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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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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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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해주시면, 소정의 사례금도 드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린 말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휴 아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저는 그런거 못 합니다. 무대 울렁증이 있어가지고, 남 앞에 딱 서면 잘하던 농담도 어버버 거린다니까요"

보통은 그렇게 거절하면 깔끔하게 끝이련만, 그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번의 강의지만, 반응이 좋고 또 그러면 또 다른 제안도 받으실 수 있고, 실제로 저희 강연회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 매번 회당 막 300, 500만원씩 강의료 받으면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그런 분도 계시거든요. 잘 하실 수 있잖아요."

그 말에는 살짝 흔들렸다. 그런가, 잘 풀리면 또 이야기가 다르려나.

"고민해볼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시작했다.




강연




내 말에 소정이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오빠가? 그럼 오빠가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는거야?"
"아 그래, 상상만 해도 막 아찔한데, 그래도 뭐 25분만 강연하면 30만원 준다고 해서 눈 딱 감고 하기로 했어."

그래, 돈이 끌렸다. 그리 막 큰 돈도 아니지만, 작은 돈은 결코 아니니까. 소정이는 이것저것 묻다가 또 훅 들어왔다.

"나 거기 가도 돼? 오빠 강연하는거 보고 싶은데?"
"아 무슨 소리야. 그리고 평일 5시 강의라서 안돼. 나도 반차내고 가는거야. 그리고 너 오면 떨려서 더 안 돼"
"아 뭐야, 완전 꿀잼일텐데. 알겠어. 포기. 그럼 강연은 언제 하는건데?"
"2주 뒤, 금요일에"
"알았어. 그럼 준비 잘 해서, 완전 멋있게 강연하구 와"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꼭 엎친데 덮친다고, 기간이 2주나 있으니까 설렁설렁 준비하면 되겠구나 했더니 회사에 일이 터졌다. 지난 번에 공급된 건이 잘못되서 그걸 사실상 새로 엎어야 했다. 두 달 걸려 끝낸 일을 불과 3주 안에. 첫 주는 주말 출근까지 해야할 판이었고, 금요일 반차 내는 것도 엄청 눈치 봐가면서 겨우 냈다.


"아 오셨어요?"
"네"
"준비 많이 하셨나요?"
"어, 아뇨. 하나도 못했습니다. 지금 손발이 다 벌벌 떨려요"
"하하, 얼굴은 여유만만이신데요"

그녀는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졸린 눈 비벼가며 겨우 강연 슬라이드 완성했고, 그나마도 어제 새벽 4시까지 만든거다. 강연 리허설 따위는 할 시간조차 없었다. 앞선 강연자의 '멀티 플랫폼에서의 다채널 게임 마케팅' 강연을 보면서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다'

나는 그냥 나같은 아마추어들의 약간 대학교 조별과제 발표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앞선 강연자의 레벨은 거의 프로급이었다. 약 150여 명의 내방객들 앞에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아주 쉽게 풀어서, 적절한 비유와 농담을 섞어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미친 강연이었다. 대기업 마케터들은 과연 저런 사람들인가. 세상에.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저 사람 반의 반만 화술이 있었어도 이번 일이 그 꼴나지는 않았을텐데.

"질문 있으신가요? 네, 그쪽의 손 드신 선생님"
"네, 상상피플의 강성태 부장입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한 가지 궁금했던게, 저희 업계에서는 아무래도 세계 각국의 글로벌한 환경에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다양한 채널이 함께 연계되는 마케팅을 기획하다보면, 국가나 기반 환경에 의해서 조금씩 환경이 다르거나 제약되는 부분들이 조금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인터넷 인프라가 조금 약한 나라에서의 온라인 마케팅이나 중국에서의 SNS 마케팅처럼…"

일단 참석자들부터 30대 실무자들은 물론이거니와, 40대 50대 임원급으로 보이는 사람들마저 제법 있었다. 아 그거였구나. 소희씨가 '여기서 강연 잘 하면 진짜로 업계에서 일 잘 풀리기도 하거든요'라고 귀뜸했던게 이런 거였구나. 게다가 아까 자기들끼리 인사 나누는 모습 보면서 '어?!' 싶었을 정도로 어디서 이름 좀 들어본 업계의 '네임드' 구루들마저 꽤 와있었다.

'진짜 좆됐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얼른 노트북을 펴고 강연할 내용을 다시 한번 옹알옹알 정신없이 다시 살펴보았지만, 이제보니 영 구린 것도 같고, 앞의 저런 달변 강연자를 보니 용기마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게 막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 다음은 레오버닷넷의 스타 개발자, 발달린칼 님 강연입니다. 강연 주제는 '휴먼 해킹'입니다"

강연 제목부터 훅 사람을 끌어가는 내용이다. 내용 역시 듣다보니 무척 흥미로웠다. 보통 해킹이라고 하면 천재 개발자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미친듯이 노트북 두드리며 방화벽이나 온갖 보안 프로그램을 다 피하고 들어가서 정보 훔쳐내는 그런 것부터 생각하지 않는가.

"의외로 그런 쪽의 해킹이 실제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애초에 오픈된 서버에 런치되는 데이터는 크리티컬한 자료들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러나 현실에서의 해킹은 의외로 '퇴사한 사원의 정리 안 한 아이디와 비번', '신입사원의 바이러스 묻은 USB', '외부 서버관리자의 작은 게으름' 같은 것부터 해서, '모두를 위해 공유한 소스 내에 계정과 관계된 특정한 코드가 노출되는 경우' 하다못해 "안녕하세요 여기 CS센터인데요, 콜센터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되는데 원격으로 좀 처리 가능할까요?" 하면서 살짝 열린 문 등등, 아주 다양한 해킹사고의 이면들을 빠꾸 없이 실제 기업명을 까며 사례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아주 흥미로웠다. 전혀 문외한인 나조차도 즐겁게 들었을 정도로.

'어?'

정신없이 듣고 있노라니 강연이 마무리 되었고, 뜨거운 반응 속에 10개가 넘는, 보통 사람은 이해도 못할 심도 높은 질문과 답변 속에 드디어 '발달린칼'님의 강연이 진짜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그 다음은 나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많은 분들이 기다리셨습니다. 다음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소설 블로그의 '스타일박스게이'님이십니다!"

'그냥 스타일박스'라고 정정하고 싶었지만 이메일 주소 때문에 착각한 모양인지 나를 '스타일박스게이'라고 소개한 사회자 소희씨의 말과 함께 나는 무대로 나갔다. 방금 전까지 개발자들의 훈훈하고도 열띈 토론의 장이, 내가 무대에 오르자 한순간에

'뭐라고? 게이?', '저 새끼 뭔데?', '뭐지', '성소수자 강연 같은건가?'

같은 반응으로 바뀌었다. 꽤 당황한 눈으로 안내 팜플렛을 뒤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가장 당황한건 나였다.


"어…반갑습니…다, 여러분"

너무 쫀 탓일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큼! 큼!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저 쪽에서 "안 들려요"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어… 네네, 큰 목소리로 말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작았던지 "안 들려요" 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그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압도했기에 장내는 웃음꽃이 피었다. 내 등에서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렀고. 소희씨가 얼른 다가와 마이크를 교체해주었다. 아, 마이크 문제였나.

"하아, 넵 반갑습니다. 스타일박스라고 합니다"

겨우 용기를 내서 자기소개를 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소희씨에게 건내 받은 슬라이드 리모컨으로 화면에 크게 띄운 PPT의 첫 장을 오픈했다.

[ B급 감성과 온라인 커뮤니티 ]

그래, 이제 와서 보니 강연 주제부터 구려도 너무 구렸다. 젠장, 주제가 구리면 제목이라도 조금 더 다듬을 수 있었는데. 제목부터 구렸다.

"어, 그러니까, 제가 오늘 강연할 내용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기본적인, 어떤, 그런 정서… 오덕문화, 비급감성, 찌질이 문화 그런 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이 그 또래 집단 내에서 어떤 형태로 응용되는지, 그런거… 를, 온라인 환경에서의 마케팅에 연결지어서…"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내가 준비한 말이 아닌데. 머릿 속이 복잡했다. 첫 스타트가 이상하게 시작되자, 모든 스텝이 꼬였다.

"밈 형태로 구현되는 자기비하는, 어… 이 개구리는 다들 보셨죠. 네, 이게 그러니까 어 뭐더라…"

좆됐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봉투에 담긴 강연료를 받으면서도 미안했다. 그러자 소희씨는 내 팔뚝을 치면서 "아니에요, 웃음 주신 것만으로도 오늘 강연비 200% 초과달성입니다" 라면서 짖궂게 농담을 해왔다. 그 말이 차라리 고마웠다.

"아, 진짜 평생 팔 쪽 오늘 다팔았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농담이고 오늘 정말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또 다른 강연 부탁 드릴께요"
"어휴,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트라우마 생기고도 남았습니다"
"하하, 네, 그럼 살펴 가세요. 저희는 여기 정리를 좀 해야 되서"
"네네"

강연장을 나왔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쳤다. 갑자기 커피와 베이글이 맹렬히 땡겼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이 시발, 뭐한다고 병신 같이 이런 걸 한다고 해서.

"하아 씨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역 방향은 저쪽이었음에도, 괜히 한참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그냥 택시를 잡아탔다. 하필이면 모범택시였지만 상관없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눈을 한참 감고 있노라니 전화가 왔다.

"어"

소정이었다.

"어땠어? 강연"

나는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솔직하게 "아 그냥 나 개쪽팔았어. 완전 사람들 앞에서 망신망신 그런 망신이 없었어. 말 하다가 한참 멍하니 있고, 막 아 이거 뭐지 뭐지 하고, 횡설수설하고, 아 진짜 2시간 같은 25분이었어. 참, 25분 강연인데 15분 만에 끝냈어" 하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의외로 가슴이 좀 후련했다.

"아휴, 수고했어. 그럼, 그런게 어디 쉽나. 남 앞에서 그러는게"

평소답지 않게 소정이가 달래주니 마음이 뭉클했다. 하마터면 택시 안에서 울 뻔 했다. 겨우 간신히 울음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돈 생겼으니까 맛있는거 먹자. 주말에 고기 사줄께"


하지만 우리가 주말에 향한 곳은 고기집이 아니었다.

"아프다. 팔 저려"
"야 그래도 암 막는 주산데 아무렴"

자궁경부암 예방주사. 일전에 한번 이야기를 했던게 생각나서, 그거 맞혀준다고 예약 잡으라고 한 건데 솔직히 가격보고 개깜놀했다. 백신주사 같은거 생각하고 한 3만원, 비싸야 10만원쯤 할 줄 알았는데. 한방에 탕진.

"고마워"

고맙다며 내 손을 잡아주는 소정이.

"그래, 그니까 평생 아프지마. 암 같은거 절대 걸리지마"
"알았어, 오래오래 살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난, 조금은 허무했지만 그 무엇보다 보람찬 기분이었다. 그래, 니 암을 막을 수 있다는데, 내 쪽 좀 파는게 무슨 대수랴.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그냥 인덕원 역 앞을 지나치면서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생각해보니 해준게 너무 없었다. 꼭 물질적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 흔한 지갑 하나, 그 흔한 패딩 한벌 사준 기억이 없었으니까. 꼴랑 그거 하나가 전부였다.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아프지마"

신호대기를 기다리며 나는, 전해질 일 없는 말을 그렇게 중얼거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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