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얘들 봐라? 둘이 사귀는거 아냐?"
점심시간 끝나고 둘이 함께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전 상무와 황 차장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우리를 가리킨다.
"왜요? 사귀면 안되요?"
당황해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나와 달리, 소민은 언제나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팔짱까지 낀다.
"잘 어울려요?"
이미 내 심장은 쿵쿵쿵쿵 뛴다. 물론 그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 생각한 나는 "맞아요!" 하고 뒤늦게 너스레를 떨지면, 황 차장은 "하나도 안 어울린다 야. 소민이가 너무 아까워" 하며 낄낄댄다.
"내가 아깝죠!"
어색하게 한 마디 보태지만 이미 둘은 "좋을 때다", "저거저거 이미 지 혼자 짝사랑하고 있네 뭐" 하면서 뒤로 돌아선다. 소민은 "뭐야, 얼굴 왜 빨개졌어. 설렌거야?" 하며 미소 짓는다. 너무 예쁘다. 당연히, 설랬다. 훅하고 콧가를 스치는 소민의 화장품 냄새. 사귀고 싶다. 얘랑 사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레긴 무슨. 야, 속 올라온다"
하며 얼른 내가 먼저 팔짱을 뺀다. 조금이라도 티 덜나라고.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린다. 웃으며 "얼른 가자"하고 보채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나는 소민을 이미 짝사랑하고 있다. 쟤라고 모를 거 같진 않은데, 고백하기에는….
"기원 대리, 이번 형산쪽 진행 중이던거, 마무리 됐어?"
팀장님의 말에 반쯤 졸고 있던 기원 대리는 흠칫 놀라더니 "어어어, 네, 거의 됐습니다. 3시까지 드리겠습니다" 하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한다. 팀장은 마뜩찮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소민에게 묻는다.
"소민씨, 세라 대리 오늘 휴가니까 이따가 박 과장이랑 4시에 기획실 회의할 때 같이 들어가요. 분기보고 자료 어제 받아놓은거 8부, 아니 9부 프린트 해서"
"네에, 알겠습니다"
그냥 알겠다는 흔한 대답인데도 발랄한 목소리에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정말 밝은 에너지가 좋다. 박 과장님이 부탁한 기획안 보강자료를 찾던 나는 흘낏 소민쪽 자리를 돌아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것은 소민이 아니라 팀장님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영재씨, 잠깐 회의실로"
뭐지.
"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옆에서 보면서 내심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설마설마 하는 상태였기에 직접 말로 듣는 것은 충격이 컸다.
"어떻게든 같이 가보려고 했는데, 지금 영업쪽도 실적 저조한 사람들 다 계약해지하고, 외부 지사 사무실들 반 이상 정리하고 여기도 총무팀 이번 달에만 3명 자른거 알지? 있는 사람도 자르는 판에 우리 팀만 인력을 계속 충원하는게 어려운 상황이야"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해줬는데, 정직원 전환은 어려울 것 같애. 보니까 다음 달 9일까지지 아마? 그때까지 수고 부탁하고, 으흠, 영재씨는 실력 좋으니까 잘 할거야. 여튼 그럼."
팀장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회의실에 조금 더 오래 앉아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긁다가 빈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난 달에 에이전시에서 오라고 할 때 거기라도 갈 거 그랬나. 괜히 플렉스니 뭐니 하면서 회사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치보여서 청구 안 했던 야근 택시비 같은거 다 청구해버릴걸.
"후우"
설마설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려니 했다. 본사는 다르다며. 소민이만 해도 당장 지지난 달에 정직원 전환됐는데 왜 나만. 지금까지 90% 이상은 그냥 기본으로 전환해줬다며. 내가 뭘 그렇게 못했지? 다들 나는 100% 정직원 전환될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왜 나만. 아니, 이럴 줄 알았다. 언제는 안 그랬나. 매번 꼭 다들 잘되는거 나할 때 되면 제대로 안되고 망하는게 어디 이번 뿐이던가. 내 모든 삶이 그랬지 뭐.
"아 시발"
그나마도 혹시 누군가 들을까 싶어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계약직 나부랭이 따위가 헛된 꿈을 꾼게 잘못이지. 내 주제에 무슨. 정규직 전환되면 소민이한테 고백할까 했던 불과 1시간 남짓 전의 내가 너무 기가 막혔다. 존나 웃겨. 병신.
"아흐"
어쨌든 박 과장님 돌아오기 전에 자료 준비해놔야지. 뭐 다 하기 싫어졌지만.
"영재"
씁쓸한 마음을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소민이 들어왔다. 히죽 밝은 얼굴이, 내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된다.
"표정이 왜 그래? 팀장님한테 혼난거야?"
하지만 그 말 직후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지 "설마, 전환 안 된거야?" 하고 묻는다. 눈치 드럽게 둔한 애가 이럴 때는 또 귀신 같다.
"어"
"뭐?"
마치 본인이 당하기라도 한 양 더 확 표정이 변한다. 이렇게 화를 대신 내주는 모습에, 솔직히 울컥하는 마음이 살짝 들 정도로 고맙다.
"회사 사정이 안 좋은데, 나까지 같이 가긴 힘들거 같대"
"같이 가긴 어딜 같이 가. 자기가 뭐 쇼미더힙합이야?"
여기서 쇼미더힙합이 왜 나오냐고 웃으며 한 마디 대꾸 붙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지금 너무 무거웠다.
"여튼 나 준비해야 돼. 박 과장님 오기 전에 자료준비"
"영재"
"미안해"
사실 내가 말하고도 뭐가 미안하다는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히 눈물이 터졌다. 정작 팀장님한테 통보 받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얼른 눈물을 감추려 사무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응, 알았어. 아 뭐 회사가 여기 밖에 없나? 아 됐어. 또 다른 더 좋은데 가면 되는거지. 그래, 엄마는 엄마 몸이나 잘 챙겨. 요즘 수치는 어떻게 나와. 잘 체크하고. 어어. 알았어. 나 바뻐. 어어"
옥상에 와서 눈물이나 좀 닦고 한숨 돌리는데 마침 또 엄마의 카톡. 그냥 다 말했다. 전환 안 됐다고. 전화기 너머로 속상해하는 엄마의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지만 그냥 됐다고 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거의 확정적이라느니, 내가 누군데 어쩌고 하며 괜한 말들을 미리 했던 것들이 후회스럽다. 얼른 화장실 가서 세수 한판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업무에 집중한다.
"자료 준비 다 됐습니다"
박 과장님한테 자료를 메신저로 보내고 말로 확인한다.
"어어 고마워"
언제나 일과 피로와 육아에 찌들어 있는 불쌍한 박 과장님. 물론 진짜 불쌍한건 나지만. 내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다들 내 눈치를 말은 안 해도 살피는게 느껴진다. 언제나의 자료조사 같은 일도 오늘따라 누가 뭐 시키지도 않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냥 하던대로 이번 주 성과보고 로우 데이터 취합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뭐라도 일을 해야 시간이 갈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마음이 뭐 같아서 그냥 6시 3분이 되자 컴퓨터를 껐다. 피곤하다.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날씨 좀 풀렸나 했더니 퇴근시간 되니 또 쌀쌀하다. 걷어 올린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잠궜다. 답답하다. 집에 가면 이력서부터 업데이트 해야되나. 문득 지난 주에 술자리에서 원호한테 사회생활이 어쩌고 하면서 잘 나가는 척 한게 갑자기 생각났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 앞이 다 아찔했다.
"영재"
뒤에서 누가 부른다. 소민이다. 사실 가방 쌀 때 이미 소민이 "이따가…" 하며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내가 먼저 "나 먼저 들어갈게" 하고 말을 끊었더랬지. 그렇게 휘적휘적 나왔지만 그래, 솔직한 마음으로는 한번 더 붙잡아주길 바랬었다.
"영재!"
"어"
저 개구리 같은 얼굴이 또 히죽 웃으며 다가온다. 울적한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어쩜 이리도 해맑을 수 있나 싶은 개구지고 예쁘장한 얼굴이다.
"야, 술 한잔 하자고 할랬더니 그렇게 가버리는게 어딨냐"
"술은 뭔 술이야. 지금 술 마시면 나 취할 거 같애"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징징 짜려고?"
"짜긴 무슨"
"됐고, 한 잔 해"
고마웠다. 너무 좋았다.
"좀따 기원대리님도 올거야"
이건 좀 싫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원 대리라니.
"아니 뭐 솔직히 회사 분위기도 분위기니까 할 말은 없는데, 근데 그게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잖아. 원래 내가 전환 힘들거면 미리 좀 말해줬으면 좀 좋아? 두세 달 전에만 말해줬어도 내가 준비라도 할거 아냐. 근데 이거 뭐야. 그냥 한달 일하고 나가라? 그게 진짜 배신감 들고 힘들어"
겨우 생맥주 500도 아니고 330 하나 마셨는데 약간 알딸딸하다. 역시 기분 안 좋은 날 마시는 술이라 그런건가. 아까는 추운거 같더니만 또 술을 한잔 먹어서 그런지 좋다. 호프집 테라스에서 이렇게 소민이랑 둘이 술 마시니까 그건 좋았다. 시원하고.
"그래 맞어. 너 지난 달에도 막 야근하고 차 끊겨서 택시타고 집에 가고 그랬잖아. 그렇게 막 부려먹구!"
맞장구 쳐주는 소민이가 이쁘다. 목소리가 높아 옆에서 흘낏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남자 셋이 마시는 테이블. 저 맞은 편의 남자 넷 앉은 테이블. 다들 한번 보고 또 한번 쳐다본다. 이쁘장한 애가 취한 듯 소리치는게 귀여웠겠지. 아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건가.
"한잔 더 마실래?"
"어. 오늘 완전 죽자! 씨!"
"죽긴 무슨. 야, 이제 한 잔 마셨어. 오바하지마"
내 한 마디에 또 소민은 빵 터져서 "아 그러네?" 하며 실실 웃는다. 아 귀엽다. 새하얀 피부에 웃는 표정이 귀여운 소민이.
"어후, 미안미안. 내가 늦었네"
그때 기원 대리님이 왔다. 일은 드럽게 못하지만-솔직히 나보다 못하는 거 같다- 외모 하나는 호감형이고 몸매 딱 각 잡힌.
"아 목말라. 어? 이미 한잔씩들 마셨네? 나도 그럼 같이 시작해"
"좋아요! 오늘 기원 대리님이 술 값 팍팍 다 쏘는거?"
"오케이"
맞은 편의 소민 옆자리에 앉은 기원. 그는 곧바로 맥주 세 잔을 추가로 시켰고, 치킨 한 마리를 또 시켰다. 소민의 말에 얼떨결에 술값 다 부담하게 생겼지만, 그런 것 따위 그에게 전혀 상관없겠지. 스패로우 스포츠카에 집에는 세컨카로 BMG MINE까지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카푸어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비록 15평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자기 집까지 있는 사람이다. 부동산 폭등하기 전에 영끌해서 산 집이 대박 난 케이스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집 자체가 원래 좀 사는 사람 같다. 나랑은 불과 3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나와는 모든 조건이 차이가 난다. 당장 회사만 해도 공채 출신에 정규직이니까.
"얘기 들었어. 참, 타이밍이 안 좋았네"
몇 잔 더 들어가고, 뒤늦게 피처를 시키며 그마저도 반 이상 비웠을 무렵 기원 대리가 말했다.
"신사업이라는게 말이 쉽지 우리 회사처럼 보수적인 분들 위에 계시면 정작 제대로 된 신사업은 하기 어렵지. 했다가 잘 안되면 누가 책임질건데. 그러다보니 안전한 먹거리 찾는거고 그러면 또 뻔한 일 뻔한 기획 해서 하는데 그게 어디 우리 회장님 눈에 들겠냐고. 뻔한 소리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흘낏 주변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다른 테이블에 회사 사람 있나 눈치 보는 기원 대리의 모습에 작게 실소가 나오지만 저게 직장인의 기본적인 자세겠지.
"어쨌거나 그러면서 시간 지금 벌써 신사업 찾겠다고 허송세월한게 거의 2년 다 되어가잖아. 회사는 기울어 가는데 시간만 날리니 비전은 없어지고, 능력 좋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른 곳 나가고 그러면서 악순환이 서서히 완성되는거야. 그나마 요즘 시국이니까 다들 뭉개고 있는거지. 어차피 경기 조금만 풀리면 제 발로 나갈 사람 그렇잖아도 많을걸"
그래, 어차피 비전 없어 보이긴 했지. 그런 말에 막막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도 하지만 어쨌든 당장 다음 직장이 캄캄한 입장에서 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말만 그렇지, 어치피 이 회사가 당장 망할 회사도 아니고.
"근데 그럼 언제까지야?"
"다음 달 9일까지요"
"얼마 안 남았네"
당연히 걱정해주는 말인데, 그냥 별로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야, 진짜 너무 한다. 차가 비명을 지르겠네. 이번 주말에 당장 정비소 가야 돼"
소민이 중고차 사고 2년 반 됐는데 아직 엔진오일 한번도 안 갈았다는 말에 기겁을 하며 기원 대리님이 손사레를 친다.
"그래요? 내 차 잘 나가는데?"
소민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갸우뚱하지만, 그 말에 나도 기원대리님도 모두 코로 실소를 내뿜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차량 관리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소민의 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 표정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치? 너도 내 차 타봤잖아"
소민은 몇 번인가 나를 퇴근길에 태워줬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지난 달에 같이 한강공원에도 갔었고.
"어, 잘 나가긴 하더라. 생각보다 소민이 운전 잘하더라구요. 올림픽대로에서 막히는데도 막 쑥쑥 잘 끼어들고"
내 맞장구에 ,그러나 기원은 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거야? 둘 다 집 방향 그 쪽이 아니잖아. 올림픽대로에 둘이 차 타고 갈 일이 뭐가 있어. 응? 이상한데?"
역시 운전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쓸데없이 예리하다. 어쩌면 견제구인지도.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잠깐 망설일 때 소민이 바로 말했다.
"지난 달에 주말에 한강공원 갔어요. 바람 쐬러. 내가 밥두 사구. 나 TF 소속됐을 때 너무 힘들었을 때 영재가 진짜 많이 도와줬거든요. 아니었으면 나 그때 관뒀을지도 몰라서"
그러자 기원 대리님이 "올" 하면서 나를 흘낏 쳐다본다. 그러더니 물었다.
"영재씨는 차 뭐 몬다고 했지?"
일부러 물어본 것일까.
"장농면허에요"
"아, 뭐 그럼 연수 받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소민씨도 차도 있는데"
나는 웃으며 물었다.
"소민이 차 있는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뭐, 내가 딱 보니 조만간 소민씨 차가 영재씨 차 되겠구만"
"아 대리니임! 아저씨들이랑 맨날 놀더니 대리님도 아저씨 같은 소리해!"
소민이 기원 대리님 팔뚝을 때린다. 나도 팔뚝 맞고 싶다. 기원 대리는 그게 재밌던지 더 놀리기 시작한다.
"아니 둘이 뭐, 한강공원 데이트하고 뭐 맨날, 어? 아 부럽다. 나도 연애해야 되는데 아. 소민씨 주변에 솔로인 언니들 없어? 나도 영재씨랑 소민씨처럼 연애하고 싶어. 나도 연애 시켜줭"
"아 대리님 뭔 소리에요"
괜히 나랑 이어주는게 민망하면서도 실실 웃음이 나오던 차에, 소민이 뾰루퉁해진 척 말했다.
"아 맨날 왜 우리 둘이 엮어요. 그냥 친구에요 친구. 동갑이잖아요. 거의 입사동기구. 그니까 친하죠. 왜 맨날 몰아가요. 회사 아저씨들만 그러더니 이제는 대리님까지 그러네. 넘 싫어. 야, 영재. 말해봐봐"
소민이 삐친 척, 기원대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징징대는 모습에 방금 전까지 내 귀에 걸렸던 미소가 빠르게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입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기원 대리 앞에서만큼은 나랑 엮이기 싫다는 건가. 그런건가. 혼가 김칫국 오지게 퍼마셨던건가.
"아 그럼. 아 나 쟤 싫어요. 싫어. 내가 그래서 나가는거에요 진짜"
서늘해지는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해가며 잔을 비웠다. 대충 안주도 거의 다 먹었고, 다들 내일 출근할 사람들이니까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아우 피곤하다. 우리 슬슬 가요"
조금 서운한 티가 났을라나.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이제는 어차피 소민도 오르지 못할 나무다. 대기업 계열사 출신의,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업계 중견기업의 곧 3년 되어가는 2년차 정규직 사원과 백수인 내가 가당키나 하는 사인가. 게다가 그런거 떠나서 와꾸만 봐도 어디 어울릴 사람인가.
하긴.
차라리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은 둘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래, 소민이 쟤도 뭐, 딱 저런 대리님이랑 어울리는 나이지. 정말로.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술자리가 정말 괜한 시간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잘걸.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무리 맥주라지만 꽤 마셨음에도 별로 취하진 않았다. 아니 술기운은 도는데 머리는 말짱하다. 전철에 앉아서 멍하니 혼자 깊은 생각을 한다.
앞으로의 미래 생각, 엄마의 한숨, 카드값, 퇴직금의 사용처, 그리고 소민.
사실 한강공원에서 고백을 할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굳이굳이 우리 집까지 태워주겠다던 소민의 행동도 왠지 빨리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런 것도 같고. 근데 그때도 만약 정규직 전환 안 되면 꼴이 우스워 질 것 같아서 마지막에 꿀꺽 고백을 삼켰다. 집에 가서도 정말 많이 후회했고, 그 날 이후로 사실 따로 둘이 주말에 본 적은 없었다.
'연애도 다 타이밍이라던데'
그래도 여전히 회사에서는 가장 말이 잘 통하고, 지금도 실없는 소리지만 메신저로는 맨날 낄낄대니까 정규직 전환만 되면 뭐 그때 가서 진짜 나도 차도 뽑고, 아니 연수부터 받고 뭐 고백도 할라고 했는데.
"답 없네"
혼자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확률이 얼마나 올라갈까. 뭐 솔직히 나 말고도 회사에 은근히 소민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몇 명 있는거 안다. 총무팀 재환이도 남자끼리 있는 술자리에서 "소민씨 좀 매력적이지 않아?" 하고 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었고, 원일 과장님도 내가 알기로 "요즘에는 소민씨처럼 발랄한 타입이 인기 많지 않아? 막 너무 튕기고 그런 타입보다 털털하면서도 애교 많고 귀염귀염하잖아. 아 그럼. 나야 유부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싱글이면 바로 데이트 신청했지" 하면서 대충 막연하게 다들 생각하는 부분을 짚기도 했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그 중에서 제일 신경쓰이는건 역시 같은 팀의 기원 대리님. 아니 무슨 님씩이나. 어차피 이제 곧 다 남인데.
"흐"
이제 곧 내릴 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집 있고 차 좋고 다정다감하면서 약간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으면서도 뭐든 스무스하게 잘 웃어 넘기는 그런 멍청한 듯 약아빠진 타입. 반대로 여직원들 많은 술자리에서도 퇴사한 혜경씨랑 아름씨랑 은근 기싸움까지 하면서 서로 호감을 표시한 거 본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에게 비호감인 타입 뭐 그런건 아니리라. 일단 허우대도 175에 슬림하니까. 정장 입으면 나름 태도 나고. 내년이면 과장 승진 대상이고. 그럼 연봉이 얼마냐.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자 부럽고 배가 아팠다. 아까 술자리 도중에 인스타 계정까지 팔로우 맺던데. 이제 곧 둘이 친해지겠네. 나 같은 백수야 퇴사하면 금방 잊혀질테고. 눈을 감았다. 이력서 몇 장을 더 지원하면 이직이 될까. 좆같구만.
"영재씨, 내가 이런 말할 입장도 솔직히 아니고, 영재씨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게 유종의 미라는건 중요한거잖아. 관둘 때 관두더라도 마지막에 조금은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 나야 뭐 이해하지만 다른 팀 사람이나 보면 좀 마지막 이미지가 안 좋게 비쳐지는 것도 좀 아니잖아"
마지막 3주 동안,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버젓히 잡람인, 잡커리어 같은 사이트를 펴놓고 일자리 찾기도 했고, 4일 연속 지각을 하는가 하면 퇴근은 59분만 되면 엑셀부터 껐다. 업무요청을 해와도 설렁설렁. 결국 참다참다 박 과장님이 좋게좋게 이렇게 한 소리를 했지만 솔직히 그마저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주의하겠습니다"
성의없는 대답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유종의 미? 마지막 이미지? 코웃음이 나왔다. 박 과장님이라고 해서 뭐 개인적인 감정일 리는 없고 아마 팀장님 대신에 좋게 말해준거 아니면 정말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냥 남은 시간 최대한 시간이나 때우다가 관두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날의 술자리 이후로 소민에게도 철벽을 쳤다. 소민이 몇 번인가 "기분…안 좋은건 알겠지만, 그거 말구 혹시 뭐 내가 실수한거 있어?" 하고,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지만 솔직히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직장 동료, 그나마도 곧 관둘 회사의 동료라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쉽게 내 마음의 문이 닫혔다.
창원 주임이나 성은씨 등 다른 루트를 통해서 "요즘 많이 힘들어?", "소민씨랑 뭐 싸운거?" 하는 식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다 귀찮았다. 부질없고 한심한 이야기들. 퇴사 마지막 주, 팀장님이 그래도 회식 겸 인사 겸 해서 술자리 한번 마련한다고 했지만 난 그마저도 거절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 날 술자리에서도 좋은 얼굴로 끝까지 앉아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거절했다. 팀장님도 그날 처음으로 "영재씨, 나도 솔직히 이런 이야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다 힘들어지는거잖아" 하고 넌지시 한소리 했지만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죄송합니다"가 다 였다. 담담했다. 솔직히 멋지게 퇴사하고 싶어서 그 몇 주 사이에 입사지원만 13군데를 했지만 면접 제의조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그렇구만"
그리고 그건 내 현실을 그 무엇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었고 앞으로 다가올, 퇴사 이후 퇴직금 까먹고 실업급여 몇 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생활 지나가면 얼마나 암울해질까에 대한 실감나는 공포였다. 요즘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인지 자꾸 다리에 쥐가 난다는 엄마가 발가락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야, 홍영재"
그리고 퇴사 전날, 일을 마치고 오늘도 모두의 동정인지 짜증인지 실망인지 모를 묘한 시선을 느끼며 칼퇴를 한 후,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는 나를 뒤에서 소민이 불렀다. 담담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돌아본 소민은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뭐야.
"뭐야, 슬리퍼 신고 나오면 어떻게 해"
"지금 그게 중요해?"
화가 난 건지 어떤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가온 소민은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니가 퇴사하면 하는거지, 왜 그러는건데 도대체. 기분 안 좋은거? 그래, 그건 이해해. 근데 왜 나한테까지 그러는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하기라도 한거야?"
처음으로 내가 당황스러웠다.
"뭐가"
소민은 "하 참" 하면서 한 손을 허리에 얹는다.
"너, 요즘 나한테 인사도 안 하잖아. 하루에 말 한 마디 안 하잖아. 그냥 업무적으로 말해야지만 어, 어, 어. 그게 다잖아. 왜 그래?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왜 그러는건데. 회사 관두는거 힘든거? 그래, 알어. 아니 안다고 말 안 할게.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랑 나랑은 친구 아냐? 힘들 때 서로 돕고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너 힘들 때 갑자기 이렇게 나 막 모르는 사람인 척 하면, 나는? 너는 나 도왔는데 나는"
그랬나. 그래도 쉽사리 공감이 가진 않는다. 지금의 나는 열등감 덩어리니까.
"소민아, 일단 진정하고…"
정문 쪽을 쳐다보자, 우리 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팀 사람들까지 몇 명 나와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구경 난거야 뭐야.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나가자마자 소민이 씩씩대며 슬리퍼만 신은 채 후다닥 뛰어나왔고, 그거 보고 다들 뭐야뭐야 하면서 따라 나온 거구만. 찐한 스캔들 또 돌겠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들 멋쩍은 얼굴로 히히덕 거리며 들어간다.
"소민아. 일단 저기서 이야기 하자"
아직도 정문 쪽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덤불에 가려지는 옆 벤치쪽으로 소민을 인도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대로 말 안 하고 조용히 퇴사하려고 했던, 정말로 정말로 소민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은 더 분위기 있고 그럴싸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도 안다. 인생이라는건 항상 뭔 일을 하던 그렇게 머릿 속에 그린 것처럼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타이밍에 할 수 있는건 아니라는걸.
"나 너 좋아해. 직장동료로서가 아니라, 여사친… 여자친구로서. 솔직히 한강 갔을 때도 고백하고 싶었구. 근데 니가 입사 초에 사내커플은 죽어도 안 한다고 한 적도 있었고…"
"내가 언제"
"너 그랬었어. 여튼 그랬고, 그런데 그래도 최소한 앞날이 불투명한데 고백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지금처럼 결국 전환 안 되니까 힘이 다 빠지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접은…접을라고 한거야"
접은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또 그 와중에 접으려고 한 거라며 한번 더 여지를 둔다. 속 뻔히 들여다 보이게. 그리고 다음은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여기까지 다 말해야 내 마음을 소민이가 이해하겠지 하는 마음에 그냥 120% 다 말했다.
"그리고 디게 찌질한 이야기지만, 그 날 그 같이 술 마신 날에 너랑 기원 대리님이랑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데 둘이 잘 어울려 보이더라. 그럴싸한 직장에 환경에, 뭐. 근데 나는 이제 곧 백수고, 그러니까 디게 멀게 느껴지더라고. 나 혼자 짝사랑하는게 등신 같고, 가망 없는 일에 혼자 마음 주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와중에 칼퇴근 하는 다른 팀원 분들 몇 분을 뻘쭘하게 마주하며 인사했다. CS팀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나와 소민을 쳐다보며 묘한 눈으로 인사하더니 또 까르르 까르르 대며 저기 역쪽으로 걸어간다.
"너 발 시렵겠다. 어쨌든 오늘도 그렇지만 그런데 막 너랑 친근하게 구는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좀 그래보일거 같고 너도 직장생활 하는데 내가 괜히 좀 그런거 같고 그래서 그랬어. 사실 이 이야기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해버리게 됐네"
속이 조금 시원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민이 나랑 사귀어 주길 바라게도 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나의 고단하고 찌질한 연애에 이 매력적이고 착한 애가 끼어들게 바라는 나의 이기심에 화까지 조금 났고.
진심으로 소원했다. 소민이가 그냥 이렇게 "알었어. 뭣 땜에 그랬는지 알겠어. 그렇다고 내가 너랑 사귈 수는 없지. 알았으니까 잘 가" 하고 그렇게 다시 들어가길.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찌질하게 좀 울고 나면 나도 후련해질테니까. 그리고 또 소원했다. 부디부디 1%의 확률이지만 나랑 만나주길.
"홍영재"
"어?"
"내 얼굴을 보고 말해"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소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의 장난끼 많은 얼굴.
"기원 대리님은 내가 소개팅 내가 알아봐주기로 했고, 내가 그리고 기원 대리님이랑 왜 사귀냐? 그리고 넌 날 좋아하면 뭐 남자답게 고백하고 차이던가, 꼭 그렇게까지 혼자 찌질하게 그랬어야 돼?"
"찌질하긴 뭐가 찌질해"
소민은 팔꿈치로 내 팔뚝을 쿡 찔렀다.
"야, 회사 다른 팀 사람도 니가 나 좋아하는거 다 아는데 나만 모르겠냐?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무슨"
"이 누나가 이 찌질이랑 사귀어 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니까 내가 한번 봐준다"
"뭘"
소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야, 회사 사람 다 봤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뭐가 되냐? 내가 고백하고 차인 줄 알거 아냐"
"어?"
"만약에 지금도 고백 안 했으면 진짜로 그래 꺼져, 하고 쌍욕하고 바로 연락처 다 차단할라고 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뒤늦게라도 말하니까 내가 용서한다. 빨리 제대로 고백해"
"무슨 고백"
"나 좋아한담서"
흐.
"어. 소민아 좋아해. 사귀자"
무미건조한 내 말 톤에 소민은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투로 주먹을 쥐었다.
"아 진짜 아 너무 짜증난다. 이게 뭐야 쪽팔리구 멋도 없고. 너 진짜 나한테 잘해라. 어?"
"참나"
"그리고 백수 남친 만날 수는 없으니까 오늘부터 이력서 100장씩 써. 알겠어?"
"어. 이미 쓰고 있어"
"더 써"
"알았어"
"너 내 혼사길 막았으니까 진짜 잘해라. 멋있는 회사 이직 못하면 너 죽인다"
"어"
그래. 사실 너무 좋았다. 내 주제에 이렇게 이쁜 애랑 연애를 하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고 찌질하게 연애하게 된 것 같긴 하지만…막차에 올라타는건 다들 그런거지. 안 그런가.
"여튼 발 시렵겠다. 얼른 들어가서 짐 싸서 나와. 기다릴께"
내 말에 소민은 "아 안에 어떻게 들어가지. 내일은 또 어쩌지. 나도 회사 그냥 관둘까" 하며 갑자기 발을 동동 굴렀다.
"둘 다 백수면 어떻게 해. 빨리 들어가"
"아 씨. 알았어. 기달려"
소민은 저쪽으로 가다가 "잘해라" 하고 한번 더 경고하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소민이 말대로 잘하는 수 밖에 없다. 잘하자.
< 끝 >
tag : 연애소설, 연애
점심시간 끝나고 둘이 함께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전 상무와 황 차장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우리를 가리킨다.
"왜요? 사귀면 안되요?"
당황해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나와 달리, 소민은 언제나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팔짱까지 낀다.
"잘 어울려요?"
이미 내 심장은 쿵쿵쿵쿵 뛴다. 물론 그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 생각한 나는 "맞아요!" 하고 뒤늦게 너스레를 떨지면, 황 차장은 "하나도 안 어울린다 야. 소민이가 너무 아까워" 하며 낄낄댄다.
"내가 아깝죠!"
어색하게 한 마디 보태지만 이미 둘은 "좋을 때다", "저거저거 이미 지 혼자 짝사랑하고 있네 뭐" 하면서 뒤로 돌아선다. 소민은 "뭐야, 얼굴 왜 빨개졌어. 설렌거야?" 하며 미소 짓는다. 너무 예쁘다. 당연히, 설랬다. 훅하고 콧가를 스치는 소민의 화장품 냄새. 사귀고 싶다. 얘랑 사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레긴 무슨. 야, 속 올라온다"
하며 얼른 내가 먼저 팔짱을 뺀다. 조금이라도 티 덜나라고.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린다. 웃으며 "얼른 가자"하고 보채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나는 소민을 이미 짝사랑하고 있다. 쟤라고 모를 거 같진 않은데, 고백하기에는….
차이
"기원 대리, 이번 형산쪽 진행 중이던거, 마무리 됐어?"
팀장님의 말에 반쯤 졸고 있던 기원 대리는 흠칫 놀라더니 "어어어, 네, 거의 됐습니다. 3시까지 드리겠습니다" 하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한다. 팀장은 마뜩찮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소민에게 묻는다.
"소민씨, 세라 대리 오늘 휴가니까 이따가 박 과장이랑 4시에 기획실 회의할 때 같이 들어가요. 분기보고 자료 어제 받아놓은거 8부, 아니 9부 프린트 해서"
"네에, 알겠습니다"
그냥 알겠다는 흔한 대답인데도 발랄한 목소리에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정말 밝은 에너지가 좋다. 박 과장님이 부탁한 기획안 보강자료를 찾던 나는 흘낏 소민쪽 자리를 돌아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것은 소민이 아니라 팀장님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영재씨, 잠깐 회의실로"
뭐지.
"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옆에서 보면서 내심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설마설마 하는 상태였기에 직접 말로 듣는 것은 충격이 컸다.
"어떻게든 같이 가보려고 했는데, 지금 영업쪽도 실적 저조한 사람들 다 계약해지하고, 외부 지사 사무실들 반 이상 정리하고 여기도 총무팀 이번 달에만 3명 자른거 알지? 있는 사람도 자르는 판에 우리 팀만 인력을 계속 충원하는게 어려운 상황이야"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해줬는데, 정직원 전환은 어려울 것 같애. 보니까 다음 달 9일까지지 아마? 그때까지 수고 부탁하고, 으흠, 영재씨는 실력 좋으니까 잘 할거야. 여튼 그럼."
팀장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회의실에 조금 더 오래 앉아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긁다가 빈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난 달에 에이전시에서 오라고 할 때 거기라도 갈 거 그랬나. 괜히 플렉스니 뭐니 하면서 회사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치보여서 청구 안 했던 야근 택시비 같은거 다 청구해버릴걸.
"후우"
설마설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려니 했다. 본사는 다르다며. 소민이만 해도 당장 지지난 달에 정직원 전환됐는데 왜 나만. 지금까지 90% 이상은 그냥 기본으로 전환해줬다며. 내가 뭘 그렇게 못했지? 다들 나는 100% 정직원 전환될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왜 나만. 아니, 이럴 줄 알았다. 언제는 안 그랬나. 매번 꼭 다들 잘되는거 나할 때 되면 제대로 안되고 망하는게 어디 이번 뿐이던가. 내 모든 삶이 그랬지 뭐.
"아 시발"
그나마도 혹시 누군가 들을까 싶어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계약직 나부랭이 따위가 헛된 꿈을 꾼게 잘못이지. 내 주제에 무슨. 정규직 전환되면 소민이한테 고백할까 했던 불과 1시간 남짓 전의 내가 너무 기가 막혔다. 존나 웃겨. 병신.
"아흐"
어쨌든 박 과장님 돌아오기 전에 자료 준비해놔야지. 뭐 다 하기 싫어졌지만.
"영재"
씁쓸한 마음을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소민이 들어왔다. 히죽 밝은 얼굴이, 내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된다.
"표정이 왜 그래? 팀장님한테 혼난거야?"
하지만 그 말 직후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지 "설마, 전환 안 된거야?" 하고 묻는다. 눈치 드럽게 둔한 애가 이럴 때는 또 귀신 같다.
"어"
"뭐?"
마치 본인이 당하기라도 한 양 더 확 표정이 변한다. 이렇게 화를 대신 내주는 모습에, 솔직히 울컥하는 마음이 살짝 들 정도로 고맙다.
"회사 사정이 안 좋은데, 나까지 같이 가긴 힘들거 같대"
"같이 가긴 어딜 같이 가. 자기가 뭐 쇼미더힙합이야?"
여기서 쇼미더힙합이 왜 나오냐고 웃으며 한 마디 대꾸 붙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지금 너무 무거웠다.
"여튼 나 준비해야 돼. 박 과장님 오기 전에 자료준비"
"영재"
"미안해"
사실 내가 말하고도 뭐가 미안하다는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히 눈물이 터졌다. 정작 팀장님한테 통보 받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얼른 눈물을 감추려 사무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응, 알았어. 아 뭐 회사가 여기 밖에 없나? 아 됐어. 또 다른 더 좋은데 가면 되는거지. 그래, 엄마는 엄마 몸이나 잘 챙겨. 요즘 수치는 어떻게 나와. 잘 체크하고. 어어. 알았어. 나 바뻐. 어어"
옥상에 와서 눈물이나 좀 닦고 한숨 돌리는데 마침 또 엄마의 카톡. 그냥 다 말했다. 전환 안 됐다고. 전화기 너머로 속상해하는 엄마의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지만 그냥 됐다고 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거의 확정적이라느니, 내가 누군데 어쩌고 하며 괜한 말들을 미리 했던 것들이 후회스럽다. 얼른 화장실 가서 세수 한판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업무에 집중한다.
"자료 준비 다 됐습니다"
박 과장님한테 자료를 메신저로 보내고 말로 확인한다.
"어어 고마워"
언제나 일과 피로와 육아에 찌들어 있는 불쌍한 박 과장님. 물론 진짜 불쌍한건 나지만. 내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다들 내 눈치를 말은 안 해도 살피는게 느껴진다. 언제나의 자료조사 같은 일도 오늘따라 누가 뭐 시키지도 않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냥 하던대로 이번 주 성과보고 로우 데이터 취합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뭐라도 일을 해야 시간이 갈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마음이 뭐 같아서 그냥 6시 3분이 되자 컴퓨터를 껐다. 피곤하다.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날씨 좀 풀렸나 했더니 퇴근시간 되니 또 쌀쌀하다. 걷어 올린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잠궜다. 답답하다. 집에 가면 이력서부터 업데이트 해야되나. 문득 지난 주에 술자리에서 원호한테 사회생활이 어쩌고 하면서 잘 나가는 척 한게 갑자기 생각났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 앞이 다 아찔했다.
"영재"
뒤에서 누가 부른다. 소민이다. 사실 가방 쌀 때 이미 소민이 "이따가…" 하며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내가 먼저 "나 먼저 들어갈게" 하고 말을 끊었더랬지. 그렇게 휘적휘적 나왔지만 그래, 솔직한 마음으로는 한번 더 붙잡아주길 바랬었다.
"영재!"
"어"
저 개구리 같은 얼굴이 또 히죽 웃으며 다가온다. 울적한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어쩜 이리도 해맑을 수 있나 싶은 개구지고 예쁘장한 얼굴이다.
"야, 술 한잔 하자고 할랬더니 그렇게 가버리는게 어딨냐"
"술은 뭔 술이야. 지금 술 마시면 나 취할 거 같애"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징징 짜려고?"
"짜긴 무슨"
"됐고, 한 잔 해"
고마웠다. 너무 좋았다.
"좀따 기원대리님도 올거야"
이건 좀 싫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원 대리라니.
"아니 뭐 솔직히 회사 분위기도 분위기니까 할 말은 없는데, 근데 그게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잖아. 원래 내가 전환 힘들거면 미리 좀 말해줬으면 좀 좋아? 두세 달 전에만 말해줬어도 내가 준비라도 할거 아냐. 근데 이거 뭐야. 그냥 한달 일하고 나가라? 그게 진짜 배신감 들고 힘들어"
겨우 생맥주 500도 아니고 330 하나 마셨는데 약간 알딸딸하다. 역시 기분 안 좋은 날 마시는 술이라 그런건가. 아까는 추운거 같더니만 또 술을 한잔 먹어서 그런지 좋다. 호프집 테라스에서 이렇게 소민이랑 둘이 술 마시니까 그건 좋았다. 시원하고.
"그래 맞어. 너 지난 달에도 막 야근하고 차 끊겨서 택시타고 집에 가고 그랬잖아. 그렇게 막 부려먹구!"
맞장구 쳐주는 소민이가 이쁘다. 목소리가 높아 옆에서 흘낏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남자 셋이 마시는 테이블. 저 맞은 편의 남자 넷 앉은 테이블. 다들 한번 보고 또 한번 쳐다본다. 이쁘장한 애가 취한 듯 소리치는게 귀여웠겠지. 아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건가.
"한잔 더 마실래?"
"어. 오늘 완전 죽자! 씨!"
"죽긴 무슨. 야, 이제 한 잔 마셨어. 오바하지마"
내 한 마디에 또 소민은 빵 터져서 "아 그러네?" 하며 실실 웃는다. 아 귀엽다. 새하얀 피부에 웃는 표정이 귀여운 소민이.
"어후, 미안미안. 내가 늦었네"
그때 기원 대리님이 왔다. 일은 드럽게 못하지만-솔직히 나보다 못하는 거 같다- 외모 하나는 호감형이고 몸매 딱 각 잡힌.
"아 목말라. 어? 이미 한잔씩들 마셨네? 나도 그럼 같이 시작해"
"좋아요! 오늘 기원 대리님이 술 값 팍팍 다 쏘는거?"
"오케이"
맞은 편의 소민 옆자리에 앉은 기원. 그는 곧바로 맥주 세 잔을 추가로 시켰고, 치킨 한 마리를 또 시켰다. 소민의 말에 얼떨결에 술값 다 부담하게 생겼지만, 그런 것 따위 그에게 전혀 상관없겠지. 스패로우 스포츠카에 집에는 세컨카로 BMG MINE까지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카푸어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비록 15평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자기 집까지 있는 사람이다. 부동산 폭등하기 전에 영끌해서 산 집이 대박 난 케이스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집 자체가 원래 좀 사는 사람 같다. 나랑은 불과 3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나와는 모든 조건이 차이가 난다. 당장 회사만 해도 공채 출신에 정규직이니까.
"얘기 들었어. 참, 타이밍이 안 좋았네"
몇 잔 더 들어가고, 뒤늦게 피처를 시키며 그마저도 반 이상 비웠을 무렵 기원 대리가 말했다.
"신사업이라는게 말이 쉽지 우리 회사처럼 보수적인 분들 위에 계시면 정작 제대로 된 신사업은 하기 어렵지. 했다가 잘 안되면 누가 책임질건데. 그러다보니 안전한 먹거리 찾는거고 그러면 또 뻔한 일 뻔한 기획 해서 하는데 그게 어디 우리 회장님 눈에 들겠냐고. 뻔한 소리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흘낏 주변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다른 테이블에 회사 사람 있나 눈치 보는 기원 대리의 모습에 작게 실소가 나오지만 저게 직장인의 기본적인 자세겠지.
"어쨌거나 그러면서 시간 지금 벌써 신사업 찾겠다고 허송세월한게 거의 2년 다 되어가잖아. 회사는 기울어 가는데 시간만 날리니 비전은 없어지고, 능력 좋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른 곳 나가고 그러면서 악순환이 서서히 완성되는거야. 그나마 요즘 시국이니까 다들 뭉개고 있는거지. 어차피 경기 조금만 풀리면 제 발로 나갈 사람 그렇잖아도 많을걸"
그래, 어차피 비전 없어 보이긴 했지. 그런 말에 막막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도 하지만 어쨌든 당장 다음 직장이 캄캄한 입장에서 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말만 그렇지, 어치피 이 회사가 당장 망할 회사도 아니고.
"근데 그럼 언제까지야?"
"다음 달 9일까지요"
"얼마 안 남았네"
당연히 걱정해주는 말인데, 그냥 별로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야, 진짜 너무 한다. 차가 비명을 지르겠네. 이번 주말에 당장 정비소 가야 돼"
소민이 중고차 사고 2년 반 됐는데 아직 엔진오일 한번도 안 갈았다는 말에 기겁을 하며 기원 대리님이 손사레를 친다.
"그래요? 내 차 잘 나가는데?"
소민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갸우뚱하지만, 그 말에 나도 기원대리님도 모두 코로 실소를 내뿜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차량 관리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소민의 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 표정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치? 너도 내 차 타봤잖아"
소민은 몇 번인가 나를 퇴근길에 태워줬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지난 달에 같이 한강공원에도 갔었고.
"어, 잘 나가긴 하더라. 생각보다 소민이 운전 잘하더라구요. 올림픽대로에서 막히는데도 막 쑥쑥 잘 끼어들고"
내 맞장구에 ,그러나 기원은 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거야? 둘 다 집 방향 그 쪽이 아니잖아. 올림픽대로에 둘이 차 타고 갈 일이 뭐가 있어. 응? 이상한데?"
역시 운전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쓸데없이 예리하다. 어쩌면 견제구인지도.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잠깐 망설일 때 소민이 바로 말했다.
"지난 달에 주말에 한강공원 갔어요. 바람 쐬러. 내가 밥두 사구. 나 TF 소속됐을 때 너무 힘들었을 때 영재가 진짜 많이 도와줬거든요. 아니었으면 나 그때 관뒀을지도 몰라서"
그러자 기원 대리님이 "올" 하면서 나를 흘낏 쳐다본다. 그러더니 물었다.
"영재씨는 차 뭐 몬다고 했지?"
일부러 물어본 것일까.
"장농면허에요"
"아, 뭐 그럼 연수 받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소민씨도 차도 있는데"
나는 웃으며 물었다.
"소민이 차 있는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뭐, 내가 딱 보니 조만간 소민씨 차가 영재씨 차 되겠구만"
"아 대리니임! 아저씨들이랑 맨날 놀더니 대리님도 아저씨 같은 소리해!"
소민이 기원 대리님 팔뚝을 때린다. 나도 팔뚝 맞고 싶다. 기원 대리는 그게 재밌던지 더 놀리기 시작한다.
"아니 둘이 뭐, 한강공원 데이트하고 뭐 맨날, 어? 아 부럽다. 나도 연애해야 되는데 아. 소민씨 주변에 솔로인 언니들 없어? 나도 영재씨랑 소민씨처럼 연애하고 싶어. 나도 연애 시켜줭"
"아 대리님 뭔 소리에요"
괜히 나랑 이어주는게 민망하면서도 실실 웃음이 나오던 차에, 소민이 뾰루퉁해진 척 말했다.
"아 맨날 왜 우리 둘이 엮어요. 그냥 친구에요 친구. 동갑이잖아요. 거의 입사동기구. 그니까 친하죠. 왜 맨날 몰아가요. 회사 아저씨들만 그러더니 이제는 대리님까지 그러네. 넘 싫어. 야, 영재. 말해봐봐"
소민이 삐친 척, 기원대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징징대는 모습에 방금 전까지 내 귀에 걸렸던 미소가 빠르게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입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기원 대리 앞에서만큼은 나랑 엮이기 싫다는 건가. 그런건가. 혼가 김칫국 오지게 퍼마셨던건가.
"아 그럼. 아 나 쟤 싫어요. 싫어. 내가 그래서 나가는거에요 진짜"
서늘해지는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해가며 잔을 비웠다. 대충 안주도 거의 다 먹었고, 다들 내일 출근할 사람들이니까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아우 피곤하다. 우리 슬슬 가요"
조금 서운한 티가 났을라나.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이제는 어차피 소민도 오르지 못할 나무다. 대기업 계열사 출신의,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업계 중견기업의 곧 3년 되어가는 2년차 정규직 사원과 백수인 내가 가당키나 하는 사인가. 게다가 그런거 떠나서 와꾸만 봐도 어디 어울릴 사람인가.
하긴.
차라리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은 둘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래, 소민이 쟤도 뭐, 딱 저런 대리님이랑 어울리는 나이지. 정말로.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술자리가 정말 괜한 시간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잘걸.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무리 맥주라지만 꽤 마셨음에도 별로 취하진 않았다. 아니 술기운은 도는데 머리는 말짱하다. 전철에 앉아서 멍하니 혼자 깊은 생각을 한다.
앞으로의 미래 생각, 엄마의 한숨, 카드값, 퇴직금의 사용처, 그리고 소민.
사실 한강공원에서 고백을 할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굳이굳이 우리 집까지 태워주겠다던 소민의 행동도 왠지 빨리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런 것도 같고. 근데 그때도 만약 정규직 전환 안 되면 꼴이 우스워 질 것 같아서 마지막에 꿀꺽 고백을 삼켰다. 집에 가서도 정말 많이 후회했고, 그 날 이후로 사실 따로 둘이 주말에 본 적은 없었다.
'연애도 다 타이밍이라던데'
그래도 여전히 회사에서는 가장 말이 잘 통하고, 지금도 실없는 소리지만 메신저로는 맨날 낄낄대니까 정규직 전환만 되면 뭐 그때 가서 진짜 나도 차도 뽑고, 아니 연수부터 받고 뭐 고백도 할라고 했는데.
"답 없네"
혼자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확률이 얼마나 올라갈까. 뭐 솔직히 나 말고도 회사에 은근히 소민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몇 명 있는거 안다. 총무팀 재환이도 남자끼리 있는 술자리에서 "소민씨 좀 매력적이지 않아?" 하고 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었고, 원일 과장님도 내가 알기로 "요즘에는 소민씨처럼 발랄한 타입이 인기 많지 않아? 막 너무 튕기고 그런 타입보다 털털하면서도 애교 많고 귀염귀염하잖아. 아 그럼. 나야 유부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싱글이면 바로 데이트 신청했지" 하면서 대충 막연하게 다들 생각하는 부분을 짚기도 했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그 중에서 제일 신경쓰이는건 역시 같은 팀의 기원 대리님. 아니 무슨 님씩이나. 어차피 이제 곧 다 남인데.
"흐"
이제 곧 내릴 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집 있고 차 좋고 다정다감하면서 약간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으면서도 뭐든 스무스하게 잘 웃어 넘기는 그런 멍청한 듯 약아빠진 타입. 반대로 여직원들 많은 술자리에서도 퇴사한 혜경씨랑 아름씨랑 은근 기싸움까지 하면서 서로 호감을 표시한 거 본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에게 비호감인 타입 뭐 그런건 아니리라. 일단 허우대도 175에 슬림하니까. 정장 입으면 나름 태도 나고. 내년이면 과장 승진 대상이고. 그럼 연봉이 얼마냐.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자 부럽고 배가 아팠다. 아까 술자리 도중에 인스타 계정까지 팔로우 맺던데. 이제 곧 둘이 친해지겠네. 나 같은 백수야 퇴사하면 금방 잊혀질테고. 눈을 감았다. 이력서 몇 장을 더 지원하면 이직이 될까. 좆같구만.
"영재씨, 내가 이런 말할 입장도 솔직히 아니고, 영재씨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게 유종의 미라는건 중요한거잖아. 관둘 때 관두더라도 마지막에 조금은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 나야 뭐 이해하지만 다른 팀 사람이나 보면 좀 마지막 이미지가 안 좋게 비쳐지는 것도 좀 아니잖아"
마지막 3주 동안,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버젓히 잡람인, 잡커리어 같은 사이트를 펴놓고 일자리 찾기도 했고, 4일 연속 지각을 하는가 하면 퇴근은 59분만 되면 엑셀부터 껐다. 업무요청을 해와도 설렁설렁. 결국 참다참다 박 과장님이 좋게좋게 이렇게 한 소리를 했지만 솔직히 그마저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주의하겠습니다"
성의없는 대답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유종의 미? 마지막 이미지? 코웃음이 나왔다. 박 과장님이라고 해서 뭐 개인적인 감정일 리는 없고 아마 팀장님 대신에 좋게 말해준거 아니면 정말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냥 남은 시간 최대한 시간이나 때우다가 관두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날의 술자리 이후로 소민에게도 철벽을 쳤다. 소민이 몇 번인가 "기분…안 좋은건 알겠지만, 그거 말구 혹시 뭐 내가 실수한거 있어?" 하고,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지만 솔직히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직장 동료, 그나마도 곧 관둘 회사의 동료라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쉽게 내 마음의 문이 닫혔다.
창원 주임이나 성은씨 등 다른 루트를 통해서 "요즘 많이 힘들어?", "소민씨랑 뭐 싸운거?" 하는 식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다 귀찮았다. 부질없고 한심한 이야기들. 퇴사 마지막 주, 팀장님이 그래도 회식 겸 인사 겸 해서 술자리 한번 마련한다고 했지만 난 그마저도 거절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 날 술자리에서도 좋은 얼굴로 끝까지 앉아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거절했다. 팀장님도 그날 처음으로 "영재씨, 나도 솔직히 이런 이야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다 힘들어지는거잖아" 하고 넌지시 한소리 했지만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죄송합니다"가 다 였다. 담담했다. 솔직히 멋지게 퇴사하고 싶어서 그 몇 주 사이에 입사지원만 13군데를 했지만 면접 제의조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그렇구만"
그리고 그건 내 현실을 그 무엇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었고 앞으로 다가올, 퇴사 이후 퇴직금 까먹고 실업급여 몇 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생활 지나가면 얼마나 암울해질까에 대한 실감나는 공포였다. 요즘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인지 자꾸 다리에 쥐가 난다는 엄마가 발가락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야, 홍영재"
그리고 퇴사 전날, 일을 마치고 오늘도 모두의 동정인지 짜증인지 실망인지 모를 묘한 시선을 느끼며 칼퇴를 한 후,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는 나를 뒤에서 소민이 불렀다. 담담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돌아본 소민은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뭐야.
"뭐야, 슬리퍼 신고 나오면 어떻게 해"
"지금 그게 중요해?"
화가 난 건지 어떤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가온 소민은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니가 퇴사하면 하는거지, 왜 그러는건데 도대체. 기분 안 좋은거? 그래, 그건 이해해. 근데 왜 나한테까지 그러는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하기라도 한거야?"
처음으로 내가 당황스러웠다.
"뭐가"
소민은 "하 참" 하면서 한 손을 허리에 얹는다.
"너, 요즘 나한테 인사도 안 하잖아. 하루에 말 한 마디 안 하잖아. 그냥 업무적으로 말해야지만 어, 어, 어. 그게 다잖아. 왜 그래?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왜 그러는건데. 회사 관두는거 힘든거? 그래, 알어. 아니 안다고 말 안 할게.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랑 나랑은 친구 아냐? 힘들 때 서로 돕고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너 힘들 때 갑자기 이렇게 나 막 모르는 사람인 척 하면, 나는? 너는 나 도왔는데 나는"
그랬나. 그래도 쉽사리 공감이 가진 않는다. 지금의 나는 열등감 덩어리니까.
"소민아, 일단 진정하고…"
정문 쪽을 쳐다보자, 우리 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팀 사람들까지 몇 명 나와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구경 난거야 뭐야.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나가자마자 소민이 씩씩대며 슬리퍼만 신은 채 후다닥 뛰어나왔고, 그거 보고 다들 뭐야뭐야 하면서 따라 나온 거구만. 찐한 스캔들 또 돌겠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들 멋쩍은 얼굴로 히히덕 거리며 들어간다.
"소민아. 일단 저기서 이야기 하자"
아직도 정문 쪽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덤불에 가려지는 옆 벤치쪽으로 소민을 인도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대로 말 안 하고 조용히 퇴사하려고 했던, 정말로 정말로 소민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은 더 분위기 있고 그럴싸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도 안다. 인생이라는건 항상 뭔 일을 하던 그렇게 머릿 속에 그린 것처럼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타이밍에 할 수 있는건 아니라는걸.
"나 너 좋아해. 직장동료로서가 아니라, 여사친… 여자친구로서. 솔직히 한강 갔을 때도 고백하고 싶었구. 근데 니가 입사 초에 사내커플은 죽어도 안 한다고 한 적도 있었고…"
"내가 언제"
"너 그랬었어. 여튼 그랬고, 그런데 그래도 최소한 앞날이 불투명한데 고백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지금처럼 결국 전환 안 되니까 힘이 다 빠지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접은…접을라고 한거야"
접은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또 그 와중에 접으려고 한 거라며 한번 더 여지를 둔다. 속 뻔히 들여다 보이게. 그리고 다음은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여기까지 다 말해야 내 마음을 소민이가 이해하겠지 하는 마음에 그냥 120% 다 말했다.
"그리고 디게 찌질한 이야기지만, 그 날 그 같이 술 마신 날에 너랑 기원 대리님이랑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데 둘이 잘 어울려 보이더라. 그럴싸한 직장에 환경에, 뭐. 근데 나는 이제 곧 백수고, 그러니까 디게 멀게 느껴지더라고. 나 혼자 짝사랑하는게 등신 같고, 가망 없는 일에 혼자 마음 주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와중에 칼퇴근 하는 다른 팀원 분들 몇 분을 뻘쭘하게 마주하며 인사했다. CS팀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나와 소민을 쳐다보며 묘한 눈으로 인사하더니 또 까르르 까르르 대며 저기 역쪽으로 걸어간다.
"너 발 시렵겠다. 어쨌든 오늘도 그렇지만 그런데 막 너랑 친근하게 구는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좀 그래보일거 같고 너도 직장생활 하는데 내가 괜히 좀 그런거 같고 그래서 그랬어. 사실 이 이야기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해버리게 됐네"
속이 조금 시원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민이 나랑 사귀어 주길 바라게도 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나의 고단하고 찌질한 연애에 이 매력적이고 착한 애가 끼어들게 바라는 나의 이기심에 화까지 조금 났고.
진심으로 소원했다. 소민이가 그냥 이렇게 "알었어. 뭣 땜에 그랬는지 알겠어. 그렇다고 내가 너랑 사귈 수는 없지. 알았으니까 잘 가" 하고 그렇게 다시 들어가길.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찌질하게 좀 울고 나면 나도 후련해질테니까. 그리고 또 소원했다. 부디부디 1%의 확률이지만 나랑 만나주길.
"홍영재"
"어?"
"내 얼굴을 보고 말해"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소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의 장난끼 많은 얼굴.
"기원 대리님은 내가 소개팅 내가 알아봐주기로 했고, 내가 그리고 기원 대리님이랑 왜 사귀냐? 그리고 넌 날 좋아하면 뭐 남자답게 고백하고 차이던가, 꼭 그렇게까지 혼자 찌질하게 그랬어야 돼?"
"찌질하긴 뭐가 찌질해"
소민은 팔꿈치로 내 팔뚝을 쿡 찔렀다.
"야, 회사 다른 팀 사람도 니가 나 좋아하는거 다 아는데 나만 모르겠냐?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무슨"
"이 누나가 이 찌질이랑 사귀어 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니까 내가 한번 봐준다"
"뭘"
소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야, 회사 사람 다 봤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뭐가 되냐? 내가 고백하고 차인 줄 알거 아냐"
"어?"
"만약에 지금도 고백 안 했으면 진짜로 그래 꺼져, 하고 쌍욕하고 바로 연락처 다 차단할라고 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뒤늦게라도 말하니까 내가 용서한다. 빨리 제대로 고백해"
"무슨 고백"
"나 좋아한담서"
흐.
"어. 소민아 좋아해. 사귀자"
무미건조한 내 말 톤에 소민은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투로 주먹을 쥐었다.
"아 진짜 아 너무 짜증난다. 이게 뭐야 쪽팔리구 멋도 없고. 너 진짜 나한테 잘해라. 어?"
"참나"
"그리고 백수 남친 만날 수는 없으니까 오늘부터 이력서 100장씩 써. 알겠어?"
"어. 이미 쓰고 있어"
"더 써"
"알았어"
"너 내 혼사길 막았으니까 진짜 잘해라. 멋있는 회사 이직 못하면 너 죽인다"
"어"
그래. 사실 너무 좋았다. 내 주제에 이렇게 이쁜 애랑 연애를 하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고 찌질하게 연애하게 된 것 같긴 하지만…막차에 올라타는건 다들 그런거지. 안 그런가.
"여튼 발 시렵겠다. 얼른 들어가서 짐 싸서 나와. 기다릴께"
내 말에 소민은 "아 안에 어떻게 들어가지. 내일은 또 어쩌지. 나도 회사 그냥 관둘까" 하며 갑자기 발을 동동 굴렀다.
"둘 다 백수면 어떻게 해. 빨리 들어가"
"아 씨. 알았어. 기달려"
소민은 저쪽으로 가다가 "잘해라" 하고 한번 더 경고하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소민이 말대로 잘하는 수 밖에 없다. 잘하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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