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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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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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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먹고 싶어?"

나의 질문에 진서는 "아무거나" 하고 대답한다. 그때 정말 아무거나 골랐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진서가 좋아하는 거 사주고 싶어서 한번 더 물어봤다.

"그래도 뭐 먹고 싶은거 있을거 아냐. 배 안 고파? 좋아하는거 사줄께"

하지만 진서는 짜증난다는 듯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쏘아붙였다.

"아 그냥 아무거나 먹는다고. 아무거나 먹는다면 그냥 고르면 되잖아. 왜 꼭 그렇게 몇 번을 물어보는거야 귀찮게. 나 별로 밥 먹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순간 벙 쪘고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럼 요 앞에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 하고 말했다. 약간의 뜸을 들인 진서는 그제서야 감정을 추스리고는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아니, 왜 꼭 나만 나쁜 사람이 되냐고. 그냥 아무거나 먹자고 하면 오빠가 먹고 싶은거 고르면 되잖아. 몇 번을 물어보니까 사람이 짜증이 확 나잖아. 이래도 내가 나쁜 사람이야?"

나는 그저 묵묵히 입 다물고 신발을 신으며 "미안해, 얼른 먹으러 가자. 나 배고프다" 하면서 그녀에게 사람 좋게 말했다. 진서는 여전히 짜증이 풀풀 난 얼굴로 겨우 신발을 신는다.




몇 년 전의 일이 겹쳐 떠오른다. 그때는 내가 진서의 입장이었다.

"아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내가 뭐 니가 고른 메뉴 갖고 한번이라도 뭐라고 한 적 있냐? 근데 뭘 자꾸 그렇게 매번 꼬치꼬치 캐묻는거야. 그냥 너 먹고 싶은거 먹어 쫌!"

소리를 빽지른 나. 아영이는 당황한 듯 "아, 아니. 그냥 난 오빠가…" 라며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서러운 듯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제서야 미안함을 느끼고 나는 게임을 끄고 아영에게 달려가 안아주었다. 보통의 여자애 같았으면 그쯤해서 더 화를 내고 헤어지네 마네 소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건만, 그녀는 조금 운 뒤에는 또 나를 이해해주었다.

"내가 미안해. 게임하는데 자꾸 이것저것 말거니까 오빠 신경 건드려서 그렇지 뭐. 괜찮아"

벌개진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참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애가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진심으로 사과하며 앞으로는 안 그러겠노라고 말했지만 그 이후로도 사실 자주 그랬다.




"맛있다 여기"

사실 그저 그랬다. 저번에는 분명히 맛있었는데, 오늘은 어째 영 그렇다. 진서는 여전히 최악의 표정으로 말 없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예전 같으면 "왜 그래, 이거 좀 먹어봐" 하면서 더 말이라도 걸었을텐데, 이제는 안다. 굳이 말 걸어봐야 좋을 일 없다는거.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문다.

말 없이 그저 몇 숟가락을 더 먹는 순간, 진서가 말했다.

"좀 천천히 먹어. 맨날 뭐가 그렇게 급해"

나는 입 안의 씹는 속도를 줄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둘 다 또 말이 없어졌다. 불편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내 머릿 속에 가득찬다.




아영이는 항상 나를 갈구했다.

"맛있어? 나 좀 봐. 나랑 밥 먹으러 와서 휴대폰만 보지 말구"

그제서야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영이에게 "너도 먹어. 나만 먹고 있네. 나는 먹는 속도가 빠르니까… 너 살 좀 쪄야 돼" 하면서 뒤늦게 휴대폰에 쏟아붓던 애정을 아영에게 건낸다. 그래도 아영은 싫은 소리 한번 한 적이 없다.

"밥 다 먹고,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언젠가의 일 이후로, 아영은 막연하게 '우리 뭐할까' 라는 식의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옷 사러갈까? DVD방 갈까? 만화방 갈까? 식으로, 무언가의 제안을 해왔다. 그러고보니 그걸 이제야 캐치했다. 헤어진지 3년이 지나서야.




"아니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지만 난 아영이 아니다.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몇 번이고 화를 꿀꺽꿀꺽 삼켰지만, 결국에는 계속 심통을 내는 진서에게 화를 쏟아냈다. 진서도 나쁜 애는 아니다.

"미안해. 내가 좀…"

머리를 쓸어올리며 사과하는 진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근심 걱정이 있던 모양이다.

"미안해. 내가 오늘 영 컨디션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아서 오빠한테 괜한 화를 냈나봐. 미안해"

그래, 내가 바란 것은 그리 큰 게 아니다. 애초에 나도 과거 바보 짓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 사과를 하면 된다. 그게 내가 바라는…

"근데 오빠. 미안해. 그만하자"

뭐를.

"뭘 그만해…"

오 제발.

"그냥, 그만 만나자고. 내가 지금 오빠랑 만날 심적 여유가 없는 거 같애. 알잖아. 나 요즘 이직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솔직히 오빠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별로 재미있는 줄 모르겠어. 맨날 이렇게 싸우기나 하고. 이건 아닌 거 같아."

하….




그렇게 멍하니 거의 3분을, 진서네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할 말을 열심히 찾던 나는 결국 "그래…" 하며 돌아섰다. 붙잡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에도 아영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안해, 오빠 화 풀어라. 응?"

내가 먼저 잘못하고도 또 사과는 아영이 먼저한다. 아영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나의 심통은 도대체 왜 이럴까.

"아니 내가 그래, 잘못한건 맞어. 근데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 내가 뭐가 되냐?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아영을 타박하는 나. 연애의 주도권을 쥔 자로서의 잔인한 권리.

"아니 진짜 하. 야, 솔직히 나도 힘들어. 맨날 못되게 구는 새끼 되는 거 같아서. 근데 솔직히 너도 좀 너무 해. 사람이 좀 센스있게 넘어가 줄 수도 있는거 아니냐고. 웃으면서"

개같은 논리로, 나는 아영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다.

"지겹다 진짜. 나 그냥 집에 갈 테니까, 너도 그냥 들어가. 아… 힘들다 정말"
"오빠…"
"아 손 놓으라고!"

지금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 참 그렇게 모질고 못 되게 굴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정신 나간 놈이었다. 인생에서 단 한순간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몇 번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 …"

아영은 손을 뿌리친 나를 보며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그제서야 등을 돌리고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조금 화가 풀린 나는 그냥 여기서 다시 화해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때는 또 내 딴에 '앞으로 싸울 때마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소리 지르는 쟤 버릇 좀 고치자' 라는 병신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아영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전화든 카톡이든 다시 할테니까.

그러나 그게 아영을 본 마지막이었다. 새벽 4시, 아영은 길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내용은 '나 요즘 많이 힘들었어. 알아. 원래는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닌거.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거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러니까 내가 오빠를 만났지. 근데 나를 만나면서 오빠가 마음이 많이 힘들어진 것 같아.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동안 어쩌면 우리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나 편안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 사실 나는 그래도 오빠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 그렇다면 내가 오빠 곁에 있는게 서로에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 정말 고마웠구... 정말로 좋아했어. 안녕' 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는 내가 울컥하는데 쓰던 아영의 기분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그런 문자다. 그리고 정말 그게 끝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그 문자를 본 나는 회사도 빠지고 정신없이 그녀의 자취방으로 뛰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몇 십통의 전화과 카톡을 했지만 이미 차단된 상태였고 그녀의 집도 결국 며칠 뒤 내가 회사 간 사이 포장이사가 와서 싹 다 치워갔다.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아영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집에 와 멍하니 앉아, 진서를 생각했다. 나는 참 많이 부족한 남자친구였다. 멋있는 기억, 좋은 기억,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기억도 별로 없다. 참 부족했다.

"진서야, 좋은 사람 만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서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속, 회사 단합대회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만 보이는 저 환한 웃음을 자주 짓길 바라며 나는 그렇게 눈을 감고 길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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