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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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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19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플레이 뒤에야 VR헬멧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눈이 아프다 못해 뒷골이 욱씬 쑤실 정도의 통증이 몰려왔다. 뒷목과 허리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후'

절망감이 몰려왔다. 어처구니 없지만 '청춘을 바쳐가며' 플레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게임에서 난 지금 모든 것을 날릴 위기에 처해있다. 내 손으로 키워낸 최강의 반란군에 의해 부인이자 전설의 마법사인 레오라를 이미 잃었고, 제국의 황제 자리도 날아갈 위기다.

'음'

도망치던 도중 수도의 궁성을 나 대신 지키고 있던 제국상서 루키후그는 '어떻게든 3일은 버텨 보겠습니다' 라고 전언을 보내왔다. 게임 속 세계관 최강의 듀오인 나와 레오라도 못 이겨낸 청기사단을 어떻게 혼자 얼마 안되는 친위대로 막아내겠다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다음 날 알았다. 루키후그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궁성 자체에 거대한 어둠의 실드를 쳤다. 세계관 내 최강의 NPC 흑마법사가 목숨을 댓가로 친 마법인만큼 이미 수도를 포위한 청기사단으로서도 이제 3일간은 궁성에 접근할 수 없다.

"고로…"

최고의 충신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만들어 낸 3일의 시간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적색기사단을 만나, 그들을 지휘하여 역도가 된 청기사단을 무찌르고 제국의 평화를 다시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너무 지친 나는 3시간의 알람을 맞춰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이 오전 6시 55분이니까, 딱 10시에 일어나면 되겠구나.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P.03





"음"

잠에서 깼다. 하지만 알람이 아니다. 전화벨 소리다.

"으음,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고구려 캐피탈 정,수,림 파이낸셜 상담원입니다. 실례지만…"

아…좆됐다.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그녀가 묻는 내 신상에 대답을 했고, 연체 안내 겸 독촉 전화에 최대한 빨리 내일 모레까지는 갚겠다고 대답하고 끊었다. 연체가 3일 이상 길어질시 내 연체정보가 모든 금융업체에 공유될 수 있고, 신용정보 및 추후의 금융거래에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에 치를 떨며.

"150만원을 어디에서 구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까짓 몇 푼 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답 없는 돈이다. 애초에 빌리면 안됐을 돈인데, 조회만 해도 커피 쿠폰을 하나 준다는 앱 이벤트에 '나같은 무직자에게 한도가 나올리가' 하면서 조회해 봤더니 실제로 한도가 나와서 고민 끝에 빌린 돈이다. 당초의 계획은 150만원 빌려서 100만원은 코인하고, 30만원은 엄마 환갑잔치에 근사한 곳에서 밥이라도 먹고, 20만원은 게임 현질을 하려고 했는데 150 전부 치킨 사먹고 게임에 발라버렸다. 그나마도 마지막에는 2,500원이 없어서 레오라도 죽었지만.

"아 씨발 어쩌지"

엄마한테는 손 벌리기도 미안하고, 애초에 엄마가 나한테 내줄 수 있을 돈도 없을거다. 누나에게도 손 벌리기 힘들고…. 눈 앞이 아득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VR헬멧을 썼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 아니, '나에게만큼은 이게 진짜 현실' 게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좁고 어두컴컴한 반지하 원룸이, 헬멧을 쓰는 순간 눈이 시원해지는 대초원으로 변한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지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화려한 병장기와 붉은 색 갑옷, 육중한 군마를 거느린 역전의 용사 6만명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다. 화려한 나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나의 모습에 모두가 말에 내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해야 할 그들은, 마치 적을 앞둔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다.

"무엄하구나"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서서히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사실 이제와서 적색기사단이 나에게 충성을 할 이유도 없다. 아무리 대륙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고 한들, 결국에는 '인간 마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변질된 폭군일 따름이다. 어진 재상과 자애로운 황후가 아무리 들끓는 백성들의 민심을 가라앉힌다고 해도, 결국 황제의 "90% 세율", "무자비한 폭동 진압", "가혹한 건설 노동" 같은 헛짓 앞에는 무소용이니까.

"폐하"

적색기사단의 단장은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이 게임의 모든 캐릭터는 AI가 만들어 낸, 굉장히 사람같이 생긴 캐릭터 텍스쳐를 갖고 있다. 전투 모션이 살짝 과하거나 천박한게 문제지, 외모 자체는 굉장히 리얼하다. 거기에 전투에서 생긴 상흔 같은 것이 더해져, 이 적색기사단의 베두인 단장처럼 백발이 성성한 대장군의 압도적인 풍채를 가진 캐릭터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감히 나에게 이 무슨 무례냐"

하던 지랄은 마저하는게 도리다. 체통이 땅에 떨어진 지금이라도 황제는 황제다. 사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 이 적색기사단이 내 황제 캐릭터를 끝장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현실로 빠르게 돌아가 정신 차릴 수 있게. 당장 오늘 내일, 노가다라도 나가서 얼마라도 돈을 벌어오게.

"폐하, 레오라 황후마마를 죽인 것이 정녕 청기사단의 짓입니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색기사단의 베두인 단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놈이 왜 내 죽은 마누라에게 이렇게까지 과잉 충성을 하는지 궁금해서 슥 캐릭터 열전을 살펴봤다. 아하. 이 양반은 레오라와 동향인 마티오 왕국의 왕족 출신으로, 왕족답게 혈연 관계가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레오라 엄마의 이복동생이며 나에게는 처숙부쯤 되는 인물이다.

'아 맞다'

게다가 거기까지 읽으니까 나도 생각났는데 적색기사단의 창설 자체가, 마티오 왕국의 왕인 레오라가 나에게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조국의 핵심 전력을 변방으로 보내 제국을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적색기사단 입장에서는 레오라에게 서운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들은 '왕국의 안녕과 제국의 평화'라는 기치 아래 숭고한 희생을 묵묵히 해왔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충성의 대상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렇다. 짐은 그녀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힘이 부족하여 그녀를 지키지 못했노라…"

이쯤해서는 내가 할 일이 또다시 명확해진다. 눈물연기로 이 충직한 부하들을 구워삶아야지. 한 마디 던진 나는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 친히 수백 수천의 역도를 베었건만, 그들의 간계에 빠져 레오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못난 지아비를 원망해도 좋으련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어진 황제가 되라는 부탁을 남겼을 따름이다. 그대들에게 나는 황제가 아닌, 아내를 잃은 남편으로서 피 끓는 한을 담아 부탁한다. 레오라의 복수를 해다오. 그대들의 왕이자 제국의 어머니를 참한 흉측한 무리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길 간절히 청하노라!"

바로 이거다. 내가 이제껏 '엠퍼러'를 버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 글로벌 IT기업이 혼을 담아 제작한 게임답게, 전무후무한 수준의 엄청난 음성인식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갖고 있는 게임이라는 점. 게임 속 일정 트리거가 발동되면, 이렇게 혼자 게임에 취해서 유치한 중2병 수준 웅변을 토해내도, 게임 속 캐릭터들이 그에 감화되어 나를 따르거나 한다는 것.

"폐하!"

적색기사단은 일제히 말에게 내려 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의 "출진하라" 지시에 맞추어 진군을 시작했다. 무너진 나의 자존감이 이렇게 채워진다. 결국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게임에 내가 이토록 빠진 것도 다 그 놈의 자존감과 보상심리 때문이다. 나도 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취업한 회사, 열심히 일하고자 다짐했지만 일이 너무 어려웠다. 아니 일보다는 사람이 어려웠다. 조금만 실수해도 모진 핀찬이 날아왔고, 나는 점점 위축됐다. 참 그런 쓰레기 같은 회사는 진작 관뒀으면 좋았을텐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꾹꾹 참았다가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나는 틱 장애까지 얻었다.

"레오라를 해한 그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말아라!"

처음에는 가벼운 행동틱이었지만, 그것으로 또 은근하게 따돌림을 받자 언어틱까지 생겼다. 욕설까진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비명과도 같은 꽥 소리는 더이상 회사를 다니기 어렵게 만들었다. 몇 달을 쉬고 이직을 했다. 아주 다행히도 틱 장애는 쉬는 동안 거의 사라질 정도로 완화되었지만 자존감이 낮아지고 위축되었다. 사람을 마주 보는게 두려웠다.

"아니 왜 그렇게 사람이 히마리가 없어요"
"회사에서는, 사회성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가 이런 말 하는게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직장에서 일보다도 중요한게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유대라고. 그거 알만한 나이잖아"

결국 싫은 소리들을 들어가면서 버티던 내가 돌파구로 찾은 것이 게임이었다. '엠퍼러'는 정말로 나에게 자존감과 사회성을 키워주었다. 게임 속의 캐릭터들은 결코 내 뒷담화를 하는 일도, 내 약점을 두고 조롱을 하거나 조언이라는 이름의 폭언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나는 그들에게 한줄기 빛이요 구원이었다. 그렇게 나 역시 위로 받았다. 단지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결국 회사에서도 잘린게 문제지만.




"어찌하는게 좋을까"

수도 궁성으로 향하는 적색기사단의 이동경로에, 이미 청기사단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가 확보되었다. 양쪽 다 기마부대가 주력인만큼, 전투는 바르바리 평원에서 대회전 형태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문제는 청기사단은 중갑기마부대 1만이 주력이고, 적색기사단은 8천의 가벼운 경갑의 궁기병이 중심이었다. 거기에 중보병 1만, 궁병과 장창병을 포함한 경보병 4만, 마법대 2천의 구성이었다. 병력의 수는 3만대 6만으로 적색기사단이 거의 2배 가깝지만, 병력의 질 자체도 청기사단이 크게 앞선다. 반란 진압하라고 온갖 고급 장비들을 청기사단에 올인해주기도 했고.

"폐하가 곧 전력입니다"
"그건 아는데, 한번 졌잖아"
"전투에 패배는 병가지 상사이옵니다. 전력만 온존한다면 다음 전투에서 배로 갚아주면 됩니다"

첫 인상은 소도 생으로 씹어먹을 것 같은 상남자인 베두인이지만, 역시나 핏줄은 핏줄인지 레오라처럼 든든하게 나를 격려해준다. 나같은 쓰레기에게 이토록 굳건한 믿음을 주는 부하들이라니. 새삼 어진 정치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마족 놈들은 역시 씨를 말리는게 맞는 건데"
"역적 알드리드는 반드시 무찌를 것이옵니다"

청기사단의 단장 알드리드는 무려 마족 출신이다. 마왕을 무찌르고 그의 사천왕 중 하나를 부하로 삼은건데,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

"그보다 마법 전력에서 상대가 안되는데. 이쪽은 죄 초급 마법사들이잖아. 방어마법만으로도 벅차보여"
"그것이 유일한 걱정입니다"

만렙 마법사인 레오라가 청기사단과의 전투에서 고전한 이유도 그것이다. 마족이 단장이라 그런지 '기사단' 주제에 제법 준수한 마법사 전력까지 갖추고 있는 청기사단이라 순수한 무력충돌로 정면대결은 리스크가 크다.

"하는 수 없지. 마법사들은 내가 맡는다. 내가 마법사를 방어하는 적 방패수들을 뚫고 들어갈테니, 내가 포위되지 않도록 정예기병 1천으로 내 뒤를 받쳐다오. 그러면 내가 마법사들을 도륙내마"
"폐하, 알겠사옵니다"

일단 오늘은 푹 자기로 했다. 게임 속에서 나는 최고급 산해진미와 최상급의 회복약들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현실에서 나는 김치도 없이 라면에 밥 말아먹은게 전부지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진군을 한 우리는 저 앞 바르바리 평원에 이미 진을 치고 대기 중인 청기사단을 마주했다. 3만 대 6만. 병력에서는 이쪽이 거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전력차는 AI분석으로는 13:9 정도로 이쪽이 오히려 열세였다. 사실 이 정도 전력차면 섬멸전 모드로 AI전투 치르면 몰살이다. 유저의 직접 전투가 필요한 이유다.

"적 1파가 옵니다!"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궁병과 마법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듯 중보병과 장창병이 배치되었다. 나와 1천의 정예기병은 부대의 후미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움직일 예정이었다. '베두인 놈, 적의 중갑기병을 어떻게 막을 생각이지?' 하며 궁금했는데, 잠시 후 적 기마대 1파의 공격을 막아내는 적색기사단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적 중갑기병이 말의 행동을 막는 이동형 장애물을 돌파하면, 다이아 스피어를 낀 장창병들이 흐트러진 기마대를 견제하고, 양익의 경기병과 궁병, 마법대가 그들을 집중 공격하며, 마지막으로 4인 1조로 중보병이 적 기병을 끝장낸다. 환상적인 호흡으로 깔끔하게 상대하는 모습에 감탄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적이 소수일 때나 먹힐 수 있는 방식임을 알았다. 통일된 제국 내에서 대규모 적 기병을 상대할 일이 없기에 지금까지는 저런 전투방식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에 상대하는 적은 청기사단이다. 본격적인 2파가 몰려오면 곧바로 쓸려나갈 수도 있다.

"가자!"

따라서 나는 적의 1파가 아직 돌진 중이고, 2파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을 파고 들기로 했다. 말에 오른 나는 내 뒤를 따르는 1천의 기병과 함께 아군 부대 뒤를 크게 돌아, 방패병이 방어하고 있는 적의 우측에 기습적인 돌파를 시도했다. 물론 그 앞을 가로막는 놈들에게는 당연하게도 '마검 새_롱스워드'의 '불검' 공격이 내려진다.

"후우!"

VR 컨트롤러를 3회 빠르게 누르자 강력한 화염마법이 내 검 끝에서 쏟아져 나갔다. 물론 적의 마법사들이 실드를 쳐서 위력이 다소 반감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데미지는 수십 만이다. 어지간한 중간보스들도 3방이면 아웃되는 이 절정의 마법에 청기사단의 우익에 큰 구멍이 생긴다.

적의 1파를 막아내던 적색기사단의 기병대 역시 날개를 열면서 동시에 중앙의 중갑보병이 장창병과 함께 서서히 중앙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보병이 기병의 진격을 막아냄은 물론 동시에 역으로 진군까지 하는 모습에 나는 감탄했다. 순간적이지만 과몰입을 하여 '십수년간 야전을 돌며 산전수전 겪은 부대와, 민간인 학살이나 하던 부대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파고 들어!"

혼란스러워진 적의 대열을 뚫으며 선봉으로 나선 나는 정신없이 적의 방패병들을 '마검 새_롱스워드'로 방패째로 쪼개나갔다. 굉장했다. 내가 탄 말이 적의 검에 옆구리를 맞아 쓰러졌지만 일어선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탕탕탕탕탕탕, 적진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노라니 적의 공격 역시 집중되어 컨트롤러와 헬멧에 초당 3회가 넘는 포스피드백이 전해진다. 간간히 블라인드 마법도 날아오지만 그것만큼은 정확히 걷어낸다.

"이야, 이거 무슨 마사지기가 따로 없네"

다행히 내 뒤와 옆으로 아군이 끼어들어 적군을 파고 드는 송곳이 깊어지고, 이윽고 저쪽의 아군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대는 청기사단 마법사들 앞까지 도달했다.

"너네 다 죽었다"

20초의 '불검' 쿨타임이 돌았다. 적의 마법사들에게 불검을 쏟아내었…지만 그것은 나보다 2배는 큰 거대한 체격을 가진, 날개 달린 외눈박이 거인의 방패에 그대로 흡수되고 말았다.

"알드리드"

청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전직 마왕의 사천왕 중 수장이며 통일전쟁 당시 혼자서 한 나라를 망하게 하기도 한 괴물 중의 괴물. 궁성의 감옥에 봉인해두었던 괴물에게 기사단장직을 수여한 내가 미친 놈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이 놈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제국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감히 나에게 반역을 한단 말이냐"

나의 말에 알드리드는 "너…마왕, 더 나쁜 마왕"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 마검을 내 머리를 향해 내리꽂는다.




"오"

지이이이잉- 거의 1.5초에 이르는 긴 진동이 컨트롤러를 통해 전해진다. 하마터면 컨트롤러를 떨굴 뻔 했다. 곧바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다. 놈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의해 아군은 물론, 청기사단까지 피해를 입는다. 나는 재빨리 내 뒤를 따르는 정예기병에게 "마법사들을 공격해" 하면서 지시를 내린 후, 알드리드와의 싸움에 집중한다.

알드리드. 중간보스 중에서도 상급 중간보스다. 그리고 싸우다보니 생각났는데 내가 마왕을 잡으러 구성한 최강의 NPC 5인조 파티로 겨우 잡은 놈이 이 놈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혼자 싸우고 있네. 심지어 이 놈에게 준 마법 흡수방패와 검도 내가 하사한거다. 저 놈이 쓰는 검도 나와 같은 '마검 새_롱스워드(2)'다.

'어떻게 이기지?'

물론 상성상 검을 든 용사는 마족에게 크리티컬 데미지가 들어가기는 한데, 문제는 저 놈의 피통이 내 피통의 한 5배는 족히 된다는 점이고 회복을 담당하는 백마법사도 없이 이렇게 난전에서 1:1로 싸운다는건 역시나 아주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중간보스급답게 중간중간 발광을 하며 벼락을 내리 꽂는데 저거 맞으면 바로 사망이다.

'어쩌지'

가속 스크롤을 사용하며 공격의 속도를 높인다. 회복물약을 빨고, 놈의 공격을 피하며 다른 청기사단을 벤다. 드디어 세번째 불검의 쿨타임이 찬 나는 청기사단의 마법사들을 향해 화염마법을 뿜어낸다. 드디어 크리티컬이 터진 내 공격에 무려 적의 마법사 1/3이 그대로 녹아버린다.

'어?'

하지만 적의 2파 공격이 시작되었고, 예상대로 아군 병력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약 500명 남짓한 기병 공격이었던 1파와는 달리, 2천이 넘는 중갑기병이 아군의 정면에 그대로 돌파를 시도했다. 후방으로 빠졌던 장창병 예비대가 투입되어 겨우 뚫리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아군 진영이 양단될 뻔 했다. 3만대 6만이던 숫자는 어느새 2만 6천대 4만까지 따라잡혔다.

'이대로라면 진다'

또 다시 알드리드의 검을 받아낸 나는 긴 진동을 느끼며 또 다른 필살기 '중검'으로 알드리드를 내리친다. 역시 이번에도 크리티컬 데미지가 들어가 주욱- 놈의 HP바가 줄어드는게 보인다. 하지만 멀었다. 어째 지난 번 전투와 동일한 패턴이다. 승기를 잡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소모전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이게 아닌데'

정신없이 리듬게임 하듯이 막고 치고 베고 찌르고 쏘고 채우고 먹고 막고 치고 베고 찌르고 돌고 숙이고 채우고 막고 피하며 싸우는 와중에 옛날 생각이 또 났다.

'내 연애도 그런 패턴이었지'

내 딴에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한없이 퍼주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오는 와중에 점점 작아지는 나를 느끼고 결국에는 버려지는 어떤 뻔한 패턴. 게임 속에서야 수십 수백의 여자를 거느린 하렘의 왕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호구 찌질이.

'또 체력이 다해간다'

카드 한도를 채워가면서 점점 막막해지는 연애. 점점 가망없어 보이는 둘의 미래 앞에 작아지는 나. 점점 무거워지는 내 팔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던 그때 당시의 내 마음. 숨이 가빠오는 만큼 답답했던 연애. 버려지면서도 "행복해라" 라면서 담담히 행복을 빌어주는 내 병신 같은 모습.

"씨발"



헬멧을 벗어 침대에 던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던진 것은 아니고 곱게 벗어놓았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딱 30초를 셌다. 그냥 그렇게 뒤지면 된다. 그러면 이 게임하고도 안녕이고, 그냥 확 뒈질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

…24…25…26…27…28…29…30.

진정한 나는 다시 헬멧을 뒤집어 썼다. 당연히 붉어진 화면과 함께 GAME OVER가 떠있길 바랬지만 놀랍게도 나는 전장에 그대로 서있었다. 간발의 차로 쏟아지는 벼락을 피하면서 내가 서있던 자리를 봤다. 아군 병사 수십이 나를 지키려 대신 죽었다.

'뭐한다고 나를 지키느라 죽은거야'

과몰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이런 전투를 한 경험이 없다. 게임 초중반기에야 마왕잡이용 5인 파티로 싸웠고, 그 이후에야 전략 시뮬레이션 모드로 부대를 움직여 싸웠지 이런 식으로 대규모 전장에 1인칭으로 부하들과 싸운 경험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천천히…천천히…'

나는 방금 죽은 아군의 말을 잡아 올라탄 뒤, 적진을 향해 쿨타임이 찬 '불검'을 쏘았다. 그렇게 고립된 내 뒤의 정예병들의 살 길을 뚫었고, 알드리드의 공격을 막으면서 남은 청기사단의 마법사들을 일제히 쓸어버렸다. 그렇게 적진의 후방을 털어버린 나는 다시 내가 이끄는 별동대와 함께 전열을 정비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짐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그대들의 충성을 기억하고, 반드시 다시 좋은 황제가 되겠노라"

사기를 최고로 끌어올린 뒤 나는 다시 한번 '불검'으로 길을 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뿜어져 나가는 용사 전용 마법 '불검'에 의해 수백의 청기사단이 단번에 죽어나가며 적진에 큰 구멍이 생기고, 저 멀리 적의 3파 공격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아군 진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대들은 아군을 도우라"

뚫린 길을 통해, 내 뒤를 따라온 남은 600의 정예기병이 제 3파 공격을 진행 중인 청기사단의 뒤를 쳤고 나는 알드리드와 1:1 싸움을 이어나갔다.

보스전은 기본적으로 패턴의 싸움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공격을 막고, 0.5초 사이의 빈틈에 맞추어 딜을 넣고, 보스의 필살기를 정확한 타이밍에 피하고, 다시 그 빈틈에 딜을 넣는 패턴의 공격. 이미 흥건해진 VR 컨트롤러를 쥔 손.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기고 싶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게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그냥 삶의 전환점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총 3시간 40분이 넘는 대혈전 끝에 나는 승리했다. 13년 넘게 플레이를 했지만, 이렇게까지 긴 전투는 처음이었다. 마왕 잡을 때도 이렇게 긴 전투를 한 적이 없었다. 청기사단과 적색기사단의 전력이 13,272 VS 11,902로 역전되었을 무렵, 나는 알드리드를 잡았다.

"개새끼야!"

놈의 목을 잘랐다. 배신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낸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올린 후에 승진한 김 과장 그 새끼도 그렇고, 그럴싸한 핑계로 헤어지자더니 사실은 양다리 걸치다가 갈아탄 것이었던 유림이 그 년도 그렇다. 청기사단의 단장 목을 잘라 손에 들자, 남은 청기사단은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폐하!"

적색기사단의 단장 베두인은 기쁜 얼굴로 다가왔고, 그렇게 반란은 진압되었다. 타격은 컸다. 이번 반란을 통해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전투집단 두 개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제국의 든든한 두 기둥-레오라와 루키후그-도 무너졌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황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기에 흔들림은 없었다.

"반란은 용서할 수 없으나,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겠다"

수도 궁성으로 귀환한 나는 청기사단의 백인대 이상 간부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모든 병력을 뿔뿔히 조각내어 제국 변방에 배치했다. 적색기사단의 모두에게는 공훈에 따라 포상과 작위를 하사하였으며, 베두인을 마티오 연합왕국의 새로운 왕에 임명하여 적색기사단과 함께 연합왕국으로 귀환시켰다.

"제국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겠다"

한편 녹색기사단, 황색기사단, 백색기사단 등 새로운 전투부대를 창설하였고, 제국의 세율을 90%에서 20%로 낮추었다. 그와 함께 이번 전투기록을 '엠퍼러'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 전투기록은 꽤 화제가 되었는데, VR게임 특성상 1인칭 액션모드로 3시간이 넘는 전투를 치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다 고인물들은 보통 안 하는 일이었기에 때문이다. 그래봤자 조회수 2천 남짓한 게시판이지만, 그래도 인기글에 올라갔다.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wow!!!'

또, 레오라의 유언과 적색기사단을 회유하는 연설 역시 한국 커뮤니티 기준으로는 오글오글하다 못해 손발이 다 퇴화될 내용이지만, 진성 덕후들이 많은 엠퍼러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엄마"
"왜"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는 꽤 지쳐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 다음 주부터 다시 일 알아보려고"하고 뜬금없이 말했다. 사실 그 말을 하면서도 "에이구 행여나 니가 잘도 일하겠다" 하는 식의 비아냥이나 듣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엄마는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아이구 우리 아들이 웬일이래"하면서 그저 마냥 좋아라만 하셨다.

"근데 나 돈이 조금 필요한데…"

그 말에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는 "생활지원금 나온 것도 조금 있고, 내일 은행 가서 적금 붓던거 털어올게" 하면서 150만원을 선뜻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문득 깊은 후회가 몰려왔다. 조금만 일찍 정신 차렸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흐"

한때의 나는 분명히 빛나는 사람이었는데. 이 세계의 용사처럼, 현실에서도 장래 유망한…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 많고 성격 좋고 친구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취업한 놈이었는데. 어쩌다 폭군이 되었고, 어쩌다 게임중독자, 하프 히키코모리,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그래도…"

어진 황제가 되라는 내 마누라의 유언처럼, 다시 정상적인 일상을 가진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알바 자리던 뭐든 직업도 갖고, 미래도 준비할 생각이다. 방구석 폭군이 아니라, 집 바깥의 성군이 될 수 있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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