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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난(女難)

"대리님 방금 전에, 뭐라고 하신거에요?"

근무시간. 작은 목소리로 살짝 웃음끼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아주 미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속삭이는 소연씨.

"방금 전에요? 내가 뭐라고 했지? 아, 나랑 모티브 안 갈래요? 라고 했죠. 잠 너무 오는데, 커피 한잔 마시고 해요"

그러자 혼자 "아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웃는 그녀.

"왜요?"

당황해서 내가 묻자 "카페 가서 말씀드릴게요. 모티브 가요" 하며 먼저 일어서는 소연의 뒤를 따르며 지갑부터 챙긴다.




1층의 카페 '모티브'에 내려와서는 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받아들고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았다.

"아니 나는, 갑자기 대리님이 나한테 '나랑 모텔 안 갈래요?' 이러길래, 이거 뭐지? 했죠"

정말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모티브가 어떻게 모텔로 들려요! 이건 음란마귀 드립치기도 뭐할 정도네!"
"맞아요 나 요즘 음란마귀 들렸나봐요. 저번에는 아름 언니가 '유부초밥 먹으러 가자'라고 한걸 '고추…' 아 이건 대리님한테 말하긴 좀 그렇다. 여튼, 요즘 나 좀 그래요"
"일상생활 불가능 수준인데, 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둘이 낄낄대고 있으려니 아름씨와 선화씨도 어느새 카페로 내려왔다.

"어허! 아니 이 싸람들이 근무시간에 카페에서 이런 땡땡이를?"
"언니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응 맞어"
"언니꺼는 내가 주문할게요. 아름 언니 뭐 마실거에요?"
"나 그냥 아아. 아냐 선화야 내 카드로 결제해"

소연, 아름, 선화. 우리 팀원들이다. 같은 여자이건만 "나는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봐" 하면서 대놓고 외모 보고 뽑는 우리 선 매니저님의 취향에 따라 다들 한 미모 하는 직원들이다. 성격도 쿨하다 못해 형님 같은 그녀들. 물론 그런 만큼 다들 멋진 남자친구들이 있고.

"아니 아까 대리님이 나한테 대뜸 모텔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뭐?! 아니 대리님!"
"아냐! 무슨 소리야, 소연씨 말을 똑바로 설명해요!"
"어, 사실은 나한테 모티브 가자고 한건데 내가 모텔로 들어서."

소연의 부연에 아름은 한숨을 크게 쉬며 이마를 친다.

"야, 장소연, 진짜 너 왜 그래. 야, 너 남친한테 딱 전해. 다 이게 지금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거니까 만날 때마다 뽀뽀 열 번씩 해달라고"
"아유 언니. 뽀뽀 열 번이 뭐야. 약해, 그런 걸로는 안 돼"

나는 그녀들의 농담에 혼자 피식피식 웃는다. 다들 드립이 장사다. 아름은 내 눈치를 살피며 "대리님도 있는데 그럼 뽀뽀라고 하지 뭐라고 말해" 하며 또 웃는다.

"아 다들 왜들 그래. 진짜 좀 너무하네. 나 사내 고충위에 신고할래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소연이 또 한발자국 나선다.

"무슨위요? 나 지금 미쳤나봐, 또 말이 이상하게 들려"
"고'충'위! 사내 고충 위원회"
"아아"

그리고 그제서야 소연의 말을 이해한 아름이 웃으며 그녀의 팔뚝을 때린다.

"진짜 미친거야?"




퇴근 길, 후문 쪽의 주차타워 앞에서 차 꺼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뒤늦게 소연이 나온다.

"어 대리님? 아직 안 가셨어요?"
"아 네. 차 빼느라고. 우리 주차타워 느려도 너무 느려."
"아 맞아요. 저번에 영업팀 조 과장님도 한 소리 하던데. 세상에 무슨 차 하나 빼는데 20분씩 걸린다고, 너무 짜증난다고"
"그러게요. 아 소연씨 집이 사당쪽이라고 했나? 태워줄까요?"

내 제안에 반색하는 소연.

"정말요? 좋아요!"




"우리 팀 다들 어디 산다고 했죠?"
"아름 언니는 건대쪽에 살고, 선화 언니는 목동 쪽이에요. 저는 사당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돼요, 이따가 사당역 근처에서 세워주세요. 걸어가면 금방이에요"
"아 그렇구나. 네"

조금 더 가노라니 소연이 묻는다.

"대리님 여자친구 있다고 하셨죠? 몇 살이에요?"
"한 살 어려요. 서른 하나에요. 건축 일하고 있어요"
"건축이요? 설계 뭐 그런거?"
"네"
"와 멋있다"

나도 묻는다.

"소연씨 남자친구는요?"
"동갑인데, 코스포 다녀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도 볼까말까. 맨날 지방 돌아다니고, 1년에 막 두 세달씩 출장 가고 그래요"
"와 힘들겠다. 그래도 연봉 장난 아니겠는데?"
"연봉도 연봉인데, 원래 집이 좀 살아요. 부모님이 뭐 사업하신다던가? 그럼 뭐해. 내 돈도 아닌걸"
"맛있는거 많이 사달라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살쪘잖아요"
"에이 살은 무슨"

하지만 알고 있다. 수시로 바뀌는 소연의 가방과 구두 중에 상당수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지분이 있다는 것을. 어쨌든 내 여자친구와 그녀의 남자친구, 결혼 이슈로 이야기가 돌다가 아름씨가 남자친구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 소연이 자기는 나중에 결혼하면 애를 최소한 둘은 낳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간 무렵, 그녀의 뱃 속에서 꽤나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어 배고픈가 보네. 나도 배고픈데. 우리 밥 먹고 들어갈래요?"

무안해할 것 같아서 건낸 빈 말인데, 소연은 "좋아요" 하며 가볍게 콜한다.

"저기 골목 앞에 파스타 맛집 있어요. 주인이 이태리에서 유학한 사람이라나봐요"
"올, 본토의 맛"

대학생 때 나름 맛집 파워블로거까지 했다던 소연의 추천이면 기대해 볼만하다 싶었다. 정말 맛있으면 다음에 가희랑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 골목 안쪽 공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노을이 참 예뻤다.




"오 여기 진짜 맛있네. 스튜 정말 맛있다. 고기 스튜 이렇게 잘하는 곳 드문데"

소연이 "그쵸!"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대리님도 은근 맛잘알이야. 미식가야, 저번에 '페이로드' 가서 미슐랭 밥 혼자 먹고 왔다는 이야기 듣고 딱 알아봤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거"
"아니 그냥 그건 그 날 여친이랑 싸워서 그렇게 된거에요"

그 말에 소연이 웃으면서 반박한다.

"아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럼 예약을 취소하지 굳이 가서 혼자 밥 먹는 경우는 없다구요"
"예약 잡느라 고생한게 아까워서"
"그러니까 미식가지. 근데 여친 분 진짜 그거 혼자 먹은거 알면 더 화날걸요? 완전 미쳤다고 할텐데"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어요"
"웃겨 진짜"

소연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맛집에 대한 썰과 정보를 푼다. 이 동네 맛집은 어디어디가 있으며, 다음에 여친이랑 꼭 어디어디 가보라는 둥, 자기 남친은 이런거 맛집 찾아다니는거 정말 귀찮아하고 이해 못한다고, 맨날 무슨 탕이나 먹자고 한다고 투덜대며.

"입맛 무난하면 좋죠"
"그렇지도 않아요. 약간 마마보이 끼도 있어서, 아직도 김치는 엄마표 김치 아니면 안 먹어요"
"흐, 나도 스무살 때까지 그랬는데"
"어떻게 고쳤어요?"
"군대 가서"
"아, 내 남친은 군대도 공익 다녀왔어요"

한참을 서로의 남친, 여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 서로의 취미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소연은 전시나 공연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주에는 무슨 르네상스 위인들 전시를 보러 갔대나.

"갈릴레오 망원경 진짜 큰 거 봤는데 멋있더라구요"
"그렇구나. 나도 전시 같은거 좋아하는데, 좋은 전시 있으면 같이 보러 가요"

말을 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싶어서 '남친하고 같이' 하고 말을 덧붙이려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꼭 보러가요 꼭"

내가 빈 말을 많이 해서일까, 소연은 '꼭'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잘 먹었습니다" 하며 "내일 모레 점심은 제가 쏠게요. 목요일에 선화 언니랑 아름 언니 둘 다 외근이잖아요" 하며 인사를 한다. 이직한 이래 근 삼주일만에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좋다.

"좋아요.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대리님"

걸어가면서 생긋 웃고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차가운 인상의 가희와는 확실히 다른 이미지와 행동.




"응,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어? 스파게티. 아, 그냥 간만에 땡겨서. 어 그럼, 혼자 먹었지. 어어, 씻고 이따가 연락할게"

가희 성격에 회사 여직원이랑 밥 먹고 들어왔다면 불 같이 화를 낼 것 같아서 괜한 거짓말을 했다. 정작 지는 이 놈 저 놈 신경 거슬리는 놈들이랑 같이 밥 잘만 먹으면서 말이다, 라는 내 안의 핑계를 대며.

[ 소연 : 대리님 나 넘 배불러요ㅋㅋㅋ배 터질 것 같아요 ]

소연의 카톡 메세지. 나도 배가 많이 부르다. 애초에 파스타만 해도 양이 많은데다, 큼지막한 식전 빵에다가 화덕피자 맛있을 것 같다고 피자까지 시켜먹었더니 정말 나도 배 터질 것 같다.

[ 나 : 난 이미 터짐ㅋㅋㅋㅋㅋ ]
[ 소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친이 아닌 또래 여자와 이렇게 사담을 나누는 재미. 허튼 생각이 아예 안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저 친해지는 동료 관계일 뿐.




"다녀오겠습니다. 대리님 저희 근데 꼭 복귀해야 되나요? 지금 가면 암만 빨라도 오후 5시 전에는 못 오지 싶은데. 꼭 복귀해야 되요?"
"음, 모르겠네요. 차장님이랑 부장님 지금 다 안 계시네. 두 분도 아마 오늘 복귀 안 하실거 같은데. 그럼 그냥 거기 끝날 무렵해서 전화 한 통 주세요. 그냥 복귀 안 하고 바로 집에 가도 될 거에요. 뭐 크게 뭔 일 있겠어요? 끝나면 거기서 바로 퇴근해요"
"오? 그러다 내일 혼나면요"
"내가 책임질게요"
"정말요!?"
"끽해야 시말서 한 장 밖에 더 쓰겠어요?"
"올"

아름과 선화가 "올~" 하면서 엄지를 치켜들지만 사실 어제 물어봤다. 그냥 현지 퇴근하라는 허락 받아놨다. 소연도 옆에서 들었고. 그 모습을 보던 소연이 "어제 대리님이 물어봤어요. 그냥 부장님이 바로 퇴근하랬어요" 하고 끼어든다.

"아 뭐야, 난 왠일로 우리 대리님이 멋있나 했네"

아름의 독설에 "뭐라고? '왠'일'로'?" 하며 되묻자 그녀들은 그저 웃으며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외근을 나선다.




"온지 얼마 안 됐는데, 여직원들하고 잘 어울리네"

현장에 잠깐 가야하는데 차가 말썽이라며 금요일에 차 좀 빌릴 수 있냐는 가희의 전화를 받느라고 1층으로 나온 차, 담배를 피우러 내려 와 있던 총무팀 박 과장님이 말을 건다.

"아 예. 안녕하세요. 네, 그냥 뭐, 어린 친구들이라 같이 일하기 재밌네요. 어려운 것도 있지만"
"흐, 좋을 때지. 아 잠깐만, 김 대리 여자친구 있나? 없으면 저 중에 하나 골라서 만나면 되잖아?"

아, 이런 꼰대.

"아니요 아니요, 여자친구 있습니다. 큰일나요. 그런 말씀 여자친구가 실수로라도 들었다가는 저 죽어요"

일부러 괜한 오바를 했다. 그러자 그는 히죽 웃고는 "에이, 김 대리 여친한테 꽉 잡혀지내네. 장가가면 바람도 못 피우겠어" 하고는 껄껄 웃는다. 여직원들과 즐겁게 일하는 모습에서 저런 부류의 꼰대들이 느낄 어떤 시샘. 그 부분에서 흘러나올 묘한 짖궂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준다.

"그럼 수고해요. 점심 맛있게 먹고"
"네, 과장님도 화이팅입니다"
"어이~"




점심시간. 오늘따라 소연이 왠지 화장에도 머리에도 옷에도 힘을 좀 준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내 착각일까.

"오늘 끝나고 어디 가요?"
"아니요, 바로 집에 가요"
"근데 오늘 뭔가 좀 멋있는데?"

내 말에 픽 웃은 소연이 "대리님이랑 단 둘이 점심 먹으니까요" 하고 농담을 건낸다. 농담이지만 기분 좋다. 이거야말로 박과장님에게 내가 한 말처럼, 소연이 알았다가는 "죽을 일" 지도 모를 일이지만.

"뭐 먹을까요?"

내 질문에 소연이 "저번에 아름이 언니랑 찾은 초밥집 있는데 거기가요. 맛있어요" 하며 안내한다.




"나 사실 좀 고민 있는데, 대리님한테 물어봐도 되요?"
"뭐든"

고개를 끄덕이자 소연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말한다. 인당 18,000원짜리 초밥 세트가 나왔다. 직장인의 점심식사치고는 살짝 과하지만, 사실 구성으로 치자면 그저 그렇다. 단지 이 동네 가게 중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먹을만한 스시야니까.

"지금 남친이 일하는 회사에, 좀 신경쓰이는 여자가 있는데요오"
"오우"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소연의 남친 주변에 여자가 붙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미 예전에 한번 어설프게 의심했다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자기만 이상한 여자가 됐었는데, 요즘은 어째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다는 것.

"소연씨 그런데 원래 의심이라는게, 한번 꼬리에 꼬리를 물면 기가 막히게도 맞아 떨어져요. 진짜 그런 거 같다는 생각만 들고, 아귀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것만 같고. 원래 그래요.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던데? 뭐래더라, 확증편향! 맞어. 한번 의심하면 그런 쪽으로만 뇌가 정보를 받아들인다나?"
"맞아요…근데 이건 진짜 좀 아… 대리님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알죠, 당연히"

머리가 꽤 복잡해보이는 그녀.

"여자의 촉, 남자의 감, 뭐 이런 이야기들 하고… 실제로 오래 만나온 커플은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알아채잖아요. 어?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하지? 얘가 이 시간에 잔다고? 얘 목소리가 왜 이러지? 뭐 이런거부터… 뭐 안하던 짓을 한다거나, 그럴 시간이 아닌데 평소와 행동이 좀 많이 다르다던가. 다 느끼죠. 분명히 감은 무시 못하죠. 근데… 의심부터 하면 결국 오해만 쌓여요. 진짜 만에 하나 아니면 나만 완전 이상한 사람 되는거고."
"하…"

이 기름지고 맛나보이는 초밥을 앞에 두고 한숨만 길게 쉬는 소연.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봐요. 만나서, 나 요즘 너 때문에 이러이러해서 엄청 신경 쓰인다, 그러니까 내 말 이상하게만 듣지 말고,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 해달라고"
"왜 그런 이야기 안 해봤겠어요. 절대 그런거 아니라는데 뭐라고 하겠어요. 오히려 왜 또 그러냐는데"

하긴 그렇겠지.

"그럼 그냥 완전 믿어요. 믿음이 있으니까 만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바람 피우는 사람 많긴 한데, 또 의외로 드물기도 한게 바람이니까. 오해겠지, 하고 묻어두세요 그냥. 애초에 바람은 교통사고 같은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 교통사고 두 번이나 났었는데"
"세 번은 안 나겠죠"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소연.

"얼른 먹어요. 이러다 생선 다 밥에 눌어 붙겠어요"
"대리님도 얼른 드세요. 고마워요, 이런 이야기 들어줘서"




"그런데 우리 회사도 너무 웃기지 않아요? 아무리 그냥 인사차 서류만 받아 오는거래도 사원급 두 명 달랑 보내는게 어딨어. 너무 막장이야.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화날거 같아"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아름씨 선화씨 둘이 오면 되게 좋아할거 같은데"

소연의 중얼거림에 내 심드렁한 한 마디. 그리고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기획팀 최 주임이 혼자 웃음 터뜨린다.

"와, 대리님 진짜 솔직하시다. 인정"
"아 남자들이란. 내가 이래서 못 믿어"

나와 최 주임을 보며 혀를 차며 손가락질 하는 소연.

"솔직한게 최고에요."

묘하게 뼈있는 한 마디씩을 주고 받은 우리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하지만 소연은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쉽게 집중하지 못한다.




"어, 대리님"
"아, 소연씨! 같이 갈래요? 태워줄게요. 같이 타고 가요"

비구름에 어두워진 퇴근 길, 주차 타워 옆에 서있노라니 이번에도 소연씨를 만났다. 솔직히 '괜찮아요'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럼이 없이 "고마워요 대리님" 하면서 내 옆에 선다. 정말 이제 빈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루종일 집중 못 하던데. 그렇게 불안해요?"
"네"

많이 좋아하는구나.

"소연씨가 그렇게 걱정하는거, 남자친구도 알아요?"

아, 이런.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대답이 없다. 한참을 말이 없던 소연은 "대리님 말대로, 그냥 믿기로 했어요. 또 바람 나면 그땐 정말 내 잘못이겠죠.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죠"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것대로 좀 아닌데. 그래서 나는 빈 말 하지 말자는 1분 전의 다짐을 뒤로 하고, 또 실없는 소리를 했다. 꽤나 위험한 실없는 소리를.

"정 그럼 먼저 바람 피워버려요. 그럼 안 억울하잖아요"

소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리님, 나 화나면 무서워요" 하며 주먹을 움켜쥔다. 귀엽군.




오늘따라 차가 조금 막힌다.

"아까 아름 언니랑 통화했거든요? 지금 거기서 퇴근한다고"
"아아 맞다. 네, 뭐래요? 일은 잘 됐대요?"
"네. 가니까 거기 사장님이 회 사줬대요. 이미 밥 먹었는데도 오후 3시에 회를."
"헐! 진짜 내 말이 맞네. 이쁜 여직원들 가니까 그러는거봐. 와"

또 아차 싶었다. 가벼운 농담이라지만 결과적으로 자꾸 말 실수를 하는 느낌이다. 남자친구가 예쁜 직장동료에 눈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외모에 흔들리는 남자 이야기를 자꾸하다니.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왜요?"

아까부터 침체된 기분의 그녀가 처음으로 다소 밝은 톤의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걱정한 일들이, 실제로 안 좋게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없더라구요. 진짜 안 좋은 일들은, 꼭 전혀 의심도 안 할 때 터지는 법이니까"

내 말에 대답이 없던 소연은 잠시 후 "고마워요 대리님. 자꾸 제가 신경쓰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고 대답해왔다.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막혔던 길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어제 대리님 조언대로 그냥 완전 직설적으로 물어봤는데, 내가 막 말하다가 우니까 남친이 그 자리에서 카톡한거 다 보여주고 막… 그래서 나 다 풀렸어요"
"오 레알? 대박이네"

환해진 얼굴의 소연, 그리고 어리둥절한 아름과 선화.

"뭐야, 둘이 이제 연애상담까지 해? 대리님 완전 그거다. 그 뭐지? 친구 미만 연인 이상"
"반대 아냐?"

아름의 말에 선화가 치고 들어온다.

"남친하고 못하는 연애상담은 하는데, 막 친구보다도 못한 사이. 완전 딱인데요?"
"뭐야 말은 그럴 듯 한데, 여튼 어감 이상해, 구려"
"어 이상하긴 해요. 맞어, 나 저번에 인스타 하는데 대놓고 프로필에 FWB 써놓은 남자가…"
"악! 무슨 틸더야 뭐야"

아침의 카페. 다들 깔깔대며 커피 한잔씩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수다를 떨며 환하게 웃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차에 그 머리카락 누구거야?"

금요일 밤, 차를 빌려쓴 가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 이런.

"무슨 머리카락?"

당연히 소연의 머리카락인 것을 알면서도 잠깐 시간을 벌어본다. 솔직히 말하는게 좋을까, 구라를 치는게 좋을까. 이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게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망할.

"이거"

가희가 머리카락을 내민다. 그걸 또 가지고 왔니. 음, 색으로 보나 길이로 보나 무조건 소연의 머리카락이다.

"아, 우리 회사 여직원"
"뭐?"
"아 무슨 그런거 아냐. 저번에 회사 여직원이 자기 남친이랑 막 사이 별로라서, 엄청 정신 못 차리길래 퇴근하면서 잠깐 같은 방향이라서 데려다 준거야"
"오빠가 그 여자를 왜 챙기는데?"
"아 부하직원이니까. 하루종일 일도 못하고 정신 못 차리니까 내가 그럼 사수니까 챙겨야지. 아 그리고 걔 남친도 있어."
"오빠 지금 이직한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 문제로 나 짜증나게 만들어? 그리고 언제 걔가 오빠 차에 탔는데?"
"아 그, 화요일에"
"화요일 언제"

후, 따지기의 무한루프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아 화요일 퇴근길에"
"스파게티 먹은 날? 그 날 혼자 먹었다며"

이런건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 작년에는 내 생일까지 까먹은 주제에.

"걔 데려다 주면서 달래주고 오는 길에 밥 혼자 먹었다고"
"하"

진실의 함정에 빠질 뻔 했지만 나는 곧바로 구라의 2단 기어를 집어넣고 간신히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 앞에는 진실의 과속방지턱, 블랙박스가 있었다.

"블박 까봐"
"야, 이가희"
"까보라고"

정색하는 표정의 이가희. 암만 생각해도 얘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었을 것 같다.

"에효"

나는 가희를 데리고는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기어코 그 자리에서 블랙박스를 조작했다. 화요일, 약 30분 남짓한 시간의 운행시간 중 몇 분간의 녹화된 영상들이 있었고 그 조그마한 블박의 스피커로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친 운운하는 내용은 분명히 있었기에 적어도 내 말에서 상당한 부분의 의혹이 조각되어 가희는 심문을 중단했다.

"진짜 왜 그래? 뭐 좋은 아는 오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거야? 회사에서?'

짜증은 여전히 상당한 수위로 배어있지만 적어도 아까만큼의 흥분한 기색은 다소 누그러든 눈치다. 사실 바람을 피운다는 전제라면 남친이 있던 없던,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희의 평가로는 내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수준의 골게터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아니, 너야말로 이상하게 생각하냐. 너는 회사 사람들이랑 상담 같은거 안해?"
"안해. 그리고 무슨 상담을 해도 무슨 연애상담 같은걸 하냐고. 오빠가 무슨 대학생이야? 동아리 회장이야?"
"참나"

동아리 회장이라는 말에 솔직히 공감이 가서 나 혼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데"
"동아리 회장 맞는거 같아서"

그리고 그 말에 가희도 할 말이 없었던지 "참" 하고 허탈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지도 웃겼는지 웃음을 흘린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적당한 진심과 적당한 사과를 섞어 말한다.

"미안해, 여튼 또래 그룹이라서 더 그런거 같아. 내가 좀 주책 부렸나봐. 안 그럴게, 선 잘 그을게. 그리고 넌 날 모르냐? 내가 미쳤다고 그 불여우 같은 것들이랑 연애질을 해? 그리고 너가 백배는 이뻐. 안심해도 돼"
"말 같지도 않는 말로 어설프게 넘기려고 하지마. 그리고 그 기집애 사진 좀 보여줘"
"사진이 어딨어"
"휴대폰에 번호 있을거 아냐. 그럼 카톡이라도 추가되어 있을거고"
"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는 당당하게 휴대폰을 내민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 끝까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아뿔싸'

서로 배부르다고 이야기 나눈 카톡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화요일에. 아 젠장, 진짜 뭣도 아닌 구라 하나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나. 짜증이 난다. 그냥 앞으로는 공기만 같이 쳐마셔도 같이 쳐먹었다고 솔직하게 불어야겠다.

"걔 이름이 뭔데?"

휴대폰을 뒤적이던 가희가 묻는다. 일이 괜히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다른 이름을 댄다.

"윤선화"

아름이나 소연과는 그래도 제법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특히나 더 도도한 느낌의 선화는 그닥 카톡을 나눈게 없다.

"얘 머리카락 까만색인데?"

치밀하게 파고 들지만 "예전 사진이야. 지금은 염색했어" 하고 둘러댄다. 가희는 다소 찜찜한 듯 했지만 어쨌든 더이상은 파고 들지 않는다.

"하여간 한번만 더 차에 딴 년 머리카락 떨어져 있고 막 그랬단 봐. 그냥 그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라 버릴거야"
"뭘 잘라"
"알면서 뭘 물어"



…불금이니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내일 또 현장 가야된다면서 피곤하다고 기어코 집으로 가버린 가희. 지난 주에도 현장 핑계대고 나 주말 내내 외롭게 한 주제에.

"후"

어쨌든 간만에 심장 두근거린 하루였다. 씻고 나니 가희의 카톡 상태명이 "지켜본다" 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으 시발"

아주 약간의 설레임이 그만 본전도 못 찾고 아주 간만 콩알만해졌다. 총무팀 박 과장님이랑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망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소연과 함께 나누었던 갈릴레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추는 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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