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씨팔!"
큰아버지는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고 나갔다. 발로 걷어차인 현관문 가운데는 움푹 패였고, 폭풍이 지나고 난 듯 엉망이 된 집구석에서 어린 여동생은 눈물을 훔치며 찢기고 내팽겨쳐진 캐릭터 달력을 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조용해진 거실에서 큰아버지의 고함과 폭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목의 할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후"
울다 못한 엄마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장농 한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고, 갑자기 화가 오른 아버지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었다.
"에이 씨발!"
"너 그냥 나랑 이혼해"
그녀가 장농에서 꺼낸 것은 언젠가의 이혼 서류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가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이미 지난 번 일로 부부의 결혼 패물은 모두 사라졌다. 그 흔한 은가락지 하나 없어졌다. 아버지는 몰래 또 큰아버지에게 도장을 찍어주었고, 뒤늦게 그것을 안 엄마는 큰아버지를 소환해 해명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앞뒤 맞지 않는 거짓말에 엄마도 감정이 격해졌고, 아버지도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제서야
"나한테 한 말이랑 다르잖아. 무슨 소리야 또 그게"
하며 멍청하게도 자신이 또 한번 속았음을 가족 앞에서 인증했다. 나이 쉰을 슬슬 바라볼 두 어른의 거친 몸싸움을 어린 아이들이 울며 지켜봤고, 그 둘을 말리던 엄마는 아예 그 둘이 보는 앞에서 집문서를 찢어버렸다. 어차피 이미 그 권리는 남의 것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식칼을 꺼내들고 그냥 다 죽자는 엄마의 행동에 그제서야 형제는 싸움을 멈추었다. 이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진 엄마의 광기 어린 퍼포먼스에 뒤늦게서야 그 나이 먹은 괴물은 현관 옆 벽지에 긴 할퀸 핏자국과 흉측한 발자국을 현관문에 남긴 채 우리 집을 떠났다.
감정이 가라앉자 엄마는 차분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의 설득 끝에 좌절감마저 느끼며 급기야 그녀 앞에 맹세했다. 형제애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기로에서, 드디어, 드디어 그 후자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만약 5년 만, 아니 반 년 만이라도 먼저 그것을 깨달았다면 온 가족의 미래가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변했겠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아라를 고아원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그 미련하고도 폭력적인 기억은 그에게 어떤 자국으로 남았다.
"와, 대박이네"
앨범을 넘기며 마음 속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입으로는 가영이의 어린 시절 모습을 찬양했지만, 그보다 진정으로 마음을 건드렸던 것은 가족여행 사진들이었다.
"여긴 어디야?"
"태국"
그 흔한 해운대, 그 흔한 제주도, 그 흔한 경포대, 그 흔한 63빌딩 사진 하나 없는 나, 그리고 우리 집. 물론 나는 당연히 그 모든 것과 전 세계 곳곳을 수도 없이 싸돌아 다녀봤지만 그 모든 것은 연인 혹은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좋았겠네"
"응 정말 재밌었어. 이때만 해도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였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난데없이 눈물을 글썽이는 가영. 당황스럽고 귀여웠지만,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일가친척의 이야기에 그리움과 행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른 휴지를 뽑아들어 닦아주며 "어휴, 눈물도 많다" 하며 피식 웃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괜히 아프다. 화목한 가족여행이라.
"오빠는 가족여행 다닌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영이가 의문을 품을 정도의 어색한 긴 뜸을 들인 끝에 "우리 집은 나 빼고는 다들 여행을 싫어해서, 중학교 때 이후로 가족여행 다닌 기억이 없어" 하고 대답한다. 그녀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모든 것에 앞서 이렇게 상대의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 있는 구김살 없는 마음이 부럽다. 우울한 상념에 빠질 것 같아 화제를 전환한다.
"가영아, 출출한데 우리 피자 시켜 먹을까?"
"좋아!"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큰아버지가 우리 집에 지운 빚만 아니었다면, 그랬더라면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텐데.
아버지의 엔터프라이즈, 옛날 사진 속 어머니 가슴팍의 화려한 브로치, 내 유년기 마당의 그네, 마당의 미끄럼틀. 앨범 속 사진으로만 확인 가능한 그 행복했던 나날들은 결코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가족 행복을 담보로 한 부부의 헌신과 희생은 다행히도 수렁에 빠질 뻔한 가족 모두의 인생을 구원하고 정상 궤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감내해야 했던 것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뭐하는데. 병원 간다고? 어. 아냐 진짜 그냥 한거야"
밥은 먹었냐, 뭐 힘든 일 있냐, 가영이랑은 잘 지내냐 등등등, 언제나와 같은 그녀의 관심사.
"아니 그냥. 뉴스보다가 사기꾼 뉴스가 보이길래, 문득 영감 생각나서"
그러자 엄마는 한숨부터 내쉰다. 그러고서는 "니 애비가 바보 짓만 안 했어도… 그래도 니 애비 그 이후로 평생을 죽어라 일했잖냐. 빚 싹 다 갚고 그 말단에서 거기까지 올라간거 생각해보면 니 애비도 대단한 양반이야. 사람이 모질지 못하고 정이 많아서, 그리고 순진해서 뭘 몰라서 그랬던거지. 그러니 니도 정신 똑바로 챙기고 돈 날리는거, 보증 스는거 이러는 거는 꿈도 꾸지 말어. 하긴 뭐 니는 약아빠져서 걱정이 없는데, 아라 걔가 걱정이지. 기집애가 지 애비 닮아서 귀가 얇아서" 하며 한바탕 교양을 하신다.
"아 알았어 알았어. 또 잔소리. 됐고, 몸 잘 챙겨. 영감 또 혹시 뭔 허튼데 도장 안 찍어주나 감시 잘하고"
그 말에 장 여사는 "그랬다가는 아주 내가 손가락을 다 짤라다 내버리지 뭐" 하며 웃는다. 그래, 이제는 그녀도 그 긴 어둠의 시간을 두고 웃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그 시간들을 이겨낸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가족 개개인에게 각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고통을 안긴 깊은 상처였지만, 이제는 모두 극복하여 아문 흉터자국에 불과하다.
저녁이 머지않은 늦은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정수리로 받으며, 가영이의 무어라 무어라 하는 카톡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버스 안의 짧은 수면을 만끽한다.
- 끝 -
큰아버지는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고 나갔다. 발로 걷어차인 현관문 가운데는 움푹 패였고, 폭풍이 지나고 난 듯 엉망이 된 집구석에서 어린 여동생은 눈물을 훔치며 찢기고 내팽겨쳐진 캐릭터 달력을 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조용해진 거실에서 큰아버지의 고함과 폭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목의 할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후"
울다 못한 엄마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장농 한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고, 갑자기 화가 오른 아버지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었다.
"에이 씨발!"
"너 그냥 나랑 이혼해"
그녀가 장농에서 꺼낸 것은 언젠가의 이혼 서류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가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이미 지난 번 일로 부부의 결혼 패물은 모두 사라졌다. 그 흔한 은가락지 하나 없어졌다. 아버지는 몰래 또 큰아버지에게 도장을 찍어주었고, 뒤늦게 그것을 안 엄마는 큰아버지를 소환해 해명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앞뒤 맞지 않는 거짓말에 엄마도 감정이 격해졌고, 아버지도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제서야
"나한테 한 말이랑 다르잖아. 무슨 소리야 또 그게"
하며 멍청하게도 자신이 또 한번 속았음을 가족 앞에서 인증했다. 나이 쉰을 슬슬 바라볼 두 어른의 거친 몸싸움을 어린 아이들이 울며 지켜봤고, 그 둘을 말리던 엄마는 아예 그 둘이 보는 앞에서 집문서를 찢어버렸다. 어차피 이미 그 권리는 남의 것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식칼을 꺼내들고 그냥 다 죽자는 엄마의 행동에 그제서야 형제는 싸움을 멈추었다. 이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진 엄마의 광기 어린 퍼포먼스에 뒤늦게서야 그 나이 먹은 괴물은 현관 옆 벽지에 긴 할퀸 핏자국과 흉측한 발자국을 현관문에 남긴 채 우리 집을 떠났다.
감정이 가라앉자 엄마는 차분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의 설득 끝에 좌절감마저 느끼며 급기야 그녀 앞에 맹세했다. 형제애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기로에서, 드디어, 드디어 그 후자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만약 5년 만, 아니 반 년 만이라도 먼저 그것을 깨달았다면 온 가족의 미래가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변했겠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아라를 고아원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그 미련하고도 폭력적인 기억은 그에게 어떤 자국으로 남았다.
자국
"와, 대박이네"
앨범을 넘기며 마음 속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입으로는 가영이의 어린 시절 모습을 찬양했지만, 그보다 진정으로 마음을 건드렸던 것은 가족여행 사진들이었다.
"여긴 어디야?"
"태국"
그 흔한 해운대, 그 흔한 제주도, 그 흔한 경포대, 그 흔한 63빌딩 사진 하나 없는 나, 그리고 우리 집. 물론 나는 당연히 그 모든 것과 전 세계 곳곳을 수도 없이 싸돌아 다녀봤지만 그 모든 것은 연인 혹은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좋았겠네"
"응 정말 재밌었어. 이때만 해도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였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난데없이 눈물을 글썽이는 가영. 당황스럽고 귀여웠지만,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일가친척의 이야기에 그리움과 행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른 휴지를 뽑아들어 닦아주며 "어휴, 눈물도 많다" 하며 피식 웃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괜히 아프다. 화목한 가족여행이라.
"오빠는 가족여행 다닌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영이가 의문을 품을 정도의 어색한 긴 뜸을 들인 끝에 "우리 집은 나 빼고는 다들 여행을 싫어해서, 중학교 때 이후로 가족여행 다닌 기억이 없어" 하고 대답한다. 그녀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모든 것에 앞서 이렇게 상대의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 있는 구김살 없는 마음이 부럽다. 우울한 상념에 빠질 것 같아 화제를 전환한다.
"가영아, 출출한데 우리 피자 시켜 먹을까?"
"좋아!"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큰아버지가 우리 집에 지운 빚만 아니었다면, 그랬더라면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텐데.
아버지의 엔터프라이즈, 옛날 사진 속 어머니 가슴팍의 화려한 브로치, 내 유년기 마당의 그네, 마당의 미끄럼틀. 앨범 속 사진으로만 확인 가능한 그 행복했던 나날들은 결코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가족 행복을 담보로 한 부부의 헌신과 희생은 다행히도 수렁에 빠질 뻔한 가족 모두의 인생을 구원하고 정상 궤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감내해야 했던 것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뭐하는데. 병원 간다고? 어. 아냐 진짜 그냥 한거야"
밥은 먹었냐, 뭐 힘든 일 있냐, 가영이랑은 잘 지내냐 등등등, 언제나와 같은 그녀의 관심사.
"아니 그냥. 뉴스보다가 사기꾼 뉴스가 보이길래, 문득 영감 생각나서"
그러자 엄마는 한숨부터 내쉰다. 그러고서는 "니 애비가 바보 짓만 안 했어도… 그래도 니 애비 그 이후로 평생을 죽어라 일했잖냐. 빚 싹 다 갚고 그 말단에서 거기까지 올라간거 생각해보면 니 애비도 대단한 양반이야. 사람이 모질지 못하고 정이 많아서, 그리고 순진해서 뭘 몰라서 그랬던거지. 그러니 니도 정신 똑바로 챙기고 돈 날리는거, 보증 스는거 이러는 거는 꿈도 꾸지 말어. 하긴 뭐 니는 약아빠져서 걱정이 없는데, 아라 걔가 걱정이지. 기집애가 지 애비 닮아서 귀가 얇아서" 하며 한바탕 교양을 하신다.
"아 알았어 알았어. 또 잔소리. 됐고, 몸 잘 챙겨. 영감 또 혹시 뭔 허튼데 도장 안 찍어주나 감시 잘하고"
그 말에 장 여사는 "그랬다가는 아주 내가 손가락을 다 짤라다 내버리지 뭐" 하며 웃는다. 그래, 이제는 그녀도 그 긴 어둠의 시간을 두고 웃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그 시간들을 이겨낸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가족 개개인에게 각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고통을 안긴 깊은 상처였지만, 이제는 모두 극복하여 아문 흉터자국에 불과하다.
저녁이 머지않은 늦은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정수리로 받으며, 가영이의 무어라 무어라 하는 카톡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버스 안의 짧은 수면을 만끽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