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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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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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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희

"나 가지 말까? 응?"

웃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꽤 스무스하게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가'라는 말은 죽어도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2. 가영

"사람 많은데서 정말 이럴거야? 아 쫌 놓으라구!"
"한번만 더 생각해봐라. 내가…하아, 이건 내가 납득이 안되서 그래. 이유라도 말해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히히덕대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가영의 손을 꾹 쥐었고, 그녀는 "아프다고!" 하며 소리까지 질렀다. 그녀의 말에 나도 놀라 "미안"하고 그만 손을 놓았고, 가영은 차갑게 말했다.

"오빠도 그 새끼랑 똑같애. 똑같다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영의 차가운 눈빛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3. 아름

"그랬구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며 나는 꽤 씁쓸함을 느꼈지만, 어차피 모두가 감수해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미 한참 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의 맛이, 입 안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더 좋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건 다음 번을 기약하기로 했다.




4. 태미

밤사이 전화 52통, 문자 142개, 카톡 392개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예전이었다면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원망하는 그녀의 대꾸를 받아주다가 몇 마디인가의 이야기로 마음을 홀리고, 또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문득 생각난 작은 가십성 이슈를 이야기 하면서 농담을 하고, 그리고 커피 한잔 혹은 식사를 제안하며, 밤사이 쓰라렸을 그녀의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매만지며, 조금 더 자고 이따가 전화번호를 바꾸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 소영

"그래서 이 미친 년아, 니가 잘했다는거야? 니가 잘했어?"

만약에, 정말로 내가 대신 죽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단 한순간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딱 두달 전까지는. 아니 사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신 죽기는 커녕 내가 당장 이 년의 목아지를 비틀어 패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바람을 피우지. 미친 년. 그러나 사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순간에마저 깊게 패인 그녀의 가슴골에 시선이 꽂히는 이 개병신 호구 같은 나의 눈깔이었다.




6. 가을

이미 2시간 가까이 그네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문득 모든 감정에 앞서는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가을아"

그녀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 할 말을 이어갔다.

"됐어. 니 마음이 그렇다는걸 어쩌겠냐. 그게 뭐 니 잘못이냐. 다아 니 잘못이지"

가을이가 그토로 좋아하던, 내 마지막 말장난이었지만 당연히 그녀는 이번만큼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그다지 슬플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자고 싶었다.




7. 지영

"너만큼 나 좋아해준 남자 분명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겠지. 근데, 근데! 솔직히, 너만큼은 나 좋아해주지 않아도, 그냥 적당히, 너보다는 아니더라도 그냥 적당히 나 좋아해주는 남자 만나서 그렇게 살면 돼.

아니 정 안되서 혼자 살더라도, 너랑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나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년이야. 너 그래서 나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잖아.

알아. 알잖아. 나 못된 년이야. 잘가, 나 이제 들어가볼께. 앞으로 다시 연락도 하지마. 우린 이제 끝이야. 영원히."




8. 효주

"그게 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를 붙잡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에 사실 이미 내 마음은 아까 진작에 풀렸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부터 별로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고작 그까짓 일로 제가 화가 났겠습니까. 그냥 웃어 넘기고 말 일이지.

단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일 뿐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9. 도연

"야, 시발 이게 말이 되냐? 어? 아, 도연아!"

새벽이 가까운 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문득 어지러움을 유발합니다.

"야야, 도연아. 진짜 이건 아니지. 어? 야! 진짜 시발 이건 너, 너 진짜 야, 이건 시바 아니 씨부랄 이게 말이 되냐고!"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지르는 나의 말에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곧바로 맥시멈으로 치솟는 혈압에 온갖 개쌍욕을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대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지만, 하, 진짜. 이 기집애는 어쩜 그렇게 빨리도 차단을 걸까요. 진짜 미스테립니다. 이럴 때는 손이 아주 귀신같이 빨라요. 엠병 시부럴. 이제 일주일간 전화는 종 쳤습니다. 엠병.



10. 은나

"오빠 그게 할 소리야?"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나는 소주잔 속의 찰랑이는 소주에 문득 '소주도 찰랑이는구나' 하는 멍한 생각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바로 옆에 앉은 은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슬슬 붙잡아줘야겠죠. 정신. 그래야 끝낼 수 있으니까.

"은나야"
"응? 왜?"

아, 순간 응? 하는 얼굴에 뽀뽀할 뻔 했습니다. 이 기집애 왜 이렇게 귀엽나요. 하지만 안됩니다. 오늘 끝내야 됩니다.

"그만하자"
"아 진짜 왜!"

은나는 버럭 화를 내지만, 사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의 답을 왜 자꾸 캐묻냐. 힘들게 진짜. 안되니까 안되지. 뭘 묻고 난리야. 니네 엄마가 어제 우리 집에 전화까지 했는데. 이게 임마 사랑한다고 다 되면, 헤어지는 커플이 세상에 어딨냐. 사랑은 다 하는건데.




11. 새롬

"미쳤어, 미쳤어 진짜"

언제나의 그 웃으며 하는 톤의 미쳤어가 아닙니다. 제대로 한심한 병신을 논할 때의 미쳤어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기집애는 왜 미쳤다는 말을 이리 즐겨쓸까요.

"아, 미안해"

사실 사과할 입장도 아니지만 일단 사과를 합니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내 바지를 벗깁니다.

"오빠, 잘 들어?"

뭔 소리를 하려고. 이미 술에 취해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그녀는 착착 내 옷을 벗기고 그 와중에도 틈틈히 방 정리를 하며 말합니다.

"그동안 나 많이 참았고, 오빠도 많이 노력한거 알어"
"흐"

사근사근한 그녀의 말투가 귀엽습니다.

"오빠 디게 매력 있는 사람인 것도 맞구, 능력 좋은 것도 알아. 필요할 때마다 착착 돈 만들어오는 재주 진짜 최고인거 알거든. 오빠가 나 정말 많이 도와줬구"
"그럼"

나는 흐뭇하게 맞장구를 칩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말을 다 벗기고, 하, 이 기집애 어디서 배운 스킬인지 물티슈로 발가락을 다 닦아주네요. 그렇게 나는 아기처럼 되어 이불 속에 편히 눕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조가 바뀝니다.

"근데… 안될거 같아"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신건데요. 그리고 말은 내 탓 하지만 진짜 이유도 잘 알고 있구요.

"흐, 새롬아"

나는 웃으며, 입을 맞추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현관 앞에 그 포장지 열어봐. 니 구두야. 그거 신고 좋은데로 가라"

새롬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이러지 말지. 이게 뭐야, 사람 이상해지게"
"야,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는거야. 니 말고 그런 구두 이제 줄 사람도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새롬은 말했습니다.

"나 갈게"




12. 유영

"에이 왜 그래. 선수끼리"

그녀는 완곡하게,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미안, 잘가"

사실, 아마 유영이는 내가 몇 번 더 잡아주길 바랬을 겁니다. 당연히. 아마 당연히 내가 붙잡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긴가민가 하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랬기에, 오히려 거절 당했을 때 차라리 기뻤습니다.

"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다시 유영이 쪽으로 돌리자,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겠죠.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지만, 역시 그녀의 자존심은 언제나 그녀의 본심보다 힘이 셌죠. 바보같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하는 유영.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그나마 제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13. 승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머리에 온전히 새겨넣기라도 할 기세로, 선 하나하나를 모두 살핍니다. 혹시라도 내 콧김이 그녀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이 순간.

이렇게 열심히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넣어도, 어느 순간에는 잊혀지겠죠. 그리고 그 소중한 기억들도 하나하나씩.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 말이야, 바닥에 닿기 전에 그 낙엽을 하늘에서 낚아채면, 안 헤어진대"
"어, 정말? 오, 오오, 어? 와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어려운거야"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이리저리 팔을 뻗어보지만 여간해서 안 잡히는 낙엽. 더이상은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 포기하려던 그 순간, 승아의 후드티에 모자 속 은행 잎을 발견합니다.

"찾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승아도 기뻐했더랬죠.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낙엽은 매년 떨어지는데, 그럼 매년 붙잡아야 되는걸까, 하고. 올해는 더이상 안 붙잡아도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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