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놈들이네. 종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거냐"
군대 있을 때 잡지에 소개된 또라이들을 보다가 피식 웃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 모든 것의 첫 장면이다.
"…근데 우리나라는 전쟁 위험이 있긴 하지"
그 몇 년 후, 인터넷에서 다시 본 생존주의자 글이 인상적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생존배낭 하나로 시작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큰 사고 등으로 인해 최소한의 생존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큼지막한 배낭 안에 군용 레이션 3일치, 물 2리터, 우비, 초코바 같은 고열량 음식, 3돈 정도의 금 정도를 챙겨놓는 것이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장농 안에 쳐박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현재 간 나오토 총리는 사고수습에 총력을 다할 것을 지시한 상태로…"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번쩍하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 2년 만에 열어본 배낭 안의 음식들은 의외로 멀쩡했지만, 유통기한이 지나간 초콜렛도 그렇고, 물도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죄 버리고 새로 채워넣었다. 앞으로 매 달마다 교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그때 다시 한번 나를 놀래킨 것이 바로 생존주의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야말로 '세계 3차 대전이나 '지구 종말의 날'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을 법한 자체 지하 벙커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신선하고 부러웠다. 사실 그들처럼 절박함을 떠나서라도 그런 식의 완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삶이 부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철없는 호기심이었다.
"반갑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였다. 생존주의자 커뮤니티를 검색하고 활동을 시작했던게. 호기심과 관심은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점점 발전했다. 처음에는 사실상의 캠핑 동호회 활동이나 마찬가지라서 더 마음 편하고 재밌게 활동했다. 그러면서 정말 한국에서 생존주의 쉘터를 만들어 꾸미는 사람들을 동경하다 못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글쎄"
고교 시절에 이혼한 부모님을 보며 이미 가정을 꾸린다 라는 개념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던 나였다. 그리고 허튼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점점 생각이 간절해졌다. 3년을 고민했다.
"단독배낭 피난형이냐, 요새구축형이냐에 따라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이미 후자쪽에 꽂히신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그럼 지하실 있는 집부터 찾아야죠"
인터넷의 생존주의자 해외 포럼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 마침 집도 가까워서 커피나 한잔 하던 차에 그가 내려준 명료한 결론에 나 스스로도 동의했다. 마침 전세 계약기간도 끝날 무렵이었기에 나는 결심했다.
"옛날에 지은 집이라서 지하실도 있고…"
오피스텔 전세를 옮기면서 지하실 딸린 주택을 골랐다. 아예 구매였다.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전세가 수준으로 구매를 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낡아도 너무 낡은 건물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중창도 없는 집이라니. 평수도 전에 살던 집의 2/3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넓고 제법 튼튼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25평 지하실이 있다는 점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음 선거 때는 손을 안 댈 수가 없을 걸요"
주변에서 그리 낡은 건물을 도대체 왜 사냐며 말리는 목소리는, 재건축 노리고 투자하는 거다 어쩐다 하면서 적당히 넘겼다. 하지만 사실 나는 평생 이 곳에서 살고 싶다.
"견적이 꽤 나올텐데요?"
"괜찮습니다"
이사가 완료된 직후부터 곧바로 지하실의 대대적인 수리와 보완, 개조를 시작했다. 바가지 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몇 군데 견적을 받아보았고, 인터넷의 자가 인테리어, 낡은 집 개보수 전문가들에게 식사까지 대접해가며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이 집으 원래, 집을 지을 때 인근 연립주택들의 대피소로 활용할 것을 전제로 민방위 지원금까지 받아 지은 건물이라 생존건물로서 아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어? 발전기네? 대박, 이거 완전 득템인데요?"
"돌아가기는 할까?"
"안 돌아가도 수리하면 돼죠"
지하실 수리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구석의 디젤 발전기.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다보니 여기저기 녹도 많이 슬어 있었고, 결국 수리비가 최종적으로 60만원 가까이 나오기는 했지만 깎고 깎고 또 깎아서 35만원에 쇼부를 봤다. 시연도 해봤는데, 매연 문제가 거슬렸다. 매연 환기용 닥트를 달아볼까 고민했는데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자전거형 자가발전기도 공지 글 보고 세팅은 했는데,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는 사실 회의적이었다.
"배터리를 최대한 확보해두세요. 생존주의의 기본이죠. 그리고 전기 관련해서 공부 좀 해두시구요."
활동하는 생존주의 커뮤니티의 두 살 연하 정군의 조언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양평의 별장을 자신의 아지트 삼아서 이것저것 꾸미고 설치하는 중이었다. 그 역시 물론 독신. 애시당초 배우자가 있었다면 이런 뻘짓을 용납할 리가 없다.
"엔터테인먼트를 절대 무시하면 안됩니다. 좋아하는 장르의 소설이나 잡지 최소 100권 정도는 비치해두세요. 종말의 세계에서 PC게임 같은 것은 사치일테니까. 그리고, 야한 잡지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 핵전쟁이든 운석충돌이든 세상이 그야말로 끝장나버려서 전기, 수도 같은 아주 기초적인 환경조차 확보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기 소모해가며 PC로 야동을 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치일 것이다. 뭐, 어쩌다 한두번이라면 또 몰라도. 게다가 좀 민망하지만 '기왕에' 하는 생각에 성인용품도 몇 개 사뒀다.
1억 9천에 산 집에, 지하실 설비 수리 보강으로만 2천 5백만원을 더 썼다. 납판을 두텁게 두르고 싶었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납이요? 에이, 그건 오바죠. 그리고 중성자선은 어떻게 할건데요? 네? 몇 센치요? 헐, 갑부세요? 무리무리, 일반집에 그걸 어떻게 둘러요. 무너져요. 그보다는 흙에 공구리가 답이죠. 흙 1미터만 덮어도 사실상 그게 차폐에요"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해볼게요"
"와 진짜 추진력 미치셨다"
나는 이미 동호회에서도 꽤 유명인이었다. 아무리 광인이 많은 커뮤니티라고 해도, 결국은 한국 커뮤니티다. 남 눈치 보기 바쁜 한국 사람들 말이다. 금수저들의 잠깐 취미가 아닌,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인생 갈아넣는 케이스는 드문 편이었다. 이때의 나는 조금 우쭐했던 것도 같다. 커뮤니티 멤버들의 칭찬과 감탄이, 무리한 도전도 다 시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솔까 근데 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기도 한 듯요"
"열정은 이해하는데, 남들한테 강요하는 건 꼰대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갔다. 커뮤니티 활동이 의례 그렇듯이, 나에 대한 추종자만큼 안티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그 어느 시점에서 나는 동호회의 유난 떠는 피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탈퇴합니다 ]
깔끔한 마무리였다. 어차피 진정한 생존주의자는 홀로서기부터 시작한다는 이 업계의 해외 유명인들 말을 새삼 공감했다. 정군 등 몇몇 멤버와는 조금 더 친분을 이어갔지만.
낡은 설비들을 고치고, 단열과 습기를 잡기 위해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상대도 없던 막연한 꿈이기는 했지만 분명 내 장가 밑천이기도 한 그 돈들은 그렇게 이 집에 싹 투입됐다. 내 나이 마흔 하나. 마지막 남은 삼천만원으로는 이제 그 안을 꾸밀 시간이었다.
"후후"
사실 처음에는 맨케이브에 가까웠다. 지상의 내 집에는 최소한의 설비만 놓고, '진짜'들은 지하실로 꾸몄다. 그 한 예로 지상의 방에는 싸구려 20만원짜리 침대를 놓고, 이 지하실에는 매트리스만 160만원짜리 킹사이즈 침대를 설치했다. 조금 오버했나 하고 후회했지만 하룻밤 자고 나서 대만족했다.
"…그리고…"
생존주의의 로망, 식료품 찬장이다. 25평 지하실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영역에 빼곡하게 수납선반을 세우고 그 안을 통조림과 이런저런 말린 식품들로 가득 채웠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통조림 식품이 꽤 다양했다. 목표는 6개월 분의 식량 확보. 일단은 3개월치 분량을 채웠다. 코스트코와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천만원어치를 질렀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았다. 지랄맞은 물가여.
"흐"
생존주의자들에게서는 금기시 되는 아이템이지만, 그래도 콜라와 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맹물만 먹고 어떻게 살아"
콜라 350ml 5박스, 인스턴트 커피 150포짜리 20박스를 채워뒀다. 혹시 몰라 쥬스 분말과 가루 우유도 준비하고 밀폐포장을 했다.
"그래, 단 맛에 사는거지"
비상 아이템으로 라면도 네 박스를 사뒀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온갖 종류의 사탕과 젤리를 30만원 어치나 사서 밀폐용기에 보관했다. 초콜렛을 별로 안 좋아하는게 다행이었다.
"흠"
그러나 역시 진짜 문제는 물이었다. 처음에는 Only 물탱크만 생각했는데, 그건 정군이 고개를 저었다.
"청소도 힘들고, 1년에 두 어번은 싹 다 비우고 채워야 되는데 물탱크는 스페어로 생각하세요. 일단은 생수로 준비하세요. 엄청 많이요. 하루 사용량을 최소 6리터로 잡으시고… 정화기랑 필터도 준비하세요. 처음에는 락스만 희석해서 쓰셔도 되구요"
다음은 약을 챙겼다. 타이레놀만 몇 곽을 샀는지. 온갖 종류의 약과 의학, 약학서적도 챙겼다. 응급수술용 키트도 아마존에서 구매했다. 미국은 의료보험이 엉망인 양놈나라답게 자가수술용 키트가 별별 종류가 다 있었다. 의료기기도 가급적 더 구해다 놓고 싶었는데 국내법상 반입이 안되는 기기가 많아서 짜증이 났다.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 주제에, 전쟁 중에도 병원은 완벽히 운용할 자신이라도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가 1차 준비 완료였다. 물론 역시나 멘케이브로 활용됐다. 친구들은 다들 너무 좋아했다. 물론 첫 반응이야 다들 "너 진짜 돌았구나" 하는 황당해하는 반응이었지만, 유부남으로서 5만원짜리 한장 마음대로 쓰기 버거운 녀석들은 결국 "아 부럽다. 진심 부럽다. 너처럼 살았어야 하는건데" 하며 후회들을 했다.
그게 또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맨케이브를 조금 더 강화해보려고 당구대부터, 심지어 1/3 길이이긴 했지만 볼링 레인까지 들여다 놓았다. 야심작이었지만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군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특히 정군은 극렬히 반대했다.
"뭔가 엉뚱한 쪽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이건 정말 최악이에요"
옳은 지적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왠일인지 참 그 말이 고까웠다. 그래서 정군과도 단교를 했다. 사실 그 한참 후에 몇 번이고 정군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외골수적인 면은 분명히 있으니까. 참 뼈저린 후회를 하고 다행히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볼링 레인과 당구대는 다시 팔아버렸다. 세팅할 때의 1/10 가격도 못 받고 고물로 처리할 뿐이었다.
"후우"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나만의 아지트에서 게임을 하고, 책을 보고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처음 3년은 정말 꿈처럼 즐거웠다. 회사를 다녀와서 조금씩 나의 쉘터를 꾸미는 작업은 너무나 즐거웠다. 보강하고, 꾸미고, 채워넣고, 업그레이드하고. 돈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지하공사는 지상공사와는 차원이 다른 돈이 필요했다. 결국 집 담보대출을 받아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쪽에서도 돈을 많이 줄여야 했다.
"후우"
보존식의 교체를 통해 매일의 식사를 해치웠다. 매일 인스턴트, 통조림의 식사는 사실 몸에 그리 좋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무려 12kg이 쪘다. 또 대량의 식자재를 한번에 구입하다보니 유통기한 역시 한번에 임박해지는 문제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최근에는 일주일 단위로 식량을 교체하고 채워놓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군"
인스턴트 식품의 폐혜를 줄여보고자 광열설비와 정수 처리한 물을 통한 소량의 지하 농장도 한쪽 벽에 꾸며보았지만, 역시 효율은 좋지 않았다. 어렵게 다시 모은 천만원이 부질없이 사라졌다.
"73만 2천원이라"
언젠가 닥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쉘터 작업이, 오히려 현실의 나에게 최악의 상황을 조금씩 만들어 오고 있었다. 40대 중반 나이에 비상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다니전 직장에서 짤렸다.
'어쩐다'
최소 반 년은 걱정이 없었다. 일단 실업급여만으로도 빚은 그럭저럭 갚을만 했고, 식량은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4개월간의 백수 생활 끝에 새 직장을 얻었다.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내 지난 커리어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마트 경비원 일자리였다. 밤에 그 넓은 마트를 돌아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조금 고되었지만, 운동이 좀 된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자리였다. 게다가 마트의 폐기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았다.
"알뜰하시네요"
"저는 혼자 사니까 나중에 누가 챙겨줄 사람도 없잖아요. 돈이라도 부지런히 모아야죠"
"오우, 많이 모으셨어요?"
"이제부터라도 모아야죠"
가끔 유통기한이 몇 주 지난 냉동식품 폐기가 생기면 얻어와서 집에서 해먹었다. 아주 가끔 배탈이 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 문제 없었다. 때로는 옷이나 각종 생활용품도 거져 생겼다.
"흐음"
그리고 드디어 무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맥가이버 칼 한 자루 시작했던 무기체계가 어느새 핫스틸 나이프부터 해서 수렵용 공기총에 이르게 되었다. 또 집 구석구석 눈에 안 띄게 일부 무기를 숨겨놓기도 했다. 하루 한두시간씩 꼭 나이프 파이팅과 맨몸운동을 반복했다. 공기총 사격도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서 했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건 좀 오버 같긴 한데"
패닉룸도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생각보다 패닉룸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 잘 눈에 안 띄게, 외부에서 함부러 들어올 수 없도록 튼튼하면서도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는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지하실 구석에 고작 두 평짜리 공간 만드는데 천만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까지가 또 3년. 40대 후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다시 한번 해고의 위기에 직면했다. 남은 돈은 고작 170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지난 3년간 모으고 챙겨둔 구난식량과 각종 장비는 이미 내 쉘터의 한계 기간을 2년 반에 이르도록 늘린 상태였다. 게다가 고용보험으로도 6개월은 돈이 나오니까.
"후우"
…그러나 이 나이에 재고용은 어려웠다. 경기둔화로 일자리가 없어지기도 했고, 지난 번처럼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간간히 일일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백수 기간은 무려 3년 반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지"
쉘터의 식량창고는 텅텅 비었다. 지난 주에 마트에서 몰래 훔쳐온 식품 중에 남은 유통기한 지난 시리얼 세 통이 남은 식량의 전부였다. 경비 루트와 시간을 잘 아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시발"
하지만 그마저도 엊그제부터 바뀐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지난 번에 꿀단지를 몇 개 훔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 욕심을 부린 탓이다.
"젠장 젠장"
혼잣말이 늘었다.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었는데, 요즘 나는 혼잣말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다쟁이다. 무료 와이파이 존에서 가끔 친구놈들과 카톡을 나누는데, 녀석들이 한 마디 하면 나는 열 마디를 하는 정도였다. 녀석들의 반응도 썰렁했다.
"외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을. 내 정신에도.
"돈이, 돈이 문제군"
다른 것은 몰라도 대출금은 갚아야 했다. 집 담보 대출이었다. 만약 대출금을 못 갚아서 집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건 내 모든 것의 상실을 뜻했다. 차를 팔아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안타깝게도 쉘터의 일부 장비들을 뜯어 팔아야했다. 구입할 때의 반 값 받는 것도 드물었다.
"빌어먹을!"
급수/정화장치를 떼어 팔면서, 속상해서 울었다. 더이상 나의 쉘터는 '쉘터'가 아니었다. 그냥 흔한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후우"
자가발전 전기로 휴대폰을 충전하기는 하지만 통신은 결국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야 했다. 집 근처 그 어느 와이파이도 암호가 걸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야박한 동네. 전기는 물론이요 수도도 끊겼다. 물은 결국 근처 공원 식수대에서 받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에, 마실 물이 없어서 급하게 낮에 그렇게 했다가 노숙자로 오해 받은 통에 식수대 물이 끊겼다. 밤에 몰래 공원 급수밸부를 연 뒤 물을 받아왔다.
"젠장 젠장 젠장"
때문에 물을 아껴야 했다. 하루 5리터 안쪽으로 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더럽기는 했지만 샤워를 안 하면 사실 1리터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생각보단 먹을만한데"
비둘기를 잡았다. 그것도 공기총으로. 무려 수렵생활의 시작이었다. 중금속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기생충이 무서워서 그냥 거의 다 태워먹었다. 바싹 익혀먹는 비둘기는 소금만 쳐서 먹어도 꽤 먹을만했다. 인근 야산에 가서 칡을 캐기도 했는데, 뭘 잘못 먹었는지 한번 크게 앓고 나서는 칡만 입에 넣었다 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알러지가 생겨서 그것도 못 먹게 되었다.
"야, 임마, 너 꼴이 이게 뭐야"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온 것은 무려 4년만의 일이었다. 그래도 종종 메신저 대화방에서 대화는 나누던 내가 근 반 년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을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또 하필 뭘 잘못 먹어서 지하방에서 고열 속에 끙끙 앓던 중이었다.
"어후"
녀석들은 나의 방에 들어오면서 코를 감싸 쥐었다. 몰랐다. 내 집에서 그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 줄은. 아니, 내 몸에서도. 하기사 내 몰골이야 이미 어지간한 노숙자보다도 심한 상태였고, 문 앞에는 차압 딱지와 불법 건축물 용도변경 관련 벌금 통지서가 어마어마하게 꽂히고 쌓여 있었다.
"미친 놈아"
친구 한 놈은 나를 보며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직후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한달 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 재활센터로 보내졌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좋았다.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샤워를 물 걱정 없이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제는 진짜 재활을 하셔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해당 기관에서 내가 묵을 수 있는 기간은 최장 3개월이었다. 나는 센터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무려 철거 딱지와 함께 '붕괴위험 건축물'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마 불법으로 지하실에 이것저것 내가 공사를 어설프게 한 탓이리라. 내가 밖에서 보아도 집 왼쪽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괜찮아'
나는 그 와중에도 다시 지하실로 돌아와, 그 160만원짜리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확실히 말해, 나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시당초 내 쉘터는 최고로 업그레이드 했을 때가 고작해야 한계 생존기한이 2년 5개월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훨씬 오래 버텼다.
'그럼 살만큼 살았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생존주의자의 꿈, 완벽 자급자족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쉘터 한계 기한보다 오래 생존했다는 자체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후후"
- 끝 -
tag : 생존주의, 쉘터
군대 있을 때 잡지에 소개된 또라이들을 보다가 피식 웃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 모든 것의 첫 장면이다.
"…근데 우리나라는 전쟁 위험이 있긴 하지"
그 몇 년 후, 인터넷에서 다시 본 생존주의자 글이 인상적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생존배낭 하나로 시작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큰 사고 등으로 인해 최소한의 생존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큼지막한 배낭 안에 군용 레이션 3일치, 물 2리터, 우비, 초코바 같은 고열량 음식, 3돈 정도의 금 정도를 챙겨놓는 것이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장농 안에 쳐박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현재 간 나오토 총리는 사고수습에 총력을 다할 것을 지시한 상태로…"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번쩍하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 2년 만에 열어본 배낭 안의 음식들은 의외로 멀쩡했지만, 유통기한이 지나간 초콜렛도 그렇고, 물도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죄 버리고 새로 채워넣었다. 앞으로 매 달마다 교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그때 다시 한번 나를 놀래킨 것이 바로 생존주의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야말로 '세계 3차 대전이나 '지구 종말의 날'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을 법한 자체 지하 벙커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신선하고 부러웠다. 사실 그들처럼 절박함을 떠나서라도 그런 식의 완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삶이 부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철없는 호기심이었다.
"반갑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였다. 생존주의자 커뮤니티를 검색하고 활동을 시작했던게. 호기심과 관심은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점점 발전했다. 처음에는 사실상의 캠핑 동호회 활동이나 마찬가지라서 더 마음 편하고 재밌게 활동했다. 그러면서 정말 한국에서 생존주의 쉘터를 만들어 꾸미는 사람들을 동경하다 못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글쎄"
고교 시절에 이혼한 부모님을 보며 이미 가정을 꾸린다 라는 개념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던 나였다. 그리고 허튼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점점 생각이 간절해졌다. 3년을 고민했다.
"단독배낭 피난형이냐, 요새구축형이냐에 따라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이미 후자쪽에 꽂히신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그럼 지하실 있는 집부터 찾아야죠"
인터넷의 생존주의자 해외 포럼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 마침 집도 가까워서 커피나 한잔 하던 차에 그가 내려준 명료한 결론에 나 스스로도 동의했다. 마침 전세 계약기간도 끝날 무렵이었기에 나는 결심했다.
"옛날에 지은 집이라서 지하실도 있고…"
오피스텔 전세를 옮기면서 지하실 딸린 주택을 골랐다. 아예 구매였다.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전세가 수준으로 구매를 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낡아도 너무 낡은 건물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중창도 없는 집이라니. 평수도 전에 살던 집의 2/3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넓고 제법 튼튼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25평 지하실이 있다는 점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음 선거 때는 손을 안 댈 수가 없을 걸요"
주변에서 그리 낡은 건물을 도대체 왜 사냐며 말리는 목소리는, 재건축 노리고 투자하는 거다 어쩐다 하면서 적당히 넘겼다. 하지만 사실 나는 평생 이 곳에서 살고 싶다.
"견적이 꽤 나올텐데요?"
"괜찮습니다"
이사가 완료된 직후부터 곧바로 지하실의 대대적인 수리와 보완, 개조를 시작했다. 바가지 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몇 군데 견적을 받아보았고, 인터넷의 자가 인테리어, 낡은 집 개보수 전문가들에게 식사까지 대접해가며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이 집으 원래, 집을 지을 때 인근 연립주택들의 대피소로 활용할 것을 전제로 민방위 지원금까지 받아 지은 건물이라 생존건물로서 아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어? 발전기네? 대박, 이거 완전 득템인데요?"
"돌아가기는 할까?"
"안 돌아가도 수리하면 돼죠"
지하실 수리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구석의 디젤 발전기.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다보니 여기저기 녹도 많이 슬어 있었고, 결국 수리비가 최종적으로 60만원 가까이 나오기는 했지만 깎고 깎고 또 깎아서 35만원에 쇼부를 봤다. 시연도 해봤는데, 매연 문제가 거슬렸다. 매연 환기용 닥트를 달아볼까 고민했는데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자전거형 자가발전기도 공지 글 보고 세팅은 했는데,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는 사실 회의적이었다.
"배터리를 최대한 확보해두세요. 생존주의의 기본이죠. 그리고 전기 관련해서 공부 좀 해두시구요."
활동하는 생존주의 커뮤니티의 두 살 연하 정군의 조언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양평의 별장을 자신의 아지트 삼아서 이것저것 꾸미고 설치하는 중이었다. 그 역시 물론 독신. 애시당초 배우자가 있었다면 이런 뻘짓을 용납할 리가 없다.
"엔터테인먼트를 절대 무시하면 안됩니다. 좋아하는 장르의 소설이나 잡지 최소 100권 정도는 비치해두세요. 종말의 세계에서 PC게임 같은 것은 사치일테니까. 그리고, 야한 잡지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 핵전쟁이든 운석충돌이든 세상이 그야말로 끝장나버려서 전기, 수도 같은 아주 기초적인 환경조차 확보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기 소모해가며 PC로 야동을 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치일 것이다. 뭐, 어쩌다 한두번이라면 또 몰라도. 게다가 좀 민망하지만 '기왕에' 하는 생각에 성인용품도 몇 개 사뒀다.
1억 9천에 산 집에, 지하실 설비 수리 보강으로만 2천 5백만원을 더 썼다. 납판을 두텁게 두르고 싶었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납이요? 에이, 그건 오바죠. 그리고 중성자선은 어떻게 할건데요? 네? 몇 센치요? 헐, 갑부세요? 무리무리, 일반집에 그걸 어떻게 둘러요. 무너져요. 그보다는 흙에 공구리가 답이죠. 흙 1미터만 덮어도 사실상 그게 차폐에요"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해볼게요"
"와 진짜 추진력 미치셨다"
나는 이미 동호회에서도 꽤 유명인이었다. 아무리 광인이 많은 커뮤니티라고 해도, 결국은 한국 커뮤니티다. 남 눈치 보기 바쁜 한국 사람들 말이다. 금수저들의 잠깐 취미가 아닌,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인생 갈아넣는 케이스는 드문 편이었다. 이때의 나는 조금 우쭐했던 것도 같다. 커뮤니티 멤버들의 칭찬과 감탄이, 무리한 도전도 다 시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솔까 근데 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기도 한 듯요"
"열정은 이해하는데, 남들한테 강요하는 건 꼰대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갔다. 커뮤니티 활동이 의례 그렇듯이, 나에 대한 추종자만큼 안티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그 어느 시점에서 나는 동호회의 유난 떠는 피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탈퇴합니다 ]
깔끔한 마무리였다. 어차피 진정한 생존주의자는 홀로서기부터 시작한다는 이 업계의 해외 유명인들 말을 새삼 공감했다. 정군 등 몇몇 멤버와는 조금 더 친분을 이어갔지만.
낡은 설비들을 고치고, 단열과 습기를 잡기 위해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상대도 없던 막연한 꿈이기는 했지만 분명 내 장가 밑천이기도 한 그 돈들은 그렇게 이 집에 싹 투입됐다. 내 나이 마흔 하나. 마지막 남은 삼천만원으로는 이제 그 안을 꾸밀 시간이었다.
"후후"
사실 처음에는 맨케이브에 가까웠다. 지상의 내 집에는 최소한의 설비만 놓고, '진짜'들은 지하실로 꾸몄다. 그 한 예로 지상의 방에는 싸구려 20만원짜리 침대를 놓고, 이 지하실에는 매트리스만 160만원짜리 킹사이즈 침대를 설치했다. 조금 오버했나 하고 후회했지만 하룻밤 자고 나서 대만족했다.
"…그리고…"
생존주의의 로망, 식료품 찬장이다. 25평 지하실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영역에 빼곡하게 수납선반을 세우고 그 안을 통조림과 이런저런 말린 식품들로 가득 채웠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통조림 식품이 꽤 다양했다. 목표는 6개월 분의 식량 확보. 일단은 3개월치 분량을 채웠다. 코스트코와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천만원어치를 질렀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았다. 지랄맞은 물가여.
"흐"
생존주의자들에게서는 금기시 되는 아이템이지만, 그래도 콜라와 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맹물만 먹고 어떻게 살아"
콜라 350ml 5박스, 인스턴트 커피 150포짜리 20박스를 채워뒀다. 혹시 몰라 쥬스 분말과 가루 우유도 준비하고 밀폐포장을 했다.
"그래, 단 맛에 사는거지"
비상 아이템으로 라면도 네 박스를 사뒀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온갖 종류의 사탕과 젤리를 30만원 어치나 사서 밀폐용기에 보관했다. 초콜렛을 별로 안 좋아하는게 다행이었다.
"흠"
그러나 역시 진짜 문제는 물이었다. 처음에는 Only 물탱크만 생각했는데, 그건 정군이 고개를 저었다.
"청소도 힘들고, 1년에 두 어번은 싹 다 비우고 채워야 되는데 물탱크는 스페어로 생각하세요. 일단은 생수로 준비하세요. 엄청 많이요. 하루 사용량을 최소 6리터로 잡으시고… 정화기랑 필터도 준비하세요. 처음에는 락스만 희석해서 쓰셔도 되구요"
다음은 약을 챙겼다. 타이레놀만 몇 곽을 샀는지. 온갖 종류의 약과 의학, 약학서적도 챙겼다. 응급수술용 키트도 아마존에서 구매했다. 미국은 의료보험이 엉망인 양놈나라답게 자가수술용 키트가 별별 종류가 다 있었다. 의료기기도 가급적 더 구해다 놓고 싶었는데 국내법상 반입이 안되는 기기가 많아서 짜증이 났다.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 주제에, 전쟁 중에도 병원은 완벽히 운용할 자신이라도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가 1차 준비 완료였다. 물론 역시나 멘케이브로 활용됐다. 친구들은 다들 너무 좋아했다. 물론 첫 반응이야 다들 "너 진짜 돌았구나" 하는 황당해하는 반응이었지만, 유부남으로서 5만원짜리 한장 마음대로 쓰기 버거운 녀석들은 결국 "아 부럽다. 진심 부럽다. 너처럼 살았어야 하는건데" 하며 후회들을 했다.
그게 또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맨케이브를 조금 더 강화해보려고 당구대부터, 심지어 1/3 길이이긴 했지만 볼링 레인까지 들여다 놓았다. 야심작이었지만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군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특히 정군은 극렬히 반대했다.
"뭔가 엉뚱한 쪽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이건 정말 최악이에요"
옳은 지적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왠일인지 참 그 말이 고까웠다. 그래서 정군과도 단교를 했다. 사실 그 한참 후에 몇 번이고 정군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외골수적인 면은 분명히 있으니까. 참 뼈저린 후회를 하고 다행히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볼링 레인과 당구대는 다시 팔아버렸다. 세팅할 때의 1/10 가격도 못 받고 고물로 처리할 뿐이었다.
"후우"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나만의 아지트에서 게임을 하고, 책을 보고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처음 3년은 정말 꿈처럼 즐거웠다. 회사를 다녀와서 조금씩 나의 쉘터를 꾸미는 작업은 너무나 즐거웠다. 보강하고, 꾸미고, 채워넣고, 업그레이드하고. 돈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지하공사는 지상공사와는 차원이 다른 돈이 필요했다. 결국 집 담보대출을 받아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쪽에서도 돈을 많이 줄여야 했다.
"후우"
보존식의 교체를 통해 매일의 식사를 해치웠다. 매일 인스턴트, 통조림의 식사는 사실 몸에 그리 좋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무려 12kg이 쪘다. 또 대량의 식자재를 한번에 구입하다보니 유통기한 역시 한번에 임박해지는 문제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최근에는 일주일 단위로 식량을 교체하고 채워놓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군"
인스턴트 식품의 폐혜를 줄여보고자 광열설비와 정수 처리한 물을 통한 소량의 지하 농장도 한쪽 벽에 꾸며보았지만, 역시 효율은 좋지 않았다. 어렵게 다시 모은 천만원이 부질없이 사라졌다.
"73만 2천원이라"
언젠가 닥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쉘터 작업이, 오히려 현실의 나에게 최악의 상황을 조금씩 만들어 오고 있었다. 40대 중반 나이에 비상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다니전 직장에서 짤렸다.
'어쩐다'
최소 반 년은 걱정이 없었다. 일단 실업급여만으로도 빚은 그럭저럭 갚을만 했고, 식량은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4개월간의 백수 생활 끝에 새 직장을 얻었다.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내 지난 커리어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마트 경비원 일자리였다. 밤에 그 넓은 마트를 돌아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조금 고되었지만, 운동이 좀 된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자리였다. 게다가 마트의 폐기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았다.
"알뜰하시네요"
"저는 혼자 사니까 나중에 누가 챙겨줄 사람도 없잖아요. 돈이라도 부지런히 모아야죠"
"오우, 많이 모으셨어요?"
"이제부터라도 모아야죠"
가끔 유통기한이 몇 주 지난 냉동식품 폐기가 생기면 얻어와서 집에서 해먹었다. 아주 가끔 배탈이 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 문제 없었다. 때로는 옷이나 각종 생활용품도 거져 생겼다.
"흐음"
그리고 드디어 무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맥가이버 칼 한 자루 시작했던 무기체계가 어느새 핫스틸 나이프부터 해서 수렵용 공기총에 이르게 되었다. 또 집 구석구석 눈에 안 띄게 일부 무기를 숨겨놓기도 했다. 하루 한두시간씩 꼭 나이프 파이팅과 맨몸운동을 반복했다. 공기총 사격도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서 했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건 좀 오버 같긴 한데"
패닉룸도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생각보다 패닉룸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 잘 눈에 안 띄게, 외부에서 함부러 들어올 수 없도록 튼튼하면서도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는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지하실 구석에 고작 두 평짜리 공간 만드는데 천만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까지가 또 3년. 40대 후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다시 한번 해고의 위기에 직면했다. 남은 돈은 고작 170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지난 3년간 모으고 챙겨둔 구난식량과 각종 장비는 이미 내 쉘터의 한계 기간을 2년 반에 이르도록 늘린 상태였다. 게다가 고용보험으로도 6개월은 돈이 나오니까.
"후우"
…그러나 이 나이에 재고용은 어려웠다. 경기둔화로 일자리가 없어지기도 했고, 지난 번처럼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간간히 일일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백수 기간은 무려 3년 반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지"
쉘터의 식량창고는 텅텅 비었다. 지난 주에 마트에서 몰래 훔쳐온 식품 중에 남은 유통기한 지난 시리얼 세 통이 남은 식량의 전부였다. 경비 루트와 시간을 잘 아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시발"
하지만 그마저도 엊그제부터 바뀐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지난 번에 꿀단지를 몇 개 훔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 욕심을 부린 탓이다.
"젠장 젠장"
혼잣말이 늘었다.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었는데, 요즘 나는 혼잣말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다쟁이다. 무료 와이파이 존에서 가끔 친구놈들과 카톡을 나누는데, 녀석들이 한 마디 하면 나는 열 마디를 하는 정도였다. 녀석들의 반응도 썰렁했다.
"외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을. 내 정신에도.
"돈이, 돈이 문제군"
다른 것은 몰라도 대출금은 갚아야 했다. 집 담보 대출이었다. 만약 대출금을 못 갚아서 집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건 내 모든 것의 상실을 뜻했다. 차를 팔아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안타깝게도 쉘터의 일부 장비들을 뜯어 팔아야했다. 구입할 때의 반 값 받는 것도 드물었다.
"빌어먹을!"
급수/정화장치를 떼어 팔면서, 속상해서 울었다. 더이상 나의 쉘터는 '쉘터'가 아니었다. 그냥 흔한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후우"
자가발전 전기로 휴대폰을 충전하기는 하지만 통신은 결국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야 했다. 집 근처 그 어느 와이파이도 암호가 걸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야박한 동네. 전기는 물론이요 수도도 끊겼다. 물은 결국 근처 공원 식수대에서 받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에, 마실 물이 없어서 급하게 낮에 그렇게 했다가 노숙자로 오해 받은 통에 식수대 물이 끊겼다. 밤에 몰래 공원 급수밸부를 연 뒤 물을 받아왔다.
"젠장 젠장 젠장"
때문에 물을 아껴야 했다. 하루 5리터 안쪽으로 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더럽기는 했지만 샤워를 안 하면 사실 1리터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생각보단 먹을만한데"
비둘기를 잡았다. 그것도 공기총으로. 무려 수렵생활의 시작이었다. 중금속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기생충이 무서워서 그냥 거의 다 태워먹었다. 바싹 익혀먹는 비둘기는 소금만 쳐서 먹어도 꽤 먹을만했다. 인근 야산에 가서 칡을 캐기도 했는데, 뭘 잘못 먹었는지 한번 크게 앓고 나서는 칡만 입에 넣었다 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알러지가 생겨서 그것도 못 먹게 되었다.
"야, 임마, 너 꼴이 이게 뭐야"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온 것은 무려 4년만의 일이었다. 그래도 종종 메신저 대화방에서 대화는 나누던 내가 근 반 년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을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또 하필 뭘 잘못 먹어서 지하방에서 고열 속에 끙끙 앓던 중이었다.
"어후"
녀석들은 나의 방에 들어오면서 코를 감싸 쥐었다. 몰랐다. 내 집에서 그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 줄은. 아니, 내 몸에서도. 하기사 내 몰골이야 이미 어지간한 노숙자보다도 심한 상태였고, 문 앞에는 차압 딱지와 불법 건축물 용도변경 관련 벌금 통지서가 어마어마하게 꽂히고 쌓여 있었다.
"미친 놈아"
친구 한 놈은 나를 보며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직후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한달 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 재활센터로 보내졌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좋았다.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샤워를 물 걱정 없이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제는 진짜 재활을 하셔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해당 기관에서 내가 묵을 수 있는 기간은 최장 3개월이었다. 나는 센터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무려 철거 딱지와 함께 '붕괴위험 건축물'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마 불법으로 지하실에 이것저것 내가 공사를 어설프게 한 탓이리라. 내가 밖에서 보아도 집 왼쪽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괜찮아'
나는 그 와중에도 다시 지하실로 돌아와, 그 160만원짜리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확실히 말해, 나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시당초 내 쉘터는 최고로 업그레이드 했을 때가 고작해야 한계 생존기한이 2년 5개월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훨씬 오래 버텼다.
'그럼 살만큼 살았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생존주의자의 꿈, 완벽 자급자족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쉘터 한계 기한보다 오래 생존했다는 자체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후후"
이 정도면, A급은 아니어도 B급 정도는 되는 성공 아닐까.
- 끝 -
tag : 생존주의, 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