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2082

"오빠, 내가 밤에 뭐 먹지 말랬잖아"

거울 앞에서 알몸으로 몸매를 확인하던 아내는, 문득 살짝 열린 화장실 문틈 너머로 남편이 빵을 입에 베어무는 것을 보고 말았다. 가벼운 짜증을 억누르며 가볍게 핀찬을 주었지만, 남편은 곧 후회할 악수를 두고야 만다. 볼멘 말투로 결코 좋은 대답이 돌아올 일 없는 '그 대답'을 한 것이다.

"솔직히 내 몸매가 뭐가 중요해. 당신 몸매가 중요하지. 우리 구독자들이 뭐 나 보러 오냐. 당신 보러 오지"

도대체 몇 번이나 저 말에 부부싸움을 했는데 또 저 소리다. 아내는 화장을 지우다가 폭발할 거 같은 기분으로 발칵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진짜 사람이 왜 그래? 지금 우리 구독자 수 떨어지는거 안 보여? 당신 몸매 관리가 안 되니까 구독자 수가 늘기는 커녕 계속 줄고 있잖아! 배 나온 아저씨 야동을 누가 본다고!"

하지만 의외로 이번에는 남편도 참다 참다 한 소리를 한다.

"하… 야.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우리 구독자 수 계속 떨어지는게 내 몸매 탓이야? 아니 그래, 그것도 한 축이긴 하겠지. 근데 솔직히 진짜 이유 말해줄까? 냉정히 구독자 입장에서? 야, 1년 내내 뭐 신선한 시도 하나 없이, 하다못해 뭐 기구 하나 쓰는 일이 없고 뻔한 부부 영상을 누가 1년 동안 죽치고 보냐? 안 그래?"
"뭐?"
"내가 뭐 기구 하나 사와서 하자면 그것도 싫다, 그럼 이런 플레이 어떠냐 하면 그것도 싫다, 하다못해 뭐 자극적인 대화나 뭐 그런 거라도 하나 하자고 하면 그것도 싫다, 뭐 다 싫다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업데이트도 말이야, 남들은 최소 3일에 한번씩은 업로드 한다는데 우리는 거의 뭐 이주일에 한 편인데, 우리가 무슨 연예인 커플이냐?"

아내는 화를 참다 못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 지금 구독자 떨어지는게 내 책임이다 이거야? 정말로?"

남편은 그제서야 좀 누그러지며 "누가 다 니 책임이래? 근데 중요한건 내 몸매보다 새로운 시도라는거지" 하며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아내는 이미 분노의 단계를 넘어 눈물을 쏟는 지경이었다. 남편은 "아이 왜 또 우는데" 하면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아내의 하소연이 시작될 차례였다.

"누가 이 짓 하고 싶어서 해? 내 고등학교 친구 남편들은 주식강의 채널로 구독자 하고, 축구기술 강의하고 그래. 부부커플도 요가 채널에 줌바댄스 채널에… 나처럼 포르노 팔아서 먹고 사는 년 없어. 처음에 뭐라고 했어? 그냥 오빠 처음에 나보고 그랬지? 그냥 옷 갈아입는 채널하자고, 그러더니 코스프레 채널하자더니 또 뭐, 속옷리뷰 채널 하자고 하더니 결국에… 아 나도 이런거 싫다고! 근데 어떻게 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울며 말하다가 마지막에 '먹고 살아야 하는데' 라는, 아내가 터뜨린 노호성에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입에 타바코 드롭을 한 알 밀어넣었다.

"미안하다"

한참을 말없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무능한 남편으로서의 좌절감에 빠져 들었다.












바야흐로 21세기. AI혁명과 로봇기술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모두의 예상처럼 당연하다는 듯 빠르게 세상을 바꿔나갔다.

"기계가 빼앗은 우리의 일자리를 되찾자!"
"기업은 인간을 고용하라!"

AI로봇과 자동화 설비에 의한 압도적인 생산성 앞에 더이상 기업은 인간을 고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의 마지막 명분이었던 '일자리 제공이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2052년 불어닥친 경제대공황 이래,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기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적 책무는 경영효율의 극대화를 통한 기업의 생존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없다면 국가의 세금이 줄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기초생활자금에 악영향이 갈테니까요. 냉정하게 생각해서, 경영효율화를 저하할 우려가 있는 인간 고용이야말로 고용된 그들만을 위한 특혜이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지독히 불합리한 결정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이제 대다수 선진국에서 고전적 개념의 노동자는 사라졌다. 노동의 상실은 소득의 상실을 의미했고, 그 직후 세상은 자산소득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극단적인 양극화가 발생했다. 하지만 정부에서 매달 지급되는 기초생활자금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생활만 가능한' 수준의 생활비에 불과했다. 결국 안정적인 자산소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은 '새로운 노동'을 찾거나, 노동 대신 무엇이든 팔아야만 했다.

"슛을 때릴 때, 이 무릎의 각도를 이렇게 좁혀서 때리게 되면 아무래도 공이 진행될 때…"
"여기에서 리듬에 맞춰 파트너와 가슴과 가슴 사이 간격을 벌리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가까이 하며 눈을 마주봅니다. 춤선은 이런 느낌으로 가져가시고, 눈빛은 연인 같은 느낌으로. 자 그 다음에는…"
"붓터치의 느낌을 살리고 싶을 때 보통 이런 식으로 하는데요, 저는 여기에서 붓을 하나 더 들어서…"

예체능 쪽의 재능을 살려 자산소득이 충분한 중산층 시청자 대상의 강의나 교육영상을 만드는 이들도 많았지만, 이미 레드오션을 넘어 아예 블랙오션이 되어버린 영상 제작 컨텐츠는 보통 아주 자극적이어야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일주일간 모은 8등신 여친의 방귀를 한 모금도 빠짐없이 마셔보자! 아후, 지금도 골이 띵한데요… 일단 미션은 성공!"
"오늘은 모짜르트의 그랑 파르티타를 바이올린과 비올라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해 보았습니다. 아후, 에어컨을 풀파워로 틀어놓고 완전 나체로 연주를 한 건 정말 처음이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근데 이게 추운 것도 추운건데, 실시간으로 현의 상태가 변하는게 느껴져서 더 연주하기 힘들었어요"
"오늘은 동생과 함께 대광장에 나왔는데요, 중간에 갑자기 제가 아주 잠깐 간식거리를 사러 간다고 하고서는 동생을 혼자 두고 30분이 넘게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럼 동생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이런 돌발상황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 저도 궁금합니다! 자, 그럼 보시죠!"

물론 '자극적인 영상'의 허들 중에서는 포르노가 제일 쉬운 편에 속했다.

"제 아내가 좋아하는 체위는 좌위인데요, 특히 이렇게…"
"니플피어싱에 도전해보겠습니다"

심한 경우는 동물학대나 자학 등의 영상을 파는 경우도 있었고, 물론 성매매를 하는 자들도 많았다. 전국민의 41%가 성을 팔아본 경험이 있는 사회에서는 또 많은 것들이 변하기 마련이었다.

"당신 오늘 몇 건이나 했어?"
"3건 했어"
"고생했네. 오늘은 뭐 진상 없었어?"
"없긴. 아 무슨 아저씨 하나가 계속 자기 바이닐 먹었다고, 콘돔 싫다고 빡빡 우기는데 딱 봐도 안 먹은 새끼라서 그냥 꺼지라고 했어"
"잘했네. 근데 그런 진상 상대하는거 좀 걱정되네. 그냥 우리도 보호비 내고 일할까"
"아후 됐어. 괜히 단속 걸리면 진짜 신상등록해야 돼. 그건 죽기보다 싫어"
"그래, 일단 나도 여기저기 더 알아볼게. 저번에 고등학교 동기 택진이 그 놈이, 당신하고 한거 최고였다고 연락 한번 줬는데, 한번 다시 연락해볼까 해"
"정말? 그 사람 매너 좋던데. 팁도 잘 주고. 연락 해봐"
"알았어. 난 걔 못 생겼다고 당신이 싫어하는 줄 알았지"
"지금 외모가 문제야? 돈이 문제지"

아내의 성을 팔 상대를 남편이 알아보러 다니는 일이 더이상 흉이 되지 않는 그런 시대. 사람들이 재능이나 웃음을 넘어 수치심이나 양심, 고전적 윤리관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결국 일부 국가는 최후의 리미트를 풀기 시작했다.

"어제 '콜로세움' 봤어? 아 진짜 미쳤 더라. 라모디오 진짜 칼 후리는건 레알 진짜다…"
"김재욱 그 새끼, 존나 얄미운 새끼긴 한데 막상 팔 잘리고 그 와이프 기절하는거 보니까 마음이 찡하더만. 돈이 뭔지, 솔직히 체급도 그렇고, 그게 말이 되냐. 배당이 12:1이더만. 그냥 죽는 싸움 올라간거지 그게. 에휴"
"우리나라는 언제쯤 그런 컨텐츠 허용하냐. 아, 너무 뻔해 진짜. 방송 틀면 뭐 맨날 포르노 아니면 실험 카메라가 전부야. 양놈들 봐. '콜로세움'으로 막 목 자르고 난리나는데. 그러니까 인재들 다 외국 나가지"


국가 전체의 부를 반 넘게 틀어쥔 1%의 최상위 로열층과 그들의 부를 나뉘어 가진 6%의 부유층.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자금 이외의 추가적 금융소득이 있는 14%의 중산층, 그리고 기초생활자금으로만 살아가는 79%의 서민. 미래기술에 의한 노동해방이라는 꿈은 일자리 소멸이라는 처참한 결과만을 낳았다.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일자리 자체가 없으니, 대다수의 서민들은 푼돈을 쪼개어 주식에 투자하거나 생활도우미 활동이나 창작활동, 심지어는 성매매까지 하면서 추가적 수입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65세 이상 인구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라!"

정부에서 지급하는 기초생활자금은 0세에서 60세까지. 그나마 65세까지의 식료품이나 연 3회의 옷가지 제공, 임대주거지 제공 등의 연장지원까지 끝나고 나면 그 이상 인구에 대해서는 땡전 한 푼 지급되지 않는다. 결국 그 이상의 노인들은 자식에게 몸을 의탁하거나, 자연스럽게 존엄사를 선택하고야 만다.



"아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내년에 '병원' 가신대"

남편의 말에 아내는 대답 대신 그저 스프를 목으로 넘길 따름이다. 아내의 안색을 살피던 남자는 "그러니까 올해까지만 어떻게 좀, 잘 해드리자" 하고 말을 붙였다. 하지만 아내는 수저를 내려놓으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똑같이 말했잖아"

남편은 무언가 할 말을 찾았지만,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엄마 아빠… 나 부담될까봐, 그 건강하던 분들이 55살에 '병원' 가셨어. 조기은퇴수당 나한테 넘겨주기까지 했고. 이 집 보증금도 그 돈 보탠거잖아"

남자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 지금 4년째 우리랑 살고 있는거 나 별로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우리 아빠 엄마한테 못한거, 아버님께 대신 해드리는거라고 생각하자 하면서 나도 최선을 다했고"

하지만 아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아버님도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애. 나 내년까지 아버님 못 모실 거 같아"

아내의 선언에 남편은 당황하며 손을 맞잡았다.

"…음, 니 말에도 일리가 있어. 그렇지. 장인 장모님 모두 다 그렇게 우릴 도와주셨는데…"
"나 생리 안해. 입이 하나 늘었으니, 하나 줄어야 돼"
"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동해방은 분명히 성공의 수순에 이르고 있었다. 우선 강인공지능에 의한 생산 네트워크의 연결은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 수요와 공급, 유통과 소비를 완벽한 타이밍에 연결함으로서, 낭비되거나 부족함이 없는 초고효율의 생산성 증진에 성공했고, 곧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강인공지능의 네트워크는 전세계 공장으로 이어졌다.

"바이어가 검색을 한 뒤 마케팅 자료를 보고 찾아오거나 영업직이 가서 그 회사 사람들과 만나 일정을 잡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미팅을 하면서 설득해야 진행되던 일들이, 인공지능으로 가장 필요한 수요와 공급을 나노초만에 바로바로 연결시켜버리니 그 효율이 얼마나 압도적이었겠어"

또한 그와 동시에 생산력 자체의 극단적인 향상을 이뤄낼 수 있는 생산방식 자체의 신개발과 효율화가 이뤄졌다. 그렇게 완성된 최첨단 식료 플랜트 생산공장은 압도적인 생산성으로 각국의 수요는 물론, 빈곤국가 지원용의 수요까지 채움으로서 전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그런 방식은 식량의 생산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모잠비크에 파견된 국경 없는 의료봇 산부인과 캠프에서 한 아이의 출산과 혈액검사 결과가 등록되면, 실시간으로 캘리포니아 대곡창 플랜트에 그 아이의 잠재적 유전질환에 효과적인 맞춤형 유전자 조작 곡물이 심어져, 그 아이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할 때 쯤 수확되어 대륙간 수송드론으로 운송이 됐지. 물론 그 아이 임신 16주차에는 베른의 국제아동복지재단에서 아기용품을 실은 배가 출발했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그 시기에 딱 맞게 제공되는 천국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완벽한 하모니였어. 경제망이 통일되니, 정치사회문화적 통일도 가까워보였지"

과거 유엔 세계통합기구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아직도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원자재부터 개발, 생산, 제조, 유통 및 소비, 폐기와 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이, 광범위한 네트워크 연결을 통해 최적화 되어 완벽한 세계화 공장을 이루는 꿈의 시대.

"…근데 니 같은 놈들이 배부른 소리들을 해댔지"
"아부지, 그때는 그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니들이 만들어 낸 결과를 봐라. 100년 전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을! 밥 쳐먹고 싶다고 콘솔에 입력하면 로봇이 밥 가져다 주고, 옷 필요하다면 옷 가져다주고, 맛없다고 툴툴대면 다시 만들어서 다시 가져다 주고, 그걸 다 공짜로! 그런데도 네놈들은 배가 불러서! 그게 천국이 아니면 뭐가 천국이냐"

각자가 소지한, 혹은 손목 등의 체내에 삽입한 콘솔을 향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 그 모든 것을 기계들이 다 알아서 해결해주던 시절. 노동을 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인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삶의 모든 시간이 여가시간이 된 인류는 10년 만에 65억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최적화와 고효율. …당연하죠. 아무리 위대한 기계라도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감당한다는건 무리니까. 수요를 감당하려면 그래야만 하니까. 주거지의 고효율을 위해서 낮은 건물들이 강제 철거당하고, 거기 살던 사람들이 쫒겨나고…"
"그 대신에 그 좋은 집들을 줬잖아"
"사람 마음이 항상 꼭 그런건 아니잖아요. 추억이 깃든 집에서 오래 살고 싶을 수도 있고…"
"끽해야 30명 사는 3층짜리 연립주택 몇 채를 부수고 그 자리에 메가빌딩을 지으면 1,800명의 거주문제가 해결이 돼. 그것도 압도적인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집으로. 30명, 아니 그중에서도 지독하게 보수적인 서너 명의 이기심 때문에 1,800명의 바램을…"
"제발요 제발. 최적화가 전부가 아니잖아요!"
"너는 니 애미랑 어쩜 그리도 똑같냐"
"아버지!"

최적화와 효율화는 시대의 모토였고, 그 모토는 '공공이익'이라는 미명 아래 세상을 지배했다. 국민 절대 다수의 안정적 거주를 위해 서울 시내의 모든 5층 미만 건축물이 50층 이상의 고층빌딩으로 재건축 되었다. 물론 절대 다수는 찬성했다. 장마면 비가 새던 낡은 연립주택을 부수고, 그 자리에 안드로이드 집사와 AI 라이프 도우미가 탑재된 최첨단 102층짜리 거주빌딩을 지어 무상으로 지급한다는데 그걸 반대하고 싫어할 미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니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유별난 사람이었지. 남들이 찬성하면 반대하고, 남들이 반대하면 혼자 찬성하고. 뭐든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엄마의 매력이라면서요"
"그것도 어디 한 두번이라야지"

최적화와 효율화를 위해 사람들의 소수의견이 하나둘씩 무시당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 몰라! 그냥 나는 이런게 좋아!" 하며 억지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통제장치였던 다수결은 점차 사람들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춧가루 뿌리는 것도 안돼? 아 내 입맛이 원래 그런걸 어떻게 해. 야, 이건 선 넘는거 아님? 요구르트에 고춧가루 좀 뿌려달라고!"
"딥샤프란 추가가 안돼? 왜?"
"내년부터는 '듀플란'의 해치백 모델 생산이 전면중단 됩니다. 0.002% 미만의 선택율을 보인 이 모델은…"
"내후년부터는 나인엑스라지 사이즈의 생산이 중단됩니다. 그에 따라 에잇엑스라지, 텐엑스라지 사이즈 의상에 강제로 몸을 맞추게 된 나인엑스라지 사이즈의 비만환우들이 오늘 시위에 나서…"

'극단적으로 특이한 취향'이나 '특정 소수만을 위한 사치스러운 취향'을 맞추기 위해 증설되는 라인이나 요청의 수행을 거절함으로서 효율화를 추구하면 훨씬 많은 이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 통제수준으로는 인류의 넘쳐나는 요구를 모두 따라갈 수 없었고 통제는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극단적으로 특이한 취향에 대한 통제가, 슬슬 특이한 취향에 대한 생산거부로, 그게 또 어느 시점이 되니까 선택지의 축소로, 나중에는 극단적으로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게. 아마 그것도 내버려뒀으면 아예 하나로 통일 시켰을걸요. '이제 앞으로 세상 모든 차는 짐칸 있는 회색 8인승 픽업트럭만 생산됩니다!' 뭐 이런 식으로"
"그거야말로 '그때는 그게 필요했던거'야. 인구가 폭발해서 수요 자체가 폭발해버렸는데 그럼 어떻게 해. 만약 한 10년만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양자두뇌들이 분명히 해결책을 찾았을건데"

각각의 분야에서 조금씩 취향의 자제를 강요받는 '소수자'들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6억분의 1 미만의 확률로 거절당한 특이취향의 누군가가 소리칠 때는 그저 비웃을 따름이었지만, 그 확률이 1만분의 일, 1백분의 일, 결국 언젠가부터 뭘 요구하던 선택지가 10개 이하로 줄어들도록 강요당하자 '소수연대'가 뭉치기 시작했고 그 비율이 1/3까지 줄어들자 이제 세상의 소수자들은 더이상 소수자들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뭐든지 원하면 다 들어주는 세상'에서 자란 세대잖아요, 이거 안되요 저거 안되요 하는걸 받아들이지 못한거죠. 인정해요. 지금와서 보면 그것도 다 배부른 투정이죠. 근데 그건 결과론이잖아요. 당시 사람들 기준에서는 심각한 권리침해였다구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인류의 온갖 수요 폭발에 대해 인공지능은 결국 '일시적 수요통제'라는 방안으로 대응했고, 차원이 다른 초고효율 생산방법이라는 해답을 찾을 때까지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의 통제가 이루어지자 인간은 결국 폭발했다.

"인류가 저지른 가장 병신 짓을 하나 꼽으라면 난 바로 그거 꼽는다"
"저두요"
"니네 세대가 한 짓이잖아"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다니까요"

'글로벌 통합 인공지능에 의한 월드와이드 일관 생산라인의 전면중단' 및 '국가별 개별생산라인 허용'이라는 엄청난 미친 짓을, 전 세계 다수 국가의 다수결로.

"아니 똥을 찍어먹어봐야 아냐? 중복투자가 사라진다는거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엄청난 일이냐"
"후, 제 생각에는 그냥 그게 우리 세대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생각까지 컴퓨터가 대신 해주던 세대니까"
"이젠 알긴 아나보구나"
"하지만 필요했던 일이라는 사실에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여러가지 의미에서"

'전 세계 모든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에 대한 생산 계획부터 원자재 조달, 생산과 유통, 폐기와 재활용'까지 척척 그려내던 초고성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무대에서 물러나자,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것들이 어그러졌다. 그 다음 해에 식량조달 문제로 아프리카에서 3억이 굶어죽었고, 대륙내전이 터졌으며, 중요한 물자들의 전략 생산기지가 있던 국가들은 선진국으로, 그런 것이 없는 나라들은 후진국으로 몰락했다.

아주 다행하게도 세계대전까지 터지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 공장의 통합 네트워크를 통한 완벽한 효율화'라는 SF수준의 꿈은 그렇게 영영 물 건너 갔고, 오히려 자국중심주의적 폐쇄경제로 돌아간 세계경제는 그 활력을 잃고 대공황을 유발했다. 그 결과가 결국 오늘에 이른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남자의 말에, 아버지는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 말이 옳다. 그럼 뭐 이렇게 된거 다음 주에 '병원' 가지 뭐"

존엄사를 하러 가겠다는 말에 남자의 눈에는 그만 눈물이 핑돌았다.

"아버지"
"괜찮아. 니도 중간에서 나 때문에 마음 많이 쓴거 안다. 젊어서는 큰일한답시고 가족 내팽겨치고 전 세계 돌아다녔고, 늙어서는 사업한답시고 이래저래 사고만 치고 이렇게 빈털털이 되어설랑은 아들 가족 고생이나 시켰고. 못난 애비인거 잘 안다."

아버지는 손목의 콘솔에서 아들에게 파일 몇 개를 건내며 말했다.

"그 자료들, 이제는 어디 구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니놈 세대들 때문에 인공지능 셧다운 시키고 아주 난리굿 피울 때 내가 마지막으로 백업한 일부 파일 중에 복구할 수 있는 곳까지 복구한거다"
"뭘 복구했는데요"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또 특유의 강의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알루미늄이 금보다도 비쌌어. 흔한 원소이긴 한데, 정련하는게 너무 어려웠거든. 그런데 19세기 말에, 전기로 분해하는 제련법이 나온거야. 근 2천년 가까이 금보다 비싸서 보석처럼 다뤄지던 금속이, 하루 아침에 흔한 쇳덩이가 됐지. 마찬가지야. 인공지능은 마지막까지 인간들의 그 탐욕을 채워줄 방법을 찾고 있었어"
"그게 뭔데요"
"이 세상 모든 원소를 마음대로, 저렴하게 재구성할 방법. 수소를 금으로 바꾼다거나, 뭐 그런. 그게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것도 가능하겠지"

아버지의 말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말이 되요? 그거 뭐, 물리법칙 위반 되는거 아닌가?"
"나도 모르지 그거야. 근데 혹시나 하는거지. 10해 요타플롭스 성능 컴퓨터가 수십 년간 연구하던 건데, 뭐라도 나오지 않았겠나 하는거지. 그리고… 두번째 파일은, 만에 하나, 다시… 세상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옛날에 내가 유엔에서 일하던 때 갖고 있던 자료들이야. 그거 지금 유엔에도 없다. 다 파기되서. 에이 홍위병만도 못한 놈들"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세번째 파일은, 내가 틈틈히 쓴 단편소설들이다. 아들 내외가 포르노나 찍어서 먹고 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내가 소시적 솜씨로 소설 좀 써봤다. 니 이름으로 발표해. 2천 편이 넘어가니까, 대박까진 어려워도 그냥 조회수만으로도 생활비에 보탬은 될거다. 69세 노인이 발표하면 저작권 수입의 8할이 세금으로 떼가니까"
"뭔 소리야. 그럼 그럼 내 이름으로 발표하고 그 인세로 아버지도 같이 먹고 살면 되잖아"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이제 애도 생긴다면서 내가 뭔 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 있겠냐. 어차피 또래친구 하나 없는 마당에 갈 때 되면 가야지. 나는 이제 하는 데까진 다 했다"
"제목은 뭘로 붙이는데"
"파일에 써놨잖아. [ 생각보다 짧은 시간 ]이라고"

아들은 알겠다며 슥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듯 자리에 드러눕는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선뜻 방을 나서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저 한 마디만을 할 수 있었다.

"고마워"

아버지는 대답 대신 그저 방귀를 뿍! 하고 뀔 따름이었지만, 아들은 웃지 못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