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라고 이미 낮부터 가득찬 카페. 결국 파라솔 친 테라스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마침 소록소록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바람은 불지 않아 춥지는 않다. 단지 발이 살짝 시릴 뿐.
"후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카메라로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머리스타일을 확인해 본다. 아까 혜선이한테 셀카 사진 보냈을 때에 비해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 뺨을 문지르고 있노라니 "안녕하세요" 하며 누가 등 뒤에서 나를 톡톡 건드린다. 혜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웃기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피부의 미인.
"어, 어어. 아…녕하세요"
일어서던 나는 의자를 잡으며 다시 조심스레 앉았고, 그 어색한 모습에 상대는 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신의 이름을 서은빈이라고 밝힌 그녀는 혜선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 이름은 자주 들었다. 댄스 학원에서 만났다던. 예쁜 이름이다 싶었는데. 혜선의 인스타에서도 매번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녀. 비공개 계정이라 얼굴은 못 봤는데. 동그랗게 큰 눈이 엄청 귀여운, 상큼하고 예쁜 인상이다. 빨간 베레모가 잘 어울린다. 혜선이도 저런 모자 가끔 써주면 좋을텐데.
"언니가 나 혼자 클스마스에 우울하게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놀자고 해서, 이렇게 민폐 끼치러 나왔어요"
"아 그렇구나. 아니에요, 같이 놀면 좋죠 뭐. 와 혜선이 주변에 이렇게 예쁜 동생이 있었다니!"
"핫! 아니에요"
맨날 집에만 쳐박혀있는 완전 집순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좀 무미건조한 뭐 그런 타입을 생각했는데, 엄청… 흠. 흐.
"언니 차 막혀서 좀 늦을거 같다고, 먼저 뭐 마시고 있으래요"
"아 그래요. 뭐 마실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아, 그럼… 아메리카노요"
주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니 힐을 신어서인지, 키는 나보다 살짝 작다. 코 끝을 스치는 향기.
"저는 언니 인스타에서 오빠 사진 많이 봤어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귀여우시다"
"와! 거봐, 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그쵸? 나 못 생긴거 아니죠?"
"잘 생겼는데. 왜요? 언니는 잘 생겼다고 말 안 해줘요?"
"아까도 셀카 보냈더니 시력 나빠진다고 이런 후진 사진 보내지 말라는거에요"
"아 언니 너무 웃겨"
10분, 15분, 20, 30분의 시간. 혜선은 미안하다고, 버스가 아예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미안하다고 카톡을 보내온다.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답장을 보낸다.
"언니랑은 만난지 이제 얼마나 됐어요?"
"이제 1년 좀 넘었어요"
"그렇구나. 나도 연애하고 싶다"
"은빈씨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후, 말도 안 돼"
"나야 혜선이가 시력이 나빠서 이렇게 만나주지만…"
"아 오빠도 너무 웃겨요"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잘 웃어주는 은빈 덕분에 실없는 소리도 부담없이 흘릴 수 있었고, 그녀도 정말 잘 웃어주었다.
"오빠 인스타 친구 신청해도 되요?"
"당연히"
서로 팔로우를 한 순간,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조용해지며 파라솔 아래 나와 은빈의 입김만이 어색하게 겹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혜선 언니 힘들겠다"
"아, 그러게"
인스타 피드 속 은빈의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혜선의 생각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뒤늦게 전화를 하자, 저 멀리서 "나 도착했어" 하며 팔을 씩씩하게 휘젓는 혜선을 발견한다.
"크~ 아 역시 몸 녹이는데는 뜨끈한 국물이 최고여"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로 설렁탕이라니, 뭔가 웃겼지만 혜선 장군님의 초이스에 토달 사람은 없었다. 은빈은 밥을 거의 다 남긴 채 국물만 먹었고, 나와 혜선은 한 그릇으로도 부족해 밥 공기 하나를 더 추가해서 반씩 나누어 말아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자기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은빈이 너는 좀 더 먹구. 이게 뭐양"
"알았어요 언니"
왜일까. 아까는 그렇게 잘 웃고 말이 잘 통하던 은빈이, 혜선이 온 이후로는 조금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생글생글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 모습은 왠지….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화장실쪽을 살핀 은빈이 나에게 입을 열었다.
"오빠 이따가요…"
"어"
"아니에요"
"엥? 이따가 뭐?"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는 다시 손까지 흔든 뒤 자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당을 나와 카페에서 은빈과 혜선이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다. 혜선의 일상은 내가 아는 그대로, 은빈의 일상은 집-회사-안무학원-집-회사-안무학원이 전부였다.
"얘가 이렇다니까. 맨날 집에만 있구. 어제 이브에 뭐했어"
"그냥 낮에 잠깐 카페 갔다가 사람들 많아서 집에 와서 뮤지컬 영화 몇 개 다운받아 보고…"
"아, 은빈아. 너 어쩔라고 그래. 연애 좀 해 연애 좀. 니 청춘이 아깝다."
혜선은 나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자기야, 얘한테 남자라도 좀 소개시켜줘. 얘 진짜 착하고 이쁘잖아. 근데 남자 보는 눈 지지리도 없고, 지 좋다면 무조건 어, 어 하다가 이상한 쓰레기 만날 뻔하고 그런다니까"
"에이 언니"
"뭐가 에이야. 너 작년에 만난 그 병신 뭐야, 사귄지 3일 됐는데 돈 빌려달라고 뺨 때린 새끼"
듣고 있던 내가 더 놀랐다.
"뭐요? 뺨을 때려요? 은빈씨를? 돈을 빌리고?"
"어, 돈 빌려달라고 했는데, 얘도 웃긴게 실제로 100만원 빌려줬어. 만난지 3일된 새끼한테. 그리고 잠수 타는거 연락했더니 왜 그렇게 사람 귀찮게 하냐면서 싸우다가 얘 뺨을 때렸어. 그 미친 놈이"
"아…"
저렇게 예쁜 애도 그런 개호구 같은 연애를 하기도 하는구나.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잘해줄텐데. 저런 애한테.
영화라도 볼까했지만 크리스마스 저녁에 미리 예약하지도 않은 좋은 세 자리가 있을 리 없다. 어느새 추워진 저녁, 우리 셋은 그렇게 정처없이 번화가를 걷다가 마침 발견한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하나뿐인 My
럽럽럽럽럽 My Luver
내 머리부터 뿜뿜
내 발끝까지 뿜뿜 뿜뿜 어!"
은빈과 혜선이 춤까지 추며 부르는 뿜뿜. 과연 댄스 학원 동기답게 그 좁은 곳에서도 들썩들썩 춤을 추는 모습을 VIP석에서 구경하는 호사를 누린다. 사실은 나도 신나서 춤추다가 "아 좁아 오빠는 앉아서 구경이나 해" 하는 혜선의 핀찬에 입 삐죽이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지만.
이어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른다. 혜선도 노래라면 어디가서 절대 안 빠지는 앤데, 은빈의 실력도 훌륭했다.
"언니 나 잠깐만"
"어"
은빈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순간, 혜선이 나를 보며 웃는다.
"오빠 은빈이 이쁘지?"
"어?"
"어때?"
"이쁘네"
혜선의 표정에 묘한 분노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당할 내가 아니다.
"근데 좀 뭐랄까"
"왜?"
곧바로 표정이 풀린다. 혜선이 더 궁금할 이야기.
"그냥,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보다 여자들 사이에서 더 인기 많을 거 같아."
"전혀 아닌데"
"그래?"
"어. 하여간 사람 볼 줄 몰라 쯧쯧"
"야, 내가 사람 볼 줄 아니까 너를 만나지"
"아 그러셔?"
"그럼, 우리 혜선이 같은 여자 또 없으니까 만나지"
"에휴"
잠시 후, 은빈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혜선이 화장실로 향했다. 잠깐의 어색함이 방 안을 채운 순간, 은빈은 웃으며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아공, 기분 좋다"
술이 들어가고 춤을 춰서 조금 기분이 알딸딸해져서 였을까, 아니면 곧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다고 느껴서 였을까. 아니면 하루종일 같이 놀면서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오빠, 오늘 너무 재밌어요. 우리 가끔 봐요. …언니랑 같이"
"어, 그래"
'언니와 같이' 라는 말이 뒤늦게, 그리고 아쉬움을 띄며 나온 말이라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래, 은빈아, 자주 보자"
그 뒤에 "우리 둘이" 라는 말을 간신히 참아낸다. 이후 곧 혜선이 들어오고 우리는 못다한 노래를 이어간다.
"어, 재밌었어, 잘 들어강~"
"네, 언니 너무 재밌었어요"
인사를 몇 번이고 꾸벅꾸벅하는 은빈. 나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옆의 혜선을 의식하며 이번에도 역시 참아내며 "잘 들어가요" 하고 고개를 돌린다.
"서은빈…"
아까 그냥 뭐라고 말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착각이든 뭐든, 그냥. 내 마음이니까. 향초를 태운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 은빈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혜선이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혼자 괜한 생각으로 뒤척이던 나는 문득 '아 맞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인스타라도 다시 볼까 싶어 휴대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휴대폰에는 DM이 와 있었다.
[ 오빠, 뭐하고 있어요? ]
나는 가벼운 콧바람을 내쉬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후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카메라로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머리스타일을 확인해 본다. 아까 혜선이한테 셀카 사진 보냈을 때에 비해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 뺨을 문지르고 있노라니 "안녕하세요" 하며 누가 등 뒤에서 나를 톡톡 건드린다. 혜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웃기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피부의 미인.
"어, 어어. 아…녕하세요"
일어서던 나는 의자를 잡으며 다시 조심스레 앉았고, 그 어색한 모습에 상대는 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신의 이름을 서은빈이라고 밝힌 그녀는 혜선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 이름은 자주 들었다. 댄스 학원에서 만났다던. 예쁜 이름이다 싶었는데. 혜선의 인스타에서도 매번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녀. 비공개 계정이라 얼굴은 못 봤는데. 동그랗게 큰 눈이 엄청 귀여운, 상큼하고 예쁜 인상이다. 빨간 베레모가 잘 어울린다. 혜선이도 저런 모자 가끔 써주면 좋을텐데.
"언니가 나 혼자 클스마스에 우울하게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놀자고 해서, 이렇게 민폐 끼치러 나왔어요"
"아 그렇구나. 아니에요, 같이 놀면 좋죠 뭐. 와 혜선이 주변에 이렇게 예쁜 동생이 있었다니!"
"핫! 아니에요"
맨날 집에만 쳐박혀있는 완전 집순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좀 무미건조한 뭐 그런 타입을 생각했는데, 엄청… 흠. 흐.
"언니 차 막혀서 좀 늦을거 같다고, 먼저 뭐 마시고 있으래요"
"아 그래요. 뭐 마실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아, 그럼… 아메리카노요"
주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니 힐을 신어서인지, 키는 나보다 살짝 작다. 코 끝을 스치는 향기.
"저는 언니 인스타에서 오빠 사진 많이 봤어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귀여우시다"
"와! 거봐, 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그쵸? 나 못 생긴거 아니죠?"
"잘 생겼는데. 왜요? 언니는 잘 생겼다고 말 안 해줘요?"
"아까도 셀카 보냈더니 시력 나빠진다고 이런 후진 사진 보내지 말라는거에요"
"아 언니 너무 웃겨"
10분, 15분, 20, 30분의 시간. 혜선은 미안하다고, 버스가 아예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미안하다고 카톡을 보내온다.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답장을 보낸다.
"언니랑은 만난지 이제 얼마나 됐어요?"
"이제 1년 좀 넘었어요"
"그렇구나. 나도 연애하고 싶다"
"은빈씨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후, 말도 안 돼"
"나야 혜선이가 시력이 나빠서 이렇게 만나주지만…"
"아 오빠도 너무 웃겨요"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잘 웃어주는 은빈 덕분에 실없는 소리도 부담없이 흘릴 수 있었고, 그녀도 정말 잘 웃어주었다.
"오빠 인스타 친구 신청해도 되요?"
"당연히"
서로 팔로우를 한 순간,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조용해지며 파라솔 아래 나와 은빈의 입김만이 어색하게 겹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혜선 언니 힘들겠다"
"아, 그러게"
인스타 피드 속 은빈의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혜선의 생각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뒤늦게 전화를 하자, 저 멀리서 "나 도착했어" 하며 팔을 씩씩하게 휘젓는 혜선을 발견한다.
"크~ 아 역시 몸 녹이는데는 뜨끈한 국물이 최고여"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로 설렁탕이라니, 뭔가 웃겼지만 혜선 장군님의 초이스에 토달 사람은 없었다. 은빈은 밥을 거의 다 남긴 채 국물만 먹었고, 나와 혜선은 한 그릇으로도 부족해 밥 공기 하나를 더 추가해서 반씩 나누어 말아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자기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은빈이 너는 좀 더 먹구. 이게 뭐양"
"알았어요 언니"
왜일까. 아까는 그렇게 잘 웃고 말이 잘 통하던 은빈이, 혜선이 온 이후로는 조금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생글생글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 모습은 왠지….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화장실쪽을 살핀 은빈이 나에게 입을 열었다.
"오빠 이따가요…"
"어"
"아니에요"
"엥? 이따가 뭐?"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는 다시 손까지 흔든 뒤 자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당을 나와 카페에서 은빈과 혜선이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다. 혜선의 일상은 내가 아는 그대로, 은빈의 일상은 집-회사-안무학원-집-회사-안무학원이 전부였다.
"얘가 이렇다니까. 맨날 집에만 있구. 어제 이브에 뭐했어"
"그냥 낮에 잠깐 카페 갔다가 사람들 많아서 집에 와서 뮤지컬 영화 몇 개 다운받아 보고…"
"아, 은빈아. 너 어쩔라고 그래. 연애 좀 해 연애 좀. 니 청춘이 아깝다."
혜선은 나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자기야, 얘한테 남자라도 좀 소개시켜줘. 얘 진짜 착하고 이쁘잖아. 근데 남자 보는 눈 지지리도 없고, 지 좋다면 무조건 어, 어 하다가 이상한 쓰레기 만날 뻔하고 그런다니까"
"에이 언니"
"뭐가 에이야. 너 작년에 만난 그 병신 뭐야, 사귄지 3일 됐는데 돈 빌려달라고 뺨 때린 새끼"
듣고 있던 내가 더 놀랐다.
"뭐요? 뺨을 때려요? 은빈씨를? 돈을 빌리고?"
"어, 돈 빌려달라고 했는데, 얘도 웃긴게 실제로 100만원 빌려줬어. 만난지 3일된 새끼한테. 그리고 잠수 타는거 연락했더니 왜 그렇게 사람 귀찮게 하냐면서 싸우다가 얘 뺨을 때렸어. 그 미친 놈이"
"아…"
저렇게 예쁜 애도 그런 개호구 같은 연애를 하기도 하는구나.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잘해줄텐데. 저런 애한테.
영화라도 볼까했지만 크리스마스 저녁에 미리 예약하지도 않은 좋은 세 자리가 있을 리 없다. 어느새 추워진 저녁, 우리 셋은 그렇게 정처없이 번화가를 걷다가 마침 발견한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하나뿐인 My
럽럽럽럽럽 My Luver
내 머리부터 뿜뿜
내 발끝까지 뿜뿜 뿜뿜 어!"
은빈과 혜선이 춤까지 추며 부르는 뿜뿜. 과연 댄스 학원 동기답게 그 좁은 곳에서도 들썩들썩 춤을 추는 모습을 VIP석에서 구경하는 호사를 누린다. 사실은 나도 신나서 춤추다가 "아 좁아 오빠는 앉아서 구경이나 해" 하는 혜선의 핀찬에 입 삐죽이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지만.
이어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른다. 혜선도 노래라면 어디가서 절대 안 빠지는 앤데, 은빈의 실력도 훌륭했다.
"언니 나 잠깐만"
"어"
은빈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순간, 혜선이 나를 보며 웃는다.
"오빠 은빈이 이쁘지?"
"어?"
"어때?"
"이쁘네"
혜선의 표정에 묘한 분노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당할 내가 아니다.
"근데 좀 뭐랄까"
"왜?"
곧바로 표정이 풀린다. 혜선이 더 궁금할 이야기.
"그냥,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보다 여자들 사이에서 더 인기 많을 거 같아."
"전혀 아닌데"
"그래?"
"어. 하여간 사람 볼 줄 몰라 쯧쯧"
"야, 내가 사람 볼 줄 아니까 너를 만나지"
"아 그러셔?"
"그럼, 우리 혜선이 같은 여자 또 없으니까 만나지"
"에휴"
잠시 후, 은빈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혜선이 화장실로 향했다. 잠깐의 어색함이 방 안을 채운 순간, 은빈은 웃으며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아공, 기분 좋다"
술이 들어가고 춤을 춰서 조금 기분이 알딸딸해져서 였을까, 아니면 곧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다고 느껴서 였을까. 아니면 하루종일 같이 놀면서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오빠, 오늘 너무 재밌어요. 우리 가끔 봐요. …언니랑 같이"
"어, 그래"
'언니와 같이' 라는 말이 뒤늦게, 그리고 아쉬움을 띄며 나온 말이라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래, 은빈아, 자주 보자"
그 뒤에 "우리 둘이" 라는 말을 간신히 참아낸다. 이후 곧 혜선이 들어오고 우리는 못다한 노래를 이어간다.
"어, 재밌었어, 잘 들어강~"
"네, 언니 너무 재밌었어요"
인사를 몇 번이고 꾸벅꾸벅하는 은빈. 나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옆의 혜선을 의식하며 이번에도 역시 참아내며 "잘 들어가요" 하고 고개를 돌린다.
"서은빈…"
아까 그냥 뭐라고 말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착각이든 뭐든, 그냥. 내 마음이니까. 향초를 태운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 은빈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혜선이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혼자 괜한 생각으로 뒤척이던 나는 문득 '아 맞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인스타라도 다시 볼까 싶어 휴대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휴대폰에는 DM이 와 있었다.
[ 오빠, 뭐하고 있어요? ]
나는 가벼운 콧바람을 내쉬며, 타이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