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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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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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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야 밥 먹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강아지 밥을 준다. 아, 방금 전에 말한 '애기'는 강아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 이름은 둘둘이다.

"둘둘이도 밥 먹어"

하얀 푸들. 사실 나는 강아지 중에서 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둘둘이만큼은 예외다. 이 놈은 정말 똑똑하니까. 꼬리를 좋아라 흔들며 밥을 먹는다.

"왔어?"

아라는 부스스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간신히 세수만 하고 식탁에 앉는다. 푸석푸석한 피부. 건조한 목소리와 부은 눈.

"왜? 나 새삼 보니 너무 못 생겼어?"

얼굴을 매만지며 하는 자조적인 농담. 나는 웃으며 "아니, 완전 이쁜데? 우리 애기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하고 그녀의 앞으로 계란말이를 슥 내민다.

"얼른 먹어. 그래야 이따 약 먹지"
"응"

아라의 피부는 이제 새하얗다 못해 파리하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은 탓이다. 식사도 꼭 내가 있을 때만 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잘해야 담배 사러 나갈 때 정도. 그때도 항상 마스크에 선글래스, 후드티에 에어팟은 필수다.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우울증,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갑상선 항진증, 부정맥, 자가면역성 각막 알레르기, 편두통, 두통, 불면증, 빈혈, 피부 소양증 등등, 그녀가 겪고 있는 병들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물론 먹어야 하는 약도 한가득이다. 그녀도 나도 두렵다. 맨날 그렇게 한주먹씩 약을 먹어도 과연 간에 무리가 가지 않을런지. 게다가 그녀가 앓고 있는 병 상당수에 효과 있는 약물이 그나마 스테로이드다. 빌어먹게도.

"밥 먹고 요 앞에 산책 나갈까"

나의 제안에 아라는 의외로 순순히 "그러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로서는 근 3일 만의 외출이다. 아라의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덜한데, 혼자 있을 때는 이제 외출을 점점 덜하고 있다. 창도 하루종일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만 바라볼 뿐이다.



"많이 춥다. 그래도 둘둘이 데리고 나올걸 그랬나?"

검은 후드에 검은 롱패딩, 검은색 에어포스를 신은 채 마스크를 챙긴 아라. 긴 앞머리로도 가리지 못하는 예쁜 눈매가 여전히 나를 설레이게 한다.

"아냐, 둘둘이 산책은 아까 내가 시켰어. 두부 사러 나갔다 오면서"
"그렇구나"

아파트 근처 산책로를 따라 20분쯤 걸은 후,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이제는 그냥 담배는 못 피우지?"
"응, 전자담배 피우다가 그냥 담배 피우면 너무 독하고 맛도 이상해서 못 피우겠어"

아라가 먼 산을 바라보며 내뿜는 담배연기는 항상 묘하게 쓸쓸하다.

"들어가자"
"응, 춥네"

하루 반나절을 자고 일어나서 휴대폰으로 각종 모바일 응모 이벤트를 하고, 인터넷 유머 사이트들에 올라온 베스트글을 거의 다 읽고, 심심할 때면 심즈나 동물의 숲을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굶거나 혹은 내가 사다놓은 혹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고,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해 또 자다가 일어나 일어나 퇴근한 나를 맞이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렇게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한다. 그리고 둘둘이와 잠시 놀아주다가 밤이 되면 약을 먹은 뒤, 끌어안고 잔다.

그게 우리의 평화다. 어떨 때면 아라가 빵을 굽거나 푸딩을 만든다. 정작 식사 솜씨는 엉망이지만, 이런 제과 제빵은 제법 솜씨가 좋다.




그러나 가끔 심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어떤 기간이 되면 아라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 거의 36시간을 피곤해 죽을 것 같아하면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이상증세를 보이며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거나 손톱을 물어뜯는다. 약에 취해 자거나 기절하듯 갑자기 쓰러져 잔다. 기면증처럼.

그 즈음이 되면 우리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연인의 싸움을 넘어 쌍욕과 처절한 저주의 말이 오가고, 자살 위협과 자학, 자해의 쇼가 밤마다 서로를 할퀸다. 며칠 간의 그 지옥과 같은 기간이 지나고, 이윽고 싸우다 지쳐 누군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비로소 서로의 감정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뒤늦게 화해무드가 펼쳐진다.

무한의 싸이클, 5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동거생활은 언제나 그랬다. 그 주기는 보름이 넘을 정도로 길 때도, 3일 단위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간만에 그 싸이클이 도래했다.

"그냥 나 죽어버릴래"

무슨 지랄을 했는지 바닥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아라. 가만히 보니 허벅지에서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하혈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저번처럼 성기에…. 내 낯빛까지 변해가며 당황하자,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허벅지 심하게 긁었더니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가서 피가 난거야. 닦으면 돼. 사타구니 조금 쓰린 정도야"

나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서 새 독일행주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봐봐"
"됐어"
"보라고, 벌려봐"
"됐다고!"

이쯤해서야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차라리 빠른 포기가 나을 수도 있다. 나는 바닥에 얌전히 행주를 내려놓는다. 아라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그냥 나는 너한테 도움이 안되는 인생이야. 매일 그 년이 생각나. 그리고 요즘 더 생각이 나"

나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다.

"야,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야"

하지만 아라는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묘하다. 슬픈 눈빛일까, 나를 경멸하는 눈빛일까, 잡아달라는 눈빛일까.

"너한테는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귓 가에 생생해. 그리고 밤에 잘 때가 되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얼마나 무섭고, 싫은지 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바람 피웠던거, 그것도 3년이나 피운 거 정말 죽도록 미안한데… 이제는 잊을 때도 됐잖아. 아니 니 말대로 평생 나 원망하고 그래도 좋은데, 이제 자학은 안 해도 되잖아"

아라는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말했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 너 처음 만났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너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 너랑 그 년 때문에, 니 두 년놈 때문에"

내가 대답 대신 또 그냥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자 아라는 털썩 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말해줄까. 내가 진짜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정말 몰랐다. 니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년 때문이야"

나는 그저 내가 피운 바람 때문에, 그리고 그 수습 과정에서 내가 우유부단 했던 것 때문에, 그게 아라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가면





가영과 나는 사내커플이었다. 작은 마케팅 회사에서 청춘남녀들이 하루종일 가족보다도 더 오래 바쁘게 일하다보면 불꽃 같은 우정이 생기거나 전장 속의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다. 우정과 사랑의 수식어가 바뀐 것 같아도 사실이 그렇다.

동갑내기 그녀는 적어도 당시의 나보다는 이래저래 더 우월한 여자였다. 그녀가 엄청 우월했다기보다는 내가 부족한 형태로. 지질한 너드같은 나와는 다른, '보통에서 살짝 그 위를 넘나드는' 계급의 사람이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겠느냐만 적어도 결혼을 서서히 생각할 나이의 남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래서 사실 딱지 맞을 것을 예상하고 고백했다. 오히려 속으로는 '그래, 차라리 딱지 맞고 이제 쿨하게 정말 열심히 다른 여자애 알아보자' 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정말 그 1년 동안의 허무한 짝사랑을 끝낼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좋아,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말하는 순간 바로 난 회사 관두고 너랑 헤어질거야. 난 사람들이 뒤에서 너랑 나 두고 수근거리는거 죽기보다 싫어"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기쁜 대답이었다. 물론 다른 누군가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 한 켠이 조금 쓸쓸해지는 이야기였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나만의 연예인'이나 다름 없었던 그녀를 그렇게 나의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철저했다. 사내커플은 결국 누군가에게 들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이들조차 짐작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단 둘이 같은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었고, 같은 회사를 다니는 기간 동안 둘이 같은 시기에 휴가를 쓴 적도 없다. 그녀가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오로지 금요일 밤에 가서 일요일 밤, 월요일 새벽에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그 철저함 이면으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갭이 컸다. 지금의 내 모습만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의 나는 분명한 찌질이였다. 외모도, 생각하는 것도 관심사도 수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영이 나를 받아준 이유조차 궁금할 정도로. 그저 어쩌면 여자들 일생에 한두번쯤 찾아오는 '착하고 못난 똥차와 사귀는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정말 그녀에게 순정을 바쳤다. 가영이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못되게 굴어도 나는 혼자 분을 삭힐 지언정 마냥 그녀를 즐겁게 하기 바빴다.

갑자기 그 한참 이후의,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어느 직장 여자 동료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솔직히 지금 남편 처음 만났을 때는 외모도 취미도 말하는 것도 뭐 여자 챙기는 것도 다 엉망진창이었어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냥 만나보자고 했는데, 딱 알잖아요. 이 이 남자 연애경험 별로 없구나 싶은거. 연애 못하는 티도 많이 났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꾸밀 줄도 모르고. 근데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열렸냐면… 한번은 내가 그냥 그만두자고 하면서 막 되게 모질게 가슴에 상처주는 말을 했어요. 정나미 떨어지고 그냥 돌아서게 하려고. 안 그러면 이 남자한테서 미안해서 나도 못 헤어질 거 같애서. 근데 그렇게 막 되게 모진 말을 했는데, 그래서 막 그게 분명히 그 사람한테도 상처가 됐는지 눈물 흘리고 손까지 떨리는거 보이는데도… 끝까지 나한테 '그래도 나한테는 니가 제일로 이뻐서 사귀는 내내 즐거웠어. 나같은 놈이랑 사귀어줘서 고마워. 행복해라' 하면서 돌아서는데… 그리고 막 자기 감정 주체 못하고 얼굴 막 쓸어내리면서 가는데 아 그 뒷 모습이 진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내가, 내 주제에… 내가 정말 내 스타일의 마음에 드는 남자 만난다고 해서 내가 이 남자처럼 나한테 잘할 그럴 사람이 또 있을까? 뭐 연애 감정 좀 지나면 본성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누가 이 남자만큼 나한테 무식하게 잘해줄까 싶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불러서 잡았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내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 역시 가영에게 잘했다. 한달 월급 160만원 받던 시절에 카드값만 180만원을 썼다. 데이트 비용이 그랬다. 물론 가영에게는 가급적 티도 안 냈다.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다. 호구의 연애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마치 부모의 그것마냥 사랑하는 그녀가 무엇을 해도 좋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 하지만 그 행복함은 매번 오래가지 않았다. 내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하는 연애였지만 그것이 가영의 눈에는 언제나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모처럼 정성을 다해 고른 그 선물도 가영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고, 내가 모처럼 차려입은 옷도 가영에게는 패션 테러였으며, 내가 모처럼 찾아본 데이트 코스는 그녀에게 뻔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 …"

돌아오는 길의 택시 안은 언제나 조용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아쉬운 조잘거림 대신 침묵이 그 자리를 곧잘 대신했다. 나의 손길마저 부정한 채 그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2년에 걸쳐 서서히 초조함에서 당혹감, 외로움에서 자괴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정점이 된 계기는 언젠가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가영의 사촌오빠였다.

"어! 가영아!"
"어?! 형석 오빠!"

데이트를 하던 중, 횡단보도를 건너려 대기하던 중 갑자기 옆에서 가영을 보고 아는 척을 하는 왠 훤칠한 남자. 누군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먼저 사근사근하게 "아, 가영이 사촌 오빠에요. 둘은… 남자친구?" 하고 씩 웃는 그. 사촌오빠라는 말에 경계심을 풀며 씩 웃고는 악수를 나누기 직전 가영의 말.

"아니야, 남친은 무슨. 그냥 친구야"

쑥쓰럽게 웃으며 악수를 내밀던 나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고, 뒤늦게 다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촌 오빠는 "어어, 그래요. 어쨌든 둘이 재미나게 놀아요" 하고 금방 사라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머릿 속에서 "그냥 친구야" 라는 말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화를 냈다면 어땠을까. 가영은 이후에 들린 식당에서 평소답지 않게 "그냥, 이모가 알면 이러쿵 저러쿵 막 어른들한테도 말하고 그럴 거 같아서 그랬어" 등의 말로 애써 수습하려 했고, 나도 "그래, 뭐 당황스러울만해"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결국 그 날은 도저히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의 나는 참 외로웠다. 지난 2년간의 연애가 송두리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거의 우리 5~6년 만 아니에요? 아니 더 됐나?"

대학교 시절, 죽어라 열심히 활동했던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였다. 단 한번의 오프라인 정모에서 은근한 썸과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던 우리는 아주 뜻밖에 역시나 함께 활동했던 멤버 재훈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셋이 보기로 해놓고 정작 재훈이 다른 급한 약속으로 빠졌지만, 확신컨데 나와 아라는 아쉬워하는 대신 오히려 기뻐했던 것 같다.

"영화요? 좋아요! 뭐 볼까요? 보시고 싶은거 보세요. 저는 다 좋아요"

신선했다. 언제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추어 신중히 고르고 까탈스러운 재가를 거쳤어야 했던 가영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연인 사이에서 당연토록 누렸어야 할 그 무엇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저 오랫만에 만난 '아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에 여자친구까지 투영해서 비교하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하고 못났지만, 그만큼 그런 감정에 목말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우리 조만간 또 봐요!"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대화하고 영화 보고 헤어지는, 가영이의 표현을 빌어 "연애 못하는 것들이나 하는 뻔하고도 재미없는 데이트 코스"에 정작 나 이상의 묘한 긴장과 설렘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는 아라가 좋았다. 단언컨데, 가영과의 연애 중에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어떤 그런 행복 어린 표정과 시선이 좋았다.

"그래요"

이제 인사를 하고 집을 향해 돌아서야 할 타이밍에 서로 뭔가 묘하게 아쉬어서 미적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들뜬 내 마음. 반나절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에 어떤 확신을 쏟아내는 아라의 말.

"아, 근데 혹시 요즘에 만나시는 분 있으세요?"

물론 그 말에 나는 "아니요. 있으면 좋겠죠. 저 요즘 엄청 외로워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고, 밝아지는 아라의 표정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가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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