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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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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색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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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산행이건만 매섭게 추운 날씨가 마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허나 또 추우면 얼마나 추우랴 하는 생각으로 그저 채비만 단단히 할 따름이다.

"허허"

두툼한 벙거지까지 뒤집어 쓰고 나니 그 몰골이 조금은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멋쩍임이 함께 하지만, 모름지기 산에 대한 준비는 과함이 모자름보다야 항시 나은 법이렸다.

"웃챠"

산 초입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산을 오르노라니, 얼마 채 오르지도 않았건만 숨이 가쁘고 몸이 무겁다. 어깨의 등짐에서 물통을 꺼내 허리춤 카라비너에 결속하고 나니 조금 흉하고 거슬리긴 하되 손이 편하고 심적으로 물이 덜 고프다.

"후아"

야트마한 산이라 한참을 정신이 없이 오르니 벌써 정상까지 2.3km만이 남았다. 산길로 2키로야 내 걸음으로 그리 짧은 길이 아니긴 하다만 사람 없고 한가로운 사색의 시간이 새삼 짦게 느껴져 아쉬움만이 진해진다.




정상에 올라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바위에 살짝 앉았다가, 엉덩이가 너무 시려워 결국 귀찮음을 무릎쓰고 배낭에서 깔개를 꺼내 앉는다.

"허허, 참"

구태여 별 의미도 없는 혼자만의 감탄사, 추임새를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외로움의 탓도 있겠지만, 어딘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두려움에 대한 작은 반항이다. 이 놈의 두려움은 산의 공포라기 보다는 그저 삶에 대한 공포로, 산에 오르기 전부터 내 곁을 감싸고 있는 그 무엇이다.

아내와는 별거를 하였고, 자식은 일찌기 세상을 떠났다. 가진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지마는 남 앞에서 기가 죽지는 않는다. 거기까지 다달으면 결국 그 사람의 혼은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미 나 역시 청춘의 색은 바래다 못해 잎사귀 떨어진 이 산의 나무들과 같지만 그래도 굳건히 바닥에 박은 뿌리처럼 세상에 그 기운은 뻗치고 싶은 것이다.

"나 아직 안 죽었다아아아아!"

밑도 끝도 없는 외침. 그 멋적음에 나 나름의 호연지기라 애써 변명해 보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 별 짓 다한다 라는 와이프의 예전 말이 생각난다.




그리 애틋할 것도, 서운할 것도 없던 평범한 근 20년의 결혼생활이었지만 자식 죽고 피차가 느낀 정신적 피로는 결정적으로 우리의 사이를 건조시켰고,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에 지친 아내는 등산 모임에서 만난 새 남자와 바람이 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혹은 나 자신의 반성이나 분노를 풀기 위해 몇 차례고 홀로 올랐던 산. 이 산 저 산을 혼자 오르며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과 회한을 뒤늦게 느끼며 왜 그녀와 함께 산에 자주 올라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았다.

그렇게 아내에게 "놓아줄게" 라는 말과 함께 전한 이별 선언. 뒤늦게 꼬리가 밟힌 것을 안 아내는 놀라며 자초지종을 밝혔지만 이미 나의 속은 모든 것이 정리된 이후였고, 뒤늦게 알았지만 사실 그녀 역시도 새 남자와의 새 출발 준비가 한창이었다.


"미안해요…"

그러나 아내를 홀린 새 남자는 돈을 목적으로 접근했을 뿐이었고, 전세자금 목적으로 준비한 1억은 그렇게 그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한 아내는 나에게 다시 돌아와 그 사실만을 전하고 다시 문을 나섰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 중얼중얼 "미친 년" 어쩌고 저쩌고 욕을 하던 나는 문득 문을 나서던 아내의 복장을 떠올렸다. 흰 고무신. 미친 년이 이젠 정신 나가서 헛지랄을 다 하고 다니는구나, 하고 욕하던 나는 간신히 그녀의 심정에까지 생각이 닿았고 그 의미를 깨달고는 벽력같이 튀어나갔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사방을 뛰며 그녀를 찾으며 빌고 또 빌었다. 나는 당장 죽어도 좋으니 그녀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바람 나서 다른 놈 좋다가 떠났다가 사기 당한 년이 뭐가 좋다고 그리도 뛰어다녔냐 하면 나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미움보다 독한 것이 정이고, 정보다 귀한 것이 사람 목숨 아니던가.

"정옥아"

멀리 가지도 못했다. 겨우 산 초입이었다. 나는 그녀를 붙들었고, 그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렇게 모든게 좋아지나 했지만, 정옥은 차마 나를 더이상 볼 낯이 없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도저히 나를 볼 낯이 없다며 그녀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이혼 절차를 밟지는 않았으니 별거의 상태지만, 사실상 이혼이었다. 이럴 거면 돌아오기는 왜 돌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무했지만 나 역시 그렇다고 딱히 후회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 사색의 시간을 갖노라니, 함께 산에 오른 아주머니 셋이 보인다. 정상에 와서 간단히 뭐라도 먹고 갈 요량이었나 보지만, 여는 사실 정작 정상에는 불편하이 제대로 앉을 자리가 없는 산이다.

50대 중반, 아니 후반쯤 되었을까. 요즘에는 다들 관리들을 잘해 40대 초중반까지는 어떻게든 얼굴에 무조건적인 반반함을 남겨둘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결국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남는다. 모질고 심술궂게 살았는가, 웃으며 인자하게 살았는가, 욕심 속에 살았는가, 근심걱정 속에 살았는가…그 모두가 적나라하게 얼굴에 그려지는 것이다. 물론 그에 예외가 없겠냐마는 깊게 알아가다보면 그 첫인상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이 또 인생이었다.



"아이고 여사님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넉살좋게 인사를 하고 나선다. 보통 여기에서 대부분 결판이 난다. 어색하고 당황해하며 "네, 네" 하며 식은땀과 함께 후다닥 도망가기 바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보다도 더 기분좋게 "예, 사장님, 어머 혼자 오셨나요?"하며 먼저 끼를 부리는 여사님도 있다. 그러면 나 역시 기분좋게 동행을 하며 정상 인근의 삼각사에서 함께 국수라도 같이 한 그릇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또 산을 내려오노라면 보통 나 하나와 둘, 셋의 여사님 모임의 흥겨움은 무르익는다. 하하호호 웃으며 내려오노라면 스쳐 지나가는 질투 어린 남정네들이 은근하게 끼어들거나 중얼대며 눈치도 주건만, 아무렴 허리 굽고 배 나온 양반들이 무슨 소리를 한들 그녀들 눈에 나 이외의 남정네가 눈에 찰 리가 없다. 왕자병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마는 내 일생이 그리한 이상 어쩌겠는가.

"밀가루 국시를 먹어서 그런가, 벌써 배가 훅 꺼지네요. 날씨도 좋고 한데, 맛있는 녹두전 어떻습니까"

산을 내려와서는 땀 흘린 뒤의 기쁨을 만끽하며 2차로 전집으로 향한다. 남편이 지랄맞고 기세 등등한 여사님들 같으면 곧바로 파장이지만, 요즘 같은 여권 신장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열에 아홉은 그저 제 맘에 들면 "좋죠!" 하며 먼저 탁주까지 주문한다. 그리 거나하게 한 잔씩 돌고 나면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 남편 흉도 보고, 자식 자랑도 하고, 외로움을 이야기 하노라면 어느새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 마누라를 말로 저승으로 보내고야 만다. 마음 속으로야 어차피 이혼이나 다름 없는 사이인데 말로 죽이면 좀 어떠랴 하고 변명도 애써 해본다.

"예, 그래도 벌써 10년도 넘은 일인걸요. 이젠 그저 편합니다. 허허"

보통은 그 즈음하여 기분좋게 파장이지만, 사별했다는 말에 눈에 이채가 도는 여사님들이 종종 있다. 이 국면에 그게 무엇이랴 싶긴 해도, 어쨌거나 머리채 잡힐 가능성이 없어지고 상대가 외로움에 가득차 있으리라는 착각을 하게 되면 비교적 쉬운 상대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런지도 모른다. 양심의 부담도 함께 가벼워지고.

그렇게 슬쩍 여지를 주고, 분위기상 파장이 된 주점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끌어대노라면,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되는 여사님이 반드시 먼저 입을 열게 되어 있다.

"이제 저는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요"

말로는 "어어 그래요" 하고 다같이 일어서지만, 거기서 또 나는 다른 아지매의 아쉬운 얼굴을 확인한다. 눈치 빠른 아지매 같으면 "아냐 언니는 한잔 더 해. 사장님도 한잔 더 드세요. 저는 오늘 갈 데가 있어서" 하고 먼저 자리를 비켜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체면치례나 뒷감당을 위해서라도 일단 함께 헤어진 다음에 다시 따로 연락을 해서 만나는 것이 정석이다. 그 후에 눈치 보며 다시 만나 3차를 가게 되면 그때는 더이상 꺼리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이미 산은 내려왔건만 나는 또 한번 산을 탄다. 허나 이번에 오르는 산은 암벽과 고목 대신 야트막하고 보들보들 언덕에 얕은 수풀이 전부이니 수월하기 그지없다. 허나 그럼에도 내 오래된 등산 스틱이 또 한번 말썽을 부리니 이제는 등산 놀음도 슬슬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작은 고민이 된다. 그래도 오기로 운우의 힘을 빌어 노익장을 부려보니 이 새하얀 민둥산의 메아리는 저 푸르고 높은 산의 그것보다 애틋하고 간절하다.

비록 저 고산구곡 천지산야의 고색창연함에 비할 바 아닐지라도, 등산로 한 켠의 이름없는 야생화 한 송이만도 못한 시들어 버린 박색의 꽃이라 한들 역시나 함께 오르는 이 기분좋은 오르막의 기쁨만큼은 세상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순수한 활기참에, 곧이어 찾아올 어색함과 묘한 허전함을 미리 떠올려보고도 애써 깔끔하게 잊어본다. 

그리고 그럴 때 터져 나오는 얕은 실소야말로 내가 박색산하를 오르는 작고도 새하얀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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