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객관적으로 내가 나 스스로를 돌아봐도 나는 '지랄 같은 년'이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도. 그냥 나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광기가…
아니. 좀 더 솔직해져야겠죠.
그래요, 그냥 그 남자가 만만하고 잘해주니까 그냥 내 정신줄을 놔버리고 막 나갔던거죠. 인정해요.
막 정신없이 퍼붓다가 탁 전화 끊어버리고 혼자 씩씩대고 있노라면 엄마가 방에 혀를 끌끌차며 들어와요.
"너 진짜 왜 그러냐. 상현이 같은 애가 어딨다고. 너 그 지랄같은 성격 받아주는 남자 걔 말고는 없다"
물론 저는 그럼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화를 엄마한테 쏟아내죠.
"아 엄마가 뭘 안 다고 그래! 내가 화가 안 나 그럼? 엄마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고 그래! 엄마가 뭘 아는데!"
네,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역시나 지랄맞은 빽빽거림이었어요. 정말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날 죽이고 싶어져요. 반성이 아니라, 그냥 저런 년이 내 눈 앞에 있다면 당장 나 스스로가 먼저 머리채를 잡을 것 같다구요. 미친 년.
그냥 기준이 없었어요. 데이트를 약속하잖아요? 그럼 어떤 날은 상현이가 일찍 오고, 어떤 날은 늦게 오겠죠. 늦은 날은 당연히 전 지랄발광을 하는 거고, 일찍 오면 "아니 넌 2시가 약속이면 대충 2시쯤에 오면 되잖아. 왜 혼자 30분도 넘게 일찍 와서 날 불편하게 만드는데" 하며 트집을 잡았어요. 네, 뻔뻔한거 알아요. 내로남불인 것도 알구요. 근데 어쩌겠어요. 그 미친 년이 전데요.
이제 그럼 그때부터 심통이 터지는거죠. 밥을 먹으러 가죠. 어디로? 그건 상현이가 알아와야 되요. 새롭고, 맛있는 맛집으로. 못 알아오면 그건 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걸로 간주하고 궁시렁대고 짜증 피우는거죠. 뭐, 가끔은 그냥 제가 먹고 싶은 걸로 인도할 때도 있어요. 어쨌든 거의 모든 선택은 제 기준이었어요. 가끔 나도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넌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물어보죠. 그럼 상현이는 "뭐 그냥 니 먹고 싶은거 먹어" 하고 대답하죠. 보통은. 그럼 또 저는 지랄하는거에요.
"아니 내가 지금 너 먹고 싶은거 물어봤지, 나 먹고 싶은거 물어봤어?" 하고. 그럼 그제서야 상현이 몇 가지 의견을 주섬주섬 내놓아요. 그것도 뻔히 내 취향에 맞춘 음식들로. 저는 또 심통을 부리죠. 네, 알아요. 상현이도 원래는 줏대 있는 애였어요. 내가 그렇게 만든 거 압니다. 맨날 시달리고 짜증 피우고 뭐 좀 한 마디 하면 그거 트집 잡아서 데이트 망치고 난리 피우니 걔도 그렇게 된 거겠죠.
만나면 맨날 지적질이죠. 옷 입은게 그게 뭐야, 살 좀 빼, 비염 좀 치료해, 너 탈모 아냐?, 면도 좀 깨끗히 해, 데이트 할 때 신경 좀 써서 나오면 안돼? 등등등등. 후.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했지만,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됐죠. 입장 바꿔서 누가 저한테 그 지랄하면 전 그 사람 죽일지도 몰라요. 그냥 철 없어서 그랬다기에는, 내 친구들에 비해서도 전 좀 심했죠. 근데 그때는 그게 나 스스로 멋있는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자기주도권 있고, 당당한. 아니 그냥 상현이가 제 눈에 안 차서, 그 모든게 짜증났던 거겠죠.
그런 5년이었어요. 뭐 5년 내내 그런 건 아니고, 대부분은 마지막 몇 년에 집중된 이야기지만… 아니, 그래요. 내내 그랬죠. 냉정히 말해서, 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남자가, 나한테 뭐든 맞춰주고 응석을 받아주니 그냥 되바라진 거죠. 인정해요. 사실 저였으면 진작에 헤어졌어요. 그래도 상현이는 다 참았어요. 보살, 부처, 성자… 호구.
맞죠 뭐, 호구. 나같은 년이 뭐라고 그걸 다 받아줘. 병신. 네, 그리고 드디어 떠났죠. 그래도 참 착하긴 한게, 보통 그랬으면 떠날 때라도 시원하게 한 마디 할 법 하잖아요. 근데도 마지막까지 "나 만나줘서 고마웠어" 하고 떠나더라구요. 끝까지 싫은 소리 한번 안 하더라구요.
뭐 애초에 해외취업을 하러 나간다면서 그 많은 준비할거, 준비 기간 동안 나한테 한 마디도 통보 안 했던 것 자체가 이미 훨씬 전에 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던 거겠지만요.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 그래? 근데 왜 미리 말은 안 했어? 자존심 땜에? 같은 식으로 가볍게 긁어도 보고,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히 행동하기도 했는데 그게 아무렇지가 않더라구요. 하루종일 머릿 속에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어요. 결국 오밤 중에 뛰어가서 한 바탕 하려고 했는데, 그때 상현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더라구요.
"그냥 나는 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조용히 떠나려고 마음 먹은 거였어. 내가 니 발목만 잡는거 같아서"
무슨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지랄맞게 굴었던 행동들, 못된 말 같은게 막 다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말 미친 년처럼 울었는데, 뒤늦게 생각나더라구요. 끝까지 내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했구나. 그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감정만 신경썼구나 하고. 그리고 끝이었어요. 상현이도 마지막에 그 만나줘서 고마웠다는 문자 한 통이 전부였어요. 연락도 없더라구요.
그리고 1년 쯤 지나서, 운동하면서 만난 남자랑 연애를 했죠. 상현이와는 많은게 달랐어요. 뭘 하든 주도적으로 척척하는게 훨씬 믿음직하고 외모도 훈훈하고, 당당하고 적극적이고…. 진짜 딱 3개월 만에 그 아픈 기억이 싹 사라지더라구요. 어쩌겠어요? 다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도 알았어요. 아니, 이미 당연히 알고는 있었죠. 상현이에게라면 당연하게 했을 지랄도 일체 안 하고, 개념 있는 여자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엄마도 그러더라구요. 지금 하는거 1/10만 상현이에게 했어도 걔가 니 안 버렸을거라고. 뭐 그 말 땜에 엄마랑 한달 넘게 말도 안 했지만.
짜증스럽게 굴던 것도 싹 사라졌어요 문득문득 그러면서 생각은 했죠. 그때는 참 왜 그랬을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그리고 곧바로 남 탓을 했죠. 걔가 비정상이라 나도 비정상적으로 행동한거라고.
근데 딱 6개월 만에 헤어지자고 하더라구요. 왜냐고 물어도 뭐 큰 이유도 없었어요. 그냥 나랑 잘 안 맞는 거 같다고 하는데, 그냥 질린 거였겠죠. 적당히 사귀다 재미 볼 거 보고, 끝. 알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겁이 조금 나더라구요. 연애라는게 이런거지 참,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거였지, 영원한게 아니었지 참.
뒤늦게 소개팅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남자 만날 기회도 늘렸어요. 그리고 연애도 몇 번 더 했죠. 근데 그때마다 다 그냥 그랬어요. 크게 좋지도, 나쁠 것도 없는 연애. 그렇지만 결국 몇 달 만에 헤어지는 그런 연애. 그때 알았죠. 아, 내가 그때 놓친건 연인이 아니라 인연이였구나, 하는걸. 참 후회가 되더라구요.
주변을 돌아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친한 언니들, 아는 동생들, 조건 보고 잘 된 케이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오래 만나서 서로 잘 위한 사람들이 재밌게 살더라구요. 그 언니들이라고 눈 없는거 아니고, 못난거 아닌데 왜 그 오빠들 만났을까, 그냥 그게 인연이었던거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안정되고. 전 그걸 몰랐던 거에요. 혼자 무슨 설렘이니 뭐니 그런 거나 찾고. 정작 나 스스로가 누구한테 그리 설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나마 그렇다고 느끼며 날 바라봐줬던게 상현인데.
이 얘기를 몇 명한테 한 적이 있어요.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은 "괜찮아, 네가 잘못한게 아니라 그냥 그때의 너는 그 소중함을 몰라서 그랬던 거 뿐이야. 앞으로 좋은 인연 만날거야, 초조해하지마" 하는 식으로 말해줘요. 근데 알거든요. 아니, 알았거든요. 미친듯이 후회했어요. 엄마가 또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힘들면 다시 만나보자고, 아니면 그냥 편지라도 주고 받으면서 마음 달래라고. 상현이를.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리고 오죽하면 걔가 그랬을까 생각하면 설령 이제와서 내가 손을 내민다고 걔가 받을지 기대도 잘 안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깊어질 것 같아서. …그래놓고 메일은 썼죠. 답장은 안 왔지만.
그래도 윤주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상현이랑 나랑 결혼했어도 그건 그것대로 불만족스러웠을거라고. 지금이니 후회스러울 뿐인거라고. 맞는 말이죠. 근데 어쨌든… 내가 상현이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았을까 생각해보니 또 후회가 되더라구요.
걔 기억 속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그냥 연애 기간 내내 들들 볶은 미친 년? 그냥 자기만 알았던 쓰레기? 근데 걔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에 대해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게 기가 막히고 답답한거에요.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랬더니 윤주 언니가 또 그러더라구요.
"걔가 정말로 널 그렇게 생각했으면, 훨씬 전에 널 걷어찼겠지. 그런 기억도 분명히 있기야 하겠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았을거야. 너 스스로도 기억 못할 그런 좋은 기억들. 분명히"
그 말에 위안을 받았는데, 집에 와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기억이 없더라구요. 어쩌다 '이건 좀 좋은 기억 아닌가?' 싶은 기억도 조금만 더 기억을 더듬어보면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내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끝나버리더라구요. 난 그런 인간이었던 거에요. 최소한 상현이한테는.
알아요. 이런거 이제와서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해봐야 걔한테 닿을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도 없죠. 다음 번의 연애에서 잘한다고 해도, 내가 이미 저질러버린 그 많은 잘못들은 어쩔 수 없는거고. 또 내가 아무리 후회하고 가슴 아프더라도, 당시에 직접 매번 그 많은 고통을 직접 겪은 상현이 마음에 비하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난 분명히 다른 좋은 남자 만나면, 이런 감정 곧바로 다 까먹을거에요. 난 그런 년이니까요.
"미안해"
그래도 말하고는 싶어요. 그리고 상현이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걔는 정말 그럴 자격 있는 애니까. 하긴 또 모르죠.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놓고서 다른 여자한테는 또 나처럼 굴지. 그래도 어쨌든. 아닐 거에요. 걔는 내가 아니니까.
정말로 후회스러워요. 딱 하루만이라도, 정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날 정말 좋았었는데' 하는 깔끔한 좋은 기억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렇게 가슴 아프고 후회스럽진 않을텐데. 왜 나는 단 하루도 상현이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까요. 왜. 뭣 때문에.
아니. 좀 더 솔직해져야겠죠.
그래요, 그냥 그 남자가 만만하고 잘해주니까 그냥 내 정신줄을 놔버리고 막 나갔던거죠. 인정해요.
지랄 같은 년
막 정신없이 퍼붓다가 탁 전화 끊어버리고 혼자 씩씩대고 있노라면 엄마가 방에 혀를 끌끌차며 들어와요.
"너 진짜 왜 그러냐. 상현이 같은 애가 어딨다고. 너 그 지랄같은 성격 받아주는 남자 걔 말고는 없다"
물론 저는 그럼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화를 엄마한테 쏟아내죠.
"아 엄마가 뭘 안 다고 그래! 내가 화가 안 나 그럼? 엄마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고 그래! 엄마가 뭘 아는데!"
네,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역시나 지랄맞은 빽빽거림이었어요. 정말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날 죽이고 싶어져요. 반성이 아니라, 그냥 저런 년이 내 눈 앞에 있다면 당장 나 스스로가 먼저 머리채를 잡을 것 같다구요. 미친 년.
그냥 기준이 없었어요. 데이트를 약속하잖아요? 그럼 어떤 날은 상현이가 일찍 오고, 어떤 날은 늦게 오겠죠. 늦은 날은 당연히 전 지랄발광을 하는 거고, 일찍 오면 "아니 넌 2시가 약속이면 대충 2시쯤에 오면 되잖아. 왜 혼자 30분도 넘게 일찍 와서 날 불편하게 만드는데" 하며 트집을 잡았어요. 네, 뻔뻔한거 알아요. 내로남불인 것도 알구요. 근데 어쩌겠어요. 그 미친 년이 전데요.
이제 그럼 그때부터 심통이 터지는거죠. 밥을 먹으러 가죠. 어디로? 그건 상현이가 알아와야 되요. 새롭고, 맛있는 맛집으로. 못 알아오면 그건 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걸로 간주하고 궁시렁대고 짜증 피우는거죠. 뭐, 가끔은 그냥 제가 먹고 싶은 걸로 인도할 때도 있어요. 어쨌든 거의 모든 선택은 제 기준이었어요. 가끔 나도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넌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물어보죠. 그럼 상현이는 "뭐 그냥 니 먹고 싶은거 먹어" 하고 대답하죠. 보통은. 그럼 또 저는 지랄하는거에요.
"아니 내가 지금 너 먹고 싶은거 물어봤지, 나 먹고 싶은거 물어봤어?" 하고. 그럼 그제서야 상현이 몇 가지 의견을 주섬주섬 내놓아요. 그것도 뻔히 내 취향에 맞춘 음식들로. 저는 또 심통을 부리죠. 네, 알아요. 상현이도 원래는 줏대 있는 애였어요. 내가 그렇게 만든 거 압니다. 맨날 시달리고 짜증 피우고 뭐 좀 한 마디 하면 그거 트집 잡아서 데이트 망치고 난리 피우니 걔도 그렇게 된 거겠죠.
만나면 맨날 지적질이죠. 옷 입은게 그게 뭐야, 살 좀 빼, 비염 좀 치료해, 너 탈모 아냐?, 면도 좀 깨끗히 해, 데이트 할 때 신경 좀 써서 나오면 안돼? 등등등등. 후.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했지만,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됐죠. 입장 바꿔서 누가 저한테 그 지랄하면 전 그 사람 죽일지도 몰라요. 그냥 철 없어서 그랬다기에는, 내 친구들에 비해서도 전 좀 심했죠. 근데 그때는 그게 나 스스로 멋있는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자기주도권 있고, 당당한. 아니 그냥 상현이가 제 눈에 안 차서, 그 모든게 짜증났던 거겠죠.
그런 5년이었어요. 뭐 5년 내내 그런 건 아니고, 대부분은 마지막 몇 년에 집중된 이야기지만… 아니, 그래요. 내내 그랬죠. 냉정히 말해서, 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남자가, 나한테 뭐든 맞춰주고 응석을 받아주니 그냥 되바라진 거죠. 인정해요. 사실 저였으면 진작에 헤어졌어요. 그래도 상현이는 다 참았어요. 보살, 부처, 성자… 호구.
맞죠 뭐, 호구. 나같은 년이 뭐라고 그걸 다 받아줘. 병신. 네, 그리고 드디어 떠났죠. 그래도 참 착하긴 한게, 보통 그랬으면 떠날 때라도 시원하게 한 마디 할 법 하잖아요. 근데도 마지막까지 "나 만나줘서 고마웠어" 하고 떠나더라구요. 끝까지 싫은 소리 한번 안 하더라구요.
뭐 애초에 해외취업을 하러 나간다면서 그 많은 준비할거, 준비 기간 동안 나한테 한 마디도 통보 안 했던 것 자체가 이미 훨씬 전에 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던 거겠지만요.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 그래? 근데 왜 미리 말은 안 했어? 자존심 땜에? 같은 식으로 가볍게 긁어도 보고,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히 행동하기도 했는데 그게 아무렇지가 않더라구요. 하루종일 머릿 속에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어요. 결국 오밤 중에 뛰어가서 한 바탕 하려고 했는데, 그때 상현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더라구요.
"그냥 나는 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조용히 떠나려고 마음 먹은 거였어. 내가 니 발목만 잡는거 같아서"
무슨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지랄맞게 굴었던 행동들, 못된 말 같은게 막 다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말 미친 년처럼 울었는데, 뒤늦게 생각나더라구요. 끝까지 내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했구나. 그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감정만 신경썼구나 하고. 그리고 끝이었어요. 상현이도 마지막에 그 만나줘서 고마웠다는 문자 한 통이 전부였어요. 연락도 없더라구요.
그리고 1년 쯤 지나서, 운동하면서 만난 남자랑 연애를 했죠. 상현이와는 많은게 달랐어요. 뭘 하든 주도적으로 척척하는게 훨씬 믿음직하고 외모도 훈훈하고, 당당하고 적극적이고…. 진짜 딱 3개월 만에 그 아픈 기억이 싹 사라지더라구요. 어쩌겠어요? 다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도 알았어요. 아니, 이미 당연히 알고는 있었죠. 상현이에게라면 당연하게 했을 지랄도 일체 안 하고, 개념 있는 여자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엄마도 그러더라구요. 지금 하는거 1/10만 상현이에게 했어도 걔가 니 안 버렸을거라고. 뭐 그 말 땜에 엄마랑 한달 넘게 말도 안 했지만.
짜증스럽게 굴던 것도 싹 사라졌어요 문득문득 그러면서 생각은 했죠. 그때는 참 왜 그랬을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그리고 곧바로 남 탓을 했죠. 걔가 비정상이라 나도 비정상적으로 행동한거라고.
근데 딱 6개월 만에 헤어지자고 하더라구요. 왜냐고 물어도 뭐 큰 이유도 없었어요. 그냥 나랑 잘 안 맞는 거 같다고 하는데, 그냥 질린 거였겠죠. 적당히 사귀다 재미 볼 거 보고, 끝. 알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겁이 조금 나더라구요. 연애라는게 이런거지 참,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거였지, 영원한게 아니었지 참.
뒤늦게 소개팅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남자 만날 기회도 늘렸어요. 그리고 연애도 몇 번 더 했죠. 근데 그때마다 다 그냥 그랬어요. 크게 좋지도, 나쁠 것도 없는 연애. 그렇지만 결국 몇 달 만에 헤어지는 그런 연애. 그때 알았죠. 아, 내가 그때 놓친건 연인이 아니라 인연이였구나, 하는걸. 참 후회가 되더라구요.
주변을 돌아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친한 언니들, 아는 동생들, 조건 보고 잘 된 케이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오래 만나서 서로 잘 위한 사람들이 재밌게 살더라구요. 그 언니들이라고 눈 없는거 아니고, 못난거 아닌데 왜 그 오빠들 만났을까, 그냥 그게 인연이었던거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안정되고. 전 그걸 몰랐던 거에요. 혼자 무슨 설렘이니 뭐니 그런 거나 찾고. 정작 나 스스로가 누구한테 그리 설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나마 그렇다고 느끼며 날 바라봐줬던게 상현인데.
이 얘기를 몇 명한테 한 적이 있어요.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은 "괜찮아, 네가 잘못한게 아니라 그냥 그때의 너는 그 소중함을 몰라서 그랬던 거 뿐이야. 앞으로 좋은 인연 만날거야, 초조해하지마" 하는 식으로 말해줘요. 근데 알거든요. 아니, 알았거든요. 미친듯이 후회했어요. 엄마가 또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힘들면 다시 만나보자고, 아니면 그냥 편지라도 주고 받으면서 마음 달래라고. 상현이를.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리고 오죽하면 걔가 그랬을까 생각하면 설령 이제와서 내가 손을 내민다고 걔가 받을지 기대도 잘 안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깊어질 것 같아서. …그래놓고 메일은 썼죠. 답장은 안 왔지만.
그래도 윤주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상현이랑 나랑 결혼했어도 그건 그것대로 불만족스러웠을거라고. 지금이니 후회스러울 뿐인거라고. 맞는 말이죠. 근데 어쨌든… 내가 상현이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았을까 생각해보니 또 후회가 되더라구요.
걔 기억 속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그냥 연애 기간 내내 들들 볶은 미친 년? 그냥 자기만 알았던 쓰레기? 근데 걔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에 대해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게 기가 막히고 답답한거에요.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랬더니 윤주 언니가 또 그러더라구요.
"걔가 정말로 널 그렇게 생각했으면, 훨씬 전에 널 걷어찼겠지. 그런 기억도 분명히 있기야 하겠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았을거야. 너 스스로도 기억 못할 그런 좋은 기억들. 분명히"
그 말에 위안을 받았는데, 집에 와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기억이 없더라구요. 어쩌다 '이건 좀 좋은 기억 아닌가?' 싶은 기억도 조금만 더 기억을 더듬어보면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내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끝나버리더라구요. 난 그런 인간이었던 거에요. 최소한 상현이한테는.
알아요. 이런거 이제와서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해봐야 걔한테 닿을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도 없죠. 다음 번의 연애에서 잘한다고 해도, 내가 이미 저질러버린 그 많은 잘못들은 어쩔 수 없는거고. 또 내가 아무리 후회하고 가슴 아프더라도, 당시에 직접 매번 그 많은 고통을 직접 겪은 상현이 마음에 비하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난 분명히 다른 좋은 남자 만나면, 이런 감정 곧바로 다 까먹을거에요. 난 그런 년이니까요.
"미안해"
그래도 말하고는 싶어요. 그리고 상현이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걔는 정말 그럴 자격 있는 애니까. 하긴 또 모르죠.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놓고서 다른 여자한테는 또 나처럼 굴지. 그래도 어쨌든. 아닐 거에요. 걔는 내가 아니니까.
정말로 후회스러워요. 딱 하루만이라도, 정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날 정말 좋았었는데' 하는 깔끔한 좋은 기억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렇게 가슴 아프고 후회스럽진 않을텐데. 왜 나는 단 하루도 상현이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까요. 왜. 뭣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