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
토요일 오전 11시 40분. 혜영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비몽사몽하는 목소리로 "나 새벽에 잤어. 챔스 보느라" 하고 겨우 대답했다. 혜영은 "에휴" 하고 긴 한숨을 쉬더니 "알았어, 그럼 좀 더 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녀의 긴 한숨 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확 일어났지만 의례 그려려니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결국 눈을 뜬 것은 오후 1시 50분이 다 되어서였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변을 보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려다 관두고 다시 나와서 냉장고를 열어 본다. 먹다 마시고 남긴 콜라 패트병을 입 대고 한 모음 마신 후 다시 냉장고에 넣어놓는다.
"어후 피곤해"
꽤 잤음에도 피로가 안 가신다. 치르미누의 미친 삽질에 경기도 조지고 기분도 조지고 주말도 이렇게 조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치킨부터 치우려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허기가 조금 진다. 그러나 냉장고에 먹을 것이라고는 콜라 뿐이다. 뭐 시켜먹을까 하다가 카드 한도가 간당간당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라면이나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귀가 갑자기 마렵다. 일부러 힘을 줘서 뿌아악하고 강하게 뀐다. 밤새 숙성된 치킨 단백질과 빙초산 무의 환장 콜라보로 지독한 냄새가 난다.
"어흐"
창문을 살짝 열고 원룸촌 골목을 내려다본다. 일요일 낮인데도 인적은 드물다. 환기를 시키며 담배를 입에 문다. 윗 집 창문이 열려있다면 한 소리 들을 일이지만 요즘에는 창문을 닫아놓는지 별 소리를 안 한다.
"아 힘들다 진짜"
담배를 다 피운 후 꽁초를 창 밖으로 버린 다음 냉장고를 열고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다. 입 안 가득 탄산을 느끼며 목구멍으로 따가움의 지옥을 느낀다. 그리고 이윽고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을 마친다. 다시 방귀도 마렵다. 미친 더러운 몸이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겨우겨우 샤워를 마치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아무거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한량 그 자체다. 큰 길까지 나가서 동네 커피숍에 들어선다. 그래도 오늘은 손님이 좀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베이글이라도 먹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돈이 아깝다.
"쿠폰 찍어주세요"
생전에 쿠폰을 찍지 않는 인간이지만 요즘에는 이런 거에도 조금 궁상 맞아진다. 등을 벅벅 긁으며 기다리다가 이윽고 커피가 나오자 커피를 받아들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혜영이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오늘은 출근이라고 했다. 과연 쓰레기 좆소 인쇄업체답게 주말 출근이 아주 상시다.
[ 모하냐? 밥은 먹었고 ]
카톡을 보내놓는다. 약 15분 후쯤 [ 어 먹었어 도시락 사와서 ] 하고 답장이 날아온다. 또 회사 앞 두솥도시락에서 싸구려 도시락이나 사먹었겠지. 몸에 안 좋다고 그런거 먹지 말래도 돈 아낀답시고 맨날 사먹는다. 별로 싸지도 않더만 참.
방으로 돌아와 간만에 오버트랙을 했다. 거의 반 년만인거 같은데. 그러나 역시 재미없다. 팸팍에 들어가 웃긴거 몇 개 낄낄대며 보다가 시계를 보니 어이없게도 벌써 4시 50분이다. 하루가 벌써 다 지나간 기분이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지는데 배가 고프다. 그래, 역시 제대로 된 밥을 난 오늘 안 먹었다. 다시 괜히 냉장고를 뒤져본다. 작년 3월에 사놓았던 돼지고기 뒷다리살 남은게 냉동실에 들어있고, 계란 한 알, 쉰 김치 정도만 있다. 계란 하나를 후라이해서 햇반 돌려 먹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참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아 추워"
귀찮아서 맨발에 쪼리 신고 나왔더니 발 시리다. 그리 춥지도 않은 날씨지만 내 발만 시리다. 아까 혜영이한테는 툴툴 대놓고 이번에는 내가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는다. 백혜자 도시락 제육만찬.
집으로 또 가져와 콜라를 곁들여 "끄어어억"하고 다시 한번 긴 트림과 함께 식사를 마친다. 코를 팽 풀고 방 한 켠에 던져놓는다. 이 청소해야 되는데. 귀찮다. 생각해보니 빨래도 안 돌렸다. 입사 날짜가 다음 주 화요일이니까 진짜 제대로 놀 시간은 오늘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성지로 맛집을 검색해본다. 혜영이 오늘 저녁이라도 맛있는거 사줄 생각이다.
"뭐라고?"
"어 아냐 그냥 오늘 집에 갈래"
"왜? 뭔 일 있어?"
기껏 검색해서 스시라도 먹여줄까 싶어 연락을 했더니 혜영은 거절했다. 목소리도 조금 다운 된 느낌이다.
"아냐, 없어. 그냥 나 얼른 일 마쳐야 퇴근할 수 있으니까 그냥 오빠 따로 먹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난 뻘쭘함에 [ 성지로 맛집 ] 검색창과 몇 개의 블로그 창을 껐다. 잠시 멍하니 레이버 메인화면만 쳐다보다가 다시 팸팍에 들어가 커뮤니티질이나 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저녁 9시 20분. 혜영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설마 아직도 일하나? 싶어서 카톡을 날려본다.
[ 아직 퇴근 안 했어? ]
마지막 남은 콜라 패트를 비우고 컴퓨터를 하지만 묘하게 마우스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약 20분을 더 기다렸다가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아 시발 뭐야"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놈의 백수타령에 일자리 겨우 찾아서 취업했더니만.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는건가. 마음이 착찹해진다.
"쓰읍 후"
창문을 열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그러나 곧 윗 집에서 "아 담배 피우지 말라고 씨팔" 하는 고함이 들려온다. 나는 서둘러 담배를 던져버리고 창문을 닫는다. 아 시발 짜증나.
"아 시발"
대충 차려입고 집 밖을 나선다. 오후 9시 56분. 여전히 혜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탄다. 적당히 사람이 찬 버스, 다행히 한 구석의 자리에 앉는다. 피곤한 버스 안 형광등 불빛이 가뜩이나 찌뿌둥한 몸에 오한을 살짝 부른다.
'피곤하다'
혜영의 집으로 향하는 나. 가는 길에 잠깐 편의점 들러서 캔맥주랑 치킨이라도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또 밥 안 먹고 혼자 침대에서 울고나 있겠지. 에휴, 궁상 맞은 기집애.
그게 귀엽긴 하지만.
사실 이 와중에 또 서랍을 뒤져서 콘돔 2개를 챙겨왔다. 이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뭐,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닌가. 담배가 또 땡긴다. 향수를 살짝 과하게 뿌렸나. 아직까지 느껴진다.
삑-
역 앞에서 내려 곧 뛰어가 전철에 오른다. 약 70미터의 질주. 오늘 한 운동 중에 제일 격한 운동이다. 숨이 차다. 이 놈의 담배라도 끊어야 할텐데.
"다음 역은 대로, 대로 역입니다"
환한 전철 안의 불빛은 역으로 또 피곤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혜영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나는 슬슬 조바심과 불안을 느낀다.
"어, 순살로 해서 반반, 아 후라이드는 크리스피로 해서요. 양념은 중간 매운 맛 칠리로"
결국 혜영의 동네 근처 네랑치킨 집에 들러서 치킨을 주문한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도 한 줄 샀다. 칠라이트로. 뭐, 대충 맛만 느끼면 됐지. 치킨이 튀겨질 때까지 기다리며 나는 혜영에게 또 카톡을 보낸다.
[ 뭐하냐고;; 사람을 왜 걱정을 시켜 ]
치킨집 TV에서는 축구 재방을 보여준다. 전반 7분만에 한 명이 퇴장 당했음에도 오히려 선취점을 뽑으며 잘 나가던 지버풀은 후반 32분에 동점골, 40분에 자책골까지 넣으며 침몰했다. 병신들.
전화를 보며 다시 한번 전화를 한다. 저녁 11시 16분.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분노일까 걱정일까.
혜영의 원룸 골목촌. 참 올 때마다 느끼지만 으슥하고 여자 혼자 살기는 골목골목에 가로등 하나 없는 우범지대다. 치킨과 맥주를 들고 그녀의 집을 향한다. 아까 밥을 먹었지만 새삼 허기지다. 얼른 치킨을 먹고 싶다. 그냥 집에 혜영이가 있고, 우울한 기분을 이 치킨과 맥주로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다. 혜영의 집은 불이 꺼져있다.
딩동-
평소답지 않게 벨까지 누른다. 쿵쿵쿵 하고 문을 두드린다. 어쩌면 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만약 이중걸쇄라도 걸어놓고 깊이 자고 있는거면 똥망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비밀번호를 누른다. 1221. 내 생일이다.
"혜영아"
불을 켜고 방을 둘러본다. 그러나 기대, 혹은 걱정와는 달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은 깨끗했다. 화장대 앞이 조금 어수선하고, 침대 이불만 아침에 일어난 고대로 접혀있다는거 빼면.
"아 시발 뭐하는건데"
사실 아까 치킨집에서 무서운 상상을 했다. 혜영이 어쩌면 이 집에 다른 남자랑 뒹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방을 슥 돌아본다. 에휴 시발.
"모르겠다"
나는 혼자 꾸역꾸역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맛이 없었다. 어제 먹은 치킨을 또 쳐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좆같은 기분으로 좆같은 상상을 하며 먹어서 그런가 진짜 치킨을 먹는건지 콩밥을 쳐먹는건지 모르게 맛이 없었다. 먹고 있던 고깃조각을 내려놓았다. 체할 거 같아서.
까톡!
나는 거의 척수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돌아본다. 그러나 엄마다.
[ 아들 다음주에는 하번 내려와 엄ㅁ마가 맜있는거 해주께 ]
에효. 그러나 지금 거기에 신경이 안 간다. 이 년이 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다가 침대 한 켠,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듯한 스타킹 포장 비닐껍질이 보인다.
혜영이가 스타킹을?
뭐 외주업체 갑사 만나러 갈 때나 친구 결혼식 때 종종 스타킹을 신긴 하지만 주말 출근에? 뭐, 아니 꼭 오늘이라는 법은 없지만. 기분이 갑자기 확 찝찝해진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우-
"여보세요?"
혜영의 전화다. 시계를 본다. 밤 12시 6분.
"너 뭐야"
나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내 목소리. 당연히,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곧 전화기 너머에서 약간 혀가 꼬부러진 듯 한 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나눈 술 마시면 안돼? 힝"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 평소에는 잘 듣기 힘든 목소리. 그래도 그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왜 전화 안 받았는데"
"왜 나 의심해? 어? 전화 바끼 시로소 안 바다따 왜!"
빙구 같이 혀 꼬인 목소리. 어느새 이미 나는 화가 다 녹고 웃음마저 터져나온다.
"어디야 지금"
"역 앞이다 왜"
"나갈게"
"지롤. 오빠 오딘데"
"니네 집"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혜영의 "올"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갈게"
역 앞까지 반 걸음, 반 뜀박질로 헉헉대며 혜영을 만나러 갔다. 다시금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곧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울려퍼지며 그 짜증이 누그러진다.
"야, 너 이러기야?"
내가 보자마자 한 소리했다. 혜영은 단정한 스타일에 스타킹까지 챙겨신었지만 이미 술에 꼻아 옷은 다 구겨지고 주접을 떠는 상태로 변해있었다.
"웨 웨 웨"
"누구랑 술 마신거야"
"과장님이랑, 용진씨랑, 현주 팀장님이랑 마셨다 왜!"
"다 출근한거야?"
"구래"
"근데 옷은 왜 이렇게 다 차려입고 나간거야"
"오전에 거래처 사장님 온다고 사장님이 나보고 옷 챙겨입으래서"
갑자기 또 짜증이 팍 난다.
"거래처 사장이 오는데 왜 니가 옷을 챙겨입는데"
"밥 사주고 술 사준다고"
"뭐이 시발?"
내 짜증에 혜영은 "뭐이 쒸" 하면서 주먹을 내 입에 들이댄다. 나는 그만 웃음이 픽 터져나온다.
"그래서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이렇게 늦게 온거야?"
"구래 왜"
"근데 그럼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짜증 대빵 나서. 꼰대 쓰레기들이랑 술 마셔야 되는데, 너같음 전화 받고 싶겠어?"
"아니 암만 그래도"
"글고 현주 팀장님 차에 폰 충전하느라 깜박하고 넣어 놨었어. 됐냐"
어느새 혀 꼬인 것도 풀린 혜영. 에효.
"그래, 알았어. 집에 치킨이랑 맥주랑 사다놨는데, 안 먹겠네"
"어, 배 터질거 같어"
"가자 가"
나는 혜영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쉬며.
…혜영이 사실 그 날 술을 마신 대상은 회사 사람과 거래처 사장이 아닌 전 남친 윤대원인가 하는 그 새끼였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한 달이나 더 지난 일이었으며, 그 날 그녀가 나의 스킨십을 거부한 것도 생리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후우-
"아 이 시팔 203호! 담배 피우지 말라고!"
"아 시발 작작 좀 해! 어쩌라고 시팔!"
"…뭐 이 새끼야?"
오늘은 참 재수가 오지게도 옴 붙은 날인 것 같다. 여친의 바람을 목격한 것도 모자라서 건달 같은 새끼랑 시비까지 붙는 날이니까.
- 끝 -
토요일 오전 11시 40분. 혜영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비몽사몽하는 목소리로 "나 새벽에 잤어. 챔스 보느라" 하고 겨우 대답했다. 혜영은 "에휴" 하고 긴 한숨을 쉬더니 "알았어, 그럼 좀 더 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녀의 긴 한숨 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확 일어났지만 의례 그려려니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소름
결국 눈을 뜬 것은 오후 1시 50분이 다 되어서였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변을 보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려다 관두고 다시 나와서 냉장고를 열어 본다. 먹다 마시고 남긴 콜라 패트병을 입 대고 한 모음 마신 후 다시 냉장고에 넣어놓는다.
"어후 피곤해"
꽤 잤음에도 피로가 안 가신다. 치르미누의 미친 삽질에 경기도 조지고 기분도 조지고 주말도 이렇게 조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치킨부터 치우려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허기가 조금 진다. 그러나 냉장고에 먹을 것이라고는 콜라 뿐이다. 뭐 시켜먹을까 하다가 카드 한도가 간당간당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라면이나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귀가 갑자기 마렵다. 일부러 힘을 줘서 뿌아악하고 강하게 뀐다. 밤새 숙성된 치킨 단백질과 빙초산 무의 환장 콜라보로 지독한 냄새가 난다.
"어흐"
창문을 살짝 열고 원룸촌 골목을 내려다본다. 일요일 낮인데도 인적은 드물다. 환기를 시키며 담배를 입에 문다. 윗 집 창문이 열려있다면 한 소리 들을 일이지만 요즘에는 창문을 닫아놓는지 별 소리를 안 한다.
"아 힘들다 진짜"
담배를 다 피운 후 꽁초를 창 밖으로 버린 다음 냉장고를 열고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다. 입 안 가득 탄산을 느끼며 목구멍으로 따가움의 지옥을 느낀다. 그리고 이윽고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을 마친다. 다시 방귀도 마렵다. 미친 더러운 몸이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겨우겨우 샤워를 마치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아무거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한량 그 자체다. 큰 길까지 나가서 동네 커피숍에 들어선다. 그래도 오늘은 손님이 좀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베이글이라도 먹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돈이 아깝다.
"쿠폰 찍어주세요"
생전에 쿠폰을 찍지 않는 인간이지만 요즘에는 이런 거에도 조금 궁상 맞아진다. 등을 벅벅 긁으며 기다리다가 이윽고 커피가 나오자 커피를 받아들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혜영이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오늘은 출근이라고 했다. 과연 쓰레기 좆소 인쇄업체답게 주말 출근이 아주 상시다.
[ 모하냐? 밥은 먹었고 ]
카톡을 보내놓는다. 약 15분 후쯤 [ 어 먹었어 도시락 사와서 ] 하고 답장이 날아온다. 또 회사 앞 두솥도시락에서 싸구려 도시락이나 사먹었겠지. 몸에 안 좋다고 그런거 먹지 말래도 돈 아낀답시고 맨날 사먹는다. 별로 싸지도 않더만 참.
방으로 돌아와 간만에 오버트랙을 했다. 거의 반 년만인거 같은데. 그러나 역시 재미없다. 팸팍에 들어가 웃긴거 몇 개 낄낄대며 보다가 시계를 보니 어이없게도 벌써 4시 50분이다. 하루가 벌써 다 지나간 기분이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지는데 배가 고프다. 그래, 역시 제대로 된 밥을 난 오늘 안 먹었다. 다시 괜히 냉장고를 뒤져본다. 작년 3월에 사놓았던 돼지고기 뒷다리살 남은게 냉동실에 들어있고, 계란 한 알, 쉰 김치 정도만 있다. 계란 하나를 후라이해서 햇반 돌려 먹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참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아 추워"
귀찮아서 맨발에 쪼리 신고 나왔더니 발 시리다. 그리 춥지도 않은 날씨지만 내 발만 시리다. 아까 혜영이한테는 툴툴 대놓고 이번에는 내가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는다. 백혜자 도시락 제육만찬.
집으로 또 가져와 콜라를 곁들여 "끄어어억"하고 다시 한번 긴 트림과 함께 식사를 마친다. 코를 팽 풀고 방 한 켠에 던져놓는다. 이 청소해야 되는데. 귀찮다. 생각해보니 빨래도 안 돌렸다. 입사 날짜가 다음 주 화요일이니까 진짜 제대로 놀 시간은 오늘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성지로 맛집을 검색해본다. 혜영이 오늘 저녁이라도 맛있는거 사줄 생각이다.
"뭐라고?"
"어 아냐 그냥 오늘 집에 갈래"
"왜? 뭔 일 있어?"
기껏 검색해서 스시라도 먹여줄까 싶어 연락을 했더니 혜영은 거절했다. 목소리도 조금 다운 된 느낌이다.
"아냐, 없어. 그냥 나 얼른 일 마쳐야 퇴근할 수 있으니까 그냥 오빠 따로 먹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난 뻘쭘함에 [ 성지로 맛집 ] 검색창과 몇 개의 블로그 창을 껐다. 잠시 멍하니 레이버 메인화면만 쳐다보다가 다시 팸팍에 들어가 커뮤니티질이나 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저녁 9시 20분. 혜영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설마 아직도 일하나? 싶어서 카톡을 날려본다.
[ 아직 퇴근 안 했어? ]
마지막 남은 콜라 패트를 비우고 컴퓨터를 하지만 묘하게 마우스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약 20분을 더 기다렸다가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아 시발 뭐야"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놈의 백수타령에 일자리 겨우 찾아서 취업했더니만.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는건가. 마음이 착찹해진다.
"쓰읍 후"
창문을 열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그러나 곧 윗 집에서 "아 담배 피우지 말라고 씨팔" 하는 고함이 들려온다. 나는 서둘러 담배를 던져버리고 창문을 닫는다. 아 시발 짜증나.
"아 시발"
대충 차려입고 집 밖을 나선다. 오후 9시 56분. 여전히 혜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탄다. 적당히 사람이 찬 버스, 다행히 한 구석의 자리에 앉는다. 피곤한 버스 안 형광등 불빛이 가뜩이나 찌뿌둥한 몸에 오한을 살짝 부른다.
'피곤하다'
혜영의 집으로 향하는 나. 가는 길에 잠깐 편의점 들러서 캔맥주랑 치킨이라도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또 밥 안 먹고 혼자 침대에서 울고나 있겠지. 에휴, 궁상 맞은 기집애.
그게 귀엽긴 하지만.
사실 이 와중에 또 서랍을 뒤져서 콘돔 2개를 챙겨왔다. 이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뭐,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닌가. 담배가 또 땡긴다. 향수를 살짝 과하게 뿌렸나. 아직까지 느껴진다.
삑-
역 앞에서 내려 곧 뛰어가 전철에 오른다. 약 70미터의 질주. 오늘 한 운동 중에 제일 격한 운동이다. 숨이 차다. 이 놈의 담배라도 끊어야 할텐데.
"다음 역은 대로, 대로 역입니다"
환한 전철 안의 불빛은 역으로 또 피곤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혜영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나는 슬슬 조바심과 불안을 느낀다.
"어, 순살로 해서 반반, 아 후라이드는 크리스피로 해서요. 양념은 중간 매운 맛 칠리로"
결국 혜영의 동네 근처 네랑치킨 집에 들러서 치킨을 주문한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도 한 줄 샀다. 칠라이트로. 뭐, 대충 맛만 느끼면 됐지. 치킨이 튀겨질 때까지 기다리며 나는 혜영에게 또 카톡을 보낸다.
[ 뭐하냐고;; 사람을 왜 걱정을 시켜 ]
치킨집 TV에서는 축구 재방을 보여준다. 전반 7분만에 한 명이 퇴장 당했음에도 오히려 선취점을 뽑으며 잘 나가던 지버풀은 후반 32분에 동점골, 40분에 자책골까지 넣으며 침몰했다. 병신들.
전화를 보며 다시 한번 전화를 한다. 저녁 11시 16분.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분노일까 걱정일까.
혜영의 원룸 골목촌. 참 올 때마다 느끼지만 으슥하고 여자 혼자 살기는 골목골목에 가로등 하나 없는 우범지대다. 치킨과 맥주를 들고 그녀의 집을 향한다. 아까 밥을 먹었지만 새삼 허기지다. 얼른 치킨을 먹고 싶다. 그냥 집에 혜영이가 있고, 우울한 기분을 이 치킨과 맥주로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다. 혜영의 집은 불이 꺼져있다.
딩동-
평소답지 않게 벨까지 누른다. 쿵쿵쿵 하고 문을 두드린다. 어쩌면 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만약 이중걸쇄라도 걸어놓고 깊이 자고 있는거면 똥망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비밀번호를 누른다. 1221. 내 생일이다.
"혜영아"
불을 켜고 방을 둘러본다. 그러나 기대, 혹은 걱정와는 달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은 깨끗했다. 화장대 앞이 조금 어수선하고, 침대 이불만 아침에 일어난 고대로 접혀있다는거 빼면.
"아 시발 뭐하는건데"
사실 아까 치킨집에서 무서운 상상을 했다. 혜영이 어쩌면 이 집에 다른 남자랑 뒹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방을 슥 돌아본다. 에휴 시발.
"모르겠다"
나는 혼자 꾸역꾸역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맛이 없었다. 어제 먹은 치킨을 또 쳐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좆같은 기분으로 좆같은 상상을 하며 먹어서 그런가 진짜 치킨을 먹는건지 콩밥을 쳐먹는건지 모르게 맛이 없었다. 먹고 있던 고깃조각을 내려놓았다. 체할 거 같아서.
까톡!
나는 거의 척수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돌아본다. 그러나 엄마다.
[ 아들 다음주에는 하번 내려와 엄ㅁ마가 맜있는거 해주께 ]
에효. 그러나 지금 거기에 신경이 안 간다. 이 년이 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다가 침대 한 켠,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듯한 스타킹 포장 비닐껍질이 보인다.
혜영이가 스타킹을?
뭐 외주업체 갑사 만나러 갈 때나 친구 결혼식 때 종종 스타킹을 신긴 하지만 주말 출근에? 뭐, 아니 꼭 오늘이라는 법은 없지만. 기분이 갑자기 확 찝찝해진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우-
"여보세요?"
혜영의 전화다. 시계를 본다. 밤 12시 6분.
"너 뭐야"
나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내 목소리. 당연히,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곧 전화기 너머에서 약간 혀가 꼬부러진 듯 한 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나눈 술 마시면 안돼? 힝"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 평소에는 잘 듣기 힘든 목소리. 그래도 그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왜 전화 안 받았는데"
"왜 나 의심해? 어? 전화 바끼 시로소 안 바다따 왜!"
빙구 같이 혀 꼬인 목소리. 어느새 이미 나는 화가 다 녹고 웃음마저 터져나온다.
"어디야 지금"
"역 앞이다 왜"
"나갈게"
"지롤. 오빠 오딘데"
"니네 집"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혜영의 "올"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갈게"
역 앞까지 반 걸음, 반 뜀박질로 헉헉대며 혜영을 만나러 갔다. 다시금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곧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울려퍼지며 그 짜증이 누그러진다.
"야, 너 이러기야?"
내가 보자마자 한 소리했다. 혜영은 단정한 스타일에 스타킹까지 챙겨신었지만 이미 술에 꼻아 옷은 다 구겨지고 주접을 떠는 상태로 변해있었다.
"웨 웨 웨"
"누구랑 술 마신거야"
"과장님이랑, 용진씨랑, 현주 팀장님이랑 마셨다 왜!"
"다 출근한거야?"
"구래"
"근데 옷은 왜 이렇게 다 차려입고 나간거야"
"오전에 거래처 사장님 온다고 사장님이 나보고 옷 챙겨입으래서"
갑자기 또 짜증이 팍 난다.
"거래처 사장이 오는데 왜 니가 옷을 챙겨입는데"
"밥 사주고 술 사준다고"
"뭐이 시발?"
내 짜증에 혜영은 "뭐이 쒸" 하면서 주먹을 내 입에 들이댄다. 나는 그만 웃음이 픽 터져나온다.
"그래서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이렇게 늦게 온거야?"
"구래 왜"
"근데 그럼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짜증 대빵 나서. 꼰대 쓰레기들이랑 술 마셔야 되는데, 너같음 전화 받고 싶겠어?"
"아니 암만 그래도"
"글고 현주 팀장님 차에 폰 충전하느라 깜박하고 넣어 놨었어. 됐냐"
어느새 혀 꼬인 것도 풀린 혜영. 에효.
"그래, 알았어. 집에 치킨이랑 맥주랑 사다놨는데, 안 먹겠네"
"어, 배 터질거 같어"
"가자 가"
나는 혜영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쉬며.
…혜영이 사실 그 날 술을 마신 대상은 회사 사람과 거래처 사장이 아닌 전 남친 윤대원인가 하는 그 새끼였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한 달이나 더 지난 일이었으며, 그 날 그녀가 나의 스킨십을 거부한 것도 생리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후우-
"아 이 시팔 203호! 담배 피우지 말라고!"
"아 시발 작작 좀 해! 어쩌라고 시팔!"
"…뭐 이 새끼야?"
오늘은 참 재수가 오지게도 옴 붙은 날인 것 같다. 여친의 바람을 목격한 것도 모자라서 건달 같은 새끼랑 시비까지 붙는 날이니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