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증과 작은 오해, 그리고 모처럼의 해외 전근 기회. 그 모든 것이 엮여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이었기에 너는 당황했고 슬퍼했으며 분노했고 이해했다.
"관두겠습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도착한 런던은 내 마음의 불안을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황장애를 유발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알았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미안해"
두 달만의 재회. 물론 너는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눈물로 기뻐했다. 그렇지만 이별 선언의 후유증과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우울증, 그리고 두 달 간의 공백 사이에 있었던 너의 다른 남자.
"그랬구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아는 오빠와의 일회성 관계, 그것도 이별로 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술에 취해 벌어진 헤프닝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데미지가 있었다. 결국 나 때문이었고, 내가 훌쩍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을 일이었건만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시간을 가져도 될까"
"…그냥, 만나지 말자"
"아냐, 미안"
나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너는 두 달의 공백을 단숨에 메꾸고 싶어했다. 못 만난 만큼, 이별을 선언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급하게, 초조하게, 서둘러 메꾸고 싶어했지만 난 그런 네가 부담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잦아졌고, 이번에는 이별에 대한 선언이 너에게서 먼저 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나는 서둘러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녀의 의견을 그저 곱게 따르기로 했다. 연애관계가 변한 순간이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두 달 사이에 이미 조금은 변해버린 너와 나의 연애 권력관계. 절대 갑이었던 나는 어느새 을에 가까워져 있었고, 내가 죽으라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살라면 "널 위해서" 라던 너는 어느새, 죽으라면 "내가 왜?" 살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금 다른 네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장난은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음, 그래"
짖궂게 치던 나의 장난은 진지한 얼굴로 제지 되었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바뀐 것이 없었다. 너는 나를 존중했고 나는 네가 편했다. 가끔 너의 발끈함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거침없었고 너는 조심스러웠다.
"선물 사왔어"
"오! 정말?!"
작은 꽃다발 하나에 좋아라 하는 네 모습에 나는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울려퍼진 카톡, 하는 알람 소리. 순간 아차하는 표정의 너와 상대를 짐작해버린 나.
"흠"
그것은 강간도 화간도 아니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나 지친 마음을 기대고 싶어 술 기운으로 누군가의 어깨를 빌렸을 뿐이며 그는 그것을 오해했을, 아니 잠시 이용했을 뿐. 콘돔은 사용했느냐는 나의 실언에 또 "아니"라고 솔직히 답한 너. 물어본 나도 잘못이지만 솔직히 답해준 너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의식한 내가 다시 미웠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오래된 너와 그 오빠의 기나긴 인연을 어찌 단숨에 끊어내랴 싶어 그저 묵묵히 입을 닫았고, 심지어 그 한번의 관계마저 마음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도 연락해?"
긴 침묵 끝의 대답은 "어. 그냥, 안부만" 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잠금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너의 당당했던 휴대폰은 어느새부터인가 무음으로 엎어져 있었고 언젠가의 깊은 밤, 몰래 시도했던 너의 폰 탐방은 난데없는 비밀번호에 참담히 막혀버렸더랬지.
"그래"
어색했지만, '도대체 왜?' 혹은 '뭐라고 하는데?' 같은 질문을 억지로 두 번 세 번 마음 속으로 삼켰을 무렵, 꽃 한다발로 화기애해했던 우리의 분위기는 곧바로 실패한 소개팅 이상의 어색함을 자아내었다.
그 날이었는지, 그 다음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그 날의 섹스는 유난히 격렬했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육상이었고 레슬링이었다. 아랫도리에서 쾌감을 넘어 꽤 심한 뻐근함을 느낄 무렵에야 우리는 섹스를 끝냈다. 사정은 없었다. 그녀는 정성을 들여 내 아랫도리를 머금었지만 역시나 사정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변강쇠네"
"네 다음 옹녀"
그렇게 다시 근 석 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즘 우리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만큼 만남의 빈도 자체가 크게 줄어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너는 어색함을 힘들어 했기에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그럼에도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없다는 사실은 조금 불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주에 우리 여행갈까"
"미안, 나 선희랑 잠깐 보기로 했는데"
나는 언제나 1순위였다. 친구따위, 가족따위 그 어떤 선약도 나와의 15분 전 약속보다 그 가치가 낮았다.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일주일 전, 최소 반나절 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나는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사실 엄청 피곤하고 싫었다는 그녀의 말에 그저 수긍할 따름이었다. 습관을 들이면 별 거 아니라는 그녀의 부연이 이어졌지만, 충동적인 만남은 어느새 확실히 불가능해졌다. 나의 야근도 늘었고.
"야, 너 휴대폰 까봐"
"응?"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그녀.
"휴대폰 열어보라고! 그 새끼 뭐야. 너 아직도 그 새끼랑 뭐 있냐?"
"뭐?"
언젠가의 금요일 밤. 섹스를 위한 밤이었다. 적당히 근사한 저녁, 기분좋게 손잡고 본 드라마 시청, 적당한 피곤함이 잠에 대한 열망과 섹스에 대한 두근거림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던 그날 밤. 가벼운 터치는 어느새 농밀한 애무가 되어 있었고, 머리 맡의 서랍에서 콘돔을 찾던 도중 수십 개의 카톡 메세지가 무음 속에서 전달되며 뿌옇게 빛나던 너의 휴대폰.
"그거 뭐야"
나의 말에 당황하지만 곧 화난 표정으로 "아무 것도 아냐" 하고 폰을 뒤로 하는 너. 사실 그 시점에 '끝났구나' 생각했다.
"열어"
"싫어"
"그 휴대폰 열어"
"싫다고!"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를 베풀었다.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면, 설령 니가 그 새끼랑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거라도 한번 용서하고 넘어갈게. 내놔 봐"
"뭐? 양다리?"
나의 그 단어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다리? 지금 너 나 의심하는거야?"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참고 또 참다가 그만 욕을 뱉었다.
"씨발년아, 내놔보라고오!"
그녀는 "나가" 하고 선언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뺨을 날렸다.
"후우"
이것을 오해라고 해야 좋을까, 비극이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내 머리채를 쥐어잡는 그녀의 배를 때렸고, 배를 감싸쥐며 쓰러진 그녀는 호흡을 간신히 추스리며 "개새끼, 넌 끝이야" 하고 선언했다.
"상관없어 씨발년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고, 네 번의 시도 끝에 '내 전화번호 뒷자리로 된 비번'을 열 수 있었다.
'염병'
카톡 메세지를 열었다.
"보지 말라고 개새끼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조용조용하던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고,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주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젠 정말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 뭔 소리야. 못 싸는거랑 매력은 전혀 상관없다;;; 진짜 매력없으면 싸지를 못하는게 아니라 발기 자체가 안되지ㅋㅋㅋㅋ ]
…스크롤을 한참을 올려봤다. 침대 옆에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여친과 허탈하게 그 오빠와의 대화를 훑어보는 나. 살을 섞은, 혹은 섞기 직전의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강도 높은 대화들이 많았다. 이미 실제로 한번 섞기도 했고 말이다.
"후우"
조금은 웃기기까지 했다. 아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즐거웠겠지. 오랜 시간의 우정이 섹스라는 열매를 맺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드문드문이지만 꽤 수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어떤 묘한 이성의 존재. 아마 즐거웠을 것이다.
"이 새끼랑 또 잤냐? 맛있디? 창녀 같은 년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나서는 문 뒤로 그녀의 엉엉대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 라는 그녀의 말에 3일 만에 연락한 우리. 그녀의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거의 30분 가까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딱 한번 뿐이야. 그 날도 서로 실수였다는거 인정했고, 너랑 다시 만난 이후로는 잔 적 없어. 정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감이라는게 있지 않는가. 여자의 촉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감. 단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뒤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불쾌했을 뿐. 게다가 그래서야 언제든 다시 섹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 말을 믿는다고 쳐도, 그럼 이제 어쩔건데. 남친 말고 다른 새끼랑 그런 이야기나 쳐하고?"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휴대폰을 켜서 보여줬다. 비번을 걸려있지 않았다. 휴대폰 차단 전화, 카톡 차단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야. 미안해"
그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말했다.
"밥은 먹었냐"
그렇게 우리는 다시 6개월을 행복하게 연애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에게 조금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 위기를 겪고 나자 우리는 오히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다.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조금은 루즈한 연애에 우리는 다시금 위기를 겪었을지도 몰랐으니까.
함께 대만, 일본, 캐나다를 여행했다. 2천 남짓 모아놓았던 돈도 방탕한 연애질에 700 가까이 써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귀국하던 그 날, 여친은 쓰러졌다. 조금은 추하게.
"간질이요?"
뇌전증이라는 말에 바로 '간질'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녀.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간질 환자라고 했더랬지. 의사가 "예, 뭐" 라고 대답하는 순간 여친의 눈에서 곧바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는 자의 눈물'이었다.
"무슨 미친 개소리야! 그럼 너가 그렇게 나 두고 가버리면, 나는? 나는? 어? 그럼 반대로 내가 간질이면 너도 나 버릴거냐? 어?"
나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단언했다.
"어, 버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야, 아직 두 군데 밖에 안 가봤어. 그리고 간질이라는게 시발 뭐 무조건 다 좆같은 케이스만 있는게 아니라두만. 왜 혼자 오바야. 그냥 좀 가끔 남보다 불편할 수 있는거 뿐인데. 더한 병 갖고도 잘만 사는데 왜 오바야 오바는" 하고 그녀를 달랬다.
"너가 진짜 그 상황을 몇 번 겪다보면… 그리고 니 앞에서 그런 꼴 보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
"야, 피차 시발 자지 보지 똥구멍 다 깐 사이에 부끄러울게 뭐 있는데? 어? 간질 와서 똥싸면? 닦아주고 씻겨주면 그만이고, 어? 시발, 어? 오줌 싸면, 오줌 싸면 닦아주면 그만이고, 쓰러지면, 어디 안 부러지게 쓰러지기만 하면 내가 일으켜주고, 다치면 병원 데리고 가면 그만인데, 뭐가, 어? 뭐가 힘들다고 그 유난이야. 아예 남들은 반 병신되서 침대에서 오줌 똥 수발 다 하면서도 살아. 혀 돌아가면 내가 다 빼줄건데, 평소에는 잘 발현도 안되는 뭐 그런 거 땜에 그렇게 오바질이냐고"
나도 울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다는게 속상했다. 병을 갖고 있는게 속상했다.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그 병에 떨면서 살아갈 것이 안타까워서 속상했다.
"아프지마… 아프지마, 병신아. 왜 아프고 지랄인데. 누가 아프래. 니 몸 니꺼 아니라고, 함부러 아프지 말랬잖아"
나도 그녀도 울고 있었다.
"너 간질이 어떤건 줄 알아? 평생을 폭탄 언제 터질지 몰라서, 본인도 떨고 가족도 떠는 병이야. 너어, 나중에 나 상처주지 말고 그냥 지금 헤어져. 그게 차라리 나아"
"좆까, 좆까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평생토록… 아마 우리는 질리도록 싸우고 또 싸우겠지만 어쨌거나 평생토록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고, 아껴도 내가 아끼면서.
"그거 아냐?"
노을 지는 낚시터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근 한 시간째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에 그저 콧물만 한 사발을 들이키고 있던 나는 라면 물을 올렸다.
"처음에 내가 너 만났을 때, 이 이 기집애랑은 사귀면 영 구리겠다 생각한거"
"뭐?"
부창부수라고, 남편이 라면물을 올리자 집에서 썰어온 대파와 양파를 꺼내는 아내.
"아니 뭔 여자애 목소리가 뭐가 이렇게 크나, 싶은거야. 뭔 나이 50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말소리가 왜 그리도 크던지. 너는 몰랐겠지만 사람들 다 쳐다보고 엄청 민망했다"
"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래서?"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그냥 그래서 소개팅 끝나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했지. 딱 라면 끓이려니 그 생각이 나네"
"근데?"
"근데 그 마지막에, 너가 그때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영화관 엘리베이터 탔잖아. 기억나냐? 여튼 극장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탔는데, 니가 뒤로 밀리면서 내 발을 밟고 있었거든"
"그랬어?"
이미 15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당황하며 미안해 하는 아내.
"그때 니가 킬힐 신고 있었거든? 것두 검지 발가락을 꾸욱 누르는데, 그때 나 가죽 존나 쫀쫀한 새 운동화 아니었으면 발가락 백퍼 부러졌다. 여튼 근데 그래서 내가 '저기, 발, 발' 하고 귀에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니가 못 알아듣는거야"
말이 없어지는 그녀.
"그래서 발을 강제로 슥 빼고 나서, 니가 무안할까봐 작게 '별로 안 아팠어요'하고 속삭이는데 또 못 알아듣는거 같더라고. 그때 문득 번개같이 울 엄마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반대편 귀쪽에 대고 '우리 넘 딱 붙었어요'하고 속삭이니까 그제서야 엄청 부끄러워하며 떨어지대"
말없이 라면을 꺼내는 아내.
"울 엄마도 한쪽 귀 안 들리잖아. 근데 문득 니가 그렇다는거 아니까… 그냥 갑자기… 코가 시큰하면서 막 한없이 널 보살펴주고 싶고 막 그러대. 니가 고백했을 때까지 나 계속 모른 척 했잖아. 근 7~8년을."
또 아내는 그 말에 콧물을 닦는다.
"여튼 그렇다고. 아프지 마라,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에 겨우 얼큰해진 코를 풀며 나에게 그 휴지를 던지는 아내.
"그럼 사랑이 아니라 동정으로 시작한거야?"
그 말에 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니랑 나랑 딱 붙었을 때 니 엉덩이가 엄청나게 빵빵하게 힙업된 엉덩이라는거 알았을 때 사랑에 빠졌지"
"아 시발"
"물 끓는다, 라면 넣자"
그렇게 나와 그녀는 오늘도 틱탁대며 이 지랄 맞은 연애를 이어 나간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참 사랑한다.
< 끝 >
"관두겠습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도착한 런던은 내 마음의 불안을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황장애를 유발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알았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미안해"
두 달만의 재회. 물론 너는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눈물로 기뻐했다. 그렇지만 이별 선언의 후유증과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우울증, 그리고 두 달 간의 공백 사이에 있었던 너의 다른 남자.
"그랬구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아는 오빠와의 일회성 관계, 그것도 이별로 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술에 취해 벌어진 헤프닝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데미지가 있었다. 결국 나 때문이었고, 내가 훌쩍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을 일이었건만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시간을 가져도 될까"
"…그냥, 만나지 말자"
"아냐, 미안"
나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너는 두 달의 공백을 단숨에 메꾸고 싶어했다. 못 만난 만큼, 이별을 선언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급하게, 초조하게, 서둘러 메꾸고 싶어했지만 난 그런 네가 부담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잦아졌고, 이번에는 이별에 대한 선언이 너에게서 먼저 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나는 서둘러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녀의 의견을 그저 곱게 따르기로 했다. 연애관계가 변한 순간이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두 달 사이에 이미 조금은 변해버린 너와 나의 연애 권력관계. 절대 갑이었던 나는 어느새 을에 가까워져 있었고, 내가 죽으라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살라면 "널 위해서" 라던 너는 어느새, 죽으라면 "내가 왜?" 살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금 다른 네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장난은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음, 그래"
짖궂게 치던 나의 장난은 진지한 얼굴로 제지 되었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바뀐 것이 없었다. 너는 나를 존중했고 나는 네가 편했다. 가끔 너의 발끈함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거침없었고 너는 조심스러웠다.
"선물 사왔어"
"오! 정말?!"
작은 꽃다발 하나에 좋아라 하는 네 모습에 나는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울려퍼진 카톡, 하는 알람 소리. 순간 아차하는 표정의 너와 상대를 짐작해버린 나.
"흠"
그것은 강간도 화간도 아니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나 지친 마음을 기대고 싶어 술 기운으로 누군가의 어깨를 빌렸을 뿐이며 그는 그것을 오해했을, 아니 잠시 이용했을 뿐. 콘돔은 사용했느냐는 나의 실언에 또 "아니"라고 솔직히 답한 너. 물어본 나도 잘못이지만 솔직히 답해준 너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의식한 내가 다시 미웠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오래된 너와 그 오빠의 기나긴 인연을 어찌 단숨에 끊어내랴 싶어 그저 묵묵히 입을 닫았고, 심지어 그 한번의 관계마저 마음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도 연락해?"
긴 침묵 끝의 대답은 "어. 그냥, 안부만" 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잠금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너의 당당했던 휴대폰은 어느새부터인가 무음으로 엎어져 있었고 언젠가의 깊은 밤, 몰래 시도했던 너의 폰 탐방은 난데없는 비밀번호에 참담히 막혀버렸더랬지.
"그래"
어색했지만, '도대체 왜?' 혹은 '뭐라고 하는데?' 같은 질문을 억지로 두 번 세 번 마음 속으로 삼켰을 무렵, 꽃 한다발로 화기애해했던 우리의 분위기는 곧바로 실패한 소개팅 이상의 어색함을 자아내었다.
그 날이었는지, 그 다음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그 날의 섹스는 유난히 격렬했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육상이었고 레슬링이었다. 아랫도리에서 쾌감을 넘어 꽤 심한 뻐근함을 느낄 무렵에야 우리는 섹스를 끝냈다. 사정은 없었다. 그녀는 정성을 들여 내 아랫도리를 머금었지만 역시나 사정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변강쇠네"
"네 다음 옹녀"
그렇게 다시 근 석 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즘 우리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만큼 만남의 빈도 자체가 크게 줄어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너는 어색함을 힘들어 했기에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그럼에도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없다는 사실은 조금 불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주에 우리 여행갈까"
"미안, 나 선희랑 잠깐 보기로 했는데"
나는 언제나 1순위였다. 친구따위, 가족따위 그 어떤 선약도 나와의 15분 전 약속보다 그 가치가 낮았다.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일주일 전, 최소 반나절 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나는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사실 엄청 피곤하고 싫었다는 그녀의 말에 그저 수긍할 따름이었다. 습관을 들이면 별 거 아니라는 그녀의 부연이 이어졌지만, 충동적인 만남은 어느새 확실히 불가능해졌다. 나의 야근도 늘었고.
"야, 너 휴대폰 까봐"
"응?"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그녀.
"휴대폰 열어보라고! 그 새끼 뭐야. 너 아직도 그 새끼랑 뭐 있냐?"
"뭐?"
언젠가의 금요일 밤. 섹스를 위한 밤이었다. 적당히 근사한 저녁, 기분좋게 손잡고 본 드라마 시청, 적당한 피곤함이 잠에 대한 열망과 섹스에 대한 두근거림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던 그날 밤. 가벼운 터치는 어느새 농밀한 애무가 되어 있었고, 머리 맡의 서랍에서 콘돔을 찾던 도중 수십 개의 카톡 메세지가 무음 속에서 전달되며 뿌옇게 빛나던 너의 휴대폰.
"그거 뭐야"
나의 말에 당황하지만 곧 화난 표정으로 "아무 것도 아냐" 하고 폰을 뒤로 하는 너. 사실 그 시점에 '끝났구나' 생각했다.
"열어"
"싫어"
"그 휴대폰 열어"
"싫다고!"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를 베풀었다.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면, 설령 니가 그 새끼랑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거라도 한번 용서하고 넘어갈게. 내놔 봐"
"뭐? 양다리?"
나의 그 단어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다리? 지금 너 나 의심하는거야?"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참고 또 참다가 그만 욕을 뱉었다.
"씨발년아, 내놔보라고오!"
그녀는 "나가" 하고 선언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뺨을 날렸다.
"후우"
이것을 오해라고 해야 좋을까, 비극이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내 머리채를 쥐어잡는 그녀의 배를 때렸고, 배를 감싸쥐며 쓰러진 그녀는 호흡을 간신히 추스리며 "개새끼, 넌 끝이야" 하고 선언했다.
"상관없어 씨발년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고, 네 번의 시도 끝에 '내 전화번호 뒷자리로 된 비번'을 열 수 있었다.
'염병'
카톡 메세지를 열었다.
"보지 말라고 개새끼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조용조용하던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고,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주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젠 정말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 뭔 소리야. 못 싸는거랑 매력은 전혀 상관없다;;; 진짜 매력없으면 싸지를 못하는게 아니라 발기 자체가 안되지ㅋㅋㅋㅋ ]
…스크롤을 한참을 올려봤다. 침대 옆에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여친과 허탈하게 그 오빠와의 대화를 훑어보는 나. 살을 섞은, 혹은 섞기 직전의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강도 높은 대화들이 많았다. 이미 실제로 한번 섞기도 했고 말이다.
"후우"
조금은 웃기기까지 했다. 아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즐거웠겠지. 오랜 시간의 우정이 섹스라는 열매를 맺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드문드문이지만 꽤 수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어떤 묘한 이성의 존재. 아마 즐거웠을 것이다.
"이 새끼랑 또 잤냐? 맛있디? 창녀 같은 년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나서는 문 뒤로 그녀의 엉엉대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 라는 그녀의 말에 3일 만에 연락한 우리. 그녀의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거의 30분 가까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딱 한번 뿐이야. 그 날도 서로 실수였다는거 인정했고, 너랑 다시 만난 이후로는 잔 적 없어. 정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감이라는게 있지 않는가. 여자의 촉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감. 단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뒤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불쾌했을 뿐. 게다가 그래서야 언제든 다시 섹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 말을 믿는다고 쳐도, 그럼 이제 어쩔건데. 남친 말고 다른 새끼랑 그런 이야기나 쳐하고?"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휴대폰을 켜서 보여줬다. 비번을 걸려있지 않았다. 휴대폰 차단 전화, 카톡 차단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야. 미안해"
그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말했다.
"밥은 먹었냐"
그렇게 우리는 다시 6개월을 행복하게 연애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에게 조금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 위기를 겪고 나자 우리는 오히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다.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조금은 루즈한 연애에 우리는 다시금 위기를 겪었을지도 몰랐으니까.
함께 대만, 일본, 캐나다를 여행했다. 2천 남짓 모아놓았던 돈도 방탕한 연애질에 700 가까이 써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귀국하던 그 날, 여친은 쓰러졌다. 조금은 추하게.
"간질이요?"
뇌전증이라는 말에 바로 '간질'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녀.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간질 환자라고 했더랬지. 의사가 "예, 뭐" 라고 대답하는 순간 여친의 눈에서 곧바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는 자의 눈물'이었다.
"무슨 미친 개소리야! 그럼 너가 그렇게 나 두고 가버리면, 나는? 나는? 어? 그럼 반대로 내가 간질이면 너도 나 버릴거냐? 어?"
나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단언했다.
"어, 버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야, 아직 두 군데 밖에 안 가봤어. 그리고 간질이라는게 시발 뭐 무조건 다 좆같은 케이스만 있는게 아니라두만. 왜 혼자 오바야. 그냥 좀 가끔 남보다 불편할 수 있는거 뿐인데. 더한 병 갖고도 잘만 사는데 왜 오바야 오바는" 하고 그녀를 달랬다.
"너가 진짜 그 상황을 몇 번 겪다보면… 그리고 니 앞에서 그런 꼴 보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
"야, 피차 시발 자지 보지 똥구멍 다 깐 사이에 부끄러울게 뭐 있는데? 어? 간질 와서 똥싸면? 닦아주고 씻겨주면 그만이고, 어? 시발, 어? 오줌 싸면, 오줌 싸면 닦아주면 그만이고, 쓰러지면, 어디 안 부러지게 쓰러지기만 하면 내가 일으켜주고, 다치면 병원 데리고 가면 그만인데, 뭐가, 어? 뭐가 힘들다고 그 유난이야. 아예 남들은 반 병신되서 침대에서 오줌 똥 수발 다 하면서도 살아. 혀 돌아가면 내가 다 빼줄건데, 평소에는 잘 발현도 안되는 뭐 그런 거 땜에 그렇게 오바질이냐고"
나도 울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다는게 속상했다. 병을 갖고 있는게 속상했다.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그 병에 떨면서 살아갈 것이 안타까워서 속상했다.
"아프지마… 아프지마, 병신아. 왜 아프고 지랄인데. 누가 아프래. 니 몸 니꺼 아니라고, 함부러 아프지 말랬잖아"
나도 그녀도 울고 있었다.
"너 간질이 어떤건 줄 알아? 평생을 폭탄 언제 터질지 몰라서, 본인도 떨고 가족도 떠는 병이야. 너어, 나중에 나 상처주지 말고 그냥 지금 헤어져. 그게 차라리 나아"
"좆까, 좆까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평생토록… 아마 우리는 질리도록 싸우고 또 싸우겠지만 어쨌거나 평생토록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고, 아껴도 내가 아끼면서.
"그거 아냐?"
노을 지는 낚시터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근 한 시간째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에 그저 콧물만 한 사발을 들이키고 있던 나는 라면 물을 올렸다.
"처음에 내가 너 만났을 때, 이 이 기집애랑은 사귀면 영 구리겠다 생각한거"
"뭐?"
부창부수라고, 남편이 라면물을 올리자 집에서 썰어온 대파와 양파를 꺼내는 아내.
"아니 뭔 여자애 목소리가 뭐가 이렇게 크나, 싶은거야. 뭔 나이 50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말소리가 왜 그리도 크던지. 너는 몰랐겠지만 사람들 다 쳐다보고 엄청 민망했다"
"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래서?"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그냥 그래서 소개팅 끝나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했지. 딱 라면 끓이려니 그 생각이 나네"
"근데?"
"근데 그 마지막에, 너가 그때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영화관 엘리베이터 탔잖아. 기억나냐? 여튼 극장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탔는데, 니가 뒤로 밀리면서 내 발을 밟고 있었거든"
"그랬어?"
이미 15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당황하며 미안해 하는 아내.
"그때 니가 킬힐 신고 있었거든? 것두 검지 발가락을 꾸욱 누르는데, 그때 나 가죽 존나 쫀쫀한 새 운동화 아니었으면 발가락 백퍼 부러졌다. 여튼 근데 그래서 내가 '저기, 발, 발' 하고 귀에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니가 못 알아듣는거야"
말이 없어지는 그녀.
"그래서 발을 강제로 슥 빼고 나서, 니가 무안할까봐 작게 '별로 안 아팠어요'하고 속삭이는데 또 못 알아듣는거 같더라고. 그때 문득 번개같이 울 엄마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반대편 귀쪽에 대고 '우리 넘 딱 붙었어요'하고 속삭이니까 그제서야 엄청 부끄러워하며 떨어지대"
말없이 라면을 꺼내는 아내.
"울 엄마도 한쪽 귀 안 들리잖아. 근데 문득 니가 그렇다는거 아니까… 그냥 갑자기… 코가 시큰하면서 막 한없이 널 보살펴주고 싶고 막 그러대. 니가 고백했을 때까지 나 계속 모른 척 했잖아. 근 7~8년을."
또 아내는 그 말에 콧물을 닦는다.
"여튼 그렇다고. 아프지 마라,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에 겨우 얼큰해진 코를 풀며 나에게 그 휴지를 던지는 아내.
"그럼 사랑이 아니라 동정으로 시작한거야?"
그 말에 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니랑 나랑 딱 붙었을 때 니 엉덩이가 엄청나게 빵빵하게 힙업된 엉덩이라는거 알았을 때 사랑에 빠졌지"
"아 시발"
"물 끓는다, 라면 넣자"
그렇게 나와 그녀는 오늘도 틱탁대며 이 지랄 맞은 연애를 이어 나간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참 사랑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