이들부터 탐색을 시작하라'하고 되어 있는데, 아시다시피 현장에서는 정 반대로 실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심 제일 투철해 보이는 놈들부터 찾아보면 지독한 놈들 하나둘씩 나온다'라고요. 이게 악마학교랑 현장 실무랑 완전히 이렇게 괴리되어 있다보니까, 막 3백년씩 교육 받고 오신 꼬리 긴 분들이 오히려 현장 바로 투입된 최하급악마들보다도 일을 더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단 말입니다"

다들 보고 들은 것이 있다보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있던 또다른 다른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문제고, 개인적으로 매니저 업무도 함께 하다보니 느끼는게, 지금 무서운 속도로 영혼회수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1년에 악마 한 명당 막 수백개씩 영혼 회수해 왔는데 요즘 솔직히 1년에 두세건 계약도 어렵습니다. 예전 같으면 간절히 '그 양반'한테 기도하다가 도저히 안 이뤄지니까 욱하는 마음에 악마한테 비는 인간들이 있었잖습니까? 근데 이제는 사람들이 기도 자체를 안할 뿐더러, 더 심각한게 신념 자체가 없다보니 기도빨이 우리한테까지도 안 전해지는 겁니다. 인간들 정신이 너무 심하게 나약해져서, 이제는 우리들 악마들조차도 기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인거죠"

그 말에는 정말 다들 "아" 하는 탄성을 느낄 정도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지옥국 정책과장을 맡고 있는 상급 악마가 반박했다.

"에, 저도 그 상황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합니다만, 인간들 정신이 나약해지고 황폐해질수록 타락하기 쉽다, 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악마학개론 첫페이지에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영혼의 직접 회수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에 반비례해서 사후에 바로 우리 지옥으로 들어오는 폐급 인간쓰레기들은 지난 100년 전에 비해서 거의 스물다섯배가 됐거든요? 그 부분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의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점은…"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지옥국 내정을 맡고 있는 또 다른 하급악마가 갑자기 흥분하며 그의 말에 반박했다.

"형벌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부분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정책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인성 쓰레기 인간들을 양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어느 정도냐면, 지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200명 정원인 유황탕에 지금 15,000명이 넘게 집어놓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유황탕 온도가 낮아져서 그냥 온천욕 시켜주는 상황이 되고 있구요, 고문악마들은 지금 5년째 파업 중입니다. 지금 감시탑에서 농성하는 것에 지금 그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있는…"

예민한 사회적 이슈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회의를 주최한 벨제뷔트가 "그만" 하며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모두가 조용해지자 재무국의 상급 악마 하나가 우려의 발언을 시작했다.

"제가 느끼는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인간 국가 사이의 행복격차 벌린다는 명목 하에 일부 국가들에 대한 유혹부양책을 장기간 실시하고 있는데, 이게 다소 과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부분입니다. 요즘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주 시시한 걱정들을 하고 삽니다. 끽해야 남보다 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뭘 더 쳐먹으면 맛있을까, 뭘 하면 더 멋져보이나, 내 탐욕을 끝까지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들을 하고 살죠. 물론 이 과정에서 정말 유달리 대단한 데미데블들이 탄생하기도 합니다만 큰 고생들을 안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끔찍한 짓을 분명 덜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전처럼 빵 한 조각 때문에 사람 죽이고 이런거 보기 힘들단 말입니다"

나이 든 악마들이 그의 말에 크게 공감을 했다. 재무국 악마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저희 재무국이 올 하반기부터 슬슬 자본계 실무진 통해서 금리인상 시작하고 경기압박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인간계 파견나가 있는 자본계 실무진들도 각자의 입장이 있고, 인간들도 아시아 금융위기다, 서브프라임이다 하면서 겪은게 있다 보니까 예전처럼 일사분란하게 도미노식으로 세계경제 박살내는게 잘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이게 정책쪽 악마 실무진들이랑 연계를 해서 미리 다 넘어갈 수 있도록 딱 세팅이 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엇박자 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난데없이 한방 얻어맞은 인간정치국 악마들이 손을 번쩍 들며 반박을 했다.

"에, 저는 미주권 정치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부분, 일견 공감되는 부분도 있는데요 다만 이게 전부 저희 측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지금 확실히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게 지금 다른 분들도 오해하고 계시는데, 이를테면 이겁니다. 무슨 우리 악마계 애들이 일을 엉망으로 해서 손발이 안 맞아서 딱딱 필요한 정책이 추진 안된다? 그럼 이런 생각들을 왜하냐, '인간 정치인들은 모두 우리 입김 하에 일하는 애들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우리 그렇게 일 안 한지 50년도 넘었습니다."

정치국 악마들이 크게 공감하며 웃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그랬죠. 네로부터 히틀러도 그랬고. 권력 가진 또라이 대가리에 이상한 생각 박아놓고 일 크게 치루게 만드는거. 지금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일 안 합니다. 왜냐? 그런 식으로 하다가 못 써먹게 된 정책들이 지금 몇 갭니까? 군국주의, 전체주의, 독재 뭐 이런거 이제 어지간한 인간 나라들은 최소한 교육적으로는 그런거 하면 안된다고 가르치거든요? 물론 지금도 옛날식으로 일하는 계발도상국 파견 악마들은 그렇게 하지만, 대가리 굵은 선진국에서는 그런거 잘 안 통하거든요. 이미 극우, 극좌 이거 다이렉트로는 둘 다 다 안 통합니다. 아예 그래서 저희가 아 이거 자꾸 이러다가 하나둘씩 막히면 나중에 정작 필요할 때 못 써먹겠다 싶어서 아예 정책을 바꾼게 이겁니다"

그는 머리 위에 링을 슥 그렸다.

"저쪽 애들 맨날 입에 발린 말들 하잖습니까. 지들도 못 지키는 말들. 남한테 싫은 소리 하지마라, 남 존중해라, 소수자 무시하지마라, 건전하게 살아라 이런거. 이거 캠페인들 하는거 보고 딱 떠올린게 이겁니다. 그럼 아예 우리가 이거 역으로 완전 미친듯이 밀어주자, 어디 정말 제대로 되기는 하나 보자. 당연히 안되죠. 인간들이 그게 가능하면 지옥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바로 역풍 불고 대립 세력 일어나고 이제 그런 말들 하는거 자체가 특정 세력으로 규정되고 눈치보이게 만들었죠. 자, 그럼 이제 판이 어떻게 돌아가냐, 신개념 극단적 대립구도 완성입니다. 이제 이쪽 당이 하는 일은 저쪽 당은 무조건 눈 감고 반대하는거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옛날에는 그게 신분 단위로 대립했다면 이제는 아예 사상적으로 완전히 쪼개놓은거죠. 그러다보니까,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일사분란한 정책 추진이 잘 안되는 면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거로 인한 손해보다는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인간세계의 사회적 소모가 훨씬 더 크거든요"

정치국 악마가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너무 깊이 들어간 이야기여서 그런 것일까. 좌중이 잠깐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실무 악마가 보다 실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무회의 같은 말씀 와중에 이건 너무 지엽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조금 그렇긴 한데 굳이 또 말씀 드려보자면 요즘 저희 악마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또 다른 어려움은… 인간들 너무 똑똑해진거 아닌가 하는 부분입니다. 아까 영혼회수율 이야기도 나와서 말인데, 예전 같으면 떡밥만 던져도 바로 말장난에 속아서 영혼만 날리는 인간들 많았는데 요샌 아니거든요. 어찌나 영악한지 계약 꼼꼼히 살피고 말장난 같은거 다 잡아내고 그래서 옛날처럼 말장난 그런거 안 통하거든요. 오히려 계약 이행하다가 우리가 인간 말장난에 속아서 재산 털리고 영혼 회수도 못하고 인생 조지는 악마들이 지금 하나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 수십 년간 크게 불거진 문제를 들고 나오자 다른 악마들도 고개를 새삼 끄덕였다.

"근데 이게 왜 그렇게 됐냐? 바로 우리 악마들이 데미데블 좀 만든답시고 사기 기법 전수하고 그 놈들로 크게 한탕 땡기게 만들고 이러다보니 피해 입은 인간들이 점점 안 속으려 진화한거거든요. 쌍끌이 어망으로 어족자원 박살내는 짓이랑 뭐가 다릅니까 이게. 어느 정도냐면, 중점 공략지역 '대한민국' 같으면 진짜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사기경험 있는 수준입니다. 아니 정도껏 해야죠. 물론 다들 실적 문제가 걸려 있으니 영업방식 쉽게 바꾸기 어렵고, 환경적으로 특정범죄들이 유리한 나라들이 있긴 한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하다보면 점점 일하기 더 어려워질 겁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정말로 기탄없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현재 지옥국의 정무적 문제점부터 현장의 고충까지. 모두가 지옥의 발전과 거악의 승리를 위한 충심 어린 의견들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좌중을 훑던 최고장관 벨제뷔트는 문득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무력부 악마들을 향해 물었다.

"무력부 쪽에는 별 의견 없는가"

지옥 악마회에서 항상 으뜸 발언권과 위상을 가진 무력부. 인간의 전쟁을 부추기고 그들을 타락시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있을 선과 악의 최종 결전, 아마겟돈을 준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지옥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헛기침을 하며 잠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던 무력부 악마들이었지만, 그 중 프로파간다 임무를 맡고 있는 무력부 홍보부 하급 악마 하나가 그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우선 현재 수행 중인 대형 전쟁 리스트로는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보코하람 반란, 시리아 내전이 있으며 중소형 전장으로는 소말리아 내전, 터키-PKK 분쟁, 와지리스탄, 멕시코 마약전쟁, 리비아 대전, 예멘 내전, 시나이 반란, 남수단 내전 등이 있습니다. 현재 대형 전장은 몇 군데 추가로 준비 중입니다만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며…"

하지만 벨제뷔트는 혀를 찼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닌데"

그러자 하급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러나 저희가 답변 드리고 싶은 부분은 사실 다른 쪽에 있습니다. 이제 예전과 같은 대형 전쟁이 발생하면 핵무기 사용이 불가피하고, 그때의 인명피해는 복구가 쉽지 않은 수준으로 인류의 숫자가 격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경우 일시적으로는 망자들이 늘어나겠지만 우리가 아마겟돈을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준비해야 할 타락한 영혼들의 숫자를 보자면 장차적으로 손해일 것입니다. 현재처럼 서서히 인간들 전체가 타락해나가는 쪽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에는 보다 유리합니다."

'궁극의 악은 전쟁'이라고 믿는 원로 악마들 사이에서 "크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들이 터져 나왔고, 반대로 사상전쟁을 수행 중인 문사철 악마들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말을 반겼다. 사실 저러한 발언이 무력부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지옥의 정책은 이미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너무 우울한 말씀들만 터져 나오는 것 같아서 저희가 기분 좋은 소식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력부 첩보실 상급악마 하나가 좌중의 분위기를 수습하듯 슥 일어났다.

"작년 기준 현재 지옥으로 편입한 타락한 인간의 숫자는 약 5천 9백만명으로, 작년 대비 3% 증가한 수준입니다. 그에 반해 천국으로 입성한 인류는 12명으로, 현재 지난 100년 통합 채 1,000명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며 이러한 추세가 100년만 더 유지된다면 이제 아마겟돈에서도 우리가 확실히 유리한 숫자가 됩니다."

전쟁 수행의 최종적인 무기는 결국 머릿수. 타락한 영혼이 많으면 많을수록, 악의 군세는 강성해질 것이며 싸움의 치열함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모두가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신학부 종교심판관 악마가 물었다.

"음, 그렇다면 오히려 조금 위험한 상황 아닐까요. 인간이 타락에 끝에 이르면 또 한번 대홍수가 있을지 어찌 압니까"

대청소. 그 말에 다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의외로 첩보실 상급 악마는 빙긋 웃었다.

"이미 지금도 우리가 머릿 수에서는 압도적이라 전력에서 크게 불리한 것은 없는 수준입니다. 지난 100년간 인류의 타락은 도를 넘어선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대홍수급의 재앙이 일어나면 그때 일어날 인류의 아귀다툼과 타락은 정말 볼만할 것입니다. 꾸준히 타락하여 140억의 영혼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한방에 70억 받느냐 수준의 차이일 뿐,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나쁠 것 없는 딜입니다. 그리고 '그 분'도 옛날에 소돔, 고모라 인구 한 오백명 죽이는 것은 쉬워도, 지금처럼 한방에 70억 죽이는 것은 부담이 있을 겁니다"

모두가 그 말에 안심하며 빙긋 웃었고, 앞선 수많은 토론내용의 우려를 일시에 잠재우는 인류의 끝없는 타락이 가져올 미래 전장의 승기에 만족해했다.

"그럼, 기분좋게 오늘의 회의는 여기에서 끝내기로 하고, 오늘 나온 다양한 의견들은 각 부처 상급악마들이 실무에 반영하여 올해는 더이상 '인간보다 착한 악마'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같은 부끄러운 소리는 하지도 듣지도 말도록 합시다. 이상!"

벨제뷔트의 회의 종료 선언과 함께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쁘게 인간계로 흩어졌다.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도, 인류의 곁에서 그들의 죄악을 부추기며 영원한 구원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성실히 그래왔듯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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