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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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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선생님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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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안락의자에 앉아 노을을 맞이하는 하루키 선생님의 조용한 오후. 시계는 어느덧 여섯시를 가리키고
지금은 딱히 식욕이 없는 그는 언제나처럼 창문 밖을 바라보며 그저 그렇게 깊은 사색에 잠긴다.

화려했던 지난 날.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만큼 모든 것을 가졌던 나날이었다. 돈과 명예, 여자… 그 모두 질리도록 가져보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사실 갖고 싶은 것도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 하루하루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지'

생각해보면 칠순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그는 자기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등치해도 좋으리만치 무심한
남자가 된 것 같다. 그건 또 그것대로 흐뭇한 일이다. 그렇게 슬슬 나른함에 잠이 들기 직전…

창문 밖, 집 정문으로 두 여인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대학생 또래로 보이는 그녀들은, 뭐… '언제나처럼'
자신의 팬이겠지.



"…허허허,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설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허허
정말로 그랬다면 내 안 사람이 과연 나를 만나주었을까요? 허허허"

하루키 선생님의 웃음에 그녀 둘은 또 입을 가리면서 웃는데 그 싱그러운 모습에서 하루키는 청춘의 아름
다움을 새삼 느꼈다. 아내가 내온 다과를 함께 먹으면서 자신의 집을 찾아온 어린 학생 팬들, 혹은 자신의
오랜 팬들과 함께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것은 그 인생 말년 최고의 낙이다.

"그런데 둘은 섹스는 잘 하고 지내나요?"

스트레이트한 질문. 늙은 소설가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들은 당혹스러울 법도 하나 '과연'
그의 팬답게 거침없이 답이 나왔다.

"저는 남자친구랑 2년 차라 간간히 배고프지 않을 정도만 하면서 지내고, 얘는 굶은지 엄청 오래 됐어요"

하면서 웃는 미야코. '굶은지 오래됐다'는 소개에 사토미는 미야코의 어깨를 툭 치며 민망해했지만 그런
둘의 모습에 그저 껄껄 웃는 하루키. 그리고 "어휴, 또 주책이야" 하면서 손을 내젓곤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아내.

"젊을 때는 신나게 해둬요. 물이 마를 정도로. 연애든 섹스든 모두 다. 사람이 노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추억을 먹고 사는데, 연애를 많이 해본 노인들은 먹고 살 거리가 풍부한 반면에, 그런게 없는 노인들은
뜯어 먹고 살 추억이 없어서 항상 굶주려 있어요. 그러다 영혼이 잠식되는거고"

짖궂은 노인의 해괴한 질문이, 한 노인의 삶에 대한 체험적 회고로 완성되는 순간에 이르자 그녀들은
또 한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하루키 선생은 언뜻 시계를 보더니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식사들 하고 가실래요?" 하고
넌지시 축객령을 내린다. 눈치가 없는 쪽인 미야코는 "그래도 되나요?" 하고 반색을 띄었지만 재빨리
사토미가 "아니에요, 저희도 가봐야 되요.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하고 그녀를 제지했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쉽지만 그럼 다음에 또 놀러와요. 보다시피 늙어 몸이 불편해서 배웅은
못 해드리겠네" 하고 기약없는 이별 인사를 전하는 하루키. 그녀들은 아쉽지만 그렇게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 탱탱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었다.



그녀들이 되돌아가고, 창가에서 다시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어 창 밖을 바라보니 그녀 둘은
문 밖을 빠져나가 무언가 큰 손동작까지 하면서 재잘대고 큰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본 하루키
선생은 붉은 노을이 어둠에 휩싸이기 직전 그 마지막의, 가장 선명한 색상이 온 세상을 품 안에 끌어
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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