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가함을 이기지 못해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마신다. 집 앞 1분 거리에 즐비한 수많은 동네 카페와 프렌차이즈 카페를 두고 왜 굳이 10분 가까이 걸어와 세 배가 넘는 가격에 커피를 마시냐 하면 조금 더 내 시간을 귀하게 쓰고 싶기 때문이다.
달그락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가 끊어지는 찰나에 내려놓은 커피잔의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평일 오전의 로비건만, 오늘따라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이 조금 많다.
"흠"
민트색 블레이저를 입은 흰 바지의 늘씬한 아가씨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편한 힙합 스타일 커플룩을 입은 한 쌍의 커플이 컨시어지 쪽을 향한다. 몇 명의 정장 입은 중장년들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만나서 2층의 컨벤션홀로 향하고 나는 다시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인다.
오늘의 스케쥴은 아무 것도 없다. 내일도. 모레는 수영씨와 점심 약속이 있다. 전 직장 거래처에서 왠지 말이 잘 통해서 친해졌지만, 정작 회사 바깥에서 여자로서 만나자니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 그녀의 회사 앞 미들급 스시 오마카세를 예약해두었다. 다만 관계의 진전에 대해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특히 지난 주 금요일 오후 4시의 카카오톡의 읽지 않은 1이, 다음 날 낮에서야 사라지고, 어색한 이유를 대는 모습에 내가 헛된 기대를 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모레의 식사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쩝"
입 안이 건조해졌다. 카페 매니저에게 물 한 잔을 부탁하자 기분좋게 얼음잔에 찬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내준다. 씁쓸해졌던 기분이 한뜻 상쾌해진다. 취향이 맞는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노라면 문득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인간관계, 오늘 나의 할 일,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사업 아이디어,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까지.
"방금 구운 쿠키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서비스인가요?"
"네"
"감사합니다"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의 호텔 내 카페 매니저가 다가와 쿠키를 하나 주고 간다. 그렇잖아도 입이 조금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그러나 맛은 그저 그렇다. 전 직장 회의실에 가득하던 그 뻑뻑한 커피 쿠키의 흔한 맛이다. 한 입 베어문 뒤 트레이에 쿠키를 버리듯 올려놓는다.
"3시 5분…"
11시에 와서 4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한가롭다. 불과 2년 전까지는 일에 치여 살았다. 하루 평균 2시간의 야근은 기본, 그러나 비전 없는 사업성과 능력 없는 상사, 재미없는 업무의 3박자로 가득 채워진 회사는 이미 나에게서 모든 열정을 빼앗아간 상태였고 그 어떤 동기부여도 받지 못한 나는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이직할 회사도, 새롭게 뛰어들 사업도 정해놓지 않고 던진 사표였다.
주말이라면 상상도 못할, 평일 오전 번화가의 한가로운 카페부터 산길 와인딩, 우연히 발 닿은 곳의 식당, 럭셔리 요트 체험, 한가로운 유명식당 탐방, 일주일간 3개의 호텔을 바꾸가며 호캉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당일치기 지방여행, 3일 밤낮에 걸친 프라모델 조립, 22시간 미드 시청, 평일 오전의 등산, 아무 의미없는 한적한 어느 교외 시골길에서의 낮잠까지, 직장생활 중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수많은 일들을 분풀이하듯 해치웠다.
그 와중에 골프레슨과 헬스를 다니며 조금은 보람찬 일(?)들로 내 안의 작은 성취감을 채웠고, 모처럼의 지인들과 오래간만에 찾아다니며 식사를 나누고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까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지체없이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나누고 약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약을 먹고 나서는 더이상의 상담을 포기했다. 형식적인 3분간의 문답과 약 처방. 이것은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치료가 아니라고 느꼈다. 마치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먹는 진통제처럼 말이다.
"이건 아니야"
어지러운 집을 보며 한숨을 쉰 나는 이틀간 깨어있는 시간 내내 청소했다. 역시 직장을 다니는 중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방을 치우고, 정리하고, 먼지 하나 없도록 스팀청소까지 하고 공기청정기를 새로 주문했다. 집에 넘쳐나는 아까운 물건들을 버리고, 팔았다. 청소가 끝나고 바닥에 누운 순간 '진작 이렇게 하고 살걸'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그 생각에 휩쓸리면 지난 3년 간의 시간이 너무 아까워지니까.
집이 깨끗해진만큼 생각도 조금 맑아졌다. 아니, 생각이 맑아졌기에 집을 치울 생각도 한 것이겠지. 그날부터 매일 아침 눈 뜨는대로 씻고 카페로 향했다. 처음에는 역시 이곳저것 분위기 좋은 카페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에는 그것도 시간 낭비, 정신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집 근처 제일 좋은 호텔 내 카페로 향했다.
매일 분위기 근사한 곳에서 커피 한 잔과 명상 아닌 명상을 하며 할 일을 찾았다. 일자리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일을.
돈은 문제가 아니다. 당장 먹고 살 돈은 충분히 있다. 무슨 일을 해야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그런 삶? 나이 마흔 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딱히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 당장 여자를 만나 결혼을 준비해서 아이를 갖고자 준비해도 아이가 이미 고등학생 때 나는 환갑이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공허하다.
결국 삶에서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당장 무언가의 목표조차 없다. 처자식이 있으면 동기부여라도 될텐데. 아니, 그것은 정말 최악의 핑계다.
그렇다면 뭘하면 좋을까.
무언가의 모임에도 몇 번 나가봤지만 별 것 없었다. 시시한 사람들의 모임은 시시해서 싫었고, 대단한 사람들의 모임은 기가 죽어서 싫었다. 매력적인 누군가들과의 연애는 충분히 설레이는 재미를 보장했지만 그 역시도 이 나이쯤 되면 내 마음 속의 애매한 무언가가 어느 시점에서 강력한 브레이크를 건다. 많은 나이 아니라고 열심히 나를 설득하고,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솔직히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다.
명예를 갖고 싶지만 명예라는 것은 가볍게 만들어 낼 수 있는게 아니다. 천부적으로 어마어마한 무엇인가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타고난 재능에 한없는 노력이 깃들어져야 만들 수 있는 것이 명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에 나는 지금 너무 마음이 초조한 상태다.
지금이라도 분명히 꾸준히 무엇인가를 진행한다면 분명히 될텐데. 그 '무엇인가'가 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새하얀 빛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그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차라리 한 방향으로 쭉 뛰어갔다면 그래도 벽이라도 만져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 속에 다시 방향 없이 뛰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충동을 겨우 이겨내며 눈을 뜨고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일어나 계산을 하곤 대낮임에도 바(bar)로 향한다. 머리를 질끈 뒤로 묶은 상큼하게 생긴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잔 주문한다. 쓴 맛을 이겨내며 한 잔을 비우고, 또 한 잔을 마신다. 술 맛도 모르고 마시는 이상한 아저씨가 되어 그렇게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진 토닉 한잔 더 받은 뒤 몇 시간을 멍하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
술이 전혀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다. 하루 반나절 동안 전화가 온 곳이라고는 은행과 회계사와 시시한 모임의 주말 모임 확인 전화-사실 표현은 그렇게 해도, 위안이 크게 됐다-가 전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세상이 환하다. 좋으면서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 시간대에는 노을도 거의 저물고, 슬슬 저녁이어야 하는거 아닌가? 하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질문을 마음 속으로 던져본다. 차라리 빨리 노을이 졌으면 좋겠다.
< 끝 >
달그락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가 끊어지는 찰나에 내려놓은 커피잔의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평일 오전의 로비건만, 오늘따라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이 조금 많다.
"흠"
민트색 블레이저를 입은 흰 바지의 늘씬한 아가씨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편한 힙합 스타일 커플룩을 입은 한 쌍의 커플이 컨시어지 쪽을 향한다. 몇 명의 정장 입은 중장년들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만나서 2층의 컨벤션홀로 향하고 나는 다시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인다.
오늘의 스케쥴은 아무 것도 없다. 내일도. 모레는 수영씨와 점심 약속이 있다. 전 직장 거래처에서 왠지 말이 잘 통해서 친해졌지만, 정작 회사 바깥에서 여자로서 만나자니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 그녀의 회사 앞 미들급 스시 오마카세를 예약해두었다. 다만 관계의 진전에 대해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특히 지난 주 금요일 오후 4시의 카카오톡의 읽지 않은 1이, 다음 날 낮에서야 사라지고, 어색한 이유를 대는 모습에 내가 헛된 기대를 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모레의 식사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쩝"
입 안이 건조해졌다. 카페 매니저에게 물 한 잔을 부탁하자 기분좋게 얼음잔에 찬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내준다. 씁쓸해졌던 기분이 한뜻 상쾌해진다. 취향이 맞는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노라면 문득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인간관계, 오늘 나의 할 일,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사업 아이디어,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까지.
"방금 구운 쿠키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서비스인가요?"
"네"
"감사합니다"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의 호텔 내 카페 매니저가 다가와 쿠키를 하나 주고 간다. 그렇잖아도 입이 조금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그러나 맛은 그저 그렇다. 전 직장 회의실에 가득하던 그 뻑뻑한 커피 쿠키의 흔한 맛이다. 한 입 베어문 뒤 트레이에 쿠키를 버리듯 올려놓는다.
"3시 5분…"
11시에 와서 4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한가롭다. 불과 2년 전까지는 일에 치여 살았다. 하루 평균 2시간의 야근은 기본, 그러나 비전 없는 사업성과 능력 없는 상사, 재미없는 업무의 3박자로 가득 채워진 회사는 이미 나에게서 모든 열정을 빼앗아간 상태였고 그 어떤 동기부여도 받지 못한 나는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이직할 회사도, 새롭게 뛰어들 사업도 정해놓지 않고 던진 사표였다.
주말이라면 상상도 못할, 평일 오전 번화가의 한가로운 카페부터 산길 와인딩, 우연히 발 닿은 곳의 식당, 럭셔리 요트 체험, 한가로운 유명식당 탐방, 일주일간 3개의 호텔을 바꾸가며 호캉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당일치기 지방여행, 3일 밤낮에 걸친 프라모델 조립, 22시간 미드 시청, 평일 오전의 등산, 아무 의미없는 한적한 어느 교외 시골길에서의 낮잠까지, 직장생활 중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수많은 일들을 분풀이하듯 해치웠다.
그 와중에 골프레슨과 헬스를 다니며 조금은 보람찬 일(?)들로 내 안의 작은 성취감을 채웠고, 모처럼의 지인들과 오래간만에 찾아다니며 식사를 나누고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까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지체없이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나누고 약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약을 먹고 나서는 더이상의 상담을 포기했다. 형식적인 3분간의 문답과 약 처방. 이것은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치료가 아니라고 느꼈다. 마치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먹는 진통제처럼 말이다.
"이건 아니야"
어지러운 집을 보며 한숨을 쉰 나는 이틀간 깨어있는 시간 내내 청소했다. 역시 직장을 다니는 중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방을 치우고, 정리하고, 먼지 하나 없도록 스팀청소까지 하고 공기청정기를 새로 주문했다. 집에 넘쳐나는 아까운 물건들을 버리고, 팔았다. 청소가 끝나고 바닥에 누운 순간 '진작 이렇게 하고 살걸'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그 생각에 휩쓸리면 지난 3년 간의 시간이 너무 아까워지니까.
집이 깨끗해진만큼 생각도 조금 맑아졌다. 아니, 생각이 맑아졌기에 집을 치울 생각도 한 것이겠지. 그날부터 매일 아침 눈 뜨는대로 씻고 카페로 향했다. 처음에는 역시 이곳저것 분위기 좋은 카페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에는 그것도 시간 낭비, 정신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집 근처 제일 좋은 호텔 내 카페로 향했다.
매일 분위기 근사한 곳에서 커피 한 잔과 명상 아닌 명상을 하며 할 일을 찾았다. 일자리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일을.
돈은 문제가 아니다. 당장 먹고 살 돈은 충분히 있다. 무슨 일을 해야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그런 삶? 나이 마흔 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딱히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 당장 여자를 만나 결혼을 준비해서 아이를 갖고자 준비해도 아이가 이미 고등학생 때 나는 환갑이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공허하다.
결국 삶에서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당장 무언가의 목표조차 없다. 처자식이 있으면 동기부여라도 될텐데. 아니, 그것은 정말 최악의 핑계다.
그렇다면 뭘하면 좋을까.
무언가의 모임에도 몇 번 나가봤지만 별 것 없었다. 시시한 사람들의 모임은 시시해서 싫었고, 대단한 사람들의 모임은 기가 죽어서 싫었다. 매력적인 누군가들과의 연애는 충분히 설레이는 재미를 보장했지만 그 역시도 이 나이쯤 되면 내 마음 속의 애매한 무언가가 어느 시점에서 강력한 브레이크를 건다. 많은 나이 아니라고 열심히 나를 설득하고,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솔직히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다.
명예를 갖고 싶지만 명예라는 것은 가볍게 만들어 낼 수 있는게 아니다. 천부적으로 어마어마한 무엇인가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타고난 재능에 한없는 노력이 깃들어져야 만들 수 있는 것이 명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에 나는 지금 너무 마음이 초조한 상태다.
지금이라도 분명히 꾸준히 무엇인가를 진행한다면 분명히 될텐데. 그 '무엇인가'가 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새하얀 빛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그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차라리 한 방향으로 쭉 뛰어갔다면 그래도 벽이라도 만져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 속에 다시 방향 없이 뛰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충동을 겨우 이겨내며 눈을 뜨고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일어나 계산을 하곤 대낮임에도 바(bar)로 향한다. 머리를 질끈 뒤로 묶은 상큼하게 생긴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잔 주문한다. 쓴 맛을 이겨내며 한 잔을 비우고, 또 한 잔을 마신다. 술 맛도 모르고 마시는 이상한 아저씨가 되어 그렇게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진 토닉 한잔 더 받은 뒤 몇 시간을 멍하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
술이 전혀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다. 하루 반나절 동안 전화가 온 곳이라고는 은행과 회계사와 시시한 모임의 주말 모임 확인 전화-사실 표현은 그렇게 해도, 위안이 크게 됐다-가 전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세상이 환하다. 좋으면서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 시간대에는 노을도 거의 저물고, 슬슬 저녁이어야 하는거 아닌가? 하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질문을 마음 속으로 던져본다. 차라리 빨리 노을이 졌으면 좋겠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