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이 불만을 표시하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실 꼭 이 시점에 저 뻔하고도 짜증나는 이야기를 남자 셋이 우울하게 지껄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상훈의 입을 찢고 싶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귀찮아서 내버려 두기로 합니다.
"아니 그렇잖아. 이게 무슨 역사적 맥락이 있냐, 아니면 무슨 대단한 뜻이라도 있냐. 그냥 노는 날 데이트 하는 뭐시깽이다 못해 이제는 아예 무슨, 어? 호텔방 모텔방 아주 꽉 꽉 들어차서 말이야"
그렇죠. 결국에는 이 흐름입니다. 결국에는 '나만 못하는 섹스'에 대한 열등감. 좀 질리기도 할 법하건만 몇 년 동안 저 주제로 맨날 이 시즌만 되면 떠들 수 있는 저 열등감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너넨 안 그래?"
정호와 나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는 상훈의 말에 나는 힘없이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딸이나 쳐 새끼야"
힘이 빠집니다. 상훈의 얼굴도 순간 붉어졌지만 곧 그 역시 풀에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아 연애 못하는게 무슨 죄냐고"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호가 조용히 입을 엽니다.
"나 사실 내일 수정이 만난다"
상훈은 곧바로 크게 놀라며 "뭐?" 하고 묻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더 힘이 없었던 거고, 상훈이 제발 그딴 소리를 안 하길 바랬던 겁니다.
"수정이랑 뭐하는데"
상훈은 표정 관리가 안 됩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동공, 믿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 그것은 단순히 동정 친구들 중 드디어 첫 이탈자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양수정. 상대가 하필이면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영화 보기로 했어"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정호. 우리 모임의 유일한 여자. 그리고 우리 같은 놈들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매력적인 여자. 털털하고, 잘 웃고, 덕질을 이해하며 우리와 놀아주는 여성 생명체.
"하아"
…아마 상훈의 마음 속에선 "씨발" 같은 욕설이 떠올랐을 겁니다. 어제의 나처럼. 깊은 열등감. 이제는 단순한 '남들 다 하는데 왜 우리만 못하냐?' 수준이 아닙니다.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먼저 치고 나간 셈이니까요. 게다가 상대는 모두들 은근하게 내심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중에 정호가 제일 그나마 일반 인간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키도 170 후반대에, 뭐 여튼. 생각해보면 수정이도 정호랑은 곧잘 따로 사적으로 연락했던 것도 같구요. 그때마다 설마설마하며 질투했었지만, 역시나.
"축하한다"
그래도 상훈이는 역시 좋은 놈입니다. 저 말을 채 3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전화 받고 나서 한 30분을 허튼 소리 떠든 뒤에야 겨우 말할 수 있었습니다.
"뭘, 그냥 같이 영화만 보는거야 영화만"
거짓말. 저는 압니다. 지난 주에 정호 폰에 깔린 호텔숙박앱을 봤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속으로 '갈 일도 없는 새끼가 이런 앱은 도대체 왜 깐 거지?' 하고 비웃음과 걱정을 동시에 했었는데, 어젯 밤 그 이유를 알았죠.
"둘이 언제부터 만나기로 한거야?"
"뭘 만나긴 만나. 그냥 지지난 주에 뭐 딱히 약속 없으면 이브 날에 같이 영화라도 보자고 했는데, 마침 수정이가 약속 없다고 잘 됐다면서 보자고 한거야"
하, 그게 더 화가 납니다. 나는 왜 진작에 안 물어봤을까요. 당연히 의례 그녀라면 같이 영화 볼, 같이 데이트할, 같이 뭐라도 할 누가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걔 남친 있지 않았어?"
상훈은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저처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10월달에 깨졌대"
"그랬구나"
상훈은 여전히 맥 빠진 얼굴입니다. 설마 어제의 내 표정도 저랬을까요. 전화로 통보 받은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정호 입장에선 상훈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요. 아니 나는.
"영화 보고 뭐할 생각이야?"
갑자기 그게 궁금했습니다. 정호는 어떤 준비를 했을지. 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듯 목소리가 밝아집니다.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영화 보고 밥 먹고, 뭐 커피 마시고… 상원동에서 만나기로 한 거라서, 걔네 집에서 레고 조립하려고"
"뭐?"
"진짜?"
다른건 중요한게 아닌데, '걔네 집'이라는 것에서 곧바로 저와 상훈의 달그락 거리던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아니 시발. 정호가 만약 호텔이나 모텔을 예약해두었다면 차라리 헛물 켜는 걸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걔네 집에 간다고?"
정호는 벌겋게 얼굴이 상기 된 우리 둘에게 "아니야, 걔네 엄마 아빠랑 같이 살잖아" 하면서 서둘러 부연합니다. 몰랐습니다 나는. 상훈이는 알았던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의아해 하며 묻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모님 있는 집에 남친도 아닌 남자를 부른다고?"
이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혹시 집 비는거 아냐?"
제가 말했지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머릿 속에서는 더러운 상상이 시작되려 합니다.
"아 몰라 미친 놈들아, 이상한 상상하지마"
정호는 서둘러 우리를 꾸짖고, 저도 상훈도 겨우 달그락 거리던 인내의 뚜껑을 붙잡지만 역시나 큰 상실감과 패배감이 휘몰아 칩니다. 씁쓸합니다. 이쯤해서는 인정해야겠지요.
"잘 모르겠지만, 여튼 축하한다. 너라도 부디…"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습니다.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뭘해도 앞서 나간다 생각한 저였지만 매번 실속을 챙기던 것은 정호였습니다. 성적도 매번 제일 나았지만 인서울 철학과 vs 지거국 기계공학과 중에서 고르라면 후자가 솔직히 낫겠지요. 대학은 간판이다 주장하며 똑똑한 척 했던 저는 헛똑똑이였죠. 롤 승급도, 뭐도. 이제는 여자까지도.
갑자기 깊은 패배감과 허무함이 저를 울리려 했습니다. 맙소사. 울면 안돼. 여기서 울면 좆되는 겁니다. 평생 놀림거리가 되는 건데. 나는 "야, 콘돔은 사뒀냐?" 하고 갑작스레 급발진을 합니다.
"미친 놈"
정호는 피식 웃습니다. 상훈도 피식 웃습니다. 상훈은 씁쓸하게 바지를 털며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좋네. 올해도 셋이 찌질하게 보내는 거보다는 하나라도 어? 인싸처럼 보내면 좋지. 좋겠다. 니가 제일 낫다 진짜" 하며 인정합니다.
베지터가 카카로트를 인정하던 그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그릇이 작습니다. 잘 인정이 안됩니다. 수정이 말고 다른 여자들의 리스트를 급하게 떠올려보지만 그딴게 있을 리 없죠. 그제서야 저도 인정을 합니다.
"미리 예약 잘 해두고. 그 날 당일에는 예약도 잘 안될거 아냐."
마음 속 한 구석이 후련해 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요, 정호라도 얼른 남자가 되면 좋은 일이죠. 어느새 말이 없어진 우리.
[ 지원님, 내일 뭐해요?ㅋㅋ ]
씁쓸하게 '파이어 & 스워드'나 실행하려던 순간, 카톡으로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 나는 흘낏 정호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리고 상훈도. 둘은 "뭔데?" 하며 동시에 묻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보여줍니다.
정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고, 상훈의 표정에 묘한 긴장과 여유가 동시에 흐릅니다. 놈은 희망과 최악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일까요. 정호의 표정에 스치는 짜증과 실망이 커집니다.
그리고 제 안의 고민도 커집니다. 글쎄요, 어떤 답을 하면 좋을까요. 친구를 위해 포기? 아니면 음…. 정호의 표정이 짜증과 실망을 거쳐 이번에는 무언가 간절함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변합니다. 뭐 그렇죠.
생각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상훈도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 상훈, 정호, 수정 넷의 크리스마스가 되느냐 아니면 정호와 수정의 러브러브 크리스마스가 되느냐가 달린 문제니까요. 또 다른 가정이라면 나, 정호, 수정 셋의 크리스마스, 아니면 아예 사랑과 전쟁이겠지만 그건 좀 말이 안되겠죠. 어쨌든 1분 여의 긴장 넘치는 시간.
"야, 대답 잘해라"
정호가 무게감 있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상훈이 놀립니다.
"같이 놀면 좋지 뭐"
정호는 순간 정색을 하며 "아 이 개새끼들아 좀 이건 아니지" 하며 짜증을 냅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좀 무서운 데가 있습니다. 저 욱하는 성미. 그러나 저는 이미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 저야 뭐...ㅎㅎ 수정님은요? ]
케, 그래요 바로 이겁니다. 친구가 별 겁니까? 정호는 서둘러 내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하고 "아 씨발 놈" 하고 욕을 하지만 저 역시 할 말은 있습니다.
"아 이게 뭐 미친 놈아. 내가 얘랑 놀자고 했어 뭐하자고 했어"
"너넨 진짜 친구도 아니다 미친 놈들아"
정호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지만, 뭐 사실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것도 오바 아닙니까.
"아 내가 말 걸었냐고. 얘가 물어보는건데"
"약속 있다고 하면 안되냐? 하 좀 진짜"
아까부터 은근하게 여유를 보이던 정호의 표정에 그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수정의 답장도 오지 않습니다. 어색함이 약 5분의 침묵 속에서 조금은 풀어집니다. 그리고 저도, 상훈도 정호의 실망 어린 표정에 동정심을 느낍니다.
"에휴 알았어 새끼야. 찌질한 놈"
저는 분명히 [ 상훈이랑 같이 놀려구요 ] 하고 답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이핑을 하던 도중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 아 사실은요... 내일 정호님이랑 영화를 보기로 했었는데, 급한 약속이 생겨서 못 보게 될 것 같아서요. 너무 죄송스러워서 차마 직접 말씀드리기가 미안해서, 음... 지원님한테 말씀 좀 대신 전해드릴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또 그것대로 실례인 거 같네요. 죄송해요. 그냥 모르는 일로 해주세요 ]
나는 일부러 [ 상훈이랑 같이 놀 ] 까지 타이핑된 채로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 수정의 메세지를 정호에게 보여주였습니다. 정호는 짜증을 내면서도 제가 휴대폰을 들이밀자 곧바로 휴대폰에 코를 박기라도 할 기세로 메세지를 확인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분노했습니다.
[ 아 씨발 ]
뭐라고 할까요. 참 이러면 안되는데 속이 후련합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후회와 아쉬움의 시간이 지나갑니다. 찢어진 것 같았던 가슴 한 쪽이 사르르 녹으며 치유됩니다. 상훈의 표정도 그래 보입니다. 오로지 정호만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곧이어 정호의 휴대폰이 울립니다. 정호는 대여섯 차례의 진동을 알면서도 무시하다 겨우 받습니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곧이어 "아 그러시구나. 네,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아유 진짜 괜찮아요. 네네 그럼 조만간 또 봐요" 하는 정호의 말.
그리고 저와 상훈은 소리 없는 행복의 춤을 격렬하게 정호의 앞에서 추기 시작합니다. 정호는 전화를 끊고 "아 씨바알!" 하는 포효를 하지만 그것은 우리 셋의 우정을 다져주는 행복의 구호에 불과합니다.
물론 압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우리 셋 중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수정과의 연애를 감히 꿈꾸었다는 다른 둘의 격렬한 견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일어날 확률이 지독하게도 낮은 일이며 당장 내일과 모레의 우울한 기분은 확실히 덜해졌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 어느 크리스마스보다 덜 외로울 것 같습니다. 상훈, 정호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가 이토록이나 소중할 줄이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과연 수정이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캐빈 대신 해리로 달려볼 예정입니다.
"야 정호야, 혹시 너 호텔 예약해뒀냐?"
"…어"
기쁨은 한층 더할 예정입니다.
- 끝 -
"아니 그렇잖아. 이게 무슨 역사적 맥락이 있냐, 아니면 무슨 대단한 뜻이라도 있냐. 그냥 노는 날 데이트 하는 뭐시깽이다 못해 이제는 아예 무슨, 어? 호텔방 모텔방 아주 꽉 꽉 들어차서 말이야"
그렇죠. 결국에는 이 흐름입니다. 결국에는 '나만 못하는 섹스'에 대한 열등감. 좀 질리기도 할 법하건만 몇 년 동안 저 주제로 맨날 이 시즌만 되면 떠들 수 있는 저 열등감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너넨 안 그래?"
정호와 나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는 상훈의 말에 나는 힘없이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딸이나 쳐 새끼야"
힘이 빠집니다. 상훈의 얼굴도 순간 붉어졌지만 곧 그 역시 풀에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아 연애 못하는게 무슨 죄냐고"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호가 조용히 입을 엽니다.
"나 사실 내일 수정이 만난다"
상훈은 곧바로 크게 놀라며 "뭐?" 하고 묻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더 힘이 없었던 거고, 상훈이 제발 그딴 소리를 안 하길 바랬던 겁니다.
"수정이랑 뭐하는데"
상훈은 표정 관리가 안 됩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동공, 믿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 그것은 단순히 동정 친구들 중 드디어 첫 이탈자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양수정. 상대가 하필이면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영화 보기로 했어"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정호. 우리 모임의 유일한 여자. 그리고 우리 같은 놈들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매력적인 여자. 털털하고, 잘 웃고, 덕질을 이해하며 우리와 놀아주는 여성 생명체.
"하아"
…아마 상훈의 마음 속에선 "씨발" 같은 욕설이 떠올랐을 겁니다. 어제의 나처럼. 깊은 열등감. 이제는 단순한 '남들 다 하는데 왜 우리만 못하냐?' 수준이 아닙니다.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먼저 치고 나간 셈이니까요. 게다가 상대는 모두들 은근하게 내심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중에 정호가 제일 그나마 일반 인간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키도 170 후반대에, 뭐 여튼. 생각해보면 수정이도 정호랑은 곧잘 따로 사적으로 연락했던 것도 같구요. 그때마다 설마설마하며 질투했었지만, 역시나.
"축하한다"
그래도 상훈이는 역시 좋은 놈입니다. 저 말을 채 3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전화 받고 나서 한 30분을 허튼 소리 떠든 뒤에야 겨우 말할 수 있었습니다.
"뭘, 그냥 같이 영화만 보는거야 영화만"
거짓말. 저는 압니다. 지난 주에 정호 폰에 깔린 호텔숙박앱을 봤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속으로 '갈 일도 없는 새끼가 이런 앱은 도대체 왜 깐 거지?' 하고 비웃음과 걱정을 동시에 했었는데, 어젯 밤 그 이유를 알았죠.
"둘이 언제부터 만나기로 한거야?"
"뭘 만나긴 만나. 그냥 지지난 주에 뭐 딱히 약속 없으면 이브 날에 같이 영화라도 보자고 했는데, 마침 수정이가 약속 없다고 잘 됐다면서 보자고 한거야"
하, 그게 더 화가 납니다. 나는 왜 진작에 안 물어봤을까요. 당연히 의례 그녀라면 같이 영화 볼, 같이 데이트할, 같이 뭐라도 할 누가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걔 남친 있지 않았어?"
상훈은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저처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10월달에 깨졌대"
"그랬구나"
상훈은 여전히 맥 빠진 얼굴입니다. 설마 어제의 내 표정도 저랬을까요. 전화로 통보 받은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정호 입장에선 상훈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요. 아니 나는.
"영화 보고 뭐할 생각이야?"
갑자기 그게 궁금했습니다. 정호는 어떤 준비를 했을지. 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듯 목소리가 밝아집니다.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영화 보고 밥 먹고, 뭐 커피 마시고… 상원동에서 만나기로 한 거라서, 걔네 집에서 레고 조립하려고"
"뭐?"
"진짜?"
다른건 중요한게 아닌데, '걔네 집'이라는 것에서 곧바로 저와 상훈의 달그락 거리던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아니 시발. 정호가 만약 호텔이나 모텔을 예약해두었다면 차라리 헛물 켜는 걸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걔네 집에 간다고?"
정호는 벌겋게 얼굴이 상기 된 우리 둘에게 "아니야, 걔네 엄마 아빠랑 같이 살잖아" 하면서 서둘러 부연합니다. 몰랐습니다 나는. 상훈이는 알았던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의아해 하며 묻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모님 있는 집에 남친도 아닌 남자를 부른다고?"
이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혹시 집 비는거 아냐?"
제가 말했지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머릿 속에서는 더러운 상상이 시작되려 합니다.
"아 몰라 미친 놈들아, 이상한 상상하지마"
정호는 서둘러 우리를 꾸짖고, 저도 상훈도 겨우 달그락 거리던 인내의 뚜껑을 붙잡지만 역시나 큰 상실감과 패배감이 휘몰아 칩니다. 씁쓸합니다. 이쯤해서는 인정해야겠지요.
"잘 모르겠지만, 여튼 축하한다. 너라도 부디…"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습니다.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뭘해도 앞서 나간다 생각한 저였지만 매번 실속을 챙기던 것은 정호였습니다. 성적도 매번 제일 나았지만 인서울 철학과 vs 지거국 기계공학과 중에서 고르라면 후자가 솔직히 낫겠지요. 대학은 간판이다 주장하며 똑똑한 척 했던 저는 헛똑똑이였죠. 롤 승급도, 뭐도. 이제는 여자까지도.
갑자기 깊은 패배감과 허무함이 저를 울리려 했습니다. 맙소사. 울면 안돼. 여기서 울면 좆되는 겁니다. 평생 놀림거리가 되는 건데. 나는 "야, 콘돔은 사뒀냐?" 하고 갑작스레 급발진을 합니다.
"미친 놈"
정호는 피식 웃습니다. 상훈도 피식 웃습니다. 상훈은 씁쓸하게 바지를 털며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좋네. 올해도 셋이 찌질하게 보내는 거보다는 하나라도 어? 인싸처럼 보내면 좋지. 좋겠다. 니가 제일 낫다 진짜" 하며 인정합니다.
베지터가 카카로트를 인정하던 그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그릇이 작습니다. 잘 인정이 안됩니다. 수정이 말고 다른 여자들의 리스트를 급하게 떠올려보지만 그딴게 있을 리 없죠. 그제서야 저도 인정을 합니다.
"미리 예약 잘 해두고. 그 날 당일에는 예약도 잘 안될거 아냐."
마음 속 한 구석이 후련해 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요, 정호라도 얼른 남자가 되면 좋은 일이죠. 어느새 말이 없어진 우리.
[ 지원님, 내일 뭐해요?ㅋㅋ ]
씁쓸하게 '파이어 & 스워드'나 실행하려던 순간, 카톡으로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 나는 흘낏 정호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리고 상훈도. 둘은 "뭔데?" 하며 동시에 묻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보여줍니다.
정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고, 상훈의 표정에 묘한 긴장과 여유가 동시에 흐릅니다. 놈은 희망과 최악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일까요. 정호의 표정에 스치는 짜증과 실망이 커집니다.
그리고 제 안의 고민도 커집니다. 글쎄요, 어떤 답을 하면 좋을까요. 친구를 위해 포기? 아니면 음…. 정호의 표정이 짜증과 실망을 거쳐 이번에는 무언가 간절함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변합니다. 뭐 그렇죠.
생각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상훈도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 상훈, 정호, 수정 넷의 크리스마스가 되느냐 아니면 정호와 수정의 러브러브 크리스마스가 되느냐가 달린 문제니까요. 또 다른 가정이라면 나, 정호, 수정 셋의 크리스마스, 아니면 아예 사랑과 전쟁이겠지만 그건 좀 말이 안되겠죠. 어쨌든 1분 여의 긴장 넘치는 시간.
"야, 대답 잘해라"
정호가 무게감 있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상훈이 놀립니다.
"같이 놀면 좋지 뭐"
정호는 순간 정색을 하며 "아 이 개새끼들아 좀 이건 아니지" 하며 짜증을 냅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좀 무서운 데가 있습니다. 저 욱하는 성미. 그러나 저는 이미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 저야 뭐...ㅎㅎ 수정님은요? ]
케, 그래요 바로 이겁니다. 친구가 별 겁니까? 정호는 서둘러 내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하고 "아 씨발 놈" 하고 욕을 하지만 저 역시 할 말은 있습니다.
"아 이게 뭐 미친 놈아. 내가 얘랑 놀자고 했어 뭐하자고 했어"
"너넨 진짜 친구도 아니다 미친 놈들아"
정호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지만, 뭐 사실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것도 오바 아닙니까.
"아 내가 말 걸었냐고. 얘가 물어보는건데"
"약속 있다고 하면 안되냐? 하 좀 진짜"
아까부터 은근하게 여유를 보이던 정호의 표정에 그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수정의 답장도 오지 않습니다. 어색함이 약 5분의 침묵 속에서 조금은 풀어집니다. 그리고 저도, 상훈도 정호의 실망 어린 표정에 동정심을 느낍니다.
"에휴 알았어 새끼야. 찌질한 놈"
저는 분명히 [ 상훈이랑 같이 놀려구요 ] 하고 답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이핑을 하던 도중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 아 사실은요... 내일 정호님이랑 영화를 보기로 했었는데, 급한 약속이 생겨서 못 보게 될 것 같아서요. 너무 죄송스러워서 차마 직접 말씀드리기가 미안해서, 음... 지원님한테 말씀 좀 대신 전해드릴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또 그것대로 실례인 거 같네요. 죄송해요. 그냥 모르는 일로 해주세요 ]
나는 일부러 [ 상훈이랑 같이 놀 ] 까지 타이핑된 채로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 수정의 메세지를 정호에게 보여주였습니다. 정호는 짜증을 내면서도 제가 휴대폰을 들이밀자 곧바로 휴대폰에 코를 박기라도 할 기세로 메세지를 확인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분노했습니다.
[ 아 씨발 ]
뭐라고 할까요. 참 이러면 안되는데 속이 후련합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후회와 아쉬움의 시간이 지나갑니다. 찢어진 것 같았던 가슴 한 쪽이 사르르 녹으며 치유됩니다. 상훈의 표정도 그래 보입니다. 오로지 정호만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곧이어 정호의 휴대폰이 울립니다. 정호는 대여섯 차례의 진동을 알면서도 무시하다 겨우 받습니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곧이어 "아 그러시구나. 네,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아유 진짜 괜찮아요. 네네 그럼 조만간 또 봐요" 하는 정호의 말.
그리고 저와 상훈은 소리 없는 행복의 춤을 격렬하게 정호의 앞에서 추기 시작합니다. 정호는 전화를 끊고 "아 씨바알!" 하는 포효를 하지만 그것은 우리 셋의 우정을 다져주는 행복의 구호에 불과합니다.
물론 압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우리 셋 중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수정과의 연애를 감히 꿈꾸었다는 다른 둘의 격렬한 견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일어날 확률이 지독하게도 낮은 일이며 당장 내일과 모레의 우울한 기분은 확실히 덜해졌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 어느 크리스마스보다 덜 외로울 것 같습니다. 상훈, 정호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가 이토록이나 소중할 줄이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과연 수정이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캐빈 대신 해리로 달려볼 예정입니다.
"야 정호야, 혹시 너 호텔 예약해뒀냐?"
"…어"
기쁨은 한층 더할 예정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