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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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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기침하시지요"

코를 스치는 향긋하면서도 매혹적인 레드 라일락의 익숙한 향기. 순간 지난 며칠간 뜨거운 밤을 보낸 몇 십에 이르는 후궁과 무희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르륵 스쳐 지나갔지만, 기억하건데 이 향기의 주인은 그녀들이 아니다.

"…레오라"

마왕 페르사스를 무찌르는 거대한 모험을 함께하며 수백 번도 넘게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동료이자, 황후인 그녀의 이름은 레오라.

"폐하께서 저를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야속하다는 듯 나를 책망하는 레오라. 3천년 만의 대륙 통일국을 이루어내고 역사상 최강의 대제국을 세운 위대한 황제의 부인이자 제국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의 천재 백마법사인 그녀라고 해도, 결국은 바람둥이 남편을 둔 불쌍한 여인일 따름이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제서야 슬그머니 눈을 뜬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며 침대로 눕혔다. 어느새 그녀도 나도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마법과 관리의 힘으로 유지되는 레오라의 젊음은 제국 마도수련생이던 17세의 그것과도 전혀 다름이 없었다.

"폐하!"

나의 짖궂음에 당황하면서도 은은히 홍조를 띄는 이 얼굴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황제에 앞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나 역시 그대를 사랑하고 있노라는 확신을 안기는 이 별 것 아닌 액션에 바로 우리 부부와 제국의 안위가 걸려 있음이다.

"제국의 안위를 위하여 보다 강력한 후계를 양성함은 짐의 중대한 책무란 말이오"

하지만 방금의 말은 하지 않는게 더 나을 뻔 했다. 레오라의 표정에 은은한 분노의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다.

"제가 낳아드린 후계 다섯으로도 여전히 부족하단 말씀인지요"

무어라 변명을 할까 잠시 고민한 나는 "다다익선"이라는 말로 또 한번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레오라의 목소리는 어느새 고성으로 변해있었다.

"으이구 으이구 이 화상아, 니가 나이가 몇 살인데 이 짓거리냐"

…방금의 말은 레오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한 반찬냄새와 강원도 억양이 살짝 섞여있는 그 목소리. 그렇다, 어머니의 목소리다. 아니, 레오슈타드 황태후 말고, 장언숙 여사 말이다. 나를 실제로 낳은 엄마.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아 엄마도 참. 연락을 하고 오라고 쪼옴!"
"이눔 시끼야 부모가 자식 집에 오는데 미리 연락을 하고 허락을 구해야 돼?"
"아 엄마 요즘에는 안 그래. 나중에 결혼해서도 이러잖아? 그럼 나 이혼이야. 이혼! 요즘 여자들 그런거 얼마나 싫어하는데"

VR 헬멧을 벗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빼며 엄마한테 불평을 하는 나. 그러나 '결혼, 이혼'이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엄마는 더더욱 분노한다.

"그래 말 잘했다. 내가 니 장가만 가면 평생 니 얼굴 안 봐도 되니까, 어디 여자나 데려와라 좀. 그 놈의 레오난지 개나발인지 그 귀신 같이 생긴 보라머리 귀신년 말고, 진짜 여자 데려오라고. 아후, 이게 사람 사는 집구석이냐 쫌. 방구석에 휴지 굴러다니는 거 좀 봐라. 아흐 이게 사람새끼야 진짜 참 내 자식이지만 넌 해도해도 너무해"

엄마는 또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한다.

"…"

나도 무어라 말을 이어서 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시 닫았다. 엄마는 주섬주섬 가방만 챙겨서는 "밥 잘 챙겨먹고. 게임도 좀 고만하고, 일자리나 알아봐." 하며 일어선다.

"뭘 벌써 가. 밥은?"

그제서야 나는 엄마에게 말했지만, 엄마는 "어우, 엄마도 바뻐. 밥은 먹고 왔어" 하며 신발부터 신는다.

"커피라도 한잔 마실래?"
"커피는 무슨. 그리고 다음 주에 선영이 애기 돌이랜다"
"그래. 축하한다고 전해줘"

엄마도 나도, 그 돌잔치에 같이 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엄마는 집을 나섰고,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인근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 짜증나는구나. 청기사단을 끌고 가서 박살내버려"

엄마의 일로 잔뜩 심통이 난 나는, 제국상서 루키후그의 보고에 누가 반란을 일으켰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지시했다. 지엄한 황제의 말투도 아닌, 그냥 일상어로. 그러나 언제나처럼 "분부 따르겠나이다" 가 아닌 "바로 그 청기사단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압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

큰일이 났다. 정말로. 수도에서 이틀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 칼을 거꾸로 쥐었단다.

"쓸만한 놈들이 또 어디 있지? 적색기사단 불러올까?"
"이미 은밀하게 부르긴 했사오나, 도착까지는 족히 일주일은 걸릴 것입니다"
"수도 근위기사단은?"
"작년에 폐하께서 거슬린다며 해체하셨사옵니다"
"맞다. 어쩔 수 없지. 수도 백성들 무장시켜"

하지만 그 지시에서 제국상서는 고개를 저었다.

"백성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외람되오나 폐하를 마왕이라고 부르는 자들마저 있을 지경인데 그들에게 청기사단과 싸우라고 강요를 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먼저 폭동을 일으킬 것이 틀림 없사옵나이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고?"



최강의 동료들을 모아 마왕을 무찌르고, 내가 황제 자리에 올라 열심히 다스리며 제국을 번영케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더이상 할만한 컨텐츠가 없다. 당연히 그러면 누구라도 나처럼 삐뚫어진 폭군이 된다.

미천한 백성 주제에 감히 나같은 황제에게 무리한 요청을 한다? 사형.
진귀한 보물을 만들고자 하는데 귀한 재료가 부족하다? 백성들을 수탈한다.
감히 엄마도 나를 못 이기는데 하찮은 신하들이 듣기 싫은 잔소리를 쏟아낸다? 조리돌림 후 사형
누가봐도 간신인데 말도 안되는 감언이설로 내 귀에 꿀이 뚝뚝 떨어지게 행복한 말을 해준다? 하루 만에 12계급 승진

…당연히 이 지경으로 게임을 하다보면 백성들의 민심도 흉흉해지고 종종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건 또 걱정이 없다. 제국 최강의 전력을 가진 청기사단에 지난 13년 간 게임을 플레이하며 모은 최강의 무기와 아이템을 쓸어넣고 반란을 진압시키면 아주 간단히 제압된다.

"도시를 불태우고 아이까지 모조리 참수하라. 철저히 모든 것을 부수고, 그 땅에는 소금을 뿌려 풀 한포기조차 자라지 않게 하라"

그렇게 처절하게 채찍을 휘두른 뒤, 다른 지방에는 역시 빵과 금은보화를 풀어 민심을 산다. 개돼지를 다루는 방법에는 확실히 이만한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말고, 예쁜 것들은 모조리 제국 궁성으로 데려와라"

그렇게 제국 하렘을 가득 채운 1만 2천명의 아이돌, 아니 무희들과 매일 파티와 환락의 밤을 보내는 나. 그런데 바로 그 통치의 기반이나 다름없는 '반란진압용 부대' 청기사단이 반역을 일으켰단다. 관리하기 귀찮다, 혹은 감히 배운 것 없는 무장 주제에 정치를 운운하며 쓴소리를 한다 등등의 이유로 다른 기사단들은 모조리 해체하거나 몰살시켜버린 관계로 그 놈들을 견제할 부대가 없다. 그나마 변방을 지키는 전투력 강한 부대로 적색기사단이 있긴 하지만, 얘들이 수도까지 돌아오려면 아무리 버프를 걸어줘도 일주일은 걸린다.



"어떻게 하냐고!"

나의 호통에 루키후그는 잠시 입을 삐죽이며 고민하더니 "역시 폐하께서 직접 그들을 상대하시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사옵니다" 라며 방법을 내놓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현재로서 방법은 그거 하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마왕을 처치한 대륙 최강최고최후의 만랩기사다. 거기에 황후이자 대륙 최강의 마법사 레오라까지 붙는다면 해볼만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건 신중히 생각해야 된다.

'그러다 죽으면 13년간 이룩한 이 모든 것이 리셋이라고!'

내가 고민을 하고 있자, 이 수염 많은 NPC가 나에게 목소리를 높여 호소한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수도에 당도해서 백성들을 선동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폐하의 신묘한 용력으로 제압하옵소서!"
"고민 좀 해보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일단 VR 헬멧을 벗었다.



내가 하는 게임 '엠페러'는 VR게임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게임이다. 세계적인 IT기업 베이스북과 VR 제작사 아우리스, 게임제작사 베들레헴 스튜디오가 손을 잡고 약 6년에 걸쳐 제작한 VR 1인칭/3인칭 판타지 전략 롤플레임 게임으로, 엄청난 주목과 기대를 받았지만 망했다.

'제대로 망했지'

맵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려면 4년이 넘게 걸린다는 엄청나게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출시 초기 그 안을 채운 컨텐츠가 영 부실했고(지금은 많이 채워졌지만), 버그도 많았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로마', '아이언킹덤' 등 유사한 장르의 전설적인 명작들이 연이어 쏟아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후려치기 당한 부분도 있고….

1조 2천억의 천문학적인 개발비가 투입된 이 게임은 그렇게 망했다. 하지만 대마불사라 했던가. 워낙 많은 개발비가 투자된 게임이라 매몰비용을 걱정했던지 제작사 측에서는 게임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10년 넘게 노력했고, 현재까지도 서비스를 유지하고 있다. (뭐, 게임 내 광고를 통해서 의외로 적자를 꽤 보전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게다가 유저 제작 컨텐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성인용 컨텐츠나 다양한 추가 모드도, 망작치고는 꽤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망했다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남 이야기일 뿐, 나에게는 꽤 취향 저격인 게임이다. 개발사의 광고처럼 '평생을 플레이해도 질리지 않을 스케일'이라는 말을 나는 공감한다. 굉장히 세심하게 디자인 된 NPC들의 감정 인공지능도 그렇고, 배경 CG는 구릴 지언정 인물 CG는 굉장히 다양하고 매력적이고.

게다가 현재까지 마왕퇴치부터 건국, 정벌 및 대륙통일, 번영과 부흥에 이르는 전과정을 지난 13년간 순조롭게 이뤄낸 나에게 이 게임은 말 그대로 '인생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게임 도중 한번이라도 사망하면, 캐릭터는 삭제된다'

다만, 게임을 하드코어 모드로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내 인생을 조졌다. 1조 2천억의 매몰비용 때문에 제작사가 이 게임을 접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이 게임에 인생을 너무 많이 투자해서 접을 수가 없게 됐다.

'접을 수 있었으면 나도 접었지'

중요한 이벤트들과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대륙의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느라 나는 현실보다 게임에 더 인생을 집중했다. 그렇게 대학 입시를 망쳤고, 겨우 입학한 대학에서는 잘렸으며, 5년을 놀다가 취업한 회사에서는 2주 만에 잘리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인생실패자가 되어 이렇게 10년 넘게 게임에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진짜 위기다'

문제는 지금이다. 대륙을 통일하고 어느 정도 제국을 안정시킨 이래, 실제로 내 캐릭터가 전투에 투입되는건 몇 년 만의 일인지 모른다. 게다가 아무리 내 캐릭터가 불패용사라고 하더라도, 상대 역시 내가 정예 중의 정예로 키운 최강의 상대들이다. 더군다나 장비도 아이템도 빵빵하다. 심지어 기사단장은 나와 동급의 검을 갖고 있을 정도. 그런 적 1,000명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 아니 황후랑 둘이서.

"좆됐다 진짜"

마왕과의 결전을 앞두었을 때보다 더 떨린다. 만약 싸움에 져서 패배한다면 내 인생의 13년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마왕과 싸울 때는 그래도 내 옆에 역시 최강의 동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레오라 뿐이다. 다른 동료들은 모조리 역모를 꾸민다는 누명을 씌워서 화형 시켜버렸으니까.



"폐하, 걱정마시옵소서"

황후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걸어간다. 단 둘이. 친위대를 비롯해 다른 병사들은 혹시라도 외부의 적과 내통하여 궁성 내부에서 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 성 내에 남겨두고 떠났다. 레오라는 제국 최강의 백마법사. 그녀와 그녀의 보호마법이 있는 이상 어차피 친위대 100명보다 낫다.

"걱정 따위 하지 않소. 단지 화가 치밀어 오를 따름이오. 감히 반란을 꾸미다니"

내 말에 레오라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뭐 그도 그럴 수 밖에. 한때 목숨을 걸고 믿고 따르던 위대한 리더이자 온 대륙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자신의 남편이, 이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지탄을 받으며 일주일에 한번씩 "인간 마왕을 때려잡자!" 라는 구호 아래 욕받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하물며 청기사단은 가장 충직한 병사들로 고르고 골라 만든 부대다. 그런 그들조차 황제를 반하는 세력이 되어버렸으니.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수많은 감정이 섞인 듯한 레오라의 말. 하지만 나는 그저 결심을 굳힐 따름이었다.

"한번 배신한 놈은 반드시 또 배신하기 마련이오.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하여 까마귀 밥으로 만들 것이오"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온갖 고문을 다 할 거다. 그렇잖아도 저번에 보니까 중세 고문 모드 누가 만들어 놓은거 있던데 그거 다 해볼거다. 물론 이번 싸움에 내가 이긴다면 말이지.

"그보다 오랜만에 솜씨 한번 볼까? 레오라, 저 숲을 싹 말려버려"
"예, 폐하"

레오라는 무어라 무어라 주문을 외우더니 곧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저 언덕 아래 녹색으로 울창하던 숲이 엄청난 속도로 말라가더니 우수수 낙엽들이 쏟아내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겨울철의 나무처럼 말라 비틀어지더니 가지들이 뚝뚝 부러지고 마지막으로는 나무들이 시커넣게 색이 변하고, 쓰러진 죽음의 숲이 되어버렸다. 자연의 위대한 회복력을 역으로 뒤틀어버린 무서운 마법이다.

"솜씨는 그대로구만"
"별 말씀을"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자부심이 스쳐 지나간다. 평소에는 시든 꽃 하나만 봐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마법으로 수천, 수만의 생명을 아작내고도 뿌듯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배덕감을 느낀다.

"어쨌든 서두르자"
"네!"

레오레는 자신과 나의 말에, 체력을 회복시키는 마법을 부여했다. 우리는 곧 전력으로 청기사단이 진을 치고 있다는 알자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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