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99년, 보다 진보된 인공지능과 미디어의 발달은 드디어 뇌파간섭을 통한 가상현실 체험을 완성시켰다. 이제는 누구라도 작은 캡슐룸 안에 들어가 눕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뇌파자극을 통한 오감체험으로 완벽하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우주체험, 포르노, 콘서트 중인 인기 아이돌, 오지 탐험, 공룡 시대, 올림픽, 정치적 승리, 전쟁과 전투, 익스트림 스포츠, 역사 체험 등 다양한 망상과 꿈이 투영되어 사람들을 만족시켰고, 그 환상적인 체험은 현실의 고단함에 대한 위안을 넘어 유토피아의 현실강림에 이르렀다.
이미 실현된 로봇에 의한 인류의 노동해방으로 인해 몇 푼 안되는 기본소득만으로 살아가야 했던 30억의 선진국 빈민들에게 이 가상현실 체험은 사실상 삶에 유일하게 주어진 엔터테인먼트나 마찬가지었다. 열풍이나 현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온 세상이 가상현실 체험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회 갈등에 골머리를 앓던 정치인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쳤으며, 소비가 사라진 시대의 자본가들에게는 마지막 여흥의 투자기회가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상현실 기술은 인류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가상현실의 대중화에 이은 보급과 제작 사업은 인류의 마지막 문화 사업으로 빛났으며 그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초창기 시절 책장만 했던 거대한 크기의 체험 머신은 불과 15년 사이 'D밴드'라 불리는 머리띠 형태의 개인화 뇌파 모바일 머신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T, 이거 공유해줄까"
묘한 미소를 띈 제이의 말에 나는 불안을 느꼈다.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나 짖궂음을 넘어 범죄에 가까운 장난을 저지를 때가 많았으니까.
"뭔데. 새 에프코어 시리즈?"
얼마 전부터인가 제이의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을 보며 새삼스레 그녀의 성별을 되새긴 나였었지만, 묘하게도 제이의 시청각적 취향만큼은 또래 남자아이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데가 있었다.
"아니"
"뭔데"
제이는 대답 대신 핸드 제스츄어로 내 D밴드에 자료를 전송해주었고, 지난 번처럼 또 바이러스 자료가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그 파일을 엑세스 했, 아니, 하려 했다.
"아, 토미! 잠깐만!"
나를 언제나의 애칭인 'T'가 아닌 '토미'라 불렀을만큼 다급한 제이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또 큰일날 뻔 했다고 속으로 한숨 내쉰 나는 물었다.
"왜? 이거 또 불법 자료야?"
"어. 온라인 보안 관련 메인터넌스 모듈 몇 개 끄고 실행해야 돼. 큰일난다. 경찰 온다."
글쎄. 이 계집애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불법 자료들을 마구 구해오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만약'에 대한 경계심 자체가 없는 것일까.
"나 그럼 안할래. 저번처럼 또 해킹 당해서 수리하다가 뭐 잘못되서 경찰서 소환되고 내 머신 다 스캐닝 당하고 그러면 진짜… 그냥 자살하고 만다"
"아니, 걱정마. 이번건 깨끗해. 이미 해리 오빠가 다 체크해봤대. 확실해. 그보다, 이거 그거야"
"뭐"
"시에나 밀크 의료 데이터를 D밴드 컨텐츠화 한거야. 완전 미친 자료야"
"뭐라고?"
시에나 밀크. 내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D 밴드에 연동된 관련 ICCDB 자료가 주르륵 내 각막 렌즈 한쪽 구석에 아로새겨져 뇌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살펴볼 것도 없었다. 우리 또래 남자애들, 아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몸 건강한 남성들 중에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무대 위에서 격렬한 안무와 함께 흔들어 대는 그 완벽한 몸매와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마스크, 놀라운 가창력은 그녀를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고, 사춘기의 우리들은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와 닮은 포르노 IVR를 찾아 뇌파를 지져대기 바빴다. 물론 깔끔한 뒷처리를 위한 콘돔젤을 미리 바르는 것은 필수적인 단계였고 말이다.
"HVRI로 전신 다 들여다 본 의료 데이터로 만든거야"
"미쳤다…"
D밴드는 우리 신체의 오감을 뇌파 자극이라는 형태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 등 외부에서 전달되어 오는 모든 현실 자극 감도를 낮추고, 대신 뇌파를 조종해서 가상 현실의 그것으로 우리의 의식을 완벽하게 속인다. 맛, 풍경, 향, 촉감까지.
즉,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지만, 나의 뇌는 내가 실제로 격렬한 축구경기를 뛰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켜 다리가 뻐근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수준의 매우 리얼한 오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걸 얼마나 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표현하느냐와 그 밸런스의 중요성이 바로 D밴드 컨텐츠 제작자들의 가장 큰 고민과 역량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럼 거시기까지 완전히 다 구현되어 있겠네?"
"당연하지. 털 하나하나까지 다 완벽하게"
우리 시대의 연예인들에게 신체적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출 영화라도 찍었다가는 베드신의 리얼한 체험을 위해 신체 구석구석에 대한 초정밀 풀스캔 3D 데이터는 물론이요 몸 여기저기의 냄새까지도 수집되어 컨텐츠에 반영되니까.
물론 유저들의 환상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몸매 보정 같은 데이터 미화가 이뤄지고, 포르노 컨텐츠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은밀한 부위에 대한 터치나 과도한 수준의 접촉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데이터가 구현되어 있지 않으니까. 설령 요즘 영화들 추세처럼 그런 부분까지 애써 구현해 놓았다 하더라도 사실 의미가 없다. 포르노 영화가 아닌 이상 그런 부분은 처음에 영화를 찍을 때부터 스캔하지 않으니까. 결국 더미 데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의료용 데이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암세포나 신경 손상을 찾기 위해 HVRL로 신체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스캐닝하는 의료용 HVR 데이터라면, 그녀의 속살을 넘어 발바닥 주름 갯수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하지만 글쎄.
"어쩐지 용량이 말도 안되게 크더라. 야, 근데 그런 데이터를 어떻게 구했는데? 의료 데이터가 그렇게 허술하게 돌아다니겠냐. 비슷한 다른 누구거나, 조작된 거겠지"
나의 말에 제이는 "아 맞다고! 베를린 그룹 애들이 해킹한거래. 나도 아까 돌려 봤는데, 몸에 난 점 위치들이랑 배꼽모양까지 다 똑같더라" 하고 반박했다. 비교자료를 묻는 내 질문에 밀크가 출연했던 다른 영화들과 뮤직 비디오를 마구 전송한 제이. 그쯤해선 나 역시 검증 대신 그저 "사실이면 진짜 완전 대박인데" 하고 탄성을 내었을 뿐이다. 사실 연예인, 게임, 해킹에 관한한, 제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하면 돼? 밀크랑 섹스체험 하려면? 이걸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어?"
나의 말에 제이는 몇 개의 추가 설치 프로그램들과 해킹법이 적힌 문서를 D밴드로 전송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D밴드로 조심스레 현재 엄마와 동생의 위치를 확인해봤다. 어니댜고 묻는 내 질문에 엄마는 짧게 세라 아줌마의 집이라고 답했고, 동생은 학원 좌표를 전송했다. 오케이, 그럼 적어도 두어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룰루루루루루"
내 방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바지를 벗고, 책상 서랍 깊숙한 구석에서 콘돔젤을 꺼냈다.
"음"
적당히 손바닥에 따른 콘돔젤로 거시기 주변을 적당히 코팅하면, 그 주변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정액의 흩뿌림을 막아주고 상대의 성감을 높여준다. 원래의 목적은 지난 세기 내내 사용된 고무나 실리콘 콘돔보다 양측 모두에게 더 리얼한 쾌감을 전달하고 보다 안전한 섹스를 경험해 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데, 솔직히 쾌감 차이는 내가 실제 섹스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단지 젤 형태로 굳어버리기에 사정 이후에 정액이 따로 흘러내리거나 할 우려가 없어서, D밴드 포르노를 볼 때 그 뒷처리가 손쉽다. 마스크팩 버리듯이 슥 뜯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오오"
그보다, 시에나 밀크의 의료 데이터를 해킹용 포르노 툴에 얹어서 가동한 체험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전에도 다른 포르노 배우들의 데이터를 인기 연예인으로 합성해서 꽤 리얼하게 구현한 유저 MOD들은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역시 '실제'의 데이터는 차원이 달랐다.
음성, 촉감, 냄새, 탄력, 맛, 온도까지 완벽하게 실제의 그것과 같게 구현된 가상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변태적 플레이를 즐겼다.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좋겠지만, 두 어시간이 흐르자 동생의 메신저가 "오빠, 나 지금 가는데 저녁 좀 차려놔" 하며 말을 걸었고, 나는 그제서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뒷처리를 해야했다.
"장난 아니지? 이 새끼 하루만에 얼굴 쾡해진 것 봐"
나보다 제이가 먼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놀렸다. 나는 "야, 쌩쌩하거든?" 하고 그녀의 말을 받은 뒤, "근데 데이터도 데이터인데, 그 프로그램은 뭐야? 완전 뭐 별별 기능이 다 있던데?" 하고 물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DCP인가 뭐래든가, 여튼 원래는 의료용 분석툴인데 그걸 해킹해서 D밴드 체감 머신에 연동시키고 그걸 초보자들도 쉽게 운용할 수 있게 간소화 시키고 지들이 만든 새 포르노용 UI 모드 얹은거야. 만든 새끼들 진짜 천재야 천재"
제이 같은 해킹 초고수가 천재라고 인정할 정도면 그 새끼들은 정말 프로페셔널 초고수 해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원래 산업용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조금 섬뜩해진 나는 다시 물었다.
"진짜 뭐 문제 없는거지? 니야 원래 이런거 잘 아니까 알아서 뭐 문제 생겨도 잘 피하겠지만 나는 진짜… 또 실수로 보안 프로그램 잘못 띄우고 긴급 점검 들어오고 그러면 진짜 나 집에서 쫒겨나고 난리나. 진짜 문제 없는거지?"
그 말에 제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만약에 경찰에 걸리게 되면, 무조건 깜빵행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고 무겁게 말했다. 이미 실행 로그 다 남았을텐데. 나는 "야!" 하고 소리쳤지만,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걸리긴 왜 걸려. 이게 스텔싱이 얼마나 잘 된 해킹 프로그램인데. 최소한 2년은 걱정없다. 내가 보장한다"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 진짜….
"그래도 만약에, 어?"
"T, 됐어.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내가 니 대신 감방 갈게. 됐냐?"
씩 웃는 제이의 얼굴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한다. 그녀가 레즈비언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고백했을텐데. 아니, 그랬더라도 내가 고백할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부치 성향의 그녀와 내가 잘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백질만으로 75%? 밀크 얘는 고기 진짜 좋아하나보네. 변비 안 오나 이러면"
이 해킹된 프로그램에는 정말 별 기능이 다 있었다. 어쨌거나 의료용 분석툴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아닌가. 시에나 밀크의 체내에 남은 음식물과 분변에 대한 스캐팅 데이터를 통해 그녀의 지난 며칠 간의 식사와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진짜 이거 걸리면 감방 가겠는데…"
아무리 요즘 D밴드 컨텐츠들이 막장일로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상 제작자들과 법률의 통제 하에 다듬어지는 '가상현실 데이터'일 따름이다. 그저 내 뇌파를 자극해서 그럴싸하게 가짜 촉감, 가짜 냄새의 자극으로 내 뇌를 속이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이건 다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체에 대한 모든 민감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해리 형 같은 유전자 은행의 연구원쯤 된다면 이 데이터 안의 유전 정보를 E셀 같은데 담아 빈 수정란에 코딩해서 바로 시험관 아기로 공여해서 시에나 밀크 복제인간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물론 자세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그런 미친 짓을 막기 위한 시스템들이 있긴 하겠지만 여튼 이론적으로 말이다.
"어…잠깐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어떤 미친 생각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 계속 >
성공한 사업가, 우주체험, 포르노, 콘서트 중인 인기 아이돌, 오지 탐험, 공룡 시대, 올림픽, 정치적 승리, 전쟁과 전투, 익스트림 스포츠, 역사 체험 등 다양한 망상과 꿈이 투영되어 사람들을 만족시켰고, 그 환상적인 체험은 현실의 고단함에 대한 위안을 넘어 유토피아의 현실강림에 이르렀다.
이미 실현된 로봇에 의한 인류의 노동해방으로 인해 몇 푼 안되는 기본소득만으로 살아가야 했던 30억의 선진국 빈민들에게 이 가상현실 체험은 사실상 삶에 유일하게 주어진 엔터테인먼트나 마찬가지었다. 열풍이나 현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온 세상이 가상현실 체험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회 갈등에 골머리를 앓던 정치인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쳤으며, 소비가 사라진 시대의 자본가들에게는 마지막 여흥의 투자기회가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상현실 기술은 인류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가상현실의 대중화에 이은 보급과 제작 사업은 인류의 마지막 문화 사업으로 빛났으며 그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초창기 시절 책장만 했던 거대한 크기의 체험 머신은 불과 15년 사이 'D밴드'라 불리는 머리띠 형태의 개인화 뇌파 모바일 머신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섹토피아
"T, 이거 공유해줄까"
묘한 미소를 띈 제이의 말에 나는 불안을 느꼈다.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나 짖궂음을 넘어 범죄에 가까운 장난을 저지를 때가 많았으니까.
"뭔데. 새 에프코어 시리즈?"
얼마 전부터인가 제이의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을 보며 새삼스레 그녀의 성별을 되새긴 나였었지만, 묘하게도 제이의 시청각적 취향만큼은 또래 남자아이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데가 있었다.
"아니"
"뭔데"
제이는 대답 대신 핸드 제스츄어로 내 D밴드에 자료를 전송해주었고, 지난 번처럼 또 바이러스 자료가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그 파일을 엑세스 했, 아니, 하려 했다.
"아, 토미! 잠깐만!"
나를 언제나의 애칭인 'T'가 아닌 '토미'라 불렀을만큼 다급한 제이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또 큰일날 뻔 했다고 속으로 한숨 내쉰 나는 물었다.
"왜? 이거 또 불법 자료야?"
"어. 온라인 보안 관련 메인터넌스 모듈 몇 개 끄고 실행해야 돼. 큰일난다. 경찰 온다."
글쎄. 이 계집애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불법 자료들을 마구 구해오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만약'에 대한 경계심 자체가 없는 것일까.
"나 그럼 안할래. 저번처럼 또 해킹 당해서 수리하다가 뭐 잘못되서 경찰서 소환되고 내 머신 다 스캐닝 당하고 그러면 진짜… 그냥 자살하고 만다"
"아니, 걱정마. 이번건 깨끗해. 이미 해리 오빠가 다 체크해봤대. 확실해. 그보다, 이거 그거야"
"뭐"
"시에나 밀크 의료 데이터를 D밴드 컨텐츠화 한거야. 완전 미친 자료야"
"뭐라고?"
시에나 밀크. 내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D 밴드에 연동된 관련 ICCDB 자료가 주르륵 내 각막 렌즈 한쪽 구석에 아로새겨져 뇌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살펴볼 것도 없었다. 우리 또래 남자애들, 아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몸 건강한 남성들 중에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무대 위에서 격렬한 안무와 함께 흔들어 대는 그 완벽한 몸매와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마스크, 놀라운 가창력은 그녀를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고, 사춘기의 우리들은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와 닮은 포르노 IVR를 찾아 뇌파를 지져대기 바빴다. 물론 깔끔한 뒷처리를 위한 콘돔젤을 미리 바르는 것은 필수적인 단계였고 말이다.
"HVRI로 전신 다 들여다 본 의료 데이터로 만든거야"
"미쳤다…"
D밴드는 우리 신체의 오감을 뇌파 자극이라는 형태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 등 외부에서 전달되어 오는 모든 현실 자극 감도를 낮추고, 대신 뇌파를 조종해서 가상 현실의 그것으로 우리의 의식을 완벽하게 속인다. 맛, 풍경, 향, 촉감까지.
즉,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지만, 나의 뇌는 내가 실제로 격렬한 축구경기를 뛰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켜 다리가 뻐근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수준의 매우 리얼한 오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걸 얼마나 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표현하느냐와 그 밸런스의 중요성이 바로 D밴드 컨텐츠 제작자들의 가장 큰 고민과 역량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럼 거시기까지 완전히 다 구현되어 있겠네?"
"당연하지. 털 하나하나까지 다 완벽하게"
우리 시대의 연예인들에게 신체적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출 영화라도 찍었다가는 베드신의 리얼한 체험을 위해 신체 구석구석에 대한 초정밀 풀스캔 3D 데이터는 물론이요 몸 여기저기의 냄새까지도 수집되어 컨텐츠에 반영되니까.
물론 유저들의 환상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몸매 보정 같은 데이터 미화가 이뤄지고, 포르노 컨텐츠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은밀한 부위에 대한 터치나 과도한 수준의 접촉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데이터가 구현되어 있지 않으니까. 설령 요즘 영화들 추세처럼 그런 부분까지 애써 구현해 놓았다 하더라도 사실 의미가 없다. 포르노 영화가 아닌 이상 그런 부분은 처음에 영화를 찍을 때부터 스캔하지 않으니까. 결국 더미 데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의료용 데이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암세포나 신경 손상을 찾기 위해 HVRL로 신체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스캐닝하는 의료용 HVR 데이터라면, 그녀의 속살을 넘어 발바닥 주름 갯수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하지만 글쎄.
"어쩐지 용량이 말도 안되게 크더라. 야, 근데 그런 데이터를 어떻게 구했는데? 의료 데이터가 그렇게 허술하게 돌아다니겠냐. 비슷한 다른 누구거나, 조작된 거겠지"
나의 말에 제이는 "아 맞다고! 베를린 그룹 애들이 해킹한거래. 나도 아까 돌려 봤는데, 몸에 난 점 위치들이랑 배꼽모양까지 다 똑같더라" 하고 반박했다. 비교자료를 묻는 내 질문에 밀크가 출연했던 다른 영화들과 뮤직 비디오를 마구 전송한 제이. 그쯤해선 나 역시 검증 대신 그저 "사실이면 진짜 완전 대박인데" 하고 탄성을 내었을 뿐이다. 사실 연예인, 게임, 해킹에 관한한, 제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하면 돼? 밀크랑 섹스체험 하려면? 이걸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어?"
나의 말에 제이는 몇 개의 추가 설치 프로그램들과 해킹법이 적힌 문서를 D밴드로 전송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D밴드로 조심스레 현재 엄마와 동생의 위치를 확인해봤다. 어니댜고 묻는 내 질문에 엄마는 짧게 세라 아줌마의 집이라고 답했고, 동생은 학원 좌표를 전송했다. 오케이, 그럼 적어도 두어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룰루루루루루"
내 방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바지를 벗고, 책상 서랍 깊숙한 구석에서 콘돔젤을 꺼냈다.
"음"
적당히 손바닥에 따른 콘돔젤로 거시기 주변을 적당히 코팅하면, 그 주변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정액의 흩뿌림을 막아주고 상대의 성감을 높여준다. 원래의 목적은 지난 세기 내내 사용된 고무나 실리콘 콘돔보다 양측 모두에게 더 리얼한 쾌감을 전달하고 보다 안전한 섹스를 경험해 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데, 솔직히 쾌감 차이는 내가 실제 섹스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단지 젤 형태로 굳어버리기에 사정 이후에 정액이 따로 흘러내리거나 할 우려가 없어서, D밴드 포르노를 볼 때 그 뒷처리가 손쉽다. 마스크팩 버리듯이 슥 뜯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오오"
그보다, 시에나 밀크의 의료 데이터를 해킹용 포르노 툴에 얹어서 가동한 체험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전에도 다른 포르노 배우들의 데이터를 인기 연예인으로 합성해서 꽤 리얼하게 구현한 유저 MOD들은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역시 '실제'의 데이터는 차원이 달랐다.
음성, 촉감, 냄새, 탄력, 맛, 온도까지 완벽하게 실제의 그것과 같게 구현된 가상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변태적 플레이를 즐겼다.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좋겠지만, 두 어시간이 흐르자 동생의 메신저가 "오빠, 나 지금 가는데 저녁 좀 차려놔" 하며 말을 걸었고, 나는 그제서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뒷처리를 해야했다.
"장난 아니지? 이 새끼 하루만에 얼굴 쾡해진 것 봐"
나보다 제이가 먼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놀렸다. 나는 "야, 쌩쌩하거든?" 하고 그녀의 말을 받은 뒤, "근데 데이터도 데이터인데, 그 프로그램은 뭐야? 완전 뭐 별별 기능이 다 있던데?" 하고 물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DCP인가 뭐래든가, 여튼 원래는 의료용 분석툴인데 그걸 해킹해서 D밴드 체감 머신에 연동시키고 그걸 초보자들도 쉽게 운용할 수 있게 간소화 시키고 지들이 만든 새 포르노용 UI 모드 얹은거야. 만든 새끼들 진짜 천재야 천재"
제이 같은 해킹 초고수가 천재라고 인정할 정도면 그 새끼들은 정말 프로페셔널 초고수 해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원래 산업용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조금 섬뜩해진 나는 다시 물었다.
"진짜 뭐 문제 없는거지? 니야 원래 이런거 잘 아니까 알아서 뭐 문제 생겨도 잘 피하겠지만 나는 진짜… 또 실수로 보안 프로그램 잘못 띄우고 긴급 점검 들어오고 그러면 진짜 나 집에서 쫒겨나고 난리나. 진짜 문제 없는거지?"
그 말에 제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만약에 경찰에 걸리게 되면, 무조건 깜빵행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고 무겁게 말했다. 이미 실행 로그 다 남았을텐데. 나는 "야!" 하고 소리쳤지만,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걸리긴 왜 걸려. 이게 스텔싱이 얼마나 잘 된 해킹 프로그램인데. 최소한 2년은 걱정없다. 내가 보장한다"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 진짜….
"그래도 만약에, 어?"
"T, 됐어.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내가 니 대신 감방 갈게. 됐냐?"
씩 웃는 제이의 얼굴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한다. 그녀가 레즈비언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고백했을텐데. 아니, 그랬더라도 내가 고백할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부치 성향의 그녀와 내가 잘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백질만으로 75%? 밀크 얘는 고기 진짜 좋아하나보네. 변비 안 오나 이러면"
이 해킹된 프로그램에는 정말 별 기능이 다 있었다. 어쨌거나 의료용 분석툴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아닌가. 시에나 밀크의 체내에 남은 음식물과 분변에 대한 스캐팅 데이터를 통해 그녀의 지난 며칠 간의 식사와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진짜 이거 걸리면 감방 가겠는데…"
아무리 요즘 D밴드 컨텐츠들이 막장일로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상 제작자들과 법률의 통제 하에 다듬어지는 '가상현실 데이터'일 따름이다. 그저 내 뇌파를 자극해서 그럴싸하게 가짜 촉감, 가짜 냄새의 자극으로 내 뇌를 속이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이건 다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체에 대한 모든 민감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해리 형 같은 유전자 은행의 연구원쯤 된다면 이 데이터 안의 유전 정보를 E셀 같은데 담아 빈 수정란에 코딩해서 바로 시험관 아기로 공여해서 시에나 밀크 복제인간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물론 자세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그런 미친 짓을 막기 위한 시스템들이 있긴 하겠지만 여튼 이론적으로 말이다.
"어…잠깐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어떤 미친 생각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