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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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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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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아니 오늘도 역시 '박스' 라는 닉네임의 저 양반이 거슬린다. 모처럼 다같이 잠깐 롤이나 한판 하자니까 굳이 또 난데없이 배그를 하자고 고집을 부리더니, 여의치 않자 급기야는 자기는 따로 하겠다며 단톡방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개인 채팅으로 다른 길드원들이 한 마디씩 한다.

[ 저 분 좀 이상하긴 한 듯요 ]
[ 후, 어쩔 수 없죠. 저희끼리 해요 ]

게임 길드를 운영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인정하기 싫어도 이 바닥에는 사회성이 부족한 찐따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느끼는 것은 결국 레벨이 금이고, 고수가 다이아라는 사실이다. 고수가 많을수록 아무래도 게임이 유리해지고, 길드 활동도 수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보니 그들을 잘 어르고 달래가며 활동하는 것이 길드를 오래 유지하는 비결이다.

[ 길드장 님 덕분에 오늘 겨우 이겼네요ㅋㅋㅋ 역시 선출은 달라ㅋㅋ ]
[ 다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ㅋㅋㅋ ]

함께 짜증난 길드원 몇몇을 잘 어르고 달래어 멘탈 케어해주며 두어 판 신나게 즐기고 밤늦게 침대에 오른다. 하루종일 컴퓨터를 하다 이제사 의자를 벗어나니 몸이 다 찌뿌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찌뿌둥함을 싫어하면 안된다. 한때 프로게이머 연습생도 했던 내가 아닌가. 부모님한테 귀싸대기 맞고 대학까지 포기하고 매달렸던 게임의 길.

결국 부모님의 고집을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내부 프로승급 결정전에서 끝내 3살 연하의 연습생에게 밀려 접어야 했던 프로게이머의 꿈. 이제는 꿈도 뭣도 아니게 된 게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일처럼 게임을 해댄다. 언젠가는 이걸 업으로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아주 막연하게 프로그래임도 혼자 공부해보고, 게임기사도 써보고 하면서.

그러나 역시 가장 기쁜 것은 마음 맞는 길드원들과 게임을 즐길 때다.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고 스스로 생각해도 인생 조지게 만든 게임이건만 이걸 또 좋다고 하고 있는 내 모습에 기가 막힘과 측은함을 함께 느낀다.

가끔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는 엄마는 "이 애미가 죽일 년이다, 니 그렇게 공부 잘할 때 컴퓨터를 사준다 어쩐다 한 내가 죽일 년이여" 하며 언제나의 타령을 할 때마다 내 속도 타들어 가지만.

"아 몰라 나가 쫌! 나 일해야 돼"

어쨌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는 지리지M을 부주로서 돌려야 하는 시간이다. 강남에서 건물 입대업을 하는 핵다이아 수저 40대 형님의 계정을 약 5~6시간 대신 돌려주는 대가로 매달 250만원 정도의 돈을 번다. 시세에 비해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는 편인데 그것은 매번 말려도 기어코 강화 들어갔다가 아이템 날려먹는 '똥손' 본주와는 달리 내가 강화를 하면 왠일인지 기가 막히게 높은 확률로 성공을 하기 때문. 지금 만나고 있는 아메리카TV 여 게임BJ도 내가 강화해 준 아이템 덕분에 인연이 닿은 것이니 더욱 나를 좋아라 하는 것이다.

[ 수고하세요 ]

눈과 목이 뻐근해지도록 휴대폰 바라보다가 겨우 또 하루 반 나절을 풀 타임으로 담당하는 40대의 또 다른 부주에게 넘긴다. 저번에 딱 한번 다같이 점심 먹을 때 봤는데 솔직히 같이 다니기 쪽팔릴 정도의 씹덕후 느낌 아재라서 깜짝 놀랐었다. 본주 형도 내 썩은 표정에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게임은 잘하잖아" 하고 귓속말로 표정 관리 하라고 해서 애써 웃었었더랬지.



[ 지난 11월은 조졌으니까 아시죠? 이번 12월은 미친듯이 돌아야 합니다. 길드 포인트 챙겨야죠. 특히 이제 연말 직전에는 포인트 2배니까 다들 최소 하루 2시간은 풀로 채워주세요. 강등 및 길드원 정리 들어갑니다 ]

그리고 활동이 다소 부족한 길드원들에게는 각자 개별로 메세지를 보낸다. 역시나 '박스'는 하루 평균 38분, 요즘은 정말 활동량이 부족하다. 그의 랭킹도 전체 서버 7위에서 14위로 밀렸다.

[ 님 자꾸 이러시면 힘들어요ㅜㅜ 도와주세요 ]
[ 길드장님ㅜㅜ 저 이번 주는 좀 봐주세요 ]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 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활동이 쉽지 않네요. 이번 달만 좀 봐주세요 ] 하며 부탁한다. 이번 주라더니 이제는 숫자 이번 달이다. 어쨌거나 우리 같은 소규모 길드 입장에서는, 전체 서버 순위권의 핵과금 랭커이자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사람을 활동 좀 부족하다고 쫒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칼 같이 처분한 다른 길드원들과는 차별을 두어 용서했다. 당장 다음 주가 길드전이니.



[ 박스님 뭐임? 완전 오늘 개트롤짓 하는데요 ]
[ 아 씹 가끔 그러더니 오늘 또! 아 진짜 우리끼리 할 때면 몰라도 오늘은 아니잖아! ]
[ 아 C1발 미1친거 아님? ]
[ 저 분 짤라요 ]
[ 길드장님 뭐함요 ]

'박스'가 사고를 쳤다. 길드전에서 완전히 미친 트롤짓을 했다. 종종 우리끼리 놀 때 그럴 때가 있긴 했지만 이건 길드 순위 결정전이다. 그런데 'ㅋㅋㅋㅋ'하는 메세지와 함께 의도적인 팀킬을 하지를 않나, 같은 편 진입경로를 막고 서 있지를 않나. 가뜩이나 운영진의 차별대우와 정모 불참, 묘하게 거슬리는 언행에 은근히 미운 털 박힌 그였기에 길드원들이 난리가 났다. 그나마 부길드장 '핸섬맨'이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그들을 달랬지만 기어코 초대 길드원 '부산_721'님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 길드장 입장에서 박스인가 뭔가 하는 그 인간을 감싸고 도는 이유는 충분히 알겠지만, 지금 길드 자체가 원칙도 없고 불공평하게 운영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리고 단순히 트롤짓이 아니라 우리한테 온갖 욕까지 하면서 플레이 했구요. 만약에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그냥 나도 탈퇴할랍니다 ]

그리고 다른 길드원 전부가 다 동의했다. 심지어 핸섬맨까지도. 게다가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끝내 단톡방에 쌓이는 메세지를 확인하지 않는 유일한 1이 바로 '박스'였다.

[ 신중히 고려하겠습니다 ]



내 입장에서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박스 같은 네임드 랭커 하나만 있다면 결국 떨거지 몇 백명 모으는 것은 순식간이다. 게다가 피차 마찬가지지만 무과금 유저들로는 한계를 느꼈다. 지난 11월의 길드전에서도 숫적 우위가 있었음에도 결국 번번히 아작난 이유도 저 부산_721같은 물만랩 무과금 유저들 때문이니까.

[ 제 생각은 여러분과 조금 다르네요 ]

결국 나는 지난 3년 간의 쌓아온 길드원들과의 우정을 저버렸다. 마침 어제 박스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그가 앞으로 다시 열심히 할 거라는 선언을 들었으니까. 온갖 폭언을 들었다. 게임 사이트 게시판에도 안 좋은 글들이 좀 올라왔다. 뭐 별 반응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박스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70명을 꽉 채웠던 길드가 단 이틀 만에 14명으로 줄어 들었다. 물론 남은 유저 대부분은 오랜 길드원이 아니라 네임드인 박스의 개인 팬들. 그러나 그러고도 박스는 거의 2주일 가량을 접속하지 않았다. 길드랭킹도 추락했다. 2서버 10위 권이던 길드 랭킹은 50위권으로 추락했다.




"형, 지금 전화 가능하세요?"
"뭔데, 나 지금 바쁜데"

바쁘기는, 또 이 한낮 다 된 시간까지 여자 끼고 침대 위에 있겠지. 하지만 애써 모르는 척 하고 다급하게 형에게 말을 전한다.

"조금 중요한 일이라"
"뭔데?"
"저 방금 계정 접속했는데요"
"어"
"그 찐따가 황금궁 12강 팔아버렸 다는데요"
"뭐?"

심드렁하던 전화 너머에서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느껴진다.

"아이 씨박 미쳤나. 왜? 왜 팔았대! 야 그거 현찰 1억 오천짜리야"
"갑자기 진홍쪽에서 기습 PVP 들어와서 싸우다가 연달아 두 번 죽어서 대응하려다 그랬다는데요. 글구 거래 급하게 올리려다가 실수로 천오백에 거래했대요"
"아 염병, 지랄났네. 아 씨발! 아 병신새끼가 진짜!"
"완전 미쳤죠? 저도 지금 너무 빡치는데 아 진짜 어쩌죠 이 병신을"
"후우"

전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어진다. 본주 형이 레알 빡쳤을 때의 반응이다. 저번의 아침 알바도 딱 이렇게 짤렸다. 그러나 나는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좀 저녁 담당 시간을 늘리고 월급 좀 더 올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형, 근데 있잖아요"
"야 잠깐만"

잔뜩 빡친 본주 형은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른 뒤에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야, 너 근데 니가 그 형한테 병신 병신할 입장이야?"

그 순간 뭔가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 이유를 알았다.

"그 새끼 우리 친형이야. 병신인 것 맞는데, 니가 병신 병신 할 입장은 아니지. 안 그래?"

몰랐다.

"아, 그랬구나. 형, 아, 제가 죄송해요. 실수를 했네요"

나는 정말로 방바닥에 주저 앉았다. 무슨 실수를 한건가 싶다.

"너 저번에도 한번 내 앞에서 형 보고 표정 개썩는거 내가 한번 뭐라고 하지 않았냐? 너 진짜 어디 가서는 내 욕할거 같다?"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아 됐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당분간 쉬어라. 나도 황금활 날리니까 좆도 할 맛 안 난다야. 그거 시발 12강짜리 어디가서 뭐 구할 수나 있겠냐? 없네. 없어. 경매장에도 없어. 하, 10강짜리도 없어. 아 시발 좀 쉬어야겠다. 다른 거 좀 하면서. 일단 이 달 월급은 입금해줄테니까, 담달부터는 다른 일 알아봐"

그렇게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할까 했지만 손이 떨려서 차마 버튼 누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노을 질 때까지 방 안에 있다가 겨우 간신히 정신 차리고 박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드라도 살려야 하니까. 다시 활동을 부탁 드린다고. 네임드 박스 중심으로 공격형 길드 만들어서 12월 길드전 3위 안에만 들면 잘하면 아마추어 상금대회도 나갈 수 있고, 캐리비안 길드 걔네처럼 스폰서라도 붙으면 당장 뭐가 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하지만 다시 사정이 생겨서 활동이 어려울 것 같다고. 나는 좋게좋게 그를 달래다가 결국 계속 힘들 것 같다고 하는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해버렸다. 그러자 박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요, 왤케 징징대요? 아니 이게 뭐 프로게이머 구단이야 뭐야. 그냥 길드잖아요. 그냥 나는 좀 혼자 뛰기 불편해서 고기방패들 좀 필요해서 좆밥 길드 활동한 건데, 이젠 날 보고 이거해라 저거해라 난리야. 다들 캐릭에 돈 천도 안 바른 거지길드 주제에. 안 그래요?"

내가 울먹이듯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그도 당황한 듯 좋게좋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알죠, 내가 지금 말이 좀 심했네. 여튼 길드장님 고생한거 알고, 그동안 재밌긴 했는데, 나도 이제 당분간 아버지 가게 물려 받을거 따라 다녀야 되서 바쁠거 같아서 그래요. 연말에는 또 좀 그렇잖아요, 친구들도 만나고 여친이랑 놀기도 해야지. 다른 때는 몰라도 클스마스 이럴 때는 여자애들 민감하니까. 님도 좀 길드 기왕 이렇게 된거 좀 쉬면서 숨도 고르고 해요. 그리고 어차피 나도 이제 부주들한테 돈 못 줘요. 아버지가 가게 물려 받으라는데 이제 용돈 막 못 땡겨쓰지. 혼자 이 똥손으로 돌려야 돼. 저번에 봤잖아요 개 트롤 짓한거. 그게 진짜 나에요"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구나.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랬구나. 그래 가끔 박스가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긴 있었다. 그게 진짜 이 새끼였구나.

"그럼 수고하시고, 좀 쉬어요. 그럼 안녕"

[ '박스' 님이 길드에서 나갔습니다 ]

심지어 길드 탈퇴까지 해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난 그 자리에서 흥분을 참지 못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짓찧어버렸다. 머리에 아득한 통증과 함께 숨조차 쉬기 힘든 코의 시큰함이 느껴졌다. 눈 앞이 빙글 돌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뇌진탕일까. 대가리가 깨진 것일까. 아니면 바닥이 깨진 것일까.

몸이, 시야가 거꾸로 돌며 통증 대신 기분 좋은 얼큰함이 머리를 중심으로 전신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랬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어차피 아무리 흙수저들이 24시간 게임을 한다고 해도 절대 금수저 캐릭터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그건 당연했다. 실력도 부주들을 통해서 위장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고. 당연히 하루에 두어시간 잠깐씩 하는 본주들이 반나절 이상을 게임하는 부주보다 나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막연하게나마, 게임으로 언젠가는 다시 내가 그럴싸한 밥벌이를 할 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이걸로 먹고 산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 길 중에도 쉬운 길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멋지게 업계의 일원이 되어, 지금 이 시기의 나를 귀엽게 돌아봐 주고 싶을 뿐이었다. 절망의 파도가, 그리고 현실의 썰물이 내 안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게임에 미쳐서 대학까지 포기한 게임중독 인간쓰레기일 따름이다. …엄마 아빠의 그 말이 옳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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