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난 13년간 밤낮 없이 즐기며 인생을 바친 엄청난 스케일의 판타지 VR게임 '엠퍼러'. 현실에서는 부모 등골 빨아먹는 쓰레기일진정, 게임 속에서만큼은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을 통일하였으며, 엄청난 정치력으로 역사상 최강의 대제국을 만들어 낸 위대한 황제'인 나다.
'그런데'
한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플레이 하다보니 근래에 와서는 권태가 생겨, 결국 온 나라를 내 마음대로 휘젓는 폭군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제국의 도처에서는 '반역이라는 이름의 혁명'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버러지 같은 백성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고, 나는 매번 그 반란을 제국의 최정예 부대 '청기사단'을 활용하여 힘으로 짓눌러왔다. 그런데…
"바로 그 청기사단이 반란을…"
이런 일이 일어나 버렸다. 문제는 관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제국의 군사력을 이래저래 지우고 조각내 버린 탓에, 수도 근처의 청기사단을 견제할만한 마땅한 카드가 없었다. 게다가 하드코어 모드로 시작한 탓에, 나는 게임 속에서 한번 죽으면 바로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내 13년 간의 인생 흔적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수도에 당도해서 백성들을 선동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폐하의 신묘한 용력으로 제압하옵소서!"
충신 중의 충신인 제국상서의 말을 들어, 결국 나는 청기사단을 치기 위해 '마왕을 무찌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사와 마법사'를 동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로 황제인 나와 황후인 레오라 말이다.
"반역자 무리가 저기 모여있구나"
수도 외곽의 알록사스 산을 넘자, 저 멀리 청기사단의 주둔지인 알록사스 요새가 보였다. 높은 성채와 깊게 판 해자, 수많은 결계와 마법보호막으로 보호 받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엄청난 위용을 보이고 있다. 그 안을 지키고 있는 청기사단은 기병만 1만에 이르는 총 3만의 최정예 병력으로, 일전의 3.6 반란 때는 무려 20만에 달하는 반란군을 단번에 쓸어버리기도 한 정예 중의 정예다.
"레오라"
"예, 폐하"
"역도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거라"
"알겠습니다"
나의 지시에 레오라는 말에서 내려 지그시 눈을 감고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한줄기 실처럼 하늘로 하늘하늘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의 오오라는 점점 굵어졌다. 큰 마법이라 꽤나 힘든 모양인지, 레오라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음-, 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참 야하긴 야해"
사실 이펙트 자체는 레트로 양산형 모바일게임스럽지만, 워낙에 캐릭터 모델링이 출중한 게임이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간만의 레오라 최종 갑옷을 본다. 바스트와 성기가 강조되는 형태의 저 에로틱한 갑옷. 너무 섹시하다. 현실에서라면 중증 성도착증 환자들이 광란의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노출광 패션이지만, 어쨌든 세계관 속에서는 전설적인 장인이 만든 갑옷이란다. 그 놈도 물론 변태겠지.
"알라두크, 푸르시두크…"
어쨌든 지금 레오라가 쓰려는 마법은 이 게임 세계관 속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인 운석소환 마법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식상함이지만 이 게임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드는 거고. 나같은 아재한테는 그저 익숙한 UI, UX가 최고다.
"시아네이스 아드후크 마지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을 한참 중얼중얼 외우던 레오라는 이제는 전신에서 엄청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나 역시도 눈을 뜨고는 레오라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아예 등을 돌린 채로 알록사스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저 멀리 하늘이 갈라진 듯 갑자기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시야 밖에서 나타나더니 요새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콩그레가티, 매그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의 마지막에 이르자 이제는 바위 뿐 아니라 수많은 돌의 비가 요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결계와 대마법실드가 쳐져 있어도 소용 없다. 레오라의 소환 마법은 '자연물'을 소환하는 것인만큼 직접적인 마법방어 중심의 요새 마법방어벽은 의미가 없다.
꽈과광-
너무 거대한 충격이라, 내가 있는 이 알록사스 산맥 자체가 한 1미터쯤 들썩인 느낌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레오라가 탄 말도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다. 그리고 요새는, 아니 '한때 요새였던 것'은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뒤덮였고 그 먼지가 가라앉은 뒤의 모습은 그냥 거대한 바위산 뿐이었다. 요새는 흔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이제 제일 쉽잖아"
계속 회복마법과 물약을 빨면서 싸운다는 전제 하에, 둘이서 3만명을 물리적으로 이기는 것도 사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싶다. 어쨌든 VR 게임이라 싸우다 보면 플레이어인 나도 지친다. 마왕과 싸우던 시절의 20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것이다. 그저 이렇게 원거리에서 지도 자체를 바꿔버리는 수준의 강력한 마법으로 끝내버리는게 최고다.
"폐하…"
"이 약을 마시거라"
하지만 역시 세계관 최강의 마법이다. 레오라는 마법을 시전한 직후 모든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입에 물약을 흘려주자 곧 기력을 채우기는 했지만, 더이상 운석소환급의 대마법은 쓸 수 없다. 기력은 게임 속 아이템으로도 충전이 가능하지만, 마나의 급속한 충전은 유료 결제를 해야한다. 현실 백수인 내가 유료 결제에 쓸 돈은 없다. 어차피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면 완충되는걸 뭐.
"돌아가자"
"네에…"
혹시나 해서 풀장비를 맞추고 온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레오라도 다시 말에 올랐고, 나도 말머리를 돌렸다. 다만 이제 청기사단이 몰살했으니 반란진압용 부대를 새로 키울 생각에 머리가 아플 따름이었다.
"폐하!"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깡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암전효과. 저격마법이 틀림없다. 블라인드 상태가 된 나는 오랜 경험에 따라 즉시 자세를 낮추고 칼을 뽑으며 전투준비를 했다. 레오라는 즉시 내 뒤에 붙으며 상황을 브리핑했다.
"폐하, 포위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청기사단입니다. 지나온 언덕 뒤에서, 수백명 이상의 기사들이 랜스 차징을 해오고 있고 마법부대 역시 이쪽을 향해 마법주문을 시전 중입니다"
큰일이다. 놈들은 이미 요새를 버리고 정예만을 뽑아 산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저격을 당해 3분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싸워야 한다. 레오라의 마나는 채 1%도 안 남기고 고갈된 상태. 그래도 만랩 마법사인만큼 방어력과 기본 공격력 모두 준수한 수준이지만, 상대 역시 내가 직접 기른 최정예 병력이다.
"너는 스크롤로 마법방어를 해. 그리고 기사들이 있는 방향을 말해줘"
"6시 방향입니다"
나는 즉시 몸을 빙글 돌린 후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장창을 향해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드는 보병. 현실이라면 자살행위지만 게임 속의 나는 다르다. 어차피 우리가 지나온 길은 좁은 산길. 말 두 마리가 간신히 나란히 지날 수 있는 폭이니만큼 옆구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 맛에 게임하는거지'
정말 오래간만에 게임하는 맛을 느끼고 있다. 입이 바싹 마르고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간다. '지는 순간 캐릭터 소멸' 이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게임하는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나는 대시 속도를 최고로 높이며 VR의 양쪽 컨트롤러 버튼을 빠르게 3회 누르며 필살기를 시전했다.
'마검 새_롱스워드'의 '불검' 공격.
…이름이 너무 시시한 이유는, 게임 초반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던 무기들은 강화 도중에 모두 깨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제련 기술과 마법부여 기술도 만랩을 채워 직접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시도 끝에 무려 32번의 강화에 성공한 마검을 얻게 된 것이다. 수만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해야 되는데 '어차피 깨질 거' 매번 이름 그럴싸하게 짓기도 귀찮아서 기본 이름 그대로 시행하던 차에 안타깝게도 이 명검은 시시한 이름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이 검과 그 검에서 발산되는 위력은 장난이 아니다. '엠퍼러'의 온오프라인 모드 포함 전체 무기 위력순위 24위에 랭크되어 있는 이 가공할 마검에서는 드래곤의 브레스와 같은 무속성 화염이, 그 원조 화염마법의 16배 데미지를 더해 쏟아져 나간다.
"가아아아아악!"
"우아아악!"
미련하게도 산길을 따라 이쪽을 향해 진격해오던 기사단 제 1파는 그렇게 화염마법에 죽 갈려나갔다. 아니 갈려나갔을 것이다. 아직 블라인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무려 2분 42초가 남았다.
두두두두두
하지만 그 뒤의 또다른 기사단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검의 쿨타임은 20초. 그 사이 나는 방어를 위해 마나실드를 치고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마구잡이 칼을 휘두른다.
콰직 콰직 콰직 촥 촥
나의 마검에 무참히 썰려나가는 청기사단.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베는 맛의 포스피드백. 간간히 깡! 깡! 하며 나의 투구와 갑옷에 기사단의 랜스 차징이 박히고 데미지가 꽤 들어오지만, 물약을 빨면 그만이다. 그렇게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수백 명의 역적을 죽여나간다. 10년도 넘게 즐겨온 게임이다. 간간히 업데이트 된다고는 해도, 인공지능 NPC 유닛의 공격패턴 정도는 안 보고도 싸울 수 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블라인드 3분은 길어도 너무 길어"
온라인 모드의 PVP 대결이라면 블라인드 마법은 거의 사기스킬이나 다름없다. 당하면 그냥 바로 접속 끊는게 차라리 덜 분할 정도로. 3분 동안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두들겨 맞는데 이길 도리가 없다. 하지만 NPC 정도야. 간간히 불검을 날려주며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죽어라 이 쓰레기들아. 어?"
기습적으로 얻어맞으면 몰라도, 이제 경계를 하는 상태에서는 블라인드를 또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이 어두워졌다. 이 중대한 상황에 2연속 블라인드라니, 순간적으로 너무 짜증이 났다. NPC 공격패턴 많이 얍삽해졌구나.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레오라! 상태는?"
"버틸만 합니다! 폐하!"
우리 부부는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좁은 산길에서 양쪽으로 맞닥뜨린 적과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다. 아니 사실 치열하다고 하기에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문제는 서서히 물약이 줄어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사 클래스인 나보다 마법사인 레오라가 더 빨리 회복약을 소모했다. 999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워 가져온 물약은 교전 5분 만에 스무개를 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
조금 초조해졌다. 아무리 내가 지금 족히 100명 가까이 베었고 레오라도 비슷하게 죽였다고 해도, 물약 소모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물며 이런 기사단 말단이 아니라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 그리고 기사단장 같은 중간보스급과도 싸워야 한다고 치면 이건 위험했다. 이 속도라면 3만 명은 커녕 그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 둘이 뻗고 말 것이다.
'망했다'
사실 처음에는 부족한 머릿수이다보니 좁은 길에서 싸우는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소모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니 이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의 우두머리를 먼저 칠 수 없고, 서서히 힘도 빠지며 회복약을 소모하게 되는데다 퇴로까지 없는 상황이라 최악이었다.
"아 좆됐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적은 끝없이 머릿 수로 밀어붙인다. 정면에서는 기마병의 랜스차징이, 그리고 뒤에서는 화살과 마법 공격이 동시에 날아온다. 모두 검과 방패로 쳐내며 기사를 쳐죽여야 한다. 팔다리를 허우적 허우적대는 나의 모습을 순간 상상하며 방문을 잠궈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달밤의 에어로빅도 아니고, 엄마가 보기라도 했으면 등짝을 때리다 못해 아예 전원을 꺼버릴테니까. 아니,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다. 화살 걷어내기 바쁘다.
허억-허억-
그리고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내 체력소모가 너무 컸다. 불과 10분도 안되는 사이에 내 온 몸에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년에 마왕 잡을 때 시절의 NPC가 아니다. 공격이 상당히 체계적이고 끝이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화살, 마법, 랜스차징이 동시에 들어온다. 리듬게임 하듯 정확히 쳐내지 않으면 데미지가 조금씩 쌓인다. 쳐내는 것은 쳐내는대로 내 현실 체력을 갉아먹는다.
"와 이거 어쩌냐 진짜, 레오라!"
…끝없는 싸움을 20분 넘게하자 진짜로 팔이 엄청나게 무겁다. 그럼에도 저 멀리 내다보이는 적의 행렬은 조금도 줄어든 기미가 없다. 삼국지의 관우가 1만 명을 족히 상대할만한 장수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관우도 아니고 그저 배 나온 게임중독자일 따름이다.
'그냥 친위대를 조금이라도 끌고 나올걸'
그랬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 방패막이가 됐을텐데. 사실 상식적으로는 이런 타입의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다. '엠퍼러'는 게임 초반에는 소규모 1인칭 판타지 액션 게임이 중심이지만, 게임 중후반에는 결국 경영, 전략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게임이다. 엄청난 군세의 부하들이 있는데 굳이 적의 대부대와 혼자 싸울 이유가 있겠는가.
'남은 물약 722개…'
내가 내 캐릭터의 HP만 믿고, 실제 나의 체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팔다리가 무거워지자 적의 공격에 맞는 횟수도 늘어나고 회복약 소모도 늘어난다. 조금 쉬기 위해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 물약만 소비한다.
깡! 깡! 깡! 깡! 깡! 깡!
진짜 무슨 총게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화살과 마법과 창의 비가 내 갑옷을 두드린다. 미칠듯한 속도로 HP가 깎이고, 타이밍 맞춰 물약을 깐다. 그렇게 한 10분을 더 쉬었다. 컨트롤러를 통해 정신없이 두들겨맞는 포스피드백이 전해진다.
"아 짜증나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전투 중에 갑자기 게임을 종료하면 승률을 계산해서 그에 따른 데미지를 입게 되는데, 이런 절망적인 싸움이라면 당연히 백퍼센트 사망 판정이다. 그렇다고 항복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는 이 게임 세계관에서 현재 마왕급의 악당이다. 항복한다고 해봤자 백성들 앞에서 참수 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길 수 없다면 도망쳐야 한다'
물론 퇴로는 없다. 방법은 그저 산길 저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것 뿐. 당연히 그것도 사망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13년차 게이머 아닌가. 꼼수는 얼마든지 있지.
"레오라, 절벽으로 도망치자! 부유마법을 걸어줘"
"네 폐하!"
레오라는 치열하게 눈 앞의 적들을 쳐부수면서도 나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레조르겟 코르퍼스, 룩스 애니마에!"
간단한 마법이다보니 그녀의 짧은 주문영창과 함께 나는 두둥실 뜬 몸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공기방울처럼 둥실둥실, 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간다. 나는 낄낄 웃으면서 여유있게 회복약을 빨았다.
"레오라 너도 얼른 튀…"
그러나 나는 그때서야 봤다. 레오라의 남은 마나 수치를. 마나 포인트 194. 부유마법은 한번에 200 포인트가 필요하다. 분당 1포인트씩 차오르는 마법을 채우려면 6분이나 버텨야 한다. 하지만 이제 레오라는 앞뒤로 적을 맞이했다.
"어…"
레오라는 물약을 빨았지만 앞뒤로 공격을 맞다보니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HP바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다시 물약을 빨지만 역시 10초도 되지 않아 위태위태해진다. 게다가 파티장인 나와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곧 인벤토리 공유가 끊긴다.
"마나 유료충전, 결제할게, 결제"
손이 덜덜 떨린다.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고는 해도 13년을 함께 동반자가 되어준 캐릭터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다. 한번 죽은 캐릭터는 되살릴 수 없다. 유료 마나충전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마나가 차지 않는다.
"뭔데"
눈 앞에 [ 결제오류 ] 안내가 뜬다. 그리고 곧 휴대폰에서 띵! 하는 문자 알림 소리가 울린다. 허겁지겁 VR 헬멧을 벗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 결제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 잔액부족 ]
아뿔싸. 고작 2,500원이 없다. 나는 다시 VR헬멧을 쓴다. 레오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몸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레오라는 그 순간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라는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청기사단의 창에 몸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그녀가 쓰러지자 여러 개의 게임 내 알림, 경고가 연달아 떴다.
[ 경고 : 파티원 사망 ]
[ 제국황후 '레오라' 붕어 ]
[ 알림 : 마티오 연합왕국 왕위 변경, 레오라 → 막시밀리안 ]
[ 레벨 99 마법사 '레오라' 사망 ]
[ 알림 : 제국 차기 황위계승권 변경, 레오라 → 드미트리 ]
[ 알림 : 전설급 귀속 무기 '페르사스의 마법봉' 파괴 ]
[ 알림 : 전설급 귀속 갑주 '음열의 불꽃' 파괴 ]
[ 알림 : 제국 황후 -공석- 변경. 새 황후를 임명하시겠습니까? ]
[ 퀘스트 알림 : '토사구팽' 완료 ]
나는 다시 천천히 산 아래로 향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최고속도 대시를 눌렀다. 청기사단의 추적이 시작됐지만, 다행히 들판에서 말을 테이밍하여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아…"
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거의 10년을 부부처럼, 아니 진짜로 내 부인이었던 캐릭터가 죽었다. 게임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게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레오라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레벨 1시절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나간 전우이자 부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
눈 앞이 멍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와중에 마지막 퀘스트 알림 메세지에 눈물이 핑 도는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토사구팽 완료라. 모험을 함께 한 전우를 싹다 죽였지만 레오라만은 곁에 두었거늘.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나는 청기사단에게 진 것이다. 청기사단은 곧 수도의 궁성으로 향할 것이다. 민심이 최악이니 수도의 백성들은 그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모실 것이고, 나는 황제에서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 레오라가 죽었으니 마티오 연합왕국은 독립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백퍼센트'
레오라가 죽었을 경우의 마티오 왕국 차기 왕위계승권자가 왜 내가 아닌 그녀의 이복동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놈은 미친 놈이니까. 빌런 캐릭터다. 마왕 소환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놈이다. 제국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수습하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내가 이 게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어쩌지'
방법은 단 하나다. 지금 수도를 향해 진군 중인 변방의 야전부대, 적색기사단을 만나 그들을 데리고 청기사단을 무찌르는 것. 물론 수도 궁성을 빼앗기고 그들이 적색기사단에게 손을 쓰면 그들마저 나를 배신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유일한 해법이었다. 나 혼자서는 결코 청기사단을 상대할 수 없다.
"음"
헬멧을 벗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오라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다. 그냥 이렇게 게임을 접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라의 유언이 떠오른다.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그 말을 떠올리자 후회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진다. 미친 짓으로 폭정만 안 했으면 반란이 일어날 일도, 레오라를 잃을 일도 없을텐데. 그냥 적당히 얼마 더 하다가 게임 접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건 아닐 거 같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래, 딱 다시 제국 쿠데타만 수습하고 진짜 접는다"
그리고 까짓거 정말로 적색기사단에게도 배신당해서 참수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게임 접기 딱 좋은 명분이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다시 헬멧을 쓰고 적색기사단의 이동경로로 향했다.
< 계속 >
'그런데'
한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플레이 하다보니 근래에 와서는 권태가 생겨, 결국 온 나라를 내 마음대로 휘젓는 폭군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제국의 도처에서는 '반역이라는 이름의 혁명'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버러지 같은 백성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고, 나는 매번 그 반란을 제국의 최정예 부대 '청기사단'을 활용하여 힘으로 짓눌러왔다. 그런데…
"바로 그 청기사단이 반란을…"
이런 일이 일어나 버렸다. 문제는 관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제국의 군사력을 이래저래 지우고 조각내 버린 탓에, 수도 근처의 청기사단을 견제할만한 마땅한 카드가 없었다. 게다가 하드코어 모드로 시작한 탓에, 나는 게임 속에서 한번 죽으면 바로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내 13년 간의 인생 흔적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수도에 당도해서 백성들을 선동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폐하의 신묘한 용력으로 제압하옵소서!"
충신 중의 충신인 제국상서의 말을 들어, 결국 나는 청기사단을 치기 위해 '마왕을 무찌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사와 마법사'를 동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로 황제인 나와 황후인 레오라 말이다.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P.02
"반역자 무리가 저기 모여있구나"
수도 외곽의 알록사스 산을 넘자, 저 멀리 청기사단의 주둔지인 알록사스 요새가 보였다. 높은 성채와 깊게 판 해자, 수많은 결계와 마법보호막으로 보호 받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엄청난 위용을 보이고 있다. 그 안을 지키고 있는 청기사단은 기병만 1만에 이르는 총 3만의 최정예 병력으로, 일전의 3.6 반란 때는 무려 20만에 달하는 반란군을 단번에 쓸어버리기도 한 정예 중의 정예다.
"레오라"
"예, 폐하"
"역도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거라"
"알겠습니다"
나의 지시에 레오라는 말에서 내려 지그시 눈을 감고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한줄기 실처럼 하늘로 하늘하늘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의 오오라는 점점 굵어졌다. 큰 마법이라 꽤나 힘든 모양인지, 레오라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음-, 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참 야하긴 야해"
사실 이펙트 자체는 레트로 양산형 모바일게임스럽지만, 워낙에 캐릭터 모델링이 출중한 게임이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간만의 레오라 최종 갑옷을 본다. 바스트와 성기가 강조되는 형태의 저 에로틱한 갑옷. 너무 섹시하다. 현실에서라면 중증 성도착증 환자들이 광란의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노출광 패션이지만, 어쨌든 세계관 속에서는 전설적인 장인이 만든 갑옷이란다. 그 놈도 물론 변태겠지.
"알라두크, 푸르시두크…"
어쨌든 지금 레오라가 쓰려는 마법은 이 게임 세계관 속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인 운석소환 마법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식상함이지만 이 게임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드는 거고. 나같은 아재한테는 그저 익숙한 UI, UX가 최고다.
"시아네이스 아드후크 마지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을 한참 중얼중얼 외우던 레오라는 이제는 전신에서 엄청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나 역시도 눈을 뜨고는 레오라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아예 등을 돌린 채로 알록사스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저 멀리 하늘이 갈라진 듯 갑자기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시야 밖에서 나타나더니 요새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콩그레가티, 매그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의 마지막에 이르자 이제는 바위 뿐 아니라 수많은 돌의 비가 요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결계와 대마법실드가 쳐져 있어도 소용 없다. 레오라의 소환 마법은 '자연물'을 소환하는 것인만큼 직접적인 마법방어 중심의 요새 마법방어벽은 의미가 없다.
꽈과광-
너무 거대한 충격이라, 내가 있는 이 알록사스 산맥 자체가 한 1미터쯤 들썩인 느낌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레오라가 탄 말도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다. 그리고 요새는, 아니 '한때 요새였던 것'은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뒤덮였고 그 먼지가 가라앉은 뒤의 모습은 그냥 거대한 바위산 뿐이었다. 요새는 흔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이제 제일 쉽잖아"
계속 회복마법과 물약을 빨면서 싸운다는 전제 하에, 둘이서 3만명을 물리적으로 이기는 것도 사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싶다. 어쨌든 VR 게임이라 싸우다 보면 플레이어인 나도 지친다. 마왕과 싸우던 시절의 20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것이다. 그저 이렇게 원거리에서 지도 자체를 바꿔버리는 수준의 강력한 마법으로 끝내버리는게 최고다.
"폐하…"
"이 약을 마시거라"
하지만 역시 세계관 최강의 마법이다. 레오라는 마법을 시전한 직후 모든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입에 물약을 흘려주자 곧 기력을 채우기는 했지만, 더이상 운석소환급의 대마법은 쓸 수 없다. 기력은 게임 속 아이템으로도 충전이 가능하지만, 마나의 급속한 충전은 유료 결제를 해야한다. 현실 백수인 내가 유료 결제에 쓸 돈은 없다. 어차피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면 완충되는걸 뭐.
"돌아가자"
"네에…"
혹시나 해서 풀장비를 맞추고 온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레오라도 다시 말에 올랐고, 나도 말머리를 돌렸다. 다만 이제 청기사단이 몰살했으니 반란진압용 부대를 새로 키울 생각에 머리가 아플 따름이었다.
"폐하!"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깡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암전효과. 저격마법이 틀림없다. 블라인드 상태가 된 나는 오랜 경험에 따라 즉시 자세를 낮추고 칼을 뽑으며 전투준비를 했다. 레오라는 즉시 내 뒤에 붙으며 상황을 브리핑했다.
"폐하, 포위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청기사단입니다. 지나온 언덕 뒤에서, 수백명 이상의 기사들이 랜스 차징을 해오고 있고 마법부대 역시 이쪽을 향해 마법주문을 시전 중입니다"
큰일이다. 놈들은 이미 요새를 버리고 정예만을 뽑아 산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저격을 당해 3분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싸워야 한다. 레오라의 마나는 채 1%도 안 남기고 고갈된 상태. 그래도 만랩 마법사인만큼 방어력과 기본 공격력 모두 준수한 수준이지만, 상대 역시 내가 직접 기른 최정예 병력이다.
"너는 스크롤로 마법방어를 해. 그리고 기사들이 있는 방향을 말해줘"
"6시 방향입니다"
나는 즉시 몸을 빙글 돌린 후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장창을 향해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드는 보병. 현실이라면 자살행위지만 게임 속의 나는 다르다. 어차피 우리가 지나온 길은 좁은 산길. 말 두 마리가 간신히 나란히 지날 수 있는 폭이니만큼 옆구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 맛에 게임하는거지'
정말 오래간만에 게임하는 맛을 느끼고 있다. 입이 바싹 마르고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간다. '지는 순간 캐릭터 소멸' 이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게임하는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나는 대시 속도를 최고로 높이며 VR의 양쪽 컨트롤러 버튼을 빠르게 3회 누르며 필살기를 시전했다.
'마검 새_롱스워드'의 '불검' 공격.
…이름이 너무 시시한 이유는, 게임 초반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던 무기들은 강화 도중에 모두 깨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제련 기술과 마법부여 기술도 만랩을 채워 직접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시도 끝에 무려 32번의 강화에 성공한 마검을 얻게 된 것이다. 수만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해야 되는데 '어차피 깨질 거' 매번 이름 그럴싸하게 짓기도 귀찮아서 기본 이름 그대로 시행하던 차에 안타깝게도 이 명검은 시시한 이름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이 검과 그 검에서 발산되는 위력은 장난이 아니다. '엠퍼러'의 온오프라인 모드 포함 전체 무기 위력순위 24위에 랭크되어 있는 이 가공할 마검에서는 드래곤의 브레스와 같은 무속성 화염이, 그 원조 화염마법의 16배 데미지를 더해 쏟아져 나간다.
"가아아아아악!"
"우아아악!"
미련하게도 산길을 따라 이쪽을 향해 진격해오던 기사단 제 1파는 그렇게 화염마법에 죽 갈려나갔다. 아니 갈려나갔을 것이다. 아직 블라인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무려 2분 42초가 남았다.
두두두두두
하지만 그 뒤의 또다른 기사단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검의 쿨타임은 20초. 그 사이 나는 방어를 위해 마나실드를 치고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마구잡이 칼을 휘두른다.
콰직 콰직 콰직 촥 촥
나의 마검에 무참히 썰려나가는 청기사단.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베는 맛의 포스피드백. 간간히 깡! 깡! 하며 나의 투구와 갑옷에 기사단의 랜스 차징이 박히고 데미지가 꽤 들어오지만, 물약을 빨면 그만이다. 그렇게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수백 명의 역적을 죽여나간다. 10년도 넘게 즐겨온 게임이다. 간간히 업데이트 된다고는 해도, 인공지능 NPC 유닛의 공격패턴 정도는 안 보고도 싸울 수 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블라인드 3분은 길어도 너무 길어"
온라인 모드의 PVP 대결이라면 블라인드 마법은 거의 사기스킬이나 다름없다. 당하면 그냥 바로 접속 끊는게 차라리 덜 분할 정도로. 3분 동안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두들겨 맞는데 이길 도리가 없다. 하지만 NPC 정도야. 간간히 불검을 날려주며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죽어라 이 쓰레기들아. 어?"
기습적으로 얻어맞으면 몰라도, 이제 경계를 하는 상태에서는 블라인드를 또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이 어두워졌다. 이 중대한 상황에 2연속 블라인드라니, 순간적으로 너무 짜증이 났다. NPC 공격패턴 많이 얍삽해졌구나.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레오라! 상태는?"
"버틸만 합니다! 폐하!"
우리 부부는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좁은 산길에서 양쪽으로 맞닥뜨린 적과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다. 아니 사실 치열하다고 하기에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문제는 서서히 물약이 줄어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사 클래스인 나보다 마법사인 레오라가 더 빨리 회복약을 소모했다. 999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워 가져온 물약은 교전 5분 만에 스무개를 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
조금 초조해졌다. 아무리 내가 지금 족히 100명 가까이 베었고 레오라도 비슷하게 죽였다고 해도, 물약 소모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물며 이런 기사단 말단이 아니라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 그리고 기사단장 같은 중간보스급과도 싸워야 한다고 치면 이건 위험했다. 이 속도라면 3만 명은 커녕 그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 둘이 뻗고 말 것이다.
'망했다'
사실 처음에는 부족한 머릿수이다보니 좁은 길에서 싸우는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소모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니 이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의 우두머리를 먼저 칠 수 없고, 서서히 힘도 빠지며 회복약을 소모하게 되는데다 퇴로까지 없는 상황이라 최악이었다.
"아 좆됐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적은 끝없이 머릿 수로 밀어붙인다. 정면에서는 기마병의 랜스차징이, 그리고 뒤에서는 화살과 마법 공격이 동시에 날아온다. 모두 검과 방패로 쳐내며 기사를 쳐죽여야 한다. 팔다리를 허우적 허우적대는 나의 모습을 순간 상상하며 방문을 잠궈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달밤의 에어로빅도 아니고, 엄마가 보기라도 했으면 등짝을 때리다 못해 아예 전원을 꺼버릴테니까. 아니,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다. 화살 걷어내기 바쁘다.
허억-허억-
그리고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내 체력소모가 너무 컸다. 불과 10분도 안되는 사이에 내 온 몸에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년에 마왕 잡을 때 시절의 NPC가 아니다. 공격이 상당히 체계적이고 끝이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화살, 마법, 랜스차징이 동시에 들어온다. 리듬게임 하듯 정확히 쳐내지 않으면 데미지가 조금씩 쌓인다. 쳐내는 것은 쳐내는대로 내 현실 체력을 갉아먹는다.
"와 이거 어쩌냐 진짜, 레오라!"
…끝없는 싸움을 20분 넘게하자 진짜로 팔이 엄청나게 무겁다. 그럼에도 저 멀리 내다보이는 적의 행렬은 조금도 줄어든 기미가 없다. 삼국지의 관우가 1만 명을 족히 상대할만한 장수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관우도 아니고 그저 배 나온 게임중독자일 따름이다.
'그냥 친위대를 조금이라도 끌고 나올걸'
그랬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 방패막이가 됐을텐데. 사실 상식적으로는 이런 타입의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다. '엠퍼러'는 게임 초반에는 소규모 1인칭 판타지 액션 게임이 중심이지만, 게임 중후반에는 결국 경영, 전략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게임이다. 엄청난 군세의 부하들이 있는데 굳이 적의 대부대와 혼자 싸울 이유가 있겠는가.
'남은 물약 722개…'
내가 내 캐릭터의 HP만 믿고, 실제 나의 체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팔다리가 무거워지자 적의 공격에 맞는 횟수도 늘어나고 회복약 소모도 늘어난다. 조금 쉬기 위해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 물약만 소비한다.
깡! 깡! 깡! 깡! 깡! 깡!
진짜 무슨 총게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화살과 마법과 창의 비가 내 갑옷을 두드린다. 미칠듯한 속도로 HP가 깎이고, 타이밍 맞춰 물약을 깐다. 그렇게 한 10분을 더 쉬었다. 컨트롤러를 통해 정신없이 두들겨맞는 포스피드백이 전해진다.
"아 짜증나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전투 중에 갑자기 게임을 종료하면 승률을 계산해서 그에 따른 데미지를 입게 되는데, 이런 절망적인 싸움이라면 당연히 백퍼센트 사망 판정이다. 그렇다고 항복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는 이 게임 세계관에서 현재 마왕급의 악당이다. 항복한다고 해봤자 백성들 앞에서 참수 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길 수 없다면 도망쳐야 한다'
물론 퇴로는 없다. 방법은 그저 산길 저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것 뿐. 당연히 그것도 사망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13년차 게이머 아닌가. 꼼수는 얼마든지 있지.
"레오라, 절벽으로 도망치자! 부유마법을 걸어줘"
"네 폐하!"
레오라는 치열하게 눈 앞의 적들을 쳐부수면서도 나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레조르겟 코르퍼스, 룩스 애니마에!"
간단한 마법이다보니 그녀의 짧은 주문영창과 함께 나는 두둥실 뜬 몸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공기방울처럼 둥실둥실, 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간다. 나는 낄낄 웃으면서 여유있게 회복약을 빨았다.
"레오라 너도 얼른 튀…"
그러나 나는 그때서야 봤다. 레오라의 남은 마나 수치를. 마나 포인트 194. 부유마법은 한번에 200 포인트가 필요하다. 분당 1포인트씩 차오르는 마법을 채우려면 6분이나 버텨야 한다. 하지만 이제 레오라는 앞뒤로 적을 맞이했다.
"어…"
레오라는 물약을 빨았지만 앞뒤로 공격을 맞다보니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HP바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다시 물약을 빨지만 역시 10초도 되지 않아 위태위태해진다. 게다가 파티장인 나와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곧 인벤토리 공유가 끊긴다.
"마나 유료충전, 결제할게, 결제"
손이 덜덜 떨린다.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고는 해도 13년을 함께 동반자가 되어준 캐릭터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다. 한번 죽은 캐릭터는 되살릴 수 없다. 유료 마나충전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마나가 차지 않는다.
"뭔데"
눈 앞에 [ 결제오류 ] 안내가 뜬다. 그리고 곧 휴대폰에서 띵! 하는 문자 알림 소리가 울린다. 허겁지겁 VR 헬멧을 벗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 결제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 잔액부족 ]
아뿔싸. 고작 2,500원이 없다. 나는 다시 VR헬멧을 쓴다. 레오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몸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레오라는 그 순간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라는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청기사단의 창에 몸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그녀가 쓰러지자 여러 개의 게임 내 알림, 경고가 연달아 떴다.
[ 경고 : 파티원 사망 ]
[ 제국황후 '레오라' 붕어 ]
[ 알림 : 마티오 연합왕국 왕위 변경, 레오라 → 막시밀리안 ]
[ 레벨 99 마법사 '레오라' 사망 ]
[ 알림 : 제국 차기 황위계승권 변경, 레오라 → 드미트리 ]
[ 알림 : 전설급 귀속 무기 '페르사스의 마법봉' 파괴 ]
[ 알림 : 전설급 귀속 갑주 '음열의 불꽃' 파괴 ]
[ 알림 : 제국 황후 -공석- 변경. 새 황후를 임명하시겠습니까? ]
[ 퀘스트 알림 : '토사구팽' 완료 ]
나는 다시 천천히 산 아래로 향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최고속도 대시를 눌렀다. 청기사단의 추적이 시작됐지만, 다행히 들판에서 말을 테이밍하여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아…"
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거의 10년을 부부처럼, 아니 진짜로 내 부인이었던 캐릭터가 죽었다. 게임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게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레오라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레벨 1시절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나간 전우이자 부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
눈 앞이 멍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와중에 마지막 퀘스트 알림 메세지에 눈물이 핑 도는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토사구팽 완료라. 모험을 함께 한 전우를 싹다 죽였지만 레오라만은 곁에 두었거늘.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나는 청기사단에게 진 것이다. 청기사단은 곧 수도의 궁성으로 향할 것이다. 민심이 최악이니 수도의 백성들은 그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모실 것이고, 나는 황제에서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 레오라가 죽었으니 마티오 연합왕국은 독립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백퍼센트'
레오라가 죽었을 경우의 마티오 왕국 차기 왕위계승권자가 왜 내가 아닌 그녀의 이복동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놈은 미친 놈이니까. 빌런 캐릭터다. 마왕 소환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놈이다. 제국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수습하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내가 이 게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어쩌지'
방법은 단 하나다. 지금 수도를 향해 진군 중인 변방의 야전부대, 적색기사단을 만나 그들을 데리고 청기사단을 무찌르는 것. 물론 수도 궁성을 빼앗기고 그들이 적색기사단에게 손을 쓰면 그들마저 나를 배신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유일한 해법이었다. 나 혼자서는 결코 청기사단을 상대할 수 없다.
"음"
헬멧을 벗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오라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다. 그냥 이렇게 게임을 접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라의 유언이 떠오른다.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그 말을 떠올리자 후회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진다. 미친 짓으로 폭정만 안 했으면 반란이 일어날 일도, 레오라를 잃을 일도 없을텐데. 그냥 적당히 얼마 더 하다가 게임 접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건 아닐 거 같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래, 딱 다시 제국 쿠데타만 수습하고 진짜 접는다"
그리고 까짓거 정말로 적색기사단에게도 배신당해서 참수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게임 접기 딱 좋은 명분이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다시 헬멧을 쓰고 적색기사단의 이동경로로 향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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