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대뇌 사령부의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주말 오후의 늦잠에 기분좋은 휴식을 취하던 뇌세포들은 여자친구의 사진 첨부된 카톡 메세지 한 방에 전력으로 일어나 언어중추석에 안착했다. 갑자기 일어난 통에 모두들 각성을 위한 카페인 한방울이 간절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선 비상대응팀은 바로 즉응해"
"이미 대응했습니다"
"좋아"
이미 오랜 연애를 통해 자율신경계와 일체화 된 혓바닥과 손가락팀은 놀랍게도 대뇌가 본격적인 반응을 하기도 전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새끼마냥 [ 헐 대박! 뭐야, 넘 이쁜데? 미용실 바꾼거야? 넘 이쁘다ㅋㅋㅋ ] 라는 답문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물론 대뇌 사령부의 뉴런들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리액션이라 평가했지만 그 즉응성만큼은 인정했다.
게다가 의외로 그녀는 그런 반응이 기뻤던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래ㅋㅋㅋ ] 하면서 좋아했다. 초탄 명중이 확인된 이상 연타를 집어넣을 찬스였다.
"오버 회로 가동 허가합니다"
좌뇌 본부의 허가에 곧바로 우뇌 본부도 결과를 산출해왔다.
[ 존예보스네 진짜ㅋㅋㅋ ]
'존예보스'라는, 37세의 김박스로서는 사용하기 민망한 유행어휘탄이 발사되었고, 뒤늦게 좌뇌 본부 측에서 '민망함' 경고를 보내왔지만 이미 오른손은 타이핑을 마치고 메세지를 입력한 후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게 좋아? ]
하지만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여친은 스스로도 이번 머리가 맘에 들었던지 꽤 노골적이고 민망한 찬양에도 좋아라하는 리액션을 보내왔다. 이제 모두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감을 잡았다.
"조금 무리수를 띄워봐도 될까요"
이때 아재 참모총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재 참모총장. 그가 누구던가. 물론 그도 한때는 빛나는 말재주를 뽐내던 전설적인 뉴런이었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등등 아군의 스펙으로는 난공불락이라 평가되었던, 도도함으로 무장한 수많은 강적들을 빛나는 말재주 하나만으로 무장해제 후 품 안으로 끌어 들었으며, 2006 입사면접, 2009 정리해고 눈물쇼, 2010 전세보증금 반환 전투 등 인생의 주요 장면마다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모두를 이끈 그였다.
하지만 그 역시 늙었고, 감은 무뎌졌다. 아니 완전히 썩어 쉰내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최근 그가 입안한 작전은 매번 괴멸적인 갑분싸를 자초했고 연전연패를 자초했다. 2015 조 이사 앞 실언사건, 2016 여친 친구 모임 참사, 2017 동창회 갑분싸 사건, 2018 땅콩크림 고지전 등… 그의 참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불킥이 난사되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역시 난세를 위해 태어난 영웅이었다. 지난 1월 지역사 사장단 회의에서 최 전무님의 실언에 심각해진 분위기를 어이없는 아재개그 한방으로 뒤집어 내는 기지를 발휘했으며, 여친의 이별 선언 앞에 멘탈이 박살나 모든 뇌세포가 눈물만 줄줄 흘리는 절망적 상황에서 터뜨린 한 마디로 영원한 사랑을 재고백 받지 않았던가.
"승인합니다"
좌뇌 본부에서는 아재 참모총장의 작전계획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원로에 대한 대우는 어쩔 수 없었다.
[ ㅋㅋㅋㅋㅋ존예보스래ㅋㅋㅋ먼가 말투가 오빠답지 않아ㅋㅋㅋ ]
재차 보내온 사진과 멘트 앞에 아재 참모총장의 집속탄이 투하되었다.
[ 응 완전 존예보스야 ]
[ 존예총통 ]
[ 존예황제 ]
[ 존예우주총황제 ]
[ 존예차원지도자 ]
[ 존예극원신, 존예궁극신, 존예정신집결적영혼만트라빛신, 존예존예불… ]
…발사된 멘트 리스트를 보고 모든 뉴런들이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지르고 마른세수에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앞머리 때문에 어려보여진 덕분인지 여친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재 참모총장은 여전히 흐뭇한 얼굴로 민망함으로 초토화 되는 대화창을 바라 보며 작전계획을 계속 실행했다. 그 민망함은 이제 모두가 "그만 그만 그만"을 연달아 외치게 할 지경이었다.
[ 마하존예존예심경 여신자재보살섹시 아재아재흥분아재 색즉예쁨공즉보스 존예존예 바라존예 여신심타심즉 완벽짱예여신발발타 사바하… ]
그러나 저런 추태에도 여전히 여친은 그저 신나서 필터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 연달아 보내오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스스로의 기분이 나쁘면 어떤 말도 용서치 않았지만, 스스로의 기분이 좋다면 그 어떤 말에도 그저 웃어주었다.
"흐흐, 어떻습니까. 끝내주지요?"
마지막 아재 참모총장의 자화자찬이 끝나자 다들 겨우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다시 상황을 주시했고,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연애세포' 뉴런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 좀 들려줄까요?"
과연, 길게 오가는 텍스트 중심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여친의 패턴을 완벽히 읽고 있는 연애세포 사령관다운 작전 입안이었다.
"승인합니다"
곧바로 전화통화가 시작되었다.
"…어, 나 이제 머리 다 잘랐고, 옷 좀 보려구"
그녀의 말에 실시간으로 각급 뉴런 참모진들의 대응 답변안이 입안되었다. 연애세포 사령관은 서둘러 그들의 작전안을 훑어보았다.
1. 어떤 옷 보게?
2. 밥은? 배 안 고파?
3. 근데 너 이번 달 카드값 간당간당하다고 하지 않았냐? 옷을 또 사?
4.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5. 나도 머리 잘라야 하는데
6. 머리는 잘 잘랐는데 너 근데 평소 옷이랑은 좀 안 어울리네. 그래 얼른 옷 사라
연애세포 사령관에게 일임된 선택 권한. 어떤 작전안을 고를까 선택하면서 내심 '세상에…' 싶은 소름돋는 핵전쟁 유발 멘트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우리 안에 스파이가 있다"
라고 항상 주장하던 누군가의 명언이 새삼 연애세포의 뇌리를 스쳤다. 확실히 "연애 때문에 매달 카드값이 폭발한단 말입니다!" 라는 재무부 뉴런들이나 "제발 좀 여자만이 해답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라는 항문-직장 신경조직, "연애 하나만 포기해도 연간 최소 50일 이상의 진짜 여가와 1,286시간의 게임 플레이 타임, 366시간의 야구관람 시간이 확보되는데 도대체 왜?" 라고 주장하는 맨케이브 뉴런 등, 수많은 내부의 스파이들은 언제든 다 된 연애에 재를 뿌리고도 남을 쓰레기들이었다.
어쨌든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춘 그는 무난하게 [ 밥은? 배 안 고파? ] 를 골랐다. 사실 그 본인이 입안한 [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 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육체사령부에서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 그저께 회식과 어제 새벽까지 게임 달린 이유로 몸 상태 안 좋음 ]
"밥은? 배 안 고파?"
그러자 여친이 말했다.
"아냐, 밥은 그냥 안 먹을래.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대뇌사령부의 모두가 '이런 분위기라면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또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겠다'며 축하의 말을 주고 받고 있던 와중, 난데없이 데프콘2가 발령되었다.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대뇌사령부 대형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전쟁 발발의 선전포고. 어떤 대답을 하던 결국 싸움이 터진다는 그 말에 다들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어…"
게다가 답변의 타이밍이 지나가고 있었다. 3...2...1... 이건 더 최악이었다. 그저 흔하게 내뱉는 "에이, 니가 살을 왜 빼" 라거나 "야, 너는 살쪄도 이뻐, 걱정마" 같은 류의 대응이라도 했더라면 다소 간의 분쟁 유발 가능성은 있을 지언정, 무사히 넘어갈 방법이라도 있었지만, 좋은 답변을 고른답시고 당황한 나머지 귀중한 골든 타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 …"
"… …"
"…나 진짜 살쪘지?"
차가워진 분위기.
"아, 아니. 무슨 니가 살이 쪄"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근데 왜 내 말에 대답을 못해. 살쪘으니까 그런거지. 나 머리 자르니까 더 돼지 같아 보이나 보네"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게. 너 지금 완전 이뻐"
대화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냐, 오빠는 좀 솔직해져야 돼. 내가 요즘 살찌고 그러면 오빠가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 내가 노력을 하지. 맨날 말로만 이쁘다 이쁘다 하면 내가 오빠를 신뢰할 수가 없잖아"
"아,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너가 살이 찌면 찐다고 말을 하지."
"언제? 오빠가 언제 나한테 살쪘다고 말했는데? 어?"
아니, 아니야. 제발.
"오빤 맨날 그렇다니깐. 다른 여자애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오빠가 솔직하게 말해주는게 좋아. 말해봐. 나 요즘 진짜 살이 찌긴 쪘어. 근데 머리까지 자르니까 더 그래보이는거야. 그치?"
어…그런가.
"아닌데, 내가 봤을 때는 아닌데. 야, 그보다 너 밥은 먹었냐? 배 안 고파?"
"오빠, 말 돌리지마."
"어?"
"이래서 내가 오빠랑 진지한 대화를 못해. 맨날 이런 식이잖아"
정색하는 그녀. 전쟁이 발발했고, 대뇌 사령부는 모두 아랫 입술을 깨물며 전원 결전을 준비했다. 한편으로 연애 세포는 전쟁의 허망함을 떠올렸다. 매 싸움마다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하는 뇌세포가 도대체 얼마인가.
'만약 그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면, 나의 미래는 얼마나 창창해질 것이란 말인가'
언젠가의 이별을 겪은 날, 스트레스로 인해 파괴되어 가던 한 추억을 담은 뇌세포도 죽기 직전 연애세포 사령관 앞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사령관님, 저는…보다 더 멋지게 살고 싶었어요. 그저 이런 쳐먹고 낄낄대는 시시한 기억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나 평화통일, 질병 극복, 우주 탐험…같은…보다 멋진…더 보람찬…그런 데이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 세포에게 연애세포 사령관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이런 위로 뿐이었다.
"휴지와 콘돔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정자들을 떠올려보게.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꿈과 기대를 갖고 태어 났겠는가.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네는 멋진 삶을 산 것일세.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말게"
…그녀가 집에 도착한 오후 2시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진 말싸움 통화는 새벽 3시 반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물론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은 여친의 울음이었고, 대뇌 사령부 전원은 뇌세포 2만 8천개의 스트레스성 사망이라는 괴멸적인 통보만 받고 침통함 속에서 한숨 돌렸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 등등, 언젠가 만취했던 날 서로 웃으면서 털어놓은 지난 연애사 속 상대들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여친의 입을 통해 '죽일 년, 살릴 년' 탄이 되어 뇌세포들을 집중 폭격했고, '오빠는 그 년들한테는 안 그랬을거면서…' 또는 '하이고, 그래. 그런 어리고 이쁜 년들 만나다가 나같은 이제 다 늙은 년 만나서…' 등의 신도림 조약을 어긴 폭언들이 터져 나오면서, 깊은 우울함과 좌절만이 또 한번 대뇌 사령부 전체에 큰 상처만을 남았다.
"후, 다들 수고 했습니다. 이제 쉬십시다"
좌뇌 사령부가 최종적으로 금번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물론 연애세포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당장 내일 일요일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주 초반까지 피곤해 집니다. 미안하다는 카톡 한 통, 승인 요청 바랍니다"
"지금 간신히 전투 마무리 됐습니다. 설건드렸다가 말싸움 재발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육체 사령부에서는 그냥 좀 적당히 하고 자자는 의견을 내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 놈의 만성피로와 노쇄한 몸을 핑계로 매번 연애를 망치는 답답한 의견만을 보내왔다. 물론 육체 사령부 측에서는 반대로 연애 세포 사령관을 향해 "나이 쳐먹고도 지가 아직 20대인 줄 아는 머저리"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도 기회도 얼마 없습니다. 이번 연애도 망쳐서, 평생 혼자 살 생각 하십니까? 그러다 진짜 평생 손양만 고생합니다"
연애세포 사령관이 독설을 내뿜자, 육체 사령관은 껄껄 웃었다.
"허허, 참 웃기는 소리도. 좋습니다. 이번 연애 성공해서 결혼까지 갔다고 칩시다. 연애 성공해서 결혼하면 뭐, 손양이 그때는 고생 안 할 것 같습니까? 남의 부대 걱정하지 마시고, 제발 본인 일이나 잘 하십시다. 왜 항상 그 놈의 연애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해야 되는지 참"
"그럼 아예 대놓고 거세하시던가! 지금 대뇌 사령부랑 아랫도리 사령부랑 조직이 이원화 되어서 얼마나 피차가 고생 많습니까!"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가장 민감한 주제가 튀어 나왔다. 대뇌 사령부와 아랫도리 사령부의 갈등…. 그랬다. 당연히 조직체계상 대뇌 사령부는 이 김박스 신체와 정신 전체의 최상위 조직체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체계도상의 일일 뿐, 실질적으로 아랫도리 사령부는 신체 전체의 예산 및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실세 조직이었다.
"피곤 타령 맨날 하는데, 그 놈의 딸딸이만 좀 덜치고 일찍일찍 자기만 해도 피로는 3일 내로 싹 사라지겠구만"
오죽하면 뉴런 사이에서도 "이쯤해선 생각을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거시기로 하는거네" 같은 자조적인 말들이 나올 지경이었기에, 연애세포 사령관의 그 말은 아랫도리 사령부로서도 꽤 찔리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육체 사령관도 할 말은 많았다.
"무슨 꼭 우리가 나쁜 놈들처럼 이야기 하는데…자율신경계 군단 애들 항상 지멋대로 움직이는거 알지? 뜬금없이 대포동 발사대에 올리고, 아침마다 올리고, 어? 그게 우리 잘못이야? 우리도 그거 때문에 아주 죽겠어. 그리고, 뭐, 딸딸이…말 잘했네. 막말로 딸딸이가 우리가 좋아서 쳐? 거 번연계 쾌락중추부에서 내려온 명령 따라서 하는거 뿐인데. 거세를 할게 아니라 아예 니네 그 애들을 잘라버려"
"번연계 애들 자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걸 아는 놈이 거세를 하라고 해? 너야말로 거세하면 무슨 변화 생기는 줄은 알고 하는 말이야? 애초에 뭔 연애세포 따위가 이리 설치는지 원"
하지만 치열한 말다툼이 되어가는 상황을 "그만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정리한 대뇌 피질 원수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뭐 안 하던 짓도 아니고…, 아쉬운 놈이 우물 파야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카톡 보내고… 다들 이제 자자. 그만들 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고단한 대뇌사령부의 하루가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새벽 4시에 이른 시간. 각각의 조직들은 취침 모드에 들어갔고, 수면 여단은 세포 복구를 위해 빠르게 전신 전개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수면 여단 내 독립 군무원 조직 '드림웍스' 팀도 새로운 작품의 상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대뇌사령부는 이렇게 열심히, 바쁘게 일할 것이다. 김박스의 오늘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연애세포 사령관 역시 눈을 붙이며 문득 그냥 입에 붙은 사랑가, '사랑의 횃불'을 새삼스레 읇조리며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이 연애를 지키는 우리
사나이 욕망으로 오늘을 산다
여친의 불벼락을 무릅쓰면서
탈솔로 행복미래번식을 위해
전우여 이 연애는 내가 지킨다
사랑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 fin -
"우선 비상대응팀은 바로 즉응해"
"이미 대응했습니다"
"좋아"
이미 오랜 연애를 통해 자율신경계와 일체화 된 혓바닥과 손가락팀은 놀랍게도 대뇌가 본격적인 반응을 하기도 전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새끼마냥 [ 헐 대박! 뭐야, 넘 이쁜데? 미용실 바꾼거야? 넘 이쁘다ㅋㅋㅋ ] 라는 답문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물론 대뇌 사령부의 뉴런들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리액션이라 평가했지만 그 즉응성만큼은 인정했다.
게다가 의외로 그녀는 그런 반응이 기뻤던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래ㅋㅋㅋ ] 하면서 좋아했다. 초탄 명중이 확인된 이상 연타를 집어넣을 찬스였다.
"오버 회로 가동 허가합니다"
좌뇌 본부의 허가에 곧바로 우뇌 본부도 결과를 산출해왔다.
[ 존예보스네 진짜ㅋㅋㅋ ]
'존예보스'라는, 37세의 김박스로서는 사용하기 민망한 유행어휘탄이 발사되었고, 뒤늦게 좌뇌 본부 측에서 '민망함' 경고를 보내왔지만 이미 오른손은 타이핑을 마치고 메세지를 입력한 후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게 좋아? ]
하지만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여친은 스스로도 이번 머리가 맘에 들었던지 꽤 노골적이고 민망한 찬양에도 좋아라하는 리액션을 보내왔다. 이제 모두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감을 잡았다.
"조금 무리수를 띄워봐도 될까요"
이때 아재 참모총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재 참모총장. 그가 누구던가. 물론 그도 한때는 빛나는 말재주를 뽐내던 전설적인 뉴런이었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등등 아군의 스펙으로는 난공불락이라 평가되었던, 도도함으로 무장한 수많은 강적들을 빛나는 말재주 하나만으로 무장해제 후 품 안으로 끌어 들었으며, 2006 입사면접, 2009 정리해고 눈물쇼, 2010 전세보증금 반환 전투 등 인생의 주요 장면마다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모두를 이끈 그였다.
하지만 그 역시 늙었고, 감은 무뎌졌다. 아니 완전히 썩어 쉰내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최근 그가 입안한 작전은 매번 괴멸적인 갑분싸를 자초했고 연전연패를 자초했다. 2015 조 이사 앞 실언사건, 2016 여친 친구 모임 참사, 2017 동창회 갑분싸 사건, 2018 땅콩크림 고지전 등… 그의 참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불킥이 난사되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역시 난세를 위해 태어난 영웅이었다. 지난 1월 지역사 사장단 회의에서 최 전무님의 실언에 심각해진 분위기를 어이없는 아재개그 한방으로 뒤집어 내는 기지를 발휘했으며, 여친의 이별 선언 앞에 멘탈이 박살나 모든 뇌세포가 눈물만 줄줄 흘리는 절망적 상황에서 터뜨린 한 마디로 영원한 사랑을 재고백 받지 않았던가.
"승인합니다"
좌뇌 본부에서는 아재 참모총장의 작전계획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원로에 대한 대우는 어쩔 수 없었다.
[ ㅋㅋㅋㅋㅋ존예보스래ㅋㅋㅋ먼가 말투가 오빠답지 않아ㅋㅋㅋ ]
재차 보내온 사진과 멘트 앞에 아재 참모총장의 집속탄이 투하되었다.
[ 응 완전 존예보스야 ]
[ 존예총통 ]
[ 존예황제 ]
[ 존예우주총황제 ]
[ 존예차원지도자 ]
[ 존예극원신, 존예궁극신, 존예정신집결적영혼만트라빛신, 존예존예불… ]
…발사된 멘트 리스트를 보고 모든 뉴런들이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지르고 마른세수에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앞머리 때문에 어려보여진 덕분인지 여친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재 참모총장은 여전히 흐뭇한 얼굴로 민망함으로 초토화 되는 대화창을 바라 보며 작전계획을 계속 실행했다. 그 민망함은 이제 모두가 "그만 그만 그만"을 연달아 외치게 할 지경이었다.
[ 마하존예존예심경 여신자재보살섹시 아재아재흥분아재 색즉예쁨공즉보스 존예존예 바라존예 여신심타심즉 완벽짱예여신발발타 사바하… ]
그러나 저런 추태에도 여전히 여친은 그저 신나서 필터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 연달아 보내오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스스로의 기분이 나쁘면 어떤 말도 용서치 않았지만, 스스로의 기분이 좋다면 그 어떤 말에도 그저 웃어주었다.
"흐흐, 어떻습니까. 끝내주지요?"
마지막 아재 참모총장의 자화자찬이 끝나자 다들 겨우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다시 상황을 주시했고,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연애세포' 뉴런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 좀 들려줄까요?"
과연, 길게 오가는 텍스트 중심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여친의 패턴을 완벽히 읽고 있는 연애세포 사령관다운 작전 입안이었다.
"승인합니다"
곧바로 전화통화가 시작되었다.
"…어, 나 이제 머리 다 잘랐고, 옷 좀 보려구"
그녀의 말에 실시간으로 각급 뉴런 참모진들의 대응 답변안이 입안되었다. 연애세포 사령관은 서둘러 그들의 작전안을 훑어보았다.
1. 어떤 옷 보게?
2. 밥은? 배 안 고파?
3. 근데 너 이번 달 카드값 간당간당하다고 하지 않았냐? 옷을 또 사?
4.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5. 나도 머리 잘라야 하는데
6. 머리는 잘 잘랐는데 너 근데 평소 옷이랑은 좀 안 어울리네. 그래 얼른 옷 사라
연애세포 사령관에게 일임된 선택 권한. 어떤 작전안을 고를까 선택하면서 내심 '세상에…' 싶은 소름돋는 핵전쟁 유발 멘트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우리 안에 스파이가 있다"
라고 항상 주장하던 누군가의 명언이 새삼 연애세포의 뇌리를 스쳤다. 확실히 "연애 때문에 매달 카드값이 폭발한단 말입니다!" 라는 재무부 뉴런들이나 "제발 좀 여자만이 해답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라는 항문-직장 신경조직, "연애 하나만 포기해도 연간 최소 50일 이상의 진짜 여가와 1,286시간의 게임 플레이 타임, 366시간의 야구관람 시간이 확보되는데 도대체 왜?" 라고 주장하는 맨케이브 뉴런 등, 수많은 내부의 스파이들은 언제든 다 된 연애에 재를 뿌리고도 남을 쓰레기들이었다.
어쨌든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춘 그는 무난하게 [ 밥은? 배 안 고파? ] 를 골랐다. 사실 그 본인이 입안한 [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 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육체사령부에서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 그저께 회식과 어제 새벽까지 게임 달린 이유로 몸 상태 안 좋음 ]
"밥은? 배 안 고파?"
그러자 여친이 말했다.
"아냐, 밥은 그냥 안 먹을래.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대뇌사령부의 모두가 '이런 분위기라면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또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겠다'며 축하의 말을 주고 받고 있던 와중, 난데없이 데프콘2가 발령되었다.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대뇌사령부 대형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전쟁 발발의 선전포고. 어떤 대답을 하던 결국 싸움이 터진다는 그 말에 다들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어…"
게다가 답변의 타이밍이 지나가고 있었다. 3...2...1... 이건 더 최악이었다. 그저 흔하게 내뱉는 "에이, 니가 살을 왜 빼" 라거나 "야, 너는 살쪄도 이뻐, 걱정마" 같은 류의 대응이라도 했더라면 다소 간의 분쟁 유발 가능성은 있을 지언정, 무사히 넘어갈 방법이라도 있었지만, 좋은 답변을 고른답시고 당황한 나머지 귀중한 골든 타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 …"
"… …"
"…나 진짜 살쪘지?"
차가워진 분위기.
"아, 아니. 무슨 니가 살이 쪄"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근데 왜 내 말에 대답을 못해. 살쪘으니까 그런거지. 나 머리 자르니까 더 돼지 같아 보이나 보네"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게. 너 지금 완전 이뻐"
대화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냐, 오빠는 좀 솔직해져야 돼. 내가 요즘 살찌고 그러면 오빠가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 내가 노력을 하지. 맨날 말로만 이쁘다 이쁘다 하면 내가 오빠를 신뢰할 수가 없잖아"
"아,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너가 살이 찌면 찐다고 말을 하지."
"언제? 오빠가 언제 나한테 살쪘다고 말했는데? 어?"
아니, 아니야. 제발.
"오빤 맨날 그렇다니깐. 다른 여자애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오빠가 솔직하게 말해주는게 좋아. 말해봐. 나 요즘 진짜 살이 찌긴 쪘어. 근데 머리까지 자르니까 더 그래보이는거야. 그치?"
어…그런가.
"아닌데, 내가 봤을 때는 아닌데. 야, 그보다 너 밥은 먹었냐? 배 안 고파?"
"오빠, 말 돌리지마."
"어?"
"이래서 내가 오빠랑 진지한 대화를 못해. 맨날 이런 식이잖아"
정색하는 그녀. 전쟁이 발발했고, 대뇌 사령부는 모두 아랫 입술을 깨물며 전원 결전을 준비했다. 한편으로 연애 세포는 전쟁의 허망함을 떠올렸다. 매 싸움마다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하는 뇌세포가 도대체 얼마인가.
'만약 그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면, 나의 미래는 얼마나 창창해질 것이란 말인가'
언젠가의 이별을 겪은 날, 스트레스로 인해 파괴되어 가던 한 추억을 담은 뇌세포도 죽기 직전 연애세포 사령관 앞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사령관님, 저는…보다 더 멋지게 살고 싶었어요. 그저 이런 쳐먹고 낄낄대는 시시한 기억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나 평화통일, 질병 극복, 우주 탐험…같은…보다 멋진…더 보람찬…그런 데이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 세포에게 연애세포 사령관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이런 위로 뿐이었다.
"휴지와 콘돔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정자들을 떠올려보게.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꿈과 기대를 갖고 태어 났겠는가.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네는 멋진 삶을 산 것일세.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말게"
…그녀가 집에 도착한 오후 2시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진 말싸움 통화는 새벽 3시 반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물론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은 여친의 울음이었고, 대뇌 사령부 전원은 뇌세포 2만 8천개의 스트레스성 사망이라는 괴멸적인 통보만 받고 침통함 속에서 한숨 돌렸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 등등, 언젠가 만취했던 날 서로 웃으면서 털어놓은 지난 연애사 속 상대들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여친의 입을 통해 '죽일 년, 살릴 년' 탄이 되어 뇌세포들을 집중 폭격했고, '오빠는 그 년들한테는 안 그랬을거면서…' 또는 '하이고, 그래. 그런 어리고 이쁜 년들 만나다가 나같은 이제 다 늙은 년 만나서…' 등의 신도림 조약을 어긴 폭언들이 터져 나오면서, 깊은 우울함과 좌절만이 또 한번 대뇌 사령부 전체에 큰 상처만을 남았다.
"후, 다들 수고 했습니다. 이제 쉬십시다"
좌뇌 사령부가 최종적으로 금번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물론 연애세포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당장 내일 일요일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주 초반까지 피곤해 집니다. 미안하다는 카톡 한 통, 승인 요청 바랍니다"
"지금 간신히 전투 마무리 됐습니다. 설건드렸다가 말싸움 재발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육체 사령부에서는 그냥 좀 적당히 하고 자자는 의견을 내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 놈의 만성피로와 노쇄한 몸을 핑계로 매번 연애를 망치는 답답한 의견만을 보내왔다. 물론 육체 사령부 측에서는 반대로 연애 세포 사령관을 향해 "나이 쳐먹고도 지가 아직 20대인 줄 아는 머저리"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도 기회도 얼마 없습니다. 이번 연애도 망쳐서, 평생 혼자 살 생각 하십니까? 그러다 진짜 평생 손양만 고생합니다"
연애세포 사령관이 독설을 내뿜자, 육체 사령관은 껄껄 웃었다.
"허허, 참 웃기는 소리도. 좋습니다. 이번 연애 성공해서 결혼까지 갔다고 칩시다. 연애 성공해서 결혼하면 뭐, 손양이 그때는 고생 안 할 것 같습니까? 남의 부대 걱정하지 마시고, 제발 본인 일이나 잘 하십시다. 왜 항상 그 놈의 연애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해야 되는지 참"
"그럼 아예 대놓고 거세하시던가! 지금 대뇌 사령부랑 아랫도리 사령부랑 조직이 이원화 되어서 얼마나 피차가 고생 많습니까!"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가장 민감한 주제가 튀어 나왔다. 대뇌 사령부와 아랫도리 사령부의 갈등…. 그랬다. 당연히 조직체계상 대뇌 사령부는 이 김박스 신체와 정신 전체의 최상위 조직체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체계도상의 일일 뿐, 실질적으로 아랫도리 사령부는 신체 전체의 예산 및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실세 조직이었다.
"피곤 타령 맨날 하는데, 그 놈의 딸딸이만 좀 덜치고 일찍일찍 자기만 해도 피로는 3일 내로 싹 사라지겠구만"
오죽하면 뉴런 사이에서도 "이쯤해선 생각을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거시기로 하는거네" 같은 자조적인 말들이 나올 지경이었기에, 연애세포 사령관의 그 말은 아랫도리 사령부로서도 꽤 찔리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육체 사령관도 할 말은 많았다.
"무슨 꼭 우리가 나쁜 놈들처럼 이야기 하는데…자율신경계 군단 애들 항상 지멋대로 움직이는거 알지? 뜬금없이 대포동 발사대에 올리고, 아침마다 올리고, 어? 그게 우리 잘못이야? 우리도 그거 때문에 아주 죽겠어. 그리고, 뭐, 딸딸이…말 잘했네. 막말로 딸딸이가 우리가 좋아서 쳐? 거 번연계 쾌락중추부에서 내려온 명령 따라서 하는거 뿐인데. 거세를 할게 아니라 아예 니네 그 애들을 잘라버려"
"번연계 애들 자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걸 아는 놈이 거세를 하라고 해? 너야말로 거세하면 무슨 변화 생기는 줄은 알고 하는 말이야? 애초에 뭔 연애세포 따위가 이리 설치는지 원"
하지만 치열한 말다툼이 되어가는 상황을 "그만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정리한 대뇌 피질 원수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뭐 안 하던 짓도 아니고…, 아쉬운 놈이 우물 파야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카톡 보내고… 다들 이제 자자. 그만들 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고단한 대뇌사령부의 하루가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새벽 4시에 이른 시간. 각각의 조직들은 취침 모드에 들어갔고, 수면 여단은 세포 복구를 위해 빠르게 전신 전개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수면 여단 내 독립 군무원 조직 '드림웍스' 팀도 새로운 작품의 상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대뇌사령부는 이렇게 열심히, 바쁘게 일할 것이다. 김박스의 오늘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연애세포 사령관 역시 눈을 붙이며 문득 그냥 입에 붙은 사랑가, '사랑의 횃불'을 새삼스레 읇조리며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이 연애를 지키는 우리
사나이 욕망으로 오늘을 산다
여친의 불벼락을 무릅쓰면서
탈솔로 행복미래번식을 위해
전우여 이 연애는 내가 지킨다
사랑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