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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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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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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벼운 접촉사고, 아니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생, 괜찮아?"
"예예"
"아니 저기, 아이, 어이!"

전날 연습에 늦은 것도 모자라 시합 날에 또 늦잠을 잤기에, 감독님의 구타가 두려웠다. 그냥 가볍게 차 범퍼에 가볍게 무릎이 닿은 정도의 사고였기에 그냥 그렇게 차를 보내고 정신없이 학교까지 달렸다.

'어어?'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늦게 시큰한 통증이 왔다. 아차 싶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늦었기에, 몸도 제대로 못 푼 상태로 시합에 나갔다. 풀 타임으로 경기를 다 뛰고, 졌다는 이유로 시합이 끝나고 기합을 또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는 무릎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경기를 뛰었다가는 여지없이 1쿼터만 끝나도 무릎을 감싸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에 병원에선 가볍게 인대가 놀란 정도라고 했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훈련과 시합 덕분에 나는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온갖 마사지며 약물이며 안 써본 방법이 없지만 효험이 없었다. 신경쪽 문제인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절대 무리하면 안됩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통증 완화를 위해서 농구를 그만두라고 조언한 상태였다. 이대로 계속 무리했다가는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풀타임 경기가 어려운 수준으로 통증이 악화되었고, 1학년 태경이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서 나는 점차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다. 경기 다음 날이면 하루에 진통제 거의 한 통을 다 먹으며 생활하던 내 모습에 엄마도 관둘 것을 권했다.

결국 태경에게 밀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억지로 뛰며, 그것도 후보로 뛰던 날이 많던 나는 전국체전 지역예선 경기에서 1분도 뛰지 못한 날을 기점으로 농구를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모든 것을 어이없게 잃은 나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고, 농구를 관둔 나가리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하는 생각에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더이상 세상에는 내가 할만한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 버리는게 아까워 군대부터 다녀왔다.

"정신차리고 이제 일해야지"

군대 전역하고 나서고 한 3개월을 방구석에서 잠만 자니 엄마가 한 소리였다. 일자리를 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런 후진 동네에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성기형이었다. 휴가 나올 때마다 어울린 농구 관둔 친구와 선배들. 그 중에서 서울에서 자리 잡았다는 그 형. 제네시스를 타고 왔던 성기 형.

"형, 잘 지내?"
"어어 우리 효원이 이 쉐리, 간만이네. 형은 잘 지내지. 왠일이야? 군대는 전역했지?"
"예, 뭐. 그보다 사실은 그냥 일 좀 할까해서"

술자리에서 형이 야부리 턴, 한달에 몇 백씩 번다던 그 일.

"어어? 왜, 너도 서울 올라오려고?"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에 실망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형은 의외로 유쾌하게 대답했다.

"형 자취방 좁아지니까 짐 많이 가져오진 마라"







밤나비







버스를 타고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7호선 논현역에서 내린 나. 큰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형이 말해준대로 논현 초등학교 근처로 향했다.

'와'

시장 골목을 지나며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네' 싶어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한산한 동네를 바쁘게 걷는 퇴근길의 정장 입은 직장인들과 골목길을 누비는 외제차들, 미용실에 가득한 화려한 화장의 누나들을 보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누가 촌놈 아니랄까봐.

"형, 나 거의 다 왔는데"

전화를 하자, 성기형은 "어, 벌써 왔냐? 미안 나 지금 강남역 쪽에 있는데. 그러면, 그… 한신포차 앞에서 기다려라. 한 10분 있다 보자" 하고 뚝 끊었다. 거기가 어딘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결국 지나던 아저씨에게 물어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미용실과 그 안의 예쁜 여자들. 벌써부터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됐다.




"그 씨입쌔끼가 원래 그래. 전술 좆도 없고 무식하게 애들 체력으로 조지는거만 할 줄 아는 새끼. 영석이 허리 나갔을 때도 죽어라 돌렸잖아. 영석이 그 새끼도 결국 허리 씨발 개좆돼고, 우리 선배 중에 민우 선배도 씨발, 하이튼 그 새끼가 잡아먹은 새끼만 몇 명인지 몰라. 나도 그 새끼 땜에 다리 풀려서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 눈 밑에 이거, 이거 보이냐? 이거 그 때 상처잖아"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 바지에 스카쟝을 입고 나타난 성기형과, 청자켓에 검은 스키니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의 친구 원민. 성기형은 같이 운동했던 사이고, 원민이 형도 성기형이 바이크 탈 때 같이 다닌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다. 농구부 출신의 우리 만큼이나 그 역시 키가 훤칠한 편이다. 새하얀 얼굴에 꼭 여자같이 예쁜 꽃미남 인상이라 성기형이랑 다니면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고 누나들이 놀리고 했었는데. 여전히 미남이긴 하다.

"그래서, 신세 좀 지고 싶다?"
"네"
"안될거 없지. 새키, 그래도 어떻게 내 생각을 다 했냐? 내가 니랑 뛸 때 존나 이뻐하긴 했다만. 아, 효원이 이 새끼 패스가 존나 예술이거든. 이 새끼랑 농구하면 존나 재밌어. 아 그리고 효원아, 원민이도 농구 좀 해. 중학교 때까지 농구한 애야 이 새끼도. 여자애 임신시키고 학교 짤렸지만. 레전드 아니냐? 하여튼 잘 왔어"

한참을 이야기하고, 술도 두 병 깠을 때 형은 담배를 피우며 대견해했다. 솔직히 나는 건달 일이라도 배울 생각으로 왔다. 농구만 하던 새끼가 농구 못하게 되고 배운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세히는 말 안 해줬지만, 화류계 일이라고 했으니 기도 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뭐? 아…이 새끼. 건달 짓 해서 빨간 줄 가고 싶냐? 븅신도 아니고. 그런 짜치는 일을 왜 해. 하여간 촌놈 아니랄까봐"

성기형은 그저 '건달 짓'을 '빨간 줄 가는 일'이라며 욕할 뿐, 정확히 무슨 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원민이 형이 소주를 깔끔하게 넘기더니 말했다.

"선수. 호빠 선수 일이야. 너 할 수 있겠어?"
"호빠? 호스트바요?"

글쎄. 호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좆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들 밑구녕 닦아주는 일이나 하면서 그 허세를 떨었나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한잔을 더 들이켰고, 그 어색한 공백에 성기형이 말했다.

"더러운 일 하러 올라왔으면, 니도 그냥 좆걸레해. 주먹질 해서 호적 걸레 만드는 것보단 자지 걸레 만드는게 낫지. 여자랑 노닥대고, 따먹고 돈도 벌고. 건달은 씨발, 뭔 영화 찍냐? 기집애들 비유만 좀 맞춰주면 돈이 다발로 나오는데 뭐하러 병신같이 돼지어깨들 뒤닦아주고 다니냐?"




술자리를 마친건 새벽 1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출근해야 되는거 아니냐고 묻자 둘은 웃으면서 "야이 새끼야" 하고 손을 들었다. 간만에 고향 동생 왔는데 오늘도 일해야 되냐며 그냥 쳐놀기나 하라는 그들의 말에 그저 정신없이 놀았다. 술에, 노래방에, 생전 처음으로 룸까지 다녀왔다.

"아 간만에 씨발, 접대하다 접대 받으니 존나 좋네. 아 피곤하다. 원민아, 어떠냐, 이 새끼 잘할거 같지 않냐?"

집 앞에서 들어가기 전, 함께 셋이 오피스텔 앞 화단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순간, 원민이 형은 성기 형의 말에 픽 웃었다.

"사이즈 나오잖아. 말 수 없고, 순진하고, 몸 좋고, 착하게 생겼고. 언니들이 환장하겠지. 좋아. 좀만 꾸미면."

그러나 담배를 짓이겨 끄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본인이 한다고 해야지. 그리고 승재 형이 하라고 해야 하는거지, 뭐 우리가 꽂아줄 수 있는 끕이나 되냐. 여튼 나 간다"
"어 그래, 잘 가라"
"들어가요"

그리고는 성기 형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워놓은 베스파를 타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원민이 형 집은 역삼동이라고 했다. 성기형은 그제서야 얼큰하게 취한 술이 좀 깨는지 "드가자" 하며 나를 이끌었다.




"형 집 좋다"
"그럼"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천장에는 무슨 레일 달린 조명에 50인치 TV에… 새하얀 방이 너무 좋았다. 원룸인가 했더니 넓직한 방도 두 개나 되고, 정말 좋았다. 이런게 고급 오피스텔이겠지. 바닥에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지긴 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이런 데는 막 몇 억씩 하지?"

그 말에 성기형은 웃었다.

"미친 무슨 부동산 하냐? 그냥 월세지 뭔 몇 억이야. 그 돈 있으면 장사하지"
"그럼 이런데 월세는 얼마나 해?"
"이백"
"이백?!"

놀라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이백에 월세 이백"

그러나 나는 월세보다 보증금에 더 놀랐다. 우리 구미 집 보증금도 2천인데.

"서울인데 보증금이 왤케 싸?"
"이런 데는 다 씨발 우리 같은 새끼들이 대부분이야. 술집 다니는 년들 아니면 밤일 하는 새끼들. 평범한 직장 다니는 새끼들이 월세100만원 200만원 내면서 살 수 있냐. 태반이 그냥 우리 같은 애들이 사는거지. 금방 금방 가게 옮기고 하니까 단기로 살 수 있게 보증금 싸고 월세 비싸고, 뭐 그런거야. 나도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한 두 달 됐나?"
"장난 아니네"
"아 피곤하다. 야, 거기 옷 방인데, 거기도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나 먼저 씻는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라. 앗싸리 안 할거면 빨리 말해주고. 그럼 걍 며칠 놀다 내려가고"




성기 형은 확실히 함께 농구할 때 죽이 잘 맞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다니. 어쩌면 그냥 나랑 같이 일하면 사이즈 좀 나오겠다 생각해서 끌어들이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잘해준건 잘해준거다. 고마운 사람이다. 하기사 옛날에 성기형 엄마 쓰러졌을 때, 우리 꼰대가 차에 태워서 병원 안 갔으면 그때 돌아가셨을거라고 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 덕분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느즈하게 일어난 우리는 집 앞 뼈해장국 집에서 속을 풀고, 신논현역과 강남역을 지나 원민이 형을 태워 신사동 쪽으로 향했다.

"딱 씨발 나도 2억. 아니 3억만 채워서 내려간다. 학교 앞에 노래방 차려야지. 에이끕 언니들 존나 돌리면서. 돈 딱 세게 맞춰주고, 여고 애들 졸업하면 바로 울 가게로 취업시키고. 개멋진 사장님 해야지. 원민이 니는?"
"나는 뭐, 그냥 돈 좀 있는 누나 하나 꼬셔서 씨 좀 뿌려주고 서방으로 살아야지. 평생 바람 피우면서"
"아 나 이 새끼는 진짜. 뭐가 이렇게 드럽냐. 효원이는?"
"난 그냥… 모르겠는데"

그러자 성기형이 룸미러로 힐끔 뒷좌석의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효원아, 서울에서 자리잡고 일하던, 구미 다시 내려가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싸나이는 딱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되는거야. 누굴 따먹겠다, 아니면 뭐 사업을 하겠다, 아니면 뭐 돈을 모으겠다던간에. 딱 목표가 있어야 노력도 하는거고. 아니면 인생 바로 좆꼬인다. 이 새끼처럼"
"야"



성기 형이 나를 인도한 곳은 신사동의 한 미용실이었다. 촌스러운 머리 좀 어떻게 하라고. 예전에 일하다 망한 가게 앞의 미용실이라고 했는데, 형도 간만에 온다고 했다. '그런데 굳이 나를 왜 데려왔나' 했더니, 역시나 자기도 스타일링 받으며 여기의 한 미용사 여자애랑 노닥대기 시작했다. 애교를 엄청 부리는 것을 보니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나보다. 어쨌든 내 머리를 담당하는 미용사, 아니 '헤어 스타일리스트' 누나도 엄청 예뻤다.

"어때요? 머리 길이 마음에 드세요?"
"네"
"그리고 머리는 내일 하루동안 감으시면 안되요"

다가온 성기형과 원민이 형은 "아 사람 됐네" 하며 박수를 쳤다. 조금 쑥쓰러웠지만, 솔직히 감탄했다. 머리 스타일 변화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싶어서.

가게를 나와 가로수길 쪽으로 걷노라니, 성기 형이 문득 말했다.

"봐, 이 새끼야. 지나가는 기집애들 다 질질 싸잖아. 우리는 상품성이 있다고"
"야 다 들려, 볼륨 조절해라"

형에게 빌려입은 반듯한 블랙 수트에 팔찌와 시계 같은 악세사리들. 원민이 형은 브라운 수트, 성기형은 무슨 검도복 마냥 엄청 통 넓은 바지의 블랙 수트…평일 대낮에 쭉 빼입은, 헤어 스타일링 받고 나온 키 180 중반대의 남자 셋. 

'그럴싸하네'

지나가던 카페 창에 비친 우리 셋. 나는 적당히 평범하고, 성기 형은 전형적인… 나쁜 남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상이고, 원민이 형이야 꽃미남이니까. 지나가던 여자들이 모두 힐끔 거리고, 뒤에서 수근거리며 좋아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성기형은 고개를 휙 돌려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기까지 하니 어린 애들은 꺄꺄 대며 좋아하기도. 원래도 좀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이 정도로 능글 맞진 않았는데. 형도 제법 변했구나 싶었다.

"니가 어리버리하게 귀염 떨고, 원민이가 분위기 만들고, 나랑 승재 형이랑 조지면 딱 바로 게임 셋이지. 딱 박스 각 제대로 나오잖아. 경원이 창희 이딴 마바리들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에이스들끼리 역할 분담 딱딱 팀으로 가는거지"

어쨌든 농구부 활동할 때도 여자들 시선이야 종종 받았지만, 서울 강남에서 제대로 차려입고 예쁜 강남 여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물론 머릿 속 한 켠에서 '그래봤자' 하는 브레이크가 또 걸렸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슬슬 저녁이 되자 논현역으로 돌아온 우리. 나는 내심 오늘도 '술인가' 생각했지만 의외로 형이 나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미안한데, 형들 오늘 일 생겨가지고 니는 그냥 혼자 좀 있어야겠다. 이걸로 밥 사먹어. 아님 뭐 어디 클럽이라도 가서 놀던지. 비싼거 먹어도 돼. 그렇다고 씨발 어디 뭐 지르면 죽인다. 카드 잃어버리면 뭐, 알지?"

손날로 목을 긋던 그는 원민이 형의 등을 툭치며 "가자, 아 근데 씨발 우리가 뭔 보도까지 뛰냐, 승재 그 새끼도 진짜 쌈마이 하고는 염병…"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형 고마워"

뒤늦게 인사를 한 나는 그저 형의 오피스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서브마리너의 무게에 새삼 형들이 돈을 잘 벌긴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놀고, 멋있는 형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진짜 조폭 일 하라고 했으면 내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고. 그러나 사실 여자애들이랑 뭐 그런 일을 한다는건,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주제에 무슨. 그러다 형 오피스텔 근처의 작은 오뎅바가 보였다. 우동이 먹고 싶었다.




퇴근 시간대라서 그런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나마 비어있는 구석 쪽의 테이블에 앉은 나는 우동에 닭꼬치 두 개를 시켰다. 잠시 후 우동이 나왔고, 고춧가루를 뿌린 바로 그 순간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한 여자애가 가게 안에 들어섰다.

'아…'

몸매가 확 드러나는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웨이브 진 밤색 머리의 그녀는 가게 안을 잠깐 살피더니 유일한 빈자리였던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내내 눈을 떼기 힘든 그녀의 외모에 진심 감탄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내 밥그릇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어'

하지만 수저통이 이쪽에 없었다. 나는 힐끔 옆자리를 보았고, 그 순간 방금 자리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가게 남자들이 다 대놓고 쳐다봤으니까. 연예인급 미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뒤늦게 "저기, 죄송한데 수저 좀…" 하고 손가락으로 그녀 테이블 위의 수저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아, 네" 하고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벌 챙겨 주었다. 그냥 수저통을 통째로 줘도 되는데 그거 챙겨주는게 또 묘하게 이뻐보였다.

"감사합니다"

수저를 전달받은 나는 다시 우동과 꼬치만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이번에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예?"

은근 그녀의 동태에 촉을 세우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고,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가리며 웃다가 "아뇨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시치미 통 좀…" 하고 내 테이블 위의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나도 그제서야 픽 웃고 고춧가루 통을 건내주었다. 일본어가 쓰여 있어서 그냥 일본 고추가루인가보다, 했더니 이거 이름이 '시치미'인가보다. 그리고 그 순간 테이블 아래로 힐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눈이 갔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우아하면서도 뭔가 섹시한 그녀의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돌려 우동에 눈을 돌렸다. 여자도 나온 우동을 먹고, 은근히 옆으로 슬쩍 눈길을 주니 얼굴 옆라인도 이뻤다. 저런 여자는 누가 데리고 잘까.




"저기요"

아마 평범한 며칠 전의 나였다면 아마 저런 도도한 매력의 여자한테는 말도 못 붙였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기 형이 빌려준 비싼 정장에 비싼 시계에, 파마까지 하고 관리 받은 나는, 내가 봐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은근히 먹는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가 다 먹고 일어서길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네?"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데, 하….

"저기, 그쪽이 입…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잠깐 커피라도 안 하실래요?"

모르겠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거. 이런 것도 처음이고. 내 말에 여자는 잠깐 픽, 하고 웃더니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역시 조금, 역시 쉽지 않지. 나는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친 있으신가요" 하고 한번 더 물었다. 여자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흐, 쪽팔리네"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멋적음을 느끼며 나는 형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할 일도 없는데 방 청소라도 해둘 요량이었다.





"후우"

청소를 다 끝내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게 뭐지, 싶었다. 아직도 민망한 기분이 조금 남았지만, 그보다는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더 컸다.

이대로 구미 내려가면 시팔 어디 공장 들어가서 박스나 나르고 조립이나 하겠지. 빡센 일 하면 무릎도 언제 다시 고장날지 모르고. 대학교를 가자니 돈도 없고 공부도 뭐 내 갈 길 아니고. 기술은 누가 공짜로 가르쳐주나.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자들 비유나 맞춰주면서 하…' 하는 생각이 지나갈 무렵. 좀 전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어차피 연애질도 여자 비유 맞추는건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양복에 그 시계에 그 팔찌에 그 구두. 공장 다니면 어디 해보기나 할 일이 있을까. 차도 끽해야 트럭이나 몰겠지. 갑자기 담배가 겁나게 땡겼다. 하지만 이미 돗대는 아까 피운지 오래고, 나가기 귀찮았다.

문득 고생하는 엄마 생각이 났다. 한달 150 벌자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공장 나가는 불쌍한 아줌마. 손발 퉁퉁 부어가지고는 야근 1시간 추가되면 그래도 얼마라도 더 번다고 좋아하고. 남편이라고는 딴 년이랑 살림 차려 나가서는 평생 돌아오지를 않고. 그나마 아들 새끼 하나 있는거 뒷바라지 했더니 무릎 병신 되서 이제 운동으로 돈 벌 일은 영영 없고. 그냥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려서, 죽는 날까지 고생만 하다 가실게 분명한 불쌍한 우리 엄마. 조온나게 불쌍한 우리 엄마.

"씨발…"

뭐 없다 싶었다. 나도 성기 형처럼 목돈 조금 만들어서, 엄마 데리고 청과물 가게라도 열어서 둘이, 아니 엄마는 쉬라고 하고 나 혼자 열심히 해서, 그래서….

'그게 될 리가 있나'

이렇게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잠깐 멋지게 살다가, 그러다 말겠지. 그러나 '그래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러다 말 인생인데. 담배를 사러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랬구나, 존나 뭐 없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나오는 길, 우연찮게도 아까의 그 여자가 다른 여자 하나와 함께 깔깔대며 편의점 골목 안 룸 술집으로 들어가는걸 봤다.

'결국 다 그렇고 그런건가'

그래, 운동 잘하는 놈이 땀 팔아 먹고 살고, 공부 잘하는 놈이 대가리 팔아 먹고 살고, 몸 좋은 놈이 좆 팔아서 돈 버는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다 파는 것도 아니라면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뭐 없네 진짜. 서울도 별로."


< 끝 >






"그때 그 새끼가 그랬단 말이야. '횽, 죠는 건달할껀데요'. 원민이 완전 벙~ 쪘잖아. 나도 순간 이 새끼가 뭔 소리 하나 싶은데 빵 터지는거 참고, '건달해서 뭐할건데. 나처럼 맨날 여자들 행복주며 살래, 아니면 어깨들 수발들며 얻어터지며 살래' 하고 말하니까 애가 쭈삣대더라고.

어휴 우리 민정이 잔 비었네? 미안, 내가 한잔 벌주 마실게. 크, 어쨌든, 그리고 그날 셋이 술 마시고 놀고, 다음 날 딱 데리고 나와서 꾸며놨더니, 아 사이즈 제대로 나오는거야. 지금은 그 새끼가 그래도 곯아서 좀 그런데, 그때는 진짜 애가 지금보다 더 괜찮았어. 푸푸웃~한게 아주 괜찮았지"

민정은 "그럼 오빠가 효원 오빠 키운거네? 원민이 오빠랑? 진짜 슈퍼 에이스 제조기네. 몇 명을 키운거야" 하고 사과를 베어물었다.

"그치, 내가 진짜 아주, 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똥 치워주고 다 애기 키우듯이 키웠다 진짜" 하고 성기가 넉살을 부리자, 민정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은근 오빠 장가가면 디게 애들한테 잘할거 같다"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성기는 어느새 민정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그럼. 내가 키운 애기들이 우리 가게 반이 넘는데. 진짜 완전 보육원 원장님이야. 호빠 보육원" 하며 민정의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 "근데 나도 이제 선수 그만 뛰려고. 나이도 있고, 내 가게 차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민정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정은 문득 머릿 속으로, 성기와 함께 가게를 차리고 사장님이 되어 큰 돈을 버는 행복한 꿈을 떠올렸다. 엄마랑 함께 미용실 차리려고 모아 놓은 돈 8천만원으로 그게 가능할까, 속으로 계산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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