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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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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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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무리한 끼어들기에 의한 3중 추돌사고였고, 차가 반바퀴 돈 상황에서 2차 사고로 빚어진 측면추돌에 의해 나는 그대로 절명했다.

'시발…'

죽는 와중에도 승호 형 말 듣고 그냥 외제차 살 것을 괜히 쉐슬람들 말 쳐믿고 임팔라 샀더니 이 지랄이구나 하고 후회했다. 하기사 도로 위에 재규어도 다니고 아슬란도 다니고 바이퍼도 다니는데 초식동물 임팔라라니, 뒤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고 아재개그를 치며 그렇게 나는 죽었다.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은 꽤 짜릿한데, 사정하는 느낌하고 비슷하다. 어쨌거나 영체가 되어 그렇게 으깨진 내 대가리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저 머리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으스스한 분위기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저승사자'

그는 길게 말하지도 않고 '알지?'하는 느낌으로 "가자" 하고는 나를 저승으로 인도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뻗댄다고 뭐 달라질성 싶지 않아 나는 그를 따라나섰다.







인생 2회차







과연, 옛날 이야기의 그 수많은 구전처럼 삼도천을 지나 저승에 도착해 나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염라대왕을 직접 뵙게 되니 꽤 감개무량했는데, 그는 키가 한 20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거리감을 일순간에 마비시키는 거인이었다.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무서운 얼굴이 꼭 무슨 어디 대형사찰 문 앞의 사천왕 뭐 그런 느낌이랄까.

"어디 보자꾸나"

재판 절차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루에 죽는 대한민국 사망자 수, 즉, 일 평균 750회의 재판을 한다고 하는만큼 나같은 시시한 소시민의 재판에 무슨 시간이 그리 걸리겠는가. 이승의 재판도 그렇지만 말이다.

간단히 저승명부에 기록된 내 이름을 확인하고, 결과에 승복할 것을 맹세하고, 재판장 한 켠에 세워진 초대형 거울에 생전의 굵직굵직한 내 죄들을 비쳐주는데 보고 있노라니 꽤나 부끄러웠다. 미안한 일도 참 많고.

"여기 비친 네 죄들을 인정하느냐?"
"예"

이쯤해선 빼도 박도 못하게 지옥행 확정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조금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는데, 염라대왕은 의외로 잠시 고민을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인 김박스에게 윤회형을 선고한다. 다시 한번 윤회의 고리에 올라 사람으로서 업의 시험을 받는다. 당 판결에 대한 이의는 3일 내로 항소를 통해 제기할 수 있다. 이상!"

빼박 지옥행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시 사람으로서 삶을 살게 되는 윤회형이라는 말에 나는 엄청 기쁜 얼굴로 만세를 불렀다. 내 뒤에 서있던 다른 망자들도 조금 부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나를 다시 삼도천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는 혀를 찼다.

"도대체 요새 인간들은 죄를 얼마나 짓고 다니길래 너 정도 쓰레기가 다시 윤회형을 받냐? 백퍼 지옥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그러게요"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한 나였지만 그는 별로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지옥 가서 조금 뺑이 치다 죄값만 다 갚으면 극락가서 선녀들이랑 질펀히 즐기며 편히 살 것을, 2회차 인생 살면서 업만 더 쌓지. 쯧쯧"

그 말에 그럼 윤회형은 별로 좋은게 아니냐니까 저승사자는 "윤회도 윤회 나름이지" 하고 썰을 푸는데. 벌레로 태어나면 뺑이는 치지만 금방 죽기 때문에 업도 덜 쌓고 벌레 자체가 일종의 형벌형이기 때문에 이승에서 지난 삶에 대한 업도 덜고 꽤 이득보는 윤회라고 했다. 초식동물도 마찬가지. 그러나 육식동물로 태어나면 살육의 업도 상당히 많이 쌓게 되어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최악은 역시…"

그것은 '인간'으로의 윤회로, 살면서 온갖 죄라는 죄는 다 지을 수 밖에 없는 지랄맞은 종인데다 수명도 보통 50년 이상은 보장되는 편이라 업을 산더미처럼 쌓아온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언젠가부터는 어디서 무슨 일들을 벌이는건지 '원죄'라는 무거운 죄까지 알아서들 짊어지고 온다고 혀를 찼다.

"그럼 윤회형이 절대 좋은게 아니네요? 그럼 나 좆된건가요?"

그 말에는 또 "그건 아니고…" 하고 말을 흐리는 저승사자.





"아니 윤회를 백 번을 하면 뭘하냐고. 전생의 기억을 다 잊고 새 출발하는데. 안 그래?"

저승의 시스템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저승사자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도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그죠? 나도 윤회라는 시스템이 그게 이상했다니까? 아니 뭐 기억이 있어야 반성하고 조심하면서 다음 생을 사는거지, 다 까먹으면 또 당연히 뻘짓하죠"
"그래, 그래놓고 뻘짓했다고 지옥으로 보내는 이 시스템이 나는 영 마음에 안 들어. 내 일이지만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어디 자기 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윤회의 고리로 시험하는 이 짓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저승사자는 "기분이다" 하면서 강가에 다가가자 조언을 했다.

"삼도천 다시 건너가서, 그 강가에서 삼신할매가 목 마르지? 하면서 곡차 주면 그거 절대 받아마시지 말아. 그거 마시면 기억 싹 다 날아가고 바보 된다. 그냥 다시 갓난쟁이로 태어나는거야."
"음. 근데 그거 안 마시면 뭐 부작용은 없나요?"
"있어"
"예?"
"니가 지금 기억 다 갖고 다시 태어나면 그게 애새끼겠어, 아니면 애늙은이겠어. 절대 뭘 좀 아는 티 많이 내지 마라. 그러다 다른 저승사자나 삼신할매한테 걸리면 곧바로 너 다시 저승 끌려간다"
"헐"
"또 한가지 알려줄까? 짐승으로 윤회하면 그거 안 마셔.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대소변 가리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살 수 있는거야. 본능은 얼어죽을"
"헐"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말이 많은 저승사자는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저승사자는 원귀와 다를 바 없어. 이승도 아니고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이 구천을 끝도 없이 맴도는거지. 지랄맞은 일이야."
"살아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화랑이었지"

그 말을 듣자 나는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이 저승사자가 이토록 나에게 친근한 것이며,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할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는지, 어째서 나 역시 이 저승사자가 그리 싫지 않은지. …예전에 듣기로 화랑들이 남색을 그리 밝혔다지. 내가 묘하게 싱글벙글 미소를 보이자, 그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내 생전의 동무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이후 한참을 말없이 걷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물었다.

"갑자기 궁금한데, 그럼 다시 환생하면 2017년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아니면 나 태어난 해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곡차를 마시면 2017년에 태어나고, 안 마시면 원래 태어난 해에 태어나. 저승명부에 갱신이 안 되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거지. 그러니까 걸리면 다시 저승 가는거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또 물었다.

"기억 안 지우고 인생 두 번 산 사람 중에 진짜 완전 잘 된 케이스 있어요?"

저승사자는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




우리는 이윽고 삼도천 강변에 도착했다. 말없이 나룻배에 올라타 뿌연 몽연 속을 가르던 중, 저승사자가 아까의 질문에 대해 답했다.

"조선시대 사람인데, 배를 타고 이렇게 너처럼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거야. 그래서 내가 무엇이 그리도 구슬프신가, 하고 물었더니 도저히 말로 다 못할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 그렇소, 하고 입을 다무는데, 조선 시대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건 보통 일이 아닌거거든. 그래서 뭔가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겠구나 싶어서 나도 더이상 안 캐묻고 그냥 '아무리 힘들어도 마른 목으로 돌아가시오. 지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외다' 하니까 알아듣고 삼신할매 곡차를 슥 흘려버리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내가 호기심에 묻자 저승사자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이승 돌아가서 그 분한 일 없도록 평생 자기 할 일, 큰 일을 다 이루고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 나라에서 그 사람한테 '충무공' 시호를 내려주더만."
"헐?! 정말로?"
"내 최고 치적이지. 덕분에 결과적으로 내가 역천의 죄를 지었음에도 처벌 안 받았잖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던 저승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놈들은 기껏 보내봐야 주식이나 하고, 인생 두 번 살면서 지 개인 영달을 위해서만 살더라고. 자잘한 놈들"

그 말에 나도 슬몃 웃으면서 "현대인들 중에 잘된 거물들은 없어요?" 하고 물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있긴 있지. 정치인 중에 있었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이 영 안 좋았지"

그런 대화를 나누던 중 어느새 배가 강나루에 도착했고, 그는 나를 삼신할매에게 인도했다. 할매는 내 얼굴을 보며 "어이구 이 놈아, 대가리가 깨져 죽었나. 다음 생은 제발 조심히 살어라" 하고는 등 두드리고 차 한 잔을 내미는데, 할매도 몇 번을 당해서인지 내가 곡차를 마시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한참을 당황하다가 저승사자의 눈빛을 살피노라니, 저승사자마저 혀를 차며 '이건 안되겠다' 하며 고개를 젓는 눈치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이판사판으로 몽환차를 마시는 척 입에 머금었다.

"음"

그리고 그 모습에 내가 곡차를 마신 줄 알고 흐뭇하게 삼신할매가 배넷저고리를 챙기며 내 엉덩이를 두드리고 그 자리에 몽고반점이 생기는 그 순간, 나는 그 몽환차를 등을 돌린 후 얼른 뱉어버렸다.

"크하하하하!"

저승사자는 적절한 타이밍에 크게 웃었고, 그렇게 그가 할매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으로 난 기억을 완전히 잃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비록 뱉기 직전 한 모금 넘어간 덕분에 그 아련한 저승의 기억을 아주 뒤늦게, 오늘에서야 떠올렸지만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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