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푹 잔 것 같은 가뿐한 몸과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포근한 햇살, 기분 좋은 여유에 나는 펄쩍 뛰며 일어났다.
"아 시발 지각이다"
새벽 같은 어둠에 알람 소리와 함께 죽음에서 깨어나는 듯한 피로가 없는 기상은, 무조건 늦잠을 잤을 때 뿐이니까. 하지만 그 직후 깨달았다.
"아 오늘 토요일이잖아"
이번 주 내내 야근을 했더니 날짜 감각이 없어졌던 모양이다. 다행이라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텁텁한 입맛을 느끼며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11시 35분. 잘만큼 잤네. 이제 일어나야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날 불렀다.
"야"
원룸살이 2년차, 여자친구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는 내 방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어서 펄쩍 뛰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다.
"야야야야"
헛소리인가 했지만 두번째 소리에 나는 잠결에 휴대폰을 켜놓았나 봤지만 아니었다.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 아니 애초에 이 목소리는 귀로 들리는게 아니었다. 내 대가리 속에서 나는 소리. 꿈인가? 아니다. 환청인가? 내가 미친건가? 나를 의심했지만 목소리는 나의 생각을 그대로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었다.
"놀라지마. 믿기 힘들겠지만 너는 게임 캐릭터고 나는 너를 키우는 계정 주인이야. 이번에 유저와 아바타 사이의 연동 업데이트가 되면서 너한테 말 걸어본거야. 참고로 이벤트 포인트 다 쓰면 못쓰는 기능이니까 자주는 못한다. 여튼 너 말인데, 어떠냐"
어떠냐니 무슨 개소리지.
"안 믿는구나? 1994년생 서준영, 신장 176 몸무게 68, 여친 없음, DMC미디어에서 일하고, 어제 딸 쳤고 아까 20분 전에 똥 쌌고, 지금 회사의 서라씨랑 썸타고 있고, 또 뭐 말해줄까. 아 어제 운전하다가 훅 들어온 트럭보고 혼자 차 안에서 개쌍욕했고, 지금 통장에 1380만원 있고, 음, 아, 어제 클린트우드에서 셔츠 사려다가 안 샀고, 맞지?"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지만, 나를 24시간 추적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단순한 해킹 정도가 아니다.
"그럼 내가 사귀었던 여자애들 다 말해봐"
"첫 사랑 지윤정, 걔랑 헤어지고 대학교 때 보영 선배, 고백했다가 까인 연수림, 편의점 알바생 솔아, 임솔아. 군대 기다려준 초희, 그리고 양다리 걸친 수진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지은이. 그리고 니 대학교 1학년 때 커뮤니티에서 만나서 원나잇한 겨울이. 정겨울. 맞지?"
세상에.
"마지막으로 그럼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너 해물찜이라고 대답하려고 그러지? 근데 니네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음식은 사실은 소갈비야"
"소갈비?"
"응"
그러고보니 저번에 아줌마들이랑 소갈비 진짜 맛있게 먹었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그럼 딱 하나만 더 . 내가 겨울이랑 안 사귀었던 이유? 뭔지 물어봐도 되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존댓말로 물었다. 그러자 허공의, 아니 머릿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낄낄대며 대답했다.
"아침에 화장 지우고 봤을 때 별로여서. 야 근데 사실은 니가 안 사귄게 아니라, 겨울이 걔도 너 섹스 못한다고 별로라고 평가했었어. 서로 찬거야. 그리고 참고로 겨울이 플레이어 내 친구다. 남자야."
"아 시발"
어쨌든 이쯤해서는 검증된거 맞다. 그렇구나. 나는 그냥 게임 캐릭터였구나.
"실망할거 없어. 그래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잖아. 이 세상에 NPC가 얼마나 많은데"
"얼마쯤 되는데요"
"동접자 수 요즘 쭉쭉 떨어지고 있어. 대충 30만 정도?"
"그 정도면 망겜 아니에요?"
"슬슬 막차 타고 있긴 하지. 나도 업데이트 때문에 간만에 접속한거야"
뭐? 간만에?
나는 방에 가만히 앉아서 그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야 이번 업데이트 존나 재밌네. 잘 들어. 일단 이 게임, 그러니까 니가 사는 세상의 이름은 '라이프'라는 게임인데, 빅뱅이라는 회사가 만든거야. 어 니가 아는 그 빅뱅의 유래가 거기에서 따온거 맞어. 여튼 이 라이프는, 니네 세계 기준으로 거의 월드 오브 빅크래프트 곱하기 한 100쯤 되는 대박난 게임이야"
"근데 요즘 동접자수가 왜 그 모양이에요"
내 질문에 그는 "아 닥치고 일단 듣기나 해" 라며 짜증을 냈다. 나는 "알겠어요"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2221년의 세계고, 니가 사는 세계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 과거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야. 쉽게 말해서 니가 에이지 오브 리퍼블릭 뭐 그런 게임하는거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여튼 이 '라이프'는 우리 세계 기준으로도 AI가 똑똑한 게임은 맞어. 그래서 너랑 나랑 이렇게 대화가 되는거고. 일단 현재 동접자는 30만명 정도 돼"
"그럼 우리 세계의 70억 인구가 다 플레이어는 아니네요?"
"당연히. 심지어 너조차도 내가 플레이 안 할 때는 그냥 세계관 속 AI로 움직이는거야"
어, 갑자기 그럼 더 물어보고 싶은데.
"그럼 내가 님 의지대로 움직이는건 어떨 때인데요?"
"너 그럴 때 없었냐. 아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혹은 갑자기 뭔가 해야겠다 하는 충동 빡세게 올 때, 혹은 갑자기 말도 안되는 행운이 딱 너를 찾을 때, 혹은 평소보다 뭔가 잘 될 때, 기가 막히게 잘 풀릴 때"
"있었어요!"
"그게 내가 움직일 때야"
"예를 들먼요?"
"니가 사귄 여자들 다 나 덕분에 사귄거야. 니 본래 성격은 제대로 고백도 못해. 혼자 번호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포기하는게 니 원래 기본 세팅이야. 물론 그건 내 기분이 좋을 때고 일부러 트롤짓 할 때도 있으니까, 너가 가끔 스스로 미친 짓을 한다? 그것도 내가 하는 짓임"
그랬구나.
"근데 그럼 왜 그렇게 나 샤이한 세팅으로 만들었어요. 기왕이면 외모도 조금 막 존멋 캐릭터로 하지"
"귀찮아서 그냥 커스터마이징 안 하고 기본 세팅으로 했어"
좀 하지.
"그럼 지금이라도 과금 좀 하면 안되요? 막 뭐 업그레이드 되고 그런거 없어요?"
"난 무과금주의자야. 게임에 돈을 왜 써. 호구도 아니고"
내 인생이 이 꼴인건 플레이어가 이 모양이라서 그런 거구나.
"아니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 쓸 수 있잖아요"
"안돼. 대신에 이벤트 포인트는 꼬박꼬박 타서 다 쓰고 있어. 작년에 성과급 700만원 들어온거 그거 이벤트 포인트야. 이번에 니 연봉 7% 상승한 것도 내가 룰렛 잘 돌려서 그렇게 나온거다"
"그럼 아예 로또 같은건요?"
"야 시발 그건 핵과금러지. 게임에 그 돈 박을거면 그 돈으로 우주선을 사지 내가"
"와 대박. 벌써 2200년대에 우주선도 다녀요?"
"어"
대박이다 정말. 어? 잠깐만.
"그럼 혹시 로또 번호 같은거 불러주면 안되요?"
"아 이 이해력 떨어지는 새끼. 그냥 현실 배경 게임일 뿐, 니가 우리 시대의 진짜 과거는 아니잖아"
"아 그렇구나. 그럼 진짜 미안한테 조금이라도 현질해주면 안되요? 조금만 과금하면 게임 재밌어지잖아요"
그리고 그제서야 '음성'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이게 이 게임 업데이트의 진짜 목적이구나. 내 피조물이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돈 안 쓰기도 좀 뭐하네. 야 시발 이 게임 운영 맛집이네"
"오, 그럼 질러주시는거에요?"
"아니. 돈 없다고 몇 번 말해. 대신에 돈 좀 벌게 해줄께"
"와 대박! 어떻게 하려구요"
"투잡 뛰자"
"아 싫어요"
하지만 순간 나는 '그래도 투잡 해야되는거 아닌가? 이대로 월급 260으로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든 생각이 그게 명령이죠?"
"어"
"아!"
이제 알았다. 노력 빡세게 하는 사람들, 그거 다 빡겜 하는 유저들이 지시해서 그런 거구나. 역시.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 진짜.
"보통 게임 얼마나 하세요? 정확히 말해서 저 얼마나 컨트롤 하세요?"
"옛날에 많이할 때는 하루에 20시간도 하고 그랬지. 요즘에는 근데 한 하루 30분?"
"아 좀 더 많이 플레이 해주세요"
"야, 이거 봐라. 과금해라, 플레이 타임 늘려라, 아주 장난 아니네. 이번 업데이트 완전 진짜 노골적이다"
낄낄대며 혀를 차는 유저, 아니 주인님에게 나는 말했다.
"주인님한테는 게임이지만 저한테는 인생이잖아요"
그러자 그 '주인님'이라는 표현에 그는 빵 터지더니 "야, 내가 왜 니 주인이야. 이 자존감 낮은 새끼. 징징대지 마라. 확 캐릭터 지우는 수가 있다" 하며 갑자기 협박을 해왔다. 난 다소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그럼 이 세상에서 성공한 대기업 회장님이나 정치인, 연예인들은 게임 빡세게 한 사람들이죠?"
"그치. 야 그런 사람들은 다 게임에 돈 개쳐부은거야. 라이프가 현질이 얼마나 개빡센 게임인데. 무과금으로 널 이만큼 키운거 진짜 넌 나한테 머리 박고 감사해야 된다."
뭐 다 나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니가 중동이나 아프리카 서버에서 한번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는 말에 조금 납득을 했다. 그보다 궁금한 것도 생겼다.
"그럼 내 주변 사람 중에 NPC는 누구에요?"
"그건 나도 모르지. 말했잖아. 라이프는 AI 수준이 꽤 높다고. 대화만으로는 몰라. 물론 이제 업데이트 됐으니까 너가 좀 친한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한테 '님 플레이어 연락처 좀' 하면서 물어봤을 때 돌아오는 답으로 알 수도 있겠지. 근데 명심해라. 슬슬 망겜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30만도 안돼"
그렇구나.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유저의 개입 여지가 적은 게임이구나. 특히 현질도 잘 안 하는 유저라면.
"어때요? 라이프 재밌어요?"
생각보다 이건 중요한 질문이다. 내 인생이 걸린 질문이기도 하다. 거의 신에게 직접 "인간세상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 수준의 질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뭐 재미로 하겠냐. 습관처럼 하는거지. 솔까 유저도 점점 줄고, 업데이트도 예전 같지 않고, 재미가 덜해. 나는 라이프 말고도 다른 게임 많이 하는 중이야"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질질짜지 말고 븅신아. 나도 생활이 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일단 라이프는 핵과금러가 지랄맞게 많은 게임이니까 섭종할 가능성은 낮다"
"주인님은 그 세상에서 직업이 뭡니까"
"엔지니어. 니네 세상의 엔지니어랑은 좀 개념이 다르지만"
"어떤 일인데요"
"설명해줘도 이해 못해. 너 18세기 사람한테 핵물리학자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자신 있냐"
"연금술사"
"지랄하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무언가 번뜩 생각나서 말했다.
"그럼 나 여친 좀 만들어줘요"
"아니 미친놈아, 니가 만들면 되잖어. 일일히 다 조종하는 것도 귀찮어. 니가 헛소리 또 할라고 하면 내가 알아서 클릭할테니까, 그럼 지금 휴대폰으로 아무나한테 고백해 봐"
"전화로 고백이요?"
내가 좀 그건 그렇지 않냐고 되묻자, 그는 무언가를 쩝쩝 씹으며 말했다.
"너 서라씨랑 썸타고 있지? 지금 전화해보자"
무슨 개소리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나는 또 나도 모르게 서라씨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주인님이 나를 조종하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솔직히 이제 막 같이 야근 때 겸사겸사 저녁 두 번 같이 먹은 사이인데, 불쑥 토요일 오전에 이렇게 전화해도 되나 싶었지만 "여보세요?" 하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서라씨, 뭐하고 있어요?" 하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준영씨가 갑자기 전화해서 놀랬잖아요" 하며 웃더니 "방금 일어났어요. 뭐 아직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준영씨는 오늘 뭐하세요?" 라고 답해왔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난 조종을 받는지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대다가 게임이나 하고 자겠죠. 등신처럼" 하고 터무니 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뿔싸. 조종당한 것 같다.
"아, 그렇시구나. 에이, 게임 말고 다른거 좀 하시지"
서라씨는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내 황당한 답에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전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낸 후 '뭐하는거에요' 하고 하늘에 대고 입 모양을 벙긋 거렸지만 그저 내 머릿 속에서는 빵 터져서 쳐웃는 그의 웃음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농담이구요, 놀랬으면 미안해요. 혹시 저녁에 저랑 저녁 먹구 드라이브 어떠세요?" 라고 얼른 수습했지만, 이번에도 서라씨는 "어? 준영씨 차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물어왔다. 아, 진짜 나 조종 받고 있나보다. 이마를 손을 올린 나는 곧 얼굴을 쓸어내렸다. 겨우겨우 수습을 위해 "아 맞네. 나 차 없지 참" 하고 어색하게 웃자, 이번에는 진짜로 서라씨가 "진짜 뭐야"하며 빵 터져서 웃었다.
어?
"나랑 전화하는거 떨려요?" 하면서 웃던 그녀는, "그럼 이따가 내가 집 근처로 픽업하러 갈게요. 저녁 사줘요. 이따 7시 신대방역쪽으로 가면 되는거죠?" 하면서 물어왔다. 나는 서둘러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따봐요"
"그래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미친듯이 웃는 '주인님'을 향해 소리쳤다.
"진짜 좆될 뻔 했잖아요! 왜 그래요 진짜"
"아 존나 웃기네. 야, 캐릭 확 지워버린다? 복종해라. 확 그냥 이따가 서라씨 앞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수가 있어"
"아 제발!"
"알았어 알았어. 야, 나도 임마 니 키우느라 들인 시간과 공이 있는데, 그런 짓 하겠냐? 겁은 오지게 많아서. 근데 서라 쟤 성격 괜찮다"
"그쵸?"
"응. 빨리 사귀어. 19금씬 좀 보자"
어?
"잠깐만요. 진짜로 다 보는거에요?"
"당연하지 임마. 넌 내가 만든 캐릭터라고"
"그…모자이크 처리 이런거 안되고?"
"아 구닥다리 새끼. 우리 시대는 임마, 표현의 자유가, 어? 우리는 금기라는게 아예 없는 세상이야. 이 청교도 캐릭터 놈아"
미쳤다.
"게임 캐릭터도 프라이버시라는게 있잖아요"
"하기 싫으면 말던가. 아쉬운건 너지 내가 아니야. 나는 그냥 우리 세계에서 SVR로 즐기면 돼"
"그건 뭔데요"
"시뮬레이선 장치. 체감형 VR이라고 하면 이해할라나? 너네 시대에는 없는거야"
"대박. 부럽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 옷장을 찾기 시작했다.
"나 뭐 입고 나가죠?"
"대충 입어. 그런 거까지 조작하는건 내 취향 아니다"
"옷 좀 현질해주면 안되요?"
"한번만 더 현질 타령하면 그냥 니 모든 돈 싹 다 아이템거래 사이트에 팔아버리고 너 북한으로 월북 시킨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쨌거나 짖궂긴 해도, 우리 이 지랄맞은 '플레이어' 님 덕분에 나는 오늘 데이트가 잡혔다. 서라씨한테 뭘 입고 나가야 잘 생겨보일까. 나는 거울 앞에서 춤까지 추며 데이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으흠"
그보다 생각보다 나, 너무 가볍게 이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누군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내 운명을 이끈다는 것. 생각해보니 이게 바로 그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심'이며 '부처는 내 안에 있는 것'이자 '신은 위대하시다'로구나. 내 츤데레 주인이 나를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해주겠지.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니, 과금 조금만 해주면 진짜 좋겠지만.
"야, 진짜 뒤진다?"
내 머릿 속에 울리는 그의 음성. 나는 얼른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하며 다른 생각을 시작했다.
< 끝 >
"아 시발 지각이다"
새벽 같은 어둠에 알람 소리와 함께 죽음에서 깨어나는 듯한 피로가 없는 기상은, 무조건 늦잠을 잤을 때 뿐이니까. 하지만 그 직후 깨달았다.
"아 오늘 토요일이잖아"
이번 주 내내 야근을 했더니 날짜 감각이 없어졌던 모양이다. 다행이라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텁텁한 입맛을 느끼며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11시 35분. 잘만큼 잤네. 이제 일어나야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날 불렀다.
"야"
원룸살이 2년차, 여자친구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는 내 방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어서 펄쩍 뛰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다.
"야야야야"
헛소리인가 했지만 두번째 소리에 나는 잠결에 휴대폰을 켜놓았나 봤지만 아니었다.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 아니 애초에 이 목소리는 귀로 들리는게 아니었다. 내 대가리 속에서 나는 소리. 꿈인가? 아니다. 환청인가? 내가 미친건가? 나를 의심했지만 목소리는 나의 생각을 그대로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었다.
"놀라지마. 믿기 힘들겠지만 너는 게임 캐릭터고 나는 너를 키우는 계정 주인이야. 이번에 유저와 아바타 사이의 연동 업데이트가 되면서 너한테 말 걸어본거야. 참고로 이벤트 포인트 다 쓰면 못쓰는 기능이니까 자주는 못한다. 여튼 너 말인데, 어떠냐"
어떠냐니 무슨 개소리지.
"안 믿는구나? 1994년생 서준영, 신장 176 몸무게 68, 여친 없음, DMC미디어에서 일하고, 어제 딸 쳤고 아까 20분 전에 똥 쌌고, 지금 회사의 서라씨랑 썸타고 있고, 또 뭐 말해줄까. 아 어제 운전하다가 훅 들어온 트럭보고 혼자 차 안에서 개쌍욕했고, 지금 통장에 1380만원 있고, 음, 아, 어제 클린트우드에서 셔츠 사려다가 안 샀고, 맞지?"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지만, 나를 24시간 추적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단순한 해킹 정도가 아니다.
"그럼 내가 사귀었던 여자애들 다 말해봐"
"첫 사랑 지윤정, 걔랑 헤어지고 대학교 때 보영 선배, 고백했다가 까인 연수림, 편의점 알바생 솔아, 임솔아. 군대 기다려준 초희, 그리고 양다리 걸친 수진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지은이. 그리고 니 대학교 1학년 때 커뮤니티에서 만나서 원나잇한 겨울이. 정겨울. 맞지?"
세상에.
"마지막으로 그럼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너 해물찜이라고 대답하려고 그러지? 근데 니네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음식은 사실은 소갈비야"
"소갈비?"
"응"
그러고보니 저번에 아줌마들이랑 소갈비 진짜 맛있게 먹었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그럼 딱 하나만 더 . 내가 겨울이랑 안 사귀었던 이유? 뭔지 물어봐도 되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존댓말로 물었다. 그러자 허공의, 아니 머릿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낄낄대며 대답했다.
"아침에 화장 지우고 봤을 때 별로여서. 야 근데 사실은 니가 안 사귄게 아니라, 겨울이 걔도 너 섹스 못한다고 별로라고 평가했었어. 서로 찬거야. 그리고 참고로 겨울이 플레이어 내 친구다. 남자야."
"아 시발"
어쨌든 이쯤해서는 검증된거 맞다. 그렇구나. 나는 그냥 게임 캐릭터였구나.
"실망할거 없어. 그래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잖아. 이 세상에 NPC가 얼마나 많은데"
"얼마쯤 되는데요"
"동접자 수 요즘 쭉쭉 떨어지고 있어. 대충 30만 정도?"
"그 정도면 망겜 아니에요?"
"슬슬 막차 타고 있긴 하지. 나도 업데이트 때문에 간만에 접속한거야"
뭐? 간만에?
라이프 온라인 : 신의 음성
나는 방에 가만히 앉아서 그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야 이번 업데이트 존나 재밌네. 잘 들어. 일단 이 게임, 그러니까 니가 사는 세상의 이름은 '라이프'라는 게임인데, 빅뱅이라는 회사가 만든거야. 어 니가 아는 그 빅뱅의 유래가 거기에서 따온거 맞어. 여튼 이 라이프는, 니네 세계 기준으로 거의 월드 오브 빅크래프트 곱하기 한 100쯤 되는 대박난 게임이야"
"근데 요즘 동접자수가 왜 그 모양이에요"
내 질문에 그는 "아 닥치고 일단 듣기나 해" 라며 짜증을 냈다. 나는 "알겠어요"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2221년의 세계고, 니가 사는 세계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 과거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야. 쉽게 말해서 니가 에이지 오브 리퍼블릭 뭐 그런 게임하는거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여튼 이 '라이프'는 우리 세계 기준으로도 AI가 똑똑한 게임은 맞어. 그래서 너랑 나랑 이렇게 대화가 되는거고. 일단 현재 동접자는 30만명 정도 돼"
"그럼 우리 세계의 70억 인구가 다 플레이어는 아니네요?"
"당연히. 심지어 너조차도 내가 플레이 안 할 때는 그냥 세계관 속 AI로 움직이는거야"
어, 갑자기 그럼 더 물어보고 싶은데.
"그럼 내가 님 의지대로 움직이는건 어떨 때인데요?"
"너 그럴 때 없었냐. 아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혹은 갑자기 뭔가 해야겠다 하는 충동 빡세게 올 때, 혹은 갑자기 말도 안되는 행운이 딱 너를 찾을 때, 혹은 평소보다 뭔가 잘 될 때, 기가 막히게 잘 풀릴 때"
"있었어요!"
"그게 내가 움직일 때야"
"예를 들먼요?"
"니가 사귄 여자들 다 나 덕분에 사귄거야. 니 본래 성격은 제대로 고백도 못해. 혼자 번호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포기하는게 니 원래 기본 세팅이야. 물론 그건 내 기분이 좋을 때고 일부러 트롤짓 할 때도 있으니까, 너가 가끔 스스로 미친 짓을 한다? 그것도 내가 하는 짓임"
그랬구나.
"근데 그럼 왜 그렇게 나 샤이한 세팅으로 만들었어요. 기왕이면 외모도 조금 막 존멋 캐릭터로 하지"
"귀찮아서 그냥 커스터마이징 안 하고 기본 세팅으로 했어"
좀 하지.
"그럼 지금이라도 과금 좀 하면 안되요? 막 뭐 업그레이드 되고 그런거 없어요?"
"난 무과금주의자야. 게임에 돈을 왜 써. 호구도 아니고"
내 인생이 이 꼴인건 플레이어가 이 모양이라서 그런 거구나.
"아니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 쓸 수 있잖아요"
"안돼. 대신에 이벤트 포인트는 꼬박꼬박 타서 다 쓰고 있어. 작년에 성과급 700만원 들어온거 그거 이벤트 포인트야. 이번에 니 연봉 7% 상승한 것도 내가 룰렛 잘 돌려서 그렇게 나온거다"
"그럼 아예 로또 같은건요?"
"야 시발 그건 핵과금러지. 게임에 그 돈 박을거면 그 돈으로 우주선을 사지 내가"
"와 대박. 벌써 2200년대에 우주선도 다녀요?"
"어"
대박이다 정말. 어? 잠깐만.
"그럼 혹시 로또 번호 같은거 불러주면 안되요?"
"아 이 이해력 떨어지는 새끼. 그냥 현실 배경 게임일 뿐, 니가 우리 시대의 진짜 과거는 아니잖아"
"아 그렇구나. 그럼 진짜 미안한테 조금이라도 현질해주면 안되요? 조금만 과금하면 게임 재밌어지잖아요"
그리고 그제서야 '음성'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이게 이 게임 업데이트의 진짜 목적이구나. 내 피조물이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돈 안 쓰기도 좀 뭐하네. 야 시발 이 게임 운영 맛집이네"
"오, 그럼 질러주시는거에요?"
"아니. 돈 없다고 몇 번 말해. 대신에 돈 좀 벌게 해줄께"
"와 대박! 어떻게 하려구요"
"투잡 뛰자"
"아 싫어요"
하지만 순간 나는 '그래도 투잡 해야되는거 아닌가? 이대로 월급 260으로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든 생각이 그게 명령이죠?"
"어"
"아!"
이제 알았다. 노력 빡세게 하는 사람들, 그거 다 빡겜 하는 유저들이 지시해서 그런 거구나. 역시.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 진짜.
"보통 게임 얼마나 하세요? 정확히 말해서 저 얼마나 컨트롤 하세요?"
"옛날에 많이할 때는 하루에 20시간도 하고 그랬지. 요즘에는 근데 한 하루 30분?"
"아 좀 더 많이 플레이 해주세요"
"야, 이거 봐라. 과금해라, 플레이 타임 늘려라, 아주 장난 아니네. 이번 업데이트 완전 진짜 노골적이다"
낄낄대며 혀를 차는 유저, 아니 주인님에게 나는 말했다.
"주인님한테는 게임이지만 저한테는 인생이잖아요"
그러자 그 '주인님'이라는 표현에 그는 빵 터지더니 "야, 내가 왜 니 주인이야. 이 자존감 낮은 새끼. 징징대지 마라. 확 캐릭터 지우는 수가 있다" 하며 갑자기 협박을 해왔다. 난 다소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그럼 이 세상에서 성공한 대기업 회장님이나 정치인, 연예인들은 게임 빡세게 한 사람들이죠?"
"그치. 야 그런 사람들은 다 게임에 돈 개쳐부은거야. 라이프가 현질이 얼마나 개빡센 게임인데. 무과금으로 널 이만큼 키운거 진짜 넌 나한테 머리 박고 감사해야 된다."
뭐 다 나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니가 중동이나 아프리카 서버에서 한번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는 말에 조금 납득을 했다. 그보다 궁금한 것도 생겼다.
"그럼 내 주변 사람 중에 NPC는 누구에요?"
"그건 나도 모르지. 말했잖아. 라이프는 AI 수준이 꽤 높다고. 대화만으로는 몰라. 물론 이제 업데이트 됐으니까 너가 좀 친한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한테 '님 플레이어 연락처 좀' 하면서 물어봤을 때 돌아오는 답으로 알 수도 있겠지. 근데 명심해라. 슬슬 망겜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30만도 안돼"
그렇구나.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유저의 개입 여지가 적은 게임이구나. 특히 현질도 잘 안 하는 유저라면.
"어때요? 라이프 재밌어요?"
생각보다 이건 중요한 질문이다. 내 인생이 걸린 질문이기도 하다. 거의 신에게 직접 "인간세상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 수준의 질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뭐 재미로 하겠냐. 습관처럼 하는거지. 솔까 유저도 점점 줄고, 업데이트도 예전 같지 않고, 재미가 덜해. 나는 라이프 말고도 다른 게임 많이 하는 중이야"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질질짜지 말고 븅신아. 나도 생활이 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일단 라이프는 핵과금러가 지랄맞게 많은 게임이니까 섭종할 가능성은 낮다"
"주인님은 그 세상에서 직업이 뭡니까"
"엔지니어. 니네 세상의 엔지니어랑은 좀 개념이 다르지만"
"어떤 일인데요"
"설명해줘도 이해 못해. 너 18세기 사람한테 핵물리학자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자신 있냐"
"연금술사"
"지랄하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무언가 번뜩 생각나서 말했다.
"그럼 나 여친 좀 만들어줘요"
"아니 미친놈아, 니가 만들면 되잖어. 일일히 다 조종하는 것도 귀찮어. 니가 헛소리 또 할라고 하면 내가 알아서 클릭할테니까, 그럼 지금 휴대폰으로 아무나한테 고백해 봐"
"전화로 고백이요?"
내가 좀 그건 그렇지 않냐고 되묻자, 그는 무언가를 쩝쩝 씹으며 말했다.
"너 서라씨랑 썸타고 있지? 지금 전화해보자"
무슨 개소리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나는 또 나도 모르게 서라씨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주인님이 나를 조종하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솔직히 이제 막 같이 야근 때 겸사겸사 저녁 두 번 같이 먹은 사이인데, 불쑥 토요일 오전에 이렇게 전화해도 되나 싶었지만 "여보세요?" 하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서라씨, 뭐하고 있어요?" 하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준영씨가 갑자기 전화해서 놀랬잖아요" 하며 웃더니 "방금 일어났어요. 뭐 아직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준영씨는 오늘 뭐하세요?" 라고 답해왔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난 조종을 받는지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대다가 게임이나 하고 자겠죠. 등신처럼" 하고 터무니 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뿔싸. 조종당한 것 같다.
"아, 그렇시구나. 에이, 게임 말고 다른거 좀 하시지"
서라씨는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내 황당한 답에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전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낸 후 '뭐하는거에요' 하고 하늘에 대고 입 모양을 벙긋 거렸지만 그저 내 머릿 속에서는 빵 터져서 쳐웃는 그의 웃음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농담이구요, 놀랬으면 미안해요. 혹시 저녁에 저랑 저녁 먹구 드라이브 어떠세요?" 라고 얼른 수습했지만, 이번에도 서라씨는 "어? 준영씨 차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물어왔다. 아, 진짜 나 조종 받고 있나보다. 이마를 손을 올린 나는 곧 얼굴을 쓸어내렸다. 겨우겨우 수습을 위해 "아 맞네. 나 차 없지 참" 하고 어색하게 웃자, 이번에는 진짜로 서라씨가 "진짜 뭐야"하며 빵 터져서 웃었다.
어?
"나랑 전화하는거 떨려요?" 하면서 웃던 그녀는, "그럼 이따가 내가 집 근처로 픽업하러 갈게요. 저녁 사줘요. 이따 7시 신대방역쪽으로 가면 되는거죠?" 하면서 물어왔다. 나는 서둘러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따봐요"
"그래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미친듯이 웃는 '주인님'을 향해 소리쳤다.
"진짜 좆될 뻔 했잖아요! 왜 그래요 진짜"
"아 존나 웃기네. 야, 캐릭 확 지워버린다? 복종해라. 확 그냥 이따가 서라씨 앞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수가 있어"
"아 제발!"
"알았어 알았어. 야, 나도 임마 니 키우느라 들인 시간과 공이 있는데, 그런 짓 하겠냐? 겁은 오지게 많아서. 근데 서라 쟤 성격 괜찮다"
"그쵸?"
"응. 빨리 사귀어. 19금씬 좀 보자"
어?
"잠깐만요. 진짜로 다 보는거에요?"
"당연하지 임마. 넌 내가 만든 캐릭터라고"
"그…모자이크 처리 이런거 안되고?"
"아 구닥다리 새끼. 우리 시대는 임마, 표현의 자유가, 어? 우리는 금기라는게 아예 없는 세상이야. 이 청교도 캐릭터 놈아"
미쳤다.
"게임 캐릭터도 프라이버시라는게 있잖아요"
"하기 싫으면 말던가. 아쉬운건 너지 내가 아니야. 나는 그냥 우리 세계에서 SVR로 즐기면 돼"
"그건 뭔데요"
"시뮬레이선 장치. 체감형 VR이라고 하면 이해할라나? 너네 시대에는 없는거야"
"대박. 부럽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 옷장을 찾기 시작했다.
"나 뭐 입고 나가죠?"
"대충 입어. 그런 거까지 조작하는건 내 취향 아니다"
"옷 좀 현질해주면 안되요?"
"한번만 더 현질 타령하면 그냥 니 모든 돈 싹 다 아이템거래 사이트에 팔아버리고 너 북한으로 월북 시킨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쨌거나 짖궂긴 해도, 우리 이 지랄맞은 '플레이어' 님 덕분에 나는 오늘 데이트가 잡혔다. 서라씨한테 뭘 입고 나가야 잘 생겨보일까. 나는 거울 앞에서 춤까지 추며 데이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으흠"
그보다 생각보다 나, 너무 가볍게 이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누군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내 운명을 이끈다는 것. 생각해보니 이게 바로 그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심'이며 '부처는 내 안에 있는 것'이자 '신은 위대하시다'로구나. 내 츤데레 주인이 나를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해주겠지.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니, 과금 조금만 해주면 진짜 좋겠지만.
"야, 진짜 뒤진다?"
내 머릿 속에 울리는 그의 음성. 나는 얼른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하며 다른 생각을 시작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