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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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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프파탈이라는게, 뭐 이미지처럼 막 엄청나게 섹시해서 남자 홀리는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보고 겪은 진짜 팜므파탈은 그런게 아니더라고. 오히려 진짜 있는거 없는거 다 남자한테 막 세상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게 잘하는 여자들이! 딱 지인짜 팜므파탈이더라고"

술만 들어가면 터져 나오는 노총각 연 과장님의 연애학개론.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는 문득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10년 전 주혜 생각부터 떠올랐다.





주혜




[ 오빠 뭐야, 군대 제대했으면 연락을 해야지! ]

전역하고 3개월을 바닥 긁으며 보내던 도중 갑자기 날아온 주혜의 네이트온 메세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답했다.

[ ㅎㅎㅎ 그러게ㅋㅋㅋ 쏘리~ 정신없었지 술 먹느라. 넌 잘 지냈어? ]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 대한 관심 순위가 그리 높지는 않았다. 서리, 연수, 진선… 한창 '하나만 걸려라' 느낌으로 수작질 부리던 애들은 이미 많았고, 주혜는 그녀들에 비하면 다소, 뭐. 좀 그랬으니까.

[ 응, 난 지금 천안에 있어 ]
[ 천안? 너 대학교 서울에 있지 않았냐? ]
[ 어휴, 나 취업계 내고 일하고 있어 힘들엉 ]
[ 아 그렇구나;; 그래도 취업 힘들다던데 넌 잘 뚫었네 ]
[ 응ㅋㅋㅋ운이 좋았어. 여기 월급도 나쁘지 않아. ]

그렇군.

[ 오빠 천안 놀러와 밥 맛난거 사줄게 ]
[ 그래, 조만간 함 보자~ ]

아마 거기에서 진짜 대화가 끊어졌다면 그대로 그녀와의 인연도 끊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하지만 주혜는 확실히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서 뭐랄까, 사회적 지능(?)이 높다고 해야되나. 좀 비범한 면이 있었다.

[ 아아 그런거 말고, 오늘 와 오늘. 내가 퇴근하고 맛난거 사줄게 ]
[ 엥? 오늘? ]
[ ㅇㅇ ]

이미 오후 4시 반. 씻고 준비해서 터미널 가서 버스 타고… 밥 먹고, 뭐 술 한 잔 하고, 엄… 근데 주혜랑 거기까지? 에이, 좀 무리수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 오늘 어케 가. 에이에이, 담에 봐, 담주 주말에 보던지 ]
[ 뭐야, 시큰둥하네? 나 그럼 이제 오빠 평생 안 본다? ]

그럴 리야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또 사실 안 간다고 해서 오늘 내일 뭐 딱히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복학까지 남은 몇 달 간 팽팽 놀기만 할 내 입장에서 안 갈 이유도 없긴 했다.

[ 알써 그럼 이따 터미널에서 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

이틀 만에 씻고 준비했다. 온 몸 구석구석, 특히 몇몇 부위를.




"오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불과 2년, 아니 신병 시절 때 면회 왔던거 생각하면 근 1년 반? 만에 주혜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누구세요?"
"야!"

주혜는 퇴근 전에 이미 식당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잠자코 따라갔더니 꽤 그럴싸한 한우 고깃집이 나온다.

"야, 여기 150그램 1인분에 38,000원이라는데"
"아 오빠, 내가 쏜다고"
"그러니까"
"걱정말고 배나 채우셔"

등심 4인분에 육회에 이것저것 곁들일 사이드 메뉴까지 시키는데 세상에 그렇게 멋있는 여자는 내가 본 기억이 없다.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내 말에 빵 터진 주혜는 "어휴 그래 우리 아들 나라 지키느라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하며 내 앞에 구워진 고기를 건낸다.




"잘 먹었어. 아 너무 훌륭하다"
"그치? 여기 맛있더라고"

배불리 밥을 먹고 나오는데 "2차 가야지" 하는 주혜. 이번에는 내가 쏴야지하고 생각하던 차에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이자카야가 보인다.

"저기 가자"
"좋아"

자리에 앉아 술과 안주를 시키고 한숨 돌리려니 주혜는 여전히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물어온다. 이렇게 보니 또 새삼스럽지만 정말 귀엽네.

"오빠는 연애 안 해?"
"해야지. 근데 뭐 있어야 하지. 주변에 이쁜 여자 없냐"
"오빠 주변에 여자들 많잖아. 그 누구지? 선… 선 뭐였는데. 선진이? 선주? 그 왜 얼굴은 완전 애긴데 몸매 미친 애 있잖아"
"진선이. 그리고 손 그렇게 하지마. 그 정도는 아니야"
"맞어. 진선이. 에드벌룬"
"미친"
"걔 막 오빠랑 썸씽 있고 그러지 않았어? 옛날에 내가 전화했을 때 옆에서 막 난리 피웠잖…"
"아 됐어. 그게 언제적 이야기야"

사실은 지난 주에도 봤다. 영화 보고 밥 먹고 곧바로 헤어졌지만. 실속 없는 기집애.

"그럼 지금은 연애 안 해?"
"안해. 넌?"
"나도 안해. 헤어진지 몇 달 됐어"
"올, 그럼 그 사이 연애 하긴 했네?"
"어"

갑자기 주혜의 얼굴이 아련해진다. 뭐여.

"왜? 안 좋게 헤어졌냐"
"어"
"뭔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걔네 엄마가 나 안 좋아한대서" 하고 대답하는 주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마보이네. 그런 새끼랑 뭐하러 만나"



사케 두 병을 포함해서 12만 4천원이 나왔다. 내가 계산하려 했지만 주혜는 막 "아 진짜 오빠 나 막 소리지른다? 나 다시 안 볼거야?" 하는 반 협박성 멘트까지 날리며 굳이 자기가 계산했다. 아까 밥 값까지 생각하면 거의 30만원 가가운 지출.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야 너 무슨 내 장기 떼가려고 그러냐. 뭔 돈을 이렇게 쓰는거야"

이미 반쯤 혀가 꼬인 주혜는 웃으며 "내가 딴 사람은 몰라도 오빠한테는 써도 돼!" 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월봉중학교 쪽으로 가주세요"

나는 오늘 얘랑 자는건가. 또 혹시나 하는 기대에 터미널에서 콘돔 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택시 안에서 주혜는 말없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주혜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 어쩌면 이다지도 보드라울까.

주혜는 전 남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대꾸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놈인 듯 했다. 주혜가 원래 좀 누구를 만나면 열과 성을 다 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 놈은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내가 걔한테는 진짜 다 줬다?"

뭘 줬는데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생활비 쓰라고 카드도 줬지, 기 죽지 말라고 용돈도 맨날 쥐어줬지, 면접 보러 다니라고 정장도 해입혔지, 잠깐 지낼 데 없다면서 한 6개월 내 자취방에서 살 때는 내가 피임약까지 먹으면서… 지 하고 싶다는거 다 해줬다고"

준마이 두 병째에 돌입하자 주혜는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걔네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호텔 숙박권까지 끊어줬다고"
"미친, 돌았네"
"내 이름으로 끊은건 아니구, 남친 이름으로 해서. 효도하라고"
"하 진짜 너도 참"

호구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자기가 제일 잘 알테니.

"근데 좀 이상한거야. 여친한테 부모님 결혼기념일 선물로 호텔숙박권 끊어주고 싶다는 말도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 결혼기념일인데 지가 연락이 안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

그랬구먼.

"그냥 괜히 이상한 느낌이 와서 다짜고짜 호텔로 찾아갔는데, 역시나 거기 있더라. 다른 여자랑"
"그래서 어떻게 했어? 가위로 잘라버렸냐"

내 말에 술 김에도 눈을 흘기던 주혜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냥 못 본 척하고 다시 집에 왔어. 그리고 카드 사용 내역 살펴봤어. 싹 다. 그랬더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싶더라고"
"왜"
"지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굴린거 같은데, 아니 금요일 밤 11시 반에 술 먹고 카드 현금인출로 8만원을 뺀 기록이 군데군데 있네? 다음 날 12시에는 해장국 두 그릇까지 결제하고?"
"캬, 미친"
"아마 기념일이었던 것 같아. 부모님 기념일이 아니라, 다른 년이랑 100일 기념일"
"정신나간 새끼네"
"근데도 나는, 다음 날 좋게좋게 말했어. 용서해줄테니 그러지 말라고. 카드 사용 내역은 딱 한번 살펴본거고 다시 그럴 일 없을거라고. 그리고 두 달을 모르는 척 지냈는데, 그 후에도 계속 그러더라"
"개새끼"




"102호, 비번 이공일삼이야"

주혜를 들쳐업고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아파트 옆 작은 빌라 1층. 주혜를 침대에 눕히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눈에 어둠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방 안을 살핀다. 작지만 아늑한 방. 대학 시절에도 참 나를 잘 따랐고, 아마 마음을 먹었다면 훨씬 이전에도 사귈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나.

그냥 조금은 나랑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과 행동은 가볍게, 대충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도 꼼꼼함과 진지한…진심이 항상 느껴지던 주혜였다. 정말 좋은 동생이고 항상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래서 사귀었다 헤어지면 영영 남이 될까 두려웠다. 10년 지기 소꿉친구였지만 어이없게 멀어진 영서처럼 될까봐.

뭐, 조금 더 솔직한 이유를 들자면 더 예쁜 애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나 오늘의 주혜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좋아하는 남친이 능력이 없다고 하자 선뜻 신용카드까지 건내고 지가 먹여살렸다는 모습이 엄청나게 섹시했다.

물질적인 모습이 아니라, 주혜에게서 우리 엄마가 겹쳐보였는지도 모른다. 공사현장에서 허리를 다쳐 평생 누워있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이끌어 온 우리 엄마가. 이런 여자라면 만약 내가 언젠가 뭔가 잘못되더라도 평생 의리를 지킬 것 같았다. 그런 여자라면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 않을까.

내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어느새 곯아 떨어진 주혜의 양말을 나는 벗겨주었다.

"으이구"

내 지금 뭐한다고 천안까지 내려와서 여자애 양말이나 벗겨주고 있나, 하는 허무함이 몰려왔지만 오른쪽 양말을 벗기는 순간 주혜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야?"

잠깐 놀랐지만, 나는 "아니"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주혜가 뭐라 더 말을 하기 전에 자리를 고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내가 너한테 아예 마음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왔겠냐"
"근데 왜 맨날 선을 그어"

뭔가 변명을 할까 하다가, 그냥 "그 선 넘으려고" 라는 말과 함께 그녀 옆에 누웠다. 둘 다 피식 웃었다. 한 명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한 명은 그런 드립을 떠올렸다는 발상 자체가 자랑스러워서.




나는 그 날부터 곧바로 주혜네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집에는 연락을 했다. 일자리 구했다고. 대학교 친구 자취방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다가 곧 들어가겠노라고. 아버지는 드디어 사람다운 짓 한다며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걱정하는 듯 했지만 역시나 좋아했다. 백수가 방구석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이거 그거야?"
"어. 피임약"

처음이었다. 하다가 내키는 그 순간 그녀의 안에 마음껏. 그리고 곧바로 또 이어서. 주혜와 나는 잘 맞았다. 매일, 정말 매일 몇 번이고.

"지금 몇 시야?"
"두 시 반"
"헐, 나 몇 시간 못 자겠네"

아마 피곤하기도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퇴근하면 남친이랑 같이 집 근처에서 밥 먹고 불당천에서 걸으며 데이트, 그리고 집에 와서는 섹스. 매일매일. 밥값도, 내 옷도, 모든 생활비도 모두 그녀가 감당하는 하루하루.

"그, 나도 서울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왜?"

돈을 좀 어떻게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집에 뭐 플스를 팔던지, 엄마한테 좀 꾸던지 해서. 우리가 뭐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아니고, 연애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세만 지는 연애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
"괜찮기는. 너가 무슨 갑부라고"
"나 연봉 꽤 괜찮게 받아"
"그래도"

사실 우리가 딱히 크게 돈 드는 연애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밥도 처음 며칠만 외식했지 이후로는 집에서 같이 요리 해먹었고, 게임도 영화도 그냥 집에서 둘이 끌어안고 보는게 전부였으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모아놓은 돈 좀 되거든?"
"내가 다 까먹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도 않지만 그럼 좀 어때. 내 서방님인데"

대신에 나는 그녀가 집에 오기 전 청소도 해놓고 빨래도 해놓고, 서툰 솜씨지만 요리도 해놓고 했다. 그때마다 주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야, 진짜 나는 복 받은 여자다"
"복은 내가 받았지"
"진짜 오빠 나한테 장가오면 안됨?"
"그래, 도장찍자"
"응"
"근데 그 전에 다른 도장부터 찍자"
"아 무슨 또 아저씨 같은 말이야"



꿈같은 이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점심시간, 주혜의 회사 근처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그녀를 들여보낸 후 퇴근까지의 여섯 시간을 PC방에서 보내는 그 순간.

"아들, 요즘 뭐하느라 연락도 없어"
"어, 그냥 일하느라 좀 바빴어."
"그려, 일은 할만해?"
"어, 꿀알바야"
"그래도 얼굴 한번 비춰야지. 거 친구네서 신세 지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옷도 없잖아"
"아 다 있어. 걱정말어"
"그래"

하긴, 잠깐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환절기인데 옷도 좀 가져다 놓고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긴 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도 커졌다.

'그래, 집에 다녀오자'

주혜에게 전화를 했다. 옷이랑 이것저것 짐이랑 좀 더 가져오겠노라고,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주혜는 의외로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올라간 날 바로 짐만 부치고 다시 내려올 생각이었지만, 막상 또 아들이 간만에 집에 들어왔다고 엄마의 대접이 달라졌다. 갈비에 삼겹살에, 무슨 과일에 뭐에, 첫 휴가 나왔을 때 생각이 날 정도였다. 배불리 먹고 나니 그냥 자고 가겠노라고 주혜에게 연락했다. 역시 선선히 그러라는 주혜.

"야, 뭐하냐?"

다음 날은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승필의 연락. 언제 한번 꼭 보자 보자 했던 놈이라 연락을 뿌리칠 수 없어서 만나고 술 마시고 그렇게 또 하루, 승필과의 술자리에서 연락 온 서리의 전화.

"오빠 요즘 연애해?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해?"
"연애는 무슨. 요즘 알바 좀 하느라 그랬지. 근데 갑자기 왜?"
"오빠 그럼 모레, 금요일에 뭐해?"

그렇게 서리와의 술 약속 때문에 또 천안으로의 귀환이 이틀 미뤄졌다. 만나서는 막상 뭐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오빠 막 밀당 초고수 아냐? 그렇게 맨날 놀자 놀자 하다가 연락 없으니까 내가 더 서운한거 있지?"
"참나. 그럼 뭐 나랑 사귀기라도 해주냐?"
"음, 하는거 보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볼뽀뽀까지 받았다.

"어…"
"또 오해하지마? 그냥, 이제부터 하는거 좀 지켜본다는 뜻이니까"

여우 같은 년. 택시 타고 떠나는 서리를 보내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 중 통화가 네 통이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미안, 잠깐 뭐 좀 하느라고. 왜?"
"바로 온다는 사람이 며칠 째야. 나 불안하게"
"아, 걱정마. 금방 갈게"
"그게 언젠데"

주혜 성격상 '지금 당장'이 답이겠지만, 당장 내일 연수와 진선이가 같이 영화 보자는 제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참.

"토요일 밤에 갈게"
"밤에? 낮에는 뭐하는데"
"현우랑 보기로 했어"
"현우? 현우는 누군데"
"대학교 친구 있어"
"하…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니 조금은 피곤했다. 하지만 아주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유부남의 기분이 이런걸까 싶고.

"친구들하고 지낸다고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고 그러는거 아니지?"
"아 무슨 내가 중고딩이야?"

집으로 돌아와 플스랑 겨울옷이랑 이것저것 개인짐들은 택배로 부쳤다. 주말 지나서 월요일, 화요일에는 도착하겠지 생각했다. 그날 밤은 주혜를 달래며 길게 통화를 했다. 늦잠을 자고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설 채비를 했다.

"또 어딜 나가."
"약속 있어"
"너 그럼 이번 주는 내내 일을 안 하는거야?"
"일 안 하는 날은 안 해도 돼"
"그런 일자리도 있니"

집에선 내가 지방에 취업해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엄마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무어라 하는 대신 용돈을 쥐어주었다. 무려 30만원이었다.

"집에 가면 애들이랑 맛난거 사먹어"
"알았어"

하지만 엄마가 준 그 돈은 주혜가 아닌, 연수와 진선에게 돌아갔다.



"참치요? 정말?"
"그럼"

…나는 끽해야 동네 회전초밥집 정도나 생각했다. 이 미친 년들이 진짜 코스요리 스시집에 갈 줄이야. 그러나 뱉어놓은 말도 있고 해서 그냥 내가 부담했다.

"21만 3천원입니다"
"여깄습니다"
"오 뭐야 오빠 현찰 부자네"
"내가 돈 빼면 시체 아니냐"

농담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속이 쓰렸다. 차라리 주혜한테 근사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것을. 셋이 같이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중간에 잠깐 주혜한테 전화했을 때도 주혜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더 속이 쓰렸다. 아쉽지만 남은 돈으로 둘이 뭐 뷔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까 돈 많이 썼죠"

영어 학원 때문에 일찍 따로 들어간다고 한 연수는 나에게 몰래 귀뜸해줬다.

'오빠, 진선이 요즘 많이 외로워해요. 기회야, 내가 팍팍 밀어줄테니 잘해봐요. 오빠 진선이 몇 년 짝사랑한거야? 잘 되면 나한테도 남자 해줘요. 알았지?'

대답도 듣기 전에 웃으며 뛰어간 그녀. 참, 왜 항상 인기는 이런 식으로 몰려오는 것일까. 좀 나눠서 오면 얼마나 좋아.

"아냐, 그렇잖아도 연수가 너 요즘 기운없다고 해서 맛있는거 사주고 싶었어. 무슨 일 있고 그런건 아니지?"
"그런거 없어요. 아 근데 진짜 오빠 최고다. 나 기운없다고 막 비싼 초밥도 사주고."
"돈이 문제냐. 근데 진짜 뭔 걱정 있는건 아니지?"

내 질문에 진선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허전하고. 막 연수는 그래서 연애해야 된다고 그러구"
"주변에 뭐 좋다는 남자 없어?"
"없어요 그런거. 맘에 드는 사람도 없고"

그 말에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애써 티는 안 내고 농담식으로 물었다.

"나 있잖아 나. 나랑 만나면 되겠네"

그리고 그 질문에 의외로 진선은 밝게 웃었다.

"진짜 오빠 같은 남자가 진지하게 고백하면 생각 좀 해볼텐데"
"정말?"

뭐야 이건. 너무 뻔히 속 보이는 대화 같지만 그래도…. 정말정말 새삼스럽지만 진선의 가슴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일부러 그러는건 아닌데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 얼굴에 이런 몸매가. 과연 연예인 제안을 몇 번이나 받은 것도 이해가 간다.

"어…, 음. 사실 나 진짜로 좀…"

뻘쭘한 고백이었지만 사실은 주혜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 년을 바라만 보던 진선과 이렇게 가까워 질 기회에 솔직히 설레임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뭐에요, 아 웃겨"

내 딴에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진지하게 들이댄 건데 그게 진선이 보기에는 그냥 개그로 보인 모양이다. 나는 얼른 함께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함께 걸으며 많이 대화를 하다가 그렇게 헤어졌다.

"잘 들어가요 오빠. 자주 봐요. 나 요즘 심심해요 많이"
"어"

저녁 10시 10분.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 한 통.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 터미널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주혜는 받지 않았다.




"뭐야, 왜 그렇게 늦었어. 저녁 만들어 놓고 기다렸잖아"
"미안해, 내가 먼저 먹으라고 했잖아"
"같이 먹으려고 했지"

미안했다. 사실은 주혜가 전화를 안 받길래 또 오만 잡생각을 하면서 미리미리 문자도 싹 다 지우고 통화기록도 지우고 하면서 왔는데 그냥 잠깐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 나도 먹은지 좀 됐어. 얼른 먹자"
"응, 내가 이거 찌개 좀 데워올게"

주혜가 끓인 김치찌개는 참 맛있었다. 아까 쳐먹은 인당 7만원짜리 스시 코스보다 훨씬 더. 그래서 더 미안했다. 서리, 진선이랑 놀다가 와서 본 주혜가 새삼 덜 예뻐 보인 것까지도 미안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은. 그리고 내일은 우리 뷔페 가서 맛있는거 먹자. 나 돈 생겼어"
"에휴, 기어코 엄마한테 돈 얻어왔구나?"
"아니거든?"

사실은 맞지만.

"그리고 여기로 택배 붙였어. 플스랑 겨울옷이랑 막 다"
"이제 우리 같이 사는거네?"
"어"
"좋아"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스려졌다. 그래, 나 좋다고 이렇게 죽고 못사는 애가 최고지, 다른 년들이 무슨 대수냐.




"잠깐 일어나 봐"

한참 곤하게 자던 중간이었다. 누군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연히 주혜였다.

"이거 뭐야"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직감했다. 주혜의 손에는 내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펴보인 휴대폰에는 [ 오빠, 진선이한테 고백했다면서?ㅋㅋㅋㅋㅋㅋㅋ 어쩜 그렇게 사람이 단순하냐ㅋㅋㅋ ] 라는 연수의 문자가 와 있었다.

"해명해 봐"

병신. 물론 나 자신에게 한 말이다. 해명이 가능할 리 없다. 이미 주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선이는 주혜도 아는 이름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에게 많은 좌절감을 안겨준 그 이름 아닌가.

"그냥… 별 일 아니었어"
"별 일 아니라고?"

주혜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연했다. 전 남친의 일도 있고, 또 짐 가지러 반나절만 다녀오겠다는 사람이 근 일주일을 뭉개다 왔으며 이상한 문자 내역까지 있고.

"그리고 현우라는 친구랑 놀았다면서. 그 친구랑 연락한 내역은 어딨는데? 연락도 없이 텔레파시로 약속 잡아서 만났어? 통화내역에 없던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더 큰 소리를 쳤다.

"너 남의 휴대폰은 왜 보는데. 의심병 있어?"

주혜는 눈물을 죽 흘렸다.

"이러지마, 사과를 해 그냥. 잘못을 했으면 그냥 사과를 하라고"

그 순간 그녀의 울먹임에서 느꼈다. 방금 전의 그 말은, 나 하나한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를 못 살게 군 전 남친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래, 그 놈은 잘못했을 때 사과를 안 하고 더 큰 소리나 치고 지랄을 했나보구나. 지금의 나처럼.

"미안해, 사실은…"



이만저만하게 잘 둘러댔다. 사실 7할에 적절한 가감 3할을 보탠 그런 구라. 물론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벗으로서 용기를 붇돋아주기 위해 한 농담일 뿐. 애시당초 걔랑 나랑 뭐 불꽃이 튀고 그런 뭐는 좀 아니잖는가' 라는 변명을 했다고 그게 쉽게 통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 주혜도 알았을 것이다. 시시한 남자의 졸렬한 짓과 그것을 감추기 위한 말도 안되는 개구라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눈물과, 그 눈물을 보고 흘린 내 눈물을 다시 웃으며 닦아주었다.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연 과장이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주혜한테는 진짜로 잘했어? 그 이쁜이들이랑 잡은 약속들은 다 파기하고?"

나는 맥주를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연 과장은 물론이요, 현 대리, 진혁이 다들 보챘다.

"뭔데?"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 뭐냐고"
"어떻게 됐어요?"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제서야 "흐음" 하며 깬 아내는 나에게 물었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그냥 맥주 몇 잔"
"응, 지금 몇 시야?"
"12시 10분"
"그럼 얼른 자. 내일 또 출근하려면 피곤하겠다"
"어, 잘자 서리야"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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