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작은 블로그에 혼자 글을 쓰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 동안 그는 글을 쓰고자 노력했지만 단 한 편도 완결짓지 못했다.
"망했군"
처음의 마흔 날 동안은 웃긴 글을, 나중의 마흔 날 동안은 슬픈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완결짓지 못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이제는 틀림없는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것이라고. 나름대로 글에 조예가 있다고 동네에서 일컬어지던 교회 집사 어른도 말했다.
"인간의 재능이란 마을의 우물과도 같아서, 펑펑 나올 때는 아무리 아낌없이 써도 부족함이 없지만 결국 한번 말라버리면 그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예전처럼 차오르지 않아. 노인은 이제 끝났어"
동네의 작은 바에 들릴 때 비치는 노인의 얼굴에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길게 늘어진 다크 서클과 신경질적인 표정, 목과 손에 늘어진 주름, 파리한 안색과 늘어진 뱃가죽의 흉한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고 한들 그에게서 더이상 '작가' 특유의 이지적인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기대해 볼만한 것이라면 여전한 그의 유머러스한 눈빛이었으며, 그나마 흥미로운 것은 새삼 빳빳하게 잘 다린 와이셔츠의 깃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낡디 낡아 소매에는 단추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랬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낡고 지쳐 있었다.
"박스 할아버지"
가게 문을 닫고 함께 나선, 바의 젊은 사장이 말했다.
"돌아오는 주말에, 예전처럼 함께 하루종일 술 마시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토론해볼까요?"
하지만 노인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더이상 나같은 노인과 노닥거릴 필요가 없단다. 나에게서 배울만한 것은 모두 배웠고, 너는 이제 여자 뒤꽁무니를 열심히 쫒아다닐 시간이야."
사장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가게 옆 골목길 한쪽 벽에 바짝 붙여 세워놓은 스포츠카에 오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알죠? 제가 박스 영감님 좋아하는거"
"알다마다"
노인은 골목길을 지나치며 인사 대신 손을 휘저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라도 하는 양. 사실 그 나름대로 하트 모양의 손짓이었지만, 이미 만취한 노인의 휘적임은 그저 가냘픈 노인의 술주정에 불과했다.
노인은 새벽의 쓰레기차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입 안을 헹구고, 세수를 한 뒤 혼자 다시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스에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글을 써온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는 굽은 어깨와 거북목이 전부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의 글에 울고 웃었던, 감탄하고 공감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글 속의 주인공과 조연이 되어 주었던 무수히 많은 얼굴이 새삼 또 스쳐 지나간다. 노인은 더이상 아름답고 행복한 글을 쓰지 않는다. 시시한 이별의 글도 쓰지 못한다. 그 모든 감정의 편린들은 아주 오래 전의 것들이다. 바싹 마르고 건조한,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주름 사이에만 배어있는 축축하고 불쾌한 얼굴 기름처럼 지독한 외로움만이 그의 안에 매우 찝찝한 형태로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커피라도 마실까"
지난 수십 년간, 하루에 네다섯잔도 연거푸 마셨던 그였다. 아침에 잠이 깨지 않아서, 술이 덜 깨서, 집중이 안 되서, 미팅을 위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밥을 먹었으니까 디저트로, 노곤하니까, 누군가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 자초지종이 알고 싶어서, 뒤를 캐고 싶어서, 제대로 얼굴 보고 따져보기 위해서, 따로 은밀하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여차하면 얼굴에 확 끼얹고 쌍욕을 퍼붓기 위해서, 비웃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사과하고 싶어서, 새까맣게 잊고 싶어서. 그렇게 수도 없이 마셨고, 또 습관적으로 마셨던 커피.
젊었을 때는 여유가 되면 되는대로 그나마 사치를 좀 부려서 고급 원두도 종종 챙겨 마시곤 했지만, 지금 노인의 사정으로는 향이고 뭐고 느끼기도 힘든 몇 년 묵은 커피가루 내려 마시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가을의 새벽 바람은 산폐되고 눅눅한 커피의 묵은 향조차도 신선한 파나마 게이샤 원두의 그것을 연상케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오늘은 느낌이 좋네"
하루에 내뱉는 말의 거의 절반이 혼잣말인 지독한 외로움.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 외로움조차 글쓰기에는 최적화 된 어떤 힘이 되는 듯 했다.
사실 노인에게 있어서 '글'이란 조금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정작 전업작가로서 활동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그는 십대 시절부터 줄곧 글을 써왔다. 욕심 많고 뽐내기 좋아하는 자신을 타인 앞에 확실하게 뽐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좋은 수단이었으며, 화려하면서도 곧잘 흔들리며 불안했던 씁쓸한 청춘의 고통을 완화하는 좋은 약이었다.
"흠, 뭘로 시작을 할까"
동이 트기 전, 노인은 음악을 재생했다. 사실 그는 글을 쓸 때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날만큼은 음악을 그저 듣고 싶었다. 무슨 음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이들의 음악이면 족했다.
최근의 작은 경험들, 조금은 특별했던 어떤 순간의 기억들을 시작으로 소재를 만들어 간다. 겪었던 인물들을 갈아넣고 조금씩 변주하며 인물들의 틀과 살을 만들어 간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조금만 생각하면 앞으로의 비전도 완성된다.
노인은 생각했다. 나는 특별하지. 평생을 주변에 여자 없이 살았던 적이 없었다. 재주에 비해 넘쳐난 여복. 잘 풀리지 못한 것은 그저 조금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끔 그런 날들이 있다. 젊었던 어느 순간에는 하루에도 서너개씩 떠올랐던 사고의 포인트들. 그저 그 근처 어딘가에 접안하고 정박하기만 해도 두뇌 어딘가 속에서 달려온 싱그러운 작품 아이디어들이 품 안에, 키보드 위에 폭신하니 포근하게 안겨오던 발상의 풍요.
그리고 그 수많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을 그저 낄낄대며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여자친구와의 농담 따먹기에 소모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은 몇 가지의 시시한 꺼리들만으로도 충분히 혼자 만족할만큼 글을 쓰던 젊었던 시절의 추억. 이제는 가끔 떠오른 그 무엇을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반나절을 고민한다.
다행히 오늘은 3분의 고민으로 다시 저 앞으로 발사된 아이디어의 총알을 쫒아가 잡아낼 수 있었다. 아까 마신 커피 카페인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디어의 신선함에 흥분을 느낀다.
"이거 좀 대박인데"
노인은 또 중얼거린다.
"이거 정말 재밌겠는데"
그는 단숨에 커피를 반 잔 비워내고 열심히 타이핑한다. 시끄러운 청축 키보드 소리가 그의 외로움에 시끄러운 말동무가 되어준다. 마치 카페에서 웃어주기만 해도 혼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끝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사랑스럽던 옛 여자친구처럼.
"이거다"
대어가 문 릴이 정신없이 풀려나가듯 충만한 사고의 흐름은 연속적으로 흥미진진한 설정들을 창조해낸다. 이런 캐릭터라면, 이런 조건이라면, 이 놈이라면, 이 정도의 디테일이 곁들여 진다면, 웃음이 피식 흘러 나온다. 그래, 이거다.
"이거라고"
혼잣말이 너무 많아졌다. 단순히 늙고 외롭다는 것만으로는 변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쩌면 이것은 정신병의 전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볍게는 우울증, 크게는, 아니, 어쨌든.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미 미친 것이라고 해도.
"원래 그랬잖아"
무언가 간절히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을 때는 다른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았다. 항상. 간절히 갖고 싶었던 그녀를 위해 나의 미래 자원들이 모조리 박살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웃으며 기꺼이 감내했고, 확실히 조준한 목표가 생기면 내 몸체가 다 부서지고 박살나도 그저 일단 그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각과 감내, 통증의 컨트롤은 항상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 뒷 단어들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든'. 노인은 항상 그렇게 간절했다.
"그리고 원래 여자들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도 덤벼들 줄 아는 바보에 대한 감동, 그리고 바보가 되어버린 그에 대해 느끼는 실망의 교차 과정. 노인은 그렇게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잃어왔다. 매번.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네. 오늘은 글이 막혀있는 여든 다섯째 날이다. 허무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에 비하면 85일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짧고 가벼운가.
"오케이"
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 갈등. 사실은 이런 부분이 포인트다. 공감대를 형성해 온 주인공의 첫 갈등. 첫 위기에 놓인 상황. 지나치게 특별하면 현실감을 잃고, 지나치게 평범하면 재미를 잃는다. 바로 그런 부분의 차이가 망작과 명작의 차이를 가른다.
"피식 웃게 만들 줄 아는 개그감각"
갈등을 봉합하며 주인공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작은 팁. 자, 주인공아, 여주인공의 마음을 녹여다오. 아름이의 성격을 부여받은 여주인공 현지. 과연 주인공의 심드렁한 한 마디에 현지는 빵 터지고 내 머릿 속 아름이도 "아 오빠!" 하며 웃는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발랄하고 신나는 기타 리프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고 있다.
어느새 나는 내 나이를 잊는다. 늙고 노쇄한 육신의 짐을 잠시 키보드 위, 의자 위에 버려두고 수십 년 전 기억 속 신나는 음악에 어깨를 흔들며 허름한 작은 바에서 설레임을 느낀다. 눈 앞에는 쭉 뻗은 허벅지와 단아한 향수 냄새, 바알간 립스틱의 섹시함이 빛나는 아름이가 웃고 있다. 술과 음악에 취한다.
내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던 아름의 얼굴이 생생하니까. 찢겨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행복을 빈다는, 정말로 내가 했던 말인지 머릿 속에서 재구성된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멘트가 나의 대사로 작성되어 아주 고이 기억 속 한 켠에 애써 치워버렸던 열정을 되살려 버린다.
음악이 바뀌고 도도도도 세밀한 전자음이 과잉된 감정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다. 잠시 멈추었던 나의 타이핑은 속도를 더해간다. 주인공은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간다. 시시한 삶의 상처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느끼며 독자와 그 감정을 공유한다.
"후우"
긴 호흡과 함께 그렇게 단번에 두 단락을 날려버린다. 아깝지 않다. 좋은 글은 얼마나 많은 파트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 노인으로서는 또 다른 흐름으로 문장들을 구성한다.
"어디 보자"
글의 서두가 완성됐다. 독자를 글로 빨아 들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가리. 여자의 얼굴, 남자의 키, 가볍게 읽고 또 읽는다. 몇 단어를 수정하여 더 부드럽게 만들고 반복되는 단어를 수정한다. 호흡을 조절하며 숨이 가쁜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조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은 후, 노인은 단숨에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린다.
"이거 정말 맘에 든다. 내가 봐도 재밌네. 표현이 좋아"
노인은 평생 자기 마음에 드는 글을 많이 써왔다. 애시당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긴 했어도, 그보다는 자기 만족이 더 큰 목적이었다. 남이 무어라 평가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일단 나한테 마음에 드는 글은 그걸로 좋았다.
"좋았어"
글의 초두와 말미를 잇는 복선을 몇 개 뒤늦게 삽입한다. 다행히 초반에 설정해 둔 몇 가지의 포인트가 있어서 확장하기에 좋았다. 일부 내용은 전체 흐름을 위해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다. 아까운 부분들이 생겨나지만 그건 아래에 옮겨두고 일단은 과감히 날린다. 그렇게 다듬는다. 직접 대사를 읽어본다.
"흐"
내 호흡에 맞춰 표현을 조정하고, 더욱 현실감을 부여한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드리우고 남보다 일찍 일어난 노인의 이로움이 더이상 압도적이지 않은 시간이 된다. 아침 식사를 기대하게 되지만 기억해보니 어제 저녁에 마지막 남은 계란 한 알마저 먹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냉장고 안에는 더이상 단백질이 없다. 자연스럽게 '글의 완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과감히 배고픔이나 허기짐 같은 부가적인 이슈들을 저버리게 된다.
"다 썼나?"
사실 더 다듬자면 한참 더 다듬을 수 있을게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꼼꼼함은 없다. 노인은 사실 그게 미완의 미학이고, 자기 글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빈틈, 아주 약간의 설정충돌. 하지만 그 어느 인간도 철저히 자기 철학대로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삶의 언젠가에는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거스르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들 잘만 살아간다. 설정의 충돌이 아니라 진정한 현실감의 부여다.
"쩝"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마우스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혜영과 현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주인공에 대한 현지의 마음이 혜영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 노인은 그 장면을 들어낸다. 독자의 감정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장면이지만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운다.
기십 년 전의 부탁이 떠올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절대 자기 이야기로는 글 쓰지 말아 달라고 했던 소희. 그렇게 혜영이라는 캐릭터가 사라진다. 글의 많은 부분이 작살난다. 주인공의 초중반부 화려한 일상이 조금 더 무미건조해지고, 부산여행 준비하는 장면에서 혜영이에게 빌린 10만원의 알바비가, 그저 주인공이 저금통 뜯어 만드는 장면으로 바뀐다. 요즘 세상에 저금통이라, 말이 안된다 싶어서 중고 플스3를 파는 장면으로 넣지만 확실히 절절한 맛이 많이 사라진다.
"후우"
하나가 무너지니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아름과의 모텔 장면이 무의미 해진다. 혜영이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챙겨준 알바비 10만원이 아름과의 모텔비로 변하는 장면의 잔인함이 감쇄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다른 장면에서 괜한 짜증을 내며 후배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나쁜 놈으로 만든다. 이 놈은 욕을 먹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을 희생하는 애틋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혜영의 캐릭터를 지운 것이 전체 글을 망가뜨렸다. 완성은 지었지만.
"됐어, 이걸로 끝이야"
몇 군데를 수정했는지 모른다. 단언컨데 처음의 완성 초고가 지금의 이것보다 압도적으로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퇴고가 아니라 퇴보를 해버렸구나"
노인은 주인공에게 말을 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정말 여자에 미쳤던 거냐고. 모처럼의 작품도 그 덕분에 이렇게 이상해지고 말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공은 노인의 입을 빌어 대답했다.
"그때는 그랬어"
무엇이 그랬다는지 알듯 모를듯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다시 긴 한숨과 함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며 작게 중얼 거렸다.
"다 내 잘못이야"
마침내 노인이 글을 올린 것은 어느새 새벽이 된 시간이었다. 무려 20시간의 집필이었다. 물론 중간에 유통기한 3일 지난 식빵 네 조각과 맹물을 먹은 시간, 허리가 너무 아파서 침대에서 세 시간 쪽잠을 잔 시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댓글이 달리기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을 시간.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노인은 그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이었다. 한층 더 굽은 어깨와 목, 아주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과 쳐진 어깨가 그에게 쌓인 엄청난 피로를 증명했다. 노인에게 하루종일 쌓인 피로는 젊은이의 한달 수명에 비하면 좋을 그 어떤 것이리라. 노인은 침대까지 가는 것조차도 부담을 느끼며 곧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분명히 일어났을 때 다시 전신의 격렬한 통증을 예상하며.
"참 기가 막히지. 어떻게 노친네가 매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몰라"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바의 젊은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어서?"
"참, 하여간 대단해. 아 보면서 나도 눈물 찔끔했다니까. 옛날 생각나서, 참. 나도 그때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나중에 그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때도 여전히 노인은 오랫동안 빨지 않은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로 곤히 자고 있었다. 노인은 첫 사랑과의 이별 후, 할아버지 제사 상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던 그때 그 시절의 바보 같은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 끝 >
"망했군"
처음의 마흔 날 동안은 웃긴 글을, 나중의 마흔 날 동안은 슬픈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완결짓지 못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이제는 틀림없는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것이라고. 나름대로 글에 조예가 있다고 동네에서 일컬어지던 교회 집사 어른도 말했다.
"인간의 재능이란 마을의 우물과도 같아서, 펑펑 나올 때는 아무리 아낌없이 써도 부족함이 없지만 결국 한번 말라버리면 그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예전처럼 차오르지 않아. 노인은 이제 끝났어"
동네의 작은 바에 들릴 때 비치는 노인의 얼굴에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길게 늘어진 다크 서클과 신경질적인 표정, 목과 손에 늘어진 주름, 파리한 안색과 늘어진 뱃가죽의 흉한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고 한들 그에게서 더이상 '작가' 특유의 이지적인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기대해 볼만한 것이라면 여전한 그의 유머러스한 눈빛이었으며, 그나마 흥미로운 것은 새삼 빳빳하게 잘 다린 와이셔츠의 깃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낡디 낡아 소매에는 단추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랬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낡고 지쳐 있었다.
"박스 할아버지"
가게 문을 닫고 함께 나선, 바의 젊은 사장이 말했다.
"돌아오는 주말에, 예전처럼 함께 하루종일 술 마시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토론해볼까요?"
하지만 노인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더이상 나같은 노인과 노닥거릴 필요가 없단다. 나에게서 배울만한 것은 모두 배웠고, 너는 이제 여자 뒤꽁무니를 열심히 쫒아다닐 시간이야."
사장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가게 옆 골목길 한쪽 벽에 바짝 붙여 세워놓은 스포츠카에 오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알죠? 제가 박스 영감님 좋아하는거"
"알다마다"
노인은 골목길을 지나치며 인사 대신 손을 휘저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라도 하는 양. 사실 그 나름대로 하트 모양의 손짓이었지만, 이미 만취한 노인의 휘적임은 그저 가냘픈 노인의 술주정에 불과했다.
노인은 새벽의 쓰레기차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입 안을 헹구고, 세수를 한 뒤 혼자 다시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스에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글을 써온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는 굽은 어깨와 거북목이 전부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의 글에 울고 웃었던, 감탄하고 공감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글 속의 주인공과 조연이 되어 주었던 무수히 많은 얼굴이 새삼 또 스쳐 지나간다. 노인은 더이상 아름답고 행복한 글을 쓰지 않는다. 시시한 이별의 글도 쓰지 못한다. 그 모든 감정의 편린들은 아주 오래 전의 것들이다. 바싹 마르고 건조한,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주름 사이에만 배어있는 축축하고 불쾌한 얼굴 기름처럼 지독한 외로움만이 그의 안에 매우 찝찝한 형태로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커피라도 마실까"
지난 수십 년간, 하루에 네다섯잔도 연거푸 마셨던 그였다. 아침에 잠이 깨지 않아서, 술이 덜 깨서, 집중이 안 되서, 미팅을 위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밥을 먹었으니까 디저트로, 노곤하니까, 누군가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 자초지종이 알고 싶어서, 뒤를 캐고 싶어서, 제대로 얼굴 보고 따져보기 위해서, 따로 은밀하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여차하면 얼굴에 확 끼얹고 쌍욕을 퍼붓기 위해서, 비웃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사과하고 싶어서, 새까맣게 잊고 싶어서. 그렇게 수도 없이 마셨고, 또 습관적으로 마셨던 커피.
젊었을 때는 여유가 되면 되는대로 그나마 사치를 좀 부려서 고급 원두도 종종 챙겨 마시곤 했지만, 지금 노인의 사정으로는 향이고 뭐고 느끼기도 힘든 몇 년 묵은 커피가루 내려 마시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가을의 새벽 바람은 산폐되고 눅눅한 커피의 묵은 향조차도 신선한 파나마 게이샤 원두의 그것을 연상케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오늘은 느낌이 좋네"
하루에 내뱉는 말의 거의 절반이 혼잣말인 지독한 외로움.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 외로움조차 글쓰기에는 최적화 된 어떤 힘이 되는 듯 했다.
사실 노인에게 있어서 '글'이란 조금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정작 전업작가로서 활동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그는 십대 시절부터 줄곧 글을 써왔다. 욕심 많고 뽐내기 좋아하는 자신을 타인 앞에 확실하게 뽐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좋은 수단이었으며, 화려하면서도 곧잘 흔들리며 불안했던 씁쓸한 청춘의 고통을 완화하는 좋은 약이었다.
"흠, 뭘로 시작을 할까"
동이 트기 전, 노인은 음악을 재생했다. 사실 그는 글을 쓸 때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날만큼은 음악을 그저 듣고 싶었다. 무슨 음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이들의 음악이면 족했다.
최근의 작은 경험들, 조금은 특별했던 어떤 순간의 기억들을 시작으로 소재를 만들어 간다. 겪었던 인물들을 갈아넣고 조금씩 변주하며 인물들의 틀과 살을 만들어 간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조금만 생각하면 앞으로의 비전도 완성된다.
노인은 생각했다. 나는 특별하지. 평생을 주변에 여자 없이 살았던 적이 없었다. 재주에 비해 넘쳐난 여복. 잘 풀리지 못한 것은 그저 조금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끔 그런 날들이 있다. 젊었던 어느 순간에는 하루에도 서너개씩 떠올랐던 사고의 포인트들. 그저 그 근처 어딘가에 접안하고 정박하기만 해도 두뇌 어딘가 속에서 달려온 싱그러운 작품 아이디어들이 품 안에, 키보드 위에 폭신하니 포근하게 안겨오던 발상의 풍요.
그리고 그 수많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을 그저 낄낄대며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여자친구와의 농담 따먹기에 소모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은 몇 가지의 시시한 꺼리들만으로도 충분히 혼자 만족할만큼 글을 쓰던 젊었던 시절의 추억. 이제는 가끔 떠오른 그 무엇을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반나절을 고민한다.
다행히 오늘은 3분의 고민으로 다시 저 앞으로 발사된 아이디어의 총알을 쫒아가 잡아낼 수 있었다. 아까 마신 커피 카페인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디어의 신선함에 흥분을 느낀다.
"이거 좀 대박인데"
노인은 또 중얼거린다.
"이거 정말 재밌겠는데"
그는 단숨에 커피를 반 잔 비워내고 열심히 타이핑한다. 시끄러운 청축 키보드 소리가 그의 외로움에 시끄러운 말동무가 되어준다. 마치 카페에서 웃어주기만 해도 혼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끝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사랑스럽던 옛 여자친구처럼.
"이거다"
대어가 문 릴이 정신없이 풀려나가듯 충만한 사고의 흐름은 연속적으로 흥미진진한 설정들을 창조해낸다. 이런 캐릭터라면, 이런 조건이라면, 이 놈이라면, 이 정도의 디테일이 곁들여 진다면, 웃음이 피식 흘러 나온다. 그래, 이거다.
"이거라고"
혼잣말이 너무 많아졌다. 단순히 늙고 외롭다는 것만으로는 변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쩌면 이것은 정신병의 전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볍게는 우울증, 크게는, 아니, 어쨌든.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미 미친 것이라고 해도.
"원래 그랬잖아"
무언가 간절히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을 때는 다른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았다. 항상. 간절히 갖고 싶었던 그녀를 위해 나의 미래 자원들이 모조리 박살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웃으며 기꺼이 감내했고, 확실히 조준한 목표가 생기면 내 몸체가 다 부서지고 박살나도 그저 일단 그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각과 감내, 통증의 컨트롤은 항상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 뒷 단어들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든'. 노인은 항상 그렇게 간절했다.
"그리고 원래 여자들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도 덤벼들 줄 아는 바보에 대한 감동, 그리고 바보가 되어버린 그에 대해 느끼는 실망의 교차 과정. 노인은 그렇게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잃어왔다. 매번.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네. 오늘은 글이 막혀있는 여든 다섯째 날이다. 허무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에 비하면 85일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짧고 가벼운가.
"오케이"
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 갈등. 사실은 이런 부분이 포인트다. 공감대를 형성해 온 주인공의 첫 갈등. 첫 위기에 놓인 상황. 지나치게 특별하면 현실감을 잃고, 지나치게 평범하면 재미를 잃는다. 바로 그런 부분의 차이가 망작과 명작의 차이를 가른다.
"피식 웃게 만들 줄 아는 개그감각"
갈등을 봉합하며 주인공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작은 팁. 자, 주인공아, 여주인공의 마음을 녹여다오. 아름이의 성격을 부여받은 여주인공 현지. 과연 주인공의 심드렁한 한 마디에 현지는 빵 터지고 내 머릿 속 아름이도 "아 오빠!" 하며 웃는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발랄하고 신나는 기타 리프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고 있다.
어느새 나는 내 나이를 잊는다. 늙고 노쇄한 육신의 짐을 잠시 키보드 위, 의자 위에 버려두고 수십 년 전 기억 속 신나는 음악에 어깨를 흔들며 허름한 작은 바에서 설레임을 느낀다. 눈 앞에는 쭉 뻗은 허벅지와 단아한 향수 냄새, 바알간 립스틱의 섹시함이 빛나는 아름이가 웃고 있다. 술과 음악에 취한다.
내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던 아름의 얼굴이 생생하니까. 찢겨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행복을 빈다는, 정말로 내가 했던 말인지 머릿 속에서 재구성된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멘트가 나의 대사로 작성되어 아주 고이 기억 속 한 켠에 애써 치워버렸던 열정을 되살려 버린다.
음악이 바뀌고 도도도도 세밀한 전자음이 과잉된 감정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다. 잠시 멈추었던 나의 타이핑은 속도를 더해간다. 주인공은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간다. 시시한 삶의 상처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느끼며 독자와 그 감정을 공유한다.
"후우"
긴 호흡과 함께 그렇게 단번에 두 단락을 날려버린다. 아깝지 않다. 좋은 글은 얼마나 많은 파트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 노인으로서는 또 다른 흐름으로 문장들을 구성한다.
"어디 보자"
글의 서두가 완성됐다. 독자를 글로 빨아 들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가리. 여자의 얼굴, 남자의 키, 가볍게 읽고 또 읽는다. 몇 단어를 수정하여 더 부드럽게 만들고 반복되는 단어를 수정한다. 호흡을 조절하며 숨이 가쁜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조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은 후, 노인은 단숨에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린다.
"이거 정말 맘에 든다. 내가 봐도 재밌네. 표현이 좋아"
노인은 평생 자기 마음에 드는 글을 많이 써왔다. 애시당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긴 했어도, 그보다는 자기 만족이 더 큰 목적이었다. 남이 무어라 평가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일단 나한테 마음에 드는 글은 그걸로 좋았다.
"좋았어"
글의 초두와 말미를 잇는 복선을 몇 개 뒤늦게 삽입한다. 다행히 초반에 설정해 둔 몇 가지의 포인트가 있어서 확장하기에 좋았다. 일부 내용은 전체 흐름을 위해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다. 아까운 부분들이 생겨나지만 그건 아래에 옮겨두고 일단은 과감히 날린다. 그렇게 다듬는다. 직접 대사를 읽어본다.
"흐"
내 호흡에 맞춰 표현을 조정하고, 더욱 현실감을 부여한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드리우고 남보다 일찍 일어난 노인의 이로움이 더이상 압도적이지 않은 시간이 된다. 아침 식사를 기대하게 되지만 기억해보니 어제 저녁에 마지막 남은 계란 한 알마저 먹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냉장고 안에는 더이상 단백질이 없다. 자연스럽게 '글의 완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과감히 배고픔이나 허기짐 같은 부가적인 이슈들을 저버리게 된다.
"다 썼나?"
사실 더 다듬자면 한참 더 다듬을 수 있을게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꼼꼼함은 없다. 노인은 사실 그게 미완의 미학이고, 자기 글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빈틈, 아주 약간의 설정충돌. 하지만 그 어느 인간도 철저히 자기 철학대로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삶의 언젠가에는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거스르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들 잘만 살아간다. 설정의 충돌이 아니라 진정한 현실감의 부여다.
"쩝"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마우스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혜영과 현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주인공에 대한 현지의 마음이 혜영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 노인은 그 장면을 들어낸다. 독자의 감정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장면이지만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운다.
기십 년 전의 부탁이 떠올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절대 자기 이야기로는 글 쓰지 말아 달라고 했던 소희. 그렇게 혜영이라는 캐릭터가 사라진다. 글의 많은 부분이 작살난다. 주인공의 초중반부 화려한 일상이 조금 더 무미건조해지고, 부산여행 준비하는 장면에서 혜영이에게 빌린 10만원의 알바비가, 그저 주인공이 저금통 뜯어 만드는 장면으로 바뀐다. 요즘 세상에 저금통이라, 말이 안된다 싶어서 중고 플스3를 파는 장면으로 넣지만 확실히 절절한 맛이 많이 사라진다.
"후우"
하나가 무너지니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아름과의 모텔 장면이 무의미 해진다. 혜영이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챙겨준 알바비 10만원이 아름과의 모텔비로 변하는 장면의 잔인함이 감쇄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다른 장면에서 괜한 짜증을 내며 후배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나쁜 놈으로 만든다. 이 놈은 욕을 먹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을 희생하는 애틋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혜영의 캐릭터를 지운 것이 전체 글을 망가뜨렸다. 완성은 지었지만.
"됐어, 이걸로 끝이야"
몇 군데를 수정했는지 모른다. 단언컨데 처음의 완성 초고가 지금의 이것보다 압도적으로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퇴고가 아니라 퇴보를 해버렸구나"
노인은 주인공에게 말을 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정말 여자에 미쳤던 거냐고. 모처럼의 작품도 그 덕분에 이렇게 이상해지고 말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공은 노인의 입을 빌어 대답했다.
"그때는 그랬어"
무엇이 그랬다는지 알듯 모를듯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다시 긴 한숨과 함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며 작게 중얼 거렸다.
"다 내 잘못이야"
마침내 노인이 글을 올린 것은 어느새 새벽이 된 시간이었다. 무려 20시간의 집필이었다. 물론 중간에 유통기한 3일 지난 식빵 네 조각과 맹물을 먹은 시간, 허리가 너무 아파서 침대에서 세 시간 쪽잠을 잔 시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댓글이 달리기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을 시간.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노인은 그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이었다. 한층 더 굽은 어깨와 목, 아주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과 쳐진 어깨가 그에게 쌓인 엄청난 피로를 증명했다. 노인에게 하루종일 쌓인 피로는 젊은이의 한달 수명에 비하면 좋을 그 어떤 것이리라. 노인은 침대까지 가는 것조차도 부담을 느끼며 곧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분명히 일어났을 때 다시 전신의 격렬한 통증을 예상하며.
"참 기가 막히지. 어떻게 노친네가 매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몰라"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바의 젊은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어서?"
"참, 하여간 대단해. 아 보면서 나도 눈물 찔끔했다니까. 옛날 생각나서, 참. 나도 그때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나중에 그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때도 여전히 노인은 오랫동안 빨지 않은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로 곤히 자고 있었다. 노인은 첫 사랑과의 이별 후, 할아버지 제사 상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던 그때 그 시절의 바보 같은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