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냉장고 교도소. 오늘도 그 안의 온갖 흉악한 밥도둑놈들이 하릴없이 수다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
"야, 너는 근데 여기 왜 들어왔냐? 내가 진짜 한달째 여기 들락거리면서도 구운 스팸이 들어오는건 첨 봤다. 스팸은 무조건 한끼컷 아니냐?"
밥절도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냉장고에 갇힌 깻잎절임 할배가 새로 들어온 구운 스팸을 향해 물었다. 스팸은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다 "갈비찜에 밀렸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칸 안의 모두가 "하여간에 굽는 놈 위에 비싼 놈이라니까" 하고 낄낄댔다. 그러나 그 작은 소란에도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밥강도 장조림이 말했다.
"다들 조용히 안 하냐? 시끄러워 뒤지겠네 진짜"
그러나 그 아래 칸에 조용히 있던 '대도' 간장게장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따 이제는 여 냉장고서 지방 허옇게 말라붙은 퇴물도 어깨 힘 팍 주는구마잉, 재미쓰브러. 나가 이 집게발로 좍좍 결대로 찢어벌랑게"
장조림과 간장게장. 각각 육고기파와 해산물파의 행동대장격인 둘이 으르렁 대자, 냉장고 안에는 새삼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타파 사무실 안에 있던 가지무침 아재가 소리쳤다.
"어디 도동노무 쉐리들이 입을 열고 있어? 엉?"
가지무침.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시퍼러죽죽해져 다시는 젓가락 댈 일이 없어지는 반찬계의 로보캅, 식탁 위의 투갑스, 밥상적 더티 해리. 이 밥경찰이 타파통을 쾅쾅치며 소리치자 이제는 냉장고의 위잉- 하는 모터 소리만이 작게 울릴 뿐이었다.
그러나 문짝 한 켠에서 조용히 있던 고추장 성님이 "거 좀 대충 삽시다, 원 지랄들도" 하며 무게를 잡았다. 고추장 성님. 그가 누군가. 육백년 전 임진란과 함께 일본에서 전래된 이래 한반도 밥상을 주름잡은 밥피아, 고추 가문의 적장자로, 그저 그가 한번 몸을 발랐다 하면 그 어떤 난다긴다하는 반찬들도 그저 그의 영향력 아래 지배받게 되는 거물. 쌈장, 초고추장 등의 형제들도 다들 한가락 하는 밥도둑 지원책들 아닌가.
특히 그의 진정한 힘은 참기름을 동원해 밥경찰 가지, 밥형사 고사리 같은 경찰측 인물들은 물론, 밥찰청장 오이지마저도 주무르는 강력한 영향력에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맛이 없다한들, 하다못해 '버려져서라도' 냉장고를 탈출할 수 있는 다른 반찬들과 다르게, 먹히기 전까지는 이 지옥같은 냉장고를 벗어날 수 없도록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장류'라는 사실이 다른 반찬들에게 새삼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문 그 순간, 장조림이 코를 킁킁대며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무슨 냄새야"
다들 코를 킁킁댄 순간, 스팸이 말했다.
"똥국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밥매치기 오뎅볶음이 스팸의 기름친 몸을 툭 치며 웃었다.
"미친 놈아, 뜬금없이 밥모총장이 왜 와. 여기가 무슨 군부대냐. 찌개파 아냐. 된장 성님"
"아, 그렇구나"
둘의 조잘거림을 뒤로 하며, 문쪽 윗줄의 대머리들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계란파 애들이었다.
"아따 간만에 된장 성님 오셨구마잉. 오늘 또 한번 주인 아재 아가리 속에서 뜨겁게 섞여 부러야제"
"시벌 또 가오 떨어지게 후라이, 쓰니싸이드 안 허고 스크램블인가 뭔가 쳐하면 피곤헌디"
"뭔 소리여, 남자는 찜이제"
"왐마? 계란은 말이제, 계란말이!"
그 어느 때보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수다였음에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계란파… 밥카르텔 '치킨' 가문의 막내아들들인 그들은 과연 냉장고 안, 식탁 위의 그 어떤 반찬들과 어울려도 전혀 밀리지 않고 항상 충실히 밥을 해치워내는 똘똘한 녀석들인고로,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고추장 성님은 특히나 자애로운 얼굴로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찌개파 된장 형님이랑 똥국 밥모총장은 어쩌다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건가요? 원래 같은 집안 아니에요?"
스팸의 질문에 늙은 대도 '깻잎절임' 할배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둘이 원래 쌍둥인데, 저 찌개파 된장이는 욕심이 많어. 그래서 지가 두부며 팽이버섯이며 버섯이며 싹다 가져다가 쫄여대니 밥도동놈이 된거고, 똥국이는 그냥 시벌 맹물에 된장이나 있는대로 풀어다가 다시다도 없이 마냥 끓이니까는 짜든가 싱겁든가 맛이라고는 쥐좆만큼도 없어진거고. 그러니 된장 가문 출신 주제에 훔치라는 밥은 못 훔치고 외려 그릇에 퍼놓은 밥도 다시 돌려놓는 밥경찰, 밥군대 짓을 하게 된건데, 이게 수십년을 그 짓을 하니 이제는 짬밥으로도 그냥 밥모총장이 된거지. 아마 얼마 뒤면 먹방부장관도 할걸"
"안타깝네요"
하지만 깻잎절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내가 거까지 가봤으면 멋있는거 아냐? 똥국이 딱 나서면 그 뒤에 조기튀김에, 코다리에 해물비빔에, 아주 쟁쟁하잖아? 얘들만 믿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쌀 부족할 일은 영원히 없겠구나 생각도 딱 들고."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고, 역시나 계란파 넷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 부럽네"
다시 냉장고 문이 닫기고, 잡범 멸치볶음이 탄식을 쏟아냈다. 갓 볶아진 직후에는 화려하게 고슬고슬한 밥을 쓸어가며 아주 잠깐 빛나지만, 한번 냉장고 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잘 나갈 수도 없고, 나간다 해도 젓가락질의 성은은 입기 어려운 그의 탄식이었기에 모두들 씁쓸하게 혀를 찼다. 특히나 그가 그 다음 말에 모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꿀맛무죄, 노맛유죄네 염병할"
밥을 아무리 많이 훔쳐대도 맛만 있으면 아예 냉장고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곧바로 빠져나가는가 하면, 밥은 생전에 딱 한 숟갈만 훔쳐도 맛이 없다는 이유로 한번 냉장고에 구속되면 쉬어 터져나가다 못해 곰팡이 피는 날까지 냉장고 속에 쳐박히거나 그저 밥상만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노맛반찬들의 신세.
"에휴"
다들 긴 한숨을 또 한번 내쉬었다. 특히나 지난 주에, 세상에 '보스' 양념치킨이 냉장고에 들어왔을 때는 다들 기겁을 했다. 아예 쌀을 밀어내고 식사를 대신하다 못해 '치밥'이라는 형태로 밥알까지 싹싹 털어가던 악질밥기꾼이 냉장고행이라니?
"오오냐, 세상이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나보다, 영양가가 중요하지, 어? 맛이 중요해? 망할 통풍 유발자 새끼"
하며 마늘쫑 특별밥검사가 통쾌하다는 듯 이를 북북 갈았음에도 그러나 허무하게 다음 날 아침 유유히 냉장고를 빠져나가 전자렌지 호텔로 가는 양념치킨의 모습을 보고 다들 온갖 욕을 다 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야, 잠깐만. 이거 또 무슨 냄새야? 어?"
"잠깐만 잠깐만!"
"오, 삼겹살 냄새다"
삼겹살 냄새가 풍기자, 신선칸 한 구석에서 다 죽어가던 특수밥강도 상추와 깻잎이 갑자기 일어나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오 이대로 뒤지는 줄 알았는데"
"아 진짜…상추 형님…"
"야 시발 진짜 뒤지라는 법은 없구나"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쩌리들이지만, 대한제육회와 연줄이 있는 그들은 쌈밥특별법에 의거하여 구제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들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밥 다됐다"
주인 아지매의 목소리에 냉장고의 모두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냉장고의 문이 열리면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있으니까. 잠시 후 냉장고 문이 열리고, 하나둘씩 식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와"
깻잎절임 할배가 놀랍게도 1순위로 뽑혀 나갔고, 역시나 상추와 깻잎이 뒤따라 나간 고추장 성님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뎅볶음이 식탁으로 향하고, 그 아래칸의 장조림과 간장게장이 조금 긴장을 시작했다. 나름 밥털이계의 거물들인데 식탁으로 향하지도 못하면 쪽팔린 일. 그러나 역시나 둘은 곧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또 놀랍게도 특별밥검사 마늘쫑이 식탁으로 향하자 구운스팸은 놀라 "와, 마늘쫑 저 분이…" 하며 감탄했지만, 옆에 있던 양파절임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차피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거야. 우리 같은 밥찰은 짬년퇴직 당할 때까지 그냥 쭉 냉장고 왔다갔다만 하는 거라고"
"그렇군요"
한편 구운 스팸은 반나절만에 꽤나 꾸덕꾸덕해진 자기 몸을 보며 '과연 내가 입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 올까' 하며 불안함을 느꼈다. 어쨌거나 다른 양반들은 그래도 다들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데, 자기만 불과 반나절만에 초라해진 느낌이다.
'시발'
게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깻잎절임' 할배도 그러지 않았던가. 냉장고 생활 한달만에 구운 스팸이 냉장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 봤다고. 부끄러웠다. 왜 나만. 아까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렸을 때 식탁 위로 힐끔 보인 연쇄쌀인마 김자반을 보노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나만 냉장고에 쳐박혀야 하나. 나보다 더 악질적으로 밥을 털어댄 놈들도 많은데.
'끝난건가'
스스로가 새삼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집은 벌써 아침에는 갈비찜, 점심에는 삼겹살을 먹었다. 저녁에 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또 말라 비틀어진 스팸을 다시 기름 둘러 굽기까지 하면서 되살려줄까? 게다가 냉장고 안에 반나절 있는 동안 스멀스멀 배어버린 김치냄새에는 덜컥 겁까지 났다.
'나 완전히 좆된거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하루 이틀 더 말라가다가, 비참하게 쓰레기통으로 짬 당하는게 마지막은 아닐까. 허무했다. 풍운의 꿈을 안고, 통조림 속에서 뜨겁게 열처리까지 견뎠는데. 누군가의 뱃 속으로 들어가 영양분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는데.
'흑…'
구운 스팸은 자기도 모르게 비참한 기름을 흘렸다. 아니 이젠 스스로를 '구운 스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말라 비틀어진 스팸'이 보다 정확한 이름이리라.
"얘들아"
냉장고 문이 다시 열리고, 고추장 성님이 들어왔다. 전체 450g에서 그동안 먹을만큼 먹고 오늘 추가로 또 100g이 덜어져 이제 150g만이 남았지만, 그래고 최소 몇 주, 어쩌면 몇 달은 더 냉장고에 갇혀 있어야 되는 분량.
"다시 오셨습니까 형님"
"아 뭐."
씁쓸하게 웃는 고추장의 모습.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그의 모습도, 새삼 가까이에서 보니 초라하게 느껴졌다. 과거의 영광은 지나갔다. '양푼에 비빔밥'으로 남은 찬밥 전부와 식탁의 잔반을 쓸어담던 그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완전히 기업화 된 떡볶이 산업의 '쌀떡볶이'가 아니었더라면 밥피아 고추장 가문 자체가 이미 한참 전에 쌀도둑 명가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것도 업소용으로 납품되는 14kg 대용량 엘리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사실 저런 식의 어중간한 가정용 고추장은 냉장고 한켠에 쳐박혀 언제 불려질지도 모르는 처량한 신세로 지내는게 대부분 아닌가. 가끔 지보다도 어린 풋고추한테 찍히기나 하고 말이다. 쪽팔리게.
'하'
우울해졌다. 구운 스팸은 고개를 떨구고, 이대로라면 자기도 계란옷을 입기 전에는 사람 입 속에 들어갈 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1500원 어육소세지들이나 하는 짓을 '스팸' 씩이나 되어서 해야한다니 기가 찼다. 그때였다.
"이거 고추장 버리자"
37살 백수인 이 집 큰 아들의 목소리. 정말로 냉장고 안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직 고추장의 형기는 150g 가까이 남았다. 그런데 출소라니? 고추장 본인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툭하면 "아 반찬 이거 쉬었네" 식으로 깔끔을 떨어 수많은 반찬들을 짬시킨 밥법원장 큰아들의 양형사유가 들려왔다.
"이거 봐. 아까 재영이가 여 고추장통에다가 고기를 찍더라고. 이거이거 기름칠을 해놔서 이거 다 허옇게 말라붙어 굳었잖아. 드럽게"
오늘 이 집에 손님으로 온 둘째 아들의 어린 막내딸이 고추장에 잔뜩 묻힌 삼겹살 기름. 그것이 냉장고 안에서 허옇게 말라붙은 것이었다. 확실히 좀 보기에는 영 그렇긴 했지만, 식통령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애기가 먹다 그런게 뭐. 그럼 거기만 걷어내면 되지"
그럼에도 큰아들은 완고했다.
"아 싫어. 걍 버려"
"에휴 유난도 유난도. 알았어, 이따 장 보러 갈 때 새로 고추장 사올게. 버려"
"오케이, 굿바이"
최종 선고가 났다. 고추장의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였다. 기적이었다. 물론 어느 반찬에게 있어서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는 치욕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추운 냉장고 안에서 기나긴 세월을 묵어야만 했던 고추장에게 있어서는 드디어 주어진 자유였다.
'와'
고추장이 영어의 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본 구운 스팸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 맞다"
고추장을 버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던 큰아들이, 스팸 구워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녀석을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밥이랑 먹어, 그 짠 걸 그냥 먹니"
식통령의 제지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괜찮어, 맛있어"
냉장고 안에서 식어 빠지고 말랐어도 그래도 과연 스팸은 스팸. 큰아들은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채로 남은 네 조각의 구운 스팸조각을 완식했다. 구운 스팸의 꿈은 결국 이뤄진 것이다.
"흐흐, 흐흐흐, 잘됐구만, 잘됐어"
열무김치를 꺼내기 위해 식통령이 잠깐 연 틈으로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냉장고 옆 건물의 김치트라즈 김치전용수용소의 쉰김치 수용소장은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번듯한 밥무부 소속이지만, 한때는 그에게도 화려한 밥도둑의 시절이 있었다. 김장날 수육과 함께 제대로 한탕 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역시나 한물 간 밥도둑들이 꿈꾸는 냉장고 탈옥의 꿈에서 짜릿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형님"
그때 쉰김치에게 연락이 왔다. 참기름군이었다.
"어, 왠일이야"
물론, 쉰김치에게 참기름이 연락 왔다는 자체만으로 무슨 의도인지 감이 잡히는 일이었지만, 애써 쉰김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른 척 했다. 그러자 참기름이 낄낄댔다.
"참 형님도. 이제 뭐 밥무부 소속됐다고 저 피하시는거에요?"
"으흠, 아니 내가 피하긴 뭘."
참기름은 미끌미끌 한참을 딴 소리만 하며 이야기를 돌리다가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제대로 한탕합시다. 이미 팀은 다 꾸려놨어요"
"누구"
"누구긴 누굽니까. 백설탕이, 참치, 마늘, 고추, 깨 다 팀 완성시켜놨어요. 형님만 오시면 됩니다. 볶음김치 한판 제대로 뛰어서 딱 두 공기만 텁시다. 그리고 딱 손 터는걸로"
전설의 밥행털이 팀, 볶음김치.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보내던 쉰 김치에게는 짜릿한 제안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그 외에도 '김치볶음밥' 등의 보장된 미래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단독밥상보다는, 역시나 밥상 위에서 다른 쟁쟁한 반찬들을 제껴가며 새하얀 흰밥을 털어대는 그 화려한 짜릿함이 매력적이었다.
"후, 그래. 근데 다른 애들은 몰라도 참치 걔는 전과 있잖아. 고추 그 새끼도 좀 꺼림칙한데가 있고"
누가 뭐래도 볶음김치의 예술은 '결백'에 있었다. 백설탕, 마늘, 깨, 참기름 등, 누가 봐도 밥도둑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평범한 소시민들이 쉰김치와 한 팀이 되었을 때 지독한 밥도둑, 밥행털이로 변신한다는 것이 매력인데, 굳이 참치나 고추 같은 밥도둑 전과 있는 놈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도 그런데요, 형님, 목표가 최소 밥 한 끼 반입니다. 만전을 기하자는거죠. 식감이랑 고기 먹는다는 정서적 쾌감 때문에라도 참치 끼운거고, 또 고추 걔가 그래도 끼어들어야 더 맛나잖아요. 인정하시잖아요"
"후, 그래 알았다. 언제냐?"
"당장 오늘 저녁입니다. 아침에 갈비찜, 점심에 삼겹살 먹어서 얘네 오늘 완전 뱃 속 니글니글 할 겁니다. 저녁에 우리 딱 출동하면, 게임 끝이죠. 두 그릇 보장합니다"
쉰김치의 잎사귀가 실룩였다.
"흐, 그래. 알았다. 이따보자"
"예 형님"
…그렇게, 오늘도 밥도둑들은 화려한 한탕의 꿈을 꾼다. 포만과 과식을 기원하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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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근데 여기 왜 들어왔냐? 내가 진짜 한달째 여기 들락거리면서도 구운 스팸이 들어오는건 첨 봤다. 스팸은 무조건 한끼컷 아니냐?"
밥절도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냉장고에 갇힌 깻잎절임 할배가 새로 들어온 구운 스팸을 향해 물었다. 스팸은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다 "갈비찜에 밀렸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칸 안의 모두가 "하여간에 굽는 놈 위에 비싼 놈이라니까" 하고 낄낄댔다. 그러나 그 작은 소란에도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밥강도 장조림이 말했다.
"다들 조용히 안 하냐? 시끄러워 뒤지겠네 진짜"
그러나 그 아래 칸에 조용히 있던 '대도' 간장게장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따 이제는 여 냉장고서 지방 허옇게 말라붙은 퇴물도 어깨 힘 팍 주는구마잉, 재미쓰브러. 나가 이 집게발로 좍좍 결대로 찢어벌랑게"
장조림과 간장게장. 각각 육고기파와 해산물파의 행동대장격인 둘이 으르렁 대자, 냉장고 안에는 새삼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타파 사무실 안에 있던 가지무침 아재가 소리쳤다.
"어디 도동노무 쉐리들이 입을 열고 있어? 엉?"
가지무침.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시퍼러죽죽해져 다시는 젓가락 댈 일이 없어지는 반찬계의 로보캅, 식탁 위의 투갑스, 밥상적 더티 해리. 이 밥경찰이 타파통을 쾅쾅치며 소리치자 이제는 냉장고의 위잉- 하는 모터 소리만이 작게 울릴 뿐이었다.
그러나 문짝 한 켠에서 조용히 있던 고추장 성님이 "거 좀 대충 삽시다, 원 지랄들도" 하며 무게를 잡았다. 고추장 성님. 그가 누군가. 육백년 전 임진란과 함께 일본에서 전래된 이래 한반도 밥상을 주름잡은 밥피아, 고추 가문의 적장자로, 그저 그가 한번 몸을 발랐다 하면 그 어떤 난다긴다하는 반찬들도 그저 그의 영향력 아래 지배받게 되는 거물. 쌈장, 초고추장 등의 형제들도 다들 한가락 하는 밥도둑 지원책들 아닌가.
특히 그의 진정한 힘은 참기름을 동원해 밥경찰 가지, 밥형사 고사리 같은 경찰측 인물들은 물론, 밥찰청장 오이지마저도 주무르는 강력한 영향력에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맛이 없다한들, 하다못해 '버려져서라도' 냉장고를 탈출할 수 있는 다른 반찬들과 다르게, 먹히기 전까지는 이 지옥같은 냉장고를 벗어날 수 없도록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장류'라는 사실이 다른 반찬들에게 새삼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문 그 순간, 장조림이 코를 킁킁대며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무슨 냄새야"
다들 코를 킁킁댄 순간, 스팸이 말했다.
"똥국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밥매치기 오뎅볶음이 스팸의 기름친 몸을 툭 치며 웃었다.
"미친 놈아, 뜬금없이 밥모총장이 왜 와. 여기가 무슨 군부대냐. 찌개파 아냐. 된장 성님"
"아, 그렇구나"
둘의 조잘거림을 뒤로 하며, 문쪽 윗줄의 대머리들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계란파 애들이었다.
"아따 간만에 된장 성님 오셨구마잉. 오늘 또 한번 주인 아재 아가리 속에서 뜨겁게 섞여 부러야제"
"시벌 또 가오 떨어지게 후라이, 쓰니싸이드 안 허고 스크램블인가 뭔가 쳐하면 피곤헌디"
"뭔 소리여, 남자는 찜이제"
"왐마? 계란은 말이제, 계란말이!"
그 어느 때보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수다였음에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계란파… 밥카르텔 '치킨' 가문의 막내아들들인 그들은 과연 냉장고 안, 식탁 위의 그 어떤 반찬들과 어울려도 전혀 밀리지 않고 항상 충실히 밥을 해치워내는 똘똘한 녀석들인고로,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고추장 성님은 특히나 자애로운 얼굴로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찌개파 된장 형님이랑 똥국 밥모총장은 어쩌다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건가요? 원래 같은 집안 아니에요?"
스팸의 질문에 늙은 대도 '깻잎절임' 할배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둘이 원래 쌍둥인데, 저 찌개파 된장이는 욕심이 많어. 그래서 지가 두부며 팽이버섯이며 버섯이며 싹다 가져다가 쫄여대니 밥도동놈이 된거고, 똥국이는 그냥 시벌 맹물에 된장이나 있는대로 풀어다가 다시다도 없이 마냥 끓이니까는 짜든가 싱겁든가 맛이라고는 쥐좆만큼도 없어진거고. 그러니 된장 가문 출신 주제에 훔치라는 밥은 못 훔치고 외려 그릇에 퍼놓은 밥도 다시 돌려놓는 밥경찰, 밥군대 짓을 하게 된건데, 이게 수십년을 그 짓을 하니 이제는 짬밥으로도 그냥 밥모총장이 된거지. 아마 얼마 뒤면 먹방부장관도 할걸"
"안타깝네요"
하지만 깻잎절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내가 거까지 가봤으면 멋있는거 아냐? 똥국이 딱 나서면 그 뒤에 조기튀김에, 코다리에 해물비빔에, 아주 쟁쟁하잖아? 얘들만 믿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쌀 부족할 일은 영원히 없겠구나 생각도 딱 들고."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고, 역시나 계란파 넷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 부럽네"
다시 냉장고 문이 닫기고, 잡범 멸치볶음이 탄식을 쏟아냈다. 갓 볶아진 직후에는 화려하게 고슬고슬한 밥을 쓸어가며 아주 잠깐 빛나지만, 한번 냉장고 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잘 나갈 수도 없고, 나간다 해도 젓가락질의 성은은 입기 어려운 그의 탄식이었기에 모두들 씁쓸하게 혀를 찼다. 특히나 그가 그 다음 말에 모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꿀맛무죄, 노맛유죄네 염병할"
밥을 아무리 많이 훔쳐대도 맛만 있으면 아예 냉장고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곧바로 빠져나가는가 하면, 밥은 생전에 딱 한 숟갈만 훔쳐도 맛이 없다는 이유로 한번 냉장고에 구속되면 쉬어 터져나가다 못해 곰팡이 피는 날까지 냉장고 속에 쳐박히거나 그저 밥상만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노맛반찬들의 신세.
"에휴"
다들 긴 한숨을 또 한번 내쉬었다. 특히나 지난 주에, 세상에 '보스' 양념치킨이 냉장고에 들어왔을 때는 다들 기겁을 했다. 아예 쌀을 밀어내고 식사를 대신하다 못해 '치밥'이라는 형태로 밥알까지 싹싹 털어가던 악질밥기꾼이 냉장고행이라니?
"오오냐, 세상이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나보다, 영양가가 중요하지, 어? 맛이 중요해? 망할 통풍 유발자 새끼"
하며 마늘쫑 특별밥검사가 통쾌하다는 듯 이를 북북 갈았음에도 그러나 허무하게 다음 날 아침 유유히 냉장고를 빠져나가 전자렌지 호텔로 가는 양념치킨의 모습을 보고 다들 온갖 욕을 다 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야, 잠깐만. 이거 또 무슨 냄새야? 어?"
"잠깐만 잠깐만!"
"오, 삼겹살 냄새다"
삼겹살 냄새가 풍기자, 신선칸 한 구석에서 다 죽어가던 특수밥강도 상추와 깻잎이 갑자기 일어나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오 이대로 뒤지는 줄 알았는데"
"아 진짜…상추 형님…"
"야 시발 진짜 뒤지라는 법은 없구나"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쩌리들이지만, 대한제육회와 연줄이 있는 그들은 쌈밥특별법에 의거하여 구제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들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밥 다됐다"
주인 아지매의 목소리에 냉장고의 모두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냉장고의 문이 열리면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있으니까. 잠시 후 냉장고 문이 열리고, 하나둘씩 식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와"
깻잎절임 할배가 놀랍게도 1순위로 뽑혀 나갔고, 역시나 상추와 깻잎이 뒤따라 나간 고추장 성님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뎅볶음이 식탁으로 향하고, 그 아래칸의 장조림과 간장게장이 조금 긴장을 시작했다. 나름 밥털이계의 거물들인데 식탁으로 향하지도 못하면 쪽팔린 일. 그러나 역시나 둘은 곧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또 놀랍게도 특별밥검사 마늘쫑이 식탁으로 향하자 구운스팸은 놀라 "와, 마늘쫑 저 분이…" 하며 감탄했지만, 옆에 있던 양파절임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차피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거야. 우리 같은 밥찰은 짬년퇴직 당할 때까지 그냥 쭉 냉장고 왔다갔다만 하는 거라고"
"그렇군요"
한편 구운 스팸은 반나절만에 꽤나 꾸덕꾸덕해진 자기 몸을 보며 '과연 내가 입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 올까' 하며 불안함을 느꼈다. 어쨌거나 다른 양반들은 그래도 다들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데, 자기만 불과 반나절만에 초라해진 느낌이다.
'시발'
게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깻잎절임' 할배도 그러지 않았던가. 냉장고 생활 한달만에 구운 스팸이 냉장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 봤다고. 부끄러웠다. 왜 나만. 아까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렸을 때 식탁 위로 힐끔 보인 연쇄쌀인마 김자반을 보노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나만 냉장고에 쳐박혀야 하나. 나보다 더 악질적으로 밥을 털어댄 놈들도 많은데.
'끝난건가'
스스로가 새삼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집은 벌써 아침에는 갈비찜, 점심에는 삼겹살을 먹었다. 저녁에 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또 말라 비틀어진 스팸을 다시 기름 둘러 굽기까지 하면서 되살려줄까? 게다가 냉장고 안에 반나절 있는 동안 스멀스멀 배어버린 김치냄새에는 덜컥 겁까지 났다.
'나 완전히 좆된거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하루 이틀 더 말라가다가, 비참하게 쓰레기통으로 짬 당하는게 마지막은 아닐까. 허무했다. 풍운의 꿈을 안고, 통조림 속에서 뜨겁게 열처리까지 견뎠는데. 누군가의 뱃 속으로 들어가 영양분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는데.
'흑…'
구운 스팸은 자기도 모르게 비참한 기름을 흘렸다. 아니 이젠 스스로를 '구운 스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말라 비틀어진 스팸'이 보다 정확한 이름이리라.
"얘들아"
냉장고 문이 다시 열리고, 고추장 성님이 들어왔다. 전체 450g에서 그동안 먹을만큼 먹고 오늘 추가로 또 100g이 덜어져 이제 150g만이 남았지만, 그래고 최소 몇 주, 어쩌면 몇 달은 더 냉장고에 갇혀 있어야 되는 분량.
"다시 오셨습니까 형님"
"아 뭐."
씁쓸하게 웃는 고추장의 모습.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그의 모습도, 새삼 가까이에서 보니 초라하게 느껴졌다. 과거의 영광은 지나갔다. '양푼에 비빔밥'으로 남은 찬밥 전부와 식탁의 잔반을 쓸어담던 그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완전히 기업화 된 떡볶이 산업의 '쌀떡볶이'가 아니었더라면 밥피아 고추장 가문 자체가 이미 한참 전에 쌀도둑 명가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것도 업소용으로 납품되는 14kg 대용량 엘리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사실 저런 식의 어중간한 가정용 고추장은 냉장고 한켠에 쳐박혀 언제 불려질지도 모르는 처량한 신세로 지내는게 대부분 아닌가. 가끔 지보다도 어린 풋고추한테 찍히기나 하고 말이다. 쪽팔리게.
'하'
우울해졌다. 구운 스팸은 고개를 떨구고, 이대로라면 자기도 계란옷을 입기 전에는 사람 입 속에 들어갈 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1500원 어육소세지들이나 하는 짓을 '스팸' 씩이나 되어서 해야한다니 기가 찼다. 그때였다.
"이거 고추장 버리자"
37살 백수인 이 집 큰 아들의 목소리. 정말로 냉장고 안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직 고추장의 형기는 150g 가까이 남았다. 그런데 출소라니? 고추장 본인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툭하면 "아 반찬 이거 쉬었네" 식으로 깔끔을 떨어 수많은 반찬들을 짬시킨 밥법원장 큰아들의 양형사유가 들려왔다.
"이거 봐. 아까 재영이가 여 고추장통에다가 고기를 찍더라고. 이거이거 기름칠을 해놔서 이거 다 허옇게 말라붙어 굳었잖아. 드럽게"
오늘 이 집에 손님으로 온 둘째 아들의 어린 막내딸이 고추장에 잔뜩 묻힌 삼겹살 기름. 그것이 냉장고 안에서 허옇게 말라붙은 것이었다. 확실히 좀 보기에는 영 그렇긴 했지만, 식통령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애기가 먹다 그런게 뭐. 그럼 거기만 걷어내면 되지"
그럼에도 큰아들은 완고했다.
"아 싫어. 걍 버려"
"에휴 유난도 유난도. 알았어, 이따 장 보러 갈 때 새로 고추장 사올게. 버려"
"오케이, 굿바이"
최종 선고가 났다. 고추장의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였다. 기적이었다. 물론 어느 반찬에게 있어서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는 치욕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추운 냉장고 안에서 기나긴 세월을 묵어야만 했던 고추장에게 있어서는 드디어 주어진 자유였다.
'와'
고추장이 영어의 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본 구운 스팸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 맞다"
고추장을 버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던 큰아들이, 스팸 구워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녀석을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밥이랑 먹어, 그 짠 걸 그냥 먹니"
식통령의 제지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괜찮어, 맛있어"
냉장고 안에서 식어 빠지고 말랐어도 그래도 과연 스팸은 스팸. 큰아들은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채로 남은 네 조각의 구운 스팸조각을 완식했다. 구운 스팸의 꿈은 결국 이뤄진 것이다.
"흐흐, 흐흐흐, 잘됐구만, 잘됐어"
열무김치를 꺼내기 위해 식통령이 잠깐 연 틈으로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냉장고 옆 건물의 김치트라즈 김치전용수용소의 쉰김치 수용소장은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번듯한 밥무부 소속이지만, 한때는 그에게도 화려한 밥도둑의 시절이 있었다. 김장날 수육과 함께 제대로 한탕 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역시나 한물 간 밥도둑들이 꿈꾸는 냉장고 탈옥의 꿈에서 짜릿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형님"
그때 쉰김치에게 연락이 왔다. 참기름군이었다.
"어, 왠일이야"
물론, 쉰김치에게 참기름이 연락 왔다는 자체만으로 무슨 의도인지 감이 잡히는 일이었지만, 애써 쉰김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른 척 했다. 그러자 참기름이 낄낄댔다.
"참 형님도. 이제 뭐 밥무부 소속됐다고 저 피하시는거에요?"
"으흠, 아니 내가 피하긴 뭘."
참기름은 미끌미끌 한참을 딴 소리만 하며 이야기를 돌리다가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제대로 한탕합시다. 이미 팀은 다 꾸려놨어요"
"누구"
"누구긴 누굽니까. 백설탕이, 참치, 마늘, 고추, 깨 다 팀 완성시켜놨어요. 형님만 오시면 됩니다. 볶음김치 한판 제대로 뛰어서 딱 두 공기만 텁시다. 그리고 딱 손 터는걸로"
전설의 밥행털이 팀, 볶음김치.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보내던 쉰 김치에게는 짜릿한 제안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그 외에도 '김치볶음밥' 등의 보장된 미래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단독밥상보다는, 역시나 밥상 위에서 다른 쟁쟁한 반찬들을 제껴가며 새하얀 흰밥을 털어대는 그 화려한 짜릿함이 매력적이었다.
"후, 그래. 근데 다른 애들은 몰라도 참치 걔는 전과 있잖아. 고추 그 새끼도 좀 꺼림칙한데가 있고"
누가 뭐래도 볶음김치의 예술은 '결백'에 있었다. 백설탕, 마늘, 깨, 참기름 등, 누가 봐도 밥도둑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평범한 소시민들이 쉰김치와 한 팀이 되었을 때 지독한 밥도둑, 밥행털이로 변신한다는 것이 매력인데, 굳이 참치나 고추 같은 밥도둑 전과 있는 놈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도 그런데요, 형님, 목표가 최소 밥 한 끼 반입니다. 만전을 기하자는거죠. 식감이랑 고기 먹는다는 정서적 쾌감 때문에라도 참치 끼운거고, 또 고추 걔가 그래도 끼어들어야 더 맛나잖아요. 인정하시잖아요"
"후, 그래 알았다. 언제냐?"
"당장 오늘 저녁입니다. 아침에 갈비찜, 점심에 삼겹살 먹어서 얘네 오늘 완전 뱃 속 니글니글 할 겁니다. 저녁에 우리 딱 출동하면, 게임 끝이죠. 두 그릇 보장합니다"
쉰김치의 잎사귀가 실룩였다.
"흐, 그래. 알았다. 이따보자"
"예 형님"
…그렇게, 오늘도 밥도둑들은 화려한 한탕의 꿈을 꾼다. 포만과 과식을 기원하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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