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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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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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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두 개를 섭취하신 후, 맥주 원샷과 함께 침대에 누우세요. 그리고 소화가 될 때까지 두 시간의 숙면! 잊지마세요! 멋진 몸매를 위한 당신의 선택!"

오늘도 TV의 벌크업 프로그램을 보며 햄버거를 억지로 입에 넣고 있는 누나.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는다.

"아 누나, 그런다고 살이 쉽게 찔 것 같아? 때려치워. 그냥 그 몸매로 살아"
"이제 죽을라고! 야, 기달려. 올 여름에는 진짜 내 반드시 80kg 채우고 만다"
"에휴, 꿈같은 소리"

누나는 곧바로 "야!" 하고 또 소리를 지르지만 난 웃으며 밖으로 뛰어 나온다. 아차, 이러다 살 빠지면 큰일. 천천히 걸어야지.





자기관리의 시대 





오늘도 역 앞에서는 멋지게 찌운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돼지들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

"폭식하러 오세요"
"아, 예예"

몇 명의 남자돼지들이 건내는 전단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피했지만,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갑자기 슥 다가온 45인치 허리의 미녀가 건내는 전단지는 나도 모르게 받아들고 말았다. 앞에서 나에게 무시당한 남자 폭식 트레이너들은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었지만 사실 놈들도 이해는 할거다. 이런 뚱녀가 상큼한 웃음과 함께 건내는 전단지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 할 수 있어요 100kg 섹시한 몸매! 올 여름 여심을 휘어잡을 목살/뱃살/옆구리살 집중 육성! ]

나는 얼떨결에 손에 건내받은 전단지를 보며 혀를 찼다. 사진 속 육중한 체구의 남자. 멋있긴 멋있다. 나도 이렇게 늘어진 뱃살과 옆구리살을 가질 수만 있다면. 폭식 트레이너들처럼 스모 선수 체형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더 늙기 전에 원팩은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보다, 지금 몇 시지. 어, 벌써 3시네.

"어, 연수야. 어디야? 응? 나도 역 앞인데? 아아, 어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께"



이미 15분 전에 도착한 연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 미안 내가 좀 늦었네"
"아니야. 괜츈. 커피 마실래?"

카드를 내미는 여자친구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살께"

나는 곧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수는 나에게 물었다.

"뭐 시켰어?"
"아메리카노"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다.

"아 왜!"
"아, 미안"

맞어, 저번에도 이걸로 한 소리 했었지.

"아 왜 내가 시키는대로 마끼아또 안 먹어? 맨날 아메리카노 아니면 에스프레소나 먹고. 자꾸 그러니까 이렇게 마르잖아. 아 진짜 짜증나. 내 말을 왜 맨날 무시해?"

어느새 연수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진정시킨다.

"아, 미안. 대신에 시럽 많이 타서 마실께"
"에휴"

그녀는 요즘 부쩍 내 몸매에 말이 많다. 연애 2년차, 슬슬 말조심을 거둘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좀.

"그럼 밥은 먹었어?"
"어, 먹었어"
"뭐 먹었어?"

사실은 견과류를 곁들인 샐러드를 먹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라면에 밥 말아먹었어" 하고 얼른 거짓말을 했다. 연수는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좀 남친 옆구리살 만지면서 데이트 좀 해보자. 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나도 살짝 짜증이 나려는 찰나에 다행히 진동벨이 울린다. 아메리카노를 받아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시럽을 억지로 몇 번 펌핑한 후 자리로 가지고 온다. 솔직히 먹기 싫어졌다. 연수는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 거리다가 나에게 물었다.

"커피 마시고 이제 뭐할거야"
"어, 영화 볼까"

사실은 오늘 간만에 날씨도 따뜻한데 둘이 요 앞에 산책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소리를 했다가는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얼른 코스를 바꿨다.

"그래, 좋아"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연수는 그다지 내키는 얼굴이 아니다.




"카라멜 팝콘이랑 콜라 주세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영화를 예매하고, 팝콘을 주문한다. 이미 커피 만으로도 배가 제법 부른데 또 팝콘까지 먹어야 한다. 후, 정말 먹기 싫다. 연수는 어쩜 저렇게 잘 먹을까.

"배 안 불러?"

조심스럽게 한 질문이지만, 연수는 이미 아까부터 짜증이 난 상태다. 별 말도 아니건만, 단박에 짜증을 낸다.

"나라고 배 안 부르겠어? 그래도 자꾸 이렇게 관리를 해줘야지. 오빠는 진짜 사람이 왜 그래? 안 먹고 싶다고 다 안 먹으면 평생 그렇게 살거야? 자기관리가 그렇게 안 돼?"

당혹스럽다. 사람도 많은데 이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옆에 줄 서있던 돼지들은 우리를 대놓고 비웃고 있다. 시발. 일단은 수습하려 노력해본다.

"아니 연수야. 내가 뭐 별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 배부를까봐 배부르냐고 물어본 거 뿐이지. 미안해 미안해,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더 화를 낸다.

"아 이런거 더 싫어. 오빠는 왜 맨날 이런 식이야? 그냥 문제를 덮으면 그게 전부야?"

아니 시팔 그럼 이 사람 많은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 머리끄댕이 붙잡으며 쌍욕이라도 해야 되냐 이 좆같은 미친 년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겨우 참고 "미안해 미안해" 하며 겨우겨우 그녀를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미 그녀도 나도 기분은 완전 작살난 상태다. 겨우겨우 영화관에 들어가 자리에 앉지만 스크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수도 기분이 안 좋겠지. 하기사, 남친이라고 있는 것이 이렇게 슬림한 잔근육에 긴 모가지에 긴 팔다리, 소두이기까지 하니 어디 데리고 다닐 맛이 날까. 키라도 작았으면 짭실한 폼이라도 날텐데. 키까지 커서 제기랄.

'시발'

나라고 어디 살이 찌기 싫어서 안찌나. 지야 원래 타고 나기를 그렇게 디룩디룩이니까 남 살찌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맨날 저 지랄이지. 아니 입에 음식이 안 들어가는걸 억지로 먹는 것도 고역이다. 막 미친듯이 뛰고 운동하고 싶기만 하다고!

'좆같네'

윤석이랑 동주는 지금쯤 죽어라 뛰고 있을텐데. 부럽다. 데이트가 즐거워야 데이트지. 후우.

'쩝'

혼자 씩씩대다가 문득 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아본 나. 어. 연수는 울고 있었다. 또 왜 울어. 곧바로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 으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내뺀다. 하, 좀 이럴 때 은근하게 가만히도 있고 서로 화도 풀면 좀 좋아? 염병. 그래, 이판사판이다.



영화가 끝났다. 찜찜한 마음으로 나와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극장을 나선다. 쓸쓸하다. 외롭다. 서로 교감이 되지 않는다.

"저녁 먹을까"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연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 좀 해" 하며 극장 뒤 골목 벤치로 간다. 저번에도 헤어지네 마네 이야기 할 때 저기에서 이야기 했었지. 마음이 무겁다.




"오빠"
"어"
"내가 오빠한테 맨날 살 찌워라 살 찌워라 하니까 오빠도 힘들지?"

시발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고 이러나.

"어, 힘들어"

그래, 근데 나도 한계다. 아닌 말로다가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 뿐이냐. 그래, 너무 힘든 인연은 인연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많이 체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수도 그렇게 가볍게 이별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오빠가 걱정되서 그래. 의사들이 그러잖아. 너무 마른 몸보다 적당히 살집 있는 몸이 오래산다고. 그리고 솔직히 뚱뚱한 몸매, 오빠도 갖고 싶지 않아?"

후우.

"연수야. 미안한데, 사람은 좀 타고 나는 것도 있어. 체형 자체가. 그리고 입맛을 이 날 이 때까지 이렇게 29년을 안 먹고 덜 먹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살 찌우는게 어디 쉽겠어? 그래, 알어. 너도 노력해서 그렇게 살 찌운거. 그래서 내가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럼 너 나만큼 축구 잘해? 나만큼 영어 잘해? 그냥 사람마다 더 잘하고 좀 약하고 이런거 있는거잖아. 그냥 그렇다고. 넌 이런 내가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너한테 맨날 이렇게 강요받는거 힘들어"

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말이 아직 안 끝났다.

"그냥 나도 생각 당연히 많이 해봤지. 니 주변에 아는 오빠들 중에 돼지들 많은거 알어. 그래서 더 내가 눈에 안 찰 수도 있겠다 싶고. 솔직히 너 만나면서 나 없던 비계 열등감까지 생기더라. 너는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나도 뭐 노력 꽤 해봤어. 밥 먹고 나서 디저트도 챙겨 먹어 보고, 햄버거도 막 두 개씩 먹어보고 그러는데, 아 진짜 살이 안 찌는걸 어떻게 해. 몇 키로 찌워봤지만 금방 또 빠지고, 그러는데"

참, 이런 말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든다. 이게 무슨 좆같은 항변이야.

"후우"
"미안해"

나는 또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는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연수도 이런 게 싫은 거겠지만, 그냥 미안하다. 내가 괜한 욕심을 낸 것 같아서.



겨우 집까지 연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나는 긴 씁쓸함을 느낀다. 나도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다. 서로가 좋아 죽고 못사는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좀, 뭐 그렇고 그런 연애.

'시발'

그리고 그렇다고 지는 뭐 그렇게까지 잘 찌운 몸맨가? 뱃살 좀 불룩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 등살 좀 붙은거 빼면 뭐… 에휴. 참, 이게 뭔 좆같은 연애인지. 왜 이런 참담한 기분을 자꾸 느껴야 하는지.

'하아'

근데 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통통한 뱃살에 여기저기 군살도 좀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냥 나이 먹고 직장생활 빡세게 하며 스트레스 받다보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져서 이렇게 된 것 뿐이지.

'놓아주어야 하나'

연수는 그래도 매력적인 여자다. 나한테야 지랄지랄할 지언정 성격 자체는 원만하고 딱 부러지고, 뭐 자기관리 열심히 하고. 좋은 애지. 내가 싫으면 지가 좋아하는 놈 만나면 지 좋은 연애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질투에 가까운 화도 나고 짜증도 나지만 곧 무기력해진다. 시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홧김에 햄버거 5개를 질렀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것을. 그래도 내 방에 틀어박혀 우걱우걱 쳐먹는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프긴 했다. 억지로 3개까지는 먹었다. 거기에 반 개를 더 먹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누웠다. 숨이 가쁘다.



그 날 밤, 여지없이 나는 체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누나는 "왠일로 무리하게 폭식을 하더라니. 등신" 하면서 혀를 찼지만, 그럼에도 소화제를 사왔다. 한참을 더 고생했지만,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서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과 함께 겨우 체한 기운이 내려갔다.

"흠"

그때까지도 연수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걔도 걔대로 생각이 많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을의 연애를 하는 나. 나와 그녀의 연락 빈도는 내가 열 번을 하면 연수는 두어번 할까 말까. 아프기까지 하니 서럽다. 게다가 이건 억지로 살 찌워보려다 이런 건데. 눈물이 찔끔 났다. 전화가 와도 안 받자고 생각했다. 사실 연수 그 년은 그런다. 내가 전화해도 지가 받기 싫으면 안 받는다. 이번에는 나도 그래야겠다.



"여보세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밝은 목소리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연수의 전화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녀도 "미안해" 하면서 먼저 사과를 한다.

"아니야, 미안하긴"

뭐 어차피 이래봤자 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다시 체형타령을 할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려니 한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자 연수는 부연한다.

"그냥, 나는 너가 좀 더 멋있었으면 좋겠어. 너도 너가 멋있으면 좋잖아. 뚱뚱하고, 더 배도 좀 나오고 그러면. 알어, 나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뚱녀도 아니면서 너한테 이러는거 좀 너도 할 말 많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어"
"여튼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아. 사람들 많은데서 화를 낸 것도 미안해"
"어"

나는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어, 어만 반복했다. 왜일까. 그냥 문득 힘이 빠졌던 것 같다.

"나 사실 아까 토했어"

내 말에 연수는 조금 놀란 듯이 묻는다.

"왜"
"집에 오는 길에 햄버거 다섯개 사서 쳐먹다가 체했거든"
"… …"

나도 모르게 괜히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난다.

"바보 같지, 나"

전화기 너머에서도 콧물을 훔치는 소리가 난다.

"미안해"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몸이 별로라서 일찍 잘게"
"어, 어어"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눕는다.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도 돼지가 되고 싶다. 나도 돼지가 되어서, 오히려 역으로 연수를 개같이 놀리며 괴롭히고 싶다.

"아 쳐먹으라고 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피식 웃음이 나오며 조금은 시원해진다.

"어? 예전에 나 쥐잡듯이 할 때는 좋았지? 너도 아주 각오해. 밥 열 그릇 쳐먹고 자, 국물 다섯그릇 싹싹 말아서. 아주 남기기만 해? 어?"

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눈가에 새삼스러운 이슬이 맺히며 나는 또 잠을 이룬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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