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비참함이고 치욕이었다.
"나 조금 이야기 하다올게. 치킨은 먹고 있어"
"어? 어, 어어…"
친구 주리라고 둘러댔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전화의 상대가 선우라는 것을. 그 개좆같은 새끼라는 것을.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함께 치킨을 먹으며 경기를 보고 싶어서, 무려 1시간 반을 줄서서 사왔다. 그러나 여친은 나를 자신의 자취방에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씨발"
금요일 밤, 여자친구와 축구를 보며 뜨거운 밤을 보낼 것이라는 기대는 차가운 분노가 되어 내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차라리 그때 화를 냈어야 했을까. 전화기를 뺏어 집어던지고 지금 만나러 가는게 진짜 주리 맞냐고, 어디 내 앞에서 스피커 폰으로 전화 걸어보라고 소리를 쳤어야 했을까. 하지만 두려웠다. 그러다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씨발"
경기는 초장부터 2: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어마어마한 전력차,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기적'을 바랄 뿐이었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상대조차 아니었다.
"개씨발"
양선우. 초등학교 때부터 아름과 알고 지내던 동네친구. 수도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아름이가 나를 그와 소개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 사실 내 입장에서도 굳이 여친의 남사친을 얼굴 보고 싶지 않았기에-게다가 나보다 더 외모도, 조건도 좋은 남자와 대면하는 상황은 더더욱- 딱히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난 한달 전부터는 조금 상황이 달라졌다.
"씨발년"
분노는 이제 아름에게로 향한다. 그 새끼가 결혼을 한다는 소리를 나에게 전하며, 아름은 어처구니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여러 감정이 섞인 눈물이었을 것이리라.
"존나, 맛도 모르겠구만"
치킨을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름은 눈물을 보인 직후 '평생 자신의 곁에서 좋은 지기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누군가가 이제 자신에게 "안녕"을 선언하는 상황'이라 그랬다며, 오해하지 말라고 수습했지만 다른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눈물까지 흘리는 여자친구를 보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으면 좋았을까. 도대체 나는 왜 그때 "미친년아 그럼 그 새끼랑 결혼하던가" 하고 소리를 치지 못했을까.
체할 것만 같았다. 나는 치킨을 내려놓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심했다. 배알고 없고 자존심도 없이, 이 지경에서도 치킨을 목구멍에 밀어넣는 내 모습이 병신 같아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골- 아, 이러면 경기가 어려워지는데요"
한 골을 만회한 듯 했지만 다시 한 골을 빼앗긴다. 캐스터의 탄식과 함께 내 입에서도 한숨이 흐른다. 드디어 정규직 전환되었다고 여친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그 다음 날 아름은 그 놈의 이야기를 꺼내며 "내 친구는 이번에 한수원 입사했대" 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걸 왜 전하는지 몰랐지만.
사실 이미 여친의 휴대폰 사진으로 몇 번 흘낏 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도 몇 장인가 있었다. 슬림하고 늘씬한 중키에 훈훈한 얼굴, 공기업 직원이라는 안정감. 마치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력을 갖추고, 이제 조별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서서히 조직력도 맞아가기 시작하는 저 새끼들 같은 든든한 전력이다.
"난"
그에 반해 나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뭐가 있지?
"우리 대표팀, 이제 조금 더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나도 열정 패기는 좋지. 아마 장담하던데, 너는 아마 이제 그 누구를 만나도 나 이상의 절절한 사랑은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뱃 속의 장기라도 꺼내 줄 듯한 그런 무식한 사랑을 하는 나니까. 하지만 전문대 출신에다, 공장이나 다니는 못난 나는…
"후우"
얼마 전 주임 진급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 그 날, 아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선우가 요즘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말을 해서, 나름 쇼크를 받았기 때문이다. 남사친에게 여친이 생겼다고 지가 쇼크를 받을 것은 또 뭔가. 그리고 한 가지 가능성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랜 시간 곁에 있었기에 사랑이라고는 느끼지 못했기에 거절했던 남사친의 고백, 그리고 그 몇 달 후 들려온 진짜 남사친의 연애소식. 문득 비로소 냉정하게 비교하게 된 그와 현재의 남친. 몰려오는 후회와 실망감.
"…아니야 씨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애써 고개를 저었지만 여전히 그 생각은 나를 불편하고 힘든 감정 속으로 몰아넣는다. 경기는 끝나간다. 4:1, 크게 벌어진 점수차. 나의 눈은 TV를 향하지 않는다. 저 TV만 해도 그렇다. 새 자취방에 TV가 없다는 말에 곧장 밤새 중고나라를 뒤져 다음 날 아침에 TV를 샀다. 선물했지만 아름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아 뭘 또 샀어 이런걸. 나 TV 잘 보지도 않는데"
한 여름에 땀 뻘뻘 흘려가며 겨우 사들고 온 건데. 그리고 나도 큰 맘 먹고 사온건데.
"그래도 가끔 보겠지. 헤헤"
속으로 천불이 났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는 나. 나는 화도 한번 낸 적이 없었다. 무조건 내가 먼저 미안하고 내가 사과를 하는 그런 연애였다. 나는 사실 제대로 연애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한번 내준 마음 끝까지 퍼주는 연애가 내가 하는 연애였다. 병신같이.
'쩝'
가끔은 그런 나 자신이 가여웠다. 방구석에 가서는 엄마한테 큰 소리는 또 그렇게 치면서도 여친에게는 그저 호구처럼 헤헤거리기나 하는 내가 싫었다. 그냥 싹 다 버리고 헤어질까. 속상해서 코끝이 찡하고 머리가 아프다. 경기 끝났다는 말에 TV도 껐다. 나는 그대로 누웠다. 형광등 불빛이 내 감은 눈을 또 찔러왔지만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괴로우니까.
'지금쯤 넌 뭘하고 있을까'
아마 오랜 친구와 그의 새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순간순간 더러운 망상들이 뇌를 스쳤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야만 했다. 분노가 뇌를 스쳤지만 콧바람을 길게 뿜으며 마음을 식힌다.
아주 오랜 정. 우리는 남녀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감정들을 속였지만 어쩔 수 없이 엇갈람을 앞에 두고 몰아치는 아쉬움과 허전함, 그런 것들이 순간적으로 불장난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지? 불신과 분노가 머릿 속과 가슴 속, 콧 속을 넘나들며 전신을 절절 끓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잠들었다.
'…'
눈을 떴다. 밤 11시 20분. 열린 창문 틈으로 차소리가 난다. 설마설마 하면서도 창문 밖으로 내려다본다. 그리고 어이없지만 아름이가 내린다. 잠깐 이야기 좀 하다 온다는 년이 몇 시간을 있다 오는지 모른다. 나는 애써 못 본 척을 하고, 서둘러 치킨들을 치운다. 진작에 치워놓고 잘 것을.
서둘러 치킨을 봉지에 따로 담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연다. 부랴부랴 티슈로 기름기를 여기저기 지우지만 방 안의 치킨 냄새는 아마 상당할 것이다. 아 젠장. 나는 항상 왜 이럴까. 역시나, 잠시 뒤 들어온 아름은 소리부터 친다.
"아 뭐야! 치킨 냄새 장난 아니야. 환기 좀 하지이! 아 짜증나!"
짜증을 있는대로 부리는 그녀. 나는 그녀의 눈가부터 살핀다. 혹시 시뻘겋게 부어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평소보다 유난히 더 빡세게 한 화장 앞에 잘 모르겠다. 나 만날 때 저렇게 화장한 적이 있던가.
"미안, 미안해"
말까지 더듬는 나.
"정말? 오빠가 그랬다고?"
힘을 쓸만큼 다 쓰고 널부러진 내 성기를 귀엽다며 조물대는 유림은 정말 웃기다며 말했다.
"근데 진짜 그 년 제대로 쌍년이네. 와 진짜 오빠 멘탈 부처다 부처. 나같았으면 바로 찢었다 진짜. 왜 그랬어. 내가 다 속상하다."
"찢긴 뭘 찢어. 에휴, 근데 내가 그랬다 진짜. 참 빙신 같았지. 그걸 또 순정이네 뭐네 하며 스스로를 달랬던거 아니냐"
유림은 다시 내 팔베개를 하며 물었다.
"근데 다 그렇대더라. 남자든 여자든, 딱 한번은 그런 연애를 한다고. 진짜 빙신 같고 진짜 호구 같은 그런 연애.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빙신 짓거리.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연애 잘한대."
나는 웃었다.
"너도 그런 적 있어?"
유림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진다.
"있지"
나는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정말 말하고 싶었다면 내가 더 캐묻지 않아도 스스로 더 말했을텐데, 의외로 유림은 진짜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간 후, 유림이 물었다.
"근데 왜 나한테는 그 년한테처럼 잘 안 해줘?"
"니가 내 여친이냐"
"아 그래두"
"내 여친하면 잘해줄께"
나는 웃으면서 유림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시절 같은 오빠면 좋은데, 지금 같은 바람둥이는 싫어. 오빠 요즘 간보는 여자 있다매"
"너랑 만나면 걔 싹 정리하지"
"풉! 지랄"
"야이!"
나는 유림을 끌어안으며, 그렇잖아도 이따가 퇴실하면 예지랑 저녁이나 먹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끝 -
"나 조금 이야기 하다올게. 치킨은 먹고 있어"
"어? 어, 어어…"
친구 주리라고 둘러댔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전화의 상대가 선우라는 것을. 그 개좆같은 새끼라는 것을.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함께 치킨을 먹으며 경기를 보고 싶어서, 무려 1시간 반을 줄서서 사왔다. 그러나 여친은 나를 자신의 자취방에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씨발"
금요일 밤, 여자친구와 축구를 보며 뜨거운 밤을 보낼 것이라는 기대는 차가운 분노가 되어 내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차라리 그때 화를 냈어야 했을까. 전화기를 뺏어 집어던지고 지금 만나러 가는게 진짜 주리 맞냐고, 어디 내 앞에서 스피커 폰으로 전화 걸어보라고 소리를 쳤어야 했을까. 하지만 두려웠다. 그러다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씨발"
경기는 초장부터 2: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어마어마한 전력차,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기적'을 바랄 뿐이었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상대조차 아니었다.
"개씨발"
양선우. 초등학교 때부터 아름과 알고 지내던 동네친구. 수도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아름이가 나를 그와 소개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 사실 내 입장에서도 굳이 여친의 남사친을 얼굴 보고 싶지 않았기에-게다가 나보다 더 외모도, 조건도 좋은 남자와 대면하는 상황은 더더욱- 딱히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난 한달 전부터는 조금 상황이 달라졌다.
"씨발년"
분노는 이제 아름에게로 향한다. 그 새끼가 결혼을 한다는 소리를 나에게 전하며, 아름은 어처구니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여러 감정이 섞인 눈물이었을 것이리라.
"존나, 맛도 모르겠구만"
치킨을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름은 눈물을 보인 직후 '평생 자신의 곁에서 좋은 지기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누군가가 이제 자신에게 "안녕"을 선언하는 상황'이라 그랬다며, 오해하지 말라고 수습했지만 다른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눈물까지 흘리는 여자친구를 보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으면 좋았을까. 도대체 나는 왜 그때 "미친년아 그럼 그 새끼랑 결혼하던가" 하고 소리를 치지 못했을까.
체할 것만 같았다. 나는 치킨을 내려놓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심했다. 배알고 없고 자존심도 없이, 이 지경에서도 치킨을 목구멍에 밀어넣는 내 모습이 병신 같아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골- 아, 이러면 경기가 어려워지는데요"
한 골을 만회한 듯 했지만 다시 한 골을 빼앗긴다. 캐스터의 탄식과 함께 내 입에서도 한숨이 흐른다. 드디어 정규직 전환되었다고 여친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그 다음 날 아름은 그 놈의 이야기를 꺼내며 "내 친구는 이번에 한수원 입사했대" 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걸 왜 전하는지 몰랐지만.
사실 이미 여친의 휴대폰 사진으로 몇 번 흘낏 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도 몇 장인가 있었다. 슬림하고 늘씬한 중키에 훈훈한 얼굴, 공기업 직원이라는 안정감. 마치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력을 갖추고, 이제 조별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서서히 조직력도 맞아가기 시작하는 저 새끼들 같은 든든한 전력이다.
"난"
그에 반해 나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뭐가 있지?
"우리 대표팀, 이제 조금 더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나도 열정 패기는 좋지. 아마 장담하던데, 너는 아마 이제 그 누구를 만나도 나 이상의 절절한 사랑은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뱃 속의 장기라도 꺼내 줄 듯한 그런 무식한 사랑을 하는 나니까. 하지만 전문대 출신에다, 공장이나 다니는 못난 나는…
"후우"
얼마 전 주임 진급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 그 날, 아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선우가 요즘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말을 해서, 나름 쇼크를 받았기 때문이다. 남사친에게 여친이 생겼다고 지가 쇼크를 받을 것은 또 뭔가. 그리고 한 가지 가능성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랜 시간 곁에 있었기에 사랑이라고는 느끼지 못했기에 거절했던 남사친의 고백, 그리고 그 몇 달 후 들려온 진짜 남사친의 연애소식. 문득 비로소 냉정하게 비교하게 된 그와 현재의 남친. 몰려오는 후회와 실망감.
"…아니야 씨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애써 고개를 저었지만 여전히 그 생각은 나를 불편하고 힘든 감정 속으로 몰아넣는다. 경기는 끝나간다. 4:1, 크게 벌어진 점수차. 나의 눈은 TV를 향하지 않는다. 저 TV만 해도 그렇다. 새 자취방에 TV가 없다는 말에 곧장 밤새 중고나라를 뒤져 다음 날 아침에 TV를 샀다. 선물했지만 아름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아 뭘 또 샀어 이런걸. 나 TV 잘 보지도 않는데"
한 여름에 땀 뻘뻘 흘려가며 겨우 사들고 온 건데. 그리고 나도 큰 맘 먹고 사온건데.
"그래도 가끔 보겠지. 헤헤"
속으로 천불이 났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는 나. 나는 화도 한번 낸 적이 없었다. 무조건 내가 먼저 미안하고 내가 사과를 하는 그런 연애였다. 나는 사실 제대로 연애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한번 내준 마음 끝까지 퍼주는 연애가 내가 하는 연애였다. 병신같이.
'쩝'
가끔은 그런 나 자신이 가여웠다. 방구석에 가서는 엄마한테 큰 소리는 또 그렇게 치면서도 여친에게는 그저 호구처럼 헤헤거리기나 하는 내가 싫었다. 그냥 싹 다 버리고 헤어질까. 속상해서 코끝이 찡하고 머리가 아프다. 경기 끝났다는 말에 TV도 껐다. 나는 그대로 누웠다. 형광등 불빛이 내 감은 눈을 또 찔러왔지만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괴로우니까.
'지금쯤 넌 뭘하고 있을까'
아마 오랜 친구와 그의 새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순간순간 더러운 망상들이 뇌를 스쳤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야만 했다. 분노가 뇌를 스쳤지만 콧바람을 길게 뿜으며 마음을 식힌다.
아주 오랜 정. 우리는 남녀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감정들을 속였지만 어쩔 수 없이 엇갈람을 앞에 두고 몰아치는 아쉬움과 허전함, 그런 것들이 순간적으로 불장난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지? 불신과 분노가 머릿 속과 가슴 속, 콧 속을 넘나들며 전신을 절절 끓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잠들었다.
'…'
눈을 떴다. 밤 11시 20분. 열린 창문 틈으로 차소리가 난다. 설마설마 하면서도 창문 밖으로 내려다본다. 그리고 어이없지만 아름이가 내린다. 잠깐 이야기 좀 하다 온다는 년이 몇 시간을 있다 오는지 모른다. 나는 애써 못 본 척을 하고, 서둘러 치킨들을 치운다. 진작에 치워놓고 잘 것을.
서둘러 치킨을 봉지에 따로 담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연다. 부랴부랴 티슈로 기름기를 여기저기 지우지만 방 안의 치킨 냄새는 아마 상당할 것이다. 아 젠장. 나는 항상 왜 이럴까. 역시나, 잠시 뒤 들어온 아름은 소리부터 친다.
"아 뭐야! 치킨 냄새 장난 아니야. 환기 좀 하지이! 아 짜증나!"
짜증을 있는대로 부리는 그녀. 나는 그녀의 눈가부터 살핀다. 혹시 시뻘겋게 부어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평소보다 유난히 더 빡세게 한 화장 앞에 잘 모르겠다. 나 만날 때 저렇게 화장한 적이 있던가.
"미안, 미안해"
말까지 더듬는 나.
"정말? 오빠가 그랬다고?"
힘을 쓸만큼 다 쓰고 널부러진 내 성기를 귀엽다며 조물대는 유림은 정말 웃기다며 말했다.
"근데 진짜 그 년 제대로 쌍년이네. 와 진짜 오빠 멘탈 부처다 부처. 나같았으면 바로 찢었다 진짜. 왜 그랬어. 내가 다 속상하다."
"찢긴 뭘 찢어. 에휴, 근데 내가 그랬다 진짜. 참 빙신 같았지. 그걸 또 순정이네 뭐네 하며 스스로를 달랬던거 아니냐"
유림은 다시 내 팔베개를 하며 물었다.
"근데 다 그렇대더라. 남자든 여자든, 딱 한번은 그런 연애를 한다고. 진짜 빙신 같고 진짜 호구 같은 그런 연애.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빙신 짓거리.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연애 잘한대."
나는 웃었다.
"너도 그런 적 있어?"
유림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진다.
"있지"
나는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정말 말하고 싶었다면 내가 더 캐묻지 않아도 스스로 더 말했을텐데, 의외로 유림은 진짜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간 후, 유림이 물었다.
"근데 왜 나한테는 그 년한테처럼 잘 안 해줘?"
"니가 내 여친이냐"
"아 그래두"
"내 여친하면 잘해줄께"
나는 웃으면서 유림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시절 같은 오빠면 좋은데, 지금 같은 바람둥이는 싫어. 오빠 요즘 간보는 여자 있다매"
"너랑 만나면 걔 싹 정리하지"
"풉! 지랄"
"야이!"
나는 유림을 끌어안으며, 그렇잖아도 이따가 퇴실하면 예지랑 저녁이나 먹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