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랜 친구 재승이는 도박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아버지가 일찌기 도박에 손을 대서 가산을 탕진하고, 사춘기 내내 어머니와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런걸 왜 하냐고 병신아"
"재미로 하는거지"
"아 진짜 참 너도 다른건 똑똑한 새끼가 이럴 때보면 디게 생각 없어보여"
…아무리 친구 간에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박에 관해서는 하다못해 흔한 짤짤이 하나조차 심하게 말을 해오던 그 놈. 그래도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 하는 차원에서 나는 매번 "알았어 임마. 내가 알아서 할께" 하고 적당히 넘어가곤 했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님?"
"아 몰라몰라"
성호와 은경이 누나랑 같이 경마장 한번 놀러 갔다 왔다고 했을 때, 재승은 눈알이 동그래져서는 막말을 퍼부어댔다. 그렇게 내가 못 마땅했으면 지가 먼저 나와 절교해도 되었으련만, 사실 재승에게는 별로 친구가 없었다.
"정신차려"
"아니 정신은 니가 차려. 가서 뭐 3만원쯤 놀다 온 걸로는 우리 엄마도 뭐라고 안 해. 니가 뭔데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아 답답하다 진짜"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상한 편견과 자기확신, 그리고 굉장히 직설적인 화법 탓에 그 놈 주변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다. 아마 나도 어릴 적부터 근처에 살았고 중고교 기간 내내 같은 학교, 6년의 기간 중 무려 4번이나 같은 반이 된 인연 때문에 친해서 여지껏 친구가 된 것이지, 요즘에 알았다면 진작에 내가 먼저 손절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사실 사과도 곧잘 내가 먼저 했다. 굳이 내가 사과를 할 일도 아니었지만, 녀석의 어떤 그런 고집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가정불화라는 지긋지긋한 고통 속에서 버티기 위해 강제로 주입한 자기확신. 친구로서 그걸 지켜주는게 의리라는 생각을 했다. 녀석도 어머니의 재가와 새 아버지의 안정된 경제력 이후로는 조금 성격이 밝아지긴 했고.
"오늘 내가 밥 쏜다"
"왜? 뭐 좋은 일 생겼냐?"
"주식이 올랐어. 어제 상한가 쳤다"
"너 주식도 하냐?"
…언젠가 대판 싸운 이후로, 녀석도 조금은 말을 가리긴 했지만 여전히 '녀석의 기준에' 도박과 비슷한 그 무엇이라도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놈은 여지없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나 역시도 '도대체 얼마나 상처가 됐고, 한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굳이 자극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지만, 근본적인 성격 차이라고나 할까. 생각보다 부딪히는 일은 여전히 잦았다.
"나 지연이한테 고백을 할까 하는데"
"지연이? 어? 너 지연이랑 친해?"
"뭐 그렇게까지 친한건 아닌데… 요즘에 서로 약간 썸 비슷한 사이라고나 할까"
내 여친 주아의 친구의 친구인 지연이. 어디 놀러가거나 생일파티 때 어울려서 다같이 종종 놀다보니 녀석이 지연에게 호감을 갖게 된 모양. 하지만 옆에서 봤을 때 재승이는 절대 지연이 취향이 아닌데.
"지연이랑 썸 탄다고?"
"응"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될지야 모를 일이지만, 주아를 통해 소개팅 제안의 형식으로 슥 재승에 대한 지연의 뜻을 알아봤을 때는 절대 성공확률이 없었다. 그래서 애둘러서
"야 그래도 좀 더 친해지고, 뭔가 마음이 통했다 싶고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전이 됐다 싶을 때 도장 찍는 느낌으로 고백을 해야지, 냅다 고백을 하는건 좀 무리수 아니냐"
하고 말했지만 재승은 아니라며 잘 될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다음 주에 영화 같이 보기로 했다며 그때 고백할 것이라고 했다. 속으로 '도박 싫어한다더니 니가 지금 하는게 도박 아니냐' 라고 한마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그냥 차라리 '당해보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말없이 넘어갔다.
"여자애들은 도대체 왜 그러냐? 지가 사람 헷깔리게 해놓고 갑자기 정색하는건 무슨 경우야"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뜸 들이라고 했잖아. 아니 지 좋다고 다짜고짜 고백하는건 무슨 경우냐고"
"아니라니까"
"에휴, 이 모쏠아, 모쏠아. 재승이 넌 그냥 나중에 혼자 살고 나 애 낳으면 대부님 해줘라"
"꺼져"
매번 나에게 정색하며 항상 지성인인 척, 잘난 척 하던 놈이 당황하며 털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솔직히 많이 웃기고 재밌었다.
"취직은 했냐?"
"뭐, 그냥. 응"
"어디? 대기업?"
"아니이. 내 주제에 대기업은 무슨. 그냥 중소기업 다녀. 넌?"
대학을 졸업한 이래, 녀석은 "안전한게 최고"라는 인생의 모토 아래, 공무원 시험 준비을 한다며 오랜기간 잠수를 탔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우리는 속도위반결혼을 하게 된 성호 & 은경이 누나 커플 결혼식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났다.
"아직 공부하지 뭐. 7급은 접었고, 요즘에는 그냥 9급이나 볼라고"
"그래"
재승은 민망했던지 "너도 그냥 공무원 준비하는게 낫지 않냐? 어차피 회사 다녀봐야 마흔 줄 넘기면 회사 짤리고 그럴텐데" 하면서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제안했지만 난 어깨를 으쓱했다.
"공부가 쉽냐. 학교 다닐 때도 안 했던게 공부인데. 수능 전날까지 게임하던 새끼가 갑자기 공부하면 뭐 되겠냐"
"그래도 안전빵이 최고지. 가늘고 길게 가는거, 그게 인생이다 이 말이야. 한방 한방 하는 애들이 인생 망하는거라고"
그런 재승의 말에 '그 빡센 공무원 시험에 인생 올인하는게 더 한탕주의 아닌가?' 하는 반박을 하고 싶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났고, 재승은 결국 공시를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간만에 놀러갔던 녀석의 집에는 공기업 취업 관련 자료들이 널려있었다.
"니는 연봉 얼마나 받냐?"
"중소기업이 뻔하지 뭐. 3년차에 대리 달고 지난 2년 연속 업무평가 A 찍었는데도 겨우 3천 찍었다 야. 답 없어 답 없어. 진짜 니처럼 공기업이나 준비할까"
재승이 앞에서는 굳이 허세를 떨지 않았다. 혼자 시험준비 하느라 '남에 비해 늦어지는거 아닐까'하고 마음고생이 심할텐데, 굳이 자괴감을 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야, 그냥 회사 잘 다녀. 그게 암만 해도 맞지 싶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재승의 목소리에는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곧 죽어도 지 질난 맛에 살던 놈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말이 어쩜 그리 안쓰럽던지. 그 날 이후로 나는 재승의 자취방에 자주 놀러가 자주 밥과 술을 사줬다.
"야 그건 씨발 진짜 도박이잖아"
"도박인지 뭔지 몰라도, 돈이 되는데 하는거지. 쥐꼬리만한 월급 받아서 언제 집 사고 언제 결혼해"
"그러다 인생 조진다고 미친놈아"
"매년 물가가 7% 넘게 오르는 세상에 겨우 1% 이자 주는 적금을 진지하게 붓고 있는게 미친 놈이지"
코인에 조금 투자를 하고 있다는 말에 재승은 정말로 정색을 했다. 나 역시 주워들은 이런저런 논리로 녀석과 말싸움을 했지만, 일단 '현대적 관점의 투자' 자체를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불로소득'이라는 단어를 '혐오'하는 녀석의 관점 앞에 그 어떤 것도 통할 리 없었다.
"아 됐다. 싸우겠다 야. 그냥 내 돈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께"
"아 진짜 답답한 새끼. 너 진짜 몇 년 고생한거 한 큐에 다 털어먹을 수도 있어. 정신차려 병신아"
나 역시도 스트레스 받아가며 코인질 하는 판에, 저주에 가까운 말까지 듣자 정말로 목구멍까지 '직장생활도 못하고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새끼가 함부러 말하지 마'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여튼, 각자가 생각하는대로 잘 살면 되는거잖아"
직장생활 5년을 했지만 모은 돈은 겨우(?) 5,300만원이었다. 사실 직장 동료들에 비하면 제법 모은 편이었다. 하지만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코인에 투자를 했다. 그래도 나로서는 나름 신중한 투자였다. 기술적인 차트의 움직임을 본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한 이유였다.
"잘 생각해봐요. 전쟁이 났어. 니가 100억 가진 부자야. 근데 전쟁나면 부동산 들고 해외로 갈 수 있어? 못 가. 그럼 그 돈 다 금괴로 만들어서 비행기 탈거야? 못 타.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탈거야? 근데 그거 들고 다니면 목숨 위태롭지 않아? 근데 비트코인 뭐야.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자산백업 가능하잖아. 아 누가 100억 다 바꾸래? 한 1억만 혹시 모르는 보험으로 넣어놓을 수 있잖아. 세상에 그런 부자가 어디 한 둘이야? 그리고 검은 돈 가진 사람들, 세탁하기 좋잖아. 그리고 그런 부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아"
라는, 인터넷에서 대충 본 논리에 설득당했다. 손에 돈가방 들고 다니는 것보다야 휴대폰 한 대가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잖아, 라는 심플한 논리였다.
"조금만 하면 돼"
시기가 좋았다. 비트코인이 개당 200만원이던 시절에 2천만원을 박았고, 그게 불과 몇 달 사이에 개당 1800만원이 됐다. 그 와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20만원까지 오른 이더리움에도 오백만원을 박았고, 그것도 나름 대박이 터졌다. 더 기다려보고 싶었지만, 그 무렵에 사귄 새 여자친구 희정의 차 타령에 딱 절반을 매도하여 원금을 회수하고 남은 돈으로 중고 외제차를 샀다. 주행거리 8만에 거의 10년도 더 된 중고차였지만, 알콩달콩 연애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요즘에 인스타 보니까 여친이랑 잘 지내는거 같더라?"
"어. 재승. 간만이네. 잘 지내지"
몇 달 후, 재승과 만났을 때 녀석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결국 공무원, 공기업 다 포기하고 작은 IT기업에 취직한 녀석은 "연봉도 낮고, 그저 그런 회사지만 워라벨은 좋아" 라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놈의 안색이 밝은 진짜 이유는 근래의 코인 뉴스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그거 다 거품이고 허상이라고. 그거 요즘 얼마나 하냐? 한 500은 하냐?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하고 접어. 너 그러다 진짜 깡통찬다?"
희정이 성화에 환상의 타이밍에 매도한 덕분에 이미 본전을 한참 뛰어넘는 이익실현도 했지만, 솔직히 '그래도 그때 다 팔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던 차에 재승의 말은 꽤 듣기 거북했다.
"그리고 임마 외제차는… 그것도 중고 외제차라니. 니가 생각이 있냐 없냐. … 진짜 어릴 때부터 니 참 이런 면은 하나도 안 변했다"
'당장 경차도 없는 놈이' 하는 말이 역시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이번에도 피식 웃고 넘어갔다. 제발 코인이 올라서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코인에 추가로 박을 돈은 없었다. 희진이 결혼 압박을 해왔기 때문이다.
"결혼? 그럼 집은?"
내가 고민을 토로하자 재승은 집부터 물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야야야, 무슨 대출을 얼마나 받아서 집을 살건데. 넌 무슨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도박이냐. 지금 시기에 집을 대출까지 내서 사는게 맞어? 평생 집 대출 갚다 끝날래? 너 진짜 어쩔라고 그래. 인생이 도박이네 이 새끼는. 니 대학교 다닐 때 경마장 가고 그럴 때부터 알아봤지만 참, 요즘에 누가 집을 사냐고. 인구구조만 봐도 한국은 이제 집값 폭락하게 되어 있다고"
재승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솔직히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대출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말에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자금여력에 한계가 있어서 대출에 아버지 도움까지 얻어 겨우 17평 아파트를 구매했다. 사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지만, 막상 사고 나니 세상이 좀 다르게 보였다.
성취.
누가 뭐래도 나는 이제 내 집도 있고, 내 차도 있고, 나랑 결혼을 생각하는 여친도 있고, 나보다 더 잘난 놈들이 수도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나도 무언가를 이뤄낸 것은 분명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재승이 그 놈의 말과 달리 내가 이제껏 해온 것은 도박이 아니라 도전이었다. 내 삶에 대한 도전 말이다.
"요즘 집값 많이 올랐지?"
4억 2천에 산 집이 현재 8억 9천에 거래된다는 말에 괜시리 헤벌쭉해지긴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나는 재승이 앞에서는 그다지 좋은 티를 안 냈다.
"어차피 이사갈 것도 아니고, 세금만 올랐는데 뭐. 진짜로 대출금 갚는거 빡세다. 희진이랑 안 헤어졌으면 그나마 뭐 보람이라도 있을텐데 그냥 헛고생만 하고 있다"
"그래도 집 없는 나보다야 낫지"
재승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더이상 이제 자신은 서울에 집을 갖는게 거의 불가능해졌음이 명확해진 이 시기, 한때 그토록 집 사지 말라고 말렸던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때 니가 내 말 듣고 정말로 집을 안 샀으면, 니가 나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냐. 당시로선 그게 틀린 말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희진이랑 결혼도 못 했으니까 의미 없지."
사실은 희진과 헤어진 이유도 그 집이었다. 나에게는 이게 한계였지만 그녀는 조금 더 큰 집을 원했다. 사실 참자면 참을 수 있었는데. 혼자 '나도 이제 이뤄냈다'라는 뿌듯함에 젖어있는 나에게 "나 이 집 완전 별로야" 라고 말해오는 희진에게 정이 떨어져 버린 것.
"야 근데 코인 아직도 하냐?"
"어"
"뭐? 진짜? 그럼 너 자산이 얼마나 돼?"
5개 남은 비트코인은, 이미 개당 300만원까지 떨어진 판에 청산해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그냥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7,700만원을 찍은 날에 3개를 팔았다. 2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꽂히던 날, 내 '썩은 외제차'를 파주에 있는 수입차 전문 튜닝샵에 가져갔다. 도장도 새로 하고, 짝퉁 휠도 순정으로 바꾸고 코팅에 시트 교체에 전체적으로 차량을 싹 새로 손봤다. 그 와중에 정말 기뻤던 것은, 비트코인 팔면서 재미로 200만원어치 박았던 알트코인들이 또 어마어마한 수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재승아, 뭐하냐"
"뭐하긴.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한다. 뭐 같은 회사에 워라벨까지 거지 됐으니 이제 그냥 죽지 못해 다녀. 넌?"
"나 내일 제주도 여행 가려고 짐 싼다"
"뭐? 혼자 가?"
"아니 미쳤냐. 여자랑 가지"
"여자 누구"
"있어. 썸 타는 애랑"
"근데 내일 화요일인데 어떻게 연휴를 내?"
"이제 우리 실에 내가 실장인데 못할게 뭐 있냐 임마"
대충 갖출 것 갖추고 주머니에 현찰까지 적당히 생기니까, 솔직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불합리한 지시에 목소리를 내게 됐고, 하다못해 자를테면 자르라는 각오로 싸웠다. 임금협상도 처음으로 협상다운 협상을 했다. 별 것 아닌데 왜 그렇게도 눈치를 봤을까.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그러니까 오히려 더 승진도 빨라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임금협상도 아니야, 통보야 통보. 작년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아 진짜 거지 같다"
그때 보았다. 재승이에게서 나의 몇 년 전 모습을. 그래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다.
"우리도 마찬가진데, 그래도 난 이게 좀 아니다 싶어서 관둘 각오로 말했어. 이 금액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내 성과가 있고, 내 노력이 있는데 1% 상승은 좀 아닌 거 같다라고 담판 지어서 좀 더 많이 올렸어. 때로는 그런 것도 필요한거 같더라"
예전 같으면 또 고집 부리면서 '너는 돈이 있으니까 그러지' 하는 식으로 회피했겠지만, 재승은 의외로 순순히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더라. 너무 매번 네네 하니까 회사가 나를 더 우습게 보는 것도 같고" 하면서 내 말을 인정했다. 아마 본인도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것이 있었으리라.
내 나이에 안정된 집이 있고, 자산이 있으며, 역시 안정된 직장과 슬슬 자기관리까지 시작하면 당연히 그 매력이 이성에게 어필되지 않을 리가 없다. 직장에서도 은근히 눈길을 주는 동료들이 보이고, 친하게 지내던 여사친이 은근하게 "요즘 연애 안 해?" 하고 물어오는가 하면, 활동하던 동호회에서도 몇 번의 모임을 갖고 나면 친해지는 여자회원들이 생겼다. 화려하게 한 눈에 반할 정도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그럭저럭?' 정도의 남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참 대단하다 대단해"
재승은 그런 나를 지저분하다고 욕했지만, 본질은 부러움이었다. 그런 녀석에게도 곧 좋은 여자친구가 생겼다. 6살 차이의, 직장에서 만난 인턴 여사원이었다.
"야, 이거 그거 아니냐? 위계에 의한…"
"꺼져 미친 놈아. 뭔 소리를 하는거야"
지가 나에게 문란하다더니 지저분하다더니 하던 농담들은 까맣게 잊은 재승이었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여자친구를 무척 좋아했다. 놈의 말에 따르면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커플"이라나.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세요. 와 미인이시네요. 재승이 이 쉑! 놀라운데?"
다른건 몰라도 여자에 관해서는 쑥맥에 가까운 녀석이었기에, 솔직히 그저 그런 여자애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생글생글 웃음도 많고, 호감 가는 인상의 그런 여자였다. 재승이를 다시 보게 됐을 정도로.
"맛있는거 먹으러 가요. 아, 여기 근처에 진짜 맛있는 쇠고기 편백찜 가게 있어요"
"편백찜이 뭐에요?"
"이렇게 나무찜기에 차돌박이를 쪄서 소스에 찍어먹는 가겐데…"
그리고 그 날의 우리 둘에 대해서 나중에 재승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다.
"정말 사랑하니까 알 수 있었다. 내가 반 년 가까이 노력하며 유림이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애정보다, 만난지 3분도 안된 너를 향한 호감이 더 크다는걸"
나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재승의 여자친구 유림이 나에게 훅 하고 나에게 빠져드는 것을. 흔히 있는 일 아닌가. 사회경험 많아 보이는 연상의 남자에게 쉽게 끌리는 타입의 여자애들. 회사의 선임으로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재승에게 쉽게 빠졌던 그녀였기에, 역시나 사회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보다 경험이 많은 나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치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 돼? 개새끼야!"
재승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내 멱살을 잡았다. 언젠가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셋이 함께 놀고는 동선상 재승이를 먼저 집 근처에 내려다주고 유림을 데려다 주러 그녀의 집으로 가던 중 눈발이 짙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그녀와 잤다.
"왜 이러는거야"
"몰라서 물어? 걔가 다 말했어. 너가 좋대"
단지 하룻밤의 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유림은 사귀자고 했고 물론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유림은 재승에게 그 일을 털어놓고 헤어지자고 했던 것.
"하아…미안하다"
의외로 재승은 나에게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내 뺨을 한 대 후려치긴 했지만, 그나마도 그리 세게 치지는 않았다. 자기가 못나서 여자친구가 떠난 것을 친구 탓 하는 것도 병신이라는 이유를 뒤에 덧붙이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미안했다. 정말로.
"어쩌다 그런거야"
"내 차, 후륜이잖아. 눈길에 쥐약이라고. 윈터타이어도 아닌데. 그래서 잠깐 좀 눈 치울 때까지만 걔네 집에 있으려고 했는데…"
"그만. 개새끼야"
"미안해"
"자다가 니 거기 내가 잘라가도 넌 비명도 지르지 마라"
"미친 놈"
그날 재승과 나는 밤새 술을 마셨다. 재승은 "어차피 나한테 안 어울리는 애긴 했어. 사실은 너한테도 보여주는게 싫었어. 괜히. 이래서 그랬나 봐" 하며 밤새 나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놓았다.
비슷한 학력에 비슷한 외모-라는 말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녀석의 생각이니까-, 약간 성격의 결이 다르기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놈, 그러면서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대충대충. …그게 녀석의 나에 대한 평가였다.
"분명히 내가 더 옳은 방식, 옳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니가 이상하게 더 잘되는거야. 매번"
나는 재수를 각오하고서라도 셋 다 '살짝 무리수 아닐까' 싶은 대학에 지원을 했고, 재승은 상향지원 하나, 성적에 맞춰서 하나, 하향지원 하나의 도전을 했지만, 결국 운 좋게 나는 인서울 대학교, 녀석은 경기권의 국립대.
녀석은 '안전한 길'이라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7급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고, 초조함이 더해지자 9급조차 쉽지 않았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중소기업에 입사한 나를 보며 '시험만 합격하면 곧바로 평생 역전'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공시에 매달리다가 시간만 날렸다.
누가 뭐래도 정정당당히 아끼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매번 도박 비슷한 것에 손을 대는 나는 큰 돈을 벌어대고, 재승 자신은 다람쥐 쳇바퀴만 도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주식이 폭락하고,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진다는 뉴스가 매번 그렇게 기뻤다고.
무리해서 집을 사길래 '이번에야말로 망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고 여자친구랑 헤어지지까지 하길래 기뻤지만….
"기뻤다고? 야, 너무한거 아냐?"
"그냥 내 기분이 그랬다고.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잖아. 그리고 너무한걸로 따지면 지금 니가 나한테 따질 상황이야?"
"너는 뭔…"
어쨌거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집이 두 배가 되어버리고, 이제 결국 영원히 집을 사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후련해질 정도였다고.
"사실 어차피 집값이 오르지 않았어도 내 주제에 집을 산다는건 무리야. 지금도 월급 260에 80은 집에 생활비로 보낸다고. 차라리 좋은 변명이지. 근데 너는 벌써 10억 부자가 됐네"
그런 말을 하는 재승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 때문에 전재산이 날아가고, 빚쟁이들한테 엄마가 시달리고 하면서 매일 소원은 딱 하나였어. 평범하게 사는거. 아버지랑 다르게 절대로 나는 도박에는 평생 손도 안 댈테니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거든. 당연히 나도 니가 부러웠지. 근데 무섭더라고. 아버지 핏줄 물려받은 내가 도박에 손다면 똑같이 되면 어쩌나 하고. 불쌍한 우리 엄마는 어쩌냐 하고"
나는 딱히 위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곁에서 항상 해왔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는 생각이 달라. 도박? 인생이 도박이지. 꼭 도박장 가서 주사위 던져야 도박이야?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이력서 지원하는 것도 도박이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것도 도박이고, 몇 년 간 지속적으로 부을 수 있을까 어떨까도 모르는데 일단 이자 확인하고 적금통장 만드는 건 도박이 아냐? 리스크가 있고, 리턴이 있으면 그게 다 도박이지"
내 딴에는 꽤 잘 정리해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재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박쟁이새끼답다"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찌질이 새끼가 말이 많다. 야, 유림이 일은 진짜 미안하다"
"됐어 개새끼야. 어차피 얼마 전에는 걔가 돈 빌려달라고 하더라. 빌려줄 돈도 없지만, 빌리는 이유도 가관이더라. 성형하고 싶다던가"
"성형?"
"니랑 잔 것도 아마 그거 기대한걸걸"
"후"
…그녀의 일이 있었지만, 현재 나와 재승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그것도 일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도 여행도 종종 같이 가고 할 정도니까. 솔직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았을 때 그게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만에 유림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사귀었다가 또 한달 만에 헤어진 덕분에 완벽히 마음의 정리가 된 것인지도.
"재승아, 간만에 밥이나 먹을래?"
"좋아. 이따가 우리 동네로 와. 아 올 때 로또 사와라"
…이제 더이상 녀석은 도박을 혐오하지 않는다. 언젠가 깨달았단다. 도박쟁이를 친구랍시고 곁에 두고도 아무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게 도박이었다고. 평생 도박 안 하겠다는 맹세는 스스로 깬 것이니까 벌 받은 거라고.
< 끝 >
"그런걸 왜 하냐고 병신아"
"재미로 하는거지"
"아 진짜 참 너도 다른건 똑똑한 새끼가 이럴 때보면 디게 생각 없어보여"
…아무리 친구 간에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박에 관해서는 하다못해 흔한 짤짤이 하나조차 심하게 말을 해오던 그 놈. 그래도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 하는 차원에서 나는 매번 "알았어 임마. 내가 알아서 할께" 하고 적당히 넘어가곤 했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님?"
"아 몰라몰라"
성호와 은경이 누나랑 같이 경마장 한번 놀러 갔다 왔다고 했을 때, 재승은 눈알이 동그래져서는 막말을 퍼부어댔다. 그렇게 내가 못 마땅했으면 지가 먼저 나와 절교해도 되었으련만, 사실 재승에게는 별로 친구가 없었다.
"정신차려"
"아니 정신은 니가 차려. 가서 뭐 3만원쯤 놀다 온 걸로는 우리 엄마도 뭐라고 안 해. 니가 뭔데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아 답답하다 진짜"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상한 편견과 자기확신, 그리고 굉장히 직설적인 화법 탓에 그 놈 주변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다. 아마 나도 어릴 적부터 근처에 살았고 중고교 기간 내내 같은 학교, 6년의 기간 중 무려 4번이나 같은 반이 된 인연 때문에 친해서 여지껏 친구가 된 것이지, 요즘에 알았다면 진작에 내가 먼저 손절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사실 사과도 곧잘 내가 먼저 했다. 굳이 내가 사과를 할 일도 아니었지만, 녀석의 어떤 그런 고집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가정불화라는 지긋지긋한 고통 속에서 버티기 위해 강제로 주입한 자기확신. 친구로서 그걸 지켜주는게 의리라는 생각을 했다. 녀석도 어머니의 재가와 새 아버지의 안정된 경제력 이후로는 조금 성격이 밝아지긴 했고.
"오늘 내가 밥 쏜다"
"왜? 뭐 좋은 일 생겼냐?"
"주식이 올랐어. 어제 상한가 쳤다"
"너 주식도 하냐?"
…언젠가 대판 싸운 이후로, 녀석도 조금은 말을 가리긴 했지만 여전히 '녀석의 기준에' 도박과 비슷한 그 무엇이라도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놈은 여지없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나 역시도 '도대체 얼마나 상처가 됐고, 한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굳이 자극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지만, 근본적인 성격 차이라고나 할까. 생각보다 부딪히는 일은 여전히 잦았다.
"나 지연이한테 고백을 할까 하는데"
"지연이? 어? 너 지연이랑 친해?"
"뭐 그렇게까지 친한건 아닌데… 요즘에 서로 약간 썸 비슷한 사이라고나 할까"
내 여친 주아의 친구의 친구인 지연이. 어디 놀러가거나 생일파티 때 어울려서 다같이 종종 놀다보니 녀석이 지연에게 호감을 갖게 된 모양. 하지만 옆에서 봤을 때 재승이는 절대 지연이 취향이 아닌데.
"지연이랑 썸 탄다고?"
"응"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될지야 모를 일이지만, 주아를 통해 소개팅 제안의 형식으로 슥 재승에 대한 지연의 뜻을 알아봤을 때는 절대 성공확률이 없었다. 그래서 애둘러서
"야 그래도 좀 더 친해지고, 뭔가 마음이 통했다 싶고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전이 됐다 싶을 때 도장 찍는 느낌으로 고백을 해야지, 냅다 고백을 하는건 좀 무리수 아니냐"
하고 말했지만 재승은 아니라며 잘 될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다음 주에 영화 같이 보기로 했다며 그때 고백할 것이라고 했다. 속으로 '도박 싫어한다더니 니가 지금 하는게 도박 아니냐' 라고 한마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그냥 차라리 '당해보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말없이 넘어갔다.
"여자애들은 도대체 왜 그러냐? 지가 사람 헷깔리게 해놓고 갑자기 정색하는건 무슨 경우야"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뜸 들이라고 했잖아. 아니 지 좋다고 다짜고짜 고백하는건 무슨 경우냐고"
"아니라니까"
"에휴, 이 모쏠아, 모쏠아. 재승이 넌 그냥 나중에 혼자 살고 나 애 낳으면 대부님 해줘라"
"꺼져"
매번 나에게 정색하며 항상 지성인인 척, 잘난 척 하던 놈이 당황하며 털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솔직히 많이 웃기고 재밌었다.
"취직은 했냐?"
"뭐, 그냥. 응"
"어디? 대기업?"
"아니이. 내 주제에 대기업은 무슨. 그냥 중소기업 다녀. 넌?"
대학을 졸업한 이래, 녀석은 "안전한게 최고"라는 인생의 모토 아래, 공무원 시험 준비을 한다며 오랜기간 잠수를 탔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우리는 속도위반결혼을 하게 된 성호 & 은경이 누나 커플 결혼식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났다.
"아직 공부하지 뭐. 7급은 접었고, 요즘에는 그냥 9급이나 볼라고"
"그래"
재승은 민망했던지 "너도 그냥 공무원 준비하는게 낫지 않냐? 어차피 회사 다녀봐야 마흔 줄 넘기면 회사 짤리고 그럴텐데" 하면서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제안했지만 난 어깨를 으쓱했다.
"공부가 쉽냐. 학교 다닐 때도 안 했던게 공부인데. 수능 전날까지 게임하던 새끼가 갑자기 공부하면 뭐 되겠냐"
"그래도 안전빵이 최고지. 가늘고 길게 가는거, 그게 인생이다 이 말이야. 한방 한방 하는 애들이 인생 망하는거라고"
그런 재승의 말에 '그 빡센 공무원 시험에 인생 올인하는게 더 한탕주의 아닌가?' 하는 반박을 하고 싶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났고, 재승은 결국 공시를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간만에 놀러갔던 녀석의 집에는 공기업 취업 관련 자료들이 널려있었다.
"니는 연봉 얼마나 받냐?"
"중소기업이 뻔하지 뭐. 3년차에 대리 달고 지난 2년 연속 업무평가 A 찍었는데도 겨우 3천 찍었다 야. 답 없어 답 없어. 진짜 니처럼 공기업이나 준비할까"
재승이 앞에서는 굳이 허세를 떨지 않았다. 혼자 시험준비 하느라 '남에 비해 늦어지는거 아닐까'하고 마음고생이 심할텐데, 굳이 자괴감을 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야, 그냥 회사 잘 다녀. 그게 암만 해도 맞지 싶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재승의 목소리에는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곧 죽어도 지 질난 맛에 살던 놈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말이 어쩜 그리 안쓰럽던지. 그 날 이후로 나는 재승의 자취방에 자주 놀러가 자주 밥과 술을 사줬다.
"야 그건 씨발 진짜 도박이잖아"
"도박인지 뭔지 몰라도, 돈이 되는데 하는거지. 쥐꼬리만한 월급 받아서 언제 집 사고 언제 결혼해"
"그러다 인생 조진다고 미친놈아"
"매년 물가가 7% 넘게 오르는 세상에 겨우 1% 이자 주는 적금을 진지하게 붓고 있는게 미친 놈이지"
코인에 조금 투자를 하고 있다는 말에 재승은 정말로 정색을 했다. 나 역시 주워들은 이런저런 논리로 녀석과 말싸움을 했지만, 일단 '현대적 관점의 투자' 자체를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불로소득'이라는 단어를 '혐오'하는 녀석의 관점 앞에 그 어떤 것도 통할 리 없었다.
"아 됐다. 싸우겠다 야. 그냥 내 돈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께"
"아 진짜 답답한 새끼. 너 진짜 몇 년 고생한거 한 큐에 다 털어먹을 수도 있어. 정신차려 병신아"
나 역시도 스트레스 받아가며 코인질 하는 판에, 저주에 가까운 말까지 듣자 정말로 목구멍까지 '직장생활도 못하고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새끼가 함부러 말하지 마'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여튼, 각자가 생각하는대로 잘 살면 되는거잖아"
직장생활 5년을 했지만 모은 돈은 겨우(?) 5,300만원이었다. 사실 직장 동료들에 비하면 제법 모은 편이었다. 하지만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코인에 투자를 했다. 그래도 나로서는 나름 신중한 투자였다. 기술적인 차트의 움직임을 본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한 이유였다.
"잘 생각해봐요. 전쟁이 났어. 니가 100억 가진 부자야. 근데 전쟁나면 부동산 들고 해외로 갈 수 있어? 못 가. 그럼 그 돈 다 금괴로 만들어서 비행기 탈거야? 못 타.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탈거야? 근데 그거 들고 다니면 목숨 위태롭지 않아? 근데 비트코인 뭐야.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자산백업 가능하잖아. 아 누가 100억 다 바꾸래? 한 1억만 혹시 모르는 보험으로 넣어놓을 수 있잖아. 세상에 그런 부자가 어디 한 둘이야? 그리고 검은 돈 가진 사람들, 세탁하기 좋잖아. 그리고 그런 부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아"
라는, 인터넷에서 대충 본 논리에 설득당했다. 손에 돈가방 들고 다니는 것보다야 휴대폰 한 대가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잖아, 라는 심플한 논리였다.
"조금만 하면 돼"
시기가 좋았다. 비트코인이 개당 200만원이던 시절에 2천만원을 박았고, 그게 불과 몇 달 사이에 개당 1800만원이 됐다. 그 와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20만원까지 오른 이더리움에도 오백만원을 박았고, 그것도 나름 대박이 터졌다. 더 기다려보고 싶었지만, 그 무렵에 사귄 새 여자친구 희정의 차 타령에 딱 절반을 매도하여 원금을 회수하고 남은 돈으로 중고 외제차를 샀다. 주행거리 8만에 거의 10년도 더 된 중고차였지만, 알콩달콩 연애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요즘에 인스타 보니까 여친이랑 잘 지내는거 같더라?"
"어. 재승. 간만이네. 잘 지내지"
몇 달 후, 재승과 만났을 때 녀석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결국 공무원, 공기업 다 포기하고 작은 IT기업에 취직한 녀석은 "연봉도 낮고, 그저 그런 회사지만 워라벨은 좋아" 라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놈의 안색이 밝은 진짜 이유는 근래의 코인 뉴스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그거 다 거품이고 허상이라고. 그거 요즘 얼마나 하냐? 한 500은 하냐?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하고 접어. 너 그러다 진짜 깡통찬다?"
희정이 성화에 환상의 타이밍에 매도한 덕분에 이미 본전을 한참 뛰어넘는 이익실현도 했지만, 솔직히 '그래도 그때 다 팔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던 차에 재승의 말은 꽤 듣기 거북했다.
"그리고 임마 외제차는… 그것도 중고 외제차라니. 니가 생각이 있냐 없냐. … 진짜 어릴 때부터 니 참 이런 면은 하나도 안 변했다"
'당장 경차도 없는 놈이' 하는 말이 역시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이번에도 피식 웃고 넘어갔다. 제발 코인이 올라서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코인에 추가로 박을 돈은 없었다. 희진이 결혼 압박을 해왔기 때문이다.
"결혼? 그럼 집은?"
내가 고민을 토로하자 재승은 집부터 물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야야야, 무슨 대출을 얼마나 받아서 집을 살건데. 넌 무슨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도박이냐. 지금 시기에 집을 대출까지 내서 사는게 맞어? 평생 집 대출 갚다 끝날래? 너 진짜 어쩔라고 그래. 인생이 도박이네 이 새끼는. 니 대학교 다닐 때 경마장 가고 그럴 때부터 알아봤지만 참, 요즘에 누가 집을 사냐고. 인구구조만 봐도 한국은 이제 집값 폭락하게 되어 있다고"
재승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솔직히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대출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말에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자금여력에 한계가 있어서 대출에 아버지 도움까지 얻어 겨우 17평 아파트를 구매했다. 사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지만, 막상 사고 나니 세상이 좀 다르게 보였다.
성취.
누가 뭐래도 나는 이제 내 집도 있고, 내 차도 있고, 나랑 결혼을 생각하는 여친도 있고, 나보다 더 잘난 놈들이 수도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나도 무언가를 이뤄낸 것은 분명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재승이 그 놈의 말과 달리 내가 이제껏 해온 것은 도박이 아니라 도전이었다. 내 삶에 대한 도전 말이다.
"요즘 집값 많이 올랐지?"
4억 2천에 산 집이 현재 8억 9천에 거래된다는 말에 괜시리 헤벌쭉해지긴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나는 재승이 앞에서는 그다지 좋은 티를 안 냈다.
"어차피 이사갈 것도 아니고, 세금만 올랐는데 뭐. 진짜로 대출금 갚는거 빡세다. 희진이랑 안 헤어졌으면 그나마 뭐 보람이라도 있을텐데 그냥 헛고생만 하고 있다"
"그래도 집 없는 나보다야 낫지"
재승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더이상 이제 자신은 서울에 집을 갖는게 거의 불가능해졌음이 명확해진 이 시기, 한때 그토록 집 사지 말라고 말렸던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때 니가 내 말 듣고 정말로 집을 안 샀으면, 니가 나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냐. 당시로선 그게 틀린 말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희진이랑 결혼도 못 했으니까 의미 없지."
사실은 희진과 헤어진 이유도 그 집이었다. 나에게는 이게 한계였지만 그녀는 조금 더 큰 집을 원했다. 사실 참자면 참을 수 있었는데. 혼자 '나도 이제 이뤄냈다'라는 뿌듯함에 젖어있는 나에게 "나 이 집 완전 별로야" 라고 말해오는 희진에게 정이 떨어져 버린 것.
"야 근데 코인 아직도 하냐?"
"어"
"뭐? 진짜? 그럼 너 자산이 얼마나 돼?"
5개 남은 비트코인은, 이미 개당 300만원까지 떨어진 판에 청산해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그냥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7,700만원을 찍은 날에 3개를 팔았다. 2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꽂히던 날, 내 '썩은 외제차'를 파주에 있는 수입차 전문 튜닝샵에 가져갔다. 도장도 새로 하고, 짝퉁 휠도 순정으로 바꾸고 코팅에 시트 교체에 전체적으로 차량을 싹 새로 손봤다. 그 와중에 정말 기뻤던 것은, 비트코인 팔면서 재미로 200만원어치 박았던 알트코인들이 또 어마어마한 수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재승아, 뭐하냐"
"뭐하긴.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한다. 뭐 같은 회사에 워라벨까지 거지 됐으니 이제 그냥 죽지 못해 다녀. 넌?"
"나 내일 제주도 여행 가려고 짐 싼다"
"뭐? 혼자 가?"
"아니 미쳤냐. 여자랑 가지"
"여자 누구"
"있어. 썸 타는 애랑"
"근데 내일 화요일인데 어떻게 연휴를 내?"
"이제 우리 실에 내가 실장인데 못할게 뭐 있냐 임마"
대충 갖출 것 갖추고 주머니에 현찰까지 적당히 생기니까, 솔직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불합리한 지시에 목소리를 내게 됐고, 하다못해 자를테면 자르라는 각오로 싸웠다. 임금협상도 처음으로 협상다운 협상을 했다. 별 것 아닌데 왜 그렇게도 눈치를 봤을까.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그러니까 오히려 더 승진도 빨라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임금협상도 아니야, 통보야 통보. 작년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아 진짜 거지 같다"
그때 보았다. 재승이에게서 나의 몇 년 전 모습을. 그래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다.
"우리도 마찬가진데, 그래도 난 이게 좀 아니다 싶어서 관둘 각오로 말했어. 이 금액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내 성과가 있고, 내 노력이 있는데 1% 상승은 좀 아닌 거 같다라고 담판 지어서 좀 더 많이 올렸어. 때로는 그런 것도 필요한거 같더라"
예전 같으면 또 고집 부리면서 '너는 돈이 있으니까 그러지' 하는 식으로 회피했겠지만, 재승은 의외로 순순히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더라. 너무 매번 네네 하니까 회사가 나를 더 우습게 보는 것도 같고" 하면서 내 말을 인정했다. 아마 본인도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것이 있었으리라.
내 나이에 안정된 집이 있고, 자산이 있으며, 역시 안정된 직장과 슬슬 자기관리까지 시작하면 당연히 그 매력이 이성에게 어필되지 않을 리가 없다. 직장에서도 은근히 눈길을 주는 동료들이 보이고, 친하게 지내던 여사친이 은근하게 "요즘 연애 안 해?" 하고 물어오는가 하면, 활동하던 동호회에서도 몇 번의 모임을 갖고 나면 친해지는 여자회원들이 생겼다. 화려하게 한 눈에 반할 정도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그럭저럭?' 정도의 남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참 대단하다 대단해"
재승은 그런 나를 지저분하다고 욕했지만, 본질은 부러움이었다. 그런 녀석에게도 곧 좋은 여자친구가 생겼다. 6살 차이의, 직장에서 만난 인턴 여사원이었다.
"야, 이거 그거 아니냐? 위계에 의한…"
"꺼져 미친 놈아. 뭔 소리를 하는거야"
지가 나에게 문란하다더니 지저분하다더니 하던 농담들은 까맣게 잊은 재승이었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여자친구를 무척 좋아했다. 놈의 말에 따르면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커플"이라나.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세요. 와 미인이시네요. 재승이 이 쉑! 놀라운데?"
다른건 몰라도 여자에 관해서는 쑥맥에 가까운 녀석이었기에, 솔직히 그저 그런 여자애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생글생글 웃음도 많고, 호감 가는 인상의 그런 여자였다. 재승이를 다시 보게 됐을 정도로.
"맛있는거 먹으러 가요. 아, 여기 근처에 진짜 맛있는 쇠고기 편백찜 가게 있어요"
"편백찜이 뭐에요?"
"이렇게 나무찜기에 차돌박이를 쪄서 소스에 찍어먹는 가겐데…"
그리고 그 날의 우리 둘에 대해서 나중에 재승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다.
"정말 사랑하니까 알 수 있었다. 내가 반 년 가까이 노력하며 유림이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애정보다, 만난지 3분도 안된 너를 향한 호감이 더 크다는걸"
나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재승의 여자친구 유림이 나에게 훅 하고 나에게 빠져드는 것을. 흔히 있는 일 아닌가. 사회경험 많아 보이는 연상의 남자에게 쉽게 끌리는 타입의 여자애들. 회사의 선임으로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재승에게 쉽게 빠졌던 그녀였기에, 역시나 사회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보다 경험이 많은 나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치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 돼? 개새끼야!"
재승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내 멱살을 잡았다. 언젠가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셋이 함께 놀고는 동선상 재승이를 먼저 집 근처에 내려다주고 유림을 데려다 주러 그녀의 집으로 가던 중 눈발이 짙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그녀와 잤다.
"왜 이러는거야"
"몰라서 물어? 걔가 다 말했어. 너가 좋대"
단지 하룻밤의 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유림은 사귀자고 했고 물론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유림은 재승에게 그 일을 털어놓고 헤어지자고 했던 것.
"하아…미안하다"
의외로 재승은 나에게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내 뺨을 한 대 후려치긴 했지만, 그나마도 그리 세게 치지는 않았다. 자기가 못나서 여자친구가 떠난 것을 친구 탓 하는 것도 병신이라는 이유를 뒤에 덧붙이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미안했다. 정말로.
"어쩌다 그런거야"
"내 차, 후륜이잖아. 눈길에 쥐약이라고. 윈터타이어도 아닌데. 그래서 잠깐 좀 눈 치울 때까지만 걔네 집에 있으려고 했는데…"
"그만. 개새끼야"
"미안해"
"자다가 니 거기 내가 잘라가도 넌 비명도 지르지 마라"
"미친 놈"
그날 재승과 나는 밤새 술을 마셨다. 재승은 "어차피 나한테 안 어울리는 애긴 했어. 사실은 너한테도 보여주는게 싫었어. 괜히. 이래서 그랬나 봐" 하며 밤새 나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놓았다.
비슷한 학력에 비슷한 외모-라는 말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녀석의 생각이니까-, 약간 성격의 결이 다르기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놈, 그러면서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대충대충. …그게 녀석의 나에 대한 평가였다.
"분명히 내가 더 옳은 방식, 옳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니가 이상하게 더 잘되는거야. 매번"
나는 재수를 각오하고서라도 셋 다 '살짝 무리수 아닐까' 싶은 대학에 지원을 했고, 재승은 상향지원 하나, 성적에 맞춰서 하나, 하향지원 하나의 도전을 했지만, 결국 운 좋게 나는 인서울 대학교, 녀석은 경기권의 국립대.
녀석은 '안전한 길'이라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7급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고, 초조함이 더해지자 9급조차 쉽지 않았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중소기업에 입사한 나를 보며 '시험만 합격하면 곧바로 평생 역전'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공시에 매달리다가 시간만 날렸다.
누가 뭐래도 정정당당히 아끼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매번 도박 비슷한 것에 손을 대는 나는 큰 돈을 벌어대고, 재승 자신은 다람쥐 쳇바퀴만 도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주식이 폭락하고,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진다는 뉴스가 매번 그렇게 기뻤다고.
무리해서 집을 사길래 '이번에야말로 망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고 여자친구랑 헤어지지까지 하길래 기뻤지만….
"기뻤다고? 야, 너무한거 아냐?"
"그냥 내 기분이 그랬다고.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잖아. 그리고 너무한걸로 따지면 지금 니가 나한테 따질 상황이야?"
"너는 뭔…"
어쨌거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집이 두 배가 되어버리고, 이제 결국 영원히 집을 사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후련해질 정도였다고.
"사실 어차피 집값이 오르지 않았어도 내 주제에 집을 산다는건 무리야. 지금도 월급 260에 80은 집에 생활비로 보낸다고. 차라리 좋은 변명이지. 근데 너는 벌써 10억 부자가 됐네"
그런 말을 하는 재승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 때문에 전재산이 날아가고, 빚쟁이들한테 엄마가 시달리고 하면서 매일 소원은 딱 하나였어. 평범하게 사는거. 아버지랑 다르게 절대로 나는 도박에는 평생 손도 안 댈테니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거든. 당연히 나도 니가 부러웠지. 근데 무섭더라고. 아버지 핏줄 물려받은 내가 도박에 손다면 똑같이 되면 어쩌나 하고. 불쌍한 우리 엄마는 어쩌냐 하고"
나는 딱히 위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곁에서 항상 해왔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는 생각이 달라. 도박? 인생이 도박이지. 꼭 도박장 가서 주사위 던져야 도박이야?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이력서 지원하는 것도 도박이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것도 도박이고, 몇 년 간 지속적으로 부을 수 있을까 어떨까도 모르는데 일단 이자 확인하고 적금통장 만드는 건 도박이 아냐? 리스크가 있고, 리턴이 있으면 그게 다 도박이지"
내 딴에는 꽤 잘 정리해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재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박쟁이새끼답다"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찌질이 새끼가 말이 많다. 야, 유림이 일은 진짜 미안하다"
"됐어 개새끼야. 어차피 얼마 전에는 걔가 돈 빌려달라고 하더라. 빌려줄 돈도 없지만, 빌리는 이유도 가관이더라. 성형하고 싶다던가"
"성형?"
"니랑 잔 것도 아마 그거 기대한걸걸"
"후"
…그녀의 일이 있었지만, 현재 나와 재승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그것도 일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도 여행도 종종 같이 가고 할 정도니까. 솔직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았을 때 그게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만에 유림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사귀었다가 또 한달 만에 헤어진 덕분에 완벽히 마음의 정리가 된 것인지도.
"재승아, 간만에 밥이나 먹을래?"
"좋아. 이따가 우리 동네로 와. 아 올 때 로또 사와라"
…이제 더이상 녀석은 도박을 혐오하지 않는다. 언젠가 깨달았단다. 도박쟁이를 친구랍시고 곁에 두고도 아무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게 도박이었다고. 평생 도박 안 하겠다는 맹세는 스스로 깬 것이니까 벌 받은 거라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