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일주일째 연락이 없다. 차단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카톡도 읽지 않는다.
"후룹"
집에 와서 혼자 멍하니 있으며 하루종일 휴대폰만 바라본다. 근 나흘째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 별로 배도 고프지 않지만 라면을 끓였다.
아무렇지 않게 멍하니 라면을 먹다가 문득 그와 이 집에서, 이 식탁 위에서 나눈 사랑의 순간에 기억이 닿았다. 그 순간의 기분은 아찔함도, 서운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냥 한심함이었다.
"씨발!"
마치 술 먹고 저지른 바보 같은 짓 같은 느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나. 먹던 젓가락을 부서져라 내려놓았다. 미친 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남자가 나에게 진심일 이유가 없지 않나.
흔해 빠진 결말.
버림 받은 것이다. 적당히 두어달 가지고 놀다가 질려버린. 그 사이 철저히 그에게 온 몸 구석구석을 내어준 스스로가 한심했다. 영호하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그런 플레이까지 했다. 더러운 짓마저.
"병신 같은 년"
콧바람이 떨리며 은은하게 분노가 차오른다. 수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 그런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이성이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날렵한 턱선에 세련된 취향, 조금은 터프한 느낌의 향수, 다부진 몸선과 각 잡힌 팔근육… 무엇보다 상쾌한 웃음과 쿨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밥 같이 먹어요"
어색함을 먼저 뚫고 들어와 서글서글하게 건내는 인사.
"여기 맛있지 않아요? 아, 별론가?"
답 없는 나의 얼굴에 짖궂은 미소로 혼잣말을 하는 그. 처음에는 그런 게 꽤 싫었다. 오버하는 느낌이. 하지만 그는 한결 같았다.
"어휴, 이러다 허리 나가요"
"괜찮아요"
"그럼 같이 들어요"
내가 무언가의 짐을 들면 저 멀리서 있다가 서둘러 달려와 들어주었고, 오다가다 우연히 보면 환한 미소와 함께 푹 고개를 숙여 하는 인사. 그런게 좋았다. 그는 어색함이 없었다. 그럴 참이면 특유의 미소와 함께 "왜요?" 하며 뭔가 시덥잖은 장난 하나를 건내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그에게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자? ]
헤어진 영호에게서의 카톡. 아마 평소였다면 이틀 정도 묵혀두었다가 확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 날 저녁 다시 걸려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차단을 걸었다. 그랬다가 그냥 아예 번호채 지웠다. 그 다음 날 또 영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헤어진거야"
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2년 간의 연애가 그렇게 온전히 끝났다. 구질구질한 한달 여간의 이별 연습 끝에.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 다음 날인 금요일 저녁, 8시를 넘겨 끝난 퇴근 길에 우연히 회사 앞 로비에서 만난 그는 저녁을 제안했다. 평소였으면 거절을 했겠지만 머리가 복잡하고 뭔가 외로웠다. 함께 먹기로 했다.
"와, 죽이네"
혼자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에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쓸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요? 누나"
그 순간에 '누나'라는 호칭을 쓰며 친근하게 훅 들어오는 그. "누가 누나래" 하면서 나는 그의 팔뚝을 쳤다.
"아 누나, 아퍼요 아퍼"
그는 내 손을 잡아챘다. 크고 굵은 손.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는 속삭임인지 아니면 그저 가까워서 닿은 콧바람인지 구분이 애매한 느낌으로 말했다.
"우리 기분 꿀꿀한데 2차 가요 2차"
소주가 몇 잔 들어가자, 사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친과의 이별을.
"그래서 죽상이었구만? 에이, 그럴 수 있죠"
처음에는 싱겁게 받은 그.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정말로 난데없이.
"나 사실 누나 좋아요"
아예 짐작도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저 은근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갖는 연상에 대한 흔한 관심과 묘한 자신감. 그리고 이미 회사 내에서 은근히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린 여자애들도 있었고.
"근데 뭐?"
술을 들이키고 물었다. 이별 이야기에 들이대는 남자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얘를 남자로 바라보아야 할까.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들이댔다.
"우리 사귀어요"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는 내가 헤어졌다니까 바로 대시하냐? 내가 그렇게 없어보여? 내가 만만해?"
그런 이야기를 할 이야기까지는 아니었지만 괜히 그렇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근데 솔직히 전부터 되게 매력 있다고 느꼈는데 누나. 난 누나 남친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없는 줄 알았지. 근데 헤어졌다네? 그럼 우리 만나도 되는거 아니에요?"
요즘 연애는 이렇게 하는건가. 이별의 슬픔에 질질 짜고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애초에….
"데이트도 한번 안 하고 사귀냐 너는?"
남자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른가? 사실 제가 연애를 많이 안 해봐서"
크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꺼져"
"에이 누나, 자 한 잔 더~"
…아마 그날 그가 들이댔다면 어쩌면 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주변을 살핀 뒤 "남친 와서 막 기다리고 있는거 아니죠?" 하면서 심장 떨리는 농담을 건낸 뒤에 "그래도 나 누나 안 놓아줄거에요" 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내일 데이트해요"
"몰라, 조심해서 들어가"
"네, 푹 쉬어요"
하루 쉬고 일요일, 그는 연락을 하고 우리 집 앞으로 구형 SM5를 타고 나타났다. 15년 전 우리 아빠 차. 반가운 차였다.
"미안해요 똥차로 모셔서"
"이 차 좋아. 예전에 우리 아빠도 이 차 몰았어"
"아 그쵸? 아버님이 차를 아시네"
미사리로 갔다. 그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편안하고 좋은 남자였다.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함께 있을 때 재미있는 남자.
"그게 있잖아요, 딱 이렇게 내가 쌓아놓고 있었는데 최CP가 막 이렇게 달려와서 완전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마 그때 그거 그렇게 넘어갔으면 여럿 다쳤을텐데, 그걸 제가 딱 이렇게 몸으로 막았죠"
"정말로?"
"이게 그때 생긴 상처에요"
난데없이 어깨를 이만큼 까보이는 그. 그러나 작은 상처보다 그 옆의 깊은 쇄골에 눈길이 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남자로 느꼈다. 가슴이 두근댔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이성의 몸에 대한 시각적 흥분. 얼굴이 뜨거웠다. 미친, 내가 몇 살인데.
"뭐야, 왜 얼굴이 벌개져요, 변태처럼"
변태처럼이라는 말에 물을 마시다 터졌다.
"내가 왜 변태야"
그도 빵 터졌다. 휴지를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며 껄껄댄다.
"아니 찔렸구만. 어? 얼굴 벌개져서"
"오늘은 라면 먹고 가도 되요?"
집 근처. 그가 차를 세우고 물었다. 피식 소리내서 웃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렀다.
"아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또 이상한 생각했죠?"
그런 너스레가 좋았다.
그는 잘했다. 영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의 몸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굴곡지고, 빼와 근육의 모양이 생생히 느껴지는 그런 몸. 벌어진 어깨와 울퉁불퉁한 어깨선.
"아 너무 좋아"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때, 등의 선을 쓰다듬어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 11시부터 아침까지,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내연애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숨기기로 했다. 그의 덜렁덜렁 건들건들한 면모에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조금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입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거운 남자였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고, 내가 묻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입이 가벼웠다. 그 선을 지킬 줄 아는 매력이 좋았다.
"오늘 출근 같이 하던데?"
염 과장님이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팔뚝을 툭 친다. 입이 가벼운 여자다. 피곤해질 수 있겠다 싶어서 굳이 말했다.
"아침에 집 앞에 나오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아, 둘 다 그쪽이야? 난 또 뭐 좋은 소식 있나 했지"
"네, 어휴, 지훈씨가 몇 살인데요"
"그른가? 내가 또 주책 떤건가? 앗하하하, 아줌마들은 원래 그래. 알지?"
적당히 둘러댔다. 사무실에 올라가자마자 카톡으로 사정을 이래저래 말했다. 그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연애 28일차. 그는 주중에 두세번, 주말에 하루 정도 꼴로 우리 집에 들렀다. 주중에는 주로 집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주말에는 교외로 나가는 데이트. 핑크뮬리 밭에서 반나절 정도 원없이 사진 찍고 돌아오는 길.
"그냥 우리, 사귀는거 밝힐까"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 사실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회사 내 거의 모든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가 조금 신경쓰였다. 개중에는 꽤 진지하게 호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타입의 애들도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왜 지훈이 나를 골랐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음, 글쎄요"
운전을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 그. 처음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부탁이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싫어? 하긴 나도 부담스럽긴 해"
얼른 수습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내 안의 불안만 커졌을 뿐.
그날 밤의 사랑은 조금 격렬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을 넘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해서는 안되는 플레이까지 해버렸다. 우리는 아직 만난지 채 한달도 안 됐어, 하는 것을 떠올린 순간은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맹세했다. 지훈의 방식에 대해. 쾌감보다는 관계의 결합이 중요하다고 느꼈기에.
초조함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제 사실… 나 좀 그랬어"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원래 다 그런 거에요."
그는 상쾌하게 웃으며 "아침 먹으러 나가요 우리" 하면서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장점이었지만, 이럴 때 더 큰 불안함을 느꼈다.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내 위에 있었다.
"미안한데, 나 이런거 싫어"
며칠 뒤, 의외로 순순히 그는 납득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 뭔가 어색해진 느낌에 "대신 입으로 해줄께" 하고 다가갔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오랜만의 팔베개였다. 금방 부담스러워서 그냥 베개로 바꾸었지만, 그의 각진 몸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사실 '그냥 하고 싶어하는대로 다 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념일에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연애 66일째, 그가 광주 지사로 내려가게 된 이래로 연락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째 되던 날 깨달았다. 아, 나 버림 받은 거구나.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지"
카톡으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현은 많이 자제를 했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연결고리가 휴대폰 하나 뿐이었구나 하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꼈다.
회사 경리팀의 경옥 차장님한테 물어서 광주지사 연락처를 얻었다. 그쪽 담당자 분께 전화를 했다. 혹시 얼마 전 본사에서 내려간 임지훈 대리 연락 가능하냐고. "잠시만요" 하는 말과 함께 그는 지훈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번호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황 실장님 이름을 팔아서 그가 일은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웃음기 도는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아 그럼요, 아주 본사에서 간만에 물건 중에 상물건이 내려왔다고 여기 분들이 다 좋아하세요"
그다웠다. 그러나 왜였을까. 안도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와서 눈물이 터졌다.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집에 돌아와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 끝에 [ 혹시 잠자리에서 문제를 느껴서 그런 것이라면 나도 노력해볼게 ] 하고 답장을 했다. 하지만 역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날. 드디어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 2시 반이었다.
[ 누나 ]
나는 이미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이미 공식적인 이별을 예감한 상태로. 그리고 그는 짧게 이별을 고했다.
[ 잘 지내요. 안녕 ]
참 덧없고 정없는 이별이었다. 순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다가 허탈한 웃음까지 흘렸지만, 그냥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그래, 겨우 두 달이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더 깊은 진지한 만남을 기대한건 더더욱 아니었잖아. 자기 입으로 모아놓은 돈 천만원도 없다는 사회초년생한테 뭘 기대한거지.
답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게 내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 세리야 ]
그 와중에도 카톡 소리에 자다가도 놀라 확인을 한 나. 새벽 4시, 피곤과 눈물에 팅팅 부은 눈에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간신히 이름만 확인한다.
영호.
멍청한 새끼, 한심한 새끼, 하고 욕을 했지만 벽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나는 답장을 했다.
[ 왜 ]
…바보 같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끝 -
"후룹"
집에 와서 혼자 멍하니 있으며 하루종일 휴대폰만 바라본다. 근 나흘째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 별로 배도 고프지 않지만 라면을 끓였다.
아무렇지 않게 멍하니 라면을 먹다가 문득 그와 이 집에서, 이 식탁 위에서 나눈 사랑의 순간에 기억이 닿았다. 그 순간의 기분은 아찔함도, 서운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냥 한심함이었다.
"씨발!"
마치 술 먹고 저지른 바보 같은 짓 같은 느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나. 먹던 젓가락을 부서져라 내려놓았다. 미친 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남자가 나에게 진심일 이유가 없지 않나.
흔해 빠진 결말.
버림 받은 것이다. 적당히 두어달 가지고 놀다가 질려버린. 그 사이 철저히 그에게 온 몸 구석구석을 내어준 스스로가 한심했다. 영호하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그런 플레이까지 했다. 더러운 짓마저.
"병신 같은 년"
콧바람이 떨리며 은은하게 분노가 차오른다. 수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 그런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이성이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날렵한 턱선에 세련된 취향, 조금은 터프한 느낌의 향수, 다부진 몸선과 각 잡힌 팔근육… 무엇보다 상쾌한 웃음과 쿨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밥 같이 먹어요"
어색함을 먼저 뚫고 들어와 서글서글하게 건내는 인사.
"여기 맛있지 않아요? 아, 별론가?"
답 없는 나의 얼굴에 짖궂은 미소로 혼잣말을 하는 그. 처음에는 그런 게 꽤 싫었다. 오버하는 느낌이. 하지만 그는 한결 같았다.
"어휴, 이러다 허리 나가요"
"괜찮아요"
"그럼 같이 들어요"
내가 무언가의 짐을 들면 저 멀리서 있다가 서둘러 달려와 들어주었고, 오다가다 우연히 보면 환한 미소와 함께 푹 고개를 숙여 하는 인사. 그런게 좋았다. 그는 어색함이 없었다. 그럴 참이면 특유의 미소와 함께 "왜요?" 하며 뭔가 시덥잖은 장난 하나를 건내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그에게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자? ]
헤어진 영호에게서의 카톡. 아마 평소였다면 이틀 정도 묵혀두었다가 확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 날 저녁 다시 걸려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차단을 걸었다. 그랬다가 그냥 아예 번호채 지웠다. 그 다음 날 또 영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헤어진거야"
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2년 간의 연애가 그렇게 온전히 끝났다. 구질구질한 한달 여간의 이별 연습 끝에.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 다음 날인 금요일 저녁, 8시를 넘겨 끝난 퇴근 길에 우연히 회사 앞 로비에서 만난 그는 저녁을 제안했다. 평소였으면 거절을 했겠지만 머리가 복잡하고 뭔가 외로웠다. 함께 먹기로 했다.
"와, 죽이네"
혼자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에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쓸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요? 누나"
그 순간에 '누나'라는 호칭을 쓰며 친근하게 훅 들어오는 그. "누가 누나래" 하면서 나는 그의 팔뚝을 쳤다.
"아 누나, 아퍼요 아퍼"
그는 내 손을 잡아챘다. 크고 굵은 손.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는 속삭임인지 아니면 그저 가까워서 닿은 콧바람인지 구분이 애매한 느낌으로 말했다.
"우리 기분 꿀꿀한데 2차 가요 2차"
소주가 몇 잔 들어가자, 사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친과의 이별을.
"그래서 죽상이었구만? 에이, 그럴 수 있죠"
처음에는 싱겁게 받은 그.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정말로 난데없이.
"나 사실 누나 좋아요"
아예 짐작도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저 은근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갖는 연상에 대한 흔한 관심과 묘한 자신감. 그리고 이미 회사 내에서 은근히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린 여자애들도 있었고.
"근데 뭐?"
술을 들이키고 물었다. 이별 이야기에 들이대는 남자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얘를 남자로 바라보아야 할까.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들이댔다.
"우리 사귀어요"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는 내가 헤어졌다니까 바로 대시하냐? 내가 그렇게 없어보여? 내가 만만해?"
그런 이야기를 할 이야기까지는 아니었지만 괜히 그렇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근데 솔직히 전부터 되게 매력 있다고 느꼈는데 누나. 난 누나 남친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없는 줄 알았지. 근데 헤어졌다네? 그럼 우리 만나도 되는거 아니에요?"
요즘 연애는 이렇게 하는건가. 이별의 슬픔에 질질 짜고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애초에….
"데이트도 한번 안 하고 사귀냐 너는?"
남자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른가? 사실 제가 연애를 많이 안 해봐서"
크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꺼져"
"에이 누나, 자 한 잔 더~"
…아마 그날 그가 들이댔다면 어쩌면 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주변을 살핀 뒤 "남친 와서 막 기다리고 있는거 아니죠?" 하면서 심장 떨리는 농담을 건낸 뒤에 "그래도 나 누나 안 놓아줄거에요" 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내일 데이트해요"
"몰라, 조심해서 들어가"
"네, 푹 쉬어요"
하루 쉬고 일요일, 그는 연락을 하고 우리 집 앞으로 구형 SM5를 타고 나타났다. 15년 전 우리 아빠 차. 반가운 차였다.
"미안해요 똥차로 모셔서"
"이 차 좋아. 예전에 우리 아빠도 이 차 몰았어"
"아 그쵸? 아버님이 차를 아시네"
미사리로 갔다. 그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편안하고 좋은 남자였다.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함께 있을 때 재미있는 남자.
"그게 있잖아요, 딱 이렇게 내가 쌓아놓고 있었는데 최CP가 막 이렇게 달려와서 완전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마 그때 그거 그렇게 넘어갔으면 여럿 다쳤을텐데, 그걸 제가 딱 이렇게 몸으로 막았죠"
"정말로?"
"이게 그때 생긴 상처에요"
난데없이 어깨를 이만큼 까보이는 그. 그러나 작은 상처보다 그 옆의 깊은 쇄골에 눈길이 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남자로 느꼈다. 가슴이 두근댔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이성의 몸에 대한 시각적 흥분. 얼굴이 뜨거웠다. 미친, 내가 몇 살인데.
"뭐야, 왜 얼굴이 벌개져요, 변태처럼"
변태처럼이라는 말에 물을 마시다 터졌다.
"내가 왜 변태야"
그도 빵 터졌다. 휴지를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며 껄껄댄다.
"아니 찔렸구만. 어? 얼굴 벌개져서"
"오늘은 라면 먹고 가도 되요?"
집 근처. 그가 차를 세우고 물었다. 피식 소리내서 웃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렀다.
"아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또 이상한 생각했죠?"
그런 너스레가 좋았다.
그는 잘했다. 영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의 몸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굴곡지고, 빼와 근육의 모양이 생생히 느껴지는 그런 몸. 벌어진 어깨와 울퉁불퉁한 어깨선.
"아 너무 좋아"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때, 등의 선을 쓰다듬어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 11시부터 아침까지,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내연애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숨기기로 했다. 그의 덜렁덜렁 건들건들한 면모에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조금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입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거운 남자였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고, 내가 묻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입이 가벼웠다. 그 선을 지킬 줄 아는 매력이 좋았다.
"오늘 출근 같이 하던데?"
염 과장님이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팔뚝을 툭 친다. 입이 가벼운 여자다. 피곤해질 수 있겠다 싶어서 굳이 말했다.
"아침에 집 앞에 나오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아, 둘 다 그쪽이야? 난 또 뭐 좋은 소식 있나 했지"
"네, 어휴, 지훈씨가 몇 살인데요"
"그른가? 내가 또 주책 떤건가? 앗하하하, 아줌마들은 원래 그래. 알지?"
적당히 둘러댔다. 사무실에 올라가자마자 카톡으로 사정을 이래저래 말했다. 그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연애 28일차. 그는 주중에 두세번, 주말에 하루 정도 꼴로 우리 집에 들렀다. 주중에는 주로 집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주말에는 교외로 나가는 데이트. 핑크뮬리 밭에서 반나절 정도 원없이 사진 찍고 돌아오는 길.
"그냥 우리, 사귀는거 밝힐까"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 사실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회사 내 거의 모든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가 조금 신경쓰였다. 개중에는 꽤 진지하게 호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타입의 애들도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왜 지훈이 나를 골랐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음, 글쎄요"
운전을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 그. 처음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부탁이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싫어? 하긴 나도 부담스럽긴 해"
얼른 수습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내 안의 불안만 커졌을 뿐.
그날 밤의 사랑은 조금 격렬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을 넘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해서는 안되는 플레이까지 해버렸다. 우리는 아직 만난지 채 한달도 안 됐어, 하는 것을 떠올린 순간은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맹세했다. 지훈의 방식에 대해. 쾌감보다는 관계의 결합이 중요하다고 느꼈기에.
초조함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제 사실… 나 좀 그랬어"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원래 다 그런 거에요."
그는 상쾌하게 웃으며 "아침 먹으러 나가요 우리" 하면서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장점이었지만, 이럴 때 더 큰 불안함을 느꼈다.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내 위에 있었다.
"미안한데, 나 이런거 싫어"
며칠 뒤, 의외로 순순히 그는 납득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 뭔가 어색해진 느낌에 "대신 입으로 해줄께" 하고 다가갔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오랜만의 팔베개였다. 금방 부담스러워서 그냥 베개로 바꾸었지만, 그의 각진 몸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사실 '그냥 하고 싶어하는대로 다 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념일에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연애 66일째, 그가 광주 지사로 내려가게 된 이래로 연락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째 되던 날 깨달았다. 아, 나 버림 받은 거구나.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지"
카톡으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현은 많이 자제를 했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연결고리가 휴대폰 하나 뿐이었구나 하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꼈다.
회사 경리팀의 경옥 차장님한테 물어서 광주지사 연락처를 얻었다. 그쪽 담당자 분께 전화를 했다. 혹시 얼마 전 본사에서 내려간 임지훈 대리 연락 가능하냐고. "잠시만요" 하는 말과 함께 그는 지훈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번호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황 실장님 이름을 팔아서 그가 일은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웃음기 도는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아 그럼요, 아주 본사에서 간만에 물건 중에 상물건이 내려왔다고 여기 분들이 다 좋아하세요"
그다웠다. 그러나 왜였을까. 안도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와서 눈물이 터졌다.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집에 돌아와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 끝에 [ 혹시 잠자리에서 문제를 느껴서 그런 것이라면 나도 노력해볼게 ] 하고 답장을 했다. 하지만 역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날. 드디어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 2시 반이었다.
[ 누나 ]
나는 이미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이미 공식적인 이별을 예감한 상태로. 그리고 그는 짧게 이별을 고했다.
[ 잘 지내요. 안녕 ]
참 덧없고 정없는 이별이었다. 순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다가 허탈한 웃음까지 흘렸지만, 그냥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그래, 겨우 두 달이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더 깊은 진지한 만남을 기대한건 더더욱 아니었잖아. 자기 입으로 모아놓은 돈 천만원도 없다는 사회초년생한테 뭘 기대한거지.
답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게 내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 세리야 ]
그 와중에도 카톡 소리에 자다가도 놀라 확인을 한 나. 새벽 4시, 피곤과 눈물에 팅팅 부은 눈에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간신히 이름만 확인한다.
영호.
멍청한 새끼, 한심한 새끼, 하고 욕을 했지만 벽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나는 답장을 했다.
[ 왜 ]
…바보 같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