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년 만이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냈어?"
간단한 안부 인사를 서로 건내고, 시시한 근황 이야기를 잠깐 하며 맥락이 살짝 끊기자 그제서야 어렵게 그녀가 본론을 말한다.
"혹시 여윳돈 좀 있어?"
코웃음을 참은 것은 그동안 나도 사회생활 단련이 조금 됐다는 증거이리라. 하지만 나는 가타부타 말을 하기 전에 액수부터 물었다. 애초에 액수가 크면 빌려줄 수도 없을테고, 아주 작으면 작은대로 줘버릴 수도 있을테니 우선은 용처보다 액수가 더 중요하다.
"한 삼백? 가능하면 오백이면 더 좋고…아니, 혹시 천은 가능해?"
그 정도면 빌려주지 못할 돈은 아니지만 빌려주고 떼이면 속 좀 쓰릴 돈이다. 게다가 말하면서 간 보는 폼새가 쌔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절하는게 맞다.
"아니. 요즘 나도 거지야"
말하고 난 직후에 아까 근황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연애를 안 해서 돈도 굳네" 하고 허세를 풀었던게 생각났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랴. 보통은 그렇게 어색하게 전화가 마무리 되고 연락도 다시 끊기는게 정석이겠지만, 다영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꽤나 집요한 애다.
"나 너네 집 근처인데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나 밥 사줘. 밥 사먹을 돈도 없어.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
사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저녁도 거절하는게 맞겠지만, 거절하기에 다영은 너무 예쁜 애다.
"이야, 뭐야, 남자 만나러 가냐?"
흰 크롭탑에 아이보리 반바지, 같은 색의 린넨 썸머재킷을 걸쳐서 그나마 살짝 민망함을 가리긴 했지만 새하얀 허벅지의 타투는 확연한 존재감을 뽑낸다.
"너는 남자 아냐?"
"오"
몇 가지 드립이 생각 났지만, 자제했다. 어중간한 드립 쳤다가 애매하게 물리면 뜨밤 한번에 몇 백을 건내야 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구질구질한 경고등이 켜졌으니까.
"뭐 먹고 싶어?"
"고기 먹자"
"옷에 냄새 배도 돼?"
"어차피 집에 갈건데 뭐"
별 고민없이 한우집에 데려갔다.
"고기 먹자니까 바로 소고기야? 야 너 돈 많지? 그럴 돈 있으면 나 돈 빌려주라고"
"아니, 천하의 임다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위로해주려고. 맛난거 사주려고. 나도 임마 카드빚으로 사주는거야"
"그래"
곧바로 등심과 안심을 주문하고, 종업원이 구워주기를 기다리며 잠시 허튼 소리를 하다가 그가 "맛있게 드십시요" 하고 자리를 비키자 그제서야 다영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기 당하고, 전과 생기고, 나 진짜 자살할거 같애"
"뭐?"
하드코어한 키워드 서너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차근차근 달래서 이야기를 살짝 듣노라니 이건 사실 소고기 먹으며 할 주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꼼장어 먹으며 포차에서 소주 부으며 먹을 이야기다.
"야, 그럼 우울한 이야기 잠깐 나중에 하고, 맛있는 고기 기분좋게 먹고 그건 2차로 이야기 하자"
"응"
다영은 내 반응에 피식 웃더니 그러자며 웃는 얼굴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잠시 우울함이 비쳤지만 그래서 더 예쁜 얼굴이다. 전형적인… 너무 예쁘고 섹시해서 평생 주변에 남자들이 줄줄 따르지만 이상하게 인생 거지같이 굴러가는 애들. 평생 눈물 많을 그런 처연한 미인. 그래서 더더욱 남자들이 안아주고 싶지만 사실 그 누구에게도 감당 안 되는 그런 타입의 미인.
"여기 진짜 맛있다"
돈만 많다면 평생 매끼라도 못 사줄까.
든든히 먹고 나서 계산하는 것을 유심히 본 그녀는 "22만원? 야, 너무 비싼데?" 하며 기겁을 하지만, 정작 주문할 때 가격표 다 보아놓고는 돈 타령하는 학습된 걱정도 조금은 귀엽다.
"됐고, 술 마시러 가자"
"응"
서로 이미 배가 제법 불렀기에 2차는 근처의 실내포차로 갔다. 마른 안주와 과일 빙수를 시키고 소주를 시켰다. 두어잔을 빠르게 마신 후, 다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세사기를 당했어. 아니 사기도 아니래. 무슨 법적으로 주인 빚을 은행이 먼저 빼가고 나는 그 돈 다 털린건데, 주인은 배째라고…"
이야기를 띄엄띄엄해서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근저당 이슈 어쩌구 때문에 피 눈물 흘리는 그런 이야기. 그런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내 주변에 있었다니.
"그래서 얼마 날린건데"
"9천만원"
한숨이 나왔다.
"그거 뭐 그 돈 다시 어떻게 받을 방법은 없는거야?"
"주인이 갚으면 되는데, 어디 하루 이틀 사이에 갚겠어?"
"갑갑하네. 그럼 그리고 전과는 뭔데"
"모욕죄"
그 대목에서는 껄껄 웃음이 나왔다.
"뭐 연예인한테 악플이라도 단 거야?"
"연예인은 아니구, 카페에서 미친 년 사연에 댓글 좀 달았는데 그 미친 년이 지 잘못한거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소를 걸었네? 한 몇 십 명이 고소 당했나 봐"
"합의를 하지?"
"그쪽 변호사가 삼백만원 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딨어. 그래서 벌금 오십만원 물고 말았어. 아 시발"
"그거 민사 또 들어올 수도 있는데?"
"몰라"
사연이 사연이다보니 술이 쭉쭉 들어간다. 불과 10분 만에 각 일 병씩을 비웠다.
"살살 마셔"
"나 지금 술 거의 두 달 만에 마시는거야. 괜찮아"
"허"
원래는 저녁이나 사주고, 대충 사연이나 조금 듣다가 돌려보냈어야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고 간만에 보는 얼굴인데다 예쁘장한 애가 실실 웃으며 내 이야기 잘 들어주니 나도 함께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럼 그렇게 헤어진거야?"
"어쩌겠어. 조건 좋은 남자 생겨서 갈아 타겠다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다영은 그 즈음해서 지그시 내 표정을 바라보더니 "너 요즘 많이 괜찮아졌다. 수염 기르니까 남자 같네" 하며 뜬금없는 끼를 부린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 됐어" 하고 웃었다. 다영도 두 달만의 술이지만, 나도 거의 몇 주 만의 술이다. 코가 얼큰해지며 취하는 것을 느낀다.
"나도 남자 안 만난지 오래 됐어. 올 초에 헤어지고 지금까지 나 계속 혼자였어. 도저히 연애할 멘탈이 아니라서"
계속 의미심장한 말을 툭툭 던져온다. 얘가 좀 인생 피곤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막 어설프게 들이대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역시 돈 때문일까.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그냥 묵묵히 있자, 그녀가 먼저 "야! 돈 달라고 안 해" 라면서 피식 웃었다. 그제서야 나도 민망하지만 "주고 싶어도 줄 돈도 없어요. 나 그렇게 쪼잔한 남자 아냐 임마. 없어서 못 주는거지" 하고 어설프게 받았다. 다영이 그 말을 하며 얼마나 속이 좀 그랬을까 생각하니 미안했다.
"집 구경 시켜줘. 나 너 자취방 한번도 안 가봤잖아"
"뭐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머릿 속으로 집에 남은 콘돔이 있던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지낸 기간이 10년이 넘는 사이의 여사친. 솔직히 레벨이 높으니만큼 가능성이 낮다는거 알면서도 은근하게나마 고백도 두어번 했었고, 당연히 까였음에도 적당히 수습해서 친구로 지냈다. 아니 친구로 지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게 연말연시에 "새해 복 많이 받아" 혹은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식으로 가끔 연락한게 전부고, 실제로 얼굴 본 것도 그 이전에도 거의 1~2년에 한 두번 꼴이었으니까.
"사는게 많이 힘들어"
그런 그녀와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섹스 후의 나른한 대화를 나눈다는게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존버 대성공이지만, 이걸 성공이라고 할 수 있나.
"쉽지 않지"
공허한 말에 공허한 대답을 했다. 가슴에 다영의 눈물이 흐르는게 느껴진다. 혼자 처연한 분위기에 젖는 것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눈물이 내 가슴 사이를 타고 흐르는게 너무 간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슥 닦았다. 그리고 그게 웃겼는지, 다영은 우는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짝 쳤고, 나도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아 진짜 분위기 너무 깬다 너"
"아니 나도 참을만큼 참았는데 넘 간지러웠어"
머쓱하노라니 의외로 그게 귀여웠는지 다영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며 심볼을 슥 쥐어온다. 단번에 다시 시동이 걸리고, 머릿 속에서는 이미 다영과 함께 '힘든 처지이지만, 둘이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는 다정한 신혼부부의 미래'를 그려본다. 이것저것 잴 거 없이, 그냥 내 주제에 이런 여자면 감지덕지 아닐까, 적당히 맞춰주고 적당히 이해하며 그렇게 고난의 바다를 함께 두 손 잡고 넘어가면 되는거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새벽 3시 반이나 됐을까. 잠시 곤히 잠들었던 다영은 부스스 일어난다. 나도 깨어나 "더워? 에어컨 켜줄까?" 하고 물었지만, 의외로 다영은 "아니야. 집에 가야지" 하고 새벽인데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고 가. 피곤한데 뭔 난데없이 새벽에 집에 가겠다는거야"
"집에 퍼피도 있고"
"강아지가 반나절 늦게 본다고 어떻게 되냐"
"나 이미 이틀째 집에 안 들어갔어. 밥 다 먹고 굶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럼 어제, 그제는 어디서 누구랑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냥 자고 가. 아침에 집까지 차로 태워다 줄께"
다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럼 아침 6시에 일어나자" 하면서 다시 누웠다. 그러나 한번 훅 일어난 의문은 묘한 생각으로 접어든다. 새벽 3시에 굳이 가야겠다는 것은, 어쩌면 뒤늦게라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같은 뭐 그런 지저분한 생각.
"미안해"
다영은 침대에 누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물었다.
"뭐가"
"그냥"
잠시 고민하던 다영은 "그냥,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던거 후회돼서"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왜 후회되는데. 어려우면 여기저기 손 내밀게 되는거지 사람이"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건데, 내가 너무 생각가 없었어 아까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이 급하기로서니 남사친이라고 하기도 뭐한 3년간 연락 없었던 남자한테 불쑥 돈 빌려달라고 연락을 하고, 그 남자에게 밥 얻어먹고 술 얻어마시고 심지어 잠이나 자고. 내가 지금 뭐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야 새벽에라도 정신 들었을 때 집에 훌쩍 가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나 역시도 방금 전에 괜한 생각을 했구나 싶어서 미안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마. 그보다 돈 떼어먹히고, 벌금 물고 뭐 오케이. 근데 나한테 돈은 왜 빌리는건데?"
"월세방이라도 당장 구해야 하니까. 근데 다들 요즘 어렵기도 하고, 나도 주변 사람들한테 잘한 것도 없으니까 돈 빌리기가 어렵더라"
한편으로는 이 모든게 다 나한테 돈 빌리려는 작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이 와중에도 또 해보지만, 너무나도 밀려오는 잠에 그렇게 눈꺼풀을 감는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다영은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이었다. 잠결에 샤워하는 소리도 듣고,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긴 한데 난 다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간만의 과음 탓이었을까.
"밥 먹고 가. 요 앞에 아침 백반정식 잘하는 집 있어"
아쉬움에 그녀를 붙잡아 보지만, 다영은 "그러다가 내일까지 있겠는데?" 하며 웃는다. 나는 "그냥 여기서 살아도 돼" 하고 농담인 척 진담을 건내지만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현관에 애완동물 금지라고 써있더라" 라며 역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답을 돌려준다.
"태워다 줄께 조금만 기달려. 세수만 할께"
"아니야, 택시 타면 금방인데 뭐. 피곤할텐데 그냥 자"
"잘 지냈어?"
간단한 안부 인사를 서로 건내고, 시시한 근황 이야기를 잠깐 하며 맥락이 살짝 끊기자 그제서야 어렵게 그녀가 본론을 말한다.
"혹시 여윳돈 좀 있어?"
코웃음을 참은 것은 그동안 나도 사회생활 단련이 조금 됐다는 증거이리라. 하지만 나는 가타부타 말을 하기 전에 액수부터 물었다. 애초에 액수가 크면 빌려줄 수도 없을테고, 아주 작으면 작은대로 줘버릴 수도 있을테니 우선은 용처보다 액수가 더 중요하다.
"한 삼백? 가능하면 오백이면 더 좋고…아니, 혹시 천은 가능해?"
그 정도면 빌려주지 못할 돈은 아니지만 빌려주고 떼이면 속 좀 쓰릴 돈이다. 게다가 말하면서 간 보는 폼새가 쌔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절하는게 맞다.
"아니. 요즘 나도 거지야"
말하고 난 직후에 아까 근황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연애를 안 해서 돈도 굳네" 하고 허세를 풀었던게 생각났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랴. 보통은 그렇게 어색하게 전화가 마무리 되고 연락도 다시 끊기는게 정석이겠지만, 다영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꽤나 집요한 애다.
"나 너네 집 근처인데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나 밥 사줘. 밥 사먹을 돈도 없어.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
사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저녁도 거절하는게 맞겠지만, 거절하기에 다영은 너무 예쁜 애다.
"이야, 뭐야, 남자 만나러 가냐?"
흰 크롭탑에 아이보리 반바지, 같은 색의 린넨 썸머재킷을 걸쳐서 그나마 살짝 민망함을 가리긴 했지만 새하얀 허벅지의 타투는 확연한 존재감을 뽑낸다.
"너는 남자 아냐?"
"오"
몇 가지 드립이 생각 났지만, 자제했다. 어중간한 드립 쳤다가 애매하게 물리면 뜨밤 한번에 몇 백을 건내야 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구질구질한 경고등이 켜졌으니까.
"뭐 먹고 싶어?"
"고기 먹자"
"옷에 냄새 배도 돼?"
"어차피 집에 갈건데 뭐"
별 고민없이 한우집에 데려갔다.
"고기 먹자니까 바로 소고기야? 야 너 돈 많지? 그럴 돈 있으면 나 돈 빌려주라고"
"아니, 천하의 임다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위로해주려고. 맛난거 사주려고. 나도 임마 카드빚으로 사주는거야"
"그래"
곧바로 등심과 안심을 주문하고, 종업원이 구워주기를 기다리며 잠시 허튼 소리를 하다가 그가 "맛있게 드십시요" 하고 자리를 비키자 그제서야 다영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기 당하고, 전과 생기고, 나 진짜 자살할거 같애"
"뭐?"
하드코어한 키워드 서너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차근차근 달래서 이야기를 살짝 듣노라니 이건 사실 소고기 먹으며 할 주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꼼장어 먹으며 포차에서 소주 부으며 먹을 이야기다.
"야, 그럼 우울한 이야기 잠깐 나중에 하고, 맛있는 고기 기분좋게 먹고 그건 2차로 이야기 하자"
"응"
다영은 내 반응에 피식 웃더니 그러자며 웃는 얼굴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잠시 우울함이 비쳤지만 그래서 더 예쁜 얼굴이다. 전형적인… 너무 예쁘고 섹시해서 평생 주변에 남자들이 줄줄 따르지만 이상하게 인생 거지같이 굴러가는 애들. 평생 눈물 많을 그런 처연한 미인. 그래서 더더욱 남자들이 안아주고 싶지만 사실 그 누구에게도 감당 안 되는 그런 타입의 미인.
"여기 진짜 맛있다"
돈만 많다면 평생 매끼라도 못 사줄까.
든든히 먹고 나서 계산하는 것을 유심히 본 그녀는 "22만원? 야, 너무 비싼데?" 하며 기겁을 하지만, 정작 주문할 때 가격표 다 보아놓고는 돈 타령하는 학습된 걱정도 조금은 귀엽다.
"됐고, 술 마시러 가자"
"응"
서로 이미 배가 제법 불렀기에 2차는 근처의 실내포차로 갔다. 마른 안주와 과일 빙수를 시키고 소주를 시켰다. 두어잔을 빠르게 마신 후, 다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세사기를 당했어. 아니 사기도 아니래. 무슨 법적으로 주인 빚을 은행이 먼저 빼가고 나는 그 돈 다 털린건데, 주인은 배째라고…"
이야기를 띄엄띄엄해서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근저당 이슈 어쩌구 때문에 피 눈물 흘리는 그런 이야기. 그런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내 주변에 있었다니.
"그래서 얼마 날린건데"
"9천만원"
한숨이 나왔다.
"그거 뭐 그 돈 다시 어떻게 받을 방법은 없는거야?"
"주인이 갚으면 되는데, 어디 하루 이틀 사이에 갚겠어?"
"갑갑하네. 그럼 그리고 전과는 뭔데"
"모욕죄"
그 대목에서는 껄껄 웃음이 나왔다.
"뭐 연예인한테 악플이라도 단 거야?"
"연예인은 아니구, 카페에서 미친 년 사연에 댓글 좀 달았는데 그 미친 년이 지 잘못한거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소를 걸었네? 한 몇 십 명이 고소 당했나 봐"
"합의를 하지?"
"그쪽 변호사가 삼백만원 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딨어. 그래서 벌금 오십만원 물고 말았어. 아 시발"
"그거 민사 또 들어올 수도 있는데?"
"몰라"
사연이 사연이다보니 술이 쭉쭉 들어간다. 불과 10분 만에 각 일 병씩을 비웠다.
"살살 마셔"
"나 지금 술 거의 두 달 만에 마시는거야. 괜찮아"
"허"
원래는 저녁이나 사주고, 대충 사연이나 조금 듣다가 돌려보냈어야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고 간만에 보는 얼굴인데다 예쁘장한 애가 실실 웃으며 내 이야기 잘 들어주니 나도 함께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럼 그렇게 헤어진거야?"
"어쩌겠어. 조건 좋은 남자 생겨서 갈아 타겠다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다영은 그 즈음해서 지그시 내 표정을 바라보더니 "너 요즘 많이 괜찮아졌다. 수염 기르니까 남자 같네" 하며 뜬금없는 끼를 부린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 됐어" 하고 웃었다. 다영도 두 달만의 술이지만, 나도 거의 몇 주 만의 술이다. 코가 얼큰해지며 취하는 것을 느낀다.
"나도 남자 안 만난지 오래 됐어. 올 초에 헤어지고 지금까지 나 계속 혼자였어. 도저히 연애할 멘탈이 아니라서"
"타투는 언제 한거야?"
"아 너는 처음 봤겠구나. 재작년? 쯤에. 여기 말고 엉덩이쪽에도 하나 더 있어. 보여줄까?"
계속 의미심장한 말을 툭툭 던져온다. 얘가 좀 인생 피곤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막 어설프게 들이대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역시 돈 때문일까.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그냥 묵묵히 있자, 그녀가 먼저 "야! 돈 달라고 안 해" 라면서 피식 웃었다. 그제서야 나도 민망하지만 "주고 싶어도 줄 돈도 없어요. 나 그렇게 쪼잔한 남자 아냐 임마. 없어서 못 주는거지" 하고 어설프게 받았다. 다영이 그 말을 하며 얼마나 속이 좀 그랬을까 생각하니 미안했다.
"집 구경 시켜줘. 나 너 자취방 한번도 안 가봤잖아"
"뭐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머릿 속으로 집에 남은 콘돔이 있던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지낸 기간이 10년이 넘는 사이의 여사친. 솔직히 레벨이 높으니만큼 가능성이 낮다는거 알면서도 은근하게나마 고백도 두어번 했었고, 당연히 까였음에도 적당히 수습해서 친구로 지냈다. 아니 친구로 지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게 연말연시에 "새해 복 많이 받아" 혹은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식으로 가끔 연락한게 전부고, 실제로 얼굴 본 것도 그 이전에도 거의 1~2년에 한 두번 꼴이었으니까.
"사는게 많이 힘들어"
그런 그녀와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섹스 후의 나른한 대화를 나눈다는게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존버 대성공이지만, 이걸 성공이라고 할 수 있나.
"쉽지 않지"
공허한 말에 공허한 대답을 했다. 가슴에 다영의 눈물이 흐르는게 느껴진다. 혼자 처연한 분위기에 젖는 것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눈물이 내 가슴 사이를 타고 흐르는게 너무 간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슥 닦았다. 그리고 그게 웃겼는지, 다영은 우는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짝 쳤고, 나도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아 진짜 분위기 너무 깬다 너"
"아니 나도 참을만큼 참았는데 넘 간지러웠어"
머쓱하노라니 의외로 그게 귀여웠는지 다영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며 심볼을 슥 쥐어온다. 단번에 다시 시동이 걸리고, 머릿 속에서는 이미 다영과 함께 '힘든 처지이지만, 둘이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는 다정한 신혼부부의 미래'를 그려본다. 이것저것 잴 거 없이, 그냥 내 주제에 이런 여자면 감지덕지 아닐까, 적당히 맞춰주고 적당히 이해하며 그렇게 고난의 바다를 함께 두 손 잡고 넘어가면 되는거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새벽 3시 반이나 됐을까. 잠시 곤히 잠들었던 다영은 부스스 일어난다. 나도 깨어나 "더워? 에어컨 켜줄까?" 하고 물었지만, 의외로 다영은 "아니야. 집에 가야지" 하고 새벽인데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고 가. 피곤한데 뭔 난데없이 새벽에 집에 가겠다는거야"
"집에 퍼피도 있고"
"강아지가 반나절 늦게 본다고 어떻게 되냐"
"나 이미 이틀째 집에 안 들어갔어. 밥 다 먹고 굶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럼 어제, 그제는 어디서 누구랑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냥 자고 가. 아침에 집까지 차로 태워다 줄께"
다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럼 아침 6시에 일어나자" 하면서 다시 누웠다. 그러나 한번 훅 일어난 의문은 묘한 생각으로 접어든다. 새벽 3시에 굳이 가야겠다는 것은, 어쩌면 뒤늦게라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같은 뭐 그런 지저분한 생각.
"미안해"
다영은 침대에 누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물었다.
"뭐가"
"그냥"
잠시 고민하던 다영은 "그냥,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던거 후회돼서"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왜 후회되는데. 어려우면 여기저기 손 내밀게 되는거지 사람이"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건데, 내가 너무 생각가 없었어 아까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이 급하기로서니 남사친이라고 하기도 뭐한 3년간 연락 없었던 남자한테 불쑥 돈 빌려달라고 연락을 하고, 그 남자에게 밥 얻어먹고 술 얻어마시고 심지어 잠이나 자고. 내가 지금 뭐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야 새벽에라도 정신 들었을 때 집에 훌쩍 가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나 역시도 방금 전에 괜한 생각을 했구나 싶어서 미안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마. 그보다 돈 떼어먹히고, 벌금 물고 뭐 오케이. 근데 나한테 돈은 왜 빌리는건데?"
"월세방이라도 당장 구해야 하니까. 근데 다들 요즘 어렵기도 하고, 나도 주변 사람들한테 잘한 것도 없으니까 돈 빌리기가 어렵더라"
한편으로는 이 모든게 다 나한테 돈 빌리려는 작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이 와중에도 또 해보지만, 너무나도 밀려오는 잠에 그렇게 눈꺼풀을 감는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다영은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이었다. 잠결에 샤워하는 소리도 듣고,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긴 한데 난 다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간만의 과음 탓이었을까.
"밥 먹고 가. 요 앞에 아침 백반정식 잘하는 집 있어"
아쉬움에 그녀를 붙잡아 보지만, 다영은 "그러다가 내일까지 있겠는데?" 하며 웃는다. 나는 "그냥 여기서 살아도 돼" 하고 농담인 척 진담을 건내지만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현관에 애완동물 금지라고 써있더라" 라며 역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답을 돌려준다.
"태워다 줄께 조금만 기달려. 세수만 할께"
"아니야, 택시 타면 금방인데 뭐. 피곤할텐데 그냥 자"
"알았어. 잘가"
"응"
다영은 그렇게 문을 닫고 나섰다. 허무함이 몰려오고, 방 안에 널부러진 내 옷가지들과 휴지 덩어리들을 치웠다. '떡정' 때문일까. 그렇게나 힘들어 하는데 몇 백이라도 빌려줄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괜히 해보고, 이러니 호구잡히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해본다.
"12년 존버 성공했네"
간밤의 뜨거운 시간들을 새삼 떠올려본다. 하나가 된 채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 본 다영의 얼굴은 새삼스러웠지만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런 여자와 내가 하다니 하는 감동이 들었을 정도로.
"아…"
다시 한번 허기와 성욕이 동시에 맹렬하게 몰려왔다. 무엇을 먼저 해결할까 한 20초 고민하다가, 괜한 짓을 하기보다는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냉장고를 다시 여는 순간, 누가 문을 콩콩 두드린다. 서둘러 옷을 걸쳐입고 문을 연다.
"왜? 뭐 두고 갔어?"
역시나 다영이었다. 뭐 두고 갔냐고 묻자, 그녀는 한 3초 정도 말을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한 삼백, 아니 이백이라도 안돼? 꼭 갚을게"
나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백?"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 끝 >
다영은 그렇게 문을 닫고 나섰다. 허무함이 몰려오고, 방 안에 널부러진 내 옷가지들과 휴지 덩어리들을 치웠다. '떡정' 때문일까. 그렇게나 힘들어 하는데 몇 백이라도 빌려줄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괜히 해보고, 이러니 호구잡히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해본다.
"12년 존버 성공했네"
간밤의 뜨거운 시간들을 새삼 떠올려본다. 하나가 된 채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 본 다영의 얼굴은 새삼스러웠지만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런 여자와 내가 하다니 하는 감동이 들었을 정도로.
"아…"
다시 한번 허기와 성욕이 동시에 맹렬하게 몰려왔다. 무엇을 먼저 해결할까 한 20초 고민하다가, 괜한 짓을 하기보다는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냉장고를 다시 여는 순간, 누가 문을 콩콩 두드린다. 서둘러 옷을 걸쳐입고 문을 연다.
"왜? 뭐 두고 갔어?"
역시나 다영이었다. 뭐 두고 갔냐고 묻자, 그녀는 한 3초 정도 말을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한 삼백, 아니 이백이라도 안돼? 꼭 갚을게"
나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백?"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