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조졌다. 뭐 원래부터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하면 인서울?' 정도는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그냥 쌩으로 조졌다. 시발거.
"야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니가 재수한다고 성적이 과연 잘 나올 수 있을까? 아마 재수하면 하루 8시간 게임, 12시간 잠, 30분 책 펴기, 2시간 휴대폰, 나머지 딸딸이. 끝. 그게 니 확정적인 일과 아니겠냐?"
지 신발 사이즈 반토막에 가까운 수능 성적을 들고도 터무니 없이 재수를 고민하는 미친 승훈이 병신한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 잘난 아들이랍시고 온 동네 맨날 아들자랑을 하고 다니던 엄마에게는 충격적인 현실이었고, 아버지는 "원 참,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할 무거운 현실이었다.
게다가 그나마의 성적으로도, 입시전략 따위 하나도 없이 그냥 고 3 선생님이 어디서 주워온 적당한 배치표 하나 보고 쑤셔 넣었으니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3학년이 되고서야 뒤늦게 그 해의 입학 커트라인을 우연히 알게 됐고, 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자퇴하러 달려갈 뻔 했다)
"아 이게 뭐라고 온 가족이 와"
"엄마는 대학교 못 나왔잖아. 어디 대학교 구경이라도 해보자"
그것도 모자라 입학식 때 온 가족이 구경왔고, 꽃다발 들고 한복까지 차려입고 오신 우리 어머니에 대해 나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남중남고를 나온 나에게 있어서, 대학교는 확실히 신세계였다. 지방대 문과 주제에 우리 학과는 왜이렇게 이쁜 애들이 없을까 탄식이 절로 나오긴 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면 바로 그래서 여자애들하고 입 털기는 쉬웠다.
"재호랑 주아랑 사귄다던데?"
"정말? 몰랐는데. 지난 주에 소개팅 한다 어쩐다 하더니만"
"그래서 초조해서 주아가 들이댔나부지"
"대박. 아 근데 너무 부럽다"
"너도 연애하면 되지"
"해미야, 나랑 사귈래?"
"아 죽어 그냥"
콧수염 레이저 시술 받은 승훈이가 머리 기르면 이렇게 생겼지 싶은 해미부터 성격은 좋은 윤정, 나보다 힘쎈 수아 등등 전혀 부담없는 친구들과(물론 그녀들 역시도 나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가던 나.
"침 흘리면 죽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함께 타고, 탈 때마다 맨날 너무 졸립다면서 내 어깨를 곧잘 빌리던 수아에게 나는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게 되었다.
"야 병신아, 병신아? 잘 생각해 봐. 암만 니가 모쏠찐따라고 해도 솔까 여자애가 매주마다 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데 그냥 그렇게 방치만 한다고? 아 시발, 나였으면 임마 지금 애가 둘이다"
승훈의 닥달과 알게 모르게 쌓여온 내 안의 어떤 어줍잖은 확신은 기어코 돌발 고백이라는 미친 짓에 이르렀다. 결과는 역시나 "왜?" 라는 황당한 표정의 수아와 씁쓸한 "그냥'이라는 변명으로 돌아왔다.
"아 죽고 싶다"
무회전 슛이라도 연습하듯 나는 미친듯한 싸커킥을 이불 속에서 날려댔지만, 의외로 그 고백은 나비효과가 꽤 컸다.
"너 수아한테 고백했다매? 대박이다 진짜"
수아 고 기집애는 고걸 또 그새 다른 애들한테 나불냈는지(나중에 알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수아 역시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나를 피해다니는 와중에 그걸 캐치한 다른 애들이 캐물어서 알아낸 것) 나는 참으로 민망했지만, 사실 내 변명은 꽤 그럴싸했다.
"사랑이 죄냐? 죄냐고"
"아, 미친 놈"
해미와 윤정은 발정이라도 났나며 웃어댔고, 나 역시도 "사랑이 죄냐고"를 연발하며 웃었다. 근데 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과의 또 다른 인싸 종현이 난데없는 제안을 해왔다.
"너 소개팅 안 할래?"
"나?"
놀랍게도 그 '재호'의 땜빵 소개팅이었다. 보통 소개팅이라는건 어느 정도 '끕'이 맞는 애들끼리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재호랑 급이 맞는 여자애면 나한텐 완전 좀 무리 아닌가, 하는 내 안의 찐따적 망설임이 '혹시 이거 무슨 몰카라도 하는거 아님?' 같은 망상으로까지 번졌지만, 종현의 초이스는 이유가 있었다.
"웃긴 애 좋아한대"
"아, 웃긴 애~"
옆에 있던 해미는 미친듯이 웃으며 바닥을 굴렀지만, 어쨌거나 종윤의 휴대폰 속에서 웃고 있는 단발머리 그녀의 미소는 수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수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어, 반갑습니다"
"뭐야, 우리 동갑이잖아. 말 놔. 요"
"어 그래"
"아 뭐야, 웃겨"
어깨만 겨우 가리는 짧은 소매의 타이트한 줄무늬 탑에 흰 핫팬츠. 그 짧은 옷을 완벽히 소화하는 몸매와 아이돌 같은 얼굴, 아기자기한 귀걸이부터 웃을 때는 손으로 가려다 다 안 가려지는 큰 입과 시원시원한 성격. 와 세상에 인싸들은 이렇게 이쁜 애들이랑 어울리는구나. 솔직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쁜 그런 얼굴이었다.
[ 어때? 이쁨? 걔도 불쌍하다 이 날씨 좋은 날에 너같은 폭탄남이랑 소개팅이라니 ]
[ 야, 수아 지금 울어 ]
[ 아꺼져 미친 것들아 나 소개팅이라고 ]
카톡으로 해미, 윤정 등등이 시비를 걸어왔지만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현아. 하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이쁜거냐. 진짜 이렇게 이쁜 애랑 소개팅이라니, 고마운 마음에 종현이 축구화라도 핥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눈 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밥 뭐 먹을까? 여기 뭐가 맛있지?"
"난 다 좋아. 근데 이거 이거 맛있어"
"여기 와봤어?"
"맨날 오는데?"
"뭐?"
뭐야, 이런 레스토랑을 맨날 온다고? 얘네 집 갑분가. 살짝 쫄렸다. 이런 애랑 사귀면 맨날 이런데 데리고 와야 되는건가, 아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되는건데 참, 얘랑 결혼하면 진짜 서울에 48평 아파트 뭐 이런거 사야 되나, 하는 망상까지 한바퀴 돌고는 "오, 그래 그거 먹자" 하며 나는 현아가 짚은 것들을 주문했다. 9만 4천원이었다. 그나마도 내건 일부러 좀 싼 거 고른건데. 지난 주에 수아, 해미, 윤정 돈까스 한번 사줬다고 생색 냈던 기억에 그녀들한테 미안했다.
"종현이랑은 별로 안 친해?"
내 몇 안되는 장점이자 단점이 때때로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점인데, 그 점이 현아한테는 제법 먹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 몰라, 솔직히 막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냐. 근데 같은 과고, 교양도 겹치는게 좀 있어서 인사는 꽤 하는 사이지. 근데 딱 보면 좀 그런거 있잖아. 걔는 전형적인 인싸 타입이고, 나는 좀 게임 같은거 좋아하는, 그런"
"오덕 오덕?"
오덕 오덕 하면서 손가락으로 안경을 만들어 돌리는 현아의 모습에 나는 진짜로 그녀한테 입덕해버렸다. 뭐야, 나 지금 꿈이라도 꾸는건가. 근데 현아의 말로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단다.
"걔가 초등학교 때 축구부 하고, 생긴 것도 좀 인상이 쎄게 생겨서 그렇지, 걔도 게임 좋아하고 그래. 그리고 너 은근 웃기다고 좋아해. 근데 좀 걔가 성격상 막 누구한테 친근하게 대하고 이런거 잘 못해서 그래"
"친근하게 못한다고? 종현이가 이 소개팅 시켜준건데?"
"소개팅?"
소개팅이라는 말에 순간 1초 정도 멈칫했던 현아는 "아, 너 소개팅으로 알고 여기 나온거야?" 하고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시발 글렀네. 갑작스러운 굴욕감과 종현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던 이후의 5초지만, 얼굴을 쓸어내린 내가 "아니야?"라고 어색한 미소로 묻는 내 말에 현아는 웃으며 답했다.
"하는거 봐서"
"뭐야 그게"
그리고 현아는 그런 '뭐야 그게' 같은 퉁명스러운 대답에 또 빵 터지며 좋아했다. 웃음이 헤퍼서 좋았다. 정말로.
"완전 배부르다"
"그치?"
양이 적어 보였는데 먹다보니 제법 배가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는 한층 가벼워진 체크카드 속 숫자에 마음 속 깊이 가벼운 한숨을 내쉴 무렵 현아는 내 손목을 잡아 이끌며 "저기 가자" 하고 뭔 동네 게임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
후덕한 인상의 주인 아저씨와 현아는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고, 현아는 "뭐야, 요즘 가게 왜 이렇게 자주 닫아요?" 하고 물었다. 아저씨는 "오빠가 요즘 바빠요. 출장을 전국으로 다녀. 뭐야, 옆에는 남자친구?" 하며 은근히 나를 의식하며 대답한다. 현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경계의 시선.
"안녕하세요"
아마도 자신만의 어떤 요정 같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어떤 그런 슬픈 아이돌팬 같은 경계심이 아닐까 하며, 해미나 수아, 윤정이 어쩌다 소개팅이라도 한다고 하면 괜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그런 감정과 동류의 감정이겠거니 하며 이해했다. 그렇지만 또 그렇다고 굳이 "아니요, 친구에요"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현아는 남친이냐고 묻는 질문을 못 들은 것인지, 적당히 무시하는 것인지 어느새 게임 진열장 쪽으로 향했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왜 종현이 이런 이쁜 애한테 나를 소개팅, 아니 소개시켜 준 것인가를. 그래, 그런 타입의 애들이 종종 있지. 누가 봐도 이쁘고 괜찮은 앤데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그래서 그 바닥에서는 곧바로 네임드에 여왕벌이 될 수 있으면서도 일반인 코스프레도 기가 막히게 잘 되는 애들. 누가 봐도 그런거 좋아할 외모(?)는 아니니까.
"흠"
게임을 몇 가지 훑어보면서도, 어쨌거나 기분이 살짝 묘했다. 뭐라고 해야될까, 이건 좀 웃기는 감정이지만 약간은 실망이라고 해야되나. 물론 게임 좋아하는 여사친이라니,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지는 캐릭터지만 뭐랄까, 내 찐따적 인생에서 나를 구원해 줄 인싸녀 같은 것을 상상했는데 '동류'라니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아쉬움이 드는? 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배가 부르긴 부르지, 지금 확실히'
"집에 플스 있어?"
내 질문에 현아는 "플스, 엑박 다 있지. 오빠 거지만 옛날에 세턴도 있었어" 라며 자랑했다. 나보다 더 상급의 덕후다. 그보다 새턴이라니, 그 오빠도 어지간한 덕후구나. 집에 엄청난 컬렉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친해지고 싶다.
"넌?"
"난 없어. 오로지 PC만 있어"
"그래?"
의외라는 듯한 반응.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게임 고르기 삼매경, 그리고 현아의 뒤태와 나를 계속 흘낏 흘낏 쳐다보는 아저씨의 애절한 눈빛에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30분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둘 다 아무 것도 고르지 않고 나왔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또 와~"
벤치에 앉은 현아와 한참을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노라니, 중간중간 그녀가 누군가와 카톡하는게 묘하게 신경쓰였다. 남자일까. 하기사 이렇게 이쁘장한 애니, 주변에 남자들이 오죽 많겠는가. 종현이 같은 타입의 잘 생긴 훈남들부터, 저 게임샵 사장님 같은 돈 많은 덕후들까지. 뭔 말만 하면 잘 웃어주는 현아였기에 '어쩌면' 하는 작은 자신감이 그렇게 금새 바스라지며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초등학교 때는 걔가 나보다 키가 작았거든. 축구부면 운동부잖아, 근데도 6학년 때까지 나보다 작았던 애가 중학교 가더니 막 크기 시작해서 지금처럼 된거야. 지금 걔가 키가 몇이더라? 78인가? 뭐 그렇게까지 큰 건 아니지만"
178이 큰 키가 아니라는 말에 나는 아예 난쟁이로 보이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지만, 어쨌거나 초중고도 부족해서 학원까지 같이 다녔다는 말에 "둘이 그럼 사귄 적 있어?" 라는 질문으로 그리 어색하지 않게 넘어갔다. 물론 그 대답에 현아는 마치 해미가 나와 엮일 때 표정처럼 "미쳤어? 걔랑 사귀게?"하며 웃음 섞인 정색을 했다.
"뭐야, 그렇게 싫어할 일이야?" 라는 내 말에 현아는 "걔 은근히 안 씻거든" 하고 속삭였다. 안 씻는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선 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저녁은 됐구, 술 한잔 할래?"
"술?"
시간은 7시 40분. 하루종일 즐거웠다, 대충 근데 뭐 컨텐츠도 없으니 이제 집에 가야되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술 한잔 하자는 현아의 제안. 한참 오그라들고 작아지던 내 안의 어떤 기대가 다시 활활 타오름을 느낀다. 지갑 속 체크카드는 심한 갈증을 느꼈겠지만.
"그래!"
"아 대박! 아 하하! 아 너무 웃겨. 꼭 만나게 해줘!"
햄, 쏴, 쩡 이 셋 이야기에 승훈이 이야기를 곁들이자 현아는 정말 좋아했고, 또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너처럼 재밌는 친구들 많으면 좋겠어"
"야, 너는 딱 봐도 주변에 친구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나? 아냐, 나 진짜 뭐 없어. 오죽하면 종현이가 친구 만들어 준다고 너 소개시켜줬겠냐. 나 완전 친구 없는 집순이야"
그랬구나. 친구. 조금은 씁쓸해졌지만 그래도 남자친구도 큰 범주 안에서 친구 안에 들어가는 거니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자위와 함께 한 잔 두 잔 술을 더 마셨다. 얼마나 마셨을까. 세상에, 아직 1시간 밖에 안 됐는데 각 일병을 했다.
"너 근데 술 잘 마신다"
"너두"
얼큰해지는 코를 느끼며 현아를 본다. 조금은 풀어져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이런 애랑 사귀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다. 적당히 취한 얼굴, 실 없이 웃는 얼굴. 바보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뭐 어쩌라고' 하는 생각도 든다. 좋은 친구. 좋지. 근데 나는 나를 안다. 이렇게 이쁜 애랑 그저 농담이나 하는 친구로 남고 싶어질 리가 없다. 중학교 때 현진이, 고등학교 때 세영이, 다 그랬지. 좋은 남사친 코스프레나 하다가 결국 남친 생기면 혼자 속이나 끓이고.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 '좀 헤어져라! 헤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이번에는 고백한다!' 해놓고 결국 고백 못하다가 멀어지고.
'이제 나도 어른이잖아'
아버지가 나 대학교 입학식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랬지. 대학교까지 갔으니 너도 이제 어른이라고.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여전히 그저 이쁜 애만 보면 헤벌레 하는 내 모습이 정신 제대로 차린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참는 병신보다는 도전하는 병신이 되기로 했다. 물론 머릿 속 한켠의 이성은
'미친 놈아, 너랑 쟤랑 지금 오늘 처음 본거야! 너 그리고 지금 술 많이 마셨어! 정신 차려! 그리고 방금 거울 봤잖아!'
하고 나를 미친듯이 말렸지만, 아버지의 당부를 지 편한대로 해석해버린 나는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한잔 바로 원샷 때렸다.
"올~ 근데 뭐야 갑자기. 화장실 다녀오더니"
현아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 당연히 티가 났겠지. 뭔가 다짐하는 얼굴을. 이런 애가 나같은 찐따 어디 한두번 겪어봤겠는가. 저 고양이 같으면서도 강아지 같은 얼굴에 그 단단한 다짐이 살짝 녹는다.
'한 타임만 넘기고, 혼자 비장해지지 말자고'
나는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오늘 술 잘 들어가는데?"
병신새끼. 소주 두 병을 각각 마실 때까지 끝내 말 못 했다. 일단 표정만 봐도 쟤가 나보다 술 잘 마신다. 젠장, 아니 애초에 고백을 하는 것도 웃기는 타이밍이라는걸 잘 안다. 두번째 만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거든. 아까 슬그머니 "담주 주말에는 뭐해?" 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이랑 놀러갈 거 같아", "다다음 주에는 엄마네 집에 갈거야" 라는 답으로 미루어 봤을 때 구태여 2주나 만남의 여지를 막아놓는 이유가 뭐겠는가.
'후'
돈만 헛되이 쓴 느낌이다. 가라앉는다, 기분이. 여기 술값까지 계산하면 시발 오늘 쓴 돈만 16만원이다. 수아랑 햄이랑 쩡이랑 노가리나 뜯을걸. 슥 시계를 봤는데 생각보다는 시간도 얼마 안 갔다. 밤 10시 반. 차 끊기기 전에 집에나 가야겠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쓸어담으며 휴대폰을 슥 주머니 속에 넣는 순간, 현아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오늘 같이 있을래?"
뭐?
심장이 쿵쿵 뛴다. 존나 웃긴데 손까지 살짝 떨려. 바들바들. 술 기운이 훅 올라오는건지 이 날씨에 갑자기 한기를 느낀다. 현아가 계산했다. 신용카드다.
"잘 먹었어"
하지만 현아는 "내가 쏘는거 아냐. 울 엄마가 사주는거야" 하면서 다시 한번 카드를 흔들어 보인다. 귀엽다. 컨버스 신발은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까. 솔직히 아까 내 마음은 그랬다. 그냥 아이돌 같이 이쁜 애랑 하루종일 데이트하고 맛있는거 먹었으니 최고다, 그리고 약간 수아한테도 조금 막 질투 작전? 같은 효과 같은거 나지 않을까, 같은 미친 생각까지 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자자니.
"밤공기 좋다"
"그러게"
오늘따라 왠일인지 이 번화한 동네에 차도 없다. 이 시간에. 알딸딸을 넘어 눈 앞이 가물가물하던 취기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진짜 물로 간을 씻은 것처럼. 근데 나는 모텔이 이 동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괜히 뭔가 고르는 척 주변을 슥 훑지만 잘 모르겠다. 현아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누나 가는데로 따라와" 하며 웃는다. 나도 웃었다. 현아의 웃는 얼굴이 참 이쁘다. 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자는건가.
"오"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 편 번화가와 골목길을 두 블록 정도 지나자 과연 모텔촌이 나타난다. 사실 나 모텔 한번도 가본 적 없는데. 모쏠이니까 당연하지만. 현아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다, 이제는 그냥 내 옆에서 걷는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내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지.
"저기…로 갈까?"
피아노라고 엄청 큰 간판을 건 모텔. 앞에 현수막을 걸고 "올 리모델링, 브랜드 매트리스 교체, 최신식 PC"라며 주절주절 와야하는 이유를 적어놓은 부분에 혹했다. 일단 술집 계산을 현아가 해서 돈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다.
"여기 얼마에요?"
모텔 카운터에 묻자 올백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특실 7만원, 준특실 6만원, 일반실 5만원이라고 답한다. 아 시발 모텔이 이렇게 비싼 거였구나, 아니 그럼 그 많은 커플은 그 많은 돈을 내며 섹스를 한단 말이야? 연애 오지게 돈 드는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특실을 달라고 했다.
"그냥 준특실해" 하고 현아가 옆에서 말렸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에 "특실주세요" 하고 오기를 부렸다. "일회용품 필요하세요?" 라고 묻는 아줌마의 말에 필요없다고 답했다가 현아가 "필요해요" 라고 답했다. 아주머니가 픽 웃는 모습에서 아 시발 뭔지는 몰라도 나 모쏠이라는거 걸렸구나 하는 촉이 왔다.
"이게 왜 안되지"
눈치껏 카드키를 그 카드키 대는 곳 같은데다 찍었는데 안되길래 문 손잡이에 대보고 다시 옆에 심지어 초인종 벨 같은 곳에까지 대봤는데 문이 안 열린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지경이었지만 "거기" 하는 현아의 말대로 다시 처음에 댄 카드키 대는 곳에 댔다. 문이 열렸고 나는 부끄러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발'
생각해보니 아까 술김에 여자 몇 명 만나봤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고, 개똥허세라는거 다 걸렸겠구나 하며 신발 벗고 어둠 속의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현아가 말했다.
"카드키 여기 꽂아야지"
"아"
현아는 이미 웃고 있었다. 아 그런 시스템이구나. 처음 알았다. 카드키를 꽂자 불이 환하게 켜졌고, 내 시뻘건 얼굴만큼이나 불그스레한 조명이 다행히 내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주지는 못했겠지.
"너 연애 안 해봤지?"
"어? 어어, 뭐, 그렇지"
"뻥쟁이"
너무 쪽팔린다. 그 와중에도 현아의 웃는 모습은 참 예뻤다.
"먼저 씻어"
"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부끄러움도 달래고, 뜨신 물로 샤워하며 정신 좀 차리자 싶었다. 어쨌거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모텔에 왔다. 불투명 유리 저 편으로 현아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고, 나는 배 터져라 먹은 안주 때문에 조금 보일락 말락하는 복근이 안 보이게 된 점에 새삼 아쉬움을 드러내며 샤워를 하면서도 배를 좀 쳤다. 근육이 좀 놀래서 튀어나오라고.
"으"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를 감으며 조금 전의 부끄러움도 날려버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우여곡절이 있다 한들 나는 이렇게 오늘 동정을 탈출하고 남자가 된다. 승훈이한테 더이상 쌩구라를 안 늘어놓아도 된다. 진짜 종현이 너는 너무 고마운 친구다. 앞으로는 정말 잘해줘야지. 엄마, 아빠 나 오늘 어른돼요, 한편으로는 또 막 혹시라도 뭐 어떻게 잘못되서 임신이라도 하면, 음, 어쩌지. 역시 책임을 져야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빠는 그렇다치고 엄마는 어떨까.
'음'
근데 솔직히 엄마도 저렇게 이쁜 며느리라면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애기 분유값은 어떻게 벌면 좋지 같은 별 생각을 다하면서 씻고 나왔을 때 모텔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일곱 통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옷을 챙겨 입고 모텔방을 나섰다. 카운터의 아주머니에게 "저 잠깐 나가는 거거든요" 하고 집에 가는거 아니라고 당부해두고 모텔 건물을 나섰다.
잠깐 뭐 간식거리나 술이라도 더 사러 나왔다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면 어쩌나 싶어서 당혹스러웠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냥 모텔까지 왔다가 내 찐따 같은 모습에 그냥 나 씻는 사이에 좀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집에 가버린' 가장 확률 높은 가능성을 나 역시 생각 못한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모텔 근처 편의점을 몇 군데나 들렀다.
"머리는 단발이구요, 이렇게 줄무니 티에 흰 반바지, 핫팬츠인데…"
세 군데를 더 들리고 전화를 네 통을 추가로 더 했으며 [ 어디야? ], [ 집에 간거야? ], [ 무슨 일 있어? ], [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 같은 카톡을 22개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발"
좆같은 년. 내가 찐따 같아서, 술 김에 든 생각이 확 사라졌다 한들 "나 그냥 집에 갈게" 한 마디를 안 하고 이러는게 어딨나. 아니 하다못해 카톡으로 답장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그냥 차단을 해주던가. 괜히 걱정만 되게.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잠이 안 왔다. 혹시라도 진짜 아까 생각처럼 잠깐 나갔다가 누구한테 어디 끌려가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사실 새벽에 두 번이나 나와서 모텔 근처를 돌아다녔다. 혹시 아까 술집에 뭐 다른 뭐라도 두고 갔다가 사고라도 난거 아닐까 하는 시나리오까지 떠올리고는 119에 전화까지 해봤다. 혹시 그런 인상착의의 여자가 병원 실려간 거 없냐고.
밤새 뒤척이고, 창문 밖에서 뭔 소리라도 나면 벌떡 일어났고, 또 한편으로는 혹시 새벽에 서프라이즈로 이 방에 다시 놀러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해봤지만 내가 눈을 뜬 것은 방을 비워달라는 11시 45분의 카운터 전화를 받고서였다.
"으음"
죽을 것 같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술을 그렇게 먹고, 밤에 잠도 못 잔 상태로, 샤워도 못하고 몸만 일으켰으니까. 밤새 안 취했던 술이 지금 몰려오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부터 봤지만 배터리 충전을 못 해서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근데 어차피 어제 새벽 4시까지 현아 연락은 없었으니 뭐가 왔을 리 없지.
너무 힘들어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진짜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미칠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병신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철저히 갖고 놀려진 기분이고, 현아 그 씨팔 년이 종현이에게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 아 그냥 휴학이나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 같은 년"
사람을 병신 만들어도 정도가 있지, 비싼 거 쳐먹이고 하루종일 지 졸개처럼 따라다녔더니 나를 진짜 뭔 개병신으로 본 건가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와서는 다시 술기운과 피로와 정신적 허탈감에 그대로 뻗었다. 눈을 뜬 것은 저녁 9시였다. 휴대폰에는 현아의 카톡이 와있었다.
[ 미안해, 어제 너무 놀랬지. 어제 너 씻고 있을 때 새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물 소리가 나니까 전화 받으려고 밖으로 나가서 받았는데, 어디냐고. 당장 들어오라며 엄마랑 싸우는 소리가 나더라. 우리 집안 사정은 굳이 말 안 했지만 대충 느낌 오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 전화를 받을 경황이 없었어. 집에 갔더니 새 아빠가 휴대폰부터 집어던져서 액정도 깨졌고. 그쯤되니 너한테 연락하기도 너무 좀 그래서, 미안해 ]
그랬다면 뭐 집에 가는 길에 사정이라도 말했으면 좋았을거 아니냐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나는 몇 번이나 카톡을 쓰다 지우다 하다가
[ 괜찮아, 넌 별 일 없었어? 새아버지라는 분한테 뭐 맞고 그런거는 아니고? ]
하고 보냈다. 한참 후에 현아는 [ 괜찮아, 정말 미안해 ] 하고 다시 답장을 보내왔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까 하다가 분위기 안 좋은 카톡만 오가면 미안함에 짓눌려 관계가 망가질 것 같아서
[ 근데 너 나 모텔 첫 경험만 시켜놓고 진짜 첫 경험은 못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져라ㅋㅋㅋ ] 하고 보냈다. 그리고 약 1분 뒤 날아온 현아의 답장은 놀랍게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았어ㅋㅋㅋㅋㅋㅋ내가 꼭 책임질게ㅋㅋㅋ담주에 봐ㅋ ] 였다.
나는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해미와 수아, 윤정이 당장 월요일에 소개팅에 대해 미친듯이 캐물을텐데 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하면 좋을까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발.
- 끝 -
"야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니가 재수한다고 성적이 과연 잘 나올 수 있을까? 아마 재수하면 하루 8시간 게임, 12시간 잠, 30분 책 펴기, 2시간 휴대폰, 나머지 딸딸이. 끝. 그게 니 확정적인 일과 아니겠냐?"
지 신발 사이즈 반토막에 가까운 수능 성적을 들고도 터무니 없이 재수를 고민하는 미친 승훈이 병신한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 잘난 아들이랍시고 온 동네 맨날 아들자랑을 하고 다니던 엄마에게는 충격적인 현실이었고, 아버지는 "원 참,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할 무거운 현실이었다.
게다가 그나마의 성적으로도, 입시전략 따위 하나도 없이 그냥 고 3 선생님이 어디서 주워온 적당한 배치표 하나 보고 쑤셔 넣었으니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3학년이 되고서야 뒤늦게 그 해의 입학 커트라인을 우연히 알게 됐고, 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자퇴하러 달려갈 뻔 했다)
"아 이게 뭐라고 온 가족이 와"
"엄마는 대학교 못 나왔잖아. 어디 대학교 구경이라도 해보자"
그것도 모자라 입학식 때 온 가족이 구경왔고, 꽃다발 들고 한복까지 차려입고 오신 우리 어머니에 대해 나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 간 모텔
남중남고를 나온 나에게 있어서, 대학교는 확실히 신세계였다. 지방대 문과 주제에 우리 학과는 왜이렇게 이쁜 애들이 없을까 탄식이 절로 나오긴 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면 바로 그래서 여자애들하고 입 털기는 쉬웠다.
"재호랑 주아랑 사귄다던데?"
"정말? 몰랐는데. 지난 주에 소개팅 한다 어쩐다 하더니만"
"그래서 초조해서 주아가 들이댔나부지"
"대박. 아 근데 너무 부럽다"
"너도 연애하면 되지"
"해미야, 나랑 사귈래?"
"아 죽어 그냥"
콧수염 레이저 시술 받은 승훈이가 머리 기르면 이렇게 생겼지 싶은 해미부터 성격은 좋은 윤정, 나보다 힘쎈 수아 등등 전혀 부담없는 친구들과(물론 그녀들 역시도 나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가던 나.
"침 흘리면 죽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함께 타고, 탈 때마다 맨날 너무 졸립다면서 내 어깨를 곧잘 빌리던 수아에게 나는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게 되었다.
"야 병신아, 병신아? 잘 생각해 봐. 암만 니가 모쏠찐따라고 해도 솔까 여자애가 매주마다 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데 그냥 그렇게 방치만 한다고? 아 시발, 나였으면 임마 지금 애가 둘이다"
승훈의 닥달과 알게 모르게 쌓여온 내 안의 어떤 어줍잖은 확신은 기어코 돌발 고백이라는 미친 짓에 이르렀다. 결과는 역시나 "왜?" 라는 황당한 표정의 수아와 씁쓸한 "그냥'이라는 변명으로 돌아왔다.
"아 죽고 싶다"
무회전 슛이라도 연습하듯 나는 미친듯한 싸커킥을 이불 속에서 날려댔지만, 의외로 그 고백은 나비효과가 꽤 컸다.
"너 수아한테 고백했다매? 대박이다 진짜"
수아 고 기집애는 고걸 또 그새 다른 애들한테 나불냈는지(나중에 알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수아 역시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나를 피해다니는 와중에 그걸 캐치한 다른 애들이 캐물어서 알아낸 것) 나는 참으로 민망했지만, 사실 내 변명은 꽤 그럴싸했다.
"사랑이 죄냐? 죄냐고"
"아, 미친 놈"
해미와 윤정은 발정이라도 났나며 웃어댔고, 나 역시도 "사랑이 죄냐고"를 연발하며 웃었다. 근데 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과의 또 다른 인싸 종현이 난데없는 제안을 해왔다.
"너 소개팅 안 할래?"
"나?"
놀랍게도 그 '재호'의 땜빵 소개팅이었다. 보통 소개팅이라는건 어느 정도 '끕'이 맞는 애들끼리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재호랑 급이 맞는 여자애면 나한텐 완전 좀 무리 아닌가, 하는 내 안의 찐따적 망설임이 '혹시 이거 무슨 몰카라도 하는거 아님?' 같은 망상으로까지 번졌지만, 종현의 초이스는 이유가 있었다.
"웃긴 애 좋아한대"
"아, 웃긴 애~"
옆에 있던 해미는 미친듯이 웃으며 바닥을 굴렀지만, 어쨌거나 종윤의 휴대폰 속에서 웃고 있는 단발머리 그녀의 미소는 수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수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어, 반갑습니다"
"뭐야, 우리 동갑이잖아. 말 놔. 요"
"어 그래"
"아 뭐야, 웃겨"
어깨만 겨우 가리는 짧은 소매의 타이트한 줄무늬 탑에 흰 핫팬츠. 그 짧은 옷을 완벽히 소화하는 몸매와 아이돌 같은 얼굴, 아기자기한 귀걸이부터 웃을 때는 손으로 가려다 다 안 가려지는 큰 입과 시원시원한 성격. 와 세상에 인싸들은 이렇게 이쁜 애들이랑 어울리는구나. 솔직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쁜 그런 얼굴이었다.
[ 어때? 이쁨? 걔도 불쌍하다 이 날씨 좋은 날에 너같은 폭탄남이랑 소개팅이라니 ]
[ 야, 수아 지금 울어 ]
[ 아꺼져 미친 것들아 나 소개팅이라고 ]
카톡으로 해미, 윤정 등등이 시비를 걸어왔지만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현아. 하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이쁜거냐. 진짜 이렇게 이쁜 애랑 소개팅이라니, 고마운 마음에 종현이 축구화라도 핥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눈 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밥 뭐 먹을까? 여기 뭐가 맛있지?"
"난 다 좋아. 근데 이거 이거 맛있어"
"여기 와봤어?"
"맨날 오는데?"
"뭐?"
뭐야, 이런 레스토랑을 맨날 온다고? 얘네 집 갑분가. 살짝 쫄렸다. 이런 애랑 사귀면 맨날 이런데 데리고 와야 되는건가, 아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되는건데 참, 얘랑 결혼하면 진짜 서울에 48평 아파트 뭐 이런거 사야 되나, 하는 망상까지 한바퀴 돌고는 "오, 그래 그거 먹자" 하며 나는 현아가 짚은 것들을 주문했다. 9만 4천원이었다. 그나마도 내건 일부러 좀 싼 거 고른건데. 지난 주에 수아, 해미, 윤정 돈까스 한번 사줬다고 생색 냈던 기억에 그녀들한테 미안했다.
"종현이랑은 별로 안 친해?"
내 몇 안되는 장점이자 단점이 때때로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점인데, 그 점이 현아한테는 제법 먹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 몰라, 솔직히 막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냐. 근데 같은 과고, 교양도 겹치는게 좀 있어서 인사는 꽤 하는 사이지. 근데 딱 보면 좀 그런거 있잖아. 걔는 전형적인 인싸 타입이고, 나는 좀 게임 같은거 좋아하는, 그런"
"오덕 오덕?"
오덕 오덕 하면서 손가락으로 안경을 만들어 돌리는 현아의 모습에 나는 진짜로 그녀한테 입덕해버렸다. 뭐야, 나 지금 꿈이라도 꾸는건가. 근데 현아의 말로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단다.
"걔가 초등학교 때 축구부 하고, 생긴 것도 좀 인상이 쎄게 생겨서 그렇지, 걔도 게임 좋아하고 그래. 그리고 너 은근 웃기다고 좋아해. 근데 좀 걔가 성격상 막 누구한테 친근하게 대하고 이런거 잘 못해서 그래"
"친근하게 못한다고? 종현이가 이 소개팅 시켜준건데?"
"소개팅?"
소개팅이라는 말에 순간 1초 정도 멈칫했던 현아는 "아, 너 소개팅으로 알고 여기 나온거야?" 하고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시발 글렀네. 갑작스러운 굴욕감과 종현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던 이후의 5초지만, 얼굴을 쓸어내린 내가 "아니야?"라고 어색한 미소로 묻는 내 말에 현아는 웃으며 답했다.
"하는거 봐서"
"뭐야 그게"
그리고 현아는 그런 '뭐야 그게' 같은 퉁명스러운 대답에 또 빵 터지며 좋아했다. 웃음이 헤퍼서 좋았다. 정말로.
"완전 배부르다"
"그치?"
양이 적어 보였는데 먹다보니 제법 배가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는 한층 가벼워진 체크카드 속 숫자에 마음 속 깊이 가벼운 한숨을 내쉴 무렵 현아는 내 손목을 잡아 이끌며 "저기 가자" 하고 뭔 동네 게임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
후덕한 인상의 주인 아저씨와 현아는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고, 현아는 "뭐야, 요즘 가게 왜 이렇게 자주 닫아요?" 하고 물었다. 아저씨는 "오빠가 요즘 바빠요. 출장을 전국으로 다녀. 뭐야, 옆에는 남자친구?" 하며 은근히 나를 의식하며 대답한다. 현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경계의 시선.
"안녕하세요"
아마도 자신만의 어떤 요정 같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어떤 그런 슬픈 아이돌팬 같은 경계심이 아닐까 하며, 해미나 수아, 윤정이 어쩌다 소개팅이라도 한다고 하면 괜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그런 감정과 동류의 감정이겠거니 하며 이해했다. 그렇지만 또 그렇다고 굳이 "아니요, 친구에요"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현아는 남친이냐고 묻는 질문을 못 들은 것인지, 적당히 무시하는 것인지 어느새 게임 진열장 쪽으로 향했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왜 종현이 이런 이쁜 애한테 나를 소개팅, 아니 소개시켜 준 것인가를. 그래, 그런 타입의 애들이 종종 있지. 누가 봐도 이쁘고 괜찮은 앤데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그래서 그 바닥에서는 곧바로 네임드에 여왕벌이 될 수 있으면서도 일반인 코스프레도 기가 막히게 잘 되는 애들. 누가 봐도 그런거 좋아할 외모(?)는 아니니까.
"흠"
게임을 몇 가지 훑어보면서도, 어쨌거나 기분이 살짝 묘했다. 뭐라고 해야될까, 이건 좀 웃기는 감정이지만 약간은 실망이라고 해야되나. 물론 게임 좋아하는 여사친이라니,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지는 캐릭터지만 뭐랄까, 내 찐따적 인생에서 나를 구원해 줄 인싸녀 같은 것을 상상했는데 '동류'라니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아쉬움이 드는? 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배가 부르긴 부르지, 지금 확실히'
"집에 플스 있어?"
내 질문에 현아는 "플스, 엑박 다 있지. 오빠 거지만 옛날에 세턴도 있었어" 라며 자랑했다. 나보다 더 상급의 덕후다. 그보다 새턴이라니, 그 오빠도 어지간한 덕후구나. 집에 엄청난 컬렉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친해지고 싶다.
"넌?"
"난 없어. 오로지 PC만 있어"
"그래?"
의외라는 듯한 반응.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게임 고르기 삼매경, 그리고 현아의 뒤태와 나를 계속 흘낏 흘낏 쳐다보는 아저씨의 애절한 눈빛에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30분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둘 다 아무 것도 고르지 않고 나왔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또 와~"
벤치에 앉은 현아와 한참을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노라니, 중간중간 그녀가 누군가와 카톡하는게 묘하게 신경쓰였다. 남자일까. 하기사 이렇게 이쁘장한 애니, 주변에 남자들이 오죽 많겠는가. 종현이 같은 타입의 잘 생긴 훈남들부터, 저 게임샵 사장님 같은 돈 많은 덕후들까지. 뭔 말만 하면 잘 웃어주는 현아였기에 '어쩌면' 하는 작은 자신감이 그렇게 금새 바스라지며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초등학교 때는 걔가 나보다 키가 작았거든. 축구부면 운동부잖아, 근데도 6학년 때까지 나보다 작았던 애가 중학교 가더니 막 크기 시작해서 지금처럼 된거야. 지금 걔가 키가 몇이더라? 78인가? 뭐 그렇게까지 큰 건 아니지만"
178이 큰 키가 아니라는 말에 나는 아예 난쟁이로 보이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지만, 어쨌거나 초중고도 부족해서 학원까지 같이 다녔다는 말에 "둘이 그럼 사귄 적 있어?" 라는 질문으로 그리 어색하지 않게 넘어갔다. 물론 그 대답에 현아는 마치 해미가 나와 엮일 때 표정처럼 "미쳤어? 걔랑 사귀게?"하며 웃음 섞인 정색을 했다.
"뭐야, 그렇게 싫어할 일이야?" 라는 내 말에 현아는 "걔 은근히 안 씻거든" 하고 속삭였다. 안 씻는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선 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저녁은 됐구, 술 한잔 할래?"
"술?"
시간은 7시 40분. 하루종일 즐거웠다, 대충 근데 뭐 컨텐츠도 없으니 이제 집에 가야되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술 한잔 하자는 현아의 제안. 한참 오그라들고 작아지던 내 안의 어떤 기대가 다시 활활 타오름을 느낀다. 지갑 속 체크카드는 심한 갈증을 느꼈겠지만.
"그래!"
"아 대박! 아 하하! 아 너무 웃겨. 꼭 만나게 해줘!"
햄, 쏴, 쩡 이 셋 이야기에 승훈이 이야기를 곁들이자 현아는 정말 좋아했고, 또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너처럼 재밌는 친구들 많으면 좋겠어"
"야, 너는 딱 봐도 주변에 친구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나? 아냐, 나 진짜 뭐 없어. 오죽하면 종현이가 친구 만들어 준다고 너 소개시켜줬겠냐. 나 완전 친구 없는 집순이야"
그랬구나. 친구. 조금은 씁쓸해졌지만 그래도 남자친구도 큰 범주 안에서 친구 안에 들어가는 거니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자위와 함께 한 잔 두 잔 술을 더 마셨다. 얼마나 마셨을까. 세상에, 아직 1시간 밖에 안 됐는데 각 일병을 했다.
"너 근데 술 잘 마신다"
"너두"
얼큰해지는 코를 느끼며 현아를 본다. 조금은 풀어져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이런 애랑 사귀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다. 적당히 취한 얼굴, 실 없이 웃는 얼굴. 바보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뭐 어쩌라고' 하는 생각도 든다. 좋은 친구. 좋지. 근데 나는 나를 안다. 이렇게 이쁜 애랑 그저 농담이나 하는 친구로 남고 싶어질 리가 없다. 중학교 때 현진이, 고등학교 때 세영이, 다 그랬지. 좋은 남사친 코스프레나 하다가 결국 남친 생기면 혼자 속이나 끓이고.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 '좀 헤어져라! 헤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이번에는 고백한다!' 해놓고 결국 고백 못하다가 멀어지고.
'이제 나도 어른이잖아'
아버지가 나 대학교 입학식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랬지. 대학교까지 갔으니 너도 이제 어른이라고.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여전히 그저 이쁜 애만 보면 헤벌레 하는 내 모습이 정신 제대로 차린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참는 병신보다는 도전하는 병신이 되기로 했다. 물론 머릿 속 한켠의 이성은
'미친 놈아, 너랑 쟤랑 지금 오늘 처음 본거야! 너 그리고 지금 술 많이 마셨어! 정신 차려! 그리고 방금 거울 봤잖아!'
하고 나를 미친듯이 말렸지만, 아버지의 당부를 지 편한대로 해석해버린 나는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한잔 바로 원샷 때렸다.
"올~ 근데 뭐야 갑자기. 화장실 다녀오더니"
현아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 당연히 티가 났겠지. 뭔가 다짐하는 얼굴을. 이런 애가 나같은 찐따 어디 한두번 겪어봤겠는가. 저 고양이 같으면서도 강아지 같은 얼굴에 그 단단한 다짐이 살짝 녹는다.
'한 타임만 넘기고, 혼자 비장해지지 말자고'
나는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오늘 술 잘 들어가는데?"
병신새끼. 소주 두 병을 각각 마실 때까지 끝내 말 못 했다. 일단 표정만 봐도 쟤가 나보다 술 잘 마신다. 젠장, 아니 애초에 고백을 하는 것도 웃기는 타이밍이라는걸 잘 안다. 두번째 만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거든. 아까 슬그머니 "담주 주말에는 뭐해?" 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이랑 놀러갈 거 같아", "다다음 주에는 엄마네 집에 갈거야" 라는 답으로 미루어 봤을 때 구태여 2주나 만남의 여지를 막아놓는 이유가 뭐겠는가.
'후'
돈만 헛되이 쓴 느낌이다. 가라앉는다, 기분이. 여기 술값까지 계산하면 시발 오늘 쓴 돈만 16만원이다. 수아랑 햄이랑 쩡이랑 노가리나 뜯을걸. 슥 시계를 봤는데 생각보다는 시간도 얼마 안 갔다. 밤 10시 반. 차 끊기기 전에 집에나 가야겠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쓸어담으며 휴대폰을 슥 주머니 속에 넣는 순간, 현아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오늘 같이 있을래?"
뭐?
심장이 쿵쿵 뛴다. 존나 웃긴데 손까지 살짝 떨려. 바들바들. 술 기운이 훅 올라오는건지 이 날씨에 갑자기 한기를 느낀다. 현아가 계산했다. 신용카드다.
"잘 먹었어"
하지만 현아는 "내가 쏘는거 아냐. 울 엄마가 사주는거야" 하면서 다시 한번 카드를 흔들어 보인다. 귀엽다. 컨버스 신발은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까. 솔직히 아까 내 마음은 그랬다. 그냥 아이돌 같이 이쁜 애랑 하루종일 데이트하고 맛있는거 먹었으니 최고다, 그리고 약간 수아한테도 조금 막 질투 작전? 같은 효과 같은거 나지 않을까, 같은 미친 생각까지 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자자니.
"밤공기 좋다"
"그러게"
오늘따라 왠일인지 이 번화한 동네에 차도 없다. 이 시간에. 알딸딸을 넘어 눈 앞이 가물가물하던 취기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진짜 물로 간을 씻은 것처럼. 근데 나는 모텔이 이 동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괜히 뭔가 고르는 척 주변을 슥 훑지만 잘 모르겠다. 현아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누나 가는데로 따라와" 하며 웃는다. 나도 웃었다. 현아의 웃는 얼굴이 참 이쁘다. 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자는건가.
"오"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 편 번화가와 골목길을 두 블록 정도 지나자 과연 모텔촌이 나타난다. 사실 나 모텔 한번도 가본 적 없는데. 모쏠이니까 당연하지만. 현아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다, 이제는 그냥 내 옆에서 걷는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내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지.
"저기…로 갈까?"
피아노라고 엄청 큰 간판을 건 모텔. 앞에 현수막을 걸고 "올 리모델링, 브랜드 매트리스 교체, 최신식 PC"라며 주절주절 와야하는 이유를 적어놓은 부분에 혹했다. 일단 술집 계산을 현아가 해서 돈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다.
"여기 얼마에요?"
모텔 카운터에 묻자 올백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특실 7만원, 준특실 6만원, 일반실 5만원이라고 답한다. 아 시발 모텔이 이렇게 비싼 거였구나, 아니 그럼 그 많은 커플은 그 많은 돈을 내며 섹스를 한단 말이야? 연애 오지게 돈 드는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특실을 달라고 했다.
"그냥 준특실해" 하고 현아가 옆에서 말렸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에 "특실주세요" 하고 오기를 부렸다. "일회용품 필요하세요?" 라고 묻는 아줌마의 말에 필요없다고 답했다가 현아가 "필요해요" 라고 답했다. 아주머니가 픽 웃는 모습에서 아 시발 뭔지는 몰라도 나 모쏠이라는거 걸렸구나 하는 촉이 왔다.
"이게 왜 안되지"
눈치껏 카드키를 그 카드키 대는 곳 같은데다 찍었는데 안되길래 문 손잡이에 대보고 다시 옆에 심지어 초인종 벨 같은 곳에까지 대봤는데 문이 안 열린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지경이었지만 "거기" 하는 현아의 말대로 다시 처음에 댄 카드키 대는 곳에 댔다. 문이 열렸고 나는 부끄러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발'
생각해보니 아까 술김에 여자 몇 명 만나봤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고, 개똥허세라는거 다 걸렸겠구나 하며 신발 벗고 어둠 속의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현아가 말했다.
"카드키 여기 꽂아야지"
"아"
현아는 이미 웃고 있었다. 아 그런 시스템이구나. 처음 알았다. 카드키를 꽂자 불이 환하게 켜졌고, 내 시뻘건 얼굴만큼이나 불그스레한 조명이 다행히 내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주지는 못했겠지.
"너 연애 안 해봤지?"
"어? 어어, 뭐, 그렇지"
"뻥쟁이"
너무 쪽팔린다. 그 와중에도 현아의 웃는 모습은 참 예뻤다.
"먼저 씻어"
"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부끄러움도 달래고, 뜨신 물로 샤워하며 정신 좀 차리자 싶었다. 어쨌거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모텔에 왔다. 불투명 유리 저 편으로 현아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고, 나는 배 터져라 먹은 안주 때문에 조금 보일락 말락하는 복근이 안 보이게 된 점에 새삼 아쉬움을 드러내며 샤워를 하면서도 배를 좀 쳤다. 근육이 좀 놀래서 튀어나오라고.
"으"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를 감으며 조금 전의 부끄러움도 날려버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우여곡절이 있다 한들 나는 이렇게 오늘 동정을 탈출하고 남자가 된다. 승훈이한테 더이상 쌩구라를 안 늘어놓아도 된다. 진짜 종현이 너는 너무 고마운 친구다. 앞으로는 정말 잘해줘야지. 엄마, 아빠 나 오늘 어른돼요, 한편으로는 또 막 혹시라도 뭐 어떻게 잘못되서 임신이라도 하면, 음, 어쩌지. 역시 책임을 져야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빠는 그렇다치고 엄마는 어떨까.
'음'
근데 솔직히 엄마도 저렇게 이쁜 며느리라면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애기 분유값은 어떻게 벌면 좋지 같은 별 생각을 다하면서 씻고 나왔을 때 모텔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일곱 통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옷을 챙겨 입고 모텔방을 나섰다. 카운터의 아주머니에게 "저 잠깐 나가는 거거든요" 하고 집에 가는거 아니라고 당부해두고 모텔 건물을 나섰다.
잠깐 뭐 간식거리나 술이라도 더 사러 나왔다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면 어쩌나 싶어서 당혹스러웠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냥 모텔까지 왔다가 내 찐따 같은 모습에 그냥 나 씻는 사이에 좀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집에 가버린' 가장 확률 높은 가능성을 나 역시 생각 못한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모텔 근처 편의점을 몇 군데나 들렀다.
"머리는 단발이구요, 이렇게 줄무니 티에 흰 반바지, 핫팬츠인데…"
세 군데를 더 들리고 전화를 네 통을 추가로 더 했으며 [ 어디야? ], [ 집에 간거야? ], [ 무슨 일 있어? ], [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 같은 카톡을 22개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발"
좆같은 년. 내가 찐따 같아서, 술 김에 든 생각이 확 사라졌다 한들 "나 그냥 집에 갈게" 한 마디를 안 하고 이러는게 어딨나. 아니 하다못해 카톡으로 답장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그냥 차단을 해주던가. 괜히 걱정만 되게.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잠이 안 왔다. 혹시라도 진짜 아까 생각처럼 잠깐 나갔다가 누구한테 어디 끌려가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사실 새벽에 두 번이나 나와서 모텔 근처를 돌아다녔다. 혹시 아까 술집에 뭐 다른 뭐라도 두고 갔다가 사고라도 난거 아닐까 하는 시나리오까지 떠올리고는 119에 전화까지 해봤다. 혹시 그런 인상착의의 여자가 병원 실려간 거 없냐고.
밤새 뒤척이고, 창문 밖에서 뭔 소리라도 나면 벌떡 일어났고, 또 한편으로는 혹시 새벽에 서프라이즈로 이 방에 다시 놀러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해봤지만 내가 눈을 뜬 것은 방을 비워달라는 11시 45분의 카운터 전화를 받고서였다.
"으음"
죽을 것 같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술을 그렇게 먹고, 밤에 잠도 못 잔 상태로, 샤워도 못하고 몸만 일으켰으니까. 밤새 안 취했던 술이 지금 몰려오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부터 봤지만 배터리 충전을 못 해서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근데 어차피 어제 새벽 4시까지 현아 연락은 없었으니 뭐가 왔을 리 없지.
너무 힘들어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진짜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미칠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병신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철저히 갖고 놀려진 기분이고, 현아 그 씨팔 년이 종현이에게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 아 그냥 휴학이나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 같은 년"
사람을 병신 만들어도 정도가 있지, 비싼 거 쳐먹이고 하루종일 지 졸개처럼 따라다녔더니 나를 진짜 뭔 개병신으로 본 건가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와서는 다시 술기운과 피로와 정신적 허탈감에 그대로 뻗었다. 눈을 뜬 것은 저녁 9시였다. 휴대폰에는 현아의 카톡이 와있었다.
[ 미안해, 어제 너무 놀랬지. 어제 너 씻고 있을 때 새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물 소리가 나니까 전화 받으려고 밖으로 나가서 받았는데, 어디냐고. 당장 들어오라며 엄마랑 싸우는 소리가 나더라. 우리 집안 사정은 굳이 말 안 했지만 대충 느낌 오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 전화를 받을 경황이 없었어. 집에 갔더니 새 아빠가 휴대폰부터 집어던져서 액정도 깨졌고. 그쯤되니 너한테 연락하기도 너무 좀 그래서, 미안해 ]
그랬다면 뭐 집에 가는 길에 사정이라도 말했으면 좋았을거 아니냐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나는 몇 번이나 카톡을 쓰다 지우다 하다가
[ 괜찮아, 넌 별 일 없었어? 새아버지라는 분한테 뭐 맞고 그런거는 아니고? ]
하고 보냈다. 한참 후에 현아는 [ 괜찮아, 정말 미안해 ] 하고 다시 답장을 보내왔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까 하다가 분위기 안 좋은 카톡만 오가면 미안함에 짓눌려 관계가 망가질 것 같아서
[ 근데 너 나 모텔 첫 경험만 시켜놓고 진짜 첫 경험은 못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져라ㅋㅋㅋ ] 하고 보냈다. 그리고 약 1분 뒤 날아온 현아의 답장은 놀랍게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았어ㅋㅋㅋㅋㅋㅋ내가 꼭 책임질게ㅋㅋㅋ담주에 봐ㅋ ] 였다.
나는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해미와 수아, 윤정이 당장 월요일에 소개팅에 대해 미친듯이 캐물을텐데 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하면 좋을까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