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반, 편의점을 향하던 나는 골목길 끝에서 길바닥에 술에 취해 앉아있는 여자를 봤다. 요즘 같은 세상에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나요, 저기요"
내 말에 그녀는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인다. 눈이 부어 있었다. 술에 취한건지, 실연이라도 한 건지. 그냥 쌩무시를 하길래 한번 더 무어라 하려는 순간 "꺼져"라는 말을 들었다. 살짝 코웃음이 났지만 그러기로 했다.
"또 오세요"
편의점에서 핫바와 컵라면을 샀다. 생수 한 병과. 사실 사면서도 먹을까 그냥 잘까 고민하면서 샀다. 괜히 샀나. 그리고 골목길로 다시 접어드는데 아까 그 여자가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제대로 취했네. 아까 목소리는 별로 취한 것 같진 않았는데.
"춥다"
혀를 끌끌차며 집 쪽 골목길로 접어 드노라니 털푸덕 소리가 난다. 역시나 그 여자다. 길바닥에 넘어졌다. 힐도 벗겨졌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다가가 쭈그려 앉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씨발"
…이럴 때는 아예 꺼지는게 정석이리라. 몸을 일으키노라니 그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야"
야?
"일으켜 줘"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다. 술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신을 챙기노라니 굽이 꺾여있다. 백도 널부러져 있다.
"아"
발을 못 내딛는다. 발을 삐끗한 모양이다. 신고 있는 스타킹도 올이 나갔다. 볼라고 본 것은 아니지만. 원피스에 퍼 달린 코트 하나 걸치고 몇 시간을 그러고 있던건가. 잠시 고민했다.
"업혀요"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굽 나간 힐을 손에 들고 내 등에 업혔다. 무거웠다. 끙하며 업었다. 큰길 쪽으로 향하노라니 그 여자가 말했다.
"나 배고파"
근처 24시간 가게를 떠올렸지만 요즘 때가 어느 때인가.
"지금 가게에서 밥 못 먹잖아요"
여자는 "아" 하더니 "큰길까지 데려다 줘" 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물었다.
"배고프면 우리 집에서 라면 먹을래요?"
정말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손에 든 컵라면 때문에 한 말이었지만 나도 말을 뱉으면서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를 깨달았다.
"아니…"
"그래"
하지만 내 변명과 그 여자의 대답이 비슷한 타이밍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한 짓을 하나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삔 발목으로 택시에서 내려도 집까지 가려면 고생하겠지, 하는 어설픈 변명으로 나는 나를 설득했다.
"이상한 짓 하면 신고한다"
"나 찐따에요"
회심의 한 마디였지만 여자는 웃음도 아무 대꾸도 없이 그대로 업혀있었다. 무거웠다. 집까지 가는 3분이 그리도 힘들었을 줄이야.
삑삐빅삑삑 띠릿-
집에 이름도 모를 여자를 들인다. 아니 나보다 여자가 더 황당한 일이겠지.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그제서야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아아"
그녀는 발목 상태를 확인했다. 언뜻 보기에도 꽤 부어 있었다. 설마 금이라도 갔나 싶을 정도로. 아마 여자도 자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 라면 먹을 때가 아니라 병원을 가야할 때 아닌가 싶은데.
"물 끓여서, 수건에 부어와. 라면도 준비하고"
"알았어요"
마치 미드 속 응급실의 한 장면처럼 지시하는 그녀. 난 여자가 시키는대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카톡을 했다. 그러더니 곧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나에게 조용하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어어, 나 지금 교대 뒷골목 쪽인데, 잠깐 차 좀 갖고 나와. 아냐, 나 지금 못 움직여서 그래. 머? 씨발. 아 짜증나. 야, 그럼… 아니다. 어, 아냐. 어어, 알았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은 그녀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삼촌, 지금 교대쪽으로 나올 수 있어요? 어, 아니, 지금 일을 어디서 해. 그냥. 어, 지금? 어어, 한 20분? 30분? 어어, 알겠어요. 여기 위치 카톡으로 보낼께. 어 고마워요"
그녀의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물을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넌 뭔 생각으로 함부러 집에 사람을 들여?"
여자는 발목을 조심스럽게 주무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너는 무슨 생각으로 계속 반말을 하냐고 되물으려다가 그냥 "불쌍해서"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혼자 사는거야?"
어라고 대답을 할까 네라고 대답을 할까 하다가 "어"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너 근데 그러다가 진짜 큰일나. 내가 지금 만약 너 신고하면 너 바로 좆되는거야. 알아? 납치야" 하고 쌩뚱맞은 말을 한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어서 허탈웃음을 한번 짓다가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길래 컵라면을 뜯었다.
"내 말 농담 같지? 너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
"아는데, 그쪽이 그럴 사람 같지는 않네요. 나 그리고 서른 둘이에요. 몇 살이에요?"
컵라면에 스프를 뿌리며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수건에 뜨거운 물 좀 뿌려와 봐" 하고 말을 돌린다. 나는 군말없이 수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끈뜨끈한 수건을 한번 짜서, 그냥 얇은 일반 수건 하나를 더해 여자에게 건냈다. 그리고 남은 뜨거운 물을 라면에 붓고, 핫바를 돌렸다.
"라면 하나만 끓이는거야?"
"하나만 샀으니까"
아뜨뜨 하면서 수건을 발목에 대던 여자는 정색하며 나를 쳐다본다. 뭐야, 줘도 난리야.
"넌?"
"난 됐어. 배고파서 사러 간거 아냐. 내일 아침에 먹을라고 산거야"
"지랄. 그럼 너 먹어"
"누나 먹어요"
손사레를 치는 그녀에게 라면을 대령하니 픽하고 웃는다.
"내가 왜 누나야?"
"뭐야, 몇 살인데. 계속 반말하길래 누난 줄 알았지"
"그럼 너도 반말해"
끝까지 나이는 안 밝힌 그녀는 꽤나 허기가 졌는지 라면이 채 다 익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먹기 시작한다. 다 돌아간 핫바도 전자렌지에서 꺼내 건내니 "그건 니 먹어" 하면서 거부한다. 몇 분 간의 침묵. 새삼 느끼지만 예쁘다. 입은 원피스도 세련됐다. 까만 원피스에 하얀 깃, 반짝이는 퍼 달린 코트도 멋있고.
"이름 물어봐도 돼?"
하지만 대답 대신 젓가락 쥔 반대편 손의 중지가 날아온다. 라면은 두어 젓가락이나 먹었을까. 여자는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신다. 면은 안 먹고 국물만 잔뜩 들이킨 그녀는 "혹시 안 신는 쓰레빠 있어?" 하고 묻는다.
"있어"
"빌려줘"
"갚긴 하는거야?"
피식 웃은 그녀는 백에서 지갑을 꺼낸다.
"아냐, 농담이야"
하지만 여자는 지갑에서 5만원짜리를 꺼낸다.
"뭔데"
뭔 10만원이나 주냐며 치우라고 했지만 여자는 "지랄 말고 받어" 하고 바닥에 돈을 내려놓는다. 무어라 더 말을 할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여자는 카톡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핫바를 먹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이번에는 내가 뜬금없이 돈을 보며 말했다.
"돈 말고, 전번 주면 안돼?"
여자는 또 정색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컵라면을 내려놓고는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마침 전화가 왔다.
"아, 네네. 여기… 파초선 있는 동네, 그 사거리 안으로 들어와서 골목 입구에 백원종 순두부 집 있어요. 네네, 맞아요. 거기 골목 안으로 좀 쭉 들어와 주세요. 나 지금 발을 다쳐서 그래요. 못 걸어. 어어, 알겠어요"
컵라면은 거의 먹지도 않았다. 몇 분인가를 더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뒤 말했다.
"밑에 까지만 부축해줘. 그리고 넌 집 안에 있어"
"알았어"
여자는 손에 힐을 들고, 내 슬리퍼를 신었다. 아픈 발을 거의 끌듯이 겨우겨우 걷는다.
"많이 아파 보인다. 바로 응급실이라도 가던지"
"됐어"
부축을 받으며 걷는 그녀. 향수 냄새가 진하다.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이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1층 계단까지 내려오자 여자는 "됐어, 이제 넌 여기 있어" 하더니 혼자 계단을 잡고 힘들게 힘들게 내려간다. 그리고는
"고마워"
하고 한 마디하며 돌아본다. 소름끼치게 예쁘다. "이름도 물어보면 안돼? 난 조승원이야" 하고 말했지만 여자는 끝내 "알아서 뭐해" 하고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는 곧 골목 앞에 서있는 SUV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약간 허탈한 마음에 허기를 느껴,그녀가 먹다 남긴 라면을 후루룹 다 먹었다.
"쩝"
그리고는 남겨두고 간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득이네"
방에 라면 냄새가 가득한 와중에도 아직도 희미하게 남은 것만 같은 여자의 짙은 향수 냄새를 그리며, 세탁기에 수건 두 장을 넣었다.
- 끝 -
"일어나요, 저기요"
내 말에 그녀는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인다. 눈이 부어 있었다. 술에 취한건지, 실연이라도 한 건지. 그냥 쌩무시를 하길래 한번 더 무어라 하려는 순간 "꺼져"라는 말을 들었다. 살짝 코웃음이 났지만 그러기로 했다.
"또 오세요"
편의점에서 핫바와 컵라면을 샀다. 생수 한 병과. 사실 사면서도 먹을까 그냥 잘까 고민하면서 샀다. 괜히 샀나. 그리고 골목길로 다시 접어드는데 아까 그 여자가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제대로 취했네. 아까 목소리는 별로 취한 것 같진 않았는데.
"춥다"
혀를 끌끌차며 집 쪽 골목길로 접어 드노라니 털푸덕 소리가 난다. 역시나 그 여자다. 길바닥에 넘어졌다. 힐도 벗겨졌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다가가 쭈그려 앉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씨발"
…이럴 때는 아예 꺼지는게 정석이리라. 몸을 일으키노라니 그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야"
야?
"일으켜 줘"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다. 술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신을 챙기노라니 굽이 꺾여있다. 백도 널부러져 있다.
"아"
발을 못 내딛는다. 발을 삐끗한 모양이다. 신고 있는 스타킹도 올이 나갔다. 볼라고 본 것은 아니지만. 원피스에 퍼 달린 코트 하나 걸치고 몇 시간을 그러고 있던건가. 잠시 고민했다.
"업혀요"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굽 나간 힐을 손에 들고 내 등에 업혔다. 무거웠다. 끙하며 업었다. 큰길 쪽으로 향하노라니 그 여자가 말했다.
"나 배고파"
근처 24시간 가게를 떠올렸지만 요즘 때가 어느 때인가.
"지금 가게에서 밥 못 먹잖아요"
여자는 "아" 하더니 "큰길까지 데려다 줘" 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물었다.
"배고프면 우리 집에서 라면 먹을래요?"
정말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손에 든 컵라면 때문에 한 말이었지만 나도 말을 뱉으면서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를 깨달았다.
"아니…"
"그래"
하지만 내 변명과 그 여자의 대답이 비슷한 타이밍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한 짓을 하나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삔 발목으로 택시에서 내려도 집까지 가려면 고생하겠지, 하는 어설픈 변명으로 나는 나를 설득했다.
"이상한 짓 하면 신고한다"
"나 찐따에요"
회심의 한 마디였지만 여자는 웃음도 아무 대꾸도 없이 그대로 업혀있었다. 무거웠다. 집까지 가는 3분이 그리도 힘들었을 줄이야.
삑삐빅삑삑 띠릿-
집에 이름도 모를 여자를 들인다. 아니 나보다 여자가 더 황당한 일이겠지.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그제서야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아아"
그녀는 발목 상태를 확인했다. 언뜻 보기에도 꽤 부어 있었다. 설마 금이라도 갔나 싶을 정도로. 아마 여자도 자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 라면 먹을 때가 아니라 병원을 가야할 때 아닌가 싶은데.
"물 끓여서, 수건에 부어와. 라면도 준비하고"
"알았어요"
마치 미드 속 응급실의 한 장면처럼 지시하는 그녀. 난 여자가 시키는대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카톡을 했다. 그러더니 곧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나에게 조용하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어어, 나 지금 교대 뒷골목 쪽인데, 잠깐 차 좀 갖고 나와. 아냐, 나 지금 못 움직여서 그래. 머? 씨발. 아 짜증나. 야, 그럼… 아니다. 어, 아냐. 어어, 알았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은 그녀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삼촌, 지금 교대쪽으로 나올 수 있어요? 어, 아니, 지금 일을 어디서 해. 그냥. 어, 지금? 어어, 한 20분? 30분? 어어, 알겠어요. 여기 위치 카톡으로 보낼께. 어 고마워요"
그녀의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물을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넌 뭔 생각으로 함부러 집에 사람을 들여?"
여자는 발목을 조심스럽게 주무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너는 무슨 생각으로 계속 반말을 하냐고 되물으려다가 그냥 "불쌍해서"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혼자 사는거야?"
어라고 대답을 할까 네라고 대답을 할까 하다가 "어"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너 근데 그러다가 진짜 큰일나. 내가 지금 만약 너 신고하면 너 바로 좆되는거야. 알아? 납치야" 하고 쌩뚱맞은 말을 한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어서 허탈웃음을 한번 짓다가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길래 컵라면을 뜯었다.
"내 말 농담 같지? 너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
"아는데, 그쪽이 그럴 사람 같지는 않네요. 나 그리고 서른 둘이에요. 몇 살이에요?"
컵라면에 스프를 뿌리며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수건에 뜨거운 물 좀 뿌려와 봐" 하고 말을 돌린다. 나는 군말없이 수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끈뜨끈한 수건을 한번 짜서, 그냥 얇은 일반 수건 하나를 더해 여자에게 건냈다. 그리고 남은 뜨거운 물을 라면에 붓고, 핫바를 돌렸다.
"라면 하나만 끓이는거야?"
"하나만 샀으니까"
아뜨뜨 하면서 수건을 발목에 대던 여자는 정색하며 나를 쳐다본다. 뭐야, 줘도 난리야.
"넌?"
"난 됐어. 배고파서 사러 간거 아냐. 내일 아침에 먹을라고 산거야"
"지랄. 그럼 너 먹어"
"누나 먹어요"
손사레를 치는 그녀에게 라면을 대령하니 픽하고 웃는다.
"내가 왜 누나야?"
"뭐야, 몇 살인데. 계속 반말하길래 누난 줄 알았지"
"그럼 너도 반말해"
끝까지 나이는 안 밝힌 그녀는 꽤나 허기가 졌는지 라면이 채 다 익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먹기 시작한다. 다 돌아간 핫바도 전자렌지에서 꺼내 건내니 "그건 니 먹어" 하면서 거부한다. 몇 분 간의 침묵. 새삼 느끼지만 예쁘다. 입은 원피스도 세련됐다. 까만 원피스에 하얀 깃, 반짝이는 퍼 달린 코트도 멋있고.
"이름 물어봐도 돼?"
하지만 대답 대신 젓가락 쥔 반대편 손의 중지가 날아온다. 라면은 두어 젓가락이나 먹었을까. 여자는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신다. 면은 안 먹고 국물만 잔뜩 들이킨 그녀는 "혹시 안 신는 쓰레빠 있어?" 하고 묻는다.
"있어"
"빌려줘"
"갚긴 하는거야?"
피식 웃은 그녀는 백에서 지갑을 꺼낸다.
"아냐, 농담이야"
하지만 여자는 지갑에서 5만원짜리를 꺼낸다.
"뭔데"
뭔 10만원이나 주냐며 치우라고 했지만 여자는 "지랄 말고 받어" 하고 바닥에 돈을 내려놓는다. 무어라 더 말을 할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여자는 카톡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핫바를 먹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이번에는 내가 뜬금없이 돈을 보며 말했다.
"돈 말고, 전번 주면 안돼?"
여자는 또 정색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컵라면을 내려놓고는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마침 전화가 왔다.
"아, 네네. 여기… 파초선 있는 동네, 그 사거리 안으로 들어와서 골목 입구에 백원종 순두부 집 있어요. 네네, 맞아요. 거기 골목 안으로 좀 쭉 들어와 주세요. 나 지금 발을 다쳐서 그래요. 못 걸어. 어어, 알겠어요"
컵라면은 거의 먹지도 않았다. 몇 분인가를 더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뒤 말했다.
"밑에 까지만 부축해줘. 그리고 넌 집 안에 있어"
"알았어"
여자는 손에 힐을 들고, 내 슬리퍼를 신었다. 아픈 발을 거의 끌듯이 겨우겨우 걷는다.
"많이 아파 보인다. 바로 응급실이라도 가던지"
"됐어"
부축을 받으며 걷는 그녀. 향수 냄새가 진하다.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이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1층 계단까지 내려오자 여자는 "됐어, 이제 넌 여기 있어" 하더니 혼자 계단을 잡고 힘들게 힘들게 내려간다. 그리고는
"고마워"
하고 한 마디하며 돌아본다. 소름끼치게 예쁘다. "이름도 물어보면 안돼? 난 조승원이야" 하고 말했지만 여자는 끝내 "알아서 뭐해" 하고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는 곧 골목 앞에 서있는 SUV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약간 허탈한 마음에 허기를 느껴,그녀가 먹다 남긴 라면을 후루룹 다 먹었다.
"쩝"
그리고는 남겨두고 간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득이네"
방에 라면 냄새가 가득한 와중에도 아직도 희미하게 남은 것만 같은 여자의 짙은 향수 냄새를 그리며, 세탁기에 수건 두 장을 넣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