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툰 사람이다. 거의 모든 일에 서투르다. 그래서 그 나이대에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거나 해냈어야 하는 일들을 매번 제 때 못하고 한참 뒤늦게서야 겪고, 배웠다. 그나마도 익숙해지는 데에는 남의 곱절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미정 어머니, 미정이가 학습이 많이 더디네요. 집에서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 너는 무슨 자전거 하나를 이렇게 못 타. 지금이 며칠째야 도대체. 아빠 하는데로 이렇게 타보라고. 에유에유, 야, 관둬 그냥"
"아하핫, 야 서미정! 너 화장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야, 이게 뭐야. 너 화장 처음 해봐?"
나로서는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오해도 참 많이 받았다. 그것은 인간관계나 업무, 사생활에 관해서도 다를 바가 없어서 곤혹스러운 일도 참 많았다.
"서미정, 너 표정이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아니긴 뭐가 아냐 표정이 그런데"
"미정씨,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거에요? 아니면 뭐, 회사 다니기 싫어서 태업하는거에요?"
"선배, 저한테 서운한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 불편한거 싫어해요."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고, 애써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 가장도 많이 해봤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매번 나의 참담한 부끄러움으로 끝나곤 했다. 아무리 애써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남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고, 나에 대한 예의나 존중 따위는 사라진 채 접근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런 사람들조차도.
"미정씨는 왜 아무 말도 안해요? 남친 없어요? 아, 왠지…미정씨는 모쏠?"
"차라리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아 진짜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문제고. 이거 진짜 어쩌니. 갑갑하네 증말"
"미정씨는 참 성실하기는 한데 말이야…하, 참. 그냥 이거 아영씨한테 맡기고, 미정씨는 이거 해요"
노력해서 무언가를 시도해 내 딴에는 '제법 이 정도면 그럭저럭'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의 눈에는 여전히 보잘 것 없고, 형편 없는 것에 그쳤고,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대단한 것은 바라지도 않을테니 그냥 딱 남만큼, 부끄러움 당하지 않을 만큼만' 하고 바랬던 것은 부끄러움만 실컷 안겨주었다. 평정과 보통을 가장했음에도 그것은 남들에게는 어설픈 허세로 밖에 비쳐지지 않았고 집요한 누군가들에게 그러한 허장성세는 오히려 톡톡한 망신을 위한 보기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저 근데 오늘 옷, 일부러 그렇게 입으신거에요?"
"이건 근데 뭐야? 누가 뭐 만들다 만건가? 어? 이거 미정씨거야?"
"그거 반대로 쥐셨어요. 그리고 아까 그거도, 이렇게 하는거에요. 안 해보셨어요?"
수많은 대실패 끝에 남들의 조롱과 동정 속에 겨우겨우 무던함을 가장하고, 괴로운 표정을 감추고 혼자 힘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눈을 감노라면,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귓가를 향해 또르르 흐르는 그런 일상도,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냥 확 사라지고 싶다'
같은 실수, 같은 실패를 겪어도 나는 더 참담했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생각이 나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왜 나만 이래야 할까, 왜 다들 나한테만? 내가 그렇게…참. 서운함과 억울함에 남들을 원망하고, 탓하다가도, 결국 그 마지막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달리기는 매번 꼴등,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부족하고 외모도 못났고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집도 가난하고 재미도 자신감도 없고 약하고 피곤하고 외로웠다. 그래, 나는 항상 외로웠다. 물론 내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서투름 때문에, 나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도 그리 오래지 않아 내 곁에서 떠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갔다기보다는 서서히 나와의 인연이 옅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붙잡을 능력도 힘도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주길 은근하게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래서 가끔 그들이 모처럼 간만에 시간을 쪼개어 나와 함께 해주었을 때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들과의 인연에 정성을 기울였지만 역시나 서투른 나로서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버리거나 쓸데없는 오해를 유발하거나 하는 식으로, 역효과만 유발하곤 했다.
"그냥 넌 조금… 뭐라고 해야되나,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어"
그러한 내 모든 것들, 나의 한심함과 부족함이 너무 아쉽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참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 사실 지금도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나도 정말 잘하고 싶다. 남들처럼 멋있게 척척, 착착해내고, 일이 안 예상처럼 안 풀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멋있게 해결해내고, 일이 꼬여도 역시 운 좋게 술술 풀려 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재주와 운과 능력이 갖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 당장 영혼을 바쳐서라도.
"아, 너무 우울한 이야기죠…"
또 이런 식이다.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 같은 말을 소개팅 자리에서 해버렸다. 하마터먼 눈물까지 찔끔할 뻔 했다. 멍청이. 그렇게 오바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했는데. 다행히 남자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솔직해서 너무 좋은걸요. 그리고 저도 많이 공감해요. 저도 비슷한 고민 많이 하거든요"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긴 어색함. 회사의 주연 과장님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였다. 한번도 소개팅 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놀라며 "그럼 더 주선해봐야겠네. 만나봐" 하며 알아봐 준 자리.
"여기 커피 맛있네요"
또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초조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내 말에 빙긋 웃더니 "네, 맛있네요" 하고 받아준다. 나의 '아무 말'에 그저 별 뜻 없이 쳐주는 맞장구지만, 그 부드러운 포근함이 나는 참 좋았다. 누군가의 말에서 묘한 조롱이나 무시, 동정이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포근함을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뭐, 내 피해의식인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별 뜻 없는 맞장구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문득 안쓰럽고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나도 그의 미소처럼이나 평소에도 화사한 봄날의 미소를 짓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웃어봐야 어색하게 찡그린 미소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식사도 없이 카페에서 저녁 7시까지 무려 5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어제 저녁부터 굶었던 터라 너무 배가 고팠지만, 남자는 식사 제안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역 앞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문득 그제서야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이나 '아, 이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많이 떠올랐다.
"언니, 그 남자 어땠어?"
내 첫 소개팅이라는 말에, 자기가 먼저 신이 나서 코디도 도와주고 화장도 도와준 재희. 집에 도착했다는 카톡에 재희가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 많이 하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 조금,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재희는 "정말? 와, 너무 잘됐다" 하고 웃더니 물었다.
"그럼 애프터는? 언제 보기로 했어?"
"응?"
"남자가 다시 또 보자고 안 했어?"
"어…어. 그러네"
그랬다. 그냥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미정씨 같은 분하고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는 근사한 마지막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이 그저 예의 차린 거절의 멘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대답한 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안했다.
잠깐의 침묵 후 재희는 "뭐…, 요즘에는 애프터 신청 바로바로 안 하고 나중에 따로 하기도 한다더라. 요즘 남자들 면전에서 까이는거 디게 무서워하잖아" 하고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그때도 정말 그래서 그런거면 좋겠다 하고 바라면서도 "뭐, 또 연락하겠지. 마음 있으면" 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겼다. 아니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리고 '마음 있으면' 이라는 말을 할 때 왠지 가슴 한 켠이 쿡 하고 아팠다.
"그래, 여튼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또 연락할께"
"응, 아 그리고 소개팅 이것저것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고맙긴. 잘 안되도, 너무 우울해하지마. 내가 또 알아봐줄께. 아영 언니네 회사에도 좋은 남자 많대"
"하하, 아니야"
괜히 어설픈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 받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혼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의 눈치없음과 사회성 부족을 욕했다. 그랬다, 그렇지. 그 말은 거절의 말이지, 어떻게 그 말을 "좋은 인연이 되자" 라는 말로 듣는가. 머저리. 그리고 그 와중에 내 뱃 속은 빨리 밥을 넣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맹렬한 경고음을 알렸다. 그것도 한심했다.
엄마가 집에서 보내온 집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러나 끓이면서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불 올려놓은 것을 깜박하고 쓰레기 분리수거와 빨래까지 걷어놓고서야 국물이 다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저리"
나의 서투름과 부족함에 다시 한번 나를 저주하게 됐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 밥상 하나 차리는 것도 못하는 모지리가 됐나. 자꾸 스스로가 한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라고 재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다 졸아서 된장액기스가 되어버린 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또 다시 스스로를 향해 욕을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밉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명목 하에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1층의 생산 라인에서 돕게 되었다. 사람이 자꾸 나가는지, 요즘 자주 있는 일이다. 멍하니 라인에서 하루종일 똑같이 부품을 결합했다. 단차가 잘 맞지 않은 부품은 손톱으로 꾹 눌러가며 조립을 해야 했기에 검지 손톱이 얼얼하고 아팠다.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같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얼얼한 작은 통증이 그나마 나의 잠도 깨워주고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면, 옆의 숙희 언니처럼 저렇게 굳은 살도 생기고, 손 마디마디도 굵어지는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자기 어제 소개팅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점심을 먹고 라인에 다시 서노라니 그녀가 물었다. 나는 새삼 왜 그걸 떠벌렸을까, 하고 막심한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꽤 들떴던 모양이다.
"그냥 잘 안됐어요"
"왜? 남자가 별로야?"
아니, 그렇지 않다. 착하게 생긴 인상에, 에, 키는 조금 작고, 배도 조금 나왔고… 조금 객관적인 기준에선 그저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이 좋았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동정하지도, 너무 차갑게 굴지도 않아서 좋았다.
"아니요, 그냥…"
무언가 그를 욕하지 않고, 나도 초라해지지 않는 답을 머릿 속으로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잘 안됐어요"
겨우 한숨 토하듯이 그 말을 뱉어내자 언니는 "그래, 아니면 마는거지. 소개팅인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양 넘긴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꽤 끊겼다. 숙희 언니도 말을 그렇게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내가 왜 소개팅 한다는 말은 꺼냈을까 하고 다시 한번 후회하며, 어색한 분위기에서 굳이 대수롭게 뭘 묻지도 않고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끝날 무렵 숙희 언니가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제안 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집에 왔다. 피곤했다. 밥 차릴 힘도 없어서 그냥 윗도리만 간신히 벗고 침대에 누웠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다시 벗어놓은 옷을 입으려다. 그냥 편한 검정 고무줄 치마와 검정 티로 갈아입고, 파란 가디건을 걸쳤다. 색이 참 안 어울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에 대한 심술인지도 모르겠다.
"후"
슬리퍼를 신으려다 다시 로퍼에 오른발을 끼워넣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가디건을 벗어 제끼고 그냥 아디다스 바람막이를 걸쳤다. 파란 운동화를 신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게 없냐. 옷 하나도"
그냥, 걸어서 1분 거리의 동네 카페에 하나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갈 곳도 참 이렇게 이상하게 어울리지도 않게 간다. 참 센스도 없고, 모자라다. 나는 내가 정말 정말 싫다. 정말 싫다.
카페에 비치된 여행 잡지 한 권을 넘겨보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다섯 테이블 있는 이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하나 뿐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맞은 편 골목 입구에 큰 커피샵이 하나 생기고 여기 손님이 많이 줄었다. 주인 아저씨의 우울한 표정이 점점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비가 한두방을 묻어나기 시작하고, 가로등빛이 서서히 빗줄기에 번져보일 무렵, 나는 커피를 다 마셨다. 하루종일, 내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한번씩, 아는 동생들이나 언니들의 안부 카톡 정도. 사실 그것도 내 책임이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쓸쓸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의 나는 고독사에 대해 문득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종일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이라도 온다면 나는 그렇게 죽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득 그냥 지금 누군가와 연애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 TV프로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싶었다. 아니아니, 그냥 주말 동안 누군가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남친이랑 여행도 가고, 그래,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올해 나이 31살, 이제 몇 년 후면 점점 더 힘들어지겠지.
비 때문에 센치해진 탓일까. 지나치게 혼자 우울함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 이대로 살다 혼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애완동물은, 아니 반려동물은, 잘 간수할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도 잘 못 챙기는 인간이 말도 안 통하는 짐승에게 잘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키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막연한 생각이지만 정말로 죽는 날까지 모태솔로로 죽지야 않겠지. 아니,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여행잡지에 눈길을 둔다. 히말라야 산맥의 사진이 멋있어 보였다.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쉬고 싶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차라리 그럴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성형이나 하면. 그럼 조금은 사정이 낫지 않을까. 얼굴에 칼 대는건 무섭지만.
[ 미정씨 ]
조금 울적해져 창 밖을 바라보노라니 카카오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소개팅의 그 남자, 영석씨였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테이블을 툭 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오늘 출근 잘 하셨죠? 저녁 드셨어요? ]
[ 안녕하세요, 네, 근데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
답장을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허둥지둥 대는 내 모습에 사장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다시 휴대폰에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대화는 그걸로 끊어진다. 거의 30분 가까이 답장이 없다. 무언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마땅한 말도 생각이 안나고, 빈 커피잔을 놓고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고하세요"
"예, 또 오세요"
무미건조한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 그 또 오세요, 라는 말이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허튼 생각하지 말고 솔로의 세계에 머무르세요' 같은 말로. 점점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비를 몇 방울 맞고 집에 들어와 옷을 다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휴대폰만 챙겨 침대에 눕는다. 새삼 아직 내가 안 씻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귀찮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비구름에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혼자 휴대폰 불빛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 죄송해요, 제가 지금 회사 회식 중이라서;;; 그보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영화 어떠세요? ]
솔직한 마음으로 기뻤다. 나 되게 비참한 방식으로 까인게 아니라, 그냥 순수히 남자가 미쳐 말을 못 꺼낸 것 뿐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 애프터 신청 받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뭐가 서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답장이 늦어서? 그 날 말을 안 해서? 그 때문에 내가 입장이 난처해져서? 그리고 웃겼다. 새삼스레. 남자에 목을 매는 그런 내가 아닌데.
[ 네, 어떤 영화 보고 싶으세요? ]
[ 미정씨 보고 싶은 영화요. 뭐 보고 싶으세요? ]
사실 극장 간지 너무 오래되서 무슨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글쎄. 그냥 영화 앱으로 업데이트까지 한 끝에 볼만한 영화를 골라본다. 남자는 [ 좋아요 ] 하고 대답하더니 [ 그럼 예매해놓을게요 ] 라며 은연 중에 데이트 약속을 확정 짓는다. 사실 난 시간도 날짜도 어디서 볼지도 이야기 안 했는데.
"그래, 다 케바케라니까. 응응, 재미나게 봐"
"어어~"
재희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만나러 가도 될까, 하는 식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너무 티 나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뭘 입고 가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내일은 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속옷도 사야되나, 하고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바보같음에 빵 터졌다. 그렇게 혼자 미친 사람처럼 히히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기로 했다.
다음 날의 퇴근길에 옷 매장에 들렀다. 옷 사는 것도 엄청 간만이다. 하도 간만에 왔더니 뭐가 이쁜 줄도 잘 모르겠다. 이 옷 저 옷 입어봤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매장에 사람이 많아 여러 번 이것저것 입어보기도 어려웠다. 다들 참 옷도 잘 입고 이쁘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만 촌스럽고 못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자신을 갖기로 했다. 결국 옷은 못 샀다. 아직 화요일도 있고, 수요일도 있고, 뭐 시간은 많았으니까.
"흠"
집에 와서 데이트 코디, 여친룩, 소개팅 패션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해봤지만 다들 20대 초중반의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 패션만 보여 도움이 안 됐다. 저런 애들이야 무슨 옷을 입는들 안 예쁠까. 입술만 깨물다 옷장을 열고 다시 이 옷 저 옷을 살펴봤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옷이 저번 소개팅 때의 그 원피스였다. 재희도 그게 제일 낫다고 했다. 또 입고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이 나왔다.
"옷이 없냐…"
탄식을 하며 더 찾다가, 얇은 가죽재킷을 하나 찾았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잘 입고 다녔는데. 지금 입기는 조금 더울지도…, 싶어서 휴대폰으로 날씨를 봤다. 주말 날씨는 조금 흐리다고 했다. 아주 못 입을 성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걸 플랜B로 하고, 내일, 모레 또 옷을 보기로 했다.
결국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가 못 참고 [ 저희 영화 언제 볼까요? ]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남자는 [ 아, 제가 깜박했네요. 토요일 12시 영화에요. 신촌에서 뵈어요 ] 하고 답장을 했다. 아, 조금 더 늦게 만나면 좋았을텐데. 결국 맘에 드는 옷을 못 사서 내일까지 좀 봤으면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죽재킷을 입기로 했다.
"내일 안 덥기를"
…더웠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일은 오전에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는데. 내일 입으면 딱일텐데. 아침까지 바람막이랑 고민하다가 그냥 이걸 입었는데 후회했다. 아니 뭘 입었어도 사실 후회했겠지만.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는데도 더웠다.
[ 어디세요? ]
벌써 11시 40분인데. 12시 영화라고 안 했나. 설마 밤 12시 영화는 아니겠지. 전화를 했는데 꺼져 있었다. 카톡을 보냈다. 날이 더워서 땀이 조금씩 났다. 땀냄새 날까 두려웠다. 시간이 애매해서 카페에서 기다리기도 조금 그랬다.
"하아"
조금 더 기다리노라니 어느새 11시 58분. 영화는 이미 늦었네 싶었다.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가 '딱 1분만 더'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또 걸었다. 역시 꺼져 있었다. 설마 늦잠 자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바람 맞는건가 하고도 생각했다. 그 역시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다리가 아팠다. 힐을 안 신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키가 작으니까, 신으면 안 좋아하겠지 싶어서.
"어디세요?"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 조금 화도 났고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마음에 우울한 먹구름도 마음 속에 가득했지만 그보다는 어쨌든 일단 반가웠다.
"미안해요, 제가 사고가 나서요"
"사고요?!"
오다가 다 와서 오토바이랑 접촉사고가 났다고 했다. 하필이면 전화기를 떨어뜨려서 망가진 통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고.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건너건너건너 통해서 번호를 알아내느라 시간도 걸렸다고 했다.
"많이 다치신거에요?"
"아니에요, 다리만 조금…"
"어느 병원이에요? 입원한거에요?"
남자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아, 그럼 여기 신촌 세브란스 병원인데 오시겠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거리길래 택시 타기도 민망해서 걸었더니, 너무 더웠다. 또 급한 마음에 서둘렀더니 땀이 줄줄 났다. 이미 화장도 무너졌을 것 같고, 망한 데이트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 나 때문이다. 속상했다. 나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거다. 순간 울컥했다. '왜 나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찼다.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 하는 것도 잘 안되는 나다. 머피의 법칙, 징크스, 불운 뭐 그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글썽글썽한 눈물을 물티슈로 조심스레 닦고 휴대폰을 보았더니 다행히 화장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조금 시원했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한지 정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멍청이'
그러다가 어차피 그가 다시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로 가야겠지, 싶어서 두리번 거리며 검색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
남자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깁스를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붕대만 한 거라고 했다. 재차 부러진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볍게 삐끗한 정도라며 걷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조금 절뚝이기는 했지만.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미정씨가 왜 미안해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저 만나러 오시다가 다치신 거잖아요. 미안해요"
그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오히려 제가 늦어서 미안해요. 영화도 못 보고… 그보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하고 제안했다. 다친 다리로 멀리가기 미안해서 그냥 병원 푸드코트에서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오면서 케이크랑 꽃다발도 샀는데, 넘어지면서 하필 쓰레기봉투 있는데로 떨어뜨려서 다 망가지고 뭐 그래서, 케이크는 버렸고 꽃다발도 요거 한 송이만 따로 빼왔어요"
남자는 가방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고마워요. 근데 꽃다발 받아야 할 사람은 영석씨 같은데요. 문병 받게"
"하하, 그러네요"
영석씨는 순두부찌개를, 나는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골랐다. 밥이 나오자 허기가 졌던 우리는 둘 다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진 않아서 더 밥 먹는데 집중한 것도 있었다. 반쯤 먹었을 무렵, 영석씨가 말했다.
"사실…저도 소개팅 같은걸 많이 안 해봐서, 아니 안 해봐서, 당연히 머리로는 애프터 신청을 해야 되는거 아는데도 막상 헤어질 때 깜박했어요"
어색하게 웃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소개팅 때 미정씨가 막 어렸을 적부터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남들보다 늦고 그런 이야기 했던 거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되게 공감도 가고, 제가 더 잘해주고 싶기도 하고, 음, 그런 마음이 들었었거든요"
그랬나.
"아까도 저 다친거 보자마자 미정씨가 자기 때문에 저 다쳤다고 미안하라고 한거, 그 말 들으면서 뭔가 가슴 여기가 디게 뭉클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막 좀, 그랬어요"
"왜요"
"그냥 보통은, 1시간씩 연락도 없는데 기다리지도 않지만 그랬다고 해도 디게 화날거 같은데, 화도 안 내고 또 병원까지 와서는 또 자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냥 그거 보면서 미정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옛날부터 그런 자기…비하? 고찰? 후회? 뭐 그런 마음 같은게 참 많은 사람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 이건 좀 아닌가. 여튼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어서, 정말 놀랐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쿠욱 아팠다.
"…"
"어쨌든 그랬어요. 그리고 진짜…미안하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한 명 정도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까 조금 울어두어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좋았다.
"우리 밥 먹어요 밥"
"아, 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밥을 먹으라는 내 말에 어색하게 또 웃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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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어머니, 미정이가 학습이 많이 더디네요. 집에서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 너는 무슨 자전거 하나를 이렇게 못 타. 지금이 며칠째야 도대체. 아빠 하는데로 이렇게 타보라고. 에유에유, 야, 관둬 그냥"
"아하핫, 야 서미정! 너 화장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야, 이게 뭐야. 너 화장 처음 해봐?"
나로서는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오해도 참 많이 받았다. 그것은 인간관계나 업무, 사생활에 관해서도 다를 바가 없어서 곤혹스러운 일도 참 많았다.
"서미정, 너 표정이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아니긴 뭐가 아냐 표정이 그런데"
"미정씨,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거에요? 아니면 뭐, 회사 다니기 싫어서 태업하는거에요?"
"선배, 저한테 서운한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 불편한거 싫어해요."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고, 애써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 가장도 많이 해봤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매번 나의 참담한 부끄러움으로 끝나곤 했다. 아무리 애써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남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고, 나에 대한 예의나 존중 따위는 사라진 채 접근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런 사람들조차도.
"미정씨는 왜 아무 말도 안해요? 남친 없어요? 아, 왠지…미정씨는 모쏠?"
"차라리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아 진짜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문제고. 이거 진짜 어쩌니. 갑갑하네 증말"
"미정씨는 참 성실하기는 한데 말이야…하, 참. 그냥 이거 아영씨한테 맡기고, 미정씨는 이거 해요"
노력해서 무언가를 시도해 내 딴에는 '제법 이 정도면 그럭저럭'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의 눈에는 여전히 보잘 것 없고, 형편 없는 것에 그쳤고,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대단한 것은 바라지도 않을테니 그냥 딱 남만큼, 부끄러움 당하지 않을 만큼만' 하고 바랬던 것은 부끄러움만 실컷 안겨주었다. 평정과 보통을 가장했음에도 그것은 남들에게는 어설픈 허세로 밖에 비쳐지지 않았고 집요한 누군가들에게 그러한 허장성세는 오히려 톡톡한 망신을 위한 보기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저 근데 오늘 옷, 일부러 그렇게 입으신거에요?"
"이건 근데 뭐야? 누가 뭐 만들다 만건가? 어? 이거 미정씨거야?"
"그거 반대로 쥐셨어요. 그리고 아까 그거도, 이렇게 하는거에요. 안 해보셨어요?"
수많은 대실패 끝에 남들의 조롱과 동정 속에 겨우겨우 무던함을 가장하고, 괴로운 표정을 감추고 혼자 힘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눈을 감노라면,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귓가를 향해 또르르 흐르는 그런 일상도,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냥 확 사라지고 싶다'
같은 실수, 같은 실패를 겪어도 나는 더 참담했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생각이 나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왜 나만 이래야 할까, 왜 다들 나한테만? 내가 그렇게…참. 서운함과 억울함에 남들을 원망하고, 탓하다가도, 결국 그 마지막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달리기는 매번 꼴등,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부족하고 외모도 못났고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집도 가난하고 재미도 자신감도 없고 약하고 피곤하고 외로웠다. 그래, 나는 항상 외로웠다. 물론 내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서투름 때문에, 나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도 그리 오래지 않아 내 곁에서 떠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갔다기보다는 서서히 나와의 인연이 옅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붙잡을 능력도 힘도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주길 은근하게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래서 가끔 그들이 모처럼 간만에 시간을 쪼개어 나와 함께 해주었을 때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들과의 인연에 정성을 기울였지만 역시나 서투른 나로서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버리거나 쓸데없는 오해를 유발하거나 하는 식으로, 역효과만 유발하곤 했다.
"그냥 넌 조금… 뭐라고 해야되나,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어"
그러한 내 모든 것들, 나의 한심함과 부족함이 너무 아쉽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참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 사실 지금도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나도 정말 잘하고 싶다. 남들처럼 멋있게 척척, 착착해내고, 일이 안 예상처럼 안 풀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멋있게 해결해내고, 일이 꼬여도 역시 운 좋게 술술 풀려 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재주와 운과 능력이 갖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 당장 영혼을 바쳐서라도.
서툰 사람
"아, 너무 우울한 이야기죠…"
또 이런 식이다.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 같은 말을 소개팅 자리에서 해버렸다. 하마터먼 눈물까지 찔끔할 뻔 했다. 멍청이. 그렇게 오바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했는데. 다행히 남자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솔직해서 너무 좋은걸요. 그리고 저도 많이 공감해요. 저도 비슷한 고민 많이 하거든요"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긴 어색함. 회사의 주연 과장님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였다. 한번도 소개팅 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놀라며 "그럼 더 주선해봐야겠네. 만나봐" 하며 알아봐 준 자리.
"여기 커피 맛있네요"
또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초조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내 말에 빙긋 웃더니 "네, 맛있네요" 하고 받아준다. 나의 '아무 말'에 그저 별 뜻 없이 쳐주는 맞장구지만, 그 부드러운 포근함이 나는 참 좋았다. 누군가의 말에서 묘한 조롱이나 무시, 동정이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포근함을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뭐, 내 피해의식인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별 뜻 없는 맞장구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문득 안쓰럽고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나도 그의 미소처럼이나 평소에도 화사한 봄날의 미소를 짓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웃어봐야 어색하게 찡그린 미소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식사도 없이 카페에서 저녁 7시까지 무려 5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어제 저녁부터 굶었던 터라 너무 배가 고팠지만, 남자는 식사 제안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역 앞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문득 그제서야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이나 '아, 이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많이 떠올랐다.
"언니, 그 남자 어땠어?"
내 첫 소개팅이라는 말에, 자기가 먼저 신이 나서 코디도 도와주고 화장도 도와준 재희. 집에 도착했다는 카톡에 재희가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 많이 하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 조금,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재희는 "정말? 와, 너무 잘됐다" 하고 웃더니 물었다.
"그럼 애프터는? 언제 보기로 했어?"
"응?"
"남자가 다시 또 보자고 안 했어?"
"어…어. 그러네"
그랬다. 그냥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미정씨 같은 분하고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는 근사한 마지막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이 그저 예의 차린 거절의 멘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대답한 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안했다.
잠깐의 침묵 후 재희는 "뭐…, 요즘에는 애프터 신청 바로바로 안 하고 나중에 따로 하기도 한다더라. 요즘 남자들 면전에서 까이는거 디게 무서워하잖아" 하고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그때도 정말 그래서 그런거면 좋겠다 하고 바라면서도 "뭐, 또 연락하겠지. 마음 있으면" 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겼다. 아니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리고 '마음 있으면' 이라는 말을 할 때 왠지 가슴 한 켠이 쿡 하고 아팠다.
"그래, 여튼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또 연락할께"
"응, 아 그리고 소개팅 이것저것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고맙긴. 잘 안되도, 너무 우울해하지마. 내가 또 알아봐줄께. 아영 언니네 회사에도 좋은 남자 많대"
"하하, 아니야"
괜히 어설픈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 받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혼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의 눈치없음과 사회성 부족을 욕했다. 그랬다, 그렇지. 그 말은 거절의 말이지, 어떻게 그 말을 "좋은 인연이 되자" 라는 말로 듣는가. 머저리. 그리고 그 와중에 내 뱃 속은 빨리 밥을 넣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맹렬한 경고음을 알렸다. 그것도 한심했다.
엄마가 집에서 보내온 집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러나 끓이면서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불 올려놓은 것을 깜박하고 쓰레기 분리수거와 빨래까지 걷어놓고서야 국물이 다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저리"
나의 서투름과 부족함에 다시 한번 나를 저주하게 됐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 밥상 하나 차리는 것도 못하는 모지리가 됐나. 자꾸 스스로가 한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라고 재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다 졸아서 된장액기스가 되어버린 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또 다시 스스로를 향해 욕을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밉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명목 하에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1층의 생산 라인에서 돕게 되었다. 사람이 자꾸 나가는지, 요즘 자주 있는 일이다. 멍하니 라인에서 하루종일 똑같이 부품을 결합했다. 단차가 잘 맞지 않은 부품은 손톱으로 꾹 눌러가며 조립을 해야 했기에 검지 손톱이 얼얼하고 아팠다.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같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얼얼한 작은 통증이 그나마 나의 잠도 깨워주고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면, 옆의 숙희 언니처럼 저렇게 굳은 살도 생기고, 손 마디마디도 굵어지는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자기 어제 소개팅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점심을 먹고 라인에 다시 서노라니 그녀가 물었다. 나는 새삼 왜 그걸 떠벌렸을까, 하고 막심한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꽤 들떴던 모양이다.
"그냥 잘 안됐어요"
"왜? 남자가 별로야?"
아니, 그렇지 않다. 착하게 생긴 인상에, 에, 키는 조금 작고, 배도 조금 나왔고… 조금 객관적인 기준에선 그저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이 좋았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동정하지도, 너무 차갑게 굴지도 않아서 좋았다.
"아니요, 그냥…"
무언가 그를 욕하지 않고, 나도 초라해지지 않는 답을 머릿 속으로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잘 안됐어요"
겨우 한숨 토하듯이 그 말을 뱉어내자 언니는 "그래, 아니면 마는거지. 소개팅인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양 넘긴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꽤 끊겼다. 숙희 언니도 말을 그렇게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내가 왜 소개팅 한다는 말은 꺼냈을까 하고 다시 한번 후회하며, 어색한 분위기에서 굳이 대수롭게 뭘 묻지도 않고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끝날 무렵 숙희 언니가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제안 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집에 왔다. 피곤했다. 밥 차릴 힘도 없어서 그냥 윗도리만 간신히 벗고 침대에 누웠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다시 벗어놓은 옷을 입으려다. 그냥 편한 검정 고무줄 치마와 검정 티로 갈아입고, 파란 가디건을 걸쳤다. 색이 참 안 어울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에 대한 심술인지도 모르겠다.
"후"
슬리퍼를 신으려다 다시 로퍼에 오른발을 끼워넣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가디건을 벗어 제끼고 그냥 아디다스 바람막이를 걸쳤다. 파란 운동화를 신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게 없냐. 옷 하나도"
그냥, 걸어서 1분 거리의 동네 카페에 하나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갈 곳도 참 이렇게 이상하게 어울리지도 않게 간다. 참 센스도 없고, 모자라다. 나는 내가 정말 정말 싫다. 정말 싫다.
카페에 비치된 여행 잡지 한 권을 넘겨보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다섯 테이블 있는 이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하나 뿐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맞은 편 골목 입구에 큰 커피샵이 하나 생기고 여기 손님이 많이 줄었다. 주인 아저씨의 우울한 표정이 점점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비가 한두방을 묻어나기 시작하고, 가로등빛이 서서히 빗줄기에 번져보일 무렵, 나는 커피를 다 마셨다. 하루종일, 내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한번씩, 아는 동생들이나 언니들의 안부 카톡 정도. 사실 그것도 내 책임이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쓸쓸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의 나는 고독사에 대해 문득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종일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이라도 온다면 나는 그렇게 죽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득 그냥 지금 누군가와 연애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 TV프로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싶었다. 아니아니, 그냥 주말 동안 누군가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남친이랑 여행도 가고, 그래,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올해 나이 31살, 이제 몇 년 후면 점점 더 힘들어지겠지.
비 때문에 센치해진 탓일까. 지나치게 혼자 우울함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 이대로 살다 혼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애완동물은, 아니 반려동물은, 잘 간수할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도 잘 못 챙기는 인간이 말도 안 통하는 짐승에게 잘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키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막연한 생각이지만 정말로 죽는 날까지 모태솔로로 죽지야 않겠지. 아니,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여행잡지에 눈길을 둔다. 히말라야 산맥의 사진이 멋있어 보였다.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쉬고 싶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차라리 그럴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성형이나 하면. 그럼 조금은 사정이 낫지 않을까. 얼굴에 칼 대는건 무섭지만.
[ 미정씨 ]
조금 울적해져 창 밖을 바라보노라니 카카오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소개팅의 그 남자, 영석씨였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테이블을 툭 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오늘 출근 잘 하셨죠? 저녁 드셨어요? ]
[ 안녕하세요, 네, 근데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
답장을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허둥지둥 대는 내 모습에 사장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다시 휴대폰에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대화는 그걸로 끊어진다. 거의 30분 가까이 답장이 없다. 무언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마땅한 말도 생각이 안나고, 빈 커피잔을 놓고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고하세요"
"예, 또 오세요"
무미건조한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 그 또 오세요, 라는 말이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허튼 생각하지 말고 솔로의 세계에 머무르세요' 같은 말로. 점점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비를 몇 방울 맞고 집에 들어와 옷을 다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휴대폰만 챙겨 침대에 눕는다. 새삼 아직 내가 안 씻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귀찮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비구름에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혼자 휴대폰 불빛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 죄송해요, 제가 지금 회사 회식 중이라서;;; 그보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영화 어떠세요? ]
솔직한 마음으로 기뻤다. 나 되게 비참한 방식으로 까인게 아니라, 그냥 순수히 남자가 미쳐 말을 못 꺼낸 것 뿐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 애프터 신청 받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뭐가 서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답장이 늦어서? 그 날 말을 안 해서? 그 때문에 내가 입장이 난처해져서? 그리고 웃겼다. 새삼스레. 남자에 목을 매는 그런 내가 아닌데.
[ 네, 어떤 영화 보고 싶으세요? ]
[ 미정씨 보고 싶은 영화요. 뭐 보고 싶으세요? ]
사실 극장 간지 너무 오래되서 무슨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글쎄. 그냥 영화 앱으로 업데이트까지 한 끝에 볼만한 영화를 골라본다. 남자는 [ 좋아요 ] 하고 대답하더니 [ 그럼 예매해놓을게요 ] 라며 은연 중에 데이트 약속을 확정 짓는다. 사실 난 시간도 날짜도 어디서 볼지도 이야기 안 했는데.
"그래, 다 케바케라니까. 응응, 재미나게 봐"
"어어~"
재희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만나러 가도 될까, 하는 식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너무 티 나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뭘 입고 가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내일은 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속옷도 사야되나, 하고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바보같음에 빵 터졌다. 그렇게 혼자 미친 사람처럼 히히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기로 했다.
다음 날의 퇴근길에 옷 매장에 들렀다. 옷 사는 것도 엄청 간만이다. 하도 간만에 왔더니 뭐가 이쁜 줄도 잘 모르겠다. 이 옷 저 옷 입어봤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매장에 사람이 많아 여러 번 이것저것 입어보기도 어려웠다. 다들 참 옷도 잘 입고 이쁘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만 촌스럽고 못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자신을 갖기로 했다. 결국 옷은 못 샀다. 아직 화요일도 있고, 수요일도 있고, 뭐 시간은 많았으니까.
"흠"
집에 와서 데이트 코디, 여친룩, 소개팅 패션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해봤지만 다들 20대 초중반의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 패션만 보여 도움이 안 됐다. 저런 애들이야 무슨 옷을 입는들 안 예쁠까. 입술만 깨물다 옷장을 열고 다시 이 옷 저 옷을 살펴봤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옷이 저번 소개팅 때의 그 원피스였다. 재희도 그게 제일 낫다고 했다. 또 입고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이 나왔다.
"옷이 없냐…"
탄식을 하며 더 찾다가, 얇은 가죽재킷을 하나 찾았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잘 입고 다녔는데. 지금 입기는 조금 더울지도…, 싶어서 휴대폰으로 날씨를 봤다. 주말 날씨는 조금 흐리다고 했다. 아주 못 입을 성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걸 플랜B로 하고, 내일, 모레 또 옷을 보기로 했다.
결국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가 못 참고 [ 저희 영화 언제 볼까요? ]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남자는 [ 아, 제가 깜박했네요. 토요일 12시 영화에요. 신촌에서 뵈어요 ] 하고 답장을 했다. 아, 조금 더 늦게 만나면 좋았을텐데. 결국 맘에 드는 옷을 못 사서 내일까지 좀 봤으면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죽재킷을 입기로 했다.
"내일 안 덥기를"
…더웠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일은 오전에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는데. 내일 입으면 딱일텐데. 아침까지 바람막이랑 고민하다가 그냥 이걸 입었는데 후회했다. 아니 뭘 입었어도 사실 후회했겠지만.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는데도 더웠다.
[ 어디세요? ]
벌써 11시 40분인데. 12시 영화라고 안 했나. 설마 밤 12시 영화는 아니겠지. 전화를 했는데 꺼져 있었다. 카톡을 보냈다. 날이 더워서 땀이 조금씩 났다. 땀냄새 날까 두려웠다. 시간이 애매해서 카페에서 기다리기도 조금 그랬다.
"하아"
조금 더 기다리노라니 어느새 11시 58분. 영화는 이미 늦었네 싶었다.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가 '딱 1분만 더'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또 걸었다. 역시 꺼져 있었다. 설마 늦잠 자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바람 맞는건가 하고도 생각했다. 그 역시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다리가 아팠다. 힐을 안 신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키가 작으니까, 신으면 안 좋아하겠지 싶어서.
"어디세요?"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 조금 화도 났고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마음에 우울한 먹구름도 마음 속에 가득했지만 그보다는 어쨌든 일단 반가웠다.
"미안해요, 제가 사고가 나서요"
"사고요?!"
오다가 다 와서 오토바이랑 접촉사고가 났다고 했다. 하필이면 전화기를 떨어뜨려서 망가진 통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고.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건너건너건너 통해서 번호를 알아내느라 시간도 걸렸다고 했다.
"많이 다치신거에요?"
"아니에요, 다리만 조금…"
"어느 병원이에요? 입원한거에요?"
남자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아, 그럼 여기 신촌 세브란스 병원인데 오시겠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거리길래 택시 타기도 민망해서 걸었더니, 너무 더웠다. 또 급한 마음에 서둘렀더니 땀이 줄줄 났다. 이미 화장도 무너졌을 것 같고, 망한 데이트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 나 때문이다. 속상했다. 나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거다. 순간 울컥했다. '왜 나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찼다.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 하는 것도 잘 안되는 나다. 머피의 법칙, 징크스, 불운 뭐 그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글썽글썽한 눈물을 물티슈로 조심스레 닦고 휴대폰을 보았더니 다행히 화장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조금 시원했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한지 정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멍청이'
그러다가 어차피 그가 다시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로 가야겠지, 싶어서 두리번 거리며 검색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
남자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깁스를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붕대만 한 거라고 했다. 재차 부러진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볍게 삐끗한 정도라며 걷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조금 절뚝이기는 했지만.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미정씨가 왜 미안해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저 만나러 오시다가 다치신 거잖아요. 미안해요"
그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오히려 제가 늦어서 미안해요. 영화도 못 보고… 그보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하고 제안했다. 다친 다리로 멀리가기 미안해서 그냥 병원 푸드코트에서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오면서 케이크랑 꽃다발도 샀는데, 넘어지면서 하필 쓰레기봉투 있는데로 떨어뜨려서 다 망가지고 뭐 그래서, 케이크는 버렸고 꽃다발도 요거 한 송이만 따로 빼왔어요"
남자는 가방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고마워요. 근데 꽃다발 받아야 할 사람은 영석씨 같은데요. 문병 받게"
"하하, 그러네요"
영석씨는 순두부찌개를, 나는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골랐다. 밥이 나오자 허기가 졌던 우리는 둘 다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진 않아서 더 밥 먹는데 집중한 것도 있었다. 반쯤 먹었을 무렵, 영석씨가 말했다.
"사실…저도 소개팅 같은걸 많이 안 해봐서, 아니 안 해봐서, 당연히 머리로는 애프터 신청을 해야 되는거 아는데도 막상 헤어질 때 깜박했어요"
어색하게 웃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소개팅 때 미정씨가 막 어렸을 적부터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남들보다 늦고 그런 이야기 했던 거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되게 공감도 가고, 제가 더 잘해주고 싶기도 하고, 음, 그런 마음이 들었었거든요"
그랬나.
"아까도 저 다친거 보자마자 미정씨가 자기 때문에 저 다쳤다고 미안하라고 한거, 그 말 들으면서 뭔가 가슴 여기가 디게 뭉클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막 좀, 그랬어요"
"왜요"
"그냥 보통은, 1시간씩 연락도 없는데 기다리지도 않지만 그랬다고 해도 디게 화날거 같은데, 화도 안 내고 또 병원까지 와서는 또 자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냥 그거 보면서 미정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옛날부터 그런 자기…비하? 고찰? 후회? 뭐 그런 마음 같은게 참 많은 사람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 이건 좀 아닌가. 여튼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어서, 정말 놀랐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쿠욱 아팠다.
"…"
"어쨌든 그랬어요. 그리고 진짜…미안하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한 명 정도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까 조금 울어두어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좋았다.
"우리 밥 먹어요 밥"
"아, 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밥을 먹으라는 내 말에 어색하게 또 웃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정말 이번 만큼은 서툴고 불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원처럼 비는게 아니라, 스스로 꼭 그렇게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람한테만큼은.
< 끝 >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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