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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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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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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지난 밤 혜주와 크게 싸우고 늦게 잔 탓에 늦잠을 자버렸다. 눈을 뜨니 이미 8시 40분이었다. 아침 9시 반에 예정되어 있던 부서간 회의에 준비했어야 할 우리 팀의 보고서가 생각났다. 전화로 연경씨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보고서 자체가 빵꾸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냈다.

"후, 이런거는 진짜 좀 아니지 않아?"

그러나 연경씨가 출력한 것은 최종본이 아니었다. 수정의 수정을 거듭한 보고서의 최종본이 아닌, 그 전전 버전의 '파일명만 최종'이었던 버전을 들고 들어갔던 팀장님은 하필이면 사장님까지 참석한 회의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 그 '또라이'에게 찍힌 이상 올해의 승진도 물 건너갔을지 모른다.

그 사람 좋은 팀장님에게 따로 불려가서 한참 한 소리를 들었다. 한 소리 들은게 싫은게 아니라, 그나마 회사에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고 곤란하게 만든 것이 죄송스러웠다. 몇 번이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팀장님 역시 상한 속을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기미였다. 실제로 비슷한 케이스의 상황에서 안산 지점으로 날아간 기획 1팀 조 팀장의 케이스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의 농담 한 마디 없이 아침부터 모니터만 보고 일만 했다. 경원 주임이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팀장님 뒤끝 없으신거 아시잖아요" 하고 커피 한잔으로 나를 달랬지만, 사실 아침의 일보다 혜주와의 일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점심시간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허기가 기분을 조금 전환케 하는 오전 11시 39분.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으니 휴대폰에 혜주의 카톡이 와있다.

"흠"

반가움과 답답함, 두려움과 피곤함이 나를 휘감는다. 내용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어제의 싸움과는 상관없는, 혜주 어머니가 지방에서 우리 집으로 옥수수 보내주신다는데, 집 주소를 불러달라는 내용의 혜주와 혜주 어머니가 나눈 대화의 캡쳐 이미지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집 주소를 적어서 답장을 보냈다.

"식사하러 가요"

경원 주임과 연경씨가 다가왔다.

"어어"

휴대폰을 들고 가려다가, 배터리가 4% 밖에 안 남아있길래 충전줄을 꽂고 두고 나갔다.





내가 아침부터 시무룩해있자, 경원 주임이 "쭈꾸미 먹으러 갈까요? 매운거?" 하고 제안해온다. 그러자고 하며 걷노라니 연경씨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침부터…" 하고 사과해 온다.

"아냐, 연경씨가 무슨 잘못이야. 최종에 최종, 최종에 진짜 최종, 보고서 파일명을 이딴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저 윗 사람들이 문제지" 하고 웃어 넘겼다. 아니 정말로 연경씨가 무슨 잘못인가.

마침 쭈꾸미를 먹으러 가자 줄이 길다. 그냥 다른데 가서 먹을까 했는데 그냥 경원 주임이 먹자고 해서 기다려서 먹었다. 스- 스- 하고 매운 입을 달래가며 먹는다. 점심 메뉴치고는 조금 과하게 매운 것 아닌가 싶지만 정신없이 먹고 나오니 확실히 스트레스도 짜증도 한결 낫다.

셋이 커피 한잔씩을 테이크아웃해서 회사로 향한다. 이제야 조금 얼굴이 풀린 것 같다며 웃는 경원 주임의 말에 나도 피식 웃었다. 조금 부끄러워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그거 때문에 그런게 아니에요. 여자친구랑 어젯 밤에 한바탕 싸워서 그래요. 그게 좀 신경쓰여서"

곧바로 연경씨와 경원 주임이 왜 싸웠냐며 물어온다.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성격 차이지 성격 차이. 그냥 나는, 원래 조금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게 있어도 말 안 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건데… 그게, 기분이 많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그걸로 이래저래 싸우다가 싸움이 커졌지"

구태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러자 경원 주임이 말했다.

"차라리 바로바로 말하지. 나도 남자친구랑, 아니 이젠 남편이지. 하하하, 웃지 말아요. 7년 연애하고 결혼하면 이래" 하며 말실수를 수습하는 그녀. "아직도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 같으신가봐요" 하고 연경이 거들자 경원 주임은 더 크게 웃으며 "어! 진짜 그래. 결혼하니까 오히려 더 막 풋풋하다니까" 하면서 신혼의 위력을 뽑낸다.

"어쨌든,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남자들 마음 속에 꽁하니 갖고 있다가 갑자기 토해내면 우리도 당황스럽다니까. 대리님 그런 타입 아니잖아요. 아마 여자친구 분도, 당황스러워서 더 화를 낸 걸거에요. 그냥 오늘 이따가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털어버리세요" 하며 조언한다.

"응, 그래야죠" 하며 씁쓸하게 웃는 나.




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지만 답장이 없다. 1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일에 집중한다. 일이 많다. 소정 대리가 관두고 나서 인원 충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사실상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미 일이 많아 한 사람이 관둔건데-그것도 대리 급의 일이-, 그걸 두 사람 몫을 하려니 완벽히 될 리 없다. 몇몇 업무는 완전히 뒷전으로 미뤄졌고, 당장 급한 일부터 쳐내기 바쁘다.

그 와중에 보고를 위한 보고는 끝이 없고, 5월의 신사업건으로 지사들에게서 오는 문의는 갈수록 많아진다. 그러나 당장 본사에서도 현재 결정된 사안이 없다. 지사는 답답해하고, 본사는 초조해하며, 임원들은 히스테리에 절어있다.

몇 건의 급한 결제서류를 팀장님에게 전달하고, 몇 번의 자잘한 수정 끝에 그의 결제가 진행된다. 보고서가 빨리 돌아오길 고대한다. 하지만 아마도 결제판은 최소한 3~4일은 지나서야 돌아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지사들에 입을 꽤나 털어야 할 것이고.

그런 와중에 3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신사업에 관한 부가 기획안에 손을 댄다. 오늘은 야근이 확정적이다. 당장 다음 주까지 이 문서가 통과되어야 한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나를 압박한다. 뒤늦은 양치를 하려다가, 그냥 커피가 먼저 마시고 싶다.

"후"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한잔 만다. 카누가 있음에도 지금은 믹스타임이다. 뒷목이 뻐근하다. 뒷골이 지끈지끈한 것은 근 한달이 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커피믹스의 탓일까. 뱃살이 계속 늘고 있다. 아니, 핑계다. 그냥 나잇살이겠지. 회계팀 주연씨가 탕비실에 들어왔다가 인사한다.

"피곤해보이세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는 그녀. 나는 웃으며 "피곤해 죽겠어요" 하고 순순히 시인한다. 그녀도 그 말에 웃으며 "진짜 집에 가고 싶어요"하며 공감한다.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보고서에 들어갈 숫자를 다듬는다. 기초 자료는 똑같은데 목표와 기준점의 장난질로 성과와 기대치가 휙휙 변한다. 참으로 잔망스런 장난질이 아닐 수 없다. 한참을 작성하고 있노라니 혜주의 카톡이 또 와있다. 이미 35분 전에.

[ 잠깐 전화 좀 해 ]





옥상으로 올라와 혜주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는 그녀.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제부터 몸살 기운 있더니, 그녀와의 싸움보다 그녀의 몸상태가 걱정된다.

"미안해"

우선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어쨌든 나도 그녀도 서로 상처주는 말을 주고 받았으니까. 나 나름의 이유,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것 자체는 틀림이 없다. 무언가 말을 잇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하기로 했다.

"어제 말이 너무 과했어. 미안해"

…사실, 여기서 그냥 "나도 미안해" 한 마디만 돌아오면, 나는 그걸로 기쁘고 정말로 기분 좋게 하루의 감정을 대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은 없다. 아니 아주 오래 전에는 그녀가 먼저 사과를 했다. 매번. 나는 항상 그녀라는 왕국의 왕이었고, 나는 절대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모두 나 때문이다.

"그만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말은 차가운 한 마디. 급속도로 짜증과 피곤이 온 몸을 휘감는다. 당장 집에 가고 싶다.

"혜주야"

이름을 부르긴 했으나 이을 말이 마땅찮다.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뭐, 어쨌거나 나도 니 감정을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되는데, 그게 나도 잘 안돼는게…"
"됐고, 시간을 좀 갖자"
"혜주야"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나 전화 오래 못해. 바쁘고 힘들어. 퇴근하면 전화 안 받을거니까 전화하지 말고. 여튼, 난 대충 마음 정했어. 그리 알아" 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하…"

짜증과 실망감, 분노와 허무함이 온 몸의 모든 힘을 다 빼앗아 간다. 씨발. 단 한번을 좋게좋게 풀지를 않는다. 뭐가 그리 힘들고 짜증이 날까. 싸우면 자기만 힘든가. 후. 세상이 다 회색빛, 그것도 창백한 회색빛이다. 미세먼지 탓인지, 내 마음이 우울한 탓인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얼굴을 새삼 쓸어내린다.

뭐가 그리도 매번 이런 식일까.

"참 시팔…"

니나 나나, 그냥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위한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왜 이렇게 매번 싸움만 했다하면 이리도 속을 다 태우고 뒤집어 놓아야만 풀릴까. 그냥 적당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미안하다, 나도 미안해, 우리 오늘 저녁 맛있는거 먹을까, 하고 치워버리면 안되나.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참, 진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울컥한다. 옥상 정원 한 구석의 벤치에 주저 앉는다. 다들 이렇게 사나. 아니면 나만 이 모양인가.

"쯥"

헤어지고 관두지 뭐,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제와서 솔로되면 그 다음이 너무 까마득하고 피곤하다. 아니, 애초에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다음은 없다. 그냥 연애 따위 자체도 피곤하다. 참, 세상 일이 다 쓸데없이 어렵다. 회사의 보고서도, 어차피 다 뻔한 이야기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구태어 그걸 몇 번이고 헤집어서 똑같은 이야기 분칠만 새로 해서 내놓는걸 그리도 지랄들이다.

"아 씨팔 진짜"

하나가 안 풀리니 그냥 다 속이 뒤집히고 다 때려치워버리고 싶다. 일은 좆터지게 많고 연봉은 오를 기미도 없으며 다들 잘만 사는데 나만 도태되어가는 기분이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많은 빌딩 숲 속에서 나 혼자만 병신인 느낌이다. 시계를 본다. 어느새 4시다.

"아 진짜 씨발…"

벤치에서 일어서자 화단 저 너머에 인사팀장님과 유통실장님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주둥아리 조심을 새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라고' 하는 막무가내적 생각이 나를 뒤덮는다.




오후 7시 반, 애 있는 직장맘 몇 명만이 퇴근을 한 채, 모두가 야근 중이다. 사무실의 형광들 불빛이 나의 마음을 싯누렇게 누른다.

"저녁, 어떻게 할까요. 주문할까요?"

연경씨의 말에 팀장님도 경원 주임도 "괜찮아", "난 안 먹을래" 하며 고개를 젓는다. 이쪽도 아까 둘이 뭔 일이 있었는지 영 분위기가 별로다.

"어떻게 할래요, 시켜먹을래요? 나가서 뭐 먹을래요. 아니면 1층에 카페 가서 간단히 때울래요?"

내 제안에 연경이 동의하며 "아, 그럼 카페가요. 팀장님 커피도 안 드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나 팀장도 경원도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1층 카페에 둘이 내려와 커피를 마시노라니 연경이 말한다.

"대리님 아까 잠깐 TF 회의 들어갔을 때, 팀장님이랑 경원 주임님이랑 둘이 따로 비상계단에서 무슨 이야기 하고 왔는데, 그 이후로 둘이 분위기 싸해요"
"왜?"
"모르겠어요. 근데 느낌으론, 되게 안 좋은거 같아요."
"뭐가"
"경원 주임님 아까 화장실에서 우는거 봤거든요"
"뭐?"

느낌이 쌔하다.

"관두라고 한거 아냐?"
"저도 그게 걱정되는데 괜히 좀 물어보기가 뭐해서…"
"허…참."

이미지에 안 맞게 아포카토에 샐러드까지 시켰는데, 영 맛이 없다. 입맛이 별로다.




"나 먼저 들어가요"

9시 반, 팀장님이 퇴근하고 나도 슬슬 피곤을 이기기 힘들다. 컴퓨터를 끌까 하는데 경원 주임이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저 관둘까봐요"
"엥?"

지금 팀장님과 경원 주임이 상당히 안 맞는 타입이긴 했다. 둘 다 일도 곧잘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팀장님은 뒤끝은 없는 대신에 욱하면 조금 심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면이 없잖아 있는 타입이고, 경원 주임은 반대로 정말 밝아보이지만 은근하게 서운한걸 쌓아두는 타입. 그런 와중에 팀장님도 무슨 일이 있는지 요 한동안 내내 히스테릭한 상황에서 경원 주임에게 최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준 모양.

그러다가 아까 급기야 잠깐 6시 넘어서 잠깐 경원 주임이 요즘 바빠서 못 본 장을 뒤늦게 보느라고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다가 팀장님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한 듯 하다.

"원래 안 그런 사람도 괜히 그런 날이 있을 수 있죠. 근데 같은 여자끼리 생리대 사는 것까지 뭐라고 하는건 진짜 좀 아니지 않아요?"
"헐"

경원 주임은 손부채질까지 하면서 말을 잇는다.

"아니 지가 보고서 내일 아침까지 내라고 해서, 내가 알겠다고 하고 잠깐 5분 짬내서, 진짜 잠깐 뭐한 걸로 그러면 나도 할 말 많지. 자기도 맨날 툭하면 중간에 커피 마시러 가서 30분씩 때우다 오고 이러는거 뻔히 아는데. 누가 안 한 대냐고. 일 다 하는건데, 왜 사람한테 그런 무안을 줘. 그게 뭐라고 진짜"

말을 하다가 혼자 북받치는지 경원 주임은 눈물까지 글썽인다. 나는 티슈를 뽑아 건내며 목소리를 줄이자고 작게 말했다. 다행히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했다.

"그리고 그거 알아요? 나 올해 인사고과 완전 최악인거? 저번에 점심시간에 인사평가 해놓은거 보고 진짜, 내가 얼척이 없어서…"
"어떻게 봤어요?"
"저번에 윤팀 막 몸살 났다고 병원 다녀오고 그랬을 때 있잖아요. 내가 자기 아프다고 쌍화탕까지 점심시간에 사왔는데, 인사평가 서류 뽑아놓은거 책상에 있는거 살짝 봤단 말이에요. 근데 나 뭐라고 한 줄 알아요? 하, 진짜 얼척이 없어서. 그냥, 내가 일을 디게 못한대요"

음, 우리 회사에서 경원 주임이 일을 못한다고 하면 공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꼼꼼함이라는 면에서 우리 팀장님을 따라갈 사람은 세상에 없기에 그녀의 눈에는 경원 주임이 눈에 덜 찰 수도 있겠지만, 같은 기준이라면 나는 정말 박살나겠구먼.

"모르겠어요 진짜. 맨날 왜 그러는지"

확실히, 팀장님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경원 주임을 미워하는건, 아니 미워한다고까지 말하긴 뭣해도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은 제 3자인 내가 봐도 느껴질 정도. 확실하게는 몰라도, 조금 성격적으로 왜 안 맞는지는 조금 알 것도 같지만.

"그냥 관둘까봐. 어쩌겠어. 싫다는데. 버텨봐야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지. 이 회사에서 내가 갈 다른 팀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말로만 그러는건지, 진짜 관둬야겠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휴대폰으로 사람인 사이트를 보고 있는 것은 몇 번 봤다.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 혜주는 아까부터 연락이 없다. 먼저 미안하다고 또 카톡을 보내봤지만 읽지도 않는다. 피곤하다. 10시가 어느새 넘었다. 씻고 뭐하고 하면 벌써 11시가 넘겠지. 삶이 고단하다. 너무 피곤하다. 멋있게 살고 싶은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라도 살고 싶은데 나이는 차고 돈은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비전도 없고 꿈도 없다.

"하"

만에 하나 회사를 관두기라도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니 답이 없다. 그러나 나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찼다. 그렇다고 승진 코스에 올라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회사에서 내가 10년 후에 임원이 되고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때의 미래에는 혜주가 내 옆에 있을까.

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미안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차라리 나보다 잘난 놈 만나서 사귀면, 사장님 사모님 노릇까지야 못해도 그냥 평범하게 서울 어디에 아파트라도 얻어서 중형차 타고 주말마다 장 보면서, 애 하나 낳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는 살 것 아닌가. 못난 년도 아닌데. 나같은 새끼 만나서…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씨발. 그냥 내가 못난게 죄지.

마음이 무겁다.

모르겠다. 무슨 재미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잘 살아가고는 있는건지. 너무, 피곤하다. 자리에 앉고 싶다. 선 채로 잠시 눈을 감는다. 아까 회사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이 떠오른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우중충한 빛의 하늘색. 그게 나의 하늘색이다.

혜주와 화해만 한다면 다시 푸르디 푸른 맑은 하늘이 될텐데. 하지만 과연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어느새 이번 역이 내릴 역이라는 사실을 안내방송을 통해서야 알았다. '내릴 역'. 그녀라는 열차에서도 내릴 타이밍일까. 흐, 오바는 말자.

"흐"

내일은 화요일이다. 정말로 피곤한 월요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도, 모레도… 이번 주는 정말 피곤할 것 같다. 누군가 제발 내 힘이 되어준다면, 아니, 그냥… 아니다. 차라리, 혼자가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라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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