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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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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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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시절, 내가 사용하던 MP3 플레이어의 메모리는 32메가짜리였다. 약 4메가짜리 노래 8곡이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조금 지겹네'

음질을 다운시켜 몇 곡을 더 집어넣을 수 있었지만, 어쨌든 앨범 하나를 통째로 넣기에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아직 CDP를 쓰는 친구들도 많았고, 개중에는 플래시 메모리 대신 CD 속의 MP3 파일을 읽어들이는 형태의 MP3 플레이어를 쓰던 녀석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직 MD를 쓰던 녀석들도 있었지만, 놈들이야말로 훗날의 블랙베리파 같은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

"올, 16화음?"
"64화음이거든? 음악보다 이걸 봐. 칼라폰이다 칼라폰"
"오 대박!"

대학교에 입학하자 나에게는 휴대폰이 생겼다. 또래 친구 중에는 이미 고교 시절 시티폰을 쓰던 놈들도 있긴 했기에 살짝 늦은 편이었지만, 대신 파워풀한 모델로 구입했다. 휴대폰 액정이 컬러라는 자체로 프리미엄이 되던 시절이었다. 대신 살짝 두껍긴 했다. 하기사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디자인보다 성능파였던 것 같다. 마지막까지 쓰던 삐삐 역시 '광역삐삐' 엮으니까.

"오 김뱅쟝님, 이거 그기 아임까. 쪼꼬렛폰"
"그래 이 새꺄, 김태희가 어? 막 이렇게 허리 흔들면서 섹시하게, 광고하면, 사줘야지"
"하 이거 디지게 이쁜데 말임다? 하 씨 내도 말년휴가 나가면 이거 사야지"
"그 날이 어디 오겠냐"

그 이후로도 몇 개의 휴대폰을 거치면서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대머리에 뉴발란스 신발, 목폴리티 입고 다니는 아재가 "어썸!" 하고 자화자찬하며 빼곡한 텍스트 대신 그림 몇 장과 달변으로 전 세계 마케터들의 PT 스타일을 한번에 바꿔놓은 뒤 그 많던 주변기기는 그 이후 근 20년 사이에 휴대폰 한 대로 줄어들었다. 버튼을 꾹꾹 눌러대던 우리의 타이핑도 어느새 스크린 터치가 기본이 되었고 말이다.

"그냥 싹 다 버려야겠다"

이사를 하면서 베란다 한 켠에 그동안 모아왔던 수십 대의 전자기기들을 버렸다. 코원 A2 PMP, 아이리버 H100, 손바닥만한 고진샤 노트북부터 소니 바이오, 몇 대의 씽크패드, 몇 대의 삼성 노트북, 그리고 애플 제품들.

"아 이건 좀…"

아이팟, 아이폰 3gs부터 아이폰20, 그리고 A2까지의 전 기종, 아이북, 아이맥 G3, G4, G5, 2011 MID부터 2026BA, MC516을 비롯해 몇 대의 유니바디 맥북과 몇 대의 맥미니, 그리고 역시 5대의 알루미늄 바디 맥북, 그리고 산지 3년도 안된 미니북과 블랙북… 사실 어딘가의 개인 박물관이라도 차리고 싶은 그런 소중한 물건들을 그냥 싹 다 버렸다.

"후"

떨이로 팔아버렸어도 최소한 몇 백은 받았음직한 물건인데, 당시의 나는 그냥 과거의 삶이 다 지긋지긋했고 미니멀리즘에 극도로 심취했던 시기라서 그저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참 후회스럽지만, 당시의 내가 그런 것을 어쩌랴.

"역시 비싼게 좋긴 좋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내장한 7cm 구형 본체의 '마이크로볼'. 아마존의 애플 라인 제품답게 3만 달러라는, 내 두 달 급여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가격이지만 확실히 성능은 압도적이었다. 'PC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인텔의 0.2 나노 공정 기반 P10 칩셋이 들어간 파워풀한 하드웨어는 'MS 플라이트 2054'의 압도적인 사양도 여유있게 받아내며 울트라급 그래픽으로 내 눈을 홀렸다.




"회사로 가자"

밤새 게임을 달렸더니 너무 피곤했다. 아예 뒷좌석에 탄 나는 오토파일럿 모드로 회사를 향하며 깊게 잠에 빠져든다. 테슬라 모델22s, 그것도 2세대인 2042년식 똥차지만, 암만 해도 차에 운전대도 없는 요즘 차들은 도저히 차 같지도 않아서 굳이굳이 안 바꾸고 버티고 있다. 왕년에 수동 몰던 사람들을 '폼생폼사'라고 놀리던 내 업보인지도 모른다.

'아차'

회사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깨달았다. '팟폰'을 두고 왔다. 어쩐지 엘리베이터에 탔는데도 자동으로 버튼이 안 눌리더라. 우리 회사 같이 쓸데없는 곳에서만 보안이 철저한 회사 같으면 팟폰이 없으니 인증이 안되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우리 층에서 안 선다.

"저, 7층 가려고 하는데요"
"네"

건물 로비에 서있는 안내로봇 '지니아'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내 홍채를 인식한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임시 안내카드를 건낸다. 솔직히 너무 이쁘다. 전 세계에 다 지니아의 섹스용 모델이 출시되는 와중에도 이 놈의 유교탈레반 한국만 여전히 섹스로이드 시판이 허가가 안난다. 인공자궁으로 인간을 찍어낸다 어쩐다 하는 요즘 시기에 성적 문란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싶다. 답 없는 나라다.

"후"

어쨌거나 팟폰을 두고 왔으니 업무전화고 뭐고 다 나가리다. 그래 확실히 휴대폰은 손에 들고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이렇게 귓구녕에 끼우고, 귀 뒤에 붙이고 이런건 참 잃어버리기 좋다. 물론 배부른 소리긴 하다. '배터리 혁명' 이전의 그, 매일매일 휴대폰 충전하던 시절에는 귀찮아서 어떻게 썼나 모르겠다 진짜.

"샤샤"

회사 내 자리에 도착해서는 AI 스피커를 향해 말을 건다. 굳이 '알렉사' 대신 '샤샤'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는건 옆 자리 동료 때문이다. '그'의 회사 내 호칭이 알렉사니까.

"그냥 호칭 바꾸면 안돼? 나 집에서는 알렉사라고 부르고 회사에서는 샤샤라고 부르기 너무 헷깔려"
"그럼 시리로 바꿀까요? 아마존이 애플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리로 불렀잖아요. 기억나시죠?"
"아니 기억이고 나발이고, 왜 그런 이름으로 바꾸냐고. 너 부를 때마다 AI가 반응하잖어. 아니 애초에 또 여자 이름이고! 조중만이라는 본명으로 해 차라리"
"에이, 책임님도 게임할 때는 여캐 고르시더만. 똑같죠 뭐"
"여긴 회사잖아"

…어쨌거나 이 날의 기억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그날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뉴스'를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수고해주셨습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감사를 전하는 '인사담당 로봇' 지니아에게 해고 통지서를 건내받은 나는 자리로 허탈하게 돌아왔고, 그때 '알렉사'가 눈치없이 "이것 좀 보세요, 대박!" 하고 나에게 건낸 '페이퍼'로 본 뉴스 기사가 그거였다.

[ 과학보건부, 인간 뇌 전자 업로드 승인, 내년부터 '노이만' 한국 내 서비스 시작 ]

슥 훑어보고는 "재밌네" 하고는, 종이처럼 가벼운 그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모니터를 돌돌말아 '알렉사'에게 건내고 난 씁쓸하게 말했더랬지.

"나 회사 짤렸어"




퇴사하자마자 실업급여와 함께 최저생계수당을 신청한 나는 그제서야 노화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디텔로미'를 먹을 수 없다.

'이제는…'

고혈압 약을 연구하다가 만들어낸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같이, 노인성 치매 연구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노화 완화제 '디텔로미'. 화이자 제약의 시가총액이 사상 최초로 6천조를 찍던 날, 나 역시 화이자 주식을 샀고 채 한달도 안 돼 -10%를 찍고 털어버렸지만 어쨌거나 그 이후 디텔로미를 먹기 시작했다.

"으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지난 20년간 전혀 늙지 않았다. 디텔로미가 조금만 더 빨리 시판되었더라도 좋았겠지만, 어쨋든 원래대로였다면 쭈글쭈글했을 내 얼굴은 아직도 여전히 탱탱하다.

"세 알 남았네"

하지만 달달이 만 달러가 넘는 이 약을 이제는 더이상 사먹을 수 없다. 나라에서 주는 최저생계시급으로 디텔로미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제 나는 노화가 진행될 것이다. 디텔로미를 이미 20년 동안 먹었으니 그 노화의 진행도 아주 빠르게. 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프고 힘들게는.




"최종적으로 여기에 윙크 한번 부탁 드립니다"

지난 6개월간 엄청난 속도로 팍삭 늙어버린 나는 흰머리를 씁쓸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다. '노이만' 서비스가 더 늦었다면 난 아마 결국 죽고 말았을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내가 죽기 전 노이만의 서비스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시작되었고 나는 접수당일 신청했다. 그리고 운 좋게 3만명의 2차 선발대에 뽑혔다. 홍채 싸인을 하고, 나는 드디어 수술방으로 인도받았다.

"자, 이제 이 마스크를 쓰시면 잠이 드실거고, 회원님의 자아의식은 드디어 온라인 세상 속으로 가시게 됩니다"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마취 후에 내 이미 빡빡머리로 만든 대가리의 뚜껑을 열고, 몇 개의 전자주사 바늘을 뇌에 동시에 꽂아넣고 전자적 자극을 준 뒤, 그 자극에서 반향된 데이터를 역으로 기반으로 온라인에 업로드한 후 더이상 쓸모없어진 내 육신은 확실하게 약물로 죽인 다음 카데바로 쓰겠지.

"네"
"그럼 숫자 다섯을 세보세요."
"하나, 둘, 세엣…"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내 모든 자아 데이터가 온라인에 업로드 되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미칠듯한 거대함과 고독이었다. 마치 별빛조차 없는 심우주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 그 거대한 고독에 공포와 패닉을 느끼기 직전, 안내 메시지가 내 뇌로 다이렉트로 전해져왔고, 그 메세지를 따라 행동하니 마치 게임을 하듯 UI가 생성되었다.

[ 이제 원하시는 공간, 원하는 시간, 원하시는 모든 것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
[ 예를 들면 국방부 같은 기밀자료는? ]
[ 그런 쪽 데이터는 더미 데이터와 가드 데이터가 지키고 있답니다 ]
[ 뭐야, 원하는 곳 아무데나 갈 수 있다며. 전자뇌 서비스 이거 실망인데 ]
[ 사람 몸을 갖고 계실 때에도 어차피 그건 불가능했잖아요 ]
[ 그건 그렇네. 근데 당신은 누구? ]
[ 클라라입니다 ]
[ 그게 뭐지? ]
[ 노이만 사의 서비스 AI입니다 ]
[ 아, 그렇구만 ]

그리고는 약 일주일-온라인 정신세계에서의 일주일은 어마어마한 시간이다-간 나는 접근 가능한 세상 수많은 데이터에 접근했다. 수많은 궁금한 기록들에도 접속해보았고,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도 접속해보았다.

그 행복한 온라인 세상 구경에 흠뻑 빠졌던 나는 젊었던 시절, 내가 인터넷에 한창 글을 쓰던 어느 시기의 데이터에 접속했고, 반가움을 느꼈다.

ㅋㅋㅋ

난데없는 'ㅋ' 타이핑으로 아재스러운 내 존재의 흔적을 남긴 나는(요즘에는 다들 팟폰 메시지로 이야기 하니까), 원래 사랑 이야기이던 소설을 지우고 그 자리에 IT 기술 기반의 내 인생을 잠시 기록해두기로 한다. 어차피 그때는 이 모든 이야기를 못 믿겠지만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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